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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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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평 일제 조병창’ 보존 희망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인천 부평의 미군기지 캠프마켓 터에 남아 있는 ‘20세기 유적’의 보존을 놓고 찬반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인천시 캠프마켓시민참여위원회’는 캠프마켓 남쪽 야구장 일대 시설물 31개동 가운데 22개동을 남겨 두고 9개동은 철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일제강점기 흔적을 남기지 말아 달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패망 직후 인천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9월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을 접수해 군수지원사령부(애스컴시티)라 이름 붙였다. 1973년 해체된 애스컴시티의 중심 시설인 캠프마켓은 2019년 한국 정부에 반환됐다. 캠프마켓을 ‘일제강점기 흔적’이라 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부평 일본 육군 조병창’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일본’이나 ‘조병창’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강화도 전등사를 오래전 찾았을 때다. 그다지 눈썰미가 없는 사람들도 전등사 범종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마련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등사 범종은 한국 종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시대 유물이다. 전등사에 왜 중국 종이 걸려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역사학자 김상기(1901~1977)가 전등사 범종을 보물로 지정할 당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 연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만들 금속류를 닥치는 대로 수탈했다. 문화재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전등사 범종도 부평 조병창으로 실려 갔다. 전쟁이 끝나자 전등사 스님들은 서둘러 조병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전등사 범종은 이미 간 데가 없었고 마당에 나뒹구는 중국 종들 가운데 북송 철종 4년(1097) 조성한 백암산 숭명사 범종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조병창 마당에 나뒹굴었던 다른 중국 종들의 행방도 궁금하다. 광복 이후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이경성(1919~2009)의 회고담에 해답이 담겨 있다. 1946년 3월 당시 김재원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부터 조병창에 중국 종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을 찾았다는 것이다. 지금 인천시립박물관에 가면 당시 수습한 중국 종 3구를 야외 전시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 것이다. 특히 명나라 종은 태산행궁이라는 도교사원에 걸려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을 둘러보고 있으면 조병창에서 수습한 청동관음보살이며 동물 모양 대포, 청동향로 등 일제가 중국에서 수탈한 각종 문화재와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중국 문화재뿐이겠는가. 전등사 범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 문화유산이 부평 조병창 용광로에 던져져 전쟁 무기로 탈바꿈했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다 오싹해진다. 문화유산을 빼앗아 간 나라는 많아도 이런 방법으로 말살한 나라가 또 있나. 그런데도 문화유산 파괴를 다룬 ‘반달리즘의 역사’에 일본의 행태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이 문화 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역사를 보존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평역사박물관이 조병창에서 캠프마켓에 이르는 상설 전시를 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본다.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1941년 부평 조병창을 세울 당시 초기 생산 목표는 소총 2만정, 총검 2만정, 경기관총 100정, 군도 1000자루였다고 한다. 지역에서는 ‘미쓰비시 줄사택’의 보존 여부도 논란이다. 역시 부평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937년 화물열차와 광산기계를 생산하는 히로나카상공이 설립됐다. 1942년 미쓰비시중공업이 이 회사를 인수해 같은 해 미쓰비시제강 부평공장으로 재편한다. 미쓰비시제강은 박격포와 방탄용 강판 등을 만드는 병기창이었다. 부평2동에 남은 줄사택도 세워졌다. 부평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거대한 병기공단이었다. 그러니 부평 조병창과 줄사택은 한국사를 넘어선 세계사의 일부분이다. 무엇보다 조병창 터와 줄사택, 인천시립박물관, 부평역사박물관, 전등사를 한데 엮으면 인천의 근대 역사를 보여 주는 훌륭한 역사 투어 코스가 된다. 모두 둘러보고 나면 ‘일제 흔적을 없애고 쇼핑센터로 개발하자’는 일부 시민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다시 자유화되면 부평 조병창과 인천시립박물관, 그리고 전등사는 중국 관광객의 한국 관광 필수 코스로 떠오를 가능성이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본다. 그렇게 인천시민들이 ‘세계사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보존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믿는다. sol@seoul.co.kr
  • [길섶에서] ‘학교 가는 길’/서동철 논설위원

    지난주 휴가를 내고 느지막이 집앞 공원으로 산보를 갔다. 공원에 맞붙은 중학교 등교시간에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학교 가는 길’이다. 20년도 더 전에 이 곡을 쓴 김광민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요즘도 어딘가에서 그의 음악이 들리면 관심을 갖는다. ‘학교 가는 길’ 연주는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1997년 펴낸 3집 ‘무언가’(無言歌)에 실렸다. 이 중학교에서는 몇 년 전까지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온 행진곡을 틀어 주었다. 휘파람 소리가 등장하는 제법 밝은 느낌의 음악이지만, 일본군에 포로가 된 영국군을 강제노역시키는 장면에 쓰였다. 하긴 나의 중·고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등굣길과 강제노역길은 그런대로 통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한다. 물론 개인적인 기억이다. 중·고교 때 등교 시간에는 스피커에서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서’가 주로 나왔다. 쌍두 독수리, 곧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문장이다. 한국과 아무 상관없는 나라의 영원무궁을 기원하는 성격을 가진 행진곡이겠다. 여기까지 추억을 더듬자 ‘학교 가는 길’이라는 ‘우리 음악’이 ‘우리 학교’에 울려퍼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문화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이다.
