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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있는 한 계속 촬영… 삶·죽음 별개로 느껴지지 않아”

    “살아있는 한 계속 촬영… 삶·죽음 별개로 느껴지지 않아”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촬영을 마치고 편집 작업을 하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일본의 노 감독들처럼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생각입니다.” 지난 19일 교통사고로 별세한 박철수(1948~2013) 감독이 이달 초 발간되는 문학계간지 ‘문학의 오늘’ 봄호에 남긴 생전 인터뷰 내용이다. 박 감독은 지난 1월 영화감독 겸 시인인 백학기(54)씨와 나눈 원고지 50장 분량의 길지 않은 인터뷰에서 유작이 된 영화 ‘생생활활’을 마무리하는 즐거움을 쏟아냈다. 2003년 ‘녹색의자’를 마지막으로 침잠했던 그는 신인배우 오인혜를 내세워 찍은 영화로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파격 베드신이 있는 이 영화는 성과 사랑을 소재로 했다. 박 감독이 “한국미디어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를 들어봤는데 성과 섹스가 많았다”며 “인터넷에 수많은 음란물이 흘러 넘치고 있지만 성 빈곤을 넘어 ‘성 영세민’이라고 표현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20개 챕터로 구성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주연 오인혜에 대해 “10여년 이상 이 바닥에서 버티다가 고향으로 내려간 배우였는데, 간호장교, 꽃제비, 여기자 겸 작가, 헨리 밀러의 연인, 게이샤, TV토론 진행자 등 1인 10역을 능히 소화했다”고 칭찬했다. 그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미지의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 최종적으로 후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사회현상을 냉정히 바라보며 감독으로서 끊임없는 문제의식이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한 행복하다. 자본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작품을 찍어가는 방식을 고수하는 나는 참 행복한 사내다”라고 했다. 그는 한·중 합작드라마 ‘너는 내 운명’ 36부작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2006년 1년 동안 중국 베이징에 머무르기도 했는데 “공항에 고적대까지 보낸 중국의 환대에 깜짝 놀랐으나, 중국과 한국의 제작 시스템이 너무 차이가 커서 아연실색했고, 인생을 영화로 친다면 편집하고 싶다”고 밝혔다. 당시 약속된 투자가 무산돼 사재를 털어 넣어야 하는 등 아픔이 있었다. 후속작에 대한 계획도 있었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분단국가에서 한국사회를 동경하고 탈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거꾸로 한국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은 없을까? 그래서 한국 영화감독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한국에서 베이징, 그리고 북쪽으로 가는 로드무비 형식의 영화를 찍어볼까 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과 같은.” 젊은 시절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읽고 있다는 그는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나는 만약 치유불가능한 병에 걸린다면 죽음을 스스로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육십을 넘기고 칠십을 향해 가다 보니 삶과 죽음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유작 ‘생생활활’은 오는 21일 개봉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정 온라인서 생생하게 만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정 온라인서 생생하게 만난다

    “동지 여러분! 나는 上海(상하이)의 우리 臨時政府(임시정부)의 사명을 띠고 현재 노력 중에 있습니다. 3월 1일 漢城(한성)에서 독립을 선언한 이래, 2000만 우리 형제 자매는 힘을 모으기로 결심하고 뜻을 모아 차라리 이 몸은 滅(멸)할지언정 이런 뜻은 不滅(불멸)이라고 가일층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倭奴(왜노)들은 조선 통치가 곤란해지고, 조선 민족의 일본 同化(동화)가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문제에 봉착하자 크게 당황해하는 오늘날, 이에 따라 만방은 한목소리로 우리 독립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1872~19 35)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1월 27일 간도에 있는 독립운동 간부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수립된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전선을 이끌었다. 이동휘는 편지에서 “우리 20 00만의 苦衷(고충)을 살피고 독립운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진 상해 임시정부는 여기서 한층 더 2000만의 소망과 세계만방의 신임을 寸刻(촌각)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3·1절을 앞두고 국내외에 흩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45권과 별책 6권 등 모두 51권에 대한 인터넷(http://db.history.go.kr/url.jsp?ID=ij) 서비스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자료집’은 이동휘의 편지 등 임정 인사들이 주고받은 서한집을 비롯해 임정의 통치조직과 기본원칙을 명시한 임정 헌법과 공보(公報), 국회인 임시의정원의 회의록, 임정이 간행한 역사서 ‘한일관계사료집’, 기관지인 독립신문 등을 망라하고 있다. 한인애국단·광복군 등 임정 산하 단체 자료와 미국·중국·유럽 각국에 대한 임정의 외교활동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한국국민당 등 정당 관련 자료와 사진 자료 등도 수록하고 있다. 국편은 광복 60주년인 2005년 학계 전문가들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자료집 편찬에 착수, 지난해 51권을 완간했다. 국편이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함에 따라 연구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임시정부의 험난했던 여정과 활동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됐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1924년 日교과서도 ‘독도는 조선땅’

    1924년 日교과서도 ‘독도는 조선땅’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강제 편입했지만 1924년 발간된 일본 교과서에 ‘독도가 조선땅’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해 가르친 증거가 발견됐다. 한일문화연구소장인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는 27일 독도를 조선땅이라고 기술한 일본의 근대 중등학교 교과서를 공개했다. 1924년 10월 1일 일본 메이지 서원에서 발간한 이 교과서에는 러일전쟁 당시 전투 상황을 담은 지도 ‘일본해해전도’(日本海海戰圖)가 실려 있다. 이 지도에는 1905년 5월 28일 오전 10시 일본 제4함선이 전투를 지휘했다는 설명과 함께 지명을 소개하는 색인란에 죽도(독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명시돼 있다.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일본이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지만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강제 편입한 뒤 독도를 ‘죽도’로 명명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독도를 일본 영토와 다른 색으로 표시한 지도는 있었지만, 독도를 조선땅으로 명시한 일본 교과서가 발견된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안다”면서 “일본이 1905년 독도를 빼앗고 이름도 바꿨지만, 일본 학생들에게는 독도가 조선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쳤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몸 바쳐’ 돈 벌어오던 형이, 엄마를 죽였다

