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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감자꽃/문소영 논설위원

    “텃밭에 감자꽃이 활짝 피었다”고 하자, 선배가 “게으른 농부네. 농부가 채소밭에서 꽃을 보면 재미가 없다”고 했다. 좁은 땅뙈기에서 수확을 많이 내려면, 제대로 된 농부는 채소가 꽃을 피우려고 준비하면 갈아엎고 얼른 다른 채소 모종을 심고 생산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언제 꽃을 보느냐는 것이다. 또 꽃까지 보면 지력도 뚝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노란 쑥갓 꽃은 들국화만큼 앙증맞고 아름다운데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고, 하얀 부추꽃은 가을 밤의 별처럼 청초한데 아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다. 감자꽃은 서양란처럼 색깔이 화려하다. 4년 전 첫해 농사에서는 뭣도 모르고 감자꽃을 놔두었다. 이웃 텃밭지기들은 내 밭에 와서 혀 차는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꽃을 보면 감자 씨알이 굵어지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했다. 그해 6월 말 수확한 감자는 잘았다. 올해 감자꽃은 피기도 전에 따버릴 작정이었는데, 자꾸 망설이다 또 여기까지 왔다. 게으른 농부는 올여름에도 채소들의 예쁜 꽃을 볼 것이다. 생산적이지 않은 텃밭, 마음이 편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갑을(甲乙)의 역설/문소영 논설위원

    ‘라면 상무’라는 신조어를 만든 포스코 계열사 임원의 ‘갑(甲)질’과 남양유업 직원의 막말 파문에 이어 50대 주차 직원을 폭행한 ‘빵 회장’ 사건 등이 연달아 폭로되자, 정의로운 소비자들은 을(乙)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을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을로 사는 서민들의 억울함과 분함이 깔려 있을 것이다. ‘갑의 횡포’를 응징하겠다는 시민이나 소비자들의 행동은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의 제품은 끊으면 되니 상대적으로 쉬운 일로 비쳐졌다. 커피믹스도 ‘김태희 대신 김연아’를 사고, 집배달 우유의 제품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양유업 주가는 내려갔다. 4월 30일 117만 5000원으로 최고가를 찍던 주가가 주르륵 미끄러져 23일 94만원대까지 떨어졌다. 2001년 수입산을 자국산으로 위장해 판매하다 적발됐던 일본 최대 식품회사 유키지루시 유업이 불매운동으로 회사 문을 닫았던 사례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22일 남양유업 현직 대리점주 1000여명이 새로운 협의체를 구성하고 ‘살려 달라’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불매운동으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들 1000여명을 위해 응징을 철회해야 할까. 현재 남양유업 불매운동은 남양유업으로 상징되는 대기업의 부당한 밀어내기식 영업과 뒷돈 등 불공정 관행을 시민들이 개선하려는 보기 드문 시도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솜방망이 처벌로 다스리기 일쑤인 게 본사와 대리점, 대기업과 하청기업, 프랜차이즈 본점과 가맹점 등 사이의 불공정 관행이다. 남양유업은 ‘재수 없게 됐다’며 한국의 불매운동이 늘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 유야무야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겠다. 사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이참에 대기업의 못된 버릇을 제대로 고쳐 놓아야 앞으로 자영업자들이 먹고살 수 있다. 짧은 기간에 대리점 매출이 40~50% 하락했다면, 대리점주들이 아니라 본사가 먼저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고 화해의 악수를 청해야 했다. 대기업이 배짱을 부리며 갑질을 하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라는 화두에 맞춰 검찰이 수사의 속도를 더 내길 희망한다. 갑·을(甲·乙)의 한자는 갑옷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뜻한다. 하지만 사주팔자를 따지는 명리학에서 갑은 하늘로 쭉쭉 몸을 뻗는 커다란 나무를 말하고, 을은 풀이나 넝쿨을 말한다. 혼자 몸을 가누기 어려운 을은 갑을 타고 올라가 생존한다. 을도 살리는 제대로 된 갑을 기대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제24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2인 인터뷰