  • [씨줄날줄] 군사유적의 보고 가덕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군사유적의 보고 가덕도/서동철 논설위원

    동남권 신공항이 추진되고 있는 가덕도는 부산시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드리워진 섬이다. 가덕도 북쪽에는 망산도가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대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의 김수로왕과 혼인하고자 바다를 건너와 배에서 내렸다는 곳이다. 가야시대에 이미 문화의 대외 창구로 기능하던 망산도 주변은 부산신항으로 개발돼 교류의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망산도와 부산신항이 문물의 수출입 창구라면 그 길목의 가덕도는 우호적인 교류의 뱃길을 지키면서 적대 세력의 출몰을 감시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가덕도 중심부에 자리잡은 해발 459.4m 연대봉 정상에는 ‘임진왜란 최초 발견 보고지’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로 몰려오는 왜군 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한 초소라는 것이다. 가덕도는 조선 초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다. 조정 안팎에서 가덕도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는데, 1544년 사량진왜변이 계기가 됐다. 왜구가 오늘날 통영시의 사량진에 침입해 백성을 납치하고 말을 약탈한 사건이다. 조정은 1544년 통영과 거제도가 바라보이는 가덕도 서쪽에 천성진성, 부산 앞바다를 방어할 동쪽에 가덕진성을 쌓았다. 가덕도 양쪽에 군사기지를 동시에 설치할 만큼 해안 방비에 결정적인 요충이었기 때문이다. 가덕도 북쪽 해발 155m 갈마봉에서는 북쪽으로 부산신항, 동북쪽으로 다대포와 낙동강 하구가 보인다. 갈마봉에서는 타원형의 석성이 확인됐는데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연대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가덕도 북동쪽의 눌차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왜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가덕도 남단에 1909년 가덕도등대가 세워진 것도 이 섬이 뱃길의 통로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가덕도등대는 대한제국시대 건축물로 서구 건축 양식의 원형을 간직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래도 가덕도가 군사유적의 보고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가덕진성은 성문터와 해자의 흔적을 확인했지만 성 안팎은 공공기관과 민가로 가득하다. 수군절도사를 기리는 송덕비와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천성동사무소 앞과 천가초등학교 운동장에 남아 있다. 부산포해전에 앞서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천성진성 발굴 작업이 속도를 내는 것은 다행이다. 부산박물관은 최근 네 번째 발굴조사에서 객사와 남문터를 확인하고 갑옷 미늘을 둥근 쇠못으로 박은 두정갑을 수습했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기정사실이 됐다. 가덕도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 [씨줄날줄] 왕조실록의 몰수 부동산/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왕조실록의 몰수 부동산/서동철 논설위원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택리지’에서 ‘천상의 수도이자 훌륭한 도읍터’라고 했던 한양의 4대문 내부 넓이는 400만㎡ 안팎이었다. 도성 인구가 초기부터 늘어난 탓에 1461년(세조 7)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한성부에 편입했다. 성저십리란 도성을 둘러싼 사방 십리를 말한다. 도성이 비좁으니 신분에 따라 집의 넓이를 제한했다. 1469년(예종 원년)에는 대군·공주 30부, 군·옹주 25부, 1·2품 15부, 3·4품 10부, 5·6품 8부, 7품 이하 4부로 정했다. 조선후기에는 대군·공주 집의 넓이도 15부로 준다. 1부는 벼 10단을 생산하는 면적으로 100㎡ 정도라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선조는 임시 궁궐로 월산대군 사저를 징발하는데 훗날 덕수궁이 된다. 궁궐로 쓰면서 주변 가옥을 사들여 넓혔지만 월산대군 사저는 처음부터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다. 1734년 부제학 이종성은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옹주가 내려받은 저택 옆에 여염집을 많이 사서 장차 집을 지으려 한다고 한다. 전하께서 과연 이런 일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하고 영조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럼에도 공사를 강행한 듯 이듬해 영조실록에는 ‘임금이 화평 옹주를 위하여 이현궁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좌의정 서명균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공사를 중단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장관 조정진이 1780년 열하에 다녀온 보고서는 정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땅으로 치부한 공직자의 불행한 말로를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청나라 문신 우민중은 청렴 정직하다고 소문이 나서 황제가 신임했고 백성의 칭찬 또한 높았는데 죽고 보니 주택과 전원 등 엄청난 재산을 남겼다’고 했다. 황제는 그의 가산을 적몰하라 명령했고, 부인 장씨는 곡부 공자묘의 노비로 삼아 후세가 교훈을 얻도록 했다는 것이다. 고종실록에는 1874년 전 장령 박기종의 상소문이 올라 있다. 그는 ‘지난해 영광·함평·무안 세 고을에서 별포청에 빼앗긴 것이 30석 논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별포별장이라는 사람은 지난해 빼앗은 전토에서 재작년 도조를 거두어 집이 망하고 농사를 그만둔 사람이 100호’라며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적인 잇속을 채운 사람에게 빨리 해당 법률을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은 정치범 등 죄인으로부터 적몰한 토지를 지방군사조직 별포청에서 활용했는데 주변 토지까지 강제로 수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공직자가 국가 제도를 오용해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고 개인의 지갑까지 두둑히 챙겼다는 뜻이다. 개발정보를 이용한 오늘날의 공직자 투기와 본질적으로 똑같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광장 새 단장과 삼군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광장 새 단장과 삼군부/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의 국방정책은 의정부와 병조의 몫이었지만 초기 여진과 왜의 침범이 잦자 비상기구가 필요했다. 결국 삼포왜란을 계기로 비정규 기구였던 비변사를 정규 조직화하고, 임진왜란 이후 사실상 국정최고기관의 지위를 부여한다. 흥선대원군이 1865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킨 것은 비변사가 세도정치의 본거지가 됐다고 인식한 결과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에서 보아 왼쪽 전면과 오른쪽 전면에 각각 의정부와 삼군부를 배치한 것은 국정의 양대축(軸)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창덕궁 돈화문 앞의 비변사 터 일부에 서울우리소리박물관이 2019년 들어섰다. 서울시가 주유소를 사들여 문화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비변사 터 보존을 위해서도 잘한 일이다. 하지만 주유소는 기름저장탱크가 필요했으니 지하유구는 이미 훼손됐을 것이다. 박물관 남쪽도 상당 면적이 비변사 터였다. 최근 지어진 민간 건물 지하에는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흔적이 옹색하나마 일부 보존돼 있다. 광화문 동남쪽의 의정부 터에는 지금 높다란 임시 담장이 쳐져 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붉은 벽돌 건물이 지어져 경기도청으로 쓰였고, 광복 이후에도 내무부 치안국 청사로 활용됐다. 2016년 이후 네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중심 전각인 정본당과 그 좌우 석획당과 협선당의 건물 흔적이 확인됐다. 지붕이 한 단 높은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나란히 배치된 3당병립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후원의 연지와 정자, 우물 자리도 찾아냈다. 삼군부는 그 건너 정부중앙청사 위치다. 의정부와 같은 권위를 부여한 만큼 삼군부 청사도 3당병립형이었다. 총무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청헌당, 오른쪽에 덕의당이 자리잡았다. 그런데 잘 안 알려졌으나 총무당과 청헌당 건물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 삼군부 총무당은 1930년대 삼선동 한성대 곁으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1968년 당시 중앙청사가 지어질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이건됐다. 덕의당만 사라졌을 뿐이니 삼군부는 비변사나 의정부보다 훨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다. 서울시가 새 광화문광장 조성에 앞서 벌이는 발굴조사에서 조선의 여러 중앙행정기관 옛터가 확인됐다. 특히 삼군부 터에서는 담장 석렬과 행랑의 기단, 배수로 등을 찾아냈다. 주변 발굴조사에서 중추부 터와 사헌부 터, 병조 터, 형조 터 유구도 상당 부분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는 발굴조사 결과를 새달 문화재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다. 왕궁인 경복궁만큼이나 중요한 조선의 육조거리 유적군(群)이다. 어떻게 문화유산의 역사성을 살릴 것인지는 전적으로 서울시의 의지에 달려 있다.
