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박록삼
    2025-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625
  • “장수하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누워자라”

    ‘매일 8시간 잠잘 것, 오른쪽으로 누워 자기, 절대 폭음(醉)하지 말 것….’ 91년 전 나온 잡지 ‘개벽’(開闢) 창간호(1920년 6월 25일)에 실린 ‘100세 장수법’ 중 일부다. 천도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개벽’은 100세까지 장수하기 위해 지켜야 할 15가지 건강법을 소개하고 있다. 음식 섭취와 수면, 운동에 관한 조언은 물론 공명심(功名心)을 제어할 것,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차분하게 하며(虛心平氣), 속을 태우고 노여움을 감추지 말 것(焦思藏怒) 등 정신 건강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어 흥미롭다. 영국의 한 의학박사가 실험을 통해 알아낸 것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다분히 민족주의적 가치를 품고 있었기에 ‘개벽’은 창간호부터 일제로부터 혹독하게 탄압받았다. 창간호가 압수된 데 이어 이틀 뒤인 27일에 발행된 호외(號外) 역시 압수돼 사흘 후인 30일에 다시 임시호를 발행했다. 창간 이후 6년 동안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26년 8월 1일 7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올해 창도 152년을 맞는 천도교는 최대 경축일인 천일기념일(4월 5일)에 중앙대교당에 전시실과 자료실을 개관하고 개벽을 비롯해 여성잡지 ‘신여성’, 어린이 잡지 ‘어린이’, 농민잡지 ‘조선농민’ 등 10여종의 천도교 계열 잡지와 3·1 독립운동 선언서, 동학농민운동 사발통문 등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그들 작품 속엔 늘 고향이 있었다

    그들 작품 속엔 늘 고향이 있었다

    김남천, 노천명, 박영준, 안수길, 윤곤강, 윤석중, 이원수, 정비석….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 속에는 늘 고향이 있었다. 삶의 터전으로서, 혹은 상실한 공간으로서, 또는 새롭게 건설해야 할 지향점으로서 고향은 자리매김돼 왔다.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 강점기였기에 고향과 조국은 얼마든지 상치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가 다음 달 7일 서울시의 후원으로 개최하는 ‘2011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는 ‘이산과 귀향, 한국 문학의 새 영토’라는 주제로 열린다. 1911년생 문인 8명이 주인공이다. 장편소설 ‘대하’를 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김남천, ‘모범경작생’을 쓴 농민소설의 대표 작가 박영준, ‘북간도’의 안수길, ‘자유부인’의 정비석 등 소설가와 ‘사슴’의 노천명, ‘나비’의 윤곤강 등 시인, 윤석중과 이원수 같은 아동문학가 등이 있다. 7일 심포지엄은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열린다. 다음 날에는 연희문학창작촌 야외 무대에서 작품을 낭독하는 문학의 밤, 문학 그림전, 작가별 학술회의 등이 열린다. 기획위원장을 맡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고향의 발견’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 총론에서 “암울한 식민지 현실의 중심부를 관통한 1911년생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고향’이라는 문학적 주제가 발견된다.”면서 “고향은 ‘잃어버린 낙원’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는 삶의 터전’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이 정신적, 실제적 생활 터전의 확보, 역사 창출과 인간의 실존 양식을 문제 삼으면서 발견한 고향이라는 주제는 이후 한국 사실주의 소설 발전에 한 기틀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은봉 작가회의 사무총장은 “8명 가운데 일부는 친일 논란, 친독재 논란 등이 있으나 이들까지 문학적 논의의 장에서 다루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 모두 재조명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사상 초유 회장 직무정지 ‘한기총’ 이대로 쪼개지나

    사상 초유 회장 직무정지 ‘한기총’ 이대로 쪼개지나

    보수적 개신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이하 한기총)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전직·현직 회장을 중심으로 세력이 쩍 갈라진 가운데 법원의 신임 회장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에 시민단체의 해체 운동까지 가세하면서 공중분해설까지 나오고 있다. 회장 직무정지는 22년 한기총 역사에서 초유의 사태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는 이광원 목사 등 ‘한기총 개혁 범대책위원회’ 소속 목사 16명이 길자연 목사를 상대로 낸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28일 “정기총회에서 이뤄진 대표회장 인준 결의는 절차상의 중대한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판결했다. 지난 15일 임시총회 개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데 이어 이번에는 대표회장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등 법원이 잇따라 ‘범대위’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재판부는 신임 회장의 임기가 1년에 불과한 만큼 우선 직무를 정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뒤 김용호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 대표)를 대표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김 변호사는 ‘한기총 개혁 범대위’에서 직무대행으로 추천한 인물로, 서울 서빙고동 온누리교회의 안수집사다. 문제의 불씨가 된 지난 1월 정기총회는 전임 대표회장 이광선 목사의 사회로 열렸으나 길자연 당선자의 불법 선거운동 논란이 일며 고성과 폭언, 몸싸움이 오고 갔다. 이에 이 목사가 정회를 선포하고 퇴장했지만 남아 있던 한기총 공동회장 등이 임시의장을 세워 총회를 속개한 뒤 길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인준했다. 하지만 이광선 목사가 지난 2월 ‘돈 선거 양심고백’을 하고 길 목사 측이 금권 선거 사실을 시인하면서 불법 선거 논란은 더욱 뜨거워진 상태다. 길 목사는 이슬람채권(수쿠크)법 반대에 앞장서 왔으며,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해 논란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이번 판결로 한기총 내분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한기총의 위기는 대표회장 직무정지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제기된 당선 무효 소송이 예정돼 있는 등 더 큰 ‘폭탄’이 기다리고 있다. 길 목사 측은 인준 절차에 문제가 있었던 만큼 인준 절차만 다시 밟으면 된다는 입장인 반면, ‘한기총 개혁 범대위’ 측 인사들은 당선 무효 소송에 더욱 힘을 받게 됐다며 반색하고 있다. 이광원 목사는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당선 무효 소송도 함께 제기한 상태”라면서 “금권 선거의 증거가 발견된 만큼 이제는 당선 무효 소송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김운태 한기총 총무는 “법원의 결정은 인준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내용인 만큼 직무대행과 함께 임시총회를 소집해서 대표회장 인준 절차를 새로 밟아야 할 것”이라면서 “당선 무효 소송이 아직 확정되기 전인 만큼 길 대표회장이 선임한 집행부 등 조직 구성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교계 시민사회단체들이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를 꾸려 벌이고 있는 한기총 탈퇴 및 해체 운동도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들은 다음 달 초 한기총 해체를 주제로 연속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김애희 교회개혁실천연대 실장은 “법원의 결정으로 앞으로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조만간 양쪽 갈등 당사자들에게 공개 질의를 해 책임을 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직무대행으로 선임된 김 변호사는 29일 “어제 저녁 구두로 통보받았지만 아직 결정문을 받지 못한 상태”라면서 “재판부 면담을 통해 직무대행의 역할 범위, 취지 등을 우선 들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한기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만큼 이번 주 내에 한기총으로 출근해서 현황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아동문학가 윤석중 고향 논란 법정으로 비화 조짐까지… 왜