    제24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자 2인 인터뷰

    김달진문학상이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시 부문에는 시집 ‘방!’의 정일근(55) 경남대 교양학부 교수, 평론 부문에는 평론집 ‘환상과 실재’의 오형엽(48)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가 각각 당선됐다. 월하 김달진(1907~1989) 선생이 나고 자란 경남 진해는 두 사람에게 묘한 공통분모가 됐다. 수상 소식이 전해진 이후 월하 선생과 동향인 정 교수는 ‘인연’을, 두 차례 진해를 찾았던 오 교수는 ‘바다’의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아우라를 떠올렸다. 시상식은 다음 달 5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 ■시 부문 정일근 교수 “‘교과서 속 시인’ 만난 그 에너지로 詩作” “김달진 선생의 고향 후배 시인이 수상하기는 처음이에요.” 시 부문 수상자인 정일근 시인은 묵직한 목소리로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남대 국어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4년 실천문학의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돼 시인이 됐다. 올해로 등단한 지 30년인 그는 “11번째 시집 ‘방!’으로 ‘근속상’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평균 2년 6개월에 한번꼴로 시집을 냈는데 이번 시집은 꼬박 4년의 진통을 겪었다. 정 시인은 월하 선생과 인연이 깊다. 1996년 7회 때도 김달진문학상 후보였다. 또 2009년에는 ‘월하진해문학상’ 2회 수상자이기도 했다. “대학생이던 1980년대 초반 마산에 오신 월하 선생님을 뵈었는데 백발에도 형형한 그의 눈빛을 보면서 (저도) 열심히 시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졌던 것 같다”고 했다. 서울신문과도 인연이 깊다.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된 그는 당시 문화부장이던 박성룡(1934~2002) 시인에게 들었던 덕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좋은 시인이 될 거라는 격려를 해 주셨는데 그때 그렇게 가슴이 뛸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국어 교사로 있으면서 박 시인의 ‘풀잎’을 가르쳤는데 ‘교과서 속 시인’을 만났던 그때의 설렘은 두고두고 시작(詩作)에 에너지가 됐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01년 그도 ‘교과서 시인’이 됐다. 국정교과서에 그의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실렸다. 1998년부터 전업 작가로 14년을 보낸 뒤 2010년부터는 모교인 경남대에서 교양학부 교수로 시를 가르치고 있다. “학사 학위밖에 없지만 ‘열심히 시를 쓰는 사람’으로 세상이 내 열정을 받아준 덕분”이라며 웃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평론 부문 오형엽 교수 “비평은 귀납… 텍스트의 비밀 밝혀내야” “거칠게 말하면 비평은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가는 현상을 이끌어 가기도 하지만 드러난 현상을 뒤에서 추적하고 탐색하고 진단하기도 하죠.” 오형엽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성실한 비평가다. 거시적 이론이나 이념, 작가의 삶 같은 텍스트의 외연 대신 텍스트 자체의 면밀한 분석을 최우선에 놓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를 정신분석하는 대신 작품을 정신분석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의 비평가적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텍스트의 미로에 갇혀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오 교수는 “작품 자체를 존중하고 그 내부에서 텍스트의 비밀을 밝혀내는 ‘내재 비평’”과 함께 ‘문학사적 비평’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2001년 첫 번째 평론집 ‘신체와 문체’의 책머리에서 “현 단계 문학 비평에서 요청되는 것은 (중략) 텍스트에 대한 세밀하고 정치한 분석을 경유하되 다시 그것을 사회적, 문화적,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문제 구성 능력”이라고 설명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현장 비평의 속성이 텍스트에 최대한 근접하고 그것의 맥락과 기원을 문학사적 상상력으로 탐색하는 작업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문학평론가 유성호)는 평을 받는다. ‘신체와 문체’ ‘주름과 기억’ ‘환상과 실재’ 등 3권의 평론집을 관통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의 문제다. 겉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문체’가 형식이라면 작가의 ‘신체’는 궁극적인 내용이다. 비평은 표면에 드러난 형식을 경유해 이면에 도사린 내용에 닿는다. 시간의 흔적인 ‘주름’을 통해 ‘기억’에 접근하고, 작품에 나타난 ‘환상’을 통해 ‘실재’를 포착하는 식이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와 실재계의 교차다. 오 교수는 “어느 때보다 평론의 위상이 위축된 것은 아쉽지만 비평가는 평론의 입지에 상관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존재”라면서 “평론을 계속할수록 에너지와 열정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문소영 시시콜콜] 페미니즘 살짝 내비친 손명순 여사 전기

    [문소영 시시콜콜] 페미니즘 살짝 내비친 손명순 여사 전기

    “니, 이리 온나!” 동갑내기이지만 늘 존댓말로 공손한 부인이 저녁상을 물린 직후 이렇게 반말로 내지르면 꼼짝할 수가 없었단다. 거산(巨山)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그림자 내조의 달인’ 손명순(85) 여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부생활 이야기다. 손 여사는 YS의 고집을 반드시 꺾어야 할 때나, 중요한 약속을 받아낼 때 이렇게 반말로 담판을 지었다. 철없는 야당 정치인 시절, 확인 안 된 여성 추문들이 들려올 때도 ‘젊은’ 손 여사는 저녁상을 치운 뒤 ‘반말 담판’을 지었단다. “니, 그리해도 좋은데, 밖에서 애만 만들어 오지 마라. 니, 꿈이 대통령 아이가.” 손 여사가 보기에 ‘경상도 섬 사나이 고집쟁이’의 기질을 지닌 YS였지만, 작심한 ‘반말 담판’에는 귀를 기울였단다. ‘상도동 멸치 시래깃국’으로 정치부 기자들에게 사랑받았던 손명순 여사가 이런 일화들이 담긴 YS와 함께한 60년의 삶을 한 권의 책에 담아 6월 말 내놓는다. 영부인의 전기는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 이어 세번째다. 구술·녹취해 작성했다. ‘여성 지도자를 육성한다’는 이화여대 약학대를 나왔지만,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던 손 여사의 전기에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지만, 27살에 여당인 자유당의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출발해 이승만의 3선 개헌을 반대하며 야당 의원으로 선회한 YS,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YS의 삶을 돌보는 아내의 삶도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상이라는 설명이다. 김정남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YS의 민주화 투쟁에서 손 여사의 내조가 필수적”이었다고 했다.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으로 상도동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나눔·배려의 따뜻한 마음들이 오갔다는 것이다. 김 전 수석은 “YS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허술하고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의미다. ‘멸치잡이 선장’ 댁 도련님인 YS의 돈 관념은 희박했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굶는다는 것. 결국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2남3녀의 생활을 책임지고, 상도동 시래깃국과 쌀을 장만한 사람은 손 여사였다. 손 여사가 그림자 내조를 벗어던질 때는 지원유세로 바쁜 YS를 대신해 지역구(부산 서구)에서 선거운동할 때였다. 유권자들이 “영샘이는 코빼기도 안보이고~”하는 불만을 터뜨리기 전에, 불문곡직하고, 먼저 90도로 공손한 인사를 했다. YS를 둘러싼 스캔들, 아들과 가족이야기, 청와대 생활과 1997년 환란 등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하는 작가의 설명이다.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아이언 맨/문소영 논설위원

