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귀향 포기한 그들의 사연은
사흘 뒤면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넉넉하고 풍성한 명절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겠다. 하지만 올 추석은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유난히 짧은 연휴와 취업 걱정 등으로 귀성을 포기한 2030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오달란 유대근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미뤄왔던 시력교정수술·영화관람 ‘기분전환’
직장인 김모(27)씨는 얼마 전 안과에서 추석 연휴 전날인 10월1일에 시력교정 수술을 하기로 예약했다. 며칠 눈을 쓰지 않고 푹 쉬어야 하는데 평일에 휴가를 내기가 눈치 보여 그동안 수술을 미뤄왔다.
“어렸을 때부터 안경을 썼는데 이상하게 점점 안경이 거추장스럽더라고요. 올 추석 연휴가 짧긴 하지만, 연차를 하루 덧붙여 수술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사실 저같은 직장인들은 연휴가 되면 그동안 못했던 일을 몰아서 하죠.”라고 말했다.
김씨는 친구와 선배 중에서도 연휴 때 보톡스를 맞거나 피부 관리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쉬면서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명절 연휴라도 마음 편하게 쉬며 재충전을 해야 한다는 게 김씨의 지론이다.
결혼 3년차인 중학교 교사 정모(30·여)씨는 연휴 동안 남편과 오붓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시부모님은 미국의 큰집에서 명절을 보내기 위해 한국을 떠나고 전남 광주인 친정에는 연휴가 짧아 내려가지 못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정씨는 추석 휴가를 간절히 기다려왔다.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신장이 나빠져 몸이 자주 붓고 피곤함을 호소해왔기 때문이다.
정씨는 “명절 때면 시댁에 미리 가서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차가 밀려서 도로 위에 꼼짝없이 갇혀 있곤 했는데 이번에는 집에서 쉬면서 건강을 챙길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남편이 챙겨주는 밥을 먹고 하루 10시간 이상 잠을 푹 자기로 했다. 사람이 덜 붐비는 극장을 찾아가 영화나 뮤지컬 한 편을 보면서 기분전환도 할 예정이다. 정씨는 “명절 스트레스에서 해방돼 연휴 3일을 고스란히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며 좋아했다.
직장인 김모(34)씨는 예년보다 짧은 이번 추석 연휴 동안 고향(대구)행을 포기하는 대신 문화 생활을 즐길 계획이다. 그는 중동지역 건설공사 프로젝트건 때문에 여름 내내 야근에 시달리며 휴가도 다녀오지 못한지라 휴식이 절실한 상황이다. 휴일이 3일밖에 되지 않는데 귀향, 귀경길에만 이틀을 잡아먹느니 차라리 텅빈 서울에서 푹 쉬며 홀로 책도 보고 오랜만에 영화관에도 가 볼 생각이다.
“각종 입찰서류, 영문 이메일에 파묻혀 지냈는데 연휴 첫날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와 김별아의 ‘미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로 나온 소설책 속에 파묻혀 보낼 겁니다. 음식은 대형마트에서 산 전과 떡으로 해결하면 되고요.”
그는 추석 당일 오후엔 혼자 경복궁과 창경궁을 돌아다니며 공짜 민속행사를 구경하고 마지막 날에는 서울이 고향인 동료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부모님을 못 뵙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효도보단 휴식을 택했다.”는 김씨는 “대신 내년 설날에는 가장 먼저 대구 집에 내려가 부모님들과 지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 “결혼해라” 명절 단골멘트 지겹다 지겨워
직장인 장모(33)씨는 추석 연휴에도 집에 머무를 틈이 없다. 혼기가 꽉 찬 노총각인 장씨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이번 추석 연휴 3일 연속으로 맞선 약속을 잡아놓았다. 평일에는 ‘야근한다, 회식한다.’는 핑계로 부모님이 권하는 선 자리를 잘 피해왔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시골에 끌려가서 어르신들에게 혼날래, 서울에서 선볼래.”라는 부모님의 최후통첩에 두 손을 들었다. “요즘 제 나이면 그다지 노총각도 아니죠. 그런데 지난해 두 살 아래 남동생이 먼저 장가를 가면서 부모님의 조급증이 부쩍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전 나이가 찼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의심스러운데, 그런 말을 꺼낼라치면 부모님은 저더러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화만 내시고….”라며 장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 말에는 어머니, 제수씨와 함께 백화점에서 선보러 갈 때 입을 옷도 샀다. 지난달만 해도 추석 연휴 때 혼자 조용히 남해안으로 여행 갈 계획을 세웠던 장씨였지만, 이제 여행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하루도 편하게 못 쉬고 선 보러 나가서 억지웃음을 지어야 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남해안이고 뭐고 어디 템플 스테이라도 가서 분노를 다스렸으면 좋겠어요.”라며 장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학원생 최모(27)씨는 이번 추석연휴에 소개팅을 하루에 한건씩 잡아놓았다. 심지어 추석 당일인 3일 저녁에도 강남역에서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각종 페이퍼 작성과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실연의 상처를 잊으려면 사람 만나는 게 최고라고 마음먹었기 때문. 그는 7월까지만 해도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알뜰살뜰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취업에 성공하자마자 절교 선언을 날렸다. “미래가 불투명한 대학원생과는 더 만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최씨는 “문과대라 석사과정이 끝나도 취업이 힘들 것 같아 고민이었는데 여자친구마저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하니 야속하기만 했다.”며 속상해 했다. 한달 가까이 식음도 전폐하며 폐인처럼 살았던 그는 10월 달력을 넘겨보며 다짐했다. 추석연휴를 계기로 다시 정신 차리고 여자친구 만들기에 나서자고 마음먹었다.
