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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과공비례(過恭非禮)/문소영 논설위원

    유학은 예(禮)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도(道)가 예를 통해 드러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예의 바르지 않으면 선비가 아니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양반 가문이라면 당연히 의관을 바르게 하고 교만하거나 건방진 언행은 삼가는 것이 기본이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자는 “지나친 공손은 예와 어긋난다”는 뜻의 과공비례(過恭非禮)를 경고했다. ‘맹자’도 이루장에서 “비례지례(非禮之禮)와 비의지의(非義之義)를 대인(大人)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인은 비례와 비의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과공비례이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예는 학문뿐 아니라 통치에도 관여했다. 17세기 조선 후기 벌어진 1차·2차 예송 논쟁이다. 1차 예송 논쟁은 1659년 둘째 아들로 왕위를 이은 효종이 죽자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인조의 계비)가 3년상을 받을지 1년상을 받을지 논란을 벌인 것이다. 아무리 국왕이지만 둘째 왕자였으니 1년상만 치르면 된다던 송시열 등 서인이 이겼다. 2차 예송 논쟁은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까로 시작됐다. 남인은 1년, 서인은 9개월을 주장했는데 현종은 1년을 주장한 남인의 손을 들어 줬다. 예송 논쟁은 왕권을 일반사대부 수준으로 취급하려던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득세로 이어져 왕권 강화가 됐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을 두고 19세기 말 일본에서 벌어진 ‘오쓰 사건’과 비교하기도 한다. 1891년 5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시베리아철도(TSR) 기공식 참석을 앞두고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가 일본 오쓰 지역을 방문했는데 일본인 순사 쓰다 산조가 갑자기 일본도로 황태자를 습격한 것이다. 찰과상에 그쳤지만,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메이지 천왕이 황태자를 위문했고, 전국의 학생은 위문편지와 위문품을 보냈다. 일본인들은 이어 쓰다 성(姓)을 가진 사람들은 성을 바꾸고, ‘산조’라는 이름은 폐기했다. 일본 정부는 사형을 선고하도록 사법부에 압력을 가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거부하고 일반인 모살 미수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쓰다는 복역 중 사망했고, 그 일가는 일본인들의 집단 따돌림 등으로 멸절됐다. 리퍼트 대사는 피습 직후 한국어로 “같이 갑시다”라는 글을 남겨 외교관의 냉철한 이성을 보여 줬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기원하는 행사를 내외신으로 보았다. 한복을 입은 중년 여성들이 부채춤과 장구춤을 추고, 발레를 선보이는가 하면 기도회도 열렸다. 70대 남성은 개고기와 미역국을 싸들고 병문안을 갔단다. 과공비례가 아닌가 싶다. 지나친 공손은 예의도 아니고 비굴하게 보이거나 미덥지 못한 대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혈맹’이라는 한·미 동맹이 개인의 피습으로 훼손될 만큼 허약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클린턴 초상화/문소영 논설위원

    미국은 역대 대통령들이 유화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엽 사진기가 대중화됐으니, 그 이전인 1789년부터 1797년까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워싱턴부터 그림으로 남기던 전통이 이어지고 있나 보다 하고 추정한다. 그 전통대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2006년 초상화로 남았다. 영국의 과학사 교수 아서 밀러가 쓴 책 ‘아인슈타인 피카소’는 20세기 비범한 두 명의 천재가 나온 당대의 사회적·과학적·예술적·지적 환경을 설명했다. 특히 ‘청색시대’만 해도 완벽한 구상 화가였던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통해 추상 화가의 길로 들어선 이유로 그림보다 더 재현 능력이 뛰어난 사진기의 발명과 사진의 대중화를 지적했다. 모습을 남기고 싶은 고관대작과 교황, 부유한 상인들에게 솜씨 좋은 화가는 더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은 남다른 기호를 슬쩍 끼워 넣을 수 있다. 클린턴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넬슨 생크는 초상화 오른쪽의 흐릿한 그림자가 ‘지퍼게이트’의 당사자 모니카 르윈스키를 상징한다고 9년 만에 폭로했다. 포토샵을 해도 사진이라면 감히 집어넣지 못할 상징이 아니었던가 싶어서 고소해하며 웃었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꽃눈/문소영 논설위원