    ‘어린이날 노래’ 작사가이자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시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년)이 때아닌 ‘고향’ 논란에 휩싸였다. 법정 공방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논란은 윤석중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책에서 불거졌다. 노경수 한서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동심의 근원을 찾아서-윤석중 연구’에서 윤석중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고향’의 정서는 충남 서산 지역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2008년 자신의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심화시킨 결과물이다. 윤석중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두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외조모 밑에서 잠시 크기도 했고, 젊은 시절 부친이 거주하던 서산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①태어나서 자란 곳 ②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③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보기에 따라 윤석중의 ‘고향’은 서울도, 서산도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 교수는 “시골과 고향을 노래한 윤석중 작품을 살펴보면 그의 고향은 서산을 가리키며, 서산은 향수의 공간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 예로 ‘서울 사는 아이야/ 시골 왜 왔니?/시골 바람 맑은 바람/쐬고 싶어 왔단다’(‘서울 사는 아이야’ 중) 또는 ‘시골 사는 아이들은/몇 갑절 저보다 큰/나뭇짐도 잘 지고’(‘시골 사는 아이’ 중) 등의 시구를 든다. 하지만 유족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한다. 윤석중의 장남 태원(미국 거주)씨는 “아버지는 일본 도쿄 유학 생활을 제외하고 80여년 동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했다.”면서 “(아버지의) 정신적 고향이 서산이라거나 향수에 관련된 많은 작품이 서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법정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이에 대해 문단은 아동문학계에서 차지해 온 윤석중의 독보적 위치를 감안할 때 ‘고향’ 논란은 이해가 가지만 법정 공방까지는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그 이면에는 윤석중의 아픈 개인사가 있다. 윤석중의 부친 윤덕병(1885~?)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소속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세 차례나 투옥됐던 민족주의계열 좌익 지식인이었던 것. 1930년대 초 윤덕병은 사회 활동을 접고 사별했던 전처(윤석중의 모친)가 남겨준 땅이자 윤석중의 외가인 ‘서산시 음암면 율목리 46번지’로 내려와 은거하다 한국전쟁 때 좌우익 대립 속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족들은 아직까지 윤덕병의 유골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노 교수는 “윤석중의 작품 이면에는 좌익계열이었던 부친을 한국전쟁 때 잃은 뒤 동심주의, 낙천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 체험, 반공주의와 연좌제가 서슬 퍼렇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주로 활동했을지라도 고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외조모와 부친이 있었던 서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중 전기를 썼던 신현득(78) 새싹회 전 이사장은 “할아버지로 인한 불편한 기억 때문에 유족들이 아버지 윤석중과 할아버지 윤덕병, 그리고 서산과의 인연이 새삼 거론되는 것 자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노 교수의 책이) 윤석중에 대한 일각의 일방적 비판을 바로잡으려 노력한 대목 등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윤석중에게는 ‘거목’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일제 치하 현실에 순응하려는 동심주의와 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낙천주의를 앞세워 아이들의 정서를 박제화시켰다는 비판도 따라다녔다. 노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윤석중의 작품 세계는 동심주의적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초기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강한 민족주의적인 색채와 일제 수탈에 대한 저항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조선아들행진곡’에서는 ‘피도 조선 뼈도 조선/이 피 이 뼈는/살아 조선 죽어 조선/네 것이라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1929년에 쓰인 ‘허수아비야’는 ‘허수아비야…/ 여기 쌓였던 곡식을/누가 다 날라 가디?/…/넌 다 알 텐데/왜 말이 없니?/넌 다 알 텐데 왜 말이 없니?’라며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현실을 상징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눈치보며 휴가 쓰세요? 기업논리에 발목 잡혔군요

