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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가 걸어온 길] (9)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하)

    [명사가 걸어온 길] (9)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하)

    백기완(80)의 마음은 찰랑거린다. 가득 차서 찰찰찰 흘러넘친다. 부조리에 대한 울분만은 아니다. 그는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이라고 했다. 시와 이야기, 영화를 빼놓고 백기완의 삶은 성립하지 않는다. 시집만 네 권을 썼다. 그는 “샘물이 콸콸 넘쳐서 메마른 땅을 적시듯, 엄마가 우물에서 뜬 물동이 찰찰 넘치듯 찰랑찰랑 넘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첫 시는 어린 시절 냉이의 싹을 보고 썼다. 나물 캐던 어머니는 “비바람을 이기고 살아남는 목숨들, 너무나 수북해 보듬어 주고 싶은 싹에는 손을 대는 게 아니다”라며 싹은 뽑지 않았다. 시심(詩心)이 싹텄다. 그는 “그런 걸 보고 어떻게 시가 안 나오겠느냐”고 했다. 예술을 향한 그의 사랑은 민초(民草)에 대한 사랑만큼 깊다. 찰랑거림의 시작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그의 민중 미학을 이루는 알맹이다. 그도 자신이 이야기꾼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좌중은 그의 이야기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자지러지거나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그 화산 같은 입심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쌀이 떨어졌어요. 아무리 밥 달라, 떡 달라 해봐야 어떡해요, 쌀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왜놈들한테 매를 맞고 돌아가셨지요. 쫄딱 깨진 아픔과 배고픔에 내가 만날 우니까 엄마랑 할머니가 달래느라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배고픈 민중을 닮아 있다. 학교에서 배운 글보다는 거리에서 체득한 말에 가깝다. 이야기의 주체도 ‘머리’가 아닌 ‘몸’이다. 몸으로 사는 민중을 이해하지 않고 그의 민중 미학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가진 거라고는 알통밖에 없는 무지렁이 민중들이 뭘 흘려요. 땀밖에 흘릴 게 더 있겠어요. 흘린 땀은 땅으로, 자연으로 갑니다. 흘러서 넘치는데 네 것 내 것이 없지요. 자본주의 문명이 몸으로 일한 사람들의 열매까지 뺏어 먹는 것과는 달라요. 땀 흘리는 사람들은 병들고 배고파서 죽고 약 올라서 죽고 대들다가 반역자로 몰려서 죽어요. 이런 민중들이 꾸는 꿈을 ‘바랄’이라고 합니다. 이 바랄의 세계가 이야기입니다. 온몸으로 일구지 않으면 바라던 사람이 죽는 게 바랄이에요.” 그가 땅과 대륙을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땅은 민중들의 한 자락 꿈인 동시에 몸으로 일구는 대상이다. 민중은 땅을 일구듯 이야기를 일군다.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는 백기완을 두고 “대륙적 정서를 가졌다”고 평했다. 그는 ‘저치 가는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아무리 일을 해도 살 수 없는 무지렁이들이 거역의 등불을 치켜들었습니다. 조정에선 그 들불을 끄려고 오랑캐를 끌어들였지요. 뿔대 돋힌 젊은이 6만명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같이 압록강을 건너가요. 이 땅별(지구)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아니에요. 그 자리에 사랑과 나눔과 영원을 상징하는 진달래와 밤나무,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가요. 남이 뚝 자른 손바닥만 한 땅에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그 안에서도 ‘나는 몇 평이다’, ‘나는 몇 뙈기다’ 하면서 ‘짜나리’(좀팽이)처럼 배배 꼬지 않아요. 그 넓은 대륙의 마음이 ‘저치’예요.” 민중은 몸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이야기의 고유한 성질로 ‘말림’을 꼽았다. 말림은 소리꾼이 몸짓으로 상황을 연출하는 ‘발림’과 가깝다. “소설은 머리로만 쓰지만 이야기는 온몸으로 한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소설과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눈빛도 이상하고 손가락도 막 움직이고 발가락도 쑤시고. 어떻게 보면 깡패 같기도 하고 우악스럽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춤추는 것 같기도 하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것, 그게 말림이에요. 말림은 듣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져요. 뼈대는 그대로지만 정서는 달라지는 거예요. 뒷골목에서 이야기하느냐 시장 바닥에서 이야기하느냐, 듣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게 민중들의 이야기예요.” 백기완은 “재워주고 밥 준다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명동의 뒷골목에서 이야기판을 벌이며 술을 얻어 마시기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심이 이야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기주의와 정신적 허무주의가 판을 쳤다. 그 막판에 ‘용이냐, 이심이냐’를 들이대고 싶었다”고 했다. “이심이는 착하고 힘없는 바닷물고기예요. 힘센 물고기들에게 부대끼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아요. 용왕을 찾아갑니다. 용왕은 ‘힘센 놈이 힘없는 놈을 먹는 게 용궁의 법도’라며 ‘저놈 잡으라’고 내쫓아요. 오갈 데 없어진 이심이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하지요. 싸우다 보니 온몸에 쇠비늘이 하나둘 생겨나요. 다시 용왕에게로 쳐들어가니 어이쿠 놀란 용왕이 팍삭 상어로 변해 버려요. 그 대단한 줄 알았던 용왕이 고작 상어라니…. 용왕을 물리친 이심이는 힘없는 물고기들을 위한 ‘벗나래’(세상)를 만들고 함께 살아갑니다.” 그는 “썩은 수챗구멍에서 구슬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용꿈만 꾸는 것은 출세주의의 환상”이라면서 “그 환상을 깨부수고 부정과 싸우는 이심이에게서 배우자는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모질게 고통받다 벼랑 끝에서 삶을 이겨 낸 장산곶매의 또 다른 변주 같다. 