    “우리는 모르는 사이 스스로 악마를 키운다.” 영화 ‘아이언 맨3’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가 한 말이다. 영화는 순수한 열정에 들뜬 과학자가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사악한 인물로 변신한 계기를 보여준다. 스타크가 1999년 12월 31일 스위스에서 만난 왕팬 킬리언을 새해 첫날 옥상에서 만나기로 하고 바람 맞힌 것은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슴에 원자로를 달기 전이었으니, 여자랑 파티를 즐기는 군산복합체의 오너 아들이자 ‘망나니’ 스타크는 그저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 킬리언은 처음 20분을 불꽃놀이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밤하늘 아래 지팡이에 불편한 다리를 의지하여 차가운 바람을 견디었지만, 이후 ‘로비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할까’ 고민하며 비참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킬리언의 선택은 스타크와 달랐다. 시인 김지하, 조순 전 서울시장의 대변인 출신인 정미홍 전 KBS아나운서가 변했다고 해서 화제다. 그저 부질없지만, 이 영화를 본 후에 문득 생각났다. 우리가 그들의 ‘무엇인가’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5·18/문소영 논설위원

    소설가 황석영이 1985년에 펴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고 나서 우울을 달고 산 20대 젊은이들이 1980년대에 적지 않았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기술한 책으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은밀하게 돌려보는 필독서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그 책을 읽고서 열혈 운동권이 됐고, 누군가는 다 읽고 토했다고도 했으며, 누군가는 “광주시민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며 사는 일이 가소롭다고 방황했다. 한국근현대사 사전에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렇게 압축됐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무력으로 권력장악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통칭 ‘5·18’로 부르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이런 사전적 정의를 얻는 데는 8~13년이 걸렸다. 1987년 6·10 민주화 운동으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 국회에서 ‘광주학살 진상규명 청문회’가 열린 덕분이었다. 당시 국회는 여소야대였다. 그 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됐다. 정부·여당이 5·18 민주화운동을 재평가한 시점은 김영삼 정부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문민정부는 5·18 연장선에 있는 민주정부’라고 표현했다. 10여년 시달리던 ‘불순세력의 폭동’이란 불명예를 씻어준 것이다. 5·18기념 행사를 정부에서 주관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닌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총선직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한 여당 국회의원들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화제를 모았다. ‘거리의 투쟁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권부 청와대에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차곡차곡 세월의 연륜을 쌓아갔다. 그러니 박근혜 정부의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신할 공식 추모곡을 제정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런 의미에서 ‘퇴행’이자 ‘추태’에 가깝다. 결국, 국가보훈처의 무리한 발상은 김무성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의 저지로 무산됐다.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이 불씨가 돼 국민의 ‘축제’가 돼야 할 5·18기념식은 적잖은 불협화음을 낳았다. 이런 일부 분위기에 편승해 종편들은 “600명 규모의 북한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다”,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북한 게릴라”라는 등 탈북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어렵사리 정치·역사적으로 공인한 ‘아키 소셜’(acquis social)을 훼손하는 것이다. 국민통합에도 나쁘다. 1960~1970년대 산업화 세대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1970~1990년대 민주화 세대의 손도 잡아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엉거주춤 끝난 전쟁 이후…추억이 된 기억으로의 여행

    엉거주춤 끝난 전쟁 이후…추억이 된 기억으로의 여행

    학교 역사 시간에 귀동냥으로 배운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사이다나 한 병 마시며 쉬다가 땀을 닦고 다음 행선지로 걸어가던 경주 관광.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첨성대에서는 쌓아 놓은 돌탑에 반 이상 기어올라 가서 사진을 찍었고 불국사 앞의 석가탑에서는 2층 기단부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삼층탑의 맨 상단까지 올라가려고 기를 썼다. 흑백사진이었다. 첨성대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검은 교복 차림으로 60~70명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누렇게 빛바랜 사진. 지금은 상상도 못할 사진이었는데, 마종기(74) 시인은 그때의 추억을 불러왔다.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달 펴냄)에서다. 한국전쟁이 엉거주춤 끝나고 어수선한 1950년대 중반에 그는 고등학생이 됐고, 그해 여름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왕복 기차비와 며칠간의 체류비를 챙겼다고는 했지만, 그 시절에 많지 않은 돈이었을 테니 무전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교 역사 시간에 귀동냥으로 배운 곳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사이다나 한 병 마시며 쉬다가 땀을 닦고 다음 행선지로 걸어가던 경주 관광.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첨성대에서는 쌓아 놓은 돌탑에 반 이상 기어올라 가서 사진을 찍었고 불국사 앞의 석가탑에서는 2층 기단부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삼층탑의 맨 상단까지 올라가려고 기를 썼다.’(42쪽)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원년(740)에 김대성이 발원해 지은 불국사 옆에 세운 1200여년 된 석가탑을 17살 마종기는 친구와 함께 ‘공략’하고 있었다. 당시의 행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고적을 어떻게 감상하고 보존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는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면서 서울로 돌아갈 기차표 값마저 다 써버려서 아버지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렸다고 한탄했다. 아버지에게는 카메라를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카메라는 두 번 다시 찾지 못했다. 경주까지의 왕복 기찻삯이 비쌌고, 개학을 맞아 공부에 쫓기고 의대에 진학하다 보니 그곳에 갈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갔던 친구는 어찌 됐을까.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해 그 대학의 교수가 됐고 대학장을 지냈다. 또한 쇠약했던 조선시대 말기에 우리의 귀중한 고서와 유물을 훔쳐간 유럽 국가들로부터 되찾아 오기 위해 국제모임을 주선하고 우리의 권리를 열변했다. 1950년대 중반 경주에서 저질렀던 부끄러움을 면죄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시인은 생각했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작고한 백충현 서울대 대학원장이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현대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연세대 의대 본과 1학년 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의사 겸 시인으로 지낸 마종기 교수가 이끄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1966년부터는 미국에서 수련의가 되고 재미교포 의사로 살았다. 전쟁으로 피란을 떠났던 마산에서의 기억이나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추억들이 따뜻하기 그지없다. 살림을 돌봐 주던 24살 처녀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던 10살 즈음의 철부지 시인에게 결혼해서 떠나던 그 누나는 “나를 잊지 말아 달라”며 울었다고 했다. 과거는 왜 이리 아름답게 윤색되는 것인지.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인사]