    2월 초부터 소백산에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노란색 난쟁이 복수초와 변산바람꽃 등을 사진 찍어 보내는 친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마른 가지 사이에 유일하게 한 송이 핀 개나리꽃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조만간 병아리색의 수줍은 생강꽃과 만개해 흐드러진 개나리꽃, 화사한 연분홍 진달래꽃들이 올라와 완연한 봄을 알릴 것 같다. 우아한 흰 목련도 봉오리를 마구 내밀 것이다. 사실 무신경하게 지나쳐서 그렇지 메마른 나뭇가지를 자세히 보면 물이 올라 붉고 푸른 빛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봄이 달려오는 거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 느닷없이 날이 며칠 따뜻해지면 철없이 꽃망울을 맺던 목련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찼지만, 식물이 봄이 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감지하는지를 알고 나니 나무로 사는 일도 쉽지 않을 성싶다. 사과나무는 섭씨 0도에서 7도의 온도가 잎눈과 꽃눈에 1600시간 정도 축적되면 봄을 깨닫고 기지개를 편다고 한다. 즉 나무마다 최적의 누적된 날씨를 감지할 온도계를 부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평균을 따져 볼 능력도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알아 갈수록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암살/문소영 논설위원

    암살(暗殺)은 특정인을 비합법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다.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정치·종교·사상적인 이유를 들어 손쉽게 제거하는 방법이 암살이다. 개인적 보복이라기보다 특정한 조직이나 권력자들과 연계된 경우가 허다하다. 영어로 암살(assassination)의 어원은 마약 하시시(hashish)를 복용한 사람을 가리키는 아랍어 하시신(hashishi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1세기 말 하산 사바바가 페르시아에서 비밀결사 아사신파(派)를 만들고 결사대원에게 하시시를 먹여 국왕과 요인들을 암살하게 했고, 12세기 십자군을 통해 유럽에 알려졌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에 암살이 많았다. 특히 독재 국가에서는 암살로 독재자가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고, 역으로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도 암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미국에서 1865년 노예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불사한 링컨 대통령이, 1963년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암살도 있었다. 안중근은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 일본 전 총리를 암살했다. 한반도로 시선을 돌리면 고려 말 조선 건국을 도모하던 이성계 등의 무리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개성 선죽교에서 암살했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권을 빼앗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영의정 김종서 등을 암살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1945년 해방된 뒤 좌우 이념 갈등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언론인 송진우가 1945년 12월에, 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암살됐고,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뒤인 1949년 6월 피격됐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 사망한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 역시 타살이자 암살로 최근 드러났다.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암살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다. 이 암살은 초기 예상과 달리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한두 달 사이에 영국·프랑스·러시아가 한 편이 된 ‘삼국협상’과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가 ‘삼국동맹’으로 맞서 전쟁을 벌인 탓이다. 191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000만명이 죽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지난달 27일 크렘린궁 인근에서 피살돼 러시아와 유럽이 들끓고 있다. 