민중은 그의 영화에서도 중요한 소재다. 그가 영화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영화야말로 오늘의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단돈 만원’, ‘대륙’, ‘쾌지나 칭칭나네’ 등 영화 대본도 3편 썼다. 그가 영화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계기도 민중의 활력 때문이었다. “1954년 경기도 여주에 농민 운동을 하러 갔어요. 농부들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웬 아낙네가 딸이랑 절구질을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고. 아낙은 서른 서넛, 딸은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둘 다 젖가리개가 없어요. 어머니는 서른서넛밖에 안 돼도 그때는 애 키운 뒤니까 젖이 출렁출렁, 딸은 탱탱하고 포동포동해요. 둘이 번갈아가면서 쿵, 쿵, 쿵, 쿵 맞절구질을 하는데, 그 역동성에 깜짝 놀랐어요. 쿵, 쿵 절구를 찧을 때마다 출렁이는 음악적인 그림. 내가 그 모습을 잡아야 한다고 그랬어요. 이 땅의 농기구가 움직이는 모습을 다 영상으로 꾸려보자 했는데 그때 뭐 카메라가 있어 필름이 있어 돈이 있어. 그래서 대신 ‘농민’이라는 시를 썼어요.” 1965년 한·일 협정 때도 백기완은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 독립군을 도와 일제에 맞서 싸우다 숨진 어린 엿장수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드물었던 16㎜ 카메라를 동성영화사에서 빌렸다. 백기완은 “어떤 놈이 술 먹겠다고 카메라를 몰래 가져가 술집에 잡혀먹는 바람에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영화의 꿈은 깨졌지만 지금도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젊었을 때는 배는 고프고 할 게 있나, 나 혼자 영화 이론 책을 뒤적거리고 그랬어요. 다시 영화를 만든다면 ‘들쑥이’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들쑥이는 열일곱 먹은 어여쁜 춤꾼인데 깡패들이 잡아다 양놈한테 팔아버리려고 하거든. 순결을 지키려고 끝까지 싸우다가 두 다리가 부러져요. 그래도 ‘짓밟혀도 일어나 이 세상을 휘젓는 춤을 다시 빚으리라’ 하며 온몸으로 춤을 춰요.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눈물이 나는 실화예요. 사람의 몸짓, 말림이 뭔지 보여주려고 해요. 지금은 몸이 아니라 다 돈으로 움직이잖아. 들쑥이의 일생을 영상 언어로 꾸리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버릴 수가 없어요.” 길을 돌아 영화에서 시로 다시 온다. 백기완은 “참된 예술은 찰(시)밖에 없다. 영화는 찰을 오늘의 예술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백기완의 예술 세계에서 시와 이야기와 영화는 환상(環狀)을 이룬다. 그는 “시는 걸레 짜듯 쥐어짜는 게 아니다. 사람의 역사적 삶에서 나온다”고 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시’라는 말을 압니까. 시라는 말도 모르고 써본 적도 없어요. 민중들은 사는 게 괴로워요. 혼자만 울어요. 샘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샘이 곧 자기 땀샘이라. 자기가 보여요. 뭔가 퍼뜩 끓어 넘쳐요. 그게 시예요.”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감옥에서였다. “배알이 튕겨져 나올 만큼 모질게 맞았다”는 차디찬 옥에서 무슨 뜨거운 것이 그리 넘쳤을까. 그는 “굳이 가장 아끼는 시를 말하라면 감옥에서 군사 양아치들한테 매를 맞고 죽음의 숨결을 먹으로 삼아 썼던 ‘묏비나리’와 별 볼품은 없지만 ‘아, 나에게도’를 꼽겠다”고 했다. 백기완은 온몸을 들썩이며 감옥에서 처음으로 쓴 시를 읊었다. 모이면/ 논의하고 뽑아대고/ 바람처럼 번개처럼/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중략) // 추렴거리도 없이 낚지볶음 안주 많이 집는다고/ 쥐어박던 그 친구가 좋았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헐벗고 굶주려도/ 결코 전전하지 않았다 (중략)// 그렇다 내 이십대 초반/ 민족상잔 직후의/ 강원도 어느 화전민 지대였지/ 열 여섯쯤 된 계집애의/ 등허리에 핀 부스럼에서/ 구데기를 파내주고/ 우리는 얼마나 울었던가 (중략)// 백번을 세월에 깎여도/ 나는 늙을 수가 없구나/ 찬바람이 여지없이 태질을 한듯/ 다시 끝이 없는 젊음을 살리라/ 구르는 마룻바닥에/ 새벽이 벌겋게 물들어 온다 (‘젊은 날’ 중) 그는 오랜 시간의 인터뷰 중 몇 번이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 나에게도 회초리를 들고 네 이놈 내려칠 어른이 한 분 계셨으면”(‘아, 나에게도’) 하고 외기도 했다. “사람은 늘 그리움으로 산다.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사람 이상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그리움이 예술이고 문화”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야기를 마치는 그의 마음은 가만히 찰랑인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이 지금은 다 뭘하는지…. 내가 죽는다 산다 해도 전화 한 번 없네. 그런 면에서 보면 내 이야기꾼의 삶은 실패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좋은 이야기를 하고 그걸 듣는다고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가슴에 심어주는 게 중요하지 반드시 성공하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의 역사는 아닙니다. 심어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 사상이고 이야기예요.”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주요 작품 <시집> 1982년 젊은 날 1985년 이제 때는 왔다,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공저) 1989년 백두산 천지 1996년 아, 나에게도 <극본> 1994년 단돈 만원 1995년 대륙 1996년 쾌지나 칭칭나네 <이야기·소설> 1991년 이심이 이야기 2004년 장산곶매 이야기 2009년 따끔한 한 모금 2012년 하얀 종이배 (시나리오 작업 중)
  • 학교 신축업자, 교구업체에 11억 리베이트 챙겨