    눈치보며 휴가 쓰세요? 기업논리에 발목 잡혔군요

    1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는,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노동시간’을 둘러싸고 노동과 자본, 그리고 국가가 벌여온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하루 12~15시간씩 이어지던 중노동은 8시간 노동으로 법제화됐다. 일주일에 5일만 일하는 주 5일제도 자리잡았다. 이제 21세기는 ‘휴가 시간’을 둘러싼 싸움이다. 싸움?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정기휴가, 생리휴가, 대체휴가, 연차휴가, 경조휴가, 휴가명령제 등 이미 법과 제도로 보장된 각종 휴가들이 엄연히 있는데 무슨 싸움이란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싸움이다. 직장 상사, 동료들의 눈치를 치열하게 살펴야 하는 싸움이다. 눈치 싸움 끝에 제대로 누리지 못한 휴가는 인사부 담당자의 컴퓨터에 켜켜이 쌓여 있다가 연말이 되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잃어버린 10일’(김영선 지음, 이학사 펴냄)은 휴가를 ‘사실상’ 반납한 채 이뤄지는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 시스템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성장, 생산성, 경쟁력의 담론 안에 갇혀 있는 ‘휴가의 해방’을 과감히 선포한다. ‘경영 담론으로 본 한국의 휴가 정치’라는 꽤 어려워 보이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러나 요지는 복잡하지 않다. 당연히 자본의 입장에서 휴가를 고민하고 있는 경영자들은 물론, 노동자 역시 자본의 입장에서 휴가를 바라보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책은 직시한다. 뭇 직장인들은 늘 쭈뼛거리며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경영자총협회(경총) 등에서는 늘 너무 많다고 아우성치는 ‘휴가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자. 마음 놓고 연차휴가 10일, 혹은 20일을 ‘쭈욱’ 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하루이틀씩 쪼개서 쉬며 ‘재생산의 시간’으로 애써 자위하고 있지 않는가. 길게 휴가를 썼다는 이유로 상사나 동료들에게 눈총을 받은 기억은 없는가. 휴가를 꼬박꼬박 챙기는 동료나 후배를 부러워하거나 욕한 적은 없는가. ‘그렇다’라는 답이라면 우리는 자본의 입장에서 만들어놓은 휴가에 대한 인식의 울타리(담론)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레저경영대학원 겸임교수인 저자는 어떻게 해서 ‘쉴 수 있는 휴가는 많은데 쉰 휴가는 별로 없는 현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그리고 정치학적으로 접근한다. 한국의 기업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문화를 기반으로 삼고 생산성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2009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316시간이다.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 보면 1년에 최소 500시간에서 1000시간 이상 더 일하고 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1년에 2달 이상을 덤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선진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온갖 휴가들이 즐비하게 보장돼 있고, 법으로 주 40시간 노동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할까. 과거의 휴가는 단순한 노동을 위한 피로 회복의 도구이면서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는 통제와 관리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휴가는 더 많은 생산성, 더 높은 경쟁력을 위한 수단이자 노동을 위한 재생산의 시간으로 변했다. 구성원들의 반론도 변변치 않다. 기업의 논리와 가치로 이뤄진 지배담론이 한국 사회를 사실상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아가 휴가에 대한 가치가 발전과 성장, 그리고 경쟁과 생산성의 가치에 뒷전으로 밀려남으로써 인해서 휴가 제도와 현실 사이에 비동조화 현상이 지속되고, 실질적 민주화 또한 계속 지연되고 있음을 결론적으로 얘기한다. 안타까운 점은 일반 노동자들의 삶과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된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대중교양서 형식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책의 구성과 문장 등이 학술 논문 형식을 띠고 있어 편안한 독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1만 9000원. 글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그래픽 이혜선기자 okong@seoul.co.kr
  • 정완영 “시를 안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정완영 “시를 안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자네는 왜 시를 쓰지 않나?” 노(老) 시인은 대뜸 묻는다. 그저 농담인가 싶어 머뭇거리니 다시 묻고 재촉한다. “자네도 시를 쓰시게. 제대로 된 시 두편만 남기면 그 어떤 훌륭한 정치인, 그 어떤 훌륭한 학자보다 더 오랫동안 역사가 기억할 거야.” 진지했다. 65년 시력(詩歷)의 시인답게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지식과 지혜를 내보였고, 92세 고령의 나이가 무색하게 얘기 중간중간 유쾌한 농담을 잊지 않던 그는 지긋한 눈빛으로 정색한 채 손주뻘 되는 기자에게 시 쓰기를 권했다. 머리를 배반한 입이 절로 움직였다. “네,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4일 시조시인 정완영을 만났다. 최근 열일곱 번째 시집 ‘詩菴(시암)의 봄’(황금알 펴냄)을 내놓은 그다. 공식 집계는 없건만 창작 시집을 내놓은 최고령 시인임에 분명하다. 경북 김천시에 있는 그의 집과 백수문학관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일제 강점 기 고문이 시로 터져나와 그의 호는 백수(白水)다. 정갈히 맑은 물이라는 뜻과 함께 고향 김천의 천(泉)을 쪼갠 글자(破字)다. 2008년 정부와 경북도 등이 예산을 들여 백수문학관을 개관했다. 시조시인으로 개인의 문학 업적을 기리는 문학관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난 시 지상주의자이면서 시 전도사야. 남녀, 학력, 노소 가리지 않고 늘 시를 권하지. 시를 쓰는 것이 즐거우니까 권하는 거지. 시를 안 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시에는 별 재주 없는 이가 많을 텐데 무작정 시를 권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짐짓 놔보는 어깃장에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면 많이 거두는 이도 있고, 조금밖에 못 거두는 이도 있지. 그러나 아무것도 못 거둔 이는 없는 법이야. 타고나지 않아도 노력한 만큼은 반드시 거두게 돼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말 그대로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다. 정완영은 일제 강점기 ‘불령선인’(일본을 따르지 않는 조선인)으로 찍혀 경찰에게 고문당해 오른쪽 중지를 쓸 수 없게 됐다. 고통은 시가 되어 터져나왔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김천에서 ‘시문학 구락부’를 만들며 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민족적 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장르로서 시조만을 고집해 온 민족사적 배경이자 개인사적 이유다. 1970~8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시조 ‘조국’에서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와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게끔 살아온 것이다. 정완영은 청마 유치환의 강권으로 공식 등단의 필요성을 느꼈고 곧바로 1960년 서울신문, 국제신보, 1962년 조선일보, 1967년 동아일보 등 신춘문예를 휩쓸다시피하며 중앙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몸으로 꿰뚫고 살아온 시 세계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시인이 가난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의 가난함은 훈장이라고 머리로 외면서도 몸은 한사코 명예와 돈을 좇아 두리번거리는 것이 여느 시인들의 비루한 현실이니 말이다. “시는 벌판에서 와. 외롭고 쓸쓸할 때, 그때 시가 나와. 안일하거나 가득 차면 시가 안 나오거든. 시가 떠오를 때는 일부러 밥도 두세 끼니씩 거르기도 해.” 하지만 어쩌랴. 짜여진 형식의 틀과 고루한 인식에 갇혀 있는, 낡은 장르로 치부되는 것이 문단에서 시조가 겪고 있는 대접이다. 그는 “시조의 형식에는 종장 세 글자를 제외하면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들어 있다. 시의 정서와 시어 역시 다루지 못할 것이 없다.”면서 “시조를 모르는 이들의 편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시조 변형 자유로워… 낡은 장르 치부는 편견” 그의 신작 시집 ‘시암의 봄’을 펼쳐 읽어 보면 시조에 대한 편견이 단박에 허물어짐을 느낄 수 있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감꽃’ 중), ‘동구 밖 개 짖는 소리로 먼 마을에 눈 내렸다’(‘먼 마을에 내리던 눈’ 중),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것인가’(‘적막한 봄’ 중) 등과 같은 시편들은 젊은 시인의 모던함과 무람 없이 견줘도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길 만하다. 특히 ‘함부로 꽃 피지 않고, 함부로 열매 안하는 석류나무’를 보여준 ‘우리 집 석류나무는’는 품격 있는 시어 조련과 범우주적 가치에 대한 사유의 정수를 확인시켜 준다. 지금도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시를 공부하고, 생각하고, 쓰고 있다는 진짜배기 시인 정완영. 그러고 보니 김천은 소설 쓰는 김연수(41), 시 쓰는 문태준(41)의 고향이다. 그냥 불쑥 튀어나온 문재들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글 사진 김천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詩에게 서정을 돌려주다