    ■서울신문 △논설위원 문소영◇경영기획실△인사부장 류기혁△재경부장 전선미◇독자서비스국△독자지원부장 안창섭△기획위원 임철재◇사업단△사업지원부장(겸임) 이연경△영업관리부장 조원석△투자개발부장 김철홍△문화사업부장 전성준◇온라인전략국△나우뉴스부장(Boom팀장 겸임) 장상옥◇제작국△제작지원부장 양승현◇겸임△고충처리인 김주혁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급 전보△국립국악원 기획운영단장 오영우◇고위공무원 승진△정책기획관 김낙중△해외문화홍보원 해외문화홍보기획관 이형호◇과장급 전보 <과장>△저작권산업 임병대△국제문화 박종달△예술정책 김상욱△공연전통예술 김정훈△관광정책 이진식△녹색관광 윤성천△미디어정책 김현기<소속기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장 황보명△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 민병찬△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 김규동 ■국민권익위원회 △행정관리담당관 양종삼◇과장△운영지원 한삼석△제도개선총괄 김태응△청렴총괄 안준호△청렴조사평가 허재우 ■관세청 △수출입물류과장 이종욱 ■특허청 ◇고위공무원 승진△기획조정관 이재우◇전보△운영지원과장 김성관△기획재정담당관 문삼섭△산업재산정책과장 김용선△대변인 정연우△공조기계심사과장 유 준△반도체심사과장 인치복△유비쿼터스심사팀장 전범재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기반시설국장 최원규
  • 한국시인협회가 펴낸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인물사’ 논란

    한국시인협회가 펴낸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인물사’ 논란

    한국시인협회(이하 협회)가 창립 56주년을 맞아 펴낸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인물사’(민음사 펴냄)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 쓰인 “근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자”는 의도와 달리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특정 인사의 공로만을 치켜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인협회는 13일 근대 인물 112명에 대해 시인 112명이 한 편씩 시를 쓴 시집 ‘사람’을 출간하고 간담회를 열었다. 신달자 회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체육 등의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온 인물들을 뽑아냈다”며 “칭송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역사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한 인물의 빛과 그늘을 말하려 했다”고 밝혔다. 근대 인물 112명에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함됐다. 중진시인 이태수씨가 쓴 시 ‘박정희’에는 ‘당신은 날이 갈수록 빛나는 전설’,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을 우리의 횃불’, ‘위대한 지도자요,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5·16은 쿠데타로 잉태해 혁명으로,/개발 독재는 애국 독재로 승화됐습니다’, ‘5·16쿠데타와 유신 독재가 없었다면/민족중흥과 경제 발전은 과연 어떻게 됐을는지요’라는 표현이 포함돼 있다. ‘유신으로 자유와 인권을 밀어 놓은 채 숭고한 희생자들을 낳기도 했다’는 표현도 들어갔지만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누가 뭐래도 당신은 빛나는 전설, 꺼지지 않는 횃불입니다’라는 결어로 마무리했다. 또 다른 중진시인 이길원씨는 시 ‘이승만’에서 “소란스레 휘두르던 붉은 깃발 몰아내고/ 첫 단추 채우던 우남 이승만/ 평화선 그어 독도를 우리 땅 만들고/ 주린 배 뼛속까지 스미던 가난 속 의무교육은/ 높은 문맹률 단숨에 말리고”라고 공로를 치켜세운 뒤 “진보라는 가면을 쓴 붉은 얼굴들이 마음껏 설치는/ 넘치고 넘친 자유가 오히려 불안한’라며 색깔논쟁을 끌어왔다. 이 시들의 작성과정에 대해 신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태수 시인에게 부탁을 한 것이고, 이승만은 이길원 시인이 직접 쓰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작고한 전직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들어갔음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상에서 빠진 것과 관련해 “인물이 너무 정치적으로 쏠려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또 다른 협회의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이 배제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 재벌회장에 대해서도 산업화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거의 거론하지 않고 굶주림 극복의 성공신화를 중심으로 평가했다. 간담회에서 선정기준 및 표현양식에 대해 논란이 되자 사회를 본 곽효환 시인은 “산업화와 민주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는 것을 통해 균형을 맞춘 것이고, 역사가 아니라 예술적 텍스트를 쓴 것이라고 이해해 달라”며 마무리를 지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北 개성 고려유적지, 새달 세계문화유산 된다

    北 개성 고려유적지, 새달 세계문화유산 된다

    북한 개성 일대 고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확실시된다. 유네스코는 다음 달 16일부터 27일까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리는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WHC)를 앞두고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북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실사한 뒤 ‘등재권고 판정’을 내린 보고서를 13일 공개했다. 이코모스는 이 실사 보고서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개성 시내와 서쪽의 산자락까지 포함해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고려 왕조의 지배 근거지를 대표하는 유산들로 구성돼 있다”면서 “유산은 통일된 고려왕조가 사상적으로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가는 시기의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 정신적인 가치를 내포하며 이는 도시의 풍수적 입지, 궁궐과 고분군, 성벽과 대문으로 구성된 도심 방어 시스템, 그리고 교육기관을 통해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연속유산은 12개의 개별 유산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 중 다섯 구역은 개성성곽을 구성하는 유산들로, 삼중으로 구성된 고려의 방어체계를 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개성역사유적지구는 개성성벽 5개 구역, 만월대와 첨성대 유적, 개성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와 표충사, 왕건릉과 7개 왕릉과 명릉, 공민왕릉을 포함한다. 이코모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실사를 담당하는 자문기구로서 개성역사유적지구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함에 따라 이변이 없는 한 개성역사유적지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실시된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을 처음으로 세계유산에 등재시킨 북한은 이번이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된다. 한국이 등재시킨 조선왕릉과 종묘 등 10건을 합쳐 남북한은 12건에 이르는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풀 뽑으랴 땔감하랴 힘든 시골살이… 그런데 행복하다