    임대형 민자사업(BTL) 방식으로 학교를 지으면서 교구 납품업체로부터 뒷돈을 받아챙긴 12개 건설사 임직원들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동부지검 형사5부(부장 이원곤)는 교구 납품업체에서 뒷돈을 받은 건설업체 I사 부장 박모(46)씨 등 4명을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1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들에게 돈을 건넨 책걸상 납품업체 J사 대표 김모(47)씨 등 2명은 배임증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박씨 등은 2008년 6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경기도 제2교육청이 BTL 방식으로 발주한 57개 초·중·고 신축 공사 현장에서 J사를 교구 납품업체로 선정하는 대가로 11억원 상당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 등은 BTL 방식이 발주기업에 광범위한 하도급 업체 선정 자율권을 주고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J사를 선정한 뒤 교구납품액의 8~12%는 리베이트로 돌려받았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J사의 횡령 사건을 수사하던 중 첩보를 입수, 지난 2월 I 건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 관계자는 “건설업계의 리베이트 관행이 교구 납품에까지 퍼져 있음을 확인한 첫 번째 사례”라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BTL 사업에 정부의 적극적인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대선기간 정치개입했는데 선거법 위반 아니다?… 부실수사 논란

    대선기간 정치개입했는데 선거법 위반 아니다?… 부실수사 논란

    “정치에 관여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4개월 넘게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해 온 경찰이 내린 결론이다. 부실 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특별수사팀을 꾸려 본격 수사에 나선 검찰이 경찰 수사를 뛰어넘는 성과물을 낼지 주목된다.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은 18일 “국정원 직원 김모(29·여)씨, 이모(39)씨와 일반인 이모(42)씨 등이 인터넷상에 올린 게시글에 대해 국정원법상 정치 관여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으나, 공직선거법상 선거 관여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박빙의 선거 정국에서 국정원 직원이 정치 관여글을 썼는데 그게 대선 개입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서장은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은 특정 정당·정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 찬양하는 것으로 이들의 행위와는 구분된다”고 반박했다. 국정원법 제9조(정치관여 금지)는 ‘특정 정당·정치인에 대해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런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정치인에 대해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민주통합당에 의해 고소당한 국정원 심리정보국장 A씨는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이 서장은 “두 번에 걸쳐 소환조사 통보를 했으나 불응해 기소중지 의견으로 보냈다”면서 “아직 조사를 하지 못해 특정 혐의가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국정원 직원의 부적절한 정치 개입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정작 조직적 개입 여부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채 ‘민감하고 뜨거운 감자’를 검찰에 넘긴 셈이다. 4개월을 끌어왔지만 사건의 실체는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실 수사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12일 수사에 착수한 이후 줄곧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것 아니냐는 눈총에 시달려 왔다. 수사를 시작한 지 나흘 만인 16일 오후 11시에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김씨의 하드디스크 두 대를 분석한 결과 댓글 흔적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사실상 국정원 직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선 후 김씨가 150여개의 정치 관련 글을 쓴 사실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 아래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경찰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이 서장은 “지난해 12월 16일 첫 발표는 하드디스크 분석 결과 대선 관련글이 없다고 했던 것”이라면서 “그때 발표와 오늘 발표가 달라졌다고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겉핥기, 눈치보기 수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심리정보국장에서 원세훈 전 원장으로 이어지는 정치 개입의 몸통에 닿지 못한 절반의 수사”라면서 “국정원도 김씨의 행위를 통상적 업무라고 인정한 데다 원장의 지시사항까지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황까지 나왔는데 당연히 조직적 개입 여부를 따져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적 고려가 작동한 수사 결과”라면서 “국가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면 박근혜 정부에 부담이 되니 개인 비리 차원으로 축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윗선의 지시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채 황급히 결론을 내린 셈”이라면서 “이 정도 수사로는 댓글 행위의 실체적 동기나 목적, 결과를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국정원 댓글’ 수사결과 발표] 대선기간 정치개입했는데 선거법 위반 아니다… 부실수사 비판

    [‘국정원 댓글’ 수사결과 발표] 대선기간 정치개입했는데 선거법 위반 아니다… 부실수사 비판

    “정치에 관여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4개월 넘게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해 온 경찰이 내린 결론이다. 부실 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경찰이 선거법 위반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파장 확산을 우려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어 향후 검찰 수사가 주목되고 있다. 이광석 서울 수서경찰서장은 18일 “국정원 직원 김모(29·여)씨, 이모(39)씨와 일반인 이모(42)씨 등이 인터넷상에 올린 게시글에 대해 국정원법상 정치 관여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으나 공직선거법상 선거 관여로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박빙의 선거 정국에서 국정원 직원이 정치 관여 글을 썼는데 그게 대선 개입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서장은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은 특정 정당·정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 찬양하는 것으로 이들의 행위와는 구분된다”고 반박했다. 공직선거법 제9조(공무원의 중립의무 등) 1항은 ‘공무원 기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선거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의 행사 기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씨 등은 지난해 8월부터 ‘오늘의 유머’ 등 사이트 3곳에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고 야당, 시민단체, 전교조, 버스노조를 비판하는 등 대북 감시업무와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정치적 글 120여건을 썼다. 내용 중에는 대선의 핵심 이슈였던 4대강과 국가보안법 등도 있어 공선법 적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경찰은 과거 비슷한 사항에 대해 공선법을 적용한 적이 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당시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며 반대 사진전, 자전거 대행진, 서명운동 등 10차례 관련 활동을 했던 수원환경운동연합 장동빈 사무국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었다. 경찰은 당시 장씨가 지방선거 쟁점과 관련해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칠 의도가 있었다며 기소 의견을 냈다. 장 국장은 1, 2심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이 서장은 당시 사례를 묻는 취재진에게 “법리와 판례를 모두 살폈지만 이들의 행위가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경찰로서는 자칫 공선법 위반으로 판단했다가 생길 수 있는 정치적 파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지난 선거전이 왜곡됐다며 야당 등에서 대선 무효 등을 주장할 수 있는 정치적 시빗거리를 차단하려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개입 여부는 전혀 밝히지 못한 채 ‘민감하고 뜨거운 감자’를 검찰에 넘겼다.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 ‘겉핥기, 눈치 보기 수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심리정보국장에서 원세훈 전 원장으로 이어지는 정치 개입의 몸통에 닿지 못한 절반의 수사”라면서 “국정원도 김씨의 행위를 통상적 업무라고 인정한 데다 원장의 지시사항까지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황까지 나왔는데 당연히 조직적 개입 여부를 따져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치적 고려가 작동한 수사 결과”라면서 “국가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면 박근혜 정부에 부담이 되니 개인 비리 차원으로 축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박주민 변호사는 “윗선의 지시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채 황급히 결론을 내린 셈”이라면서 “이 정도 수사로는 댓글 행위의 실체적 동기나 목적, 결과를 분명히 밝히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사회 약자 구제한다던 인권위 내부 비정규직은 투명인간?