암살설이 파다하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 밑에서 제1부총리를 지낸 넴초프는 피살되던 날 라디오 방송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광적이고 공격적인 유혈 정책으로 러시아가 위기에 빠졌다”면서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 푸틴을 비판하다가 암살된 야당 인사나 언론인, 고위 공직자들이 적지 않다. 이번 일로 푸틴 체제가 더 공고화될지, 발밑에서 붕괴가 시작될지 잘 지켜봐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서울광장] 태극기 뒤에 숨은 ‘가짜 애국심’/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태극기 뒤에 숨은 ‘가짜 애국심’/문소영 논설위원

    미국 연수 중에 여권이 만료돼 워싱턴DC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사관을 나오는데 정문 앞에 태극기가 푸른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촌스럽게도 울컥했던 탓에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기념사진을 찍었다. 외국에 나가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심사를 이해할 만했다. 주미 참사관으로 두 번째로 미국에 간 이완용은 1889년 5월 8일 미국 워싱턴DC의 대한제국 공사관 현관 앞에서 이하영 서리 전권공사, 고종의 어의였던 앨런 참찬관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공사관 건물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연세대박물관이 보관 중인 127년이 지나 노랗게 빛바랜 작은 흑백 사진에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아직 국권을 잃지 않은 나라의 관리로서의 당당함을 상상하게 된다. 짐작건대 애국심이 넘쳐났을 것이다. ‘조선의 엘리트’였던 이완용은 자신이 21년 뒤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요즘 애국심은 국가대표들이 겨루는 A매치 축구 경기에서 흔히 드러난다. 월드컵 경기든, 친선 경기든 표범처럼 늘씬한 몸매의 기성용이나 손흥민 등이 푸른 잔디밭에서 거친 태클을 가볍게 뛰어넘어 슛을 할 때면 사람들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땅을 친다. 해외 여행길에 한국인들은 외국의 어느 길거리에서 현대차를 만나거나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옥외 간판을 만날 때도 가슴이 두근거리곤 할 것이다. 한국이 많이 성장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배낭여행 중에도 한국의 외교관들이 있는 외국의 건물 앞에서 바람에 무심하게 흔들리는 태극기를 보고도 가슴이 출렁할 것이다. 나쁜 기억도 있다. 1970년대 국기 하강식이다. ‘얼음 땡’이 돼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들었던 경험은 40대 이상의 한국인은 누구나 있다. 볼일이 급한데도 국기 하강식에 붙잡혀 꼼짝하지 못할 때는 태극기나 애국은 그저 귀찮은 강요가 돼 버리고 만다. 영화관에서는 애국 뉴스인 ‘대한뉴스’를 보고 애국가가 나오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경배를 해야 했다. 미국인들이 성조기로 팬티를 만들어 입을 때, 한국인은 태극기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태극기가 훼손되면 처벌까지 받았으니 귀찮고 달갑지 않았다. ‘유신 시절에 강요한 국기 하강식이나 영화관의 의례가 사라졌지만, 애국심이 줄지 않았다고 입증한 시점이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다. 젊은 여성들이 태극기를 몸에 둘렀고, 초대형 태극기가 관중석에서 흔들렸으며, 국민은 열광했다. ‘관제 애국’을 강요하지 않아도 애국심은 줄지 않았다. 사회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19세기 인도네시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물리적인 공권력과 감시뿐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만한 상징과 의례, 문화예술을 정교하게 가다듬어 국가를 전체주의로 운영하는 극단적인 방식을 말한다. 대표적인 극장국가인 북한은 1930년대 항일투쟁을 전면적으로 활용하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내려오는 ‘백두혈통’을 강조해 3대 세습의 전근대적 통치를 정당화한다. ‘민주공화국’인 한국에서도 최근 이상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와 같은 애국심의 강조다. ‘태극기 게양법’을 개정하겠다는 정부가 국민에게 애국을 강요하겠다는 의도 같다. 때마침 지난 25일 서울 광화문 일대 빌딩에는 대형 태극기가 나붙기 시작했다. 관공서도 있고 민간 기업도 있었다. 행정자치부는 26일 광복 70주년 3·1절에 맞춰 ‘태극기 달기 캠페인’을 펼쳤다고 한다. 그러나 광화문 길 양옆으로 쭉 걸린 대형 태극기에서 대한민국 서울의 특별한 아름다움도 찾기 어렵다. 