    풀 뽑으랴 땔감하랴 힘든 시골살이… 그런데 행복하다

    화려한 도시에 사는 일은 24시간 편의점을 이용하는 것처럼 편리하다. 대신 소음과 매연, 복잡함, 부산스러움, 소통을 빙자한 소란스러운 인간관계 등 다양한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다. 반면 시골살이는 파 한 단,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족히 30여 분 차를 몰고 나가야 할 만큼 불편하지만, 푸른 숲과 예쁜 꽃, 텃밭의 매운 고추와 상추, 고적을 뚫고 들리는 새 울음소리가 있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도시인들에게 시골살이의 진실을 알려주면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게 하는 ‘어른용’ 만화책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졸업한 22년차 만화가 홍연식(오른쪽·42)이 그린 ‘불편하고 행복하게 1·2’(재미주의 펴냄)이다. 홍 작가는 전형적인 도시 사람이다. 그는 생계를 위해 학습지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건 좋은 만화를 그리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인(왼쪽)은 그에게 삽화 그리기를 배웠던 제자(?)로 동화책 작가를 꿈꾼다. 5년 전 쯤 서울의 비싼 전세비를 감당하지 못한 홍 작가 부부는 경기 포천시 내촌면 죽엽산의 전원주택으로 이주했다. 밀레의 만종과 같은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꿨으리라. 도낏자루가 썩어나가는 복숭아밭의 신선놀음? 시골살이에 그런 것은 없다. 죽엽산에서도 학습지 만화를 그려야 했던 홍 작가는 출판사의 끝없는 만화 수정요구와 마감 독촉전화에 찌들고 있었다. 짬짬이 마당의 풀도 뽑아야 하고, 땔감도 마련하고, 익숙지 않은 시골살림도 힘들다. 거기에 그의 집 앞을 거치는 도시의 등산객은 집 앞에 무단주차를 하고, 마당에 일궈놓은 텃밭에서 싱싱한 오이며 고추를 제멋대로 따먹으며, 함부로 쓰레기 투기까지 일삼는다. 깜깜한 밤에는 무섭고 두렵다. 홍 작가의 스트레스 수치는 하늘을 뚫고 올라가더니 귀촌한 첫해 겨울 감기·몸살을 모질게 겪고, 체중 감량에 이르렀다. 행복이 무엇일까 고민도 된다. 생계에 휘둘리며 ‘내 만화’를 뒤로 미루던 홍 작가에게 부인은 번개처럼 가슴에 꽂히는 말을 한다. “눈앞의 시급한 일을 하지 말고, 중요한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불편하고 행복하게 1·2’는 홍 작가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에 접근했던 그 결과물이다. 불편하고, 행복하게. 이 두 단어는 병립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 두 단어야말로 시골살이의 묘미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만화는 속삭인다. “도시 사람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겁니까?”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 ‘이십사시품’ 한글로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 ‘이십사시품’ 한글로

    “소박하게 살아가며 침묵을 지키나니(素處以默) 오묘한 천기는 더욱 미묘하다(妙機基微) 자연의 큰 기운을 들이마시고(飮之太和) 외로운 학과 더불어 난다(獨鶴與飛)” 당나라 말 시인 사공도(837~908)가 웅혼, 충담, 섬농 등 스물네 가지 풍격(風格)으로 표현한 시학서 ‘이십사시품’(이하 시품) 가운데 충담에 들어있는 16자에 대한 안대회(52)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의 해석이다.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의 전통사회에서 이 ‘시품’은 유별나게 취급되었다. 구체적인 시인이나 시를 다루지 않고 추상적인 단어 24개에 각각 48자의 운문을 곁들인 이 시품은 본문 전체가 겨우 1152자에 불과해, 200자 원고지로 따지면 6장 분량도 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시 같기도 하고, 시 해설서 같기도 하다. 그래서 ‘고란과업본원해’는 “문장이 고고하고 예스러우며, 의미를 기탁한 것이 멀고도 깊다”고 했고, 오히려 근현대에 와 중국 소설가 첸중수(1910~1998)는 이 책을 두고 “아름다운 시로 보고 읽어야지, 지나치게 천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경계했다. 학문을 사랑한 청나라 강희제(1654~1722)는 ‘전당시’(全唐詩)에서 사공도의 시집 뒤에 이 시품을 붙여넣으라고 했고, 스스로 편지에 시품의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1711~1799) 역시 시선집 ‘당송시순’ 등 다양한 편찬물에서 시품의 미학적 기준을 자주 이용했다. 시품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쓰기도 하고, 서예로 나타나거나 반시직이나 장부, 제내방 등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연극이나 소설 등에서도 시품의 영향이 나타났다. 조선에서도 윤춘년(1514~1567)이 ‘시가일지’와 ‘묵천금어’라는 시학 저작에 시품을 실어 알려졌다. 덕분에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시품이 널리 알려졌단다. 18세기에 겸재 정선은 시품으로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을 그렸다. 19세기엔 추사 김정희도 ‘시인과 화가가 늘 곁에 놓고 봐야할 대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안 교수가 이 시품을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라고 생각해 ‘궁극의 시학’(문학동네 펴냄)으로 펴냈다. 200자 원고지 6장도 안 되는 분량을 715쪽에 담아내는 괴력을 발휘했다. 안 교수가 2011년 매주 금요일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했던 글이기도 한데, 당시 독자들과 교감한 내용이 요즘 유행하는 참여저널리즘 같기도 하다. 독자들은 글자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부터,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하고, 타이완 국립고궁박물관에 반시직과 장부의 화첩이 있다는 것을 안 교수에게 알려줬다는 것이다. 좋은 책은 좋은 독자와 함께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15세기 씨족부락 여진, 어떻게 동북아 패권국이 되었나