    ‘몸 바쳐’ 돈 벌어오던 형이, 엄마를 죽였다

    살인 사건이었다. 13평 아파트에 사는 중년의 변계숙이 살해됐다. 범인은 볼링공으로 내려쳤다. 범인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주변을 돌아다닌 터라 7명이 경찰에 신고 전화를 하고 15분 만에 잡혔다. 현장검증에서 범인은 거침없이 자신의 범행을 재연했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살해 직전 변계숙에게 건넸다고 했다. 신문 1면 헤드라인은 ‘후안무치한 살인범 춤추듯 현장으로’로 채워졌고, 2면과 3면 사진은 ‘태연자약하게 범행 재연 반성의 기미 전혀 없어’가 됐다. 현장검증이 끝나 사진기자들과 형사들이 사라진 살해 현장, 아파트에는 락스와 향균스프레이, 수세미를 든 조인호가 서 있다. 조인호는 변계숙의 아들이다. 또한 범인은 조인호의 형이다. 여기까지 읽고서 존속살해를 당한 피해자이자 범인의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인호의 굴곡진 인생이 등장하려니 했다. 그러나 안보윤(32)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모르는 척’(문예중앙 펴냄)의 주인공은 조인호의 네 살 위 형, 어머니를 살해한 조인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신문 사회면에 있을 법한 보험 사기라는 것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니 이야기의 대강과 결말도 윤곽이 잡히는 듯했지만 예단은 어긋났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형제의 심리적 갈등과 편애가 낳게 되는 병리적인 감정, 착한 자식이자 가장으로 길러지는 맏이의 운명, 제대로 살고 싶은 가난한 사람들의 욕망 등이 ‘자본주의적 폭력’과 뒤얽혀 굴러가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이나, 어느 집단이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너 아니면 안 돼’라는 마법 같은 주문에 휘둘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사람들은 산다. 그런데 헌신적인 사람들은 어느덧 그 주문에 휘말려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 하나 고생하면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며 각오를 다진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은 고작 ‘제가 좋아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이해된다. 전업주부였던 변계숙의 가족은 가장인 아버지가 돌연사한 탓에 가난한 P시로 흘러왔고, 무능한 엄마 대신 12살의 맏아들이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머리를 벽에 짖이기고, 망치로 발가락뼈를 부러뜨리며,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려 206개의 뼈가 모두 조각조각 났는데도 인근은 말한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의 범죄의 기원은, 근친살해의 기원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부모가 동반자살해 절집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었던 석문정은 이런 잔혹하고 매정한 상황을 적시한다. “제일 나쁜 건 있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야.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도 당장 나한테 이득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려. 못 이기는 척, 모르는 척 받아들이게 돼. 그게 좀 더 지나면 당연해져 버리는 거야.”(201쪽) 가난하고 남루한 P시 청소년의 대화도 암담하다. 가난은 뿌리가 깊다. “아빠가 시멘트 개고 엄마가 벽지 바르고 내가 벽돌 나르면 알콩달콩 신도 나겠다, 씨발. 노가다가 가업이라니 끔찍하잖아.”(207쪽) 왜 제목이 ‘모르는 척’인가. 사실 우리는 헌신적인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고 영악하게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32살의 젊은 작가가 묻고 있다. 우리는 또 무엇을 모르는 척 회피하고 있는지 큰 바늘로 쑤시는 듯하다. 같은 사실을 처한 상황과 인지 수준에 맞게 이해하는 인근과 인호의 엇갈리는 서술은 영화 ‘오! 수정’이나 소설 ‘산체스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작가는 2005년 문학동네 작가상으로 등단해 2009년 제1회 자음과모음 문학상을 받았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통일신라 유적서 발자국 발견