마치 이상한 전체주의 국가 같고 유치하다. 태극기나 애국심을 국가가 전유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이 공군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 자격을 갖췄다는 뉴스를 어제 들었다. 이완구 국무총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보충역으로 군 복무를 끝냈다. 미국 군수업체에 군사기밀을 팔아넘겨 25억원을 챙긴 전 공군 참모총장에게 겨우 집행유예가 선고된다. 한국의 장관 후보자는 국가 운영의 능력을 위장 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을 통해 보여 줘야 한다. 태극기를 내걸어 애국을 입증한다면 한국에서 애국은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아빠 전성시대/문소영 논설위원

    TV를 틀면 ‘아빠 전성시대’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산업화 세대 아버지 덕수의 헌신에 열광하면서도 파독 간호사로 생고생한 덕수 아내의 수고는 그저 묻어서 평가하는 듯하다. 아빠와 엄마의 고생을 편 갈라서 누가 더 고생했나 경연을 붙이고 편애를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날 대중매체에서 건전한 엄마가 사라진 것 같아 섭섭하다. ‘엄마’는 아침 드라마 등에 건재한데 ‘막장 캐릭터’라는 것이 문제다. 개명한 21세기에도 시어머니라는 지위만으로 며느리와 사돈네에 막말을 일삼고, 남편에게는 벌이가 시원찮다며 구박하는 몰상식한 인물들로 나온다. 한겨울 얼음장을 깨고 빨래를 하다 동상에 걸린 엄마나, 본인은 무학이지만 가난 속에서 아들딸을 고등교육까지 시키는 엄마가 대중문화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엄마가 사라진 그 자리를 가설 오븐에 식빵을 구워 내는 ‘차줌마’(차승원+아줌마)가, 세 쌍둥이를 육아하는 송일국 아빠가 차지했다. 밥벌이에 바빠 20대 딸과 원만하지 못한 50대 아빠를 그려 낸 ‘아빠를 부탁해’는 또 어떤가. 체력이 필요한 리얼리티TV 탓 같기도 한데 전업주부로, 경단녀로, 슈퍼우먼으로 묵묵히 사는 엄마들이 괜히 서럽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영화 ‘버드맨’과 김치 냄새 논란/문소영 논설위원

    올해로 87회인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은 영화 ‘버드맨’은 왕년에 인기 절정을 누렸던 영화배우 리건 톰슨이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다음달 5일 한국에서도 개봉한다. 그런데 영화 ‘버드맨’의 수상과 함께 찾아온 뉴스는 이 영화가 한국 문화를 폄하했다는 지적으로, 흥행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 극 중에서 버드맨의 딸 역할을 맡은 배우 에마 스톤이 동양인이 운영하는 꽃가게에 들러 꽃들을 가리키면서 “모두 김치같이 역한 냄새가 난다”(It all smells like fucking kimchi)고 대사를 쳤다는 것이다. 버드맨의 딸이 매우 신경질적인 캐릭터를 보여 주려는 의도에서 설정된 상황이라고 설명한 해명 보도도 나왔다. 문제의 대사를 친 에마 스톤은 한식 마니아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날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40대의 퍼트리샤 아켓이 “우리는 그동안 다른 모두의 평등을 위해 싸워 왔다. 이제는 우리의 임금 평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가질 때”라고 멋진 수상 소감을 말하자 여배우 메릴 스트립과 가수 제니퍼 로페즈가 열띤 박수에 환호성을 보내 왠지 뭉클했는데 때아닌 ‘김치 냄새 논란이라니’ 싶다. 오히려 ‘김치’가 미국 영화 대사에 등장할 만큼 널리 알려진 음식인가 싶은 의문이 우선되고 궁금한 것이 아닌가. 일본의 스시가 세계적인 고급 음식이 됐지만, 그전에 대중예술과 미디어에서 일본의 날생선을 먹는 문화가 야만적으로 묘사된 적이 적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다고 해도 발효 음식인 김치는 사실 먹기 쉬운 음식이 아니다. 고린내 같은 냄새로 숙성된 치즈랑 비슷하다. 요구르트도 처음 먹을 때는 떨떠름한 맛과 향이 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음식에 들어가는 오장을 뒤집어 놓을 듯한 향채는 또 어떤가. 이런 각국의 특별한 음식문화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지상파 TV나 케이블 TV에서 오만 가지 품평이 쏟아지곤 했다. 그것은 특정 음식과 문화권을 폄하하는 것이었던가, 아니면 소개했던 것인가.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향락 생활과 죽음을 묘사한 미국 영화 ‘디 인터뷰’를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했다면 ‘김치 냄새’ 같은 대사는 덤덤히 넘어가는 것이 맞지 않겠나. 이현령비현령으로 적용하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면 말이다. 또 버드맨의 의도적인 네거티브 마케팅이라면 모를까. 한국 문화 폄하 논란은 과도한 의혹 제기다. 미국 영화 ‘루시’에서 최민식이 비정한 폭력배로 나와 한국어로 연기하거나, 007시리즈 중에서 북한이 테러 국가로 나오는 바람에 한국어(북한말)가 나오거나 하면 어색하면서도 재밌어하지 않았던가. 자국민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민족주의는 과도하면 촌스럽거나 못난 열등감의 폭발로 비춰진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핀테크와 지름신/문소영 논설위원