    국가인권위원회 기간제·무기계약직 노조가 오는 18일 출범한다. 15일 노조 측은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고 차별 구조를 개선한다는 인권위가 정작 내부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았다”면서 “인권위는 기간제 노동자 사용을 당연시하면서 비정규직 제도가 가진 한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각종 수당 등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 처우 개선에 소극적으로 일관했다”고 밝혔다. 인권위 전체 직원의 약 10%를 차지하는 19명의 기간제·무기계약직 직원은 인권상담과 사무보조, 운전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분회로 설립되는 노조에는 이중 14명이 참여한다. 정미현 노조 임시 분회장은 “운전원이 정규 직원들과 같은 일을 해도 수당이 지급되지 않거나 기간제 직원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기존 무기계약직들의 임금이 깎이는 등 다양한 차별이 계속돼 왔다”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 실태 조사를 한다면서 정작 임금 협상 권한조차 없는 기간제 직원들의 실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의견을 묻지 않았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인권위는 이에 대해 “현재 비정규직 공무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의견을 수렴 중”이라면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일본산 식품이 안전?” 시민이 직접 방사능 감시

    “일본산 식품이 안전?” 시민이 직접 방사능 감시

    시민과 환경단체가 참여하는 민간 방사능 감시기구가 출범했다. ‘한국은 방사능 안전지대’라는 입장만을 되풀이하는 정부만 믿고 있을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두레생협연합회, 환경운동연합 등 7개 단체가 설립한 시민방사능감시센터는 15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생활속 방사능에 대한 시민들의 걱정이 깊어졌지만 정부는 늘 불안을 잠재우기에만 급급했다”면서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의 입장에서 방사능 위험을 감시하겠다”고 밝혔다. 센터는 기금 1억 5000만원으로 마련한 방사성 핵종 분석센터를 통해 오는 6월부터 본격적인 모니터링 활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본산 수입 농수산식품과 원전 주변 토양 등에 포함된 세슘137, 요오드131 등 방사능 오염 물질을 조사하고 결과를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한다. 시민들이 조사를 의뢰한 식품과 생활용품의 방사능 수치를 분석하고 방사능 위험과 관련한 교육과 정책 제안 사업도 추진할 방침이다. 이 단체의 출범에 대해 일부에서는 “민간 활동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재기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아스팔트 방사능 검출 등 민간 차원의 방사능 모니터링도 꾸준한 성과를 내왔다”면서도 “정부 측의 발표라는 이유로 무조건 불신하기보다는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서로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주소 한글자 차이…‘우리민족끼리’ 패러디 사이트 등장

     북한의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풍자한 국내 사이트가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들을 ‘북조선 민주화위원회 우리민족끼리’(북민위)라고 밝힌 우익 인사들은 지난해 5월 북한 웹사이트(www.uriminzokkiri.com)와 주소까지 비슷한 ‘우리민족끼리’ 사이트(www.uriminzokiri.com)를 만들었다. 게시판 등 사이트 구성도 북한 웹사이트와 거의 똑같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게시판에 올린 공지사항을 통해 “이곳 우리민족끼리는 북조선 조평통이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를 역으로 패러디하여 김일성부터 이어져 온 북한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사이트입니다. 이곳에서만큼은 얼마든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 개XX들을 욕보이고 비판해도 좋습니다”라고 밝혔다.  사이트는 게시판과 자료실, 독자 투고란 등으로 구성됐다. 운영진과 이용자들 모두 ‘공화국의 역적패당 김정은’, ‘위원장 동지’, ‘남조선 력사’ 등 북한 말투를 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메인 화면에 ‘오늘은 김정일 개XX 죽은지 ○○○일째’라는 문구나 ‘민족의 원쑤! 돼정은(돼지 김정은)을 때려 죽이자’는 배너 광고를 띄워 북한에 대한 반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사진과 관련 기사 등도 제공한다. 지금까지 197만여명이 방문했으며, 지난 9일에만 2만 40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지난 3월에는 조갑제닷컴 등 우파 성향의 사이트들과 함께 해킹 공격을 당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2차 피해 못막는 권고 덩달아 증가

