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대현.호연재 부부의 사대부 한평생/사대부는 쌀 꿀때도 ‘위풍당당’
“호연당 위에 호연한 기운이 있어/물과 구름 사립문에서 호연함을 즐기네/호연함이 비록 좋으나 곡식에서 생겨/삼산태수님께 쌀을 빌리니 또한 호연하구나.”
한마디로 쌀을 좀 꾸어달라는 얘기다.안주인 호연당(浩然堂)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이렇듯 당당하게 시를 지어 보냈다.‘마음이 넓고 태연하다.’는 당호가 빈말이 아니다.바깥주인 소대헌(小大軒)도 다르지 않다.‘큰 테두리만 보고,작은 마디에 얽매이지 않는다.’(見大體不拘小節)는 자호대로 대범하게 한 평생을 살았다.
‘소대헌·호연재 부부의 사대부 한평생’(푸른역사 펴냄)을 읽다 보면 화려한 삶이 아닌,아주 절제된 ‘귀족적인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다음 순간 조선시대 사대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은 소대헌과 호연당 부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18세기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생과,사대부 집안의 일상을 재구성한 것이다.혼인부터 집 장만,가족 구성,교육,놀이,관직 생활,문학 생활,죽음과 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자료와 관련 기록을 덧붙여 11개 장으로 정리했다.
지은이 허경진은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처음엔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제자에게 호연재 김씨의 한시(漢詩)를 학위논문의 주제로 정해 주었다.그런데 제자가 찾아간 대전 송촌동 종손집에서 자료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호연재의 한시 연구가 아니라,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생활사를 연구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했고,호연재의 옛집과 그들의 유물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선비 박물관까지 드나들게 됐다.
소대헌 송요화(1682∼1764)는 대사헌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으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정2품)에까지 오른 문신이자 학자이다.그의 부인 호연재 김씨(1681∼1722)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고손녀로,수많은 시문을 남겨 최근에는 17∼18세기 여성 문학사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부만 감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후손들도 계속 문집을 남겼으며,고소설도 여러 종류를 필사하여 읽었다.여성들은 음식 솜씨를물려받아 요리책을 만들었다.200권이 넘는 책력도 남겼는데,그날그날 중요한 사항을 기록했다.200년치의 생활일기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본 순간,허경진 교수는 “잠시 숨이 멎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집안은 소대헌과 호연재 같은 옛 집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물론,쌍륙 같은 놀이도구부터 약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활용품들도 간직하고 있다.이것들은 299컷의 사진으로 담겨 소대헌 부부의 구체적인 삶을 눈으로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사진 김성철.1만 3000원.
서동철기자 dcs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