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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1232년(고종 19)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다. 하지만 천도를 주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과 화의가 성립함에 따라 1270년(원종 11) 고려의 이른바 강화경(江華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강화를 피난 임시 수도로 삼은 38년은 제23대 왕 고종(1213∼1259)과 제24대 왕 원종(1260∼1274)의 재위 기간이다. 강화에는 궁궐과 성곽은 물론 고종을 비롯한 왕족의 무덤이 곳곳에 남아 있다.왕족급 무덤으로 보이는 석실분은 모두 7기다. 4기는 묻힌 사람(피장자)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다.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강종비 원덕태후의 곤릉, 원종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사’에 보이는 고려 태조 왕건과 아버지 왕륭 무덤의 강화 이장(移葬) 기록이다. 강화 천도가 이루어진 고종 19년(1232) ‘이 해, 세조와 태조의 재궁(梓宮·관)을 신도(新都·새로운 도읍지)로 옮겼다’고 적었다.왕륭은 송악, 즉 송악산 주변 개성 지역의 호족으로 궁예의 휘하에 있었다. 훗날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들어서는 송악산 아래 발어참성을 쌓고,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궁예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왕건은 이런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에 추존한다. 세조와 태조의 무덤을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골 점령군에 의한 훼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신을 인질 삼은 협박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의 창릉과 태조의 현릉은 1243년(고종 30) 다시 한번 강화섬 내부의 개골동(盖骨洞)으로 이장한다. 풍수지리적 이유로 짐작한다. 두 무덤은 환도한 해 개경으로 돌아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에 복장했다. 창릉 터와 현릉 터가 궁금하지만, 주인이 알려진 무덤부터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무덤 주인들의 정보가 필요할 것 같다. 고려의 제21대 왕 희종(재위 1204∼1211)은 실권자 최충헌의 횡포가 심하자 제거하려다 자연도(영종도)에 유폐됐다. 제22대 왕 강종(재위 1211~1213)은 제19대 명왕(재위 1170~1197)의 아들이다. 명왕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1197년 아버지와 강화도로 쫓겨났다. 다시 개경으로 소환된 강종은 역시 최충헌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죽어 아들 고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최충헌은 집권 기간 동안 4명의 왕을 갈아치웠다. 강종비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다. 원종의 제1비 순경태후(1222~1237)의 아버지는 장익공 김약선이고, 어머니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큰딸이다. 김약선은 고종 시대 문신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순경태후는 1236년 충렬왕을 낳고, 이듬해 딸을 잇따라 출산하고는 곧 세상을 떠났다. 10대 중반에 불과했다. 고려 왕릉을 둘러보기에 앞서 강화읍내의 고려궁터를 먼저 찾으면 좋을 것이다. 지금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은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다. 개경의 그것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규모는 어쩔 수 없이 작았다. 강화 궁궐의 뒷산을 송악이라 부르고, 개경 만월대처럼 정문은 승평문, 동문은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고려궁터의 정문은 ‘승평문’이라 편액되어 있지만, 최근 복원한 조선시대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도 고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이곳에 강화행궁이 들어섰고, 강화유수부도 자리잡았다. 궁터 내부 한복판에는 외규장각이 외롭게 복원되어 있고, 강화유수부의 명위헌과 이방청이 보일 뿐이다. 두 왕조가 중첩되어 있는 유적의 역사성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지 고민스러워 보인다. 고려 왕릉은 강화읍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고종의 홍릉이 유일하다. 다른 무덤은 모두 남서쪽에 몰려 있다. 홍릉은 봄이면 진달래꽃이 장관을 이루는 고려산 남동쪽 기슭에 있다. 강화읍내에서 강화산성 서문을 나선 뒤 강화역사박물관 방향으로 가다 강화고인돌체육관 못미처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원래 홍릉은 다른 고려 왕릉처럼 3단의 축대를 쌓아 아래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사람 형상을 한 조각, 왕릉을 각각 배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각은 보이지 않고, 사람 형상의 돌조각 2구만 남아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홍릉이 강화섬의 중북부라면 다른 왕릉들은 중남부의 진강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읍내에서 찬우물고개를 거쳐 인천가톨릭대 쪽으로 가다 보면 원덕태후의 곤릉, 희종의 석릉, 순경태후의 가릉을 알리는 푯말이 차례로 나타난다. 조선 왕릉이 평지와 맞붙은 높지 않은 산지에 의지해 들인 것과는 달리 강화의 고려 왕릉은 상당히 가파른 산 중턱에 조성했으니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고려 왕릉이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잊혀졌기 때문인지 곤릉과 석릉은 길을 찾기도 쉽지 않다. 가릉 역시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찾기가 쉽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왕릉급 무덤 두 기가 나타난다. 먼저 보이는 것이 가릉으로 알려진 무덤이고, 뒤에 것이 능내리 석실분이다. 강화에서 세상을 떠난 왕비는 세 사람으로, 희종비 성평왕후(?~1247)의 소릉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능내리 석실분이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발굴조사 결과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보다 먼저 축조됐고, 위계도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가릉으로 알려진 앞의 무덤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인산리 석실분은 북쪽 고려산과 남쪽 진강산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퇴미산 남서쪽에 있다. 인산저수지 서쪽의 인산삼거리에서 산길을 1.3㎞쯤 올라가야 한다. 사륜구동차라면 석실분에서 500m 남짓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인산리 석실분은 강화의 다른 무덤들보다 더 가파른 곳에 자리잡았다. 다른 강화 왕릉처럼 삼단 석축으로 조성됐을 무덤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폐허를 방불케 한다. 다만 최상단의 석실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강화섬의 동쪽 해협 염하(鹽河)와 가까운 연리에도 고려시대 석실분이 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인산리 석실분과 연리 석실분이 세조와 태조의 이장지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다. 물론 어느 것이 세조의 무덤이었고, 어느 것이 태조의 무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화로 이장한 왕륭과 왕건의 무덤을 다시 옮겼다는 개골동은 찬우물고개 근처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개골동 왕릉터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하남시의 광주향교/서동철 논설위원

    하남역사박물관에서 보도자료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하남 광주향교’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향교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념인 유교 문화를 지역 곳곳에 퍼뜨리기 위한 국립교육기관이었다. 대개 읍치의 중심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곤 했다. 하남시에 광주향교가 있다는 것은 옛 경기도 광주의 읍치가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하남시는 서울 주변의 신흥 주거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서울 강남으로 접근하기가 편리한 데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도 뛰어나다. 더불어 하남시는 역사의 고장이다. 적지 않은 하남시 사람들은 한성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이곳이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 한성백제는 몰라도 통일신라 시대 하남시는 한강 유역을 통치하는 중심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주읍치는 인조가 하남시에서 1636년 남한산성 내부인 당시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로 옮겼다. 1917년에는 오늘날 광주시청이 있는 광주군 광주면 경안리로 갔다. 서울 강남도 과거에는 대부분 광주 땅이었다. 그런 광주의 중심이 지금의 하남시였으니, 주민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 [씨줄날줄] 미추홀구(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미추홀구(區)/서동철 논설위원