    통일신라 유적서 발자국 발견

    경기 화성시 안녕동에서 구릉 말단에 등고선을 따라 만든 통일신라시대 계단식 논이 발견되고 거기에서 사람 발자국이 드러났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가경고고학연구소는 서부우회도로 화성시 구간에 있는 이곳을 지난해부터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조성한 마을의 생활유적을 찾아냈다고 22일 말했다. 이 생활유적에서는 계단식 논 경작지와 기둥을 땅에 그대로 박아 세운 굴립주(掘立柱) 건물터, 땅을 움처럼 파서 만든 집터인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우물 등이 드러났다. 움집과 굴립주 건물은 일정한 군집 형태로 분포하는 특징을 보였다. 수혈주거지에서는 수혈 내외에 기둥 구멍이 다수 열을 지어 발견됐으며, 굴립주 건물터에서는 위치에 따라 규모와 기둥 구멍 크기, 깊이 등이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조사단은 “당시의 건물터 구축 방식은 물론 가옥을 중심으로 한 공간분포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이들 건물터 내부에서는 회청색이 돌고 단단하게 구운 시루와 사발, 뚜껑, 굽다리 접시 외에도 회갈색에 연질의 항아리와 손잡이 달린 잔 등 토기가 출토됐다. 구릉 하단부에서 발견된 계단식 내부에서는 작은 도랑을 비롯한 흔적이 다수 발견됐으며, 특히 사람 발자국도 잘 남아 당시의 농사짓는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한국인 1880년 전후 사할린 거주했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는 단편소설 ‘귀여운 여인’과 희곡 ‘갈매기’ ‘벚꽃동산’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체호프는 1895년 ‘사할린 섬’이란 기행문을 썼고, 그 이후 체호프의 문학은 변화됐다. 장르는 소설에서 희곡으로,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을 고려한 사실주의 계열로 바뀌었다. 체호프를 연구하는 문학평론가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안톤 체호프 사할린 섬’(배대화 번역, 김영수 해제)이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됐다. 체호프는 1890년 4월, 심기일전을 위해 모스크바를 출발해 시베리아와 사할린 섬을 7개월 정도 돌아봤다. 그리고 1893년 10월부터 1894년 7월까지 ‘러시아사상’이라는 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했고, 이후 단행본으로 묶어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학술서가 아닌 체호프의 기행문을 출간한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학술서로서 주목받을 만하다. 첫째 체호프는 이 책에 러시아와 일본의 남사할린 영유권 문제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875년 러·일은 남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양국의 경계로 확정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를 두고 체호프는 “일본에 매년 100만 루블의 소득을 넘겨주었다”고 비판했다. 체호프는 일본이 사할린을 발견한 것이 러시아보다 앞섰다고 이 책에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나온 러시아 쪽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도 17~18세기에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자국의 영토로 표기하고, 예카테리나 2세는 포고령을 내렸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1880년 전후로 한국인이 사할린에 상당수 이주해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최초로 기록했다. 이 책에 해제를 붙인 김영수 연구위원은 “길랴크인이 옥저인일 가능성이 있어 유의미하다”고 말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기독교 국가 미국의 타 종교에 대한 ‘아름다운 관용’

    미국 달러화 지폐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 재채기를 하면 주위에서 ‘신의 축복을’(God bless you!)을 남발하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다짐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려면, 종교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중동에서 벌어진 전쟁을 두고 경제적으로 ‘석유전쟁’이라고 하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로 ‘21세기의 십자군 전쟁’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 홀로 볼링’을 출간해 미국에서 시민사회에 대한 참여 등 공동체적인 삶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이 사회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한 하버드 케네디스쿨 교수 로버트 D 퍼트넘이 신간을 내놓았다. 노트르담 대학교 교수이자 미국 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 E 캠벨과 함께 펴낸 ‘아메리칸 그레이스’(American Grace)(정태식·안병진·정종현·이충훈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에서 미국에서의 종교 역할을 분석했다. 5년간 미국인 5700여명을 인터뷰해 내놓은 결과다. 미국은 전체 국민의 75%가 기독교 신자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종교가 정치와 강력하게 결합한 양상을 보이면서 정치와 종교에 염증을 느낀 많은 젊은이가 제도화된 종교를 버리고 떠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종교가 보수적인 정치인, 공화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종교를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퍼트넘은 진단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인 1970~1980년대에 세속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종교 우익이 등장한 것과 연결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종교화, 종교의 정치화는 오히려 미국에서 종교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종교가 없는 이들이 늘어나는 반면 복음주의 같은 보수 종교 세력도 동시에 힘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종교인이 줄었다고 해서 미국 내에서 종교 간의 전쟁이나 심각한 갈등이 빚어진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어찌 된 것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종교 간 결혼이 더 빈번해졌고,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도 늘어났다는 분석이다. 다른 종교 신도와 깊은 우정을 나눌 때 기부, 자원봉사 등 더 많은 시민공동체 활동을 하게 됐다는 분석했다. 결정적인 것은 목사의 설교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통해 겪는 사회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를 믿는 자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류 개신교가 79%이고, 가톨릭 신자는 83%까지 올라간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도 절반이 넘는 54%가 타 종교인의 구원을 믿었다. 다만 ‘진보적’인 주류 개신교 지도자들은 50%도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 평신도들의 타 종교에 대한 관용성은 놀라운 것이다. 더 긍정적인 변화로 퍼트넘은 “교회에서 정치에 대한 설교가 줄었다”고 평가했다. 한국사회는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사회다. 그러나 선거 때가 되면 교회에서 정치적 설교가 늘어나고,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흔적들이 돌출하곤 한다. 대통령의 종교가 개인의 종교 활동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기독교 국가이면서 다른 종교에 관용을 보이는 미국 사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동공은 빛을 잃었고 귀에선 피가 흘렀습니다.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만이 숨이 붙어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1968년 6월 16일, 새벽 5시쯤.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김수영(왼쪽) 시인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無)의 세계에 들었다. 선불로 받은 번역료로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고 귀가하던 시인은 서울 마포구 구수동의 인적이 드문 길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받혀 풀잎처럼 쓰러졌다.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김현경(오른쪽·86)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는 지난 두 달간 구술로 김수영의 삶을 풀어놨다. 원고는 조만간 자전적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 펴냄)으로 빛을 보게 된다. 에세이에는 생전 김수영이 탈고했던 시구 속에 숨은 창작 배경과 일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김수영은 평소 집에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술만 취하면 무궁무진한 애교로 웃음을 자아냈다. 장기는 무성영화의 변사 역할, 레퍼토리는 ‘수일과 순애’였다. 하지만 비위가 거슬려 술을 마신 날이면 주사가 심했다. 이혼 얘기가 입에 오르내리고 열흘간 별거까지 했다.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으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 ‘이혼 취소’는 이런 부부의 삶을 말해 준다. 몸도 돌보지 않고 폭주를 하는 날이면 시인은 자유당과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곤 했다. 4·19 직후 부정 선거에 대한 칼럼 청탁을 받고 동아일보에 원고를 보냈는데, 지면에는 김수영 이름 석자만 있고 휑하니 비어 있었다. 김수영은 “멋있잖아, 이런 게 저항이지”라며 오히려 신이 나 했다고 한다. 김현경은 진명여고 2학년이던 1942년 5월 김수영을 만났다. 만남을 주선한 이는 이종구(1990년 사망)로, 광산을 경영하던 김 여사 부친의 첩의 남동생이었다. 이종구와 김수영은 선린상고 2년 선후배로 일본 도쿄에서 함께 유학한 사이였다. 김 여사는 6살 차이인 김 시인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고, 이후 일본에 유학 중이던 시인과 편지로 사랑을 나눴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귀국한 김수영은 ‘마이 솔 이즈 다크’란 한마디 영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1949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이번엔 6·25전쟁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김 여사는 부산 피란살이 기간 동안 이종구와 동거한 뒤 김수영과 재결합했다. 이렇게 정착한 곳이 서울 성북동집. 김 여사는 “원래 거부 백낙승의 별장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세를 얻었다”면서 “정원 한쪽에 비가 오면 폭포가 되는 절벽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시 ‘폭포’를 썼다”고 회고했다. 1968년 발표한 절명시 ‘풀’은 그해 5월 29일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무성한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 김수영의 삶 속엔 현대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1950년 8월 인민군에 끌려가 의용군으로 징집된 김수영은 총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8남매 중 가장 총명했던 넷째 수경은 의용군에 자원 입대했고, 셋째 수강은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을 하다 납북됐다. 여동생 김수연씨 내외도 1969년 KAL기 납북 때 북쪽으로 끌려갔다. 김 여사는 현재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 살며 김수영의 육필 시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 ‘김수영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고 전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여행, 낯선 감정 만나보는 기쁨이란…