    2차 피해 못막는 권고 덩달아 증가

    중증 청각장애인 A씨는 2010년 한 회사의 신입사원 채용에 지원하면서 장애인 차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회사가 지원 자격으로 정한 토익점수 600점이 A씨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점수였던 것이다. 600점은 청각장애인인 A씨가 읽기 영역에서 만점(495점)을 맞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점수였다. 시각장애인 B씨 등 5명은 8개 종합병원에 진료기록 사본 발급을 요청했지만 활자 인쇄본만 제공받았다. 병원 측이 “병원에 점자 프린터가 없다”며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점자 진료기록 발급을 거부한 것은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막기 위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11일로 시행 5주년을 맞았다. 2008년 시행 이후 인권위에 접수된 장애 차별 진정이 크게 늘어나는 등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에 대한 인권 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했지만 보완할 점도 적지 않다. 2001년 11월 인권위 설립 이후 법이 시행된 2008년 4월까지 653건에 머물던 인권위 장애차별 진정은 법 시행 이후 지난해 말까지 5230건으로 8배 이상이 됐다. 전체 차별 진정에서 장애차별 진정이 차지하는 비율도 20.4%에서 53.2%로 증가했다. 차별 영역별로는 교통수단이나 정보접근권과 관련한 재화·용역의 제공 및 이용에 대한 차별이 63.5%(3322건)로 가장 많았고, 장애인에 대한 괴롭힘(10.3%) 등이 뒤를 이었다. 인권위는 조사 대상이 된 2385건의 진정 중 1626건(68.2%)에 대해 개선을 권고하거나 합의를 돕는 등 일정 부분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광범위한 장애인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완할 점도 많다. 변경택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는 “권리구제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시정권고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지역 사무소에는 장애 전문 인력이 없어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즉각 분리하거나 보복 등 2차 피해를 예방하는 보호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지성 변호사는 “민사소송법 등 관련 법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취지를 따라가지 못해 개정이 필요하다”면서 “소수자 보호에 보수적인 재판부와 행정기관도 장애인 감수성을 가지고 권리구제에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우리민족끼리’ 패러디 사이트 등장

    북한의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풍자한 국내 사이트가 뒤늦게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들을 ‘북조선 민주화위원회 우리민족끼리’(북민위)라고 밝힌 우익 인사들은 지난해 5월 북한 웹사이트(www.uriminzokkiri.com)와 주소까지 비슷한 ‘우리민족끼리’ 사이트(www.uriminzokiri.com)를 만들었다. 게시판 등 사이트 구성도 북한 웹사이트와 거의 똑같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게시판에 올린 공지사항을 통해 “이곳 우리민족끼리는 북조선 조평통이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를 역으로 패러디하여 김일성부터 이어져 온 북한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사이트입니다. 이곳에서만큼은 얼마든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 개XX들을 욕보이고 비판해도 좋습니다”라고 밝혔다. 사이트는 게시판과 자료실, 독자 투고란 등으로 구성됐다. 운영진과 이용자들 모두 ‘공화국의 역적패당 김정은’, ‘위원장 동지’, ‘남조선 력사’ 등 북한 말투를 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메인 화면에 ‘오늘은 김정일 개XX 죽은지 ○○○일째’라는 문구나 ‘민족의 원쑤! 돼정은(돼지 김정은)을 때려 죽이자’는 배너 광고를 띄워 북한에 대한 반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사진과 관련 기사 등도 제공한다. 지금까지 197만여명이 방문했으며, 지난 9일에만 2만 40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지난 3월에는 조갑제닷컴 등 우파 성향의 사이트들과 함께 해킹 공격을 당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의족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왜 ‘몸’이 아니라는 건가요”

    “의족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왜 ‘몸’이 아니라는 건가요”

    “비장애인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한쪽 다리만 가지고는 일어서는 것도, 걷는 것도, 앉는 것도 고통입니다. 의족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의족은 왜 몸이 아니라는 건가요.” 양태범(68)씨가 한쪽 다리를 절단한 것은 1995년이었다. 일을 마치고 오토바이로 귀가하던 중 큰 교통사고가 났다. 오른쪽 허벅지 아래를 잘라냈다. 눈앞이 캄캄했다. 플라스틱 다리의 이물감이 생경했다. 자식 생각에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고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취업을 부탁한 복지관과 구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몸으로 뭘 하겠느냐”는 냉소뿐이었다. 목숨을 끊을 생각도 여러 차례 했다. 어렵게 지하철 매점 등에 일자리를 구했다가 2009년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됐다. “멀쩡한 사람 두고 왜 장애인을 쓰느냐”는 일부 주민들의 눈총에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2010년 12월 폭설이 내렸다. 눈을 치우다가 미끄러져 의족이 망가지고 두 다리도 다쳤다. 치료가 필요했지만 의족을 고치는 동안에도 목발을 짚어가며 일했다. ‘괜히 장애인을 고용해서 불편하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아파트 동대표가 양씨를 위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공단은 2011년 “의족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라며 승인을 거부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양씨는 “두 시간마다 아파트를 순찰할 때 의족을 사용해 업무에 필수적인 데다 의족은 실질적인 다리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으로 다툼을 이어갔지만 1, 2심 재판부의 의견도 공단과 같았다. 재판부는 “의족은 탈부착이 비교적 쉽고 신체의 기능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판단했다.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제기했지만 역시 졌다. 그러나 재활의학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남세현 한신대 재활학과 교수와 김윤태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교수 등은 ▲보건복지부 고시와 국제표준기구(ISO) 등이 의족을 ‘신체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는 점 ▲안경이나 목발처럼 쉽게 탈부착할 수 있는 기구와는 달리 고도로 훈련된 의학 전문가를 통해 신체에 직접 연결해서 사용하지 않고서는 생활이 불가능한 점 등을 들어 의족을 신체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양씨는 지금도 경비원으로 24시간 격일 근무를 하고 있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도, 재판에 졌을 때도 ‘내 복이구나’ 싶었어요. 진다고 어쩌겠어요, 밑바닥 사람들은 속만 타고 마는 거지. 그런데 저는 장애인이라고 수당 받아먹으면서 사는 게 편치 않아요. 내 몸으로 벌어서, 내 힘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한수원, IAEA 월성1호기 보고서 축소”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해 실시한 월성 1호기에 대한 조사 보고서에서 안전에 관한 핵심 내용을 축소해 발표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수원은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환경운동연합은 8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IAEA가 지난 2월 내놓은 ‘월성 1호기 장기운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IAEA가 월성 1호기의 핵심 안전 문제 13개를 지적한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지적 사항을 해결하지 않고 수명 연장만 강행하는 것은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한수원은 지난해 6월 IAEA의 안전점검 중간결과를 발표하면서 “IAEA가 월성 1호기의 안전성을 ‘국제적인 우수 사례’라고 했다”고 홍보했지만 IAEA가 지적한 13개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IAEA는 보고서를 통해 ▲한수원이 개정된 2003년 안전성 평가 기준(14가지 항목)이 아닌 1994년 기준(11가지 항목)을 사용해 ‘원전 설계’와 ‘위험 분석’ 등 핵심 항목을 평가에서 뺀 점 ▲후쿠시마 원전 사태처럼 발전소 전체가 정전에 빠지는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안전성 평가를 진행한 점 ▲밸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냉각재 유실 가능성이 있는 점 ▲교체 부품을 대상으로 안전점검을 해 오래된 부품의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 관계자는 “환경운동연합의 주장은 보고서 전체 결과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13개 지적 사항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이 중 IAEA가 수명 연장 전에 개선을 요구한 4건에 대해서는 조치를 마쳤다”면서 “2003년 안전성 평가 기준에 포함된 3개 항목도 실질적으로는 검사 과정에서 모두 점검해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오·의역 논란’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영문본 이번엔 번역본 수정 논란