    15세기 씨족부락 여진, 어떻게 동북아 패권국이 되었나

    1616년 정월 초하루, 만주족의 국가가 탄생했다. 후금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허투알라에서 과거의 한(Han)칭호를 버리고 정식으로 최고 통치자로 칭호를 제정했다. 새 칭호는 ‘하늘이 여러 나라를 기르라 하여 임명하신 영명한 한’이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여허여진을 제외하고 자신이 속한 건주여진은 물론, 해서여진, 동해여진을 복속하여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1395년 편찬된 조선의 ‘용비어천가’에는 건주여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동북 1도는 원래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돼 야인(野人·여진)의 추장이 멀리서 오고, 일란투먼(移?豆漫)도 모두 복종하여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모셨고’ 여기서 ‘일란투먼’은 여진어로 3만호(萬戶)를 말하는 것으로 송화강 하류역의 세 추장이 이끄는 부였다. 원나라에 여진이 5만호가 살다가 원 말기에 오도리, 후르하, 타온의 3만호만 남았던 그 부다. 용비어천가의 이 대목은 누르하치의 6대조로 조선의 동북지역인 회령(여진:알목하) 지역으로 이주한 오도리 만호의 몽케테무르도 포함한 것이다. 장백산 동남쪽이 만주족의 발원지다. 14세기 중엽 무렵에도 수렵과 어로 활동을 하고, 철기도 생산하지 못해 15세기 후반에 명·조선과의 밀무역을 통해 철 화살촉과 철제 갑옷, 등자 등을 확보했고, 15세기에야 겨우 농사를 시작했던 씨족부락 여진이 어떻게 최고의 문명국가라는 명나라와 조선의 혹독한 견제를 감내하고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했을까, 오랑캐라 불리며 무시당하였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청제국(1644~1912)으로 278년간 패권을 누리고, 역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유소맹(류샤오멍·61) 중국사회과학원 교수가 쓴 ‘여진부락에서 만주국가로’(푸른역사 펴냄)를 읽어보면 풀 수 있다. 한국사람 중에 청 제국이 등장한 배경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의 등장을 그저 명이 조선의 임진왜란에 파병한 끝에 국력이 쇠약해진 덕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극동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한국이 역사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든지, 강력한 중국(원, 명, 청) 때문에 중원으로 땅을 넓히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진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는지 점검해볼 수 있겠다. 여진의 혈연조직은 15세기 이전에는 할라(씨족)에서 무쿤(새로운 씨족), 욱순(일족), 보오(가족)의 순서로 확대 발전한다. 이런 일족과 가족의 발전은 사유재산 증가와 가내 노예의 소유와 관련이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고, 생산력 발전을 위한 대외적 약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평등이 발생하고 혈연과 지연 중심의 가샨과 같은 부락이 아닌 국가조직으로 발전해나갔던 것이다. 특히 여진의 핵심 세력이었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다른 혈연의 일족으로 구성된 지역연합체로, 세습제도가 발전하고, 군사적 수장이 출현하고, 부락장의 대외적 역할이 강화되면서 상층부 일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이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문명세계인 명과 접촉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명과의 조공, 호시(互市)참여가 진행된 것이다. 여진은 모피, 잣, 버섯, 꿀, 가축 등을 명나라에 보내고 농기구, 소, 수공업품, 쌀, 소금, 비단, 면포 등을 받아왔다. 명과의 호시는 월 1회에서 나중에는 하루 1회로 급속히 증가했고, 명나라 말기에 호시에 몰리는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공은 여진은 명의 답례(회사·回賜)품을 은으로 통일했는데 여진사회로 들어오는 은의 수량이 연간 1만 5000량에 달했다. 명은 조공의 연간 인원을 해서여진은 1000명, 건주여진은 500명으로 제한했는데, 건주여진이 강성해지면서 조공인원이 1500명이 돼 규정의 3배나 됐다. 또 여진은 호시에서 거두는 세금도 은본위로 계산해서 징수해, 가치의 척도를 은으로 통일했다. 즉 화폐로 은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16세기의 이야기다. 시장의 발달은 사유제와 국가발전의 견인차가 됐다. 물질적 욕망이 자극됐지만, 다른 한편 집단의 평등원칙이나 상호협조의 관계망이 무너지면서 부족단위 대신 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주국은 자신들의 근본이었던 혈연과 지연에 기반을 둔 사회관계망을 군사조직(니루·구사), 더 나아가 팔기군 등 재편하면서 더 효율적인 통치와 전쟁수행에 나선다. 17세기로 들어오면 병자호란 등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들이 만주국의 시각으로 다뤄지고 있다. 불과 30~40년 전 자국의 역사도 배우지 않는 한국에서 만주국의 등장과 성장, 몰락을 다룬 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은 다른 국가의 운명과 엮여 있으니, 배우지 않으면 조선이 어떤 나라였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나를 잘 알기 위해 남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사재기 의혹’ 출판사 대표 “사퇴…사옥도 매각”