    “좋아서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57쪽) 이런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비록 짧은 소설이지만 뻔뻔스럽게도 잘도 늘어놓은 사람은 일본의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45)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은행나무 펴냄)는 작가가 ‘하늘 모험’에 이어 두 번째로 내놓은 여행 작품집. 단편소설보다 짧은 원고지 30장 안팎의 짧은 소설과 에세이가 18편 들어 있다. 주인공들은 서른 살에서 쉰 살 사이의 사람들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쿄의 대학으로 떠난 아들이 자취하는 집을 찾아가는 어머니, ‘베스트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생애 첫 해외 여행지인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미혼 여성, 고등학교 때 어느 기차 역에서 만난 도쿄의 낯선 여행객처럼 쉬는 날이면 비행기를 타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시골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부동산업자 등이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불안, 자유와 불편들이 한 소설 안에 엇갈리며 소개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여행이란 어떤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나 이성에게 도전하고 사귀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낯선 감정들 역시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파리로 제과 공부를 떠난 10여년 전 연인을 비행기 안에서 만나 그녀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슬쩍 찾아보는 태도나, 도쿄에 살며 이젠 잘나가는 소설가가 됐지만, 고등학교 때는 뭔지 야비하달까, 의리가 없달까 했던 친구를 기다렸지만 ‘신주쿠까지 나오는 것이 귀찮다’는 음성메시지에 기뻐하는 태도 등 말이다. 국내에 적잖은 팬을 가진 작가의 글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평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솔직하다 못해 무거운 돌로 꾹 눌러놓고 싶은 비양심적인 이야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놓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광주항쟁 겪은 임신부 스트레스… 손자까지 악영향”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임신부가 겪은 스트레스가 자녀 세대를 거쳐 손자 세대의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논문이 나왔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14일 서울대 호암관에서 개막한 ‘아시아·태평양 경제사 학술대회’에서 연구논문 ‘19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한 태아기 스트레스가 후속 세대 건강에 미친 효과’를 발표했다. 분석 결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태아기를 보낸 여성들에게서 태어난 신생아들이 그렇지 않은 신생아들에 비해 임신 기간이 짧고, 출생 당시 체중이 가벼웠으며, 저체중(2.5㎏ 미만) 출산과 조산(37주 미만 출산)의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임신 중기에 태아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경우 이 태아가 성장해 낳은 자녀의 출생에 가장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교수는 “부모의 교육 수준과 직업을 통제해도 부모의 태아기 광주항쟁 경험이 자녀의 출생 결과에 미치는 효과는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스트레스의 세대 간 전이가 사회경제적인 요인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초자료는 인구동태조사에 제시된 출생지와 부모 생년월일에 기초했고, 출생신고에 나타난 임신 주수와 체중 항목을 활용했으며, 2000년과 2002년에 태어난 신생아를 비교했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서 임신부들이 겪게 된 스트레스가 두 번째 세대(손자와 손녀)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매우 드문 증거”라며 “광주항쟁으로 인해 신체적인 외상을 입지 않은 시민의 상당수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분석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동서 69m 성곽 되살려… 외적 방어 숭례문 위용 드러내다