  • [씨줄날줄] 애틀랜타와 인종차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애틀랜타와 인종차별/서동철 논설위원

    애틀랜타는 조지아주의 주도로 미국 동남부 최대 도시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옹호한 남군의 본거지로, 윌리엄 셔먼 장군이 이끈 북군이 1864년 시가지를 완전 초토화한 역사가 있다. ‘셔먼 장군’은 ‘제너럴 셔먼’으로 한국에도 친숙하다.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 관민이 불태웠다. 장마로 불어났던 강물이 빠지고 배가 모래톱에 걸린 틈을 탄 것이다. 신미양요의 빌미가 됐다. 무장항일운동의 주역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애틀랜타를 함락한 북군의 ‘조지아 행진곡’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싸우러 나가세’라는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군가가 됐고, 대한민국 국군의 공식 군가로도 채택했다. 애틀랜타는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기도 하다. 애틀랜타 출신 작가 마거릿 미첼이 1936년 쓴 소설은 193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남북전쟁 때 조지아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재현하는 데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철저한 미국 남부 중심적 시각에서 씌어져 흑백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백인은 부유한 농장주로 우아한 삶을 즐기고 있는 반면 흑인은 하나같이 백인이 규정한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 역시 ‘용감한 기사와 우아한 숙녀, 그리고 지주와 노예와 함께 존재하던 남부의 귀족적인 전통’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1940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특히 여우조연상의 해티 맥대니얼은 흑인 최초의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기록됐다. 그런데 1939년 12월 15일 애틀랜타의 로스 그랜드 시어터에서 열린 이 영화의 공식 시사회에 맥대니얼은 참석할 수 없었다. 흑인은 백인과 함께 극장, 야구장, 버스, 공공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당시 조지아주의 ‘짐크로법’ 때문이었다. 한국계 4명 등 8명의 사망자가 나온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성격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애틀랜타 경찰이 용의자의 진술 그대로 ‘성중독’을 거론하며 ‘인종적 동기에서 유발됐다는 초기 징후는 없다’고 주장한 탓이다.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다음으로 많은 한국인이 모여 사는 도시다. 애틀랜타 경찰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맥대니얼 시대 인종차별적 정서에 여전히 매몰되어 있다면 교민들이 ‘평등한 안전’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 걱정이다. sol@seoul.co.kr
  • [길섶에서] 포천 사과/서동철 논설위원

    집에 쌀이 떨어지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철원에 다녀와야겠군’ 한다. 친분이 있는 한의사로부터 철원 쌀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다. 말이야 ‘뭐 그렇게 악착같이 찾아 먹을 필요가 있나’ 했지만 철원에 갈 이유가 생겼구나 싶었다. 그곳에는 도피안사 부처님이 계시다. 불교 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절이나 성당에 가면 마음속으로 삼배(三拜)를 하거나 성호(聖號)를 긋는다. 학창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교회 성가대의 임시단원으로 ‘메시아’를 부르기도 했다. 얼마 전 쉬는 날에도 파주 집을 나서 연천부터는 경원선 철길과 나란한 3번 국도를 타고 철원 도피안사에 갔다. 그러고는 동송읍 농협 마트에 들러 쌀 두 봉지를 사서 차 트렁크에 실었다. 철원 여행의 목적은 일단 달성한 것이었다. 돌아올 때는 다른 길로도 가 보면 좋겠다 싶어 연천 고대산의 반대편인 포천 관인을 거쳤는데 사과 과수원과 판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포천 사과는 맛있었다. 사과의 대명사는 대구였고, 이후 충주와 예산 사과가 유명해진 줄은 알겠는데 포천 사과라니. 가장 추운 도시의 하나인 철원과 맞붙은 포천이다. 사실 철원을 즐겨 찾는 이유는 도피안사 철불 말고도 오가는 길 주변의 막국수집들 때문이기도 하다. 포천 사과로 그 즐거움이 하나 늘었다.