    인천광역시 남구가 7월 1일부터 미추홀구(彌鄒忽區)로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미추홀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인천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남구는 1968년 인천시의 지방 행정 단위에 구가 처음으로 도입될 때 단순히 지역의 남쪽이라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이었던 땅이름이 역사성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신화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 주몽은 졸본부여 왕 둘째딸과의 사이에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남하해 비류는 바닷가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하북 위례성을 수도로 삼는다. 이후 비류 세력이 온조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홀(忽)이란 성(城)과 같은 뜻을 가진 고구려계 땅이름이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재위 6년(396) 백제를 공격해 뺏은 58성 가운데 미추성(彌鄒城)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가 이른바 비류백제의 도읍을 고구려식으로 표기한 것은 장수왕이 475년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이후 고구려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추홀은 남구에 있는 문학산성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일찍부터 추정됐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동사강목’에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속설에 문학산 위에 비류성 터가 있고, 성문 문짝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성안에 비류정(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삼국시대 미추홀은 매소홀(買召忽)이라고도 했는데, 두 표기는 같은 음가(音價)를 가졌던 것으로 학계는 본다. 한자는 다르게 썼어도 다르지 않게 읽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곳은 소성(邵城), 경원(慶源), 인주(仁州)라고도 불렸다. ‘세종실록’에는 “태조 원년(1292)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됐다가 태종 13년 인천군이 됐다’는 대목이 보인다. 처음 ‘인천’이 등장한 것이다. 옛 땅이름은 벌써부터 미추홀대로, 매소홀로, 소성로, 경원로, 인주로처럼 빠짐없이 길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미추홀이 곧 인천’이라는 등식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학계 일각에는 없지 않다. 전국에는 동·서·남·북·중구 같은 이름의 자치구가 25개에 이른다. 남구의 미추홀구 개명(改名)이 다른 지역에도 자극이 될 것이다. 앞서 강원도 영월군의 하동면과 수주면이 각각 김삿갓면과 무릉도원면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백제 대통사(大通寺) 터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주택 신축부지를 보존하기로 의결했다. 발굴조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문화재위가 발빠르게 보존 결정을 내림에 따라 문화재청은 공주시와 곧 부지 매입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고도 조성사업에 따라 한옥을 지으려 했던 땅이다.문제는 이번 결정으로 걱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재위가 의결한 보존 부지는 204㎡에 불과하다. 대통사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이 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 축조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왕도(王都)에 지은 국가적 사찰의 전체 규모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대통사 터의 유적 성격을 제대로 밝히려면 장기간에 걸친 발굴조사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발굴조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성과가 축적되면서 대통사 터, 혹은 그에 준하는 대형 사찰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사적 지정도 추진될 것이다. 사적 지정이 중요한 이유는 주변 지역 개발의 제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통사 터는 공주 시내 한복판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大通寺’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이미 나왔다. 주변 제민천에 있는 네 개의 마름모꼴 초석은 절로 들어가는 다리의 하부구조로 짐작한다. 멀지 않은 곳에 반죽동 당간지주도 있다. 미술사학자들이 백제가 아닌 통일신라 조각 수법이라는 의견을 내놓는 것도 흥미롭다. 대통사 당간지주로 확인된다면 절의 역사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민가가 빼곡히 들어찬 지역이다. 보존 부지 바로 곁의 공주사대부고도 절터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웅진백제의 왕궁인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말고는 백제시대 대형 유적이 없는 공주시내다. 대통사의 실체가 드러나면 전체 부지의 보존 압력은 거세질 것이다. 대통사 터를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의 내부와 비교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사 터 역시 전체 보존 결정이 내려진다면 정부와 지자체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풍납토성과 비슷한 갈등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 영남고고학회는 ‘문화재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려면 2019년도 문화재청 예산이 정부 전체 예산의 0.5%는 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문화재 보호와 주민의 이해가 충돌하는 현상은 전국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신라권과 가야권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1.8% 줄어든 7746억원이다. 정부 예산의 0.18% 수준이다. 수치를 나열하니 답답한 마음이다. 문화재 보호는 마음뿐 아니라 예산도 필요하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연곡사, ‘연기조사’ 창건설·조선 의병 본거지… 왜적과 악연 깊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연곡사, ‘연기조사’ 창건설·조선 의병 본거지… 왜적과 악연 깊어

    ‘고지마 중대는 칠불사, 연곡사, 문수암을 남북 양 방향에서 포위 공격했다. 1소대는 하동 방향에서 전진했다.…소대는 오전 7시 반 예정대로 연곡사를 공격, 100명 남짓한 의병대를 오전 10시 반야봉 쪽으로 격퇴시켰다. 의병장을 포함해 22명 사살, 부상 30명, 노획품은 소총 5, 나팔 3 등. 연곡사 14동을 소각함.’ 일본 조선주차군수비대 제18연대의 ‘진중일지’는 1907년 10월 17일 연곡사 전투의 상황을 23일 이렇게 보고했다. 21일자 일지에는 ‘키노 대위의 부대는 진해만요새포병과 함께 연곡사 일대에서 고광순이 이끄는 의병과 충돌, 고광순 이하 약 40명을 쓰러뜨림’이라고 적었다.구례 연곡사는 통일신라시대 연기조사(緣起祖師)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이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남해안과 지리산 일대 대표적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 높았다. 이런 유서 깊은 절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불을 질러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런데 300년 남짓 시간이 흐른 뒤 또다시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된 것이다.이날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맞서다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후손이다. 고광순은 문집 ‘녹천유고’(鹿川遺稿)에서도 12대조인 고경명의 뜻을 이어 항일 의병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밝혔다고 한다. ‘녹천유고’에 담긴 고광순의 ‘열읍(列邑)에 보내는 격문’에는 ‘난신적자는 모두 처단할 것, 내정에 간섭하는 왜적을 몰아낼 것, 민비 시해의 원수를 갚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을사늑약 이후 또 한 차례 일본군의 방화로 파괴된 연곡사와 두 시기 각각 전사한 고경명과 고광순의 운명은 닮아 있다. 일본은 1904년 3월 보병 제24연대 병력 4272명을 서울과 부산, 원산에 배치했다. 러일전쟁이 마무리된 1905년 10월에는 보병 제13사단과 제15사단 병력 1만 8398명으로 증강한다. 이렇게 2개 사단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할 수 있었다. 일본은 1907년 3월 제15사단을 철수시켰지만, 다시 8월 보병 제14연대를 포함한 여단 병력을 증파한다.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이후 그들이 말하는 ‘소요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영호남 의병 탄압이 목적이었던 보병 제14연대가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하고 기습작전을 벌이던 고광순 의병을 공격한 것이다. 연곡사에 가려면 전남 구례에서 경남 하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대로를 따라 달리다 외곡삼거리에서 지리산 피아골 방향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제는 좌우에 펜션이 가득 들어선 계곡을 따라 오르면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보이고 조금만 더 달리면 오른쪽에 절이 나타난다. ‘지리산 연곡사’(智異山 燕谷寺)라 편액한 일주문은 1995년 세웠다는데, 그 너머로 보이는 천왕문은 아직 단청도 되지 않았다. 연곡사는 1942년 일부 전각을 중건했지만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됐고, 1965년에야 요사채를 겸한 작은 대웅전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큰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제법 규모 있게 들어서고 있지만 전성기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만행에도 석물(石物)들이 일부가 훼손은 됐을지언정 그런대로 살아남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연곡사에는 흔히 부도(浮屠)라 부르는 승탑(僧塔)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다. 대적광전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면 동 승탑과 탑비가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 말 승탑은 가장 아름다운 부도의 하나로 꼽힌다. 동 승탑과 짝을 이루는 왼쪽의 탑비는 머릿돌과 받침돌만 남았다. 몸돌은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고 한다. 받침돌을 가만히 보면 용의 얼굴을 한 거북이 모양이되 날개를 달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상상 속의 동물인 연을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이런 동 승탑비의 모습을 본떠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동 승탑과 탑비에서 대적광전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북 승탑이 있다. 고려 초기에 동 승탑을 모범으로 삼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적광전 서쪽에 떨어져 있는 현각선사탑비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승려 현각선사를 기리고자 979년 세운 것이다. 역시 임진왜란 때 비신은 사라졌다.북 승탑에서 서쪽으로 산을 내려가다 보면 소요대사탑이 보인다. 문의 모습을 조각한 안쪽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과 ‘순치육년경인’(順治六年庚寅)이라는 두 줄의 오목새김이 있다. 순치 6년은 1649년이다. 탑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승탑에 글자를 새겨 내력을 알리는 조선시대 부도의 전통이라고 한다.소요대사 태능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에 가담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서성 수축을 주도하기도 했다. 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서산대사 휴정의 4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때 불탄 연곡사를 중창한 당사자다. 휴정의 다른 세 제자는 사명대사 유정, 편양 언기, 정관 일선이다.소요대사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현각선사탑비 왼쪽 동백숲 아래 작은 비석이 보인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다. 고광순 의병이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곳이 대적광전 서쪽이라고 했으니 이곳일 것이다. 순절비는 1958년 세워졌다. 이렇듯 연곡사 곳곳에는 왜적과의 악연이 짙게 배어 있다. 연곡사에서 토지면사무소 쪽으로 가는 길 중간의 섬진강변 석주관성(石柱關城)은 정유재란 당시 구례 지역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고려 말기에 왜구를 막고자 성벽을 쌓고 진을 설치했다고 한다. 하동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만큼 정유재란 때는 왜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건너편 언덕에는 의병으로 나서 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순절한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의 무덤도 있다. 석주관전투에는 화엄사 의승군이 대거 참전했다. 구례 화엄사라면 연곡사에서 멀지 않다. 화엄사도 연곡사와 같은 544년 연기 조사설이 전한다. 화엄사 의승군이란 곧 연곡사를 비롯한 지리산 일대 승군의 연합군이었을 것이다. 연곡사의 전각이 모두 불타고 탑비 일부가 훼손된 것도 이때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갈 기회가 있다면 불원복 태극기(不遠復 太極旗)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의병장 고광순이 만들어 항일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는 태극기다. 위쪽에 붉은색 실로 ‘불원복’(不遠復)이라 수를 놓았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어쩌다 전통/서동철 논설위원