    詩에게 서정을 돌려주다

    시구 한줄, 시어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적이 있다. 그날 하늘은 유독 푸르렀고, 바람은 달콤한 냄새를 한껏 풍겼으며, 길가 앉은뱅이 들꽃에 발길이 절로 멈춰졌다. 밤하늘 별자리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으며, 낙엽의 바스락거림이 관현악 화음으로 들려왔다. 오롯이 시(詩)만이 해낼 수 있는 힘이다. 이제 슬슬 원로 반열로 접어드는 60대 시인 세 사람이 다시 시의 서정으로 돌아가자며 뜻을 모았다. 어지러운 서사의 시, 형식을 깨뜨리는 실험시에 대한 낯섦을 극복하며 공감의 수단으로서 시의 역할을 회복하겠다는 선언이다. 조정권(62), 이하석(63), 최동호(63)는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아무런 언어유희 없이, 소통의 제약 없이, 문학적 지식 없이 오로지 감성으로만 만날 수 있는 시를 쓰겠다며 ‘극 서정시집’이라고 이름 붙인 시집을 함께 펴냈다. 조정권의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이하석의 ‘상응’, 그리고 최동호의 ‘얼음 얼굴’이다. 문학 경향으로 보자면 반동(反動)에 가깝다. 감각의 언어와 파격의 형식을 앞세운 실험시가 주도하고 있는 시단에서 소박한 아름다움만으로 노래되는 시는 흘러간 그 옛날의 것에 가깝다. 하지만 이 역시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하나의 실험이 될 수 있다. 복고적 반동에 머무느냐, 또 다른 실험이 되느냐는 결국 얇은 종이 한장 차이다. 극도로 짧은 단시들을 의도적으로 썼다. 조정권은 ‘흰 산 바위 틈에서 찾았다 쇠 깎아놓은 듯 철화鐵花’(‘빙설꽃’ 전문), 또는 ‘꽃들은, 꽃들은, 피는 걸 감추지 못하나봐/ 인간과 달라 감추는 짓을 하지 못하나봐’(‘꽃들은’ 전문)와 같이 감정을 극도로 자제하며 시어를 골라냈다. 최동호 역시 다람쥐 꼬리처럼 설핏 마룻장을 비추고 마는 겨울 햇빛을 보고 ‘툇마루 보푸라기/ 먼지/ 쓸고 가는 햇빛의 혀’라고 노래하며 여백과 여운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쓸쓸하기만 한, 그러나 소중한 따스함을 간직한 겨울 햇빛이 몸을 간지럽힌다. 최동호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명징한 서정시로 시의 정도를 가 보자는 뜻에서 극서정시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됐다.”면서 “극도로 축약해 행간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트위터 시대, 디지털 시대 코드와도 방향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시인의 시집을 낸 출판사 서정시학은 40편 안팎의 짧은 시를 실은 서정시집을 계속 펴낼 계획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국 교회 세속화·권위주의 심각하게 다시 고민해 봐야”

    “한국 교회 세속화·권위주의 심각하게 다시 고민해 봐야”