  • [서울광장] 문화유산 보고 원주 부론과 시인 손곡 이달/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문화유산 보고 원주 부론과 시인 손곡 이달/서동철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에는 양평 양동에 갔다가 내친김에 맞붙은 원주로 차를 몰았다. 시간도 넉넉하니 부론이나 한번 가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경기와 강원의 경계를 넘어 문막읍에 접어들고 보니 흥법사 터도 가본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법사 터는 섬강이 지척인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았다. 작은 절처럼 보이지만 마당 끝 진공대사탑비와 마주치면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 전성기에는 결코 예사로운 절이 아니었겠다 싶다. 탑머리와 받침 조각만 남아 있음에도 국가적 공력을 기울인 당대의 대표작임을 알 수 있다. 흥법사 터는 발굴조사를 잠시 쉬고 있는 듯 보였다. 단계적 발굴조사 마무리되어 전성기 흔적이 모두 드러났을 때를 기대하게 된다. 절터 한쪽에는 발굴 과정에서 수습했을 옛 기와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데, 그 옆 소나무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흥법사지 국가사적 지정 청원합니다’라 크게 씌어 있었다. ‘남한강 유역 폐사지 세계유산 등재 국민운동본부’라는 작은 글씨는 플래카드를 건 단체 이름이겠다. 이런 모임도, 이런 운동을 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국가사적 지정’의 희망은 발굴조사만 체계적으로 이루어져도 순조로울 것이다. 그렇게 성과가 축적되면 ‘세계유산’도 넘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지광국사현묘탑의 고향인 법천사 터로 간다. 충주로 방향을 잡아 지방도를 타고 달리면 부론면에 접어들고 오른쪽으로 ‘흥원창’ 표석이 나타난다. 고려 및 조선 시대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나르던 12조창의 하나다. 왼쪽의 남한강과 오른쪽의 섬강이 합쳐져 정면의 여주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이곳은 은섬포라고도 불린다. 은두꺼비 포구라니 유래가 궁금하다. 부론(富論). 이 땅이름은 흥미롭다. 흥원창이 지역 중심지로 떠오르고, 많은 사람이 왕래하면서 언론의 중심지가 돼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흥원창 주변 흥호리는 지금 한적하다. 조창 폐지 이후에도 번성했지만 1936년 대홍수로 주민들이 법천리로 이주하면서 면사무소도 옮겨 갔다는 것이다. 남한강은 강원도와 충청도를 개경과 한양으로 잇던 물길이었다. 경상도 세곡도 육로로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배에 실렸다. 조운의 역사를 보여 주는 박물관이 전국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서운하다. 흥원창 주변은 ‘남한강 수운 박물관’의 적지가 아닐 수 없다. 남쪽으로 더 달리면 법천리 삼거리다. 왼쪽으로 3~4분 가면 법천사 터가 나타난다. 세계유산 등재 운동의 핵심이다. 발굴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이 고려시대 절터는 그야말로 광활하다. 지광국사현묘탑이 돌아오면 유물 전시관도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절터를 돌아보는데 청자 사금파리가 발부리에 채인다. 청자 파편이 흔한 것은 고려시대 전성기 스님들이 일상적 공양구로 이 그릇을 썼다는 증거다. 현묘탑비만 있고 현묘탑 자리는 비어 있는 부도 권역에 오르니 전에 없던 ‘문화재 보호 CCTV’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감시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자음이 들려온다. 신기해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아예 요란스러운 경고음을 토해 낸다. CCTV를 연결한 케이블 저 끝에서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고음이란 곧 나를 ‘문화재 훼손 가능자’로 보고 있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나름 효과는 있을 것이다. 가던 길을 3~4분 더 달리면 손곡리다. 염두에 두었던 목적지다.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이라 생각하는 손곡 이달(1539~1612)이 고향이 아님에도 고향처럼 아낀 동네다. 그는 서얼 출신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문학사에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홍길동전’을 지은 고산 허균과 누이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한데 법천사의 문화재 안내판에는 허균이 방문한 흔적도 남아 있어 반가웠다. 허균은 스승 이달을 만나러 손곡으로 가는 길에 법천사에 들렀을 것이다. 허균은 스승의 삶을 그린 ‘손곡산인전’도 남겼다. 그런데 이달을 기려 손곡리 동네 밖 저수지 둑방에 만들어진 조각공원 철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부론은 흥원창 터와 법천사 터 말고도 세계유산을 추진하는 또 하나의 고려시대 절터인 거돈사 터도 가진 문화유산의 보고다. 이달이 손곡에 남긴 삶과 문학의 자취도 그 못지않은 문화자원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좋겠다. 법천사 유물 전시관과 함께 흥원창에 남한강 수운 박물관, 손곡리에 이달 시문학 박물관이 세워지는 모습도 보고 싶다. 작은 고을 부론이 원주와 강원을 넘어 한국 대표 문화 관광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장담한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이건희 컬렉션/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이건희 컬렉션/서동철 논설위원

    지난해 작고한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의 상속세 신고 기한이 다음달로 다가왔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이 내야 할 상속세는 적게 잡아도 11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유 주식의 배당을 늘리는 방식으로 상당 부분 충당한다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적 가치를 지녔다는 이 전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에 눈길이 간다. 선대 이병철 전 회장은 문화재 수집가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건희 전 회장의 컬렉션이 오히려 풍성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선대와 다르지 않았지만, 서양 미술품이 더해졌다. 이건희 전 회장과 서울대 미대 출신의 부인 홍라희씨는 2015년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잡지 ‘아트뉴스’의 ‘세계 2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건희 전 회장의 문화재 컬렉션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국보가 30점, ‘수월관음도’를 포함해 보물이 82점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남긴 컬렉션이 국보 12점, 보물 30점 정도인 것과 비교된다. 홍라희씨의 컬렉션에도 ‘백자청화운룡문 항아리’를 비롯해 보물이 5점 있다. 이병철 전 회장은 국보 15점과 보물 12점을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상속 재산을 관리했지만, 이건희 전 회장은 소유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은 1만 3000점에 이른다고 한다. 국가 지정 문화재는 문화재청이 공개하고 있어 내역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해 1000억원 이상을 들여 수집했다는 서양 미술품 내역은 그동안 오리무중이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품이 2200점 남짓, 서양 근현대 미술품이 1300점 남짓에 수준도 매우 높아 미술사조의 정점에 이른 거장들의 작품이 200점에 이른다는 감정 결과가 흘러나온다.감정 가격은 1조 5000억원이라고도 하고, 2조~3조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임자’만 만나면 감정 가격의 10배까지도 뛰어오르는 것이 미술품의 시장 가격이다. 삼성가(家) 안팎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할 의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의 주장처럼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물납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물납해도 감정 가격의 절반은 다시 미술품의 상속세로 내야 하니 큰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다만 기부 대상 기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뿐 아니라 삼성재단의 호암미술관이나 리움까지 떠오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기부의 형식을 빌린 또 다른 세(稅)테크로 활용될까 우려한다. 지금은 이건희 컬렉션의 ‘통 큰 기부’로 국민의 마음을 잡을 때가 아닌가 싶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서동철 논설위원