    설렁탕이나 곰탕, 갈비탕은 당연히 전통 음식이다. 그런데 그런 이름과 조리법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 역사는 길어야 100년 안팎에 그친다. 전통 음악도 마찬가지다. 우리 음악 문화를 대표하는 형식의 하나인 산조도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자랑할 것 같지만,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그 틀이 완성된 것은 실상 100년이 조금 넘었거나 하는 정도다. 그런데 삼베 수의가 일제강점기 시작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최근 나왔다. ‘죄인의 수의’였던 것을 일제가 모든 망자(亡者)에게 입혔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삼베 수의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평생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전통은 오래전부터 물려받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생각한다. 설렁탕이나 산조처럼 오래되지 않은 것도 많고, 심지어 오도(誤導)된 전통도 삼베 수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옛날 알던 것’을 무기로 내 말만 고집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백제관음입상/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백제관음입상/서동철 논설위원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면 규암리의 농부가 밭을 갈다 뚜껑이 덮인 쇠솥을 발견한다. 금동불상 두 점이 담겨 있었는데, 모두 7세기 백제 관음보살입상으로 밝혀졌다. 규암면은 백제 사비도성의 백마강 건너편이다. 규암면사무소가 있는 규암리는 읍내에서 계백로를 타고 가다 백제교를 건너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동네다. 커다란 용기에 담겨 묻힌 불상이나 불교 의례 용구라면 서울 도봉산 기슭의 영국사 터가 생각난다. 영국사 폐사 이후 도봉서원이 세워졌는데 2012년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금강령과 금강저 등 77점의 불구(佛具)가 쏟아졌다. 경북 영주의 숙수사 터에서도 1953년 학교를 짓다가 질그릇에 담긴 25구의 통일신라시대 작은 불상이 한꺼번에 나왔다. 모두 난리를 만나 훗날을 기약하고 묻었을 것이다. 규암리 백제관음입상 두 점은 일본헌병대를 거쳐 두 사람의 일본인 수장가에게 각각 넘어갔다. 니와세 하쿠쇼가 소장하게 된 불상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보물 제320호로 지정됐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국보 제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그것이다. 이치다 지로에게 넘어간 백제관음은 일본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1932년 펴낸 ‘조선미술사’에 그 아름다운 자태가 담겨 있다. 작품 설명을 보면 출토지와 소장자 이름에 이어 ‘높이는 여덟 치 여덟 푼’이라 했으니 26.7㎝ 안팎이다. 국내의 어떤 백제 금동불상보다도 크다. 빛바랜 책장 속 흑백사진으로 보아도 가슴 설레는 이 걸작이 최근 일본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백제관음을 소장한 일본 기업인이 우리 미술사학자들에게 공개했고, 진품으로 보인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얼마가 들더라도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절정기 백제 문화를 보여 주는 이 관음입상을 국내에 들여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300억원이니 500억원이니 하고 거액이 거론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가격만 따진다면 백제관음이 그 정도 가치에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빼앗기다시피 해외로 나간 문화재를 돈으로 찾아오는 잘못된 전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문화재 당국은 먼저 진품인지를 정밀하게 판별하기 바란다. 동시에 일본인이 소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 불법적 요소가 없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문제가 없더라도 매매가 아닌 기증을 유도해야 한다. 기증자에게 사례금을 지급하는 우리 박물관의 제도는 참고가 될 것이다. 소장자가 용단을 내린다면 문화훈장 서훈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 [씨줄날줄] 정상회담 숙박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정상회담 숙박비/서동철 논설위원

    외국 국가원수의 방문에 따른 의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뉜다. 국빈 방문(state visit)과 공식 방문(official visit), 공식 실무 방문(official working visit), 실무 방문(working visit) 등이다. 의전의 격(格)이야 달라져도 국가원수의 방문은 대부분 정상회담이 수반되는 국가 중대사라는 점은 불문가지다.그럼에도 외국 정상의 숙식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은 국빈 방문일 때만 초청국에서 부담한다. 이 밖의 의전 수위에서는 모두 방문자 쪽에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상 방문을 준비하려면 숙식비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숙식비를 부담하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에 외교적 상징성이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 이런 국가 사이의 의전 수위와는 관계가 없다. 북한과 미국 두 나라가 단순히 싱가포르를 회담장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각자가 쓰는 비용은 각자 부담하고, 회담장 사용료처럼 공동으로 쓰는 비용은 절반씩 나눠 내면 될 것이다. 2015년 11월 7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양안회담이 그랬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당시 대만 총통이 1949년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 만찬 비용은 철저하게 절반씩 부담했다. 만찬주도 중국은 마오타이(茅台)주, 대만은 진먼(金門) 고량주를 준비해 균형을 맞췄다. 미국 정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숙박비를 부담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는 보도가 워싱턴포스트에서 나왔다. 미국이 숙박 비용을 부담할 의향이 있지만, 북한이 모욕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가 나오자 싱가포르 정부는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작은 역할이라도 기꺼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국제회의와 관광, 전시회, 이벤트를 아우르는 마이스(MICE) 산업에 사활을 건 나라다운 태도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북·미 정상회담이다. 회담이 세계사에 남을 성과를 거둔다면 싱가포르가 거둘 부가가치는 당연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니 ‘북한 대표단의 숙박비 부담’을 언급한 것은 선심이 아니다. 미국은 손 안 대고 코 푼 꼴이다. ‘북·미 회담 효과’를 생각하면 싱가포르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국빈 방문급으로 환대해야 마땅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숙박비까지 부담해도 이상하지 않다. 기업가 출신 대통령 덕분인지 미국 정부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강화되고 있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겨우 2000명 병사로… 淸태조 사위 사살·대승 거둔 ‘광교산 대첩’

