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붓한 가족문화공간 없나요-20일 문화의 날 / 문화현실 진단
그동안 우리 문화예술은 크게 성장했다.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인 문화예술인들이 배출됐고,매일같이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각종 공연이 줄을 잇는다.그러나 이같은 ‘문화예술의 르네상스’가 아직은 서울같은 일부지역만의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또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도 가족들과 좋은공연을 즐기기는 아직도 쉽지 않다.20일은 28번째 맞는 문화의 날이다.
이를 계기로 ‘가족중심의 공연문화’로 가는 길을 다시 생각해본다. 서울에는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이라는 두 개의 국제적인 규모의 공연장이 있다.이에 대해 서울의 인구와 우리나라의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대형공연장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행정구역상의 서울특별시만 떼어놓고 보면 옳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전제부터가 달라져야한다는 지적이 우세하다.기존의 위성도시들이 고밀도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도시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어 서울과 주변도시 사이의 ‘심리적 경계’는 없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신도시에 살면서 자신이 ‘지방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문화공간 문제는 인구 1,200만명인 서울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2,000만명이 넘는 ‘수도권’이라는 초거대도시를 상정하고 접근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초거대도시의 문화공간의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공연장까지의 이동시간을 물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의 조사 결과는 문제의 핵심을잘 보여준다. 조사는 지난 8월 한달 동안 서울시내 공연장을 찾은 1,000명의관람객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조사 결과 30분 이내에 도착했다는 사람이 14.0%,30분 이상 1시간 안에 도착했다는 사람은 47.0%였다.반면 1시간 이상 2시간 안에 도착했다는 사람이33.3%나 됐고,2시간 이상 걸렸다는 사람도 5.8%였다.40%에 가까운 사람들이공연을 보기위해 공연시간의 2배 이상을 길거리에 투자했다는 얘기다.그러나 이 수치도 공연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 관람을 아예 포기한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이처럼 공연장까지의 거리가 멀어지면 필연적으로 가족단위의 관람객은 찾아가기 힘들다.앞의 조사에서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을 보아도 10대가 20.4%,20대가 50.4% 등 10∼20대가 대다수를 차지한 반면 30대는 14.1%,40∼50대는 15%에 불과했다.실제 30∼50대,특히 주부들은 가족단위의 공연관람을 매우절실히 원하고 있다.그럼에도 공연예술은 현실적으로 학생층이나 일부 전문직 젊은이들의 전유물에 가깝다는 현실을 이 조사는 보여준다.
문화정책개발원의 장미진연구원은 “많은 사람들은 저녁식사 시간 이후에가족과 함께 공연을 보고 싶어한다”면서 “지역민이 가족과 함께 즐길 수있는 문화거점을 이제 시·군·구의 문화회관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각 지역축제에 참여한 사람은 전체주민의 28.6%에 이르렀고,참여만족도도 5점 만점에 평균 3.17을 기록하는 등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게다가 문화예술의 활동공간을 지역단위로 넓혀가는 것은 주민의 문화향수를 높이는 결과를 낳을 뿐 아니라,예술인들의 창작의식을 높이는 데도 한몫을 한다는 설명이다.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는 “지방자치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이후 각시·도와 시·군·구가 경쟁적으로 공연장을 확보하여 이제 문화거점을 지역으로옮기는 데 따른 공간의 문제는 크지 않다”고 말하고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누구로 하여금 그 공간을 운영하도록 하느냐”라고 단언했다.
지역민의 욕구를 파악하여,지역 특성에 맞는 공연을,그것도 중앙에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손을 빌지 않고는 어렵다.특히 전문인력이 공연장을 운영하게 되면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보듯 재정자립도도 높여 자치단체 재정에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지역문화공간을 가족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 공간마련과 함께 인력양성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KBS교향악단·서울시향 연주회 KBS교향악단과 서울시교향악단의 이른바 ‘원 프로그램,투 콘서트’는 공연장 거리가 멀어 연주를 즐기기 힘든 관객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시도라는 점에서 바람직스럽다.
KBS가 한 프로그램으로 두 차례 연주회를 갖는 것은지난 91년 KBS홀 개관이 계기가 됐다.KBS교향악단은 이후 모든 정기연주회를 목요일에는 여의도 KBS홀,금요일에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갖는다.
서울시향은 지난 7월 처음 그 뒤를 따랐다.8월에 이어 11월에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에서 같은 프로그램으로 각각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서울시향은 내년에는 6차례의 정기연주회를 이같은 방식으로 갖기로 했다.KBS와 서울시향은 이같은 시도로 고정 팬을 두배 가까이 늘리는 효과도보고 있다.
사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향악단은 대부분 한 프로그램으로 2∼4차례씩 연주한다.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한 연주장에서 모두 소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반면 KBS교향악단이나 서울시향은 청중에 대한 서비스라는 측면이 강하다.공연장의 거리가 멀어 어려운 가족관람도 가능케한다.
그런 점에서는 서구의 교향악단 보다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KBS교향악단의 관계자는 “한 프로그램으로 두차례 연주하게 된 데는 많은비용을 들여 좋은 지휘자와 협연자를 데려오는정기연주회를 한차례 연주로끝내는 것이 아까운데다,조금이나마 보완하여 두번째는 더 좋은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뜻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무엇보다 공연장이 너무 멀다는 청중들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KBS홀 연주가 강서·영등포·은평·마포·서대문 등 강북지역,나아가 부천·인천·김포지역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면,예술의전당은 강남·강동지역은 물론 성남·과천·안양·수원 등지의 주민들을 위한 서비스”라면서 “앞으로 강북지역 중심부에 좋은 연주장이 들어선다면 한 프로그램으로 세차례 연주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동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