    ‘핀테크’(FinTech)란 단어에 순간적으로 옷핀이나 머리핀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를 뜻하는 영어의 앞머리를 따 합성한 신조어다. 즉 정보기술과 디지털 시대에 맞는 금융을 말한다. 모바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빅데이터 등을 활용해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이자 서비스이다. 2008년 스마트폰이 확산하면서 불이 붙었다. 쉽게는 인터넷 등에서 물건을 산 뒤 간단한 본인 확인을 거친 뒤 물건값을 지급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 소상공인들의 상품 결제는 현재 은행 송금이 많은데, 핀테크가 적용되면 이런 불편함이 사라지게 된다. 소비자들에게 핀테크의 도입은 새로운 차원의 쇼핑이 열리는 셈이다.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물건이 맘에 들어 구매를 결정했다가도 새롭게 신용카드를 등록하라거나, 액티브X에 오류가 나거나, ‘인증 실패’에 걸려 결제가 막히는 것 등으로 구매를 포기한 때가 적지 않았다. ‘인증 실패’나 불편함은 갑작스럽게 정신이 멍한 상태가 돼 충동구매를 일으킨다는 ‘지름신’의 강림을 막을 수 있는 적당한 장애와 노이즈가 되기도 했는데, 더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1998년 출범해 2002년 이베이에 팔린 ‘페이팔’은 핀테크의 원조격이다. 이베이 경매를 즐기는 사람들은 페이팔이라는 결제 대행 업체를 이용해 쉽게 물건을 사고팔았다. 페이팔은 전 세계 모바일 쇼핑 결제액의 18%를 차지하지만, 현재는 새로운 핀테크 경쟁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중국 벤처기업의 대표 주자인 알리바바가 내놓은 ‘알리페이’ 서비스도 유명하다. 가상 화폐를 미리 충전해 놓으면 그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 가상 화폐라고 하니 싸이월드의 ‘도토리’나, 달러 등을 대체하겠다던 ‘비트코인’도 떠오른다. 애플은 아이폰6를 출시하면서 ‘애플페이’를 선보였다. 결제를 원할 때 카드리더기를 아이폰에 갖다 대면 이미 등록해 놓은 결제 카드와 사용자의 지문을 인식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소액 결제로 지난해 9월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페이’도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18일 미국 모바일 결제 업체 ‘루프페이’를 인수했다고 한다. 그 나름대로 유망하다고 판단한 핀테크 스타트업을 인수한 것이다. 한국에서 핀테크 서비스가 가능할지 아직 미지수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관전평이다. 한국의 금융산업은 액티브X가 존재하는 ‘갈라파고스 섬’ 같은 진화하지 못한 영역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규제도 적지 않다. 규제가 많은데도 보안이 위태위태하다. 은행들이 2년 전 고객의 개인정보와 계좌정보 등을 다 털린 탓이다. 시중은행은 하루 텔레뱅킹 이체 한도도 줄인다. 정부의 각종 금융규제가 많은 탓에 한국형 핀테크가 나오지 못한다. 지름신을 생각하면 다행인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간단 요리법/문소영 논설위원

    ‘옥수수 삶는 법을 몰라 어려웠다’며 한숨을 쉬면 성인 남녀 모두 외계인 보듯 했다. 그걸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10년 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옥수수 삶는 법은 ‘냄비의 물이 끓으면 옥수수를 넣고서 익혀 꺼낸다’는 식이었다. 채반에 올려서 쪄 내는지, 옥수수를 끓는 물 속에 퐁당 담가 삶아 내는지, 소금이나 첨가물을 넣는지, 또 옥수수 껍질은 모두 벗기는지, 몇 분 동안 익히는지 등 의문투성이였다. 누군가의 노고가 들어간 옥수수를 먹을 줄만 알았지 해본 적이 없으니 그랬다. 궁금증이 생긴 대로 채반에도 쪄 내고, 물에 퐁당 담가서 삶아도 보고, 껍질째 익히는 등 몇 가지 실험을 하면 됐을 터인데, 작은 실패가 싫어서 정답만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고민한 모양이 우습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많아진 덕분인지 요즘은 인터넷 등에 간단한 요리법도 많고, 설명이 잘 돼 있어 의문점을 남기지 않는다. ‘남자는 요리를 몰라’라는 관념에 근거해 초보자가 알 수 있게 설명돼 있다. 요리 전문 채널 덕분에 동영상들도 즐비하다. ‘오늘 뭐 먹지’ 등에서 나오는 요리법 중엔 정말 간단한 것이 많다. ‘초식남’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초간단 요리법은 더 많아지리라.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작가 임옥상의 ‘헌법 병풍’/문소영 논설위원