    ‘사재기 의혹’이 또 터져 출판계에 파문이 일고 있다. SBS 시사 프로그램 ‘현장21’은 지난 7일 자음과모음에서 황석영(70)씨가 등단 50주년 기념으로 낸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와 ‘3만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김연수(43)씨의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차세대 작가 백영옥씨의 장편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모임’ 등을 조작된 베스트셀러라고 주장했다. 훌륭한 작가와 잘나가는 작가, 많이 팔린다고 알려진 작가들마저 사재기 의혹에 휩싸이자 출판계는 당혹감을 넘어 자괴감에 빠져 있다. 이런 ‘사재기 의혹’이 제기되자 자음과모음 강병철 대표는 8일 보도자료를 내고 “모든 권한을 내려놓겠다”면서 “어떠한 유형의 변명도 하지 않겠다. 사옥도 매각할 것이고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자음과모음은 강 대표 사퇴에 따라 황광수·심진경 편집위원 등을 주축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서점가에 풀린 황석영씨의 ‘여울물 소리’ 책을 수거하기로 했다. 사재기 의혹이 제기된 직후 황석영씨가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며 해당 작품을 절판시키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여울물 소리’는 칠순을 맞이해 작가 인생 50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실린 주요 작품으로 이런 추문에 연루된 것 자체가 나의 문학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치욕스러운 일”이라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김연수씨도 “사재기를 원하지도 않고 원할 이유도 없다”고 해명했다. 한국출판인회의(회장 박은주)는 이날 사재기 의혹과 관련, “출판계와 독자에 대한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자성의 뜻을 밝혔다. 출판인회의는 이번 의혹을 계기로 출판계의 잘못된 사재기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현재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대신 벌금형으로 강화하도록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사재기를 계속하는 출판사와 이를 조장하는 서점은 명단을 공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출판사들의 사재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1년 생각의나무가 사재기 혐의로 출판인회의에서 제명된 일은 유명하다. 출판사들 자정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출판물 불법유통신고센터 운영위원회가 사재기 혐의가 있는 도서 4종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문이당의 ‘아버지의 눈물’, 국일경제연구소의 ‘마법의 돈관리’, 비전코리아의 ‘정성’ 등을 공표했다. 지난해 말 출판사의 ‘사재기’ 관행을 고발한 북스피어 김홍민(37) 대표는 이날 “인터넷 서점에서 시행하는 베스트셀러 순위 경쟁에 노출된 출판사들은 모두 사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담론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독자들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신경 쓰는 만큼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다. 출판사들은 사재기가 독자를 우롱하는 사기 행위라는 것을 잘 알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위주로 판매가 되기 때문에 사재기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다. 당시 김 대표의 고발 내용에 자극받은 1인 출판사 가운데 일부는 “사재기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는 웃지 못할 주문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재기에 대한 철저한 감시·조사 이외에 인터넷 서점 등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 전국 단위의 베스트셀러 집계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1879년 日해군 오키열도에 독도 포함 안 해

    1879년 日해군 오키열도에 독도 포함 안 해

    일본 해군 수로부가 1879년에 오키 열도 측량 당시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닌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일본의 공식 자료가 최초로 공개됐다.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은 8일 1879년 일본 해군 수로부의 기모쓰키 가네유키가 제작한 ‘오키열도 측량보고서’인 ‘은기회항약기’(隱岐回航略記)에 오키 열도의 위치를 북위 35도 57분∼36도 18분, 동경 132도∼133도 23분으로 기록했다. 오키 열도의 범주에 독도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오키 섬은 일본 시마네 반도의 북쪽 약 50㎞에 있는 섬으로, 독도에서 약 157㎞ 떨어져 있다. 수로부의 자료는 17세기 중반부터 독도를 영토의 일부로 인식해 왔다는 일본 주장이 허구임을 뒷받침한다. 한철호 대외교류연구원장(역사교육과 교수)은 “오키 열도를 포함한 북서안 측량의 책임자인 기모쓰키가 독도를 오키의 소도에 속하는 179개 섬 중의 하나로 인식했다면 그 북쪽 한계에 있었던 독도를 반드시 포함하고 북위와 동경의 위치도 넓혀 잡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원장은 “하지만 그는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 영토라고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에 독도를 측량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을뿐더러 ‘은기회항약기’에도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연구원이 함께 공개한 1879년과 1883년 쓰쿠바함이 일본 환해를 항해하면서 작성한 ‘쓰쿠바함 제3회 일본환해항적지도’에도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한 원장은 “이 지도에 울릉도와 그 부속 섬인 독도가 빠져 있는 사실은 수로부를 포함한 일본 해군이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영토로 파악·인식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한 원장은 이러한 내용을 10일 동국대 다향관에서 열리는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한글의 과학성·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어”

    “한글의 과학성·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어”

    “스승의 날이 왜 5월 15일인 줄 아세요? 세종대왕의 생일이에요. 한국인의 가장 큰 스승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라는 이야기죠.” 강병인(51) 캘리그래퍼는 한글 붓글씨에 ‘꽂힌’ 사람답게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붓글씨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훈민정음해례본도 닳도록 읽었다. 그는 “한글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리도 상형했다”면서 생동 기운을 끌어온다. 칼의 날카로움, 봄의 따뜻함, 꽃의 아름다움, 나는 자유로움, 숲의 듬직함 등등. 상업적인 한글 캘리그래퍼로 본격 활동한 지 13년. 그의 글씨는 이제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참이슬’과 ‘산사춘’, ‘풀무원’, ‘아침햇살’ 등을 시작으로 ‘독도’, 숭례문 가림막 ‘늠름한 모습 그대로’,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 등 셀 수가 없다. “TV드라마 타이틀인 ‘엄마가 뿔났다’에서 ‘뿔’자를 황소의 우뚝 솟은 뿔처럼 그려서 기억에 오래 남기도 했고요, ‘화요’라는 술은 마시면 불같이 일어나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담아서 쓴 글씨라서 술꾼들이 좋아합니다”고 했다. 그가 붓글씨를 만난 것은 경남 합천군 용주면 용호초등학교 6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이 ‘서예반으로 들어오느라. 그럼 꿀을 실컷 먹게 해주마’라고 했어요. 그때 제가 군 미술대회에 나갈 만큼 그림도 곧잘 그렸는데, 꿀 때문에 서예반으로 갔죠. 중학교 때는 교과서에서 추사 김정희를 만났는데, 그때 ‘나도 추사가 되자’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영원히 먹물과 지내자’라는 ‘영묵’으로 호도 지었죠. 붓글씨가 그렇게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고교 졸업장은 1981년 검정고시로 또래보다 1년 먼저 땄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다.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면 늘 붓글씨와 디자인과 함께 살았다. 대학은 방통대와 사이버대학을 거쳤고, 2010년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에서 석사도 마쳤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형태적으로 상형문자로서 아름다움이 있는지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석사논문 제목이 ‘한글 글꼴의 의미적 상형성’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붓글씨의 자유로움을 소재로 오는 24일 고향인 경남 합천 용주초등학교에서 4~5학년과 ‘한글, 글씨로 놀다’라는 주제로 논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13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의 일환이다. 그는 “시골 촌동네에서 붓글씨를 만나고 제가 이렇게 성장했듯이,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최동호 교수의 30년 연구 결실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 발간