    병자년인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하자 전국 곳곳에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포위를 뚫고 남한산성에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런 탓에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정 대신들의 무인(武人)들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하다. 인조실록은 ‘임금이 외로운 성에 두 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다’고 적기도 했다.하지만 포위된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 왕의 격문이 닿기도 전에 군사는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충청도 군은 성남 분당의 동막천, 강원도 군은 하남시와 광주시 사이의 검단산, 경상도 군은 광주시 쌍령동까지 진출했지만 패퇴했을 뿐이다. 물론 전장(戰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만 하던 장수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산성에 피신해 갑론을박만 벌이던 대신들이 패전 책임을 일선에서 싸운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돌리는 것은 비겁하다.승리한 전투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전라병사 김준룡은 1월 4일 2000명 남짓한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쳤다. 이들은 다음날 청군 5000명을 격퇴한 데 이어 이튿날에도 화포를 동원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김준룡은 유격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적장 양고리(揚古利)를 사살했다. 당대의 대학자 미수 허목은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공이 칼을 들고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가운데 필사의 의지를 보이자, 병사들이 모두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다.…어떤 오랑캐가 산꼭대기에 큰 깃발을 세운 뒤 갑옷 차림으로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자…공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자를 죽이지 않으면 적병이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외치며 전투를 독려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와 그 좌우 몇 장수가 일시에 탄환을 맞았다.…죽은 장수는 선한(先汗)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였다.’ 백양고라가 곧 양고리다. ‘선한’이란 청태조 누르하치를 말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었다는 인물이다.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었으니, 청태종 홍타이지의 매부다. 누르하치가 ‘전장에서는 몸을 좀 사리라’고 했을 만큼 겁이 없었다는 그는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미수가 적은 대로 김준룡 부대가 ‘오랑캐의 시신이 겹겹이 쌓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승리를 거두자 남한산성의 임금과 대신들은 처음에는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 부대는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수원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전공(戰攻)을 세운 김준룡이지만 이때의 철군을 이유로 훗날 파직된 것은 물론 유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 쪽 기록인 ‘청사고’(淸史稿)의 분위기는 다르다. 이날의 패전은 충격이었다. 양고리의 시신이 광교산에서 진지로 돌아오자 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제사를 지내며 곡을 했고 임금의 의복을 내려 염하게 했다. 심양에서도 양고리의 상여가 조선에서 도착하자 태종이 교외까지 나가 맞이했고,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福陵)에 배장했다. 홍타이지는 이때도 직접 제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조총 탄환을 양고리에게 명중시킨 박의(朴義)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그는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했으니 졸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벼슬은 평안도 직동의 종9품 권관(權管)에 머물렀다. 승진은커녕 변방으로 좌천된 꼴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고려의 김윤후는 몽골의 살례탑을 활로 쏴 죽여 대장군에 제수됐다. 그런데 박의는 직동 만호에 그쳤으니 사람들은 애통해한다’고 자신의 문집인 ‘영재집’에 적었다. 만호는 권관보다 한 단계 높은 벼슬이다. ‘직동 권관’의 착오일 것이다. 청나라에 항복했으니 청황제의 가까운 인척을 사살한 군관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수는 있다. 김준룡의 승전을 재평가하는 논의는 정조시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1791년(정조 15) 사직 신기경이 ‘병자년 난리 때 김준룡은 오랑캐를 섬멸하여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장려해야 한다’고 상소한 것이다. 화성 축조를 앞두고 수원 지역의 현안을 일일이 점검하는 자리였다. 정조는 이듬해 김준룡에게 충양(忠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정부의 차관급 벼슬인 찬성(贊成)도 추증했다. 오늘은 병자호란의 역사를 바탕으로 광교산으로 간다. 해발 582m의 광교산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과 고기동, 의왕시 일부에 걸쳐 있다. 호란 당시 김준룡 부대는 서남쪽 수원에서 광교산으로 접근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이 있는 동북쪽에서 몰려왔으니 광교산 전체가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시루봉 남쪽의 토끼재 아래 해발 400m 지점에는 김준룡 장군의 승전을 알리는 각자(刻字)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김준룡 장군 전승지와 전승비’라고 부르는데 자연암반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충양공 김준룡 장군 전승지’(忠襄公 金俊龍 將軍 戰勝地)라는 큰 글자 좌우에 ‘병자청란 공제호남병 근왕지차 살청삼대장’(丙子淸亂公提湖南兵勤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 음각했다. ‘김준룡 장군 전승지’가 현대적인 글귀인 데다 ‘병자청란’이라는 표현도 익숙지 않다는 점에서 누군가 당초의 글자를 고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광교산 대첩’을 알리는 유일한 기념물이다. ‘수원군읍지’(水原郡邑誌)에는 ‘화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에 갔던 사람들로부터 김준룡 장군의 전공을 전해들은 좌의정 채제공이 새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번암 채제공은 정조 시대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당시 성역총리대신(城役總理大臣)을 맡고 있었다. 화성 건설의 총책임자다. 화성 축조를 전후해 김준룡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과 맥을 같이한다. 김준룡 전승지는 수원에서 광교유원지를 거치거나 용인에서 신봉도시개발지구를 지나 오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런데 수원 쪽 광교산 들머리에는 창성사 터, 용인의 산자락에는 서봉사 터가 있다. 창성사 터와 서봉사 터에는 모두 고려시대 고승인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와 현오국사탑비가 각각 남아 있다. 지금 천희의 탑비는 화성 내부 방화수류정 옆으로 옮겨져 있다.최근의 발굴조사에서 창성사는 신라 말 창건 이후 중창과 폐사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출토 유물을 근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7세기 폐사 이후 18세기 후반 중창이 이루어졌다. 17세기 폐사는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때 서봉사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발굴조사에서도 병장기가 적지 않게 수습됐다. 그러니 두 절터는 전승비와 함께 ‘광교산 대첩’의 중요한 기념물이다.김준룡 장군의 무덤은 경기 시흥시 군자동에 있다. 그는 호란 이후 전라도병마절도사와 영남절도사를 지내고 1642년 세상을 떠난 뒤 고향인 양천 땅에 묻혔다. 지금의 서울 강서구 화곡동으로 1972년 도시화에 따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서 소개한 허목의 전투 장면 묘사는 무덤 앞에 세워진 신도비 비문의 일부다. 양고리 유적이 경기 하남시에도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남한산성 북문이 가까운 법화사 터다. 양고리는 ‘법화장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전사하자 청태종이 그의 고향 법화둔의 이름을 따 법화사라는 원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청나라 장수를 사살한 것에 한 가닥 위안을 삼고자 비극의 현장인 남한산성에 이런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한성부·도성 품은 광활한 양주목, 한반도 물류 잇는 요충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조선시대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를 보면 양주목(楊州牧)이 도성(都城)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에는 양주목과 함께 도성과 한성부에 속한 성 밖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그려 넣었다. 양주목과 한성부는 북쪽으로 연천과 마전, 동쪽으로 포천과 가평, 남쪽으로 광주와 과천, 서쪽으로 고양과 파주와 마주하고 있다.지도에서 읍치는 양주목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경기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남쪽이다. 지금 서울에서 옛 양주읍치에 가려면 의정부를 지나서도 한참을 달려야 한다. 그만큼 양주목이 관할하는 지역은 넓었다. 고양시 지축동 일대와 파주 광탄면, 구리시, 남양주시, 동두천시, 포천시의 일부, 서울시의 광진·노원·강북·도봉·성동·중랑·은평·성북구는 물론 종로구와 중구의 일부도 양주 땅이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고양주면(古楊州面)이다. ‘옛 양주’라는 뜻이니 과거 양주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지도에서 고양주면은 망우면과 노원면 남쪽인 아차산 아래 한강변이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양주읍치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에 있었고, 1067년(고려 문종 21) 양주가 남경(南京)으로 승격하면서 북악산 아래로 옮겨 갔다는 연구도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의 ‘양주도호부’ 대목은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으로…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주를 두었고, 경덕왕이 한산군으로 바꾸었다. 고려가 양주로 고쳤다’고 했다. 아차산 아래 한강은 오늘날 광진(廣津)으로 불리지만, 양진(楊津)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광주 땅인 남쪽은 광진, 양주 땅인 북쪽은 양진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싶다. 양진에는 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양진당(楊津堂)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정종이 1399년 개경으로 환도했지만, 태종은 1404년 다시 서울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른다. 양주 땅이 수도가 된 만큼 읍치는 새로 물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조실록에는 1395년 ‘한양부를 고쳐서 한성부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이라 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때 옮긴 양주의 읍치가 오늘날의 고읍동(古邑洞)이다. 옛 읍치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옛 견주의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양주목은 1506년(중종 1) 치소를 유양동으로 옮겼다. 1922년 당시 양주군은 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했고, 2000년 지금의 양주시청 자리로 돌아갔다.양주는 큰 고을이었다.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유양동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바라보면 ‘교통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물류를 인력이 아니면 소와 말이 끄는 수레에 의존해야 했던 시절은 달랐다. 양주 유양동은 임진강의 호로하에서 한강의 광진을 잇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삼국시대 호로하 북쪽에는 고구려성인 호로고루, 남쪽에는 신라성인 칠중성이 있었다. 표주박 허리처럼 좁아진 물길이라는 뜻의 호로하는 배를 타지 않고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최하류다.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대부분 이 일대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광진 일대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다. 호로하에서 임진강을 건넌 한반도 북부지방의 교통량은 다시 광나루에 모였고, 여기서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삼남지방의 물류는 당연히 역순으로 북부지방으로 올라갔다.그러니 한반도 남북을 잇는 물류는 당연히 양주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양주에는 별산대놀이와 소놀이굿이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양주농악과 상여와 회다지소리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연희가 발달했다는 것은 물산이 풍부하고 돈이 도는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다. 유양동 관아는 양주군이 의정부로 옮겨 갈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중심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터만 남은 것을 2000년부터 5차례 발굴조사를 벌였고, 지난달 동헌과 내아 복원을 마무리했다. 새 집 냄새가 물씬해 유서 깊은 유적이라는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기 시작하면 역사성도 차근차근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불곡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양주목 관아는 복원공사와 함께 주변이 깨끗하게 정비됐다. 널찍한 주차장에 내리면 왼쪽에 제법 규모 있는 관아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탐방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정면의 비석거리다. 맨 앞에 있는 것이 ‘양주 관아지 유허비’다. 양주읍치가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다.그 옆으로 양주목사를 역임한 열여덟 분의 선정비와 불망비, 유방비, 추모비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유방이란 유방백세(流芳百世)를 줄인 말로 ‘명성을 후세에 길이 남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양주목사를 역임한 비석 주인공들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백인걸(1497~1579)은 조광조의 제자로 기묘사화에 스승을 잃고 을사사화에 파직됐으며 정미사화로 안변에 유배됐다. 학문에 뛰어나 파주 파산서원과 남평 봉산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청백리에 뽑히기도 했다. 정대년(1503~1578)은 ‘네 임금을 섬기며 아부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두 차례 이조판서를 역임하며 ‘당대 명경(名卿)’으로 불리웠다. 무신 출신으로 효종의 북벌계획에 관여한 이완(1602~1674),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던 남용익(1628~1692), 제주목사 시절 ‘탐라순력도’를 남기고 ‘병와가곡집’으로 음악사에도 한자리를 차지하는 이형상(1653~1733)도 양주목사를 지냈다. 양주목사란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다른 사람은 직함이 모두 ‘목사’지만 유일하게 ‘군수’인 사람이 홍태윤이다. 고종 시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주목이 양주군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 군수를 역임한 양주의 마지막 목민관이었다. 무인 출신으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여주까지 피신시켜 포천현감에 오른 인물이다. 홍태윤은 도성을 오가는 길목이었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 쌍문2동주민센터 앞에도 선정비를 남겼다. 그런데 선정비는 1903년, 불망비는 1904년 세워졌으니 현직 양주군수 시절이다. 어쨌든 목민관으로는 선정을 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포천에도 선정비가 있다고 한다. 비석거리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현대적 야외공연장은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다. 해마다 6월부터 9월까지 넷째 주 토요일에 상설공연을 했는데, 올해 일정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듯하다. 그 너머에는 양주향교가 있으니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텃밭 실농(失農)/서동철 논설위원