    광복회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기미독립선언서의 영문 번역본 교체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오·의역이 많다는 것이 이유다. 이 영문 독립선언서는 3·1 운동 당시 미국 동포들이 해외에 국내 상황을 알리기 위해 직접 번역한 것으로 사료의 역사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광복회 종로지회는 8일 “독립선언서 영문본의 새로운 번역을 위해 지난달부터 작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영어영문학 교수 3~4명에게 번역을 맡긴 뒤 수정본이 완성되면 광복회 명의로 서울시와 종로구, 문화재청 등에 번역본 수정을 청원하기로 했다. 지회 관계자는 “외국인도 많이 찾는 탑골공원에 오·의역본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국제적 망신”이라면서 “미주 한인 동포들이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지만 독립선언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탑골공원에 설치된 영문 번역본은 ‘슬프다’를 ‘기필코’(Assuredly)로 오역하는 등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원문의 품격을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100년 가깝게 지난 현재의 관점으로 사료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일부 오류가 있다고 해서 역사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면서 “현대적 번역을 추가해 새로운 조형물을 세우는 등의 절충안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사료의 역사성을 인정해 그대로 보존할 것인지 새로운 번역을 통해 원문을 잘 전달할 것인지는 자치구 등 지역사회가 논의를 통해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1억짜리 ‘인권위 상담버스’ 알고보니 직원용 이동버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 등의 이동 편의를 위해 도입한 ‘순회 상담버스’가 원래 취지와 달리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일 인권위에 따르면 상담버스는 도입 첫해인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11.2회만 상담을 위해 운행됐다. 전체 연평균 운행 횟수 55.8회 중 40여회 이상은 원래 취지와 다르게 이용됐다. 지난해의 경우 54회 운행 중 순회 상담은 7회에 그쳤고 나머지는 인권교육(22회), 국회 방문(17회), 위원회 행사(5회), 인권 현장 방문(3회) 등에 사용됐다. 인권위는 2006년 4월 약 3000만원을 들여 상담 버스를 도입했다. 국민이 어디서나 인권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구입과 개조 비용 등을 합쳐 1억원 넘게 들였다. 운용비도 연간 2000만원 정도 들어가고 있다. 인권위 관계자는 “부산과 광주, 대구에 지역사무소가 문을 열면서 순회 상담 수요가 줄어든 반면 지역사무소 출장 등 직원의 단체 이동 수요는 늘어났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다른 인권위 직원은 “인권위에는 순회 상담 버스 외에 업무용 승합차와 SUV 등도 있다”면서 “원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상담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호주서 한국 학생들 홈스테이 받다 한국에 푹~”

    “호주서 한국 학생들 홈스테이 받다 한국에 푹~”

    “한국에 대해 아는 건 기껏해야 한국전쟁 정도밖에 없었어요. 홈스테이 집주인으로 한국 대학생들을 만났던 게 한국에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됐죠.” 지난 2월부터 고려대에 머물고 있는 호주인 러셀 켈리(56)는 늦깎이 교환학생이다. 순전히 한국에 빠져들어 50대 중반에 만학도가 됐다. 학년으로 따지면 대학교 2학년이다. 7일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도 그는 대학 새내기처럼 고려대 점퍼와 티셔츠를 입고 왔다. 브리즈번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켈리가 한국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09년이었다. 어학연수를 위해 호주를 찾은 대학생 두 명이 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한국 학생들은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과는 달랐다. 밝고 활기찼다. 2010년 다시 두 명의 여학생을 받았다. 함께 지낸 어느 나라 학생들보다도 잘 맞았다. “생각이 열려 있었어요. 어떤 주제로도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었죠. 자기 나라와 민족에만 갇혀 있지도 않았고요. 동서양의 조화가 완벽하다고 할까요. 자기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바깥 세계에 끊임없이 귀 기울이는 것 같았어요.” 이후 한국 학생들을 더 만나면서 이들을 상대로 영어 강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픽 디자인이 호주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학위였다. 한국 정부에 영어 교사로 채용되려면 4년제 대학 학위가 필요했지만 켈리는 2년제 학위밖에 없었다. ‘새 출발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난해 4년제인 그리피스 대학 한국어·한국문화과에 입학했다. 그가 한국에서 배우고 있는 것도 한국어와 한국사다. 켈리는 “한국 생활을 위해 한국어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은 배움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는 “얼마 전에 쪽지 시험을 봤는데 반에서 꼴찌였다”며 웃었다. 한국 생활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없을까. 빤한 질문에 현명한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 사람들은 한 냄비나 접시에 있는 음식을 나눠 먹잖아요. 호주 사람들은 보통 비위생적이라며 기겁을 하는데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항상 차이에 끌리거든요. 다른 것이 아름다운 법이죠.”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한반도 전쟁 가능성 시각차] 韓 “국지도발할 수 있지만 전면전은 희박… 이달까지 긴장 지속”