    시인·평론가인 최동호(65)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1982년부터 30년간 꾸준히 연구해온 시인 정지용(1902~1950) 관련 논문 15편을 모아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서정시학 펴냄)을 최근 펴냈다. 최 교수는 1976년 겨울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집을 우연히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문서림에서 구해 읽은 뒤로 이상한 감흥에 휩싸여 그 기운으로 여기까지 몰아붙인 듯하다. 시가 무엇인가 의문이 들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유협의 ‘문심조룡’, ‘정지용시집’을 펼쳐들었다는 그는 1999년 안식년에 미국 UCLA대학 방문학자로 가서 정지용 전집을 끼고 매일 한두 편씩 정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귀국해 정지용 시어를 중심으로 한 ‘정지용 사전’(2003년)을 발간할 수 있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석가탑서 사리 46과 수습

    석가탑서 사리 46과 수습

    국보 21호인 불국사삼층석탑(일명 석가탑)에서 이미 확인된 사리 1과(顆) 외에 45과가 추가로 확인돼 모두 46과가 수습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달 29일 석가탑에서 사리 45과를 추가로 수습했다고 7일 밝혔다. 지난달 2일 수습돼 문화재보존과학센터로 이송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탑 안에 넣는 공양구)에 봉안돼 있던 것이다. 유리제사리병(복제품: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때 파손)에서 44과, 목제사리병에서 1과가 나와 모두 45과를 수습했다. 지난달 2일 은제사리호(銀製舍利壺) 내의 은제사리합(盒)에서 수습돼 불국사 무설전에 모신 1과를 합하면 석가탑 해체·수리 과정 중 수습된 사리는 모두 46과다. 그러나 사리의 수는 1966년 석가탑 해체·수리 때 수습된 것보다 2과가 부족하다. 당시 사리장엄구 안에는 유리제사리병 46과, 은제사리합 1과, 목제사리호 1과 등 모두 48과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고려 초 정종 4년(1038년)에 쓰인 ‘불국사 서석탑 중수기’에 유리제사리병에 47과의 사리가 들어 있다고 기록됐을 뿐 은제사리합과 목제사리호에 대한 기록이 없어 1038년 이후 최소 한 차례 이상 석가탑이 수리됐을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경주에서 1000여년 만의 전면적 해체·수리를 진두지휘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1966년 석가탑을 해체·수리한 뒤 당시 불국사 주지 스님이 재봉안하는 과정에서 유리제사리병을 떨어뜨려 병이 파손되고 사리는 흩어졌는데 이때 2과를 마저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수습한 사리를 석탑에 재봉안하기 전까지 불국사 무설전에 모시고 내년 3월까지 석가탑 사리친견법회를 개최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반구대 암각화 보존 해법 마련”

    “반구대 암각화 보존 해법 마련”

    김정배(73) 신임 문화재위원장이 7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전체 위원장으로 선출된 뒤 반구대 암각화 보존 문제를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문화재 분야 최대 현안인 반구대 암각화 보존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꼽혀 왔다. 고려대 사학과 교수 시절인 1971년 12월 24일 문명대, 이융조 교수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한 장본인이다. 김 위원장은 “1971년 천전리에서 암각화를 발견한 이후 발견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면서 “각계각처에서 나서 달라고 했지만 문 교수가 나서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현재 온 국민의 관심은 반구대 암각화를 어떻게 보존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면서 “변영섭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정부와 울산도 관심이 있다. 생각건대 유적·유물을 사랑하는 것은 중앙이나 지방이나 같다”고 전제했다. 그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조금 다를 수 있다”면서 “지혜를 짜서 논의해 나갈 것이며 문화재위원회 위원들의 고견을 경청할 것이다. 어려운 일일수록 의견을 듣고 하는 게 옳다. 훌륭한 의견을 경청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선사인의 생활상이 새겨진 신석기 시대의 바위그림인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으나 1965년 시작된 사연댐 건설 후 발견된 탓에 연중 8개월가량 물에 잠기면서 훼손이 가중되고 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황석영 “사재기 몰랐다… 절판시킬 것”

    황석영 “사재기 몰랐다… 절판시킬 것”

    SBS는 7일 ‘현장21’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사재기를 통해 베스트셀러가 조작되고 있다며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출간한 ‘여울물 소리’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등 3권에 대해 사재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소설가 황석영은 지난해 등단 50년을 기념해 발표한 소설 ‘여울물 소리’의 사재기 의혹에 대해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해명하며 작품을 절판시키겠다고 밝혔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황석영은 이날 SBS가 ‘여울물 소리’에 대해 제기한 사재기 의혹과 관련해 “전혀 알지 못했다”며 “출판사 ‘자음과 모음’에 출판권 해지를 통보함과 동시에 ‘여울물 소리’를 절판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황석영은 “‘여울물 소리’는 칠순을 맞이해 작가 인생 50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실린 주요 작품으로 이런 추문에 연루된 것 자체가 나의 문학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치욕스런 일”이라며 “명예훼손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 배상과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단호하게 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설가 김연수도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사재기 의혹과 관련해 “사재기를 할 이유가 없다. 사재기를 원하지도 않고 원할 이유도 없다”고 해명했다. ‘여울물 소리’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지난해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진입하는 등 인기를 모았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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