    “교회의 대형화로 인한 한국 교회 부패의 현실은 참교회와는 거리가 멉니다.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의 부패상과 뭐가 다른가요?” 유럽 종교개혁지 탐방 중에 만난 신국일(56) 목사는 최근의 한국 교회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신 목사는 1982년 독일로 유학을 와 마인츠대에서 공부를 마친 뒤 현지에 남아 지금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인 슈발바흐성령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한국 교회에 대한 발언은 특히 조심스러웠다.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은 종교 본연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의미”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하나씩 풀어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 권위주의화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오죽하면 목회자들 사이에서 대형 교회 해체 이야기까지 나오겠느냐.”며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한국 기독교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개별 교회에서 특정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의 외적 성장이 이뤄진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신 목사는 “한국 교회는 목사의 카리스마와 설교의 흥미 등에 따라 교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시스템을 갖췄다.”면서 “신앙 활동의 주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중심이 되어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에 독일 교회 시스템과의 비교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독일의 국교(國敎)는 기독교다. 그는 “독일은 국민의 80%가 거의 절반 정도로 나뉘어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믿는 나라지만 보통의 경우 1년에 한두번 교회를 찾는 정도”라면서 “요란스러운 성직자도, 요란스러운 신도도 없다.”고 말했다. 특히 성직자들의 급여와 교회 지원 등에 주로 쓰이는 ‘종교세’를 걷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덕에 일부 목사의 수십억대 연봉 혹은 교회 확장에 혈안이 되는 모습 등과 같은 한국적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신 목사는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만큼 형식이나 제도가 아닌 정신을 현재 상황 속에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네바(스위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하)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하)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존 티한 미국 뉴욕 호프스트라대 종교학과 교수는 개신교건 이슬람교건 유대교건 가톨릭이건 유일신앙을 갖고 있는 종교들은 믿음의 체계 자체가 배타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미 폭력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일부 몰지각한 신도들의 그릇된 행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라는 얘기다. 가혹하다. 이러한 학술적 연구에 현실 속 부패와 타락, 세속적 권력에 대한 욕망의 이미지까지 덧대어지니 도대체 이성적 영역에서 한국 교회가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 하지만 세속적 권위가 아닌 신앙과 진리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종교의 몫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을 2011년 한국에서 다시 되새겨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을 근거지 삼아 로마 교황청과 한창 싸우던 즈음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활약했다. 루터와 같으면서도 달랐던 츠빙글리는 종교사적으로 유명한 ‘빵과 포도주의 성만찬’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루터와 갈라진다.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은 루터나 츠빙글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터는 공재설(共在說·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에 예수도 함께한다는 주장)을 취했지만, 츠빙글리는 루터의 입장조차 비판했다. 츠빙글리는 1524년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문구에서 ‘~이다’를 ‘상징한다’로 해석하며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상징설’을 내놓았다. 스위스는 물론 독일 남서부 몇몇 도시들은 츠빙글리 주장 쪽으로 기울며 루터교로부터 이탈하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성으로 부정한다.’면서 루터가 펄쩍 뛰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종교개혁지 답사 일정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대성당을 찾았다. 이곳은 4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종교전쟁인 카펠전쟁에서 숨지기까지 츠빙글리의 열정과 개혁 의지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던 곳이며 스위스 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1932년 성당 내부에 만들어진 자코메티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러 오는 이들로 붐빈다. 내부에서는 사진 한장도 찍지 못하게 하는 씁쓸한 상업성만 앞선다. 어쨌든 츠빙글리로부터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종교개혁 1세대들의 허리를 딛고 2세대의 대표주자 칼뱅이 등장한다. ●평신도 칼뱅,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끌다 장 칼뱅은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사제도, 신부도, 목사도 아니었다. 그저 인문주의를 체현하고 진지하게 인문학과 법학을 연구한 평신도였다. 하지만 가톨릭의 박해로 프랑스를 떠나 독일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그는 종교개혁 사상가들과 교유하며 사상을 벼린다. 그리고 1536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 잠시 머문 뒤 제네바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고 주도하며 스스로 큰 산맥이 된다. 제네바 관광객들이 78㎞ 둘레의 레만호만큼이나 많이 찾는 곳이 제네바대학 근처 바스티옹 공원이다. 이른 아침 공원을 찾았다. 커다란 부조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인 칼뱅을 비롯해 파렐, 베제, 녹스 4명을 조각해 놓았다. 이와 함께 1917년에 완성된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칼뱅, 츠빙글리 등 10명의 종교개혁가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공원에서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칼뱅이 제네바 종교개혁의 근거지로 삼았던 상 피에르 교회가 있다. 제네바에서 첫 설교부터 마지막 설교까지 진행됐던 곳이다. 교황청에 대항한 루터가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바탕으로 추진했던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의 법이 세속 사회를 이끄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는 일종의 교회 감독 법원을 만들어 시민들을 통제하며 엄격한 신앙생활과 실천을 요구했다. 시민들의 사치와 방종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제네바를 이른바 ‘하나님의 도시-성시(聖市)’로 만들겠다는 의지였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칼뱅의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엄격한 신정(神政)을 추구했기에 칼뱅의 이름으로 드리워진 그늘도 짙다. 칼뱅은 제네바를 종교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3~4년의 짧은 시간 동안 수십명에 이르는 사람을 오로지 종교적 이유로 교수형, 참수형, 화형시켰다. 예정설을 비난하거나 세례를 거부했다는 등의 이유였다. 종교개혁적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은 제네바에서 추방하기까지 했다. ●엄격한 신정 속 참형… 칼뱅주의 그림자 분쟁과 비방, 사기나 절도, 화려한 복장과 사치 등 시민들의 삶에 대해 엄격히 규제했던 만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강요된 폭력이었다. 칼뱅은 한국 개신교의 뿌리로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계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받아든 스코틀랜드의 존의 녹스(1514~1572)로부터 비롯됐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짜인 직제에서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공동체의 질서를 관리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성직자들의 독단을 견제하며 교회 내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 탓에 한국 교회가 칼뱅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은 실종된 채 형식의 엄격함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진다. 이성덕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요즘 개신교가 사회적 책임 역할을 잘 못해서 여러 비판과 함께 본래의 신앙을 망각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종교라는 것이 처음에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시간이 흘러가면 굳어지고 타락하는 게 일반적인 만큼 교회 개혁은 끝없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종교 본연의 역할이 포기된 채 세속적인 힘과 금권 등의 권력에만 탐닉하고 있다.”면서 “성직자나 교권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정하기는 어렵고 깨어 있는 일반 신도 등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외부의 자극을 촉구했다. 칼뱅은 평신도였다. 루터 역시 교회를 민중의 것으로 돌려줬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 세속 권력과 유착이 극심할 때 나선 것은 민중이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한국 교회 안팎에 슬그머니 던져준 훈수다. 글 사진 제네바·취리히·루체른(스위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인생의 뜻을 찾아 헤매던 철부지… 과분한 은총 입어”

    “인생의 뜻을 찾아 헤매던 철부지… 과분한 은총 입어”

    정진석 추기경(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 18일 사제 수품(受品) 50주년(금경축)을 맞았다. 정 추기경은 18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 300여명, 신자 2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금경축(慶祝) 미사를 가졌다. 그는 1961년 3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현직 추기경으로 금경축을 맞은 것은 정 추기경이 처음이다. ●베네딕토 16세·MB 등 축하 메시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51년 사제 수품을 받은 뒤 1998년 은퇴해 현직에서 금경축을 맞지는 못했다. 금경축 행사에서는 정 추기경과 함께 14명 신부들이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교황청 인류 복음화성 장관인 이반 디아스 추기경, 주한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신학교 동창 사제인 최창무 대주교 등이 축하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수석이 대신 읽은 메시지를 통해 “50년 전 오늘, 이곳 명동성당 제대에 엎드려 온 생애를 봉헌하신 추기경님은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흔들림 없는 중심이 되어 주셨다.”고 축하했다. ●“추기경님 취미는 방콕” 농담에 폭소 강우일 주교는 “내가 등산을 즐기듯 보통 사제들은 한 가지씩 사는 낙이 있는데, 추기경님은 참 무슨 낙으로 사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추기경님의 유일한 취미는 ‘방콕’(방에 머무는 것)”이라고 농담을 던져 폭소를 자아냈다. 정 추기경은 “인생의 뜻을 찾아 헤매던 철부지를 주님께서 제자로 불러 존엄한 사제직에 올려주셨다.”면서 “지난 50년을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저에게 과분한 은총을 주셨음에 감격할 뿐”이라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간호사 출신 소설가 정유정 새 장편 ‘7년의 밤’

    간호사 출신 소설가 정유정 새 장편 ‘7년의 밤’