    작가 임옥상은 설 명절을 앞두고 지인들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제6공화국 헌법 전문을 새긴 산수화로 8폭 병풍 형태로 만든 것이다. 연하장 안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읽읍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 1항이다. ‘헌법 전문을 새긴 산수화’는 원래 지난해 2월부터 6월 1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네오 산수전’란 제목의 기획전에 내놓았던 작품이다. 가로 18m에 세로 4.8m의 초대형 작품으로 전시실의 벽 한 면을 고스란히 차지했을 법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소장하고자 했으나 전시 작품이 너무 커 곤란해하자 임 작가는 다시 절반 크기인 가로 9m에 세로 2.4m로 새로 제작했다. 이때 보관이 쉽도록 형태를 병풍으로 변형했다. 설 연하장은 이 ‘헌법 병풍’을 축소해 미니어처로 제작했다. 서양화에 풍경화(風景畵)가 있다면 동양화에서는 산수화(山水畵)가 있다. 동양의 산수화는 다시 풍경화 같은 진경산수와 마음의 이미지를 그린 관념산수로 나뉜다. 임 작가의 헌법 전문이 포함된 그 작품은 관념 산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작품을 만든 이유로 그는 “정부가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데 ‘진정 지켜야 할 체제는 헌법의 가치가 아니겠는가’ 싶었다”고 했다. 즉 임 작가의 설 연하장은 “헌법을 읽읍시다”라는 대국민운동이자 체제수호운동인 셈이다. 그는 “작가란 모름지기 아나키스트이자 아웃사이더여야 하는데, 헌법 수호를 주장하다니 식상하죠?”라고 반문했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강조했다. 혼외 자식 문제로 물러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헌법 7조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를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언론인들은 미국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를 빨리 기억해 내지 못한다. 화장실 옆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건물 미화원에게는 헌법 제10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가 절실하지 않을까. 청년 실업자에게는 헌법 제32조 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처럼 간절한 것이 없다. 헌법 제18조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는 다음카카오 등에 감청장치를 설치하겠다는 국가정보원 등의 입장과 배치된다.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할 때 헌법적 가치가 지켜지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국회뿐 아니라 대법관,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은 물론이고 시민 역시 그렇다. 때마침 인사처가 2017년부터 5급 공채시험과 외교관 선발시험의 1차 시험과목에 헌법 과목을 추가한단다. 우리 모두 헌법을 읽어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폭스뉴스/문소영 논설위원

    미국 폭스뉴스가 지난 13일 성폭행 사건을 다루면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사진을 성범죄 용의자로 내보내는 TV 방송사고를 냈다. 폭스채널의 지역방송 폭스5 샌디에이고의 방송사고로, TV 화면에는 흰색 셔츠에 푸른색 넥타이를 맨 오바마 대통령 사진 밑에 ‘불기소’(NO CHARGES)라는 자막이 삽입된 채 약 5초간 방영됐다. 방송사는 공식 사과는 하지 않은 채 “실수가 있었으나 의도적이지 않았다”라고만 해명했단다. 폭스뉴스와 오바마 대통령의 ‘악연’을 이미 아는 사람들은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해명에 ‘정말?’ 하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폭스뉴스는 2007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하던 오바마 상원의원에 대해 ‘유년 시절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에서 수학했다’는 오보를 내보냈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테러리스트와의 연계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던 미국인 유권자를 자극한 거짓 보도였다. 또 폭스뉴스의 한 아나운서는 대선 기간에 오바마가 부인 미셸과 주먹을 부딪치는 인사를 하는데 테러리스트의 인사법이 아니냐는 식의 의혹을 제기했다. 폭스뉴스의 또 다른 아나운서가 ‘오사마 빈라덴과 오바마의 이름이 헛갈리기 쉬워 암살될지도 모르겠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나중에 사과는 했다. 이런 기조는 폭스뉴스의 사주이자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 영국의 위성 TV방송 비스카이비 등을 소유한 호주 출신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평전 ‘루퍼트 머독’을 쓴 호주 언론학자 데이비드 맥나이트의 주장이다. 