    “발굴대원들은…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로 합의했다. 철조망을 돌려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았어야 할 일이었다. 예기치 않던 상태의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다.” 올해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도굴되지 않은 모습으로 발견한 유일한 왕의 무덤이다. 작고한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은 발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1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발굴의 총책임자이자 현장책임자였다. 무령왕릉 발굴은 ‘하룻밤 삽질로 이루어진 도굴 수준의 발굴’로 비판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 선생은 ‘고고학도로서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라거나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난 것’ 같은 자아비판을 거듭한 것도 모자라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라는 표현을 두 차례나 반복했다. 하지만 ‘사상 최악의 발굴’은 50년 전 한국 고고학의 수준이 오늘날과는 크게 달랐다는 사실도 감안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령왕릉 발굴과 같은 일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이후 우리 고고학자들의 뇌리에 뿌리내린 것은 다행스럽다. 김 선생도 ‘무령왕릉 발굴의 쓰라린 경험은 그 뒤 경주 고분을 발굴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이 됐다’고 했다. 사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발굴해도 미래 시각으로는 비판받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고고학과 발굴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훗날에 맡기고 발굴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고고학자’라는 우스개도 그래서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자들에게는 우울한 기억이지만 공주 시민에게는 축복이었다.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를 대표하는 도시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였다. 하지만 도청이 1932년 대전으로 옮겨 감에 따라 한적한 농촌도시가 됐다. 교육도시로 명맥이 간신히 이어지던 상황에서 무령왕릉은 공주의 이미지를 한순간 역사문화 도시로 바꿔 놓았다. 문화재청과 공주시가 올해를 ‘무령왕의 해’로 정하고 어제 선포식을 했다. 아쉬운 대목이 있다. 백제의 주요 문화유산은 서울, 공주, 부여, 익산에 나뉘어 있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진 전시회는 다른 도시에서도 열렸으면 좋겠다.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의 내부 지역에서는 무령왕릉 발굴을 기념하는 공주 농산물 판매전 같은 주민 교류 행사가 어떤가. 백제문화권 주민에게는 문화재 관람료를 면제하고 숙박비, 교통비, 밥값을 깎아 주어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 노력도 좋겠다. 한성백제 영역이 너무 넓다면 서울 송파구로 한정하면 된다. sol@seoul.co.kr
  • [길섶에서] 보리굴비/서동철 논설위원

    밥집에서 보리굴비를 먹다가 주인에게 “이 보리굴비는 진짜 조기로 만드는 거 아니지요?”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진짜 조기로 만든 보리굴비 드시려면 돈 많이 버셔야 할 거예요” 하고 점잖게 응수하는 것이다. ‘허름한 식당에서 밥 먹는 주제에 보리굴비 크기의 조기가 한 마리에 얼만데 그렇게 철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핀잔이 아닐 수 없었다. 맛있게 먹고 있다가 그런 말은 왜 했을까 싶었다. 설 연휴 고향 형님이 보내 준 보리굴비 상자에서 작은 글씨로 ‘원재료: 부세’라고 적힌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보리굴비는 조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 해도 부세로 만든다는 사실을 이렇게 떳떳하게 밝혀 놓을 수가 있나 하고 혼자 웃었다. ‘조기를 말리면 굴비가 되듯 부세도 보리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면 보리굴비가 되나 보다’ 하면서…. 그런데 요즘은 보리굴비를 만드는 데 보리도 쓰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최근 들었다. 상식적으로 명절마다 그렇게 많은 보리굴비가 오가는데 모두 보리로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 굴비도 아니고 보리를 써서 만든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런 음식을 보리굴비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 문배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 문배도/서동철 논설위원

    설 연휴 광화문에 금갑장군이 그려진 문배도(門排圖)가 내걸렸다. 문배도는 액운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초에 대문에 붙이는 그림이다. 한 해 동안 나쁜 기운이 문턱을 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금갑장군처럼 문배도의 주인공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액운을 막아 내기가 그만큼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시대 문인·학자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도 ‘도화서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다. 한 장군은 도끼를, 다른 장군은 도리깨를 들었는데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는 대목이 보인다. 광화문의 금갑장군 그림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정초 광화문 사진을 발굴해 되살릴 수 있었다. 금갑장군은 집 안과 집 밖을 가르는 대문에 깃든 일종의 문신(門神)이다. 대문으로 들락거리는 잡귀를 막고 복을 들여온다. 남해대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쪽을 향한 대문에 깃든 신을 무관(武官)으로 보는 것은 중국의 영향이라고 한다. 사찰 초입에 사천왕문을 지은 것도 사천왕에 대문신 역할을 맡긴 것이다. 광화문의 금갑장군은 말할 것도 없이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내습에서 올해만큼은 한 걸음 비켜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원의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대문신앙의 역사는 길다. 한국 최초의 문신은 처용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는 신라인들이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여 삿된 것을 피하고 좋은 일만 맞아들이게 됐다는 대목이 나온다. 처용이 누구이고 처용설화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그동안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징성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그대로 집집이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 그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용은 조선시대에도 인기 있는 문신이었다. 대학자 성현(1439~1504)의 시문집 ‘허백당집’에 실린 ‘제석’에는 ‘아이들은 저잣거리에서 시끌벅적하고/도시 사람들은 밤놀이를 하네/문배는 울루 글씨요/창첩은 처용두상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새해를 맞아 대문에는 울루 글씨를, 창문에는 처용 그림을 붙여 나쁜 기운을 막고자 했다는 뜻이다. 울루는 중국의 대표적 문신이라고 한다. 대문은 물론 창문에도 액막이 그림을 내걸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처럼 문배도를 내거는 풍습이 되살아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이런 그림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일방적 염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는 사람 스스로 마음 자세를 다잡는 역할을 한다. 문배도 같은 그림이 대량 소비되면 그림 시장도 활성화되지 않을까.