    [한반도 전쟁 가능성 시각차] 韓 “국지도발할 수 있지만 전면전은 희박… 이달까지 긴장 지속”

    제3차 핵실험 이후 북한 리스크가 장기화되고 위협 수위도 높아지고 있지만, 주변국들의 우려와 달리 한국은 전쟁 가능성을 낮게 점치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국지적 도발 가능성은 있지만 전면전 가능성은 ‘제로’(0)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태양절(김일성 생일·15일), 조선인민군 창건일(25일) 등 북한의 굵직한 내부 정치 일정이 이달 중 연달아 있어 긴장 국면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는 5월에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이후 미·중, 북·중의 대화국면이 조성되면 자연스럽게 해빙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예측했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위협 국면을 만들었을 뿐, 전면전 가능성은 희박하다”면서 “무엇보다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징후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개성공단은 남북 간 충돌의 완충지대라는 상징성이 있는데, 전면 폐쇄될 경우 ‘코리아 리스크’와 국지전 가능성은 커질 수 있다”면서 “태앙절 전후로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무수단을 발사할 수 있고, 내부 정치 일정에 따라 위협을 고조시킬 수 있어 이달까지는 현재의 긴장이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홍우택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자신들이 원하는 협상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긴장 수위를 높이는 전략을 쓰고 있다”면서 “전쟁을 택해서 얻는 북한의 실질적인 이득도 없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추지도 못했다”고 전쟁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는 “전면전으로 확산되지 않는 저강도 국지도발을 통해 위협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는 있다”면서 “중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등 저강도 수준의 도발을 예상할 수는 있지만, 전면전 발발 가능성은 제로”라고 잘라 말했다. 일반 시민들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대학생 박수진(25·여)씨는 “북한의 위협과 정부의 대응 모두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면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주부 윤지혜(36)씨도 “언론에서 미사일 관련 소식을 크게 다루는 데다 아기를 키우는 만큼 더 신경 써서 보고 있다”면서도 “지금까지 그랬듯 액션에 머물겠지 설마 전면전으로 확대되겠나”라고 말했다. 트위터아이디 @mind***는 “뉴욕타임스가 한국인들이 전쟁 위험을 못 느끼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그들은 지난 60년 동안 이런 비슷한 상황이 수없이 반복됐다는 걸 모르는 듯. 만약 그때마다 공포와 혼란의 소용돌이였다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신경증 환자가 됐을 것”이라고 썼다. 개성공단 내 한누리호텔을 지은 CNC건설의 손성연 대표는 “개성 사업을 한 지 5년이 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피부로 느끼는 것은 똑같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만약 북한이 정말 도발을 하려고 한다면 근로자를 나가라고 할 게 아니라 인질로 잡아둬야 되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북한의 호전적 태도에 경솔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밝혔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우리 손으로 온실가스 없애려 착한탄소기금 모금 시작했죠”

    “우리 손으로 온실가스 없애려 착한탄소기금 모금 시작했죠”

    “극지방 얼음이 녹아서 걱정이라고 말들만 하지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내 손으로 직접 기후변화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착한탄소기금을 시작했습니다.” 임송택(45) ㈜토람 대표가 ‘착한탄소기금’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이었다. 양승룡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의 지도로 박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함께 아이디어를 냈다. 1인 벤처기업 토람을 만들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착한탄소기금은 시민들이 낸 기부금으로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권을 사들인 뒤 이를 없애 추가 배출을 막는 제도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시작되면 기업은 친환경 발전 등으로 인한 탄소 배출 감소분만큼의 배출권을 다른 기업에 판매할 수 있게 되는데 시민들이 이를 구매해 배출 기회 자체를 ‘소각하는’(없애는) 것이다. 임 대표가 공동위원장으로 있는 착한탄소기금 준비위원회는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에서 1차 탄소배출권 소각행사를 열고 기금 기부자들에게 한국지역난방공사에서 사들인 1859t 분량의 온실가스 배출권 소각 증서를 전달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은 임 대표와 양 교수 등 30여명이 추렴한 361만원. 지역난방공사는 배출권 판매 수익 중 부가세를 뺀 328만원을 다시 서울환경운동연합의 나무심기 사업에 기부하기로 했다. 시민들은 배출권으로 사들인 만큼의 탄소 배출을 막고 기업은 판매 수익을 태양광 발전 등 온실가스 감축 사업에 기부하는 선순환 프로그램이다. 환경 컨설턴트 출신인 임 대표는 “충분한 관심을 끌지 못해 일부 시민들의 선의에만 기대야 하는 점이 가장 어렵다”고 토로한다. 유독가스 누출 등 피부에 와닿는 환경 문제에 비해 기후 변화는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발걸음을 뗀 만큼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토람은 흙(土)이 넘친다(濫)는 뜻이에요. 물론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죠. 하지만 좋은 흙이 넘치듯 뜻있는 시민들의 마음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택시만 골라…” 억대 보험금 타낸 10대들