    동서 69m 성곽 되살려… 외적 방어 숭례문 위용 드러내다

    ‘국보 1호’ 숭례문이 96% 복구됐다. 준공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4월쯤 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2008년 2월 10일) 5주년에 즈음한 14일 숭례문 복구 마무리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지난해 3월 8일 숭례문 복원 상량식을 마친 뒤 1년여 만이다. 숭례문 복원은 당초 지난해 12월 말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춥고 폭설이 잦은 데다 관리동 건립이 예정보다 지연되면서 4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잔디와 수목 심기, 박석(바닥돌) 깔기, 광장 조성 등을 남겨 두고 있다. 복구 작업이 거의 끝난 숭례문은 동편 성곽을 53m, 서편 성곽을 16m 각각 새로 복원해 숭례문이 당초 한성을 수비하던 군사시설의 일부였던 점을 명확하게 했다. 성곽이 없을 때는 2층의 관상용 누각처럼 보였다. 복구에는 총 247억원(관리동 8억 7000만원 제외)이 투입됐고, 목공사-석공사-기와공사-단청공사-철물제작 등에 각각 수천명이 동원됐다. 단청을 곱게 입힌 숭례문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진중한 느낌이다. 조선 전기의 단청 문양과 청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룬 단청색을 복원한 덕분이다. 사찰의 화려한 금단청을 기대하고 숭례문을 보면 너무 수수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수한 것 같다고 해서 단청 문양이 단순한 것은 아니라는 게 단청을 입힌 홍창원 단청장의 설명이다. 단청 작업에는 모두 1541명이 동원돼 12종의 천연안료 1332㎏을 썼다. 석간주와 호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기와공사는 이근복 번와장의 감독으로 284명이 참여해 전통기와 2만 3369장을 지붕에 이었다. 암키와 1만 4991장, 수키와 7284장, 암막새 488장, 수막새 519장, 특수기와 96장 등을 사용했다. 목공사는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했고 모두 3968명이 참여했다. 목재는 15만 1369재로 26t이 사용됐다. 화를 피한 목재 6만 47재를 재활용했고, 기증목은 1만 855재이다. 목공사 중 문루는 2010년 2월부터 2012년 5월에 대부분 끝났다. 숭례문 복구공사는 전통기와와 철물을 사용하는 등 전통기법을 활용했다. 1961~1963년 해체수리과정에서 잘못 고증한 부분을 바로잡았다. 예를 들어 군사시설에 주로 깔았던 1층 누각의 장마루를 우물마루로 바꿨던 것을 이번에 다시 장마루로 교체했다. 지붕 속을 채운 나무(적심)와 흙(보토)도 이번에 복원했다. 용마루를 90㎝ 줄이고 추녀마루를 길게 했던 것을 원상복구해 용마루가 16.6m로 늘었다. 관리권은 문화재청으로 이관됐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제왕적 대통령제 병폐 해소에는 4년 중임제·분권형이 정답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병폐 해소에는 4년 중임제·분권형이 정답 아니다”

    최근 15년간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개헌 논의가 끊임없이 진행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개헌 논의에 대해 우호적인 만큼 여야 모두 정권 초에 개헌 논의를 진행할 태세다. 정치권의 ‘원포인트 개헌’ 논의는 대통령의 임기를 현행 단임에서 중임으로 하되 임기를 1년을 줄이는 ‘4년 중임·분권형 대통령제’이다. 더 나아가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거나 줄여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책임정치 차원에서 내각제가 필요하다며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대통령을 직접 내 손으로 뽑고 싶어 하는 국민의 여망을 고려해 대통령제는 유지하되, 다수당이 내각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가자는 것이다.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가 최근 펴낸 ‘대통령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비루투 펴냄)은 미국과 프랑스 등 대통령제의 역사를 살펴보고, 영국의 내각제에 대한 통찰, 한국 대통령제의 개혁과 성공 조건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했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강력한 의회의 독주를 막고자 고안된 제도라고 하고, 영국 총리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수장이라고 밝혔다. 힘 없다고 알려진 프랑스의 대통령도 의회해산권을 포함해 의회를 압박할 만한 권한을 3개나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6공화국 헌법에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을 갖지만,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권한이 없다. 흔히 한국의 국회는 허약하고 대통령은 강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 제도는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국인은 대통령제를 지지하는데, 한국 대통령제에 대한 학술적 이해는 대단히 일천해 책을 썼고, 국회는 민주주의적이고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사고가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최 교수는 현재 거론되는 ‘4년 중임제, 분권형 대통령제’가 대통령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의 장단점 역시 프랑스의 정치제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마키아벨리의 ‘시민군주론’이 대통령제의 사상적 배경이라는 논란이 있다고 소개한 뒤 그는 강력한 대통령의 리더십이야말로 대통령제의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적 독재’라는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라고 한다. 때문에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는 “통합과 타협은 대통령이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했을 때 반대파가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더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에서 취해지는 것이지, 대통령 개인의 선의에 기대 반대파에 타협을 요청하고 스스로 권력 분산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그것은 대통령 권력을 포기하는 것”(186쪽)이라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자신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자 권력 중추라는 사실을 망각한, 코미디에 가까웠다”고 지적했다. 또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임기를 나눠서, 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시기와 독재적으로 운영한 시기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외교적 능력을 동원해 안보위협을 극복한 것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도성장의 경제적 업적을 성취한 것은 이후 독재 시기와 구분하자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한국의 정치체제는 하드웨어 차원에서 비교적 훌륭하다”면서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잘 따져보지도 않고 제도개혁을 합창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개혁안은 무엇일까. 6년 단임과 3년 중간평가다. 대통령의 임기는 1년 늘리고, 국회의원의 임기는 1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의 반대로 실현되기 어려운 시나리오로 보인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신라 왕족 김일용 묘지명, 중국 시안서 발견

