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묵은 ‘기업 총수 규제’ 바꾸자”
“대기업 지배구조 현실 반영 못 해법인 중심 재편 후 단계적 축소해야”
1980년대 만들어진 ‘동일인 지정제도’를 자연인 중심에서 법인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재계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 확산으로 기업집단의 실질적 의사결정이 이사회 중심으로 이동했음에도 총수 개인에게 광범위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현 구조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8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동일인 지정 방식, 공시대상기업집단 기준, 형벌 체계 등 공정거래 분야 제도개선 과제 24건을 제출했다. 핵심은 ‘동일인을 자연인 대신 법인으로 지정하고, 장기적으로 동일인 지정제도 자체를 단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요구다. 한경협은 “최근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는 개인이 아닌 법인 의사결정 중심으로 바뀌었다”며 “자연인 동일인 체계는 이미 기능적 수명을 다했다”고 지적했다.
특수관계인 범위가 과도하게 넓어 총수 개인에게 사실상 통제 불가능한 친족 정보 제출 책임이 돌아가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현행 제도는 4촌 혈족·3촌 인척을 기본으로 하되, 조건에 따라 6촌 혈족·4촌 인척까지 포함된다.
이 때문에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 친족의 재산·투자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면 동일인이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한경협은 “규제 범위를 직계존비속·배우자 중심으로 축소하고 지정자료 제출 책임도 ‘개인 총수’가 아닌 ‘기업집단 대표 법인’으로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동일인 지정·대기업집단 규제 체계가 국제 기준과 비교했을 때 독특하다고 지적한다.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정거래법의 본래 취지는 독과점, 담합, 카르텔 같은 경쟁 제한 행위를 규율하는 것”이라며 “대기업집단 전체를 묶어 일반 규제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90개가 넘는 기업집단을 공정위가 모두 들여다보는 구조인데 이는 경쟁당국 본래 역할과도 거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와 비교하면 한국 제도가 얼마나 이례적인지 더 분명해진다.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만 공정거래법으로 대기업집단을 억제하고 규제한다”며 “심지어 중국, 러시아, 베트남 같은 공산권 국가에도 유사한 제도가 없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집단이 무리하게 확장하던 1970~80년대의 규제 배경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며 “현재 금융 시스템에서는 과거와 같은 ‘문어발 확장’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한경협은 현행 제도가 총수 개인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과할 수 있어 투자 의욕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기업집단 신고 때 계열사 누락 시 형사처벌까지 부과되는 구조는 실제 경영 활동과 괴리되는 것은 물론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부당지원행위 등 규제가 동일인 개인에게 집중되면서 장기적 투자와 신사업 추진에 제약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규모 민간 투자가 필요한 인공지능(AI)·바이오·양자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홍대식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규제의 본래 취지는 경쟁 제한 행위를 막는 것이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는 혁신적 투자까지 제약하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주 교수 역시 “미국의 알파벳·테슬라 같은 기업은 그룹 내 현금 흐름을 자유롭게 돌려 신사업을 장기적으로 지원한다”며 “한국만 대기업집단 제약이 강해 혁신 투자 구조가 제도적으로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한경협은 지주회사나 핵심 기업 중심으로 동일인을 지정하고 장기적으로 제도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안을 제안했다. 동시에 공정위는 지정 대상 기업집단의 내부거래와 주식 소유, 채무 보증, 계열사 현황 등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공개함으로써 법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더라도 과도한 지배력 확대나 부당 내부거래를 통제할 수 있다.
한경협은 이러한 개선 방안이 총수 일가의 지배력 남용과 내부거래 문제를 여전히 통제하면서, 기업들이 투자와 경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균형점이 될 것으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