    10대들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기극을 벌여 운전자들로부터 억대의 돈을 뜯어냈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중앙선을 넘은 차량을 골라 일부러 사고를 내고 합의금 등의 명목으로 44차례에 걸쳐 1억 1200여만원을 뜯어낸 박모(16)군 등 3명에 대해 상습사기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3일 밝혔다. 한모(16)군 등 20명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올 2월까지 종로구 종로3가역과 마포구 홍익대, 용산구 숙명여대 부근 등 길가에 주정차된 차가 많은 편도 1차선 도로 등을 주무대로 삼았다. 주차된 차들 때문에 차량이 어쩔 수 없이 중앙선을 넘어오면 기다렸다는 듯 오토바이를 부딪쳐 사고를 냈다. 주로 형사처벌과 운전면허 행정처분을 두려워하는 택시기사들을 상대로 합의금을 받거나 보험회사에서 허위로 치료비와 수리비 등을 타냈다. 지나가는 차가 없을 때는 한 명이 택시를 타고 해당 골목으로 지나가게 한 후 다른 일당이 오토바이로 사고를 내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경찰은 지난 1~2월 종로3가역 부근 포장마차 밀집 지역에서 세 차례나 비슷한 유형의 교통사고가 일어나자 보험사기를 의심해 수사에 착수했다. 박군 등 10대 5명이 최근 11건의 교통사고 피해를 연이어 당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계좌 압수수색 등을 통해 범행을 확인했다. 용산구의 지역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범행 수법을 공유하며 점차 횟수를 늘려 갔다. 경찰은 “형사처벌을 받을까 봐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험사기가 의심되는 교통사고는 적극적으로 신고해야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표창원·이정희 참여 외부강연… 덕성여대 ‘정치행사’ 불허 논란

    덕성여대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등이 참여하는 강연회를 ‘정치활동’이라며 불허해 논란이 되고 있다. 2일 덕성여대 총학생회 등에 따르면 총학은 오는 5일부터 7일까지 ‘진보 2013’이라는 강연회를 개최하기 위해 지난 2월 대학본부에 장소 협조를 요청했다. 강연자로는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등 11명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대학본부는 지난달 21일 학생처장 명의의 공문을 통해 “학칙에 따라 학생은 학내외를 막론하고 정당 또는 정치적 목적의 사회단체에 가입하거나 기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 진보 2013은 정치활동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불허한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총학은 “올해로 5회째인 이 강연은 정치활동이 아닌 학술행사로 지난해에는 학교 측에서 장소 협조는 물론 강사 의전까지 제공했다”면서 “학생회가 파행 운영으로 물러났다가 지난해 복귀한 옛 재단에 반대해 농성 등을 했다는 이유로 보복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새빨간 거짓말’ 머리는 떨고 있다

    ‘새빨간 거짓말’ 머리는 떨고 있다

    성폭행 혐의로 피소된 배우 박시후 사건부터 사회 유력인사 성 접대 의혹까지 일련의 사건마다 관련자들의 주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상반된 진술 속에 누군가는 대중을 향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 거짓말탐지기는 요긴한 수사의 도구다. 법적 증거능력은 없지만 사건의 가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때가 많다. 31일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를 찾았다. 서울경찰청에서만 공식 운용중인 최첨단 거짓말 탐지기술 때문이었다. 서울청의 도움으로 거짓말을 잡아내는 최첨단 기술인 ‘바이브라 이미지’(Vibra image)를 체험했다. 거짓말을 할 때 대부분 사람에게서는 호흡이나 맥박, 땀 등 신체 변화가 나타난다. 이런 변화를 통해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게 흔히 알려진 거짓말탐지기 ‘폴리그래프’(Polygraph)의 원리다. 반면 바이브라 이미지는 머리의 미세한 떨림에 주목한다. 원리는 이렇다. 귀 안쪽에는 사람의 평형감각을 담당하는 전정기관이 있는데 거짓말 등 심리 변화에 미세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다. 바이브라 이미지는 전정기관의 반응에 의한 머리의 움직임을 특수영상으로 시각화하는데 이때 피검사자의 흥분도와 집중도 등 28개 요인이 측정된다. 신체에 전극장치 등 각종 장비를 부착하는 폴리그래프와 달리 카메라로 얼굴을 촬영하기만 하면 된다. 거짓말 탐지 전문가인 이재석 검사관과 간단한 실험을 했다. 이 검사관은 빈 종이에 숫자 3, 4, 5 중 하나를 적게 했다. 검사관이 알지 못하게 등을 돌려 ‘3’을 적었다. 검사관이 1~7을 부르면서 “1을 적었느냐”, ”2를 적었느냐”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일곱번을 물으면 모두 “아니다”로 대답하기로 미리 약속을 했다. “3을 적었느냐”고 물을 때 바이브라 이미지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실제 피조사자가 된 마음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흥분도와 좌뇌·우뇌의 심리적 대칭성 등을 종합적으로 계산한 거짓말 레벨이 “3을 적었느냐”는 질문에 답할 때(16.07)는 다른 답변(32.14)에 비해 최고 절반 수준으로 낮았다. 이 검사관은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 레벨이 정상 반응보다 크게 높거나 낮아진다”고 말했다. 2011년 이 검사관이 서울경찰청에서 실제 검사한 사례를 중심으로 120건의 바이브라 이미지 효과를 분석한 결과 거짓말 탐지율이 최대 90.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브라 이미지는 아주 작은 마음의 동요까지 훤히 드러내는 거짓말 탐지 기법이지만 다른 거짓말 탐지기와 마찬가지로 직접 증거 대신 정황 증거로만 사용되기를 바라는 수사관들도 많다. 인간의 마음에는 과학으로 측정되지 않는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검사관의 말이다. “과학은 매일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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