    신라 왕족 김일용 묘지명, 중국 시안서 발견

    신라왕의 종형(宗兄)으로서 당(唐)에 건너가 고위직에 올랐다가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 산시성 시안)에서 숨진 김일용(金日用)의 묘지명(墓誌銘)이 공개된다. 한국고대사 전공인 김영관 제주대 사학과 교수는 오는 16일 오후 서강대 정하상관에서 열리는 신라사학회 제122회 학술발표회에서 ‘재당(在唐) 신라인 김일용 묘지명의 초보적 검토’를 발표한다. 이 묘지명은 시안에 있는 민간박물관으로 2009년 개관한 대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이 이듬해 구입해 소장해왔다. 김 교수는 묘지명의 주인공 김일용은 신라왕의 종형으로 713년 신라에서 태어나 당에 들어와 황제를 숙위( 호위)하다가 774년 62세로 장안성 숭현방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일용은 생전에 종3품인 은청광록대부 광록경(銀靑光祿大夫光祿卿)이라는 벼슬까지 올라 사후 당시 당 황제가 예주도독을 추증했다. 김 교수는 김일용이 원래 신라의 왕족으로 당에 숙위했다는 사실을 묘지명으로 알 수는 있지만 신라에서의 행적과 신라왕 누구의 종형인지 등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다만 김일용이 숨진 당시 신라왕이 혜공왕(재위 765~779)이므로 그의 종형으로 볼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김일용의 아버지는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재위 742~764)의 형제로 봐야 한다”고 14일 말했다. 김 교수는 “신라는 왕족을 조공을 위한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일상적이었고, 사신은 당나라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황제를 근시(近侍)하는 ‘숙위’였다”면서 “김일용은 근친과 혈족을 정치로부터 분리시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신라의 정책때문에 당에서 살다 귀국하지 못한 기구한 팔자”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그냥, 화천 촌놈의 수더분한 이야기

    그냥, 화천 촌놈의 수더분한 이야기

    “시베리아에서 저 멀리 베링해협을 지나 알래스카까지, 왜 그런 혹독한 곳으로 사람들은 갔을까?” 3만년 전에 알래스카로 이동했다는, 황인종이 확실한 이누이트인들의 순박한 얼굴을 보면서 늘 생각해 왔던 질문이다. 고등학생이던 1984년 등단해 올해로 30년차 시인이 된 신동호(48)는 최근 펴낸 산문집 ‘분단아, 고맙다’(i&R 펴냄)의 서문에서 이런 질문과 함께 친절하게 답을 내놓았다. ‘정답’이라기보다 시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한 것이다. 신동호는 “양보, 협동, 배려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열성 유전자들이 거기서는 따뜻한 우성인자가 됐다”고 했다. 수년 전 남극 세종기지를 방문한 뒤 어린 시절의 궁금증을 해소했다는 것이다. “추울수록 배가 고파서, 풍요에 대한 욕심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절제에 익숙해졌다”면서 “인류가 빙하기에서 만난 건 이타심”이라고 강조했다. 신자유주의가 2008년 가을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붕괴하면서 인류의 이기심에 대한 비판과 마을공동체로의 복귀 등이 거론되는 가운데 그가 내놓은 답변에 귀가 솔깃했다. 같은 발상으로 통일에 대해서도 상상력이 필요하고, 분단으로 축소되고 제한된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산문집 제목이 정치적인 어떤 지점을 툭툭 건드리지만, 수록된 글들은 강원도 화천 촌놈으로 살아왔거나 서울에서 둥지 튼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고단하게 살아가는 수더분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다가 시인이 된 이야기에는 웃음이 나오고, 문자 해독에 실패한 막내딸 이야기는 찡하다. 다만 ‘서울신문’을 비롯해 언론들에 다양한 형태로 연재했던 글 중 55편을 뽑아 놓은 것이라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기보다 살짝 눙치고 주저한 흔적들이 있다. 사회, 문화, 정치, 남북관계와 남극방문기 등 6개의 장으로 나눠 놓았다.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글이야 아무래도 표제작이겠지만, 3장의 표제작인 ‘아빠 직업이 뭐니?’가 마음속으로 휙 뛰어 들어왔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삽입해도 큰 손색이 없을 글 같다. 어른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상처를 입을 수 있구나 하고 경계심이 생긴다. 자녀의 친구들이 방문하면, 부모들은 으레 아버지는 뭘 하시냐고 물어본다. 신동호 시인의 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시 조양동 3통 통장님이셨’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시인은 통장을 문턱 높은 동사무소에 들락거릴 수 있는 좋은 직장으로 이해했다. 1970년대 통장이면 그 나름대로 행세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글과 그림에 소질을 보이던 초등학교 4학년 학생 신동호는 소년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사생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첫 서울 나들이를 했다. 그것도 담임선생님과 함께. 상을 받고 춘천으로 돌아가기 전, 도시의 건널목에서 담임이 물어봤다. “아빠 직업이 뭐니?” 11살 소년은 당당히 답변했다. “우리 아버지는 통장님이셔요.” 담임의 얼굴은 실망으로 가득 찼고, 돌아오는 길은 재미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무엇이 담임을 실망시켰는지 소년은 몰랐다. 중학교 1학년 무렵 그는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됐다. 친구집에 놀러간 소년 신동호는 다시 아버지의 직업을 답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중학생 신동호는 답변을 피해 친구집을 박차고 나왔다. 신동호는 당시 담임선생님에게 눌려, 고등학교 첫사랑이 교사의 딸이라 포기했었다며 웃음을 던진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그는 결국 교사 딸과 결혼에 성공했단다. 50세를 향해 가며 ‘386세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은 시인의 산문은 2005년부터 2012년까지 8년에 걸쳐 쓴 글인 만큼 ‘그때 그 사건’을 정리하는 느낌도 있다.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애플용 e북으로 출시