머독은 2012년 10월 13일 “오바마가 대통령에 재선되면 이스라엘엔 악몽이 될 것”이라고 비난하는 트윗을 날렸다. 머독은 틈만 나면 오바마 대통령을 두고 ‘좌파 사회주의자’로 맹비난하고, 폭스뉴스를 통해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시민단체 ‘티파티 운동’에 시청자의 참여를 독려했다. 정치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언론사주들과 달리 머독은 독특하게 영국·호주·미국 등에서 ‘킹메이커’를 자처하며 자신이 소유한 언론과 출판 등을 통해 정치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애국을 강조하며 특정 정파를 옹호하는 선동가들이 ‘진영 논리’를 설파하는 폭스뉴스의 논쟁적이고 주관적인 보도 행태는 미국 방송뿐 아니라 전 세계에 확산됐는데, 이른바 ‘폭스뉴스 효과’라고 부른다. 머독이 소유한 영화사이자 폭스뉴스의 모기업인 ‘20세기 폭스’가 제작해 최근 개봉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미국 현직 대통령이 ‘선(善)의 심판’을 받아 사망하는 장면도 논란이다. 오바마 대통령을 묘사했다는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호주인이었던 머독은 이제는 호주 국적은 아니다. 1985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7개의 미국 방송국을 소유하기 위한 국적 변경으로, 1996년 폭스채널이 탄생했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거짓말/문소영 논설위원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된 영국 소설 ‘쇼퍼홀릭’의 여주인공 레베카를 생각하면 10여년 전 그 책을 읽으면서 화병이 생길 것처럼 답답했던 감각이 살아난다.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의 레베카는 경제전문 잡지 기자로 일하는데도 경제 관념이 ‘꽝’이다. 쇼핑중독증 탓이다. 은행이 대출을 제안하자 덥석 받아들이고 카드로 물건을 마구 사들인다. 문제는 사회 초년생이라 자금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대출 상환과 카드대금 지급 독촉이 올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거짓말을 해댄다. 능력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대출이나 사용 한도를 늘려 준 은행이나 카드사를 욕도 한다. 철없는 레베카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다가도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아 더 큰 곤란에 빠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제 거짓말은 그만!” 하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 당시 한국 전체가 신용카드 대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탓에 감정이입이 더 잘됐던 것도 같다. 발목 부상으로 평생 등산 한번 못 갔다던 인물이 2013년 산악회에 참여해 찍힌 사진이 돌아다닌다. 새빨간 거짓말이 드러난다. 솔직하게 사과했더라면 ‘저 시절엔 다 그랬지’ 하면서 측은하게라도 생각할 텐데.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구조조정/문소영 논설위원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한 고참 직장인은 업무상 갈등으로 보스에게 오만 가지 불평불만을 토로해도 딱 한마디 문장은 절대 내뱉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나보고 (회사에서) 나가라는 거냐”는 발언이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라는 답이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꼼짝마’ 하고 짐 싸서 회사를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빌려 온 ‘종신고용’에서 수시 구조조정으로 전환된 시점은 1997년 외환위기부터다. 사내 인사나 승진을 문제 삼아 “때려치우겠다”는 발언을 밥 먹듯 하고 또 만류하는 동료가 존재하던 한국의 직장 관행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청와대와 경제부처 장관, 대기업 오너들이 장담했지만,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외환위기를 맞고 나니 은행, 종합금융사 등이 문을 닫거나 인수합병(M&A)되면서 수많은 직장인이 거리로 나앉았다. 정년을 입사한 회사에서 맞았던 ‘철밥통’은 사라졌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최연소 최고경영자로 최고의 성과를 내던 잭 웰치의 경영혁신들이 소개·확산되기 시작했다. ‘군살 없는 조직으로 가장 낮은 원가로 고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경영 원칙에 따라 1등이 아닌 회사는 매각하거나 폐쇄했다. 효율성을 따져 하위 10%인 직원들을 해고했다. 