  • [씨줄날줄] 광화문 문배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광화문 문배도/서동철 논설위원

    설 연휴 광화문에 금갑장군이 그려진 문배도(門排圖)가 내걸렸다. 문배도는 액운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초에 대문에 붙이는 그림이다. 한 해 동안 나쁜 기운이 문턱을 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금갑장군처럼 문배도의 주인공이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액운을 막아 내기가 그만큼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 시대 문인·학자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도 ‘도화서는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다. 한 장군은 도끼를, 다른 장군은 도리깨를 들었는데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는 대목이 보인다. 광화문의 금갑장군 그림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정초 광화문 사진을 발굴해 되살릴 수 있었다. 금갑장군은 집 안과 집 밖을 가르는 대문에 깃든 일종의 문신(門神)이다. 대문으로 들락거리는 잡귀를 막고 복을 들여온다. 남해대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쪽을 향한 대문에 깃든 신을 무관(武官)으로 보는 것은 중국의 영향이라고 한다. 사찰 초입에 사천왕문을 지은 것도 사천왕에 대문신 역할을 맡긴 것이다. 광화문의 금갑장군은 말할 것도 없이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내습에서 올해만큼은 한 걸음 비켜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원의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대문신앙의 역사는 길다. 한국 최초의 문신은 처용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는 신라인들이 처용 그림을 대문에 붙여 삿된 것을 피하고 좋은 일만 맞아들이게 됐다는 대목이 나온다. 처용이 누구이고 처용설화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그동안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징성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그대로 집집이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 그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용은 조선시대에도 인기 있는 문신이었다. 대학자 성현(1439~1504)의 시문집 ‘허백당집’에 실린 ‘제석’에는 ‘아이들은 저잣거리에서 시끌벅적하고/도시 사람들은 밤놀이를 하네/문배는 울루 글씨요/창첩은 처용두상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새해를 맞아 대문에는 울루 글씨를, 창문에는 처용 그림을 붙여 나쁜 기운을 막고자 했다는 뜻이다. 울루는 중국의 대표적 문신이라고 한다. 대문은 물론 창문에도 액막이 그림을 내걸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처럼 문배도를 내거는 풍습이 되살아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이런 그림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일방적 염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는 사람 스스로 마음 자세를 다잡는 역할을 한다. 문배도 같은 그림이 대량 소비되면 그림 시장도 활성화되지 않을까.
  • [씨줄날줄] 부산항 100만명분의 코카인/서동철 논설위원

    미국 마약단속국(DEA)은 1997년 콜롬비아 마약 조직이 옛소련 잠수함을 사들이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적을 시작한다. 2018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작전명 오데사-희대의 사기꾼’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는 미국, 러시아, 쿠바 출신 사기꾼들이 잠수함을 미끼로 거액을 가로챈 실화를 다룬 것이다. 잠수함 사기를 당한 마약 조직이 칼리 카르텔이다. 세 사기꾼은 앞서 옛소련의 군용 헬리콥터를 이 마약 조직에 판매했다. 칼리 카르텔은 코카인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으로 몰래 보내는 데 소련제 무기들을 쓰려 했다. 콜롬비아산 마약을 헬리콥터와 잠수함으로 미국 연안에 잠입시키는 계획이다. 콜롬비아 마약 조직은 메데인 카르텔과 칼리 카르텔이 대표한다. 메데인과 칼리는 코카잎의 주산지인 안데스고원 지대에 자리잡은 도시다. 코카인 정제는 1970년대 이후 메데인 카르텔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칼리 카르텔은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1차 정제된 코카인을 메데인 카르텔에 전달하는 소규모 조직이었다. 1983년 1세대 두목 벤자멘 에레라의 아들 엘마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전문 조직으로 급성장했다. 1993년 메데인 카르텔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경찰에게 사살돼 한때 미국 코카인의 80%를 공급한 세계 최대 마약 조직으로 떠올랐다. 콜롬비아 마약의 역사에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흔하다. 에스코바르는 바하마군도의 섬을 사 활주로를 만들어 코카인 수송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콜롬비아에서 대형 수송기에 싣고 온 코카인을 이 섬에서 작은 비행기에 나눠 싣고 하루 5~7차례나 미국 남부의 플로리다로 실어 날랐다. 한국에도 칼리 카르텔의 마약 운반 사기 피해자가 있다. 2005년 남미 페루와 수리남 등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로 코카인 100㎏을 보낸 사건이 각국 수사 당국에 적발됐다. 국내 마약사범이 마약의 운반책으로 평범한 한국인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2013년 개봉한 ‘집으로 가는 길’은 당시 프랑스 마르티니크섬 교도소에 수감된 한국인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해경이 부산항에 들어온 라이베리아 선적 14만t급 컨테이너선에서 100만명이 투약할 수 있는 1050억원 상당의 코카인 35㎏을 적발했다. 코카인은 칼리 카르텔의 상징인 전갈 문양이 그려진 포대에 쌓여 있었다. 마약 조직의 상징 문양을 포대마다 그려 놓은 배포가 놀랍다. 미국, 콜롬비아, 한국, 중국을 잇는 정기 항로란다. 마약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화물선이 기착하는 각국의 공조 수사도 불가피하다. 칼리 카르텔에 오염된 지 오래인 한국 마약 당국도 국제적 마약 수사의 안목을 높일 기회다. sol@seoul.co.kr
  • [길섶에서] ‘향수’/서동철 논설위원