    충청도 시골집 마당에 3년 전 차나무 묘목 세 그루를 심었다. 그런데 겨울이 한 번 지날 때마다 한 그루씩 잎을 피우지 않았다. 마지막 한 그루는 지난해 탐스럽게 자라 한 가닥 희망을 가졌는데 결국 길었던 지난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차나무를 추운 고장에 심은 것은 역시 무리였다. 추위가 닥치기 전 볏짚으로 차나무를 묶어 주라는 지난가을 옆집 할아버지 충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재작년 열 포기쯤 심어 놓은 당귀는 탐스럽게 자라나고 있다. 상추에 조그만 당귀 이파리 하나만 올려도 쌈의 풍미는 깊어진다. 비가 내린 며칠 전에는 스물스물 마당에 퍼져 나가는 당귀 향내를 한껏 즐기기도 했다. 해마다 이것저것 심어 보지만, 그런대로 병충해를 견디는 것은 상추와 고추 정도다. 여기에 당귀가 더해졌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잡초도 뽑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는 그야말로 태평농법이다. 친구가 텃밭을 일군다며 시골 땅 350평을 샀다고 의욕을 보인다. 나는 “삼백오십 평은커녕 서른다섯 평도 농사짓기 힘들걸?” 하며 웃었다. 나는 열 평 텃밭도 해마다 실농(失農)이다.
  •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언덕길 오른쪽에 서울도큐호텔이 들어선 것은 1971년이었다. 그것은 흉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숭례문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25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1970년대 막바지 대학에 들어가 주변을 지날 기회가 더 잦아진 뒤에는 더욱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건 ‘할짓’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자본의 호텔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문화유산을 돋보이게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숭례문에는 정말 미안한 표현이지만, 호텔 화장실처럼 왜소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일본 호텔 자본이 철수하고 지금은 단암빌딩으로 이름을 바꾼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김중업 선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서울의 도시 및 건축 계획과 관련한 정부 시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서울도큐호텔이 문을 연 바로 그해 프랑스로 사실상의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런 김 선생이 도큐호텔 같은 건물의 설계를 수락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도큐호텔 이후에도 반성은 없어 오늘날 숭례문이 고층빌딩으로 포위당하는 처지가 된 것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해도 파리 르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도 공부한 김 선생이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리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숭례문과 서울도큐호텔의 악연을 떠올린 것은 지금 부산 복천동 고분군 안팎에서 빚어지는 파문 때문이다. 지금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주변에서 고층 아파트 건축을 위한 허가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66만㎡ 남짓한 부지에 5층에서 32층에 이르는 아파트 6000가구 안팎을 짓는 대형 공사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969년 무허가 판자촌을 택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처음 고분이 드러났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에서 200기 안팎의 2~7세기 무덤과 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금동관, 목걸이 등 1만 2000점 남짓한 유물이 확인됐다. 출토 유물은 긴급 발굴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다. 학계는 얇은 철괴인 철정(鐵錠)에 주목했는데, 사실상 화폐처럼 사용한 철기 재료였다. 이듬해는 말머리 장식 뿔잔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유행한 뿔잔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점에서 학계는 동서 교류의 흔적으로 봤다. 1980년에는 420가구의 연립주택을 짓는 공사가 다시 추진됐다. 부산시 문화재 관계자들의 주민 설득으로 발굴 조사가 시작되자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대량으로 나온 판갑(板甲)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불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판갑은 쇠를 두르려 얇게 펴서 만든 갑옷을 말한다. 그동안 가야의 판갑은 일본에서 수입한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4세기 판갑이 복천동에서 대거 나오자 5세기 것이 대부분인 일본은 할 말을 잃었다. 고대사의 공백기라는 가야사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복천동 고분군에서 찾아지자 발굴 현장 4만 5576㎡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1996년에는 복천박물관도 문을 열었으니 하나의 발굴 현장을 위한 박물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례가 드물다. 지금 추진되는 고층 아파트 건축 계획의 문제점은 둘이다. 우선은 1969년과 1980년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공사를 위해 고분군 주변을 판다면 가야 무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음은 문화재를 둘러싼 경관의 문제다. 지금도 복천동 고분군의 일부는 고층 아파트로 막혀 있다. 숭례문을 위축시킨 도큐호텔처럼 새 아파트가 건설되면 고분군의 가치는 더욱 퇴색할 것이다. 지역 고고학자의 모임인 영남고고학회도 ‘경관 보호를 위한 초고층 아파트군의 건설허가 재고’와 ‘고분군 주변을 개발하는 경우라도 철저한 발굴 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개발 계획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앞으로의 문화유적 주변은 옛 지형을 유지하는 저밀도 개발과 같은 ‘문화재 친화적 개발’을 유도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시뿐 아니라 정부와 모든 지자체가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 [씨줄날줄] ‘대가람의 뒷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대가람의 뒷간’/서동철 논설위원

    경기 양주시 회암사는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인도 선승 지공(指空) 화상이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의 아라난타사(阿羅難陀寺)를 본떠서 창건했다는 262칸의 대형 사찰이다.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준 뒤 이 절에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때는 승려가 300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한다.회암사터는 1997년부터 단계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전성기 때 모습이 드러났다. 지금 천보산 아래 회암사터를 찾으면 전각은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남아 있는 석축의 기하학적 아름다움만으로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광활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절터는 깨끗하게 정비됐고, 그 아래 절의 역사를 보여 주는 회암사지박물관이 세워졌다. 최근에는 절터와 박물관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적공원이 완성됐다. 회암사터는 새로 조성되고 있는 양주옥정신도시의 끝자락이다. 양주시민들은 역사와 문화, 휴식이 함께하는 멋진 유적공원을 가진 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지금 회암사터박물관에서는 ‘대가람의 뒷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회암사터박물관이 공동기획한 전시회다. 수천 명이 생활하는 공간이었다면 배설물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회암사 조사단은 2005년 절터 동쪽에서 남북 12.8m, 동서 2.2m, 깊이 3.6m의 대형 석실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용도를 알 수 없었지만, 서울대 의대 연구팀이 바닥 토양의 성분을 분석하면서 주로 배설물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생충의 알을 확인했다. 뒷간이라는 증거였다. 주변에서는 정료대(庭燎臺)도 나왔다. 밤에도 불편하지 않도록 불을 밝힌 것이다. 전시회는 회암사 뒷간의 발굴 과정을 소개하고, 조사 연구를 거쳐 재현한 뒷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더불어 회암사터에서 발굴된 청동발과 백자장군을 비롯한 식생활 및 뒷간 유물, 소매통과 동이, 똥바가지 등 전통시대 뒷간 문화를 보여 주는 유물 등 128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의 뒷간 문화가 속세의 그것과 다른 것은 물리적인 배설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뒷간에서 지켜야 할 마음가짐을 담은 전시실의 입측오주(入厠五呪)가 눈길을 끄는 이유일 것이다. 뒷간에 드나들 때 외우는 진언(眞言)이라고 한다. 뒷간에 들어가면서 입측(入厠), 뒷물을 하면서 세정(洗淨), 손을 씻으면서 세수(洗手), 더러움을 씻어 버리며 거예(去穢), 몸을 깨끗이 하는 정신(淨身) 진언이 그것이다. 문경 김룡사 것이라지만, 다른 사찰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궁예가 불 지르고 왕건이 중건한 영월 흥녕사 터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궁예가 불 지르고 왕건이 중건한 영월 흥녕사 터