“소개팅하는 건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휴에 어른들이 모이면 옛 여자친구의 안부를 물을 게 뻔한데 ‘소개팅 나간다.’는 걸 핑계 삼아 귀찮은 질문공세에서도 피해 나오려는 계산”이라고 말하며 최씨는 씁쓸히 웃었다.
올해 초 광고회사에 입사한 서모(27·여)씨는 있지도 않은 업무를 핑계로 이번 추석을 서울에서 혼자 지내기로 했다. 지난 3월 취업 성공과 더불어 시작된 부모님의 ‘시집’ 타령에 이골이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씨가 솔로인 것도 아니다. 3년간 만나온 남자 친구가 있지만 아직 신입사원의 티를 못 벗은 서씨로서는 결혼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
서씨는 “그토록 원하던 광고회사에 입사했지만 내가 꿈꾸던 카피라이터의 모습과는 한참 멀다.”면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내 능력을 인정받는 게 우선”이라며 신입사원의 고초를 토로했다. 서씨의 회사는 인원 충원을 위해 최근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냈다. 이 때문에 서씨의 마음은 더 조급한 상황이다.
서씨는 “입사 기간이 크게 차이 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선배인데 후배보다 하나라도 뛰어난 점을 보여야 하잖아요. 이 바닥은 워낙 경쟁이 치열한 데다 시장도 좁아서 개인에 대한 평가가 금방 퍼져요.”라며 “일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을 때 남자친구와 함께 고향집을 방문하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 금의환향할 그 날을 위해 공부 삼매경
사법고시 준비생 김모(30)씨는 이번 추석에도 고향인 경남 진주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벌써 5년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부모님과 친척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다. 김씨는 “명절이면 친척들이 가장 먼저 꺼내는 얘기가 나의 합격 여부”라면서 “그 소리가 듣기 괴롭고 부모님께도 죄송해서 3년 전부터 추석과 설날에 고향에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올해 추석 연휴 동안 서울 신림동 자취방에 틀어박혀 밀린 동영상 강의를 듣고 토익책도 펼쳐 볼 생각이다. 지난 6월에 치른 2차 시험의 성적이 좋지 못해 내년을 기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1차 시험부터 다시 응시해야 해서 토익점수도 700점 이상 확보해야 한다. 연휴도 없이 공부할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오지만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고 김씨는 전했다.
위로 누나만 두명 있는 막내아들인 터라 김씨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은 애틋하다. 지난주 말 도착한 택배 상자에는 냉동 동그랑땡과 산적, 깨송편, 김치 등이 들어있었다. 객지생활에 명절음식도 못 먹을까봐 어머니가 손수 싸서 보낸 것이다.
김씨는 “명절 분위기라도 내라고 지난 설부터 음식을 보내주시는데, 만들어먹을 시간이 없으니 보내지 말라고 해도 고집을 부리신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필코 내년 추석에는 부모님께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매달 10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축 내면서 부모님 속을 썩였던 만큼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판사 아들’ 덕 좀 보게 해드리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모(29)씨는 어느 해보다 씁쓸한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고향인 부산 집에서는 밀린 업무와 짧은 연휴 때문에 못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양씨는 새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회사의 자금난으로 지난 봄에 해고됐기 때문이다. 양씨는 “아직도 가족들은 제가 직장에 잘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부모님께서 제 소식을 알면 저보다 더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번 추석 연휴를 재기의 의지를 다지는 기회로 삼겠다며 최근 입사 지원서를 제출한 회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같이 서울로 상경한 대학 친구들을 보면 가슴이 쓰리지만 내년 설날을 기약하며 마음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멀리 뛰기 위해 잠시 움츠리고 있는 개구리”와 같다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양씨는 “추석 연휴 때면 대학 도서관도 한산해 마음이 더 허전하겠지만 지금 이 처절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이번 추석 연휴만큼은 최선을 다해 취업 준비에 몰입할 겁니다.”라며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