    시인께는 송구하지만 정지용의 ‘향수’를 시집서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국어시험처럼 ‘괄호 안 채우기’를 해도 많이 틀릴 것 같지 않다. 순전히 김희갑이 작곡하고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부른 노래에 익숙해진 덕이다. 그러니 시 ‘향수’가 아니라 노래 ‘향수’의 가사를 아는 것이다. 이 노래의 ‘사철 발벗은 아내’ 대목이 가슴저민다. 집안의 선산에 가려면 옥천 구읍의 정지용 생가를 지나쳐야 한다는 인연도 있다. 옥천 향토연구가의 글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향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한다. 산소는 대청호에 놓인 제법 긴 다리를 건너가야 나타난다. 정지용 생가에서 자동차로 3분쯤의 거리다. 그런데 이 긴 다리가 바로 그 ‘실개천’에 놓였다는 것이다. 대청댐이 지어지고 물이 차오르면서 실개천은 망망대해에 버금가는 호수가 됐다. 옥천에서는 이 시인을 관광상품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호숫가에는 옥천 향수길이 생겼다. ‘지용밥상’ 개발 소식도 들린다. 갈비찜이나 옻불고기도 있는데 관광객 지갑을 열려면 필요한 메뉴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떠올라서 그런지 그 실개천에 흔했을 올갱이 넣은 강된장이 좋다. sol@seoul.co.kr
  •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립중앙박물관, 석조 문화재 고향에 보내자/서동철 논설위원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이 5년의 보존 처리 작업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며칠 전 들렸다. 20년 전쯤 법천사터를 찾았을 때 주변은 모두 논밭이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절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절터 초입의 당간지주도 동네 한복판에 숨어 있듯 자리잡고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찾은 법천사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체계적인 발굴조사로 옛 절터의 전모가 드러났고, 당간지주도 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부도권역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련된 조각을 자랑하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나란한 현묘탑 터의 빈자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마침내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이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현묘탑은 비운의 문화재다.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15년 돌아온 뒤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앞에 세워 놓았는데, 6·25전쟁 중 포탄에 맞아 지붕돌 위쪽이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탑을 1957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 옆으로 옮겼고 보수 작업 끝에 1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한강변에는 고려시대 대찰(大刹)의 옛터가 즐비하다. 경기 여주 고달사터와 강원 원주 법천사·거돈사·흥법사터, 충북 충주 청룡사터가 그렇다. 한결같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대부분 불교국가 고려의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은퇴하고 머무른 하산소(下山所)였다. 일대는 개경에서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유사시에는 물길로 빠르게 오갈 수 있었다.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은 ‘거물 스님’의 거처로 각광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편리한 남한강 수운은 역설적으로 이 일대 사찰의 석조 문화재가 일제강점기 집중적으로 수탈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법천사를 비롯해 앞서 거론한 사찰 가운데 청룡사를 제외한 다른 사찰은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부도며 탑비를 빼앗겼다. 고달사터 쌍사자석등과 흥법사터 진공대사탑 및 석관, 거돈사터 원공국사승묘탑 등이 그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의 귀향은 이 탑의 관리 주체인 문화재청의 결단 덕분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가장 높은 진정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실제로 원주시는 법천사터를 정비한 데 이어 지광국사현묘탑을 돌려받아 ‘완전체’가 되면 새로운 역사문화 관광지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반면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관을 채우고 있는 남한강변의 다른 석조 문화재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다. 법천사터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거돈사터는 2만 5000㎡ 남짓한 사역의 정비가 일찌감치 이루어졌다. 거돈사터에도 해동공자 최충이 비문을 지었다는 원공국사승묘탑비만 남아 있을 뿐 정작 승묘탑이 없는 것은 법천사와 닮은꼴이다.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에는 모조탑을 세워 놓았는데 기계자국 선명한 새하얀 탑이 폐사지 분위기와 어울릴 수는 없다. 흥법사터는 남한강 지류인 섬강변에 있다. 섬강은 법천사가 있는 흥원창 주변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흥원창은 강원 서부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실어 나르는 조창이다. 진공대사 충담이 머무른 흥법사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비문을 지었다는 진공대사 탑비가 역시 진공대사탑을 잃은 채 남아 있다. 이 밖에 남한강 하류인 양평 보리사터의 대경대사탑비와 상류인 제천 월광사터 원랑선사 탑비도 중앙박물관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은 이들 석조 문화재를 제자리에 보내면 훼손이 염려된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시만 해도 지광국사현묘탑을 제자리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는 방안과 전시관을 새로 지어 내부에 탑과 탑비를 옮기는 방법을 놓고 고심하고 있을 만큼 지방자치단체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다. 무엇보다 ‘너무도 귀중한 문화유산인 만큼 훼손되어선 안 되니 돌려줄 수 없다’는 논리는 서구 박물관이 약탈 문화재의 반환 요구를 거절할 때 쓰는 어거지일 뿐이다. 중앙박물관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서는 조만간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개성 경천사터 십층석탑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중앙박물관은 개성 남계원터 칠층석탑도 갖고 있으니 고민은 크다. ‘훼손 염려’ 논리로 붙잡고 있는 게 가능하겠는가. 석조 문화재를 과감하게 제자리에 보내는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어렵다면 처리 원칙이라도 마련해야 할 때다. sol@seoul.co.kr