    법흥사(法興寺)가 있는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武陵桃源)면은 2016년 수주(水周)면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무릉도원이 중국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무릉도원면으로 이름을 바꾸자 “이러다 유토피아면도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무릉도원면에는 예부터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었다. 나름대로 역사성과 동떨어진 작명(作名)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도화원기’는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강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가다 복숭아꽃 만발한 살기 좋은 산속 마을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금은보화와 산해진미가 널린 호화로운 천국이 아니라 달콤한 향기가 감돌고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박한 꿈속의 마을이다. 무릉도원면이 그런 동네다. 많은 사람이 찾아들면서 법흥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름다운 계곡에는 펜션이며 캠프장이 수없이 들어섰다.법흥사는 영월과 평창, 횡성에 걸쳐 있는 해발 1167m의 사자산 아래 자리잡고 있다. 절을 창건할 때 도승(道僧)이 사자를 타고 왔다고 하여 사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자는 부처를 상징한다. 깨달음을 이룬 이가 앉는 자리가 사자좌(獅子座)이고, 그가 말하는 진리의 가르침이 사자후(獅子吼)다. 법흥사는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으로 꼽히는 성지다. 신라승려 자장(590~658)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전수받아 643년 돌아왔다.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이어 마지막으로 사자산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당시 사자산에 창건한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진신사리란 부처의 유골이니 적멸보궁은 곧 부처의 무덤이다. 한국 불교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모신 무덤과 그 무덤을 바라보며 배례하는 전각을 가리킨다. 부처의 유골이 묻혔다면 그 산 전체가 적멸보궁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대산, 태백산, 영축산, 설악산이 모두 부처의 무덤이고, 사자산이 또한 그렇다. 흥녕사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禪宗)이 사회 변화를 주도하던 신라 말 다시 역사에 등장한다. 철감 도윤(797~868)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개창한 곳은 화순 쌍봉사지만, 그의 제자 징효 절중(826~900)이 흥녕사에 머물며 선맥을 이어 감에 따라 문파의 중심지로 부각된 것이다. 흥녕사는 역사에 기록된 대로 891년(신라 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된 것을 944년(고려 혜종 1) 중건했다. 그 뒤 다시 불타서 천년 가까이 소찰(小刹)로 명맥만 이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은 1912년 다시 소실됐고, 1933년에는 적멸보궁을 지금의 터로 이전 중수했다고 법흥사 측는 홈페이지에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작고한 미술사학자 호불 정영호 선생의 1969년 동국대 석사학위 논문이 ‘신라 사자산 흥녕사지 연구’다. 그는 1955년 절터를 처음 답사한 뒤 1967년과 1968년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장을 다시 조사했다. 1934년생이니 일선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고 35세가 되어서야 석사학위 논문을 쓴 것이다. 선생은 논문에 ‘현재 절터 일대는 경작지로 변해 지상의 유구마저 파괴되고 광활한 사역에는 주초석 몇 점만 잔존하여 청자 및 기와 조각을 수집할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유물은 모두 석조물로 고려 초기에 건립된 징효대사보인탑비를 비롯해 석조부도 2기와 석실, 석관, 석조불대좌 등이 오래된 것으로 잔존한다’고 덧붙였다. 법흥사를 두고는 ‘금세기에 들어와 흥녕사 옛터에 조영된 사찰로 선문과는 직접 관련은 없다’고 적었다.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흥사를 돌아봤다. 법흥계곡을 따라 난 길이 끝날 때쯤 나타나는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새로 지은 일주문이 보인다. 사실 ‘새로 지은’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약간의 시간차가 있을 뿐 모든 전각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일주문에서 조금 더 차를 달리면 놀이공원을 방불케 할 만큼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법흥사와 적멸보궁을 찾는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리면 절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적송숲이 먼저 눈길을 끈다. 이 정도의 노거수(老巨樹)가, 그것도 토종 적송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절 초입에 보이는 2층 전각은 원음루다. 부처의 가르침을 소리로 전하는 법고, 운판, 목어가 있다. 이 세 가지와 더불어 사물(四物)을 이루는 범종은 극락전 앞에 있다. 원음루에 다가가니 1층에 ‘금강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성역(聖域)이다. 정면으로 곧바로 난 산길로 10분 남짓 오르면 적멸보궁이다. 전각 안에는 다라니경을 외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밖에도 두 손을 모으고 수없이 전각을 도는 기도객들이 보인다. 전각 너머에 정영호 선생이 언급한 석분이 있다. 입구가 직사각형인 석분은 기도를 위한 돌방으로 안쪽으로는 사리를 모셨던 돌널이 있다고 한다. 다시 산을 내려오면 원음전 서쪽은 극락전 권역, 동쪽은 요사채 권역이다. 요사채 권역에 숙소로 쓰는 듯한 큼지막한 전각에 붙은 ‘흥녕원’(興寧院)이라는 편액이 눈길을 끈다. 구산선문 시절의 흥녕선원 터에서 법등(法燈)을 이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서쪽의 극락전 앞마당은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극락전 오른쪽에 보이는 커다란 비석이 흥녕사터 징효대사탑비다. 비문에는 징효 절중이 출생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석은 대사가 입적하고 44년이 지난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워졌다. 왼쪽 산비탈에는 그의 부도가 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절중과 후삼국의 관계다.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알려진 궁예는 오늘날 영월 남면의 세달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양길도 멀지 않은 원주에서 세력을 키웠다. 흥녕사가 소실된 891년의 병화는 ‘북원의 적수 양길이 그 부장 궁예를 보내 백기(百騎)를 거느리고 북원 동쪽의 부락과 명주 관할인 주천 등 십여 군현을 침습하게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학계는 본다. 궁예가 군사를 몰아 험준한 영월 지역으로 들어간 목적은 사자산문의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한편 징효대사탑비의 건립과 흥녕사의 중건은 고려 왕실이 주도했다. 탑비에 적힌 시주자 가운데 왕요군(王堯君)과 왕소군(王昭君)은 훗날 정종과 광종이 되는 태조 왕건의 아들들이다. 또 태조의 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16비 소광주원부인, 혜종비 후광주원부인의 아버지인 광주(廣州)의 왕규를 비롯해 왕건의 장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결국 절중과 사자산문이 궁예와는 적대적이었던 반면 왕건과는 우호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칠궁(七宮)/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칠궁(七宮)/서동철 논설위원

    신분이 낮은 어머니 숙빈 최씨 때문에 영조의 고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수없이 나온 대로 최씨는 무수리였다. 궁중에서 청소나 물 긷는 일을 하는 무수리를 한자로는 수사이(水賜伊)라고 쓴다. 무수리는 몽골말이라고 한다. 고려 말 원나라 공주가 왕실에 들어오면서 풍습과 언어가 따라왔고, 조선에도 이어졌다.최씨는 열 살 안팎에 궁궐에 들어가 숙종비 인현왕후를 섬기다 임금 눈에 들어 1693년 왕자를 갖는다. 태어난 왕자는 두 달 만에 죽었지만, 이듬해 또 다른 왕자 연잉군을 낳는다. 곧 영조다. 최씨는 1718년(숙종 44)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지금의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에 썼다. 영조가 어머니 사당으로 점찍은 장소는 즉위하기 전 머물던 창의궁이었다. 경복궁 영추문 서쪽인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에 있었다. 하지만 왕이 거처하던 곳에 사친(私親)의 사당을 둘 수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영조는 청릉군의 168칸 집을 사들여 사당을 조성토록 한다. 오늘날의 청와대 서쪽 칠궁(七宮) 자리다. 영조는 즉위 직후부터 숙빈 최씨를 기리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자기 손으로 지위를 높이는 것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즉위 30년이 다 되어서야 사당을 숙빈묘(廟)에서 육상궁, 무덤을 소령묘(墓)에서 소령원으로 격상시킬 수 있었다. 이후 육상궁은 1908년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이 더해져 육궁(六宮)이라 부르다 1929년 덕안궁이 옮겨지면서 칠궁이 됐다. 저경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 대빈궁은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연호궁은 영조의 맏아들로 세자 시절 세상을 떠난 추존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선희궁에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경우궁에는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 덕안궁에는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왕비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왕을 낳은 후궁의 사당을 한자리에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숙빈 최씨가 아니라도 칠궁을 이루는 사당의 주인공들은 한 분 한 분이 조선 역사의 중요한 대목을 장식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칠궁을 한 번 둘러보려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 특별 관람객만 제한적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이 칠궁의 문을 크게 넓히기로 했다고 한다. 시범 개방 기간인 6월부터 경복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하루 다섯 차례 시간대 중에서 골라 관람할 수 있게 된다. 역사 자원이자 관광 자원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청와대를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도 작지 않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원효, 中 유학길에 당항성 토굴서 깨달음 얻어…의상은 홀로 당나라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원효, 中 유학길에 당항성 토굴서 깨달음 얻어…의상은 홀로 당나라로