    “그러니까 이게 전부 사실은 아니지요?”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는 소설의 초입부에서 ‘살인마의 아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묻는다. 사실이 진실이냐고. 그리고 소설 내내 침묵한다. 대신 어마어마하게 끔찍하면서 너무나도 불편한 얘기, 으스스하게 오래 가슴 졸여야 하는 서사(敍事)를 거침없이 풀어낸다. 그리고 소설의 끄트머리 즈음에서 스스로 대답한다.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냉소적 표현… ‘의도적 거리두기’ 그렇다.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한복판에 들어가 있어도 진실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수 년의 시간을 두고서 복판과 외곽을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할 뿐 아니라, 두려움 없이 바닷속 심연을 들여다보며 사실의 조각들을 꿰맞출 수 있는 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 그리고 소설을 덮을 때쯤 그는 침묵으로 웅변한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 말라고. 명백해 보이는 죽음과 죽임, 죄와 벌, 그리고 선과 악 등의 경계도 흐려질 수 있고, 진실과 사실이 갖고 있는 간극 만큼이나 서로 스치듯 교차하면서 공존하고 있을 뿐이라고. 2009년 세계문학상을 받은 ‘내 심장을 쏴라’ 이후 2년 동안 내내 웅크린 채 소설 쓰기에 몰두해온 정유정(45)이 장편소설 ‘7년의 밤’(은행나무 펴냄)을 내놓았다. ‘7년의 밤’은 한 마을 주민들이 몰살당한 ‘세령호의 재앙’이라는 대참사를 저지른 살인마와 그의 아들 서원, 그리고 또 다른 미치광이 살인마와 그의 딸 세령이 끌고 가는 이야기다. 7년 전 그날 밤의 사건 이야기가 그날 이후 7년 동안의 이야기 속에 액자 소설 형태로 담겨진다. 열 두 살의 서원은 7년 동안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굴레 속에서 세상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쉼 없이 학교를 전전하다 결국 등대마을까지 떠밀려 온다. 그날 밤의 또 다른 증언자인 승환은 서원과 함께 지내며 그 시간 동안 사실의 틈바구니에 버려진 진실을 찾아 헤맨다. 병적 집착증을 보이는 또 다른 미치광이 살인마는 교통사고 뒤 목졸려 숨진 딸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비이성적인 살인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그후 7년 동안 가슴 서늘한 복수를 준비한다. 정유정은 ‘7년’에서 격정적이면서도 탄탄한 문장과 짜임새 가득한 상황 설정으로 읽는 이들을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만들다가도 문득 중간중간 냉소적인 표현을 배치해 ‘의도적 거리두기’를 주문한다. 진실을 찾는 여정은 몰입만으로도, 관조만으로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서둘러서도 더뎌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서사와 모든 인물들, 모든 사실 관계들은 7년 전 그날 밤의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거나 맹렬히 모여든다. 또한 발과 땀으로 쓰여진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 곳곳에 풀어헤쳐진 취재와 노력의 흔적들은 2년 전 ‘내 심장을 쏴라’에서 보여줬듯 정유정 소설이 갖는 소중한 미덕 중 하나다. ●죽음·복수… 인간 내면 치밀한 묘사 ‘7년’에서는 스쿠버다이버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려내는 심해 깊은 곳 풍경들이 마치 산소탱크를 짊어지고 직접 바다로 뛰어든 듯 생생히 눈앞에 펼쳐진다. 몰아치는 물의 흐름 속에서 느낄 법한 불안과 공포심의 미세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는다. 세령호와 세령댐, 그리고 등대마을이라는 정교한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낸 뒤 나무 한 그루, 작은 둔덕 하나, 고양이 한 마리까지 촘촘히 배치하는 집요함도 보여준다. 정유정은 “스티븐 킹(미국 추리문학 대표작가)의 작품을 갖고 문장 공부를 했다”고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문예창작과 출신들이 잡고 있는 주류 문단에서 ‘간호사 출신 소설가’라는 이력 자체가 이미 독특하다. 스티븐 킹을 사숙(私淑)한 작가답게 죽음, 폭력, 복수, 애정 같은 격정 앞에 고스란히 내던져진 인간의 내면 심리를 치밀하게 따라가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은 채 잔인하리만치 덤덤히 풀어가는 솜씨는 전작(前作)을 뛰어넘는 성취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찌질한 기타리스트 ‘롹 스피릿’으로 ‘樂’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찌질한 기타리스트, 가진 것은 단 하나 ‘롹(록) 스피릿’뿐이다. 그냥 “떠나면 돼.”, “해버리면 돼.” 등을 되뇌면서 무작정 저지르는 것을 보면 ‘롹 스피릿’이라는 것은 말은 그럴싸하지만 얼핏 보면 ‘무대뽀 정신’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다. 그럴까.  박상(39)의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와’(자음과모음 펴냄)는 궁상 기타리스트 고남일이 영국과 한국을 무대삼아 ‘롹 스피릿’ 하나로 자신의 글로벌하게 찌질한 삶과 맞서는 이야기다. 고남일은 보증금 100만원의 서울 산동네 자취방과 낡아빠진 오토바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목숨처럼 아끼는 기타도 과감히 처분하고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당연히, 런던에서도 무엇 하나 되는 것 없는 삶은 계속된다. 대신 불법체류자로 추방될 때까지 좀체 오지 않는 런던의 시내버스 15번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롹 스피릿’을 새로 배운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도전임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임을 깨닫는다.  박상은 록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철 지난 음악 장르의 하나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가치 체계, 철학임을 자부하며 ‘15번’을 통해 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박상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지만 문단 주류의 언어와 문장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다고 그가 문체주의를 지향한다, 고 근엄하게 평하면 조금 어색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각종 말장난과 비속어 등을 쏟아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최소한 실소라도 머금게 해야 만족하는 눈치다. 지난해 인터넷 웹진에 연재했던 내용을 책으로 묶으면서 그나마 비속어들은 대거 거둬들였다.  박상은 “제목 가리고, 작가 가리고 오로지 문장만을 보고서도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개성 있는 문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내놓은 소설집 ‘이원식씨의 타격폼’, 장편소설 ‘말이 되냐’ 등만 갖고도 목표는 이미 어느 정도 달성한 듯싶다. 다만, 네티즌들이 쏟아내는 문체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이룰 지가 그에게 남아 있는 숙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외규장각 28일 한국 온다…5월까지 네차례 반환

    프랑스가 반환하기로 한 외규장각 도서가 이달 말부터 5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반환을 위해 프랑스를 방문 중인 대표단이 16일 오전 11시(현지시간) 파리에서 외규장각 도서 소장기관인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외규장각 도서 환수를 위한 약정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외규장각 도서는 오는 28일부터 5월 31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항공편을 통해 국내에 들어올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반환을 기념해 전통 의례에 따른 기념행사와 특별 전시회 등을 개최할 계획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자정능력 상실 한기총 해체하라”