    열린책들은 설 연휴를 앞둔 지난 8일 민음사와 문학동네, 을유문화사, 창비에 이어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출판사에 이름을 올렸다. 단, 차이가 있다면 열린책의 세계문학전집은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인 e북 형태로 나왔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1984’, 카프카의 ‘변신’ 등 30권을 먼저 출시했고 매주 10권을 차례로 낼 계획이다. 열린책의 ‘세계문학 앱’을 애플 앱스토어에서 무료로 내려받은 뒤 한 권당 3.99~4.99달러를 내고 구입하면 된다. 안드로이드 버전은 현재 준비 중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日서 밀반입 불상, 고려말 왜구가 약탈”

    일본 쓰시마에서 도난당해 한국에 밀반입된 한국 고대 불상 2점 중 고려시대 금동관음보살좌상불은 1330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 봉안돼 있다가 1370년 전후 왜구의 침입이 극심할 때 약탈해 간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최근 발간된 서산문화발전연구원의 기관지인 ‘서산문화춘추’ 8집에 투고한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銅觀音菩薩坐像)의 의의와 왜구에 의한 대마도로의 유출’이라는 논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쓰시마 관음사(觀音寺)에 봉안된 이 불상은 복장(腹藏·불상 안에 들어간 유물)에서 발견된 조상기가 고려 충선왕 즉위년인 1330년 2월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 교수는 이 불상은 제작 직후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기슭에 지금도 작은 규모로 현존하는 부석사에 봉안됐지만, 고려 말 왜구 침탈로 일본에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문 교수는 그 근거로 조상기에서 불상을 부석사에서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 내용이 보이는 반면 쓰시마 관음사와 관련한 언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만약 그것이 합법적으로 일본으로 넘어갔다면 그와 관련되는 기록이 복장에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런 대목이 없는 점을 들었다. 문 교수는 “약탈품이 거의 확실한 이 불상이 원래 봉안 장소인 서산 부석사로 귀환, 봉안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이젠 노년의 유연함을 노래하네

    ‘즐거운 편지’의 작가인 시인 황동규(75)가 열다섯 번째 시집 ‘사는 기쁨’을 내놓았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사소한 일일 것이나(중략)’라며 사랑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중략)매에 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하는 풀밭처럼/ 아니면 모르는 새 말라버린 춘란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얼마 동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무중력 냄새로 떠돌게 될까?/(중략)’이라며 노년을 노래한다. 요즘은 10대만 되어도 사는 일이 즐겁거나 기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는데, ‘종심’(從心)을 넘어선 작가는 공자의 말씀대로 ‘마침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경지에 이르른 것일까.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장기 기증’을 의뢰받는 전화 통화에 ‘아직 상상력 난폭하게 굴리는 고물차 다 된 뇌나 건질 만할까’라는 시인의 대응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늙고 병든다는 의미는 10대나 20대, 30대가 수천 번의 역지사지를 해도 알아낼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육체가 곡사포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 정점을 찍을 때 누가, 하강의 슬픔을 알까. 홍정선 평론가는 이 시집을 두고 ‘시인이 정점을 찍은 것인지 종점을 찍은 것인지’ 묻고 있다. 시어가 여전히 날생선처럼 퍼덕이는데, 행간에서 버석거리는 느낌이 나는 것은 사유의 깊이 탓이려나.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어른이 되어도 전쟁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어른이 되어도 전쟁의 상처는 그대로였다

    AP통신은 2011년 9월 말 “한국계 미국 소설가 이창래의 소설 ‘항복한 사람들’(The Surrendered)이 올해의 미 데이튼 문학평화상 픽션 부문 수상작으로 뽑혔다”고 보도했다. 한국전으로 상처받은 삶들을 수십 년에 걸쳐 조명한 이 소설로 이창래는 그해 퓰리쳐상 최종후보작에도 올랐다. 또한, 그해 시인 고은 등과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항복한 사람들’이 최근 출판사 RHK에서 ‘생존자’란 제목으로 번역·출판됐다. 영문을 곧이곧대로 번역하면 항복한 사람들이겠지만, 출판사가 왜 ‘생존자’라는 제목을 택했는지 소설을 읽다 보면 뼈저리게 느껴진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고통에 머물지 않고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1950년대 한국전쟁과 그로 인해 발생한 20만 명의 전쟁고아의 처참한 삶, 연합군으로 참전한 20살의 미군의 고통, 선교활동을 위해 파견된 미국인 목사 부부의 엇나가는 삶 등이 갈피갈피에 스며 있다. 또한, 재미교포들의 뿌리 없는 삶뿐만 아니라 미국의 밑바닥 인생들의 삶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다움을 말살하는 전쟁의 참상이 쓸고 간 자리에도 사람들은 신통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포기한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1950년 한국에서 전쟁으로 11살 어린 ‘준’이 엄마와 쌍둥이 언니와 오빠, 또한 쌍둥이 여동생과 남동생을 처참하게 잃고 고아가 되면서 시작된다. 이어 곧바로 1986년 뉴욕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47~48세의 ‘재미교포 준’의 인생으로 훌쩍 건너뛴다. 준은 10여년 이탈리아로 훌쩍 여행을 떠난 뒤 연락이 끊긴 아들 니콜라스를 추적하고 있다. 이제 서른 살이 됐을 아들이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 사는 헥터라는 한국전쟁 참전 군인을 찾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1950년대 전쟁으로 인생이 망가져 버린 10대의 준과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죄의식으로 도망치듯 전쟁을 찾아온 20살의 헥터, 1930년 만주에서 살다가 만주사변을 경험하고서 인생의 한 자락을 놓아버린 선교사의 아내 실비가 한데 모이는 ‘새로운 희망’ 고아원이다. 준과 헥터, 실비가 안은 각자의 삶의 무게는 누구도 덜어내 줄 수가 없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지루하지 않다. 1965년에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미국에 이민을 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한국계 미국작가인 이창래의 작품은 비교적 감정의 과잉이 적다. 과도한 민족주의로 질척거리지도 않고, 앞뒤 가리지 않는 증오와 ‘마땅히 이러해야 했다’는 식으로 재단하는 지독히 한국적 윤리의식을 강요하지 않아 한국전쟁을 비교적 자유로운 시각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당시를 돌아보며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극한까지 다가가지 않은 채 살아남은 자의 오만에 불과하지 않을까.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日 전쟁영화 보면, 극우 아베 역사관 보인다