    인도로 유학을 떠났던 중국승 현장(玄·602~664)이 17년 만인 645년 당나라에 돌아오자 신라 불교계에도 새로운 흐름을 배우려는 바람이 불었다. 현장은 인도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을 새롭게 중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도승 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의 구역(舊譯)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현장의 신역(新譯) 소식은 동아시아 전역에 퍼져나갔고, 그의 인도 불교 체험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필독서가 됐다. 의상(625~702)이 원효(617~686)에게 동반 중국 유학을 권유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650년 첫 번째 당나라 유학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삼국유사’의 ‘의상전교’(義湘傳敎)편에 적혀 있듯, 고구려를 가로질러 요동으로 가다 변방 수라군에게 첩자로 붙잡혀 고초를 겪고는 신라땅으로 추방된 것이다.두 사람은 11년이 지난 661년 다시 중국 유학을 시도한다. 송나라 승려 찬녕(贊寧·919∼1002)이 30권으로 엮은 ‘송고승전’(宋高僧傳)의 ‘신라국의상전’에 이때의 이야기가 제법 길게 실려 있다.‘당나라로 가는 경계인 해문(海門)마을에 도착해 큰 배를 구해 바다를 건너려 했다. 중도에서 폭우를 만났다. 길옆 토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의 습기를 피했다. 날이 밝아 바라보니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 궂은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밤도 무덤에서 머물렀는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원효는 “전날은 땅굴이라 해서 편안했는데, 오늘 무덤에 의탁하니 뒤숭숭하구나.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가 다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구나.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어떤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외치고는 바랑을 메고 돌아가 버렸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자 중국에 가려 했지만, 배에 타기도 전에 이미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물론 이 글은 ‘원효전’이 아니라 ‘의상전’이다. 그런 만큼 말미에는 ‘이에 의상은 외로운 그림자처럼 홀로 나아가 죽기를 맹세하고 물러나지 않았고 상선에 의탁해 당나라 등주 해안에 닿았다’고 적었다. ‘송고승전’ 내용이 뭔가 이상하다 싶은 독자도 있겠다.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북송의 연수(延壽·904~975)가 지은 ‘종경록’(宗鏡錄)에 등장한다. ‘원효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는데, 마침 그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이미 10세기에 매우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송고승전’의 ‘신라국황룡사사문(沙門) 원효전’에는 ‘원효는 일찍이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고자 했다. 그는 현장삼장의 자은사(慈恩寺) 문중을 사모했다. 그러나 입당(入唐)의 인연이 어긋났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고만 적었다. 원효의 일생을 담은 가장 권위 있는 기록인 고선사 서당화상비(高仙寺 誓幢和上碑)에서도 중국 유학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물론 신라 애장왕(제위 800~809) 때 세운 서당회상비는 깨어져 일부만 남아 있는 만큼 사라진 부분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 원효가 주석하던 고선사는 경주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토함산 어귀에 있었다. 하지만 덕동댐 공사로 절터 전체가 수몰되고 말았다. 서당화상비의 머릿돌과 받침돌, 삼층석탑과 건물 부재는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졌다. 원효가 깨달음을 이룬 곳이 어딘지는 당연히 학계의 관심사다. 원효와 의상이 배를 타고자 향했던 곳이 경기 화성의 당항성(黨項城) 언저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화성시청이 있는 남양읍의 서쪽으로, 평택시흥고속도로 송산마도나들목에서 전곡항을 가는 중간쯤이다.한성백제시대의 백제 땅이다. 하지만 장수왕이 475년 한성을 점령하면서 고구려 땅이 됐다. 진흥왕이 551년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 땅이 됐다. 신라가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한 것이다. 삼국통일의 결정적 바탕이 됐다. 신라가 대(對)중국 전진기지를 한강 하구가 아닌 남양만 일대에 건설한 것은 고구려 수군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로 남쪽의 태안반도에서 발진하는 백제 수군의 영향에서도 벗어났다. 한양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당항성은 해발 165m의 구봉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결합된 산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테뫼식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둘러 쌓았다면 포곡식은 능선을 따라 쌓은 것이다.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을 통일신라가 포곡식 산성으로 확대한 것으로 본다.당항성 곳곳에서는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옛 기와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사방이 거칠 게 없이 트여 있는 꼭대기에 오르면 망해루(望海樓)로 추정되는 집터가 있다. 삼국시대 지휘소 장대(將臺)를 고려시대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 지하에서는 시대를 달리하는 흙말 17개가 확인됐다. 큰 바다를 건너기 전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흔적이다.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은 ‘남양부 망해루기’에서 ‘시야가 트인 곳에 누대(樓臺)를 세우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해라 이름지었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작은 고려청자 사금파리 하나를 주웠다. 목은이 망해루에서 기울이던 술잔이 아니라는 법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지금 당항성에서 서해바다까지의 거리는 제법 멀어 보인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당은포(唐恩浦), 곧 당항진(黨項津)이라는 항구는 그리 멀지 않았을 것 같다. 간척 사업 이전이라면 산성 가까이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을 수도 있다. ‘송고승전’은 ‘해문마을로 가는 도중’의 토굴을 언급했지만 아마도 해문마을, 곧 당은포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돌아섰고, 의상은 당나라 가는 상선에 올랐을 것이다. 최근에는 의상이 마산포에서 배에 탔다는 주장도 나왔다. 당은포든, 마산포든 당항성의 부속 항구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망해루 터에서 보이는 마산포는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천진으로 압송된 항구다. 조선 말에도 중국을 잇는 통로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시화방조제에 가로막힌 농촌마을이 됐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무덤밭/서동철 논설위원

    할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5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위중해지신 할머니를 집에서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구급차에 함께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어머니가 “점쟁이가 그러는데 집 밖에서 객사(客死)한 할머니의 원혼을 풀어 드려야 집안이 잘된다고 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객사’라는 말을 들어 보기도 어려워졌다. 관혼상제 같은 통과의례는 완고해서 좀처럼 변치 않는다고 했는데 사회 변화에는 장사가 없다. 내가 사는 파주에는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 있다. 곁에는 율곡의 가족 무덤도 있다. 흔히 율곡과 부인 노씨의 무덤이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그것보다 위에 자리 잡은 것이나, 율곡 부부의 무덤이 앞뒤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율곡의 큰누나 매창과 매부 조대남은 물론 시아버지 조견과 시어머니 이씨의 묘소가 이곳에 어울려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더 신기하다. 사돈이 함께 잠든 무덤밭이라니…. 조선 중기 사람들의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이 놀랍다. 지금도 쉽지 않으니 관습의 변화가 유연하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초대공사 박정양이 본 미국/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초대공사 박정양이 본 미국/서동철 논설위원

    ‘지구전도를 살펴보면, 북아미리가(北阿美利加·북아메리카)주에는 미리견합중국(美利堅合衆國·아메리카합중국)이 있다. 두 개의 큰 산이 있는데, 높이가 동쪽의 알내견니(戞乃堅尼·애팔래치아)산은 6200자, 서쪽의 루옥(鏤玉·로키)산은 1만 7000자다. 강은 미서시서습피(米瑞是瑞拾陂·미시시피)가 가장 길다.’조선의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쓴 ‘미속습유’(美俗拾遺)의 일부다. 그는 조선 최초로 서양 국가에 상주하는 외교사절이 되어 1888년 1월 9일부터 11월 19일까지 워싱턴DC에 머물렀다. 이 글을 번역해 최근 책으로 펴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최초의 서양 견문기로 알려진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보다 1년 먼저 쓴 미국 견문기라고 한다. ‘미속습유’는 모두 44개 항목으로 지리와 역사, 통치 구조의 특징, 경제와 사회, 그리고 다양한 근대적 문물을 소개했다. 국헌(國憲)에서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의 3대권(大權)을 언급하면서 원로원(元老院)과 민선원(民選院)의 상·하원 제도와 하등재심원, 중등재심원, 고등재심원의 3심제 사법제도를 설명했다. 박정양은 미국의 복지 정책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하다. 복지 시설을 좋은 일을 한다는 뜻에서 선거(善擧)라고 표현했는데, ‘늙은 홀아비와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 병들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모두 보살펴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두 정부가 먼저 이끌어 인도한 것인데, 한 집이 어질면 온 나라가 어질어진다는 성현의 가르침이 꼭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라며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정양 역시 앞서 서구 문물을 접한 사람들처럼 신문의 역할이 인상 깊었다. ‘신문지’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비록 전·현직 대통령의 좋은 말이나 나쁜 행동이라도 구애받지 않고 싣는다. 일이 있으면 바로 쓰고 들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적어 내어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포용해 주는 사사로움이 없다’고 했다. 신문이 ‘좋은 풍속을 장려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파악한 미국의 장점을 조선이 하루아침에 도입해 적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제도와 문물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정양은 고종에게 “미국이 부강한 원인은 영토가 광활하거나 재원이 풍부하다는 외형적인 조건보다는 모든 국민이 내수(內修)에 무실(務實)한 데 있다”고 보고했다. 관리와 국민 모두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건봉사, ‘642칸 당우’와 영화·쇠락 함께… 만해, 소실된 ‘正史’ 재발간