    한국 개신교의 분열상을 보다 못한 교계 단체들이 ‘한기총 해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개신교계 단체들은 16일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표성이 없음에도 개신교 대표기구를 자임해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해체되더라도 교회연합운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그동안 기독교를 빙자해 특정 정치이념을 추구해온 데다 (이번 내홍 사태로) 자정능력마저 상실했음을 보여준 만큼 한기총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정치실천연대, 교회개혁실천연대, 교회개혁지원센터,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생명평화연대,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평화누리, 희년함께 등 10개 단체들로 구성된 ‘한기총 해체를 위한 기독인 네트워크’는 지난 3일 금권선거 논란과 관련해 정체성 위기에 대한 대책을 묻는 질의서를 한기총에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어 한기총 해체를 위한 탈퇴 활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김애희 교회개혁실천연대 실장은 “예수장로교 고신총회는 이미 한기총 탈퇴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면서 “어느 한쪽에서 한기총 탈퇴가 이뤄지면 중소 교단 중심으로 확산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앞서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면서 한기총 해체를 강하게 촉구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성철스님 조명 학술포럼

    성철스님 조명 학술포럼

    내년은 퇴옹 성철(1912~1993) 스님의 탄생 100주년이다. 성철 스님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는 학술포럼이 올해부터 3년 동안 열린다. 성철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은 15일 “오는 2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퇴옹 성철의 100년과 한국 불교의 100년’이라는 주제로 첫 학술 포럼을 갖는다.”고 밝혔다. 이 포럼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해마다 3, 5, 9, 11월 넷째주 목요일에 포럼을 열 예정이다. 내년 주제는 ‘퇴옹 성철과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우치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성철 스님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인 2013년에는 ‘퇴옹 성철과 한국 불교의 미래’를 다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루터를 베낀 스피노자?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루터를 베낀 스피노자?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17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문구다. 마르틴 루터는 15살인 1498년부터 1501년까지 부모님을 떠나 아이제나흐에 있는 라틴어학교를 다녔다. 그가 청소년기에 머물렀던 아이제나흐의 소박한 2층집 앞에는 ‘그리고, 내일 세상이 멸망함을 알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마르틴 루터’(Und wenn ich wte, da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geht, wu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aumchen pflanzen.)라고 새겨진 기념비석이 사과나무 한 그루와 함께 세워져 있다. 스피노자의 아포리즘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을까. 그것도 100년도 훨씬 전 인물인 루터의 이름까지 박아서? 설명을 들으면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나 이 문구는 젊은 루터가 일기장에 적은 글귀다. 독일 등 유럽에서는 아무런 의심없이 루터의 명제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기장의 기록이라면서도 당시 일기 기록 날짜와 그 문구 외의 내용 등이 덧붙여지지 않은 점은 정확한 근거를 내세우지 못한 것으로 보여 아쉬움으로 남는다. ‘모든 것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을 주장하던 스피노자의 사상과 맞아떨어진 명제이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국내에서 읽혔을 수도 있다. 신이 깃들어 있는 사과나무를 심음으로써 신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종교개혁 시기에 많이 회자된 말이기에 스피노자가 인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더(루터는 나중에 자신의 성을 ‘루터’로 바꿨다.)는 일찍이 총명하며 공부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아들이 법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 아래 자란 루터는 아이제나흐로 오기 전에는 마그데부르크로 유학을 하며 2년 동안 중세 수도원적 공동생활의 영성을 깊게 배웠다. 그리고 라틴어 공부를 마친 뒤에는 다시 에르푸르트대학으로 옮겨 인문학 석사과정까지 마친다. 스피노자의 것인지, 루터의 것인지 시비를 가리기에 앞서 분명한 점은 ‘아이제나흐 최고의 학생’으로 평가받던 어린 루터가 이룬 철학적 사유의 경지다. 충분히 주목하고 둘러볼 만한 독일 튀링겐주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글 사진 아이제나흐(독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마르틴 루터(1483~1546)의 흔적을 더듬는 여정 자체는 그다지 버거울 게 없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광부로 생계를 꾸리려는 아버지를 따라 만스펠트로 옮긴다.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아이제나흐, 에르푸르트 등에서 유년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과 토대를 착실히 닦는다. 그리고 장성한 뒤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성 등에 굵직한 발자국을 찍었다. 1521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마지막 파문장을 받은 보름스를 제외하면 모두 독일 동북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도시에서건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이면 넉넉히 닿을 수 있는 만큼만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넓지 않은 곳에서 그가 이뤄낸 업적과 생애를 따라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종교사, 나아가 인류 역사에 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까닭이다. 몇년 전 독일 정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인류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론의 여지 없이 압도적인 1위로 루터가 꼽혔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문에 내건 ‘95개조 명제’는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 금권에 대한 부패 등으로 얼룩진 중세 교회 대변혁의 신호탄이었다. 지금껏 개신교에서 종교개혁주일로 삼고 있는 이날이 2017년이면 500주년이 된다. ●신앙·믿음·개혁을 낳은 ‘정신 문화재’ 비텐베르크는 아예 ‘루터의 도시’로 통한다. 비텐베르크 교회가 대다수 루터 관광객이 찾는 첫 방문지다. 루터가 처음으로 설교를 맡아 신도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으면서 95개조 명제를 내걸고 로마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신감을 안겨준 공간이다. 500년 전 루터 생존 당시 벽보의 흔적은 화재로 없어졌다. 대신 1857년 빌헬름 황제가 부분 재건축을 하면서 새로 철문을 만들고 거기에 ‘95개조 명제’를 촘촘하게 새겨 놓았다.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루터의 개혁 정신을 영구히 남겨 놓은 것이다. 교회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은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면서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마침 교회를 찾은 독일 신학자들 또한 그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교회당 안에 나란히 자리한 루터와, 종교개혁의 동료였던 멜란히톤의 무덤 등을 둘러보고 있었다. 교회에서 천천히 걸어 5분쯤 가면 시청 광장이 있다. 인구 2만의 도시에 찾아오는 연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이곳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또다시 도보로 10여분쯤 떨어진 곳 ‘루터의 거리’ 작은 로터리 한구석에는 이른바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파문장을 불태우면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언한다. 그로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감행한 곳이다. ●민중들에게 새 길을 보여준 루터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 결과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던 도중 에르푸르트 근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해 기사 행세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어 지내며 1521년 12월~1522년 2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성경과 성만찬 포도주의 나눔은 신과 민중들의 직접 만남을 가능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음은 물론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뮌처(1490~1525)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사회 변혁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초기에는 이들에게 동정적 입장을 갖던 루터였지만 분위기가 급격히 변해가자 그들과 단호하게 결별하며 제후들의 편에 선다.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는 인간보다 더 유독하고 해롭고 악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이뤄놓은 결과물의 영향으로 복음서를 자유롭게 읽은 농민들에 대한 폭력 진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루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대목이다. 로마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갓 피워낸 종교개혁의 작은 싹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동정론과, 로마 교황에서 제후들로 종교 권력이 바뀌는 ‘제후들의 종교개혁’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루터와 헤어지느니 죽는 게 낫다” 마르크스에게는 레닌이 있었고, 피델 카스트로에게는 체 게바라가 있었다. 마오쩌둥 곁에는 저우언라이가 든든히 서 있었다. 마틴 루터에게는 멜란히톤(1497~1560)이라는 최고의 조력자가 있어 개혁 반발 세력과 급진개혁 세력 사이에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선생님’이라고 일컬어지는 멜란히톤은 빼어난 라틴어, 히브리어 실력으로 튀빙겐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 등에서 문학, 신학, 철학, 수사학 등을 강의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왕자와 공작 등 귀족계급들이 오로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어 인기를 실감케 했다. 멜란히톤이 있어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더욱 신속하고 정교해 질 수 있었다. 또한 제후들과의 갈등, 개신교 내부의 숱한 논쟁 등 주요 지점마다 루터가 거칠고 과격하며 전투적인 말과 행동으로 방향을 제시하면, 멜란히톤은 학자적인 부드러운 성격을 앞세워 조정하고 중재하며 종교개혁의 잔가지를 다듬어갔다. 그가 죽음의 공간인 무덤마저 루터와 사이좋게 나누고 있고, 기념비적인 동상 또한 루터 곁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비텐베르크 대학 바로 옆건물인 멜란히톤의 생가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최근 공사에 들어가 직접 둘러볼 수는 없다. ●수녀와 결혼한 애처가 루터 제후와 농민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렸던 루터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만큼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 비텐베르크 루터기념관 2층 전시관에는 글 하나가 눈에 띈다. ‘케테는 프랑스나 베네치아를 줘도 바꾸지 않겠다. 1531년’ ‘케테’(Kthe)는 전직 수녀였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의 애칭이다. 루터는 독신의 지옥으로부터 성직자를 해방시키고,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수녀원의 수녀들을 모두 탈출시켜 결혼까지 시킨다. 그리고 1525년 마지막까지 남은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직접 결혼한다. 루터의 나이 42세, 보라의 나이 26세였다. 루터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장례식”이라면서 장례복을 입고 나타나 루터를 깜짝 놀라게 한 뒤 “하나님이 돌아가셨기에 당신이 지금 절망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로, 어렸지만 당찬 여성이었기에 루터 역시 끔찍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사진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보름스(독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법원 “길자연 회장 인준절차 무효” 두쪽 난 한기총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대표회장 선임을 둘러싸고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법원이 일단 전임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오는 18일 나오는 신임 대표회장 직무정지 가처분 소송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4일 이광원 목사 등 15명이 제기한 임시총회 개최 금지 가처분신청 소송을 받아들이면서 “3월 15일 임시총회에서 정관 개정을 하거나 정관 개정에 따른 후속 조치로 징계를 하는 것은 무효”라면서 “지난 1월 20일 한기총 총회 당시 이광선 의장의 정회 선언이 적법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임시의장을 선임해 길자연 목사를 대표회장으로 인준한 결의는 절차상 중대한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광선 전 한기총 대표회장 등 ‘한국교회와 한기총 개혁을 위한 범대책위원회’ 소속 목사들은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 교회와 한기총의 금권 선거를 종식시켜야 한다.”면서 “한기총은 연합과 일치 정신으로 진정성을 갖고 대화를 통해 모두가 공감하는 개혁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길자연 신임 대표회장은 이날 오후 한국기독교연합회관 강당에서 임시 총회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한기총은 지난해 말 선거를 통해 길 목사를 새 대표회장으로 뽑았으나 금권 선거 시비 등 절차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조용기 목사 또 舌禍