  • [씨줄날줄] 문학작품 표절/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문학작품 표절/서동철 논설위원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백운소설’에는 선대 문인 김부식(1075~1151)과 정지상(?~1135)의 일화가 나온다.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이름을 나란히 했지만 서로 화목하지 못했다. 특히 정지상의 시에서 ‘절에서 불법을 설파하는 소리 그치고, 하늘빛 맑기가 유리 같네’라는 대목을 김부식이 좋아해 자기 시로 만들려 했지만 끝내 정지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정지상의 반응이 매우 완강하다. 김부식이 해당 표현을 자신의 시에 그대로 옮겼다가 정지상이 알게 돼 불화가 더욱 깊어진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정지상을 제거한다. 물론 전적으로 이 시구절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 작품의 표현 하나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이규보는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인이 정치인이고 정치인이 문인인 시대였다. 잊을 만하면 문학 작품의 표절 문제가 도진다.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무인도에서 글을 쓰지 않는 한 표절 시비가 일어날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길은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작가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때로 훔치고 빌리며 자기 고유의 텍스트를 실현하는데, 표절은 이런 과정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반면 시인이자 소설가 이응준은 ‘문학 헌법 제1조’라는 표현으로 표절 문제에 엄격한 것이 우리 문단의 전통이었음을 강조한다. 본시 한국 문단은 요즘처럼 표절에 관해 널널한 입장을 취하는 개념 없는 동네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헌법까지는 몰라도 현행 문학진흥법에도 ‘문학 관련 지식재산권 보호에 관한 사항’에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저작권법에는 표절을 더욱 직접적이고도 엄격하게 제재하는 조항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베껴 지난해만 다섯 개의 문학공모전서 입상한 사람의 ‘표절 행각’이 화제다. ‘2020 이병주국제하동국제문학제’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 ‘하동 날다’를 보자. 가수 유영석이 1994년 발표한 ‘화이트’에서 노랫말 네 줄을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가져와 한 줄을 덧붙였다. 이 한 줄도 직접 쓴 것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대상은 당연히 취소됐는데 당사자는 ‘표절’이 아니라 ‘인용’이라고 항변했다고 한다. 유명 문인의 표절 사건처럼 진지하게 볼 필요도 없다. 다만 어떤 법을 적용해 처벌할지는 궁금하다. 표절(剽竊)은 ‘도둑질하다’는 뜻이다. 형법에는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한다. sol@seoul.co.kr
  • [길섶에서] ‘대전 브루스’와 가락국수/서동철 논설위원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1959년 가수 안정애가 부른 ‘대전 브루스’의 시작 부분이다. 신세기레코드사 직원 최치수가 출장길 대전의 여관방에서 노랫말을 썼고, 작곡가 김부해는 불과 세 시간 만에 이 명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대전역 앞에는 대전 브루스 노래비도 세워졌다. 가요사 연구자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오후 8시 45분 서울역을 출발해 대전역에 0시 40분 도착하는 제33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것은 1959년 2월이었다. 이 목포행 완행열차는 대전역을 0시 50분에 출발했다. 그러다 대전역을 오전 3시 5분 출발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 1960년 2월이니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딱 1년만 존속했다. 목포행 완행열차는 당시 대전역에서 호남선 철길로 갈아탔다. 기관차 방향을 돌리는 데 필요한 10분이 가락국수를 탄생시켰다. 서대전역이 생겨 호남선 열차가 대전역을 지나지 않게 됐어도 한참 동안 명물로 대접받았던 플랫폼 가락국수집이다. 언젠가 슬금슬금 역사 내부 구석으로 옮겨간 가락국수집이 엊그제 보니 장사를 하지 않는다. 완전히 문을 닫은 것은 아닌 듯했지만, 대전역 가락국수가 다시 각광받기란 쉽지 않음을 알 것 같다. sol@seoul.co.kr
  • [부고]

    ●최경성씨 별세 서동철(서울신문 논설위원·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씨 부인상 17일 일산백병원, 발인 19일 오전 (031)910-7444 ●최규심씨 별세 신현호(신소아청소년의원 원장)·현준(한국신용정보원장)씨 모친상 최윤애·손정민(글로벌퓨쳐그룹 대표)씨 시모상 18일 동해병원, 발인 20일 오전 8시 (033)535-3001
  • [길섶에서] ‘광화문 스타일’ 빈대떡/서동철 논설위원

    어리굴젓 하면 서산 간월도 어리굴젓이 떠오른다. 그래서 충남 해안지역 방식의 굴젓인 줄만 알았다. 사전을 보니 ‘얼’은 ‘적다’거나 ‘모자란다’는 뜻이다. ‘얼간’은 소금을 적게 써서 절인 것이니, 어리굴젓은 얼간으로 담근 굴젓이다. 재개발되기 전 지금의 교보빌딩 뒤편에 빈대떡집이 몰려 있었다. 이 광화문 스타일 빈대떡의 특징은 굴젓과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빈대떡을 좋아하는 데다 어리굴젓도 좋아해서 광화문 빈대떡 거리가 헐리고 나서 종로 르메이에르빌딩으로 옮겨 갔던 청일집에 종종 갔다. 그런데 요즘은 빈대떡에 올려 먹는 굴젓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옛날 자그마한 자연산 굴로 담근 어리굴젓은 밥에 올려도, 빈대떡에 올려도 간이 맞았다. 하지만 큼지막한 양식굴로 담근 굴젓과 빈대떡 한 입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가, 맛있는데…. 청일집이 다시 연신내로 이전한 지도 2년이 넘었단다. 가겟세를 올려 달래서 아예 집 근처로 갔다는 것이다. 교보 뒷골목 시절 청일집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재현돼 있다. 하지만 ‘굴젓 빈대떡’이 이 집의 명물이었다는 사실은 박물관에 가도 알 수가 없다. 그게 모든 박물관의 고민이자 한계지만….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친구들과 연신내에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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