    고성 건봉사는 민통선을 지나지 않고 남쪽에서 접근하면 편안하다. 지난해 완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해 바다에 닿을 때쯤 삼척에서 속초를 잇는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그렇게 북쪽으로 달리다 고속도로 끝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에 진입해 조금만 올라가면 고성 땅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전하면서 딴생각을 하다 간성읍에서 진부령으로 가는 46번 국도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을 잊고 화진포해수욕장까지 내쳐 달렸다. 차를 돌려 조금 내려오니 반갑게도 건봉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진읍에서 절에 접근하는 길이다.산길로 접어든다 싶더니 바리케이드 너머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 주고 나서 통과할 수 있었는데 검문소는 하나가 더 있었고 절차도 반복됐다. 건봉사가 민간인 출입 통제에서 풀린 것은 1988년이다.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였고, 절 주변에서 특히 전투가 치열했다고 한다. 이번 ‘판문점 선언’에는 군사분계선(DMZ)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건봉사 가는 길’도 그 혜택을 누렸으면 좋겠다.건봉사는 전쟁 이전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사성전, 보제루, 어실각, 수침실 등 642칸의 당우가 있는 강원 최대 절집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시절 위세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수침실(水砧室)은 물레방앗간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모두 불탔다. 건봉사는 앞서 1878년(고종 15)에도 산불로 3183칸의 전각이 타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사라진 전각은 1879년 개운사·중흥사·봉은사·봉선사·용주사 등이 힘을 합쳐 중건했다고 한다. 지금 건봉사의 전각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강당인 봉서루에는 ‘금강산 건봉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봉사는 금강산 줄기에 자리잡기는 했지만 금강산은 아니다. 그럼에도 금강산 유람에 나선 옛 사람들은 간성을 지나 건봉사에 이르면 누구나 금강산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생각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은 1603년(선조 36) 궁궐의 마구간을 관리하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는 벼슬에서 파직되자 금강산 유람길에 오른다. 이때 건봉사 스님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긴 한시를 남겼는데 여기에도 ‘건봉사가 어드메냐 /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스라하다’는 대목이 보인다.건봉사의 정사(正史)는 ‘건봉사와 그 말사의 사적(事蹟)’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 시대 대화재로 각종 자료가 대거 사라짐에 따라 새로 수집한 역사를 바탕으로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대표 집필해 1928년 발간한 것이다. 편년체로 절의 연혁을 정리하고 부속 암자, 재산, 유물, 진영, 명소 등의 순으로 기술했다. 만해는 당시 건봉사의 승려였다. 건봉사 사적은 절의 역사가 신라 법흥왕 7년(520)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적었다. 아도(阿道)가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는 것이다. 법흥왕 7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8년 전이고, 아도는 그 훨씬 이전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는 인물이니 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역사 끌어올리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절들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고승을 창건주로 내세워 역사를 윤색하는 것이 사실이다. 건봉사의 경우도 지리적 위치를 보면 삼국시대 당시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 루트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도는 특정시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아미타(阿彌陀)신앙, 곧 정토신앙을 전파하는 승려라면 누구나 아도이고 아도화상이다. 역사책에서 아도나 아도화상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시대에 등장하는 이유다. 신라가 함경도 일부까지 점령하고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세운 것은 진흥왕 시대다. 법흥왕 시대 건봉사 일대는 신라보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더 컸을 수도 있다. 신라 중심으로 보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 법흥왕 시대 건봉사의 창건은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창건을 ‘신라 법흥왕 7년’이 아니라 같은 해인 ‘고구려 안장왕 2년’이라고 보면 논리적 모순은 없다. 건봉사는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시작된 절이다. 염불계(念佛契)라고도 하는 염불만일회는 1만일 동안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 부처의 이름을 마음을 다해 부르는 모임이다. 758년(신라 경덕왕 17) 발징이 절을 중건하면서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신도 1820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건봉사에서는 19~20세기에도 세 차례 염불만일회가 열렸다. 조선시대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해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면서 척불(斥佛)시대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문인과 관료들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건봉사에서 하룻밤을 묵어 갔던 것도 감당할 만한 경제력이 절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이끄는 6000명 남짓한 의승군이 건봉사를 훈련의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건봉사는 만해의 존재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에 매우 활발했다.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절을 찾는 당대 문인·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시대 변화에 눈뜰 수 있었고, 더불어 종교의 역할도 깊이 있게 고민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1909년 당시 건봉사의 말사였던 백담사에서 탈고해 1913년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물론 만해 개인의 저서지만, 진취적인 건봉사의 분위기가 응축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불교가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본연의 자세로 복귀해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다. 무엇보다 염불당을 폐지하고 염불을 개혁해야 한다는 ‘유신론’의 한 대목은 건봉사에 몸담고 있는 승려의 주장으로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1908년 회향한 염불만일회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만해는 “대낮이나 맑은 밤에 모여 앉아 찢어진 북을 치고 굳은 쇳조각을 두들겨 가며 의미 없는 소리도 대답도 없는 이름을 졸음 오는 속에서 부르고 있으니, 이는 과연 무슨 짓일까”라면서 ‘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만인회를 정조준했다. 그러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중생들의 거짓 염불을 폐지하고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라고 적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절을 둘러보면 삼국시대 고찰의 분위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아도 최근의 석물(石物)도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 왼쪽에 보이는 ‘만해당 대선사시비’도 그렇다. 그 옆 ‘사명대사기적비’도 지난해 복원한 것인데, 파손된 옛 비석 조각의 일부가 남아 있다. 사명대사가 왜적에게서 되찾아온 양산 통도사의 진신사리 일부를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건봉사의 성속(聖俗)을 가르는 경계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결국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불이문은 6·25 와중에 파괴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근대 명필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썼다. 불이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시냇물을 건너면 대웅전이고, 곧바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다. 대웅전 가는 길에 놓인 다리가 능파교다. 조선 숙종 시대 지은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2002년 보물로 지정됐다. 절 진입로의 홍예다리도 차를 타고 가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과거의 흔적이다.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과 그 무덤에 배례할 수 있도록 지은 전각이다. 사명대사기적비에 언급된 진신사리를 모시고자 조성했을 것이다. 지금 불이문에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왼쪽의 넓은 터전에는 아직 복구하지 못한 옛 전각의 주춧돌만 가득하다. 이 또한 건봉사의 역사를 보여 준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칼럼] 냉면이 우리 음식 문화에 묻는다

    [서동철 칼럼] 냉면이 우리 음식 문화에 묻는다

    평안남도 강서가 고향인 실향민 출신으로 통일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이영덕 전 국무총리는 냉면광(狂)이었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삼청동 공관에 냉면 뽑는 기계를 들여놓고 손님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그는 기자들과도 자주 냉면집을 찾았는데, 주문할 때부터 평양식 냉면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여 주곤 했다. 예를 들어 이 전 총리가 “나는 냉면!” 했는데 종업원이 “물냉면요? 비빔냉면요?” 하고 되물으면 즉각 “물냉면이라는 말이 어디 있나. 냉면은 그냥 냉면이지” 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었다. ‘평양냉면’이라고 굳이 ‘평양’을 붙일 것도 없이 ‘냉면’ 자체가 맑은 육수에 메밀사리를 말아 먹는 음식을 이르는 단어라는 것이다. 사실 강서는 냉면의 고장이다. 평양 서쪽의 강서군이라면 강서대묘라는 고구려 벽화무덤이 있는 곳이다. 내부 동서남북에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이라면 무릎을 치시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강서라는 땅이름은 평양을 관통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남포를 거쳐 서해로 나가는 대동강 서쪽이어서 붙여졌을 것이다. 1960~1970년대 서울의 강서면옥은 우래옥과 쌍벽을 이루는 냉면의 명가였다. 한때는 수원에도, 평택에도, 용인에도 강서면옥이 있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가 냉면을 자주 먹었던 곳도 을지로 남쪽의 강서면옥과 을지로 북쪽의 우래옥, 중앙극장 옆 평래옥이었다. 지금도 강서면옥이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는 듯하지만, 맛은 퇴색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니 다르게 생각하는 독자도 없지는 않겠다. 강서 남서쪽의 남포 역시 냉면의 고장이니 서울 무교동의 남포면옥도 냉면 애호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동강을 따라 형성된 ‘평양 냉면 문화 벨트’라고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니겠다. 그런데 이 전 총리의 자부심과 달리 ‘냉면’ 혹은 ‘평양 냉면’을 본고장이 아닌 서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몇 년 전 TV에 비친 평양 옥류관의 메뉴표에는 ‘국수’만 있었다. 옥류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 냉면기계를 싸들고 내려온 평양의 대표적 냉면집이다. 오늘날 평양 냉면의 맑은 육수를 일컬어 ‘슴슴하다’고 표현하는 데는 시인 백석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냉면을 예찬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시의 제목은 ‘냉면’이 아니라 ‘국수’다. 옥류관의 메뉴판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평양 냉면’이라고 지칭한 것은 상당 부분 남쪽 국민의 언어 관습을 배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북쪽에서도 대외적으로는 ‘평양 랭면’이라고 표기한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옥류관 분점에서도 ‘평양 랭면’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냉면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최근의 ‘냉면 붐’에도 불구하고 과연 ‘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이 우리 음식 문화에 제대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 음식의 특징을 말할 때 ‘발효’라고들 한다. 고추장, 된장, 간장이 그렇고 김치가 그렇다. 2015년 밀라노엑스포 한국관의 주제도 ‘발효’였다. 하지만 필자가 자주 찾는 송추 평양면옥의 빈대떡, 만두, 냉면에는 ‘발효’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발효가 우리 음식 문화의 중요한 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평안도 지방 음식들은 증명한다. 이제 발효에 그치지 않는 풍성한 음식 문화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북한 먹거리’라고 해외에 알릴 음식 문화 리스트에서 제외하던 관행이 있다면 그것부터 바꿔야 한다. 냉면은 김치와 장류 이상으로 국제화가 가능한 음식이라고 믿는다. 음식 엑스포가 다시 열린다면 남북이 공동으로 ‘냉면과 그 주변 음식 문화’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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