    조용기 목사 또 舌禍

    “일본 대지진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조용기(75)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발언을 둘러싸고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비판 속에 조 목사는 15~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도쿄순복음교회 창립 34돌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14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조 목사는 전날 한 개신교 인터넷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 대지진은)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전화위복이 돼서 이 기회에 주님께 돌아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준희 여의도순복음교회 홍보국장은 “(조 목사가) 그동안 일본 선교에 각별한 공을 들여왔는데 그만큼의 통탄스러움과 안타까움에서 나온 발언”이라면서 “계속되는 여진과 방사능 유출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사랑과 위로의 마음으로 일본행을 강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트위터를 통해 “이런 정신병자들이 목사질을 하고 자빠졌으니…”라면서 “더 큰 문제는 저런 헛소리를 듣고 ‘아멘, 할렐루야’ 외치는 골빈 신도들…종교가 아니라 집단 히스테리”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네티즌들도 “봉사활동에 먼저 나서야 할 목회자가 할 말이 아니다.”, “하나님 안 믿으면 죽어야 하나.”, “조 목사의 말이 맞다면 우리나라에도 대지진이 일어나겠다. 한국교회가 몽땅 하나님과 멀어졌으니…” 등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앞서 ‘대통령 하야운동’ 발언으로도 논란을 빚었던 조 목사는 17일 귀국할 예정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종교계도 日 대지진 복구 지원 나섰다

    국내 종교계가 일본 지진 피해 돕기에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김주원 원불교 교정원장은 13일 “피해가 확산되면서 생겨나는 일본 국민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멀리 이국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가슴 아프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 원불교 전 교도는 아픔을 함께 느끼며 더 이상 일본 국민들의 피해와 희생이 없도록 기도하고, 조속히 피해가 복구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원불교 은혜심기운동본부는 전국 600여개 교당에서 모금 운동을 벌이는 한편 구호물자를 모으고 구호대 조직에 나섰다. 교당별로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도 실시할 예정이다. 전날에는 정진석(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이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참사 현장에 갇혀 있는 생존자들의 구조 작업이 조속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부상자들의 빠른 회복을 기도한다.”고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천주교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www.obos.or.kr)와 한국카리타스(www.caritas.or.kr)를 통해 일본 지진 피해 지역에 긴급 구호자금 5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고 오는 20일 교구 내 각 본당 주일미사 때 특별헌금 모금운동을 실시하기로 했다. 구세군도 일본 구세군과 협력해 자선냄비 홈페이지(www.salvationarmy.or.kr)를 통해 모금 활동을 벌이는 한편 오는 18~19일 서울 시내 20여곳에서 자선냄비 모금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서울 강남 사랑의교회는 오는 20일까지 일본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특별 헌금을 모금하기로 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