    日 전쟁영화 보면, 극우 아베 역사관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부(GHQ) 통치 아래서 ‘맥아더 안’을 기초로 1946년 11월 새로운 ‘일본국헌법’을 공포했다. 이 헌법은 그 다음 해 5월 시행한 이후로 한 번도 개정한 적이 없다. 흔히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의 전후 헌법은 제9조에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명시하고 있다. 제9조 제1항에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라고, 제2항에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은 불보유, 국가의 교전권은 불인정한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의 군대는 군대가 아니라 ‘자위대’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군비를 적게 쓰는 것은 아니다. 2012년 기준으로 전 세계 국방비 순위 6위였다. 지난해 출범한 아베 신조(58) 정권은 지난달 28일 11년 만에 방위비(약 57조원)를 늘리는 정부 예산안을 확정해, 국방력 강화에 시동을 걸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선거공약으로 평화헌법 개정을 내세웠고, 일본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다. 경기침체로 1988년 이래 잃어버린 25년을 지나고 있는 일본인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기대할지도 모르겠으나, 1867년 메이지 유신 이래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그 피해를 경험했던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재무장이 아닌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진한 인천대 일문학과 부교수 등 일본영상연구회가 최근 펴낸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주전함 야마토’까지’(소명출판 펴냄)는 전후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전쟁영화를 통해 분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왜곡된 역사인식을 주로 일본 교과서에서 찾지만, 대중문화가 더 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7편의 논문은 전후 일본 전쟁영화가 전쟁 기억의 과잉과 망각 사이를 통과하면서 반성은 사라지고 반전의식은 인류 최초의 원폭피해 국가라는 ‘피폭내셔널리즘’으로 바뀌었고, 가미카제 특공대의 죽음을 에도시대의 무사도(武士道)로 전환시키며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한정선(43) 고려대 국제학부 부교수가 쓴 ‘전후 세대의 ‘기념비적 전쟁의 기억’과 굴절된 자긍심’이란 논문은 특히 눈길을 끈다. 한 교수는 “1974년 요미우리TV방송에서 방영된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는 기념비적인 드라마”가 된다고 지적했다. 처음엔 인기가 시들했는데, 1976년 재방송을 시작하면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제치고 중학생에서 대학생까지 폭넓은 인기를 확보했으며, 전국에 30여개 팬클럽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야마토’(大和)는 무엇이었나. 태평양 전쟁때 일본이 건조한 세대 최대 규모의 전함으로 ‘일본의 자존심’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은 ‘자존심’이 침몰할까 전전긍긍해 제대로 실전에 투입해보지도 못했는데 1945년 4월 미군 함재기의 1시간 40여분에 걸친 맹폭을 받고 결국 침몰했다.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이었다. 대신 영화 우주전함 야마토는 서기 2199년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침몰했던 태평양 연안(규슈 지역)에서 200년 만에 떠올라 영웅적 행위를 한다는 스토리다. 애니메이션에는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이 보이는 가운데 비극적 영웅을 재현하고, 카타르시스에 이른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주전함 야마토’를 소비한 층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신인류’로 명명되는 세대인데, 아베 신조가 그 세대이다. 아베 정권에 참여한 극우인사로 분류되는 아소 다로(73) 재무장관은 만화광이다. 한 교수는 “경제침체 속에서 일본인이 제국의 기억을 끌어내고 있는 것인지, 대중문화가 그런 기억을 부추기고 있는지 불명확하지만 전쟁의 기억은 아시아에서 현재진행형인 측면에서 일본의 전쟁인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햇볕정책 vs 反햇볕정책… 화해 하시죠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햇볕정책과 반(反)햇볕정책 간의 대립과 불화로 응축된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차이가 크게 부풀려진 것인 만큼 정책을 통해 수렴할 수 있다고 제기하는 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통합형 대북정책’(나남 펴냄)을 쓴 이재호(59)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이다. 이 원장은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국제부장 등을 거치며 이 같은 주제로 고려대 정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원장은 “소모적인 논쟁은 피해야 한다”면서 “햇볕론자라고 해서 다 퍼주기이고, 다 유화론자이냐? 또는 흡수통일론을 실행할만한 천문학적 재정이 존재하냐, 북한을 자극하는 것이 과연 통일에 도움이 되냐?”고 반문한다. 이 원장은 햇볕론자들은 정책의 기쁨을 같이 나누려고 노력해야 하고, 반햇볕론자들은 ‘김대중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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