이런 잭 웰치 식의 경영혁신은 오히려 근로자들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고 성과평가를 위한 아부족(族)만 양산할 뿐만 아니라 조직의 효율성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현대중공업이 최근 과장급 이상 1500명을 대상으로 명예퇴직(명퇴) 신청을 받는 과정에서 명퇴를 희망하지 않은 직원의 컴퓨터를 없애 논란을 빚고 있다. 현대중공업 측은 “명퇴 희망자들이 외부로 자료를 유출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구조조정은 현대중공업뿐만 아니다. 황창규 KT 회장은 지난해 4월 부임해 직원 약 8000명의 명퇴를 받았고, 올해 임원들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한단다. 삼성물산이 최근 수백여명을 구조조정하고 있고,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12월부터 명예퇴직을 받았다. 동부제철과 SKC, 동국제강, GS칼텍스, 삼성SDI 등도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구조조정을 했다. 외환위기 때도 40~50대의 명퇴가 적지 않았다. 이들이 자영업에 뛰어들었고 상당수는 실패했다. 그래서 명퇴를 하느니 오래오래 회사에 다니라는 충고가 적지 않다. 경기 위축에 따라 기업이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하는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한국은행이 2007년부터 “한국 경제의 변수는 일자리”라고 했던 주장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낙수 효과가 사라진 수출 증대가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유지가 중요하다. 경기가 침체할수록 기업과 직원이 일자리를 나누고 어려운 시절을 버티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직원은 내수 활성화를 위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빵 굽기/문소영 논설위원

    제빵에 취미가 있었던 시절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미혼의 막내 고모가 큰오빠네인 우리 집에 눌러앉아 신부수업 중이었다. 빵 굽기는 신부수업의 한 테마였던 터라 그 고모의 어깨 너머로 배웠다. 어쩌다 먹어 보는 폭신하고 달콤한 케이크를 직접 만든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도 했다. 밀가루 한 컵에 설탕 한 컵, 계란 4알, 우유, 버터, 베이킹파우더를 집어넣으면 빵이 만들어졌다.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날렵하게 분리한 뒤 흰자를 어깨가 빠질 정도로 오랫동안 거품기로 쳐 대는 일만 없다면 빵 만들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전자동 거품기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수십 차례 반복된 연습으로 일정한 경지의 빵 굽기에 도달한 뒤라 제빵에 대한 흥미가 그때는 사라졌다. 10년 전부터 ‘파운드 케이크’나 ‘스펀지 케이크’ 등 케이크 믹스를 구입해 손쉽게 만든다. 제과점에서 파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하는 심사다. 유기농 밀가루를 채쳐서 직접 버터·우유 등으로 만들지 않는 빵은 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가정용 빵을 구우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귀차니즘’과 ‘적당히즘’이 삶에 깊이 침투했으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다시 테헤란밸리/문소영 논설위원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강남대로는 ‘테헤란밸리’로 불린다. 테헤란은 이란의 수도다. 중동 건설 붐이 불던 1976년 한국 기업들이 이란에 진출한 것을 기념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구자춘 시장은 이란 닉페이 테헤란 시장과 자매결연을 하고, 서울시에 테헤란로를, 테헤란시에 서울로를 만들었다. 애초 대상지가 여의도였다가 강남 구간으로 정리됐다. 테헤란로에는 88서울올림픽 직전부터 약 10년 동안 오피스빌딩 건설 붐이 일었다. 오피스룸 초과 공급으로 공실률이 높아지자 임대료가 싸졌고, 최첨단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옮겨 왔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전 세계적인 벤처 투자 붐이 한국 서울에서도 시작됐는데 지하철 2호선 구간인 역삼역과 선릉역에 밀집했다. 즉 테헤란로다. 안철수연구소, 두루넷, 네띠앙 등 IT 벤처기업들이 몰려들었고, 벤처캐피털 등도 유입되자 마치 미국 실리콘밸리와 비슷하다고 해 ‘테헤란벤처밸리’로 불렸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기업 활성화 정책에 발맞춰 코스닥 시장의 등록기업 30% 이상을 차지했던 IT 기업들은 거품을 최대치로 키웠다. 당시 최고의 주식은 국제무료전화를 들고나온 새롬기술이다. 주당 2880원에 등록해 삼성그룹으로부터 30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등으로 주가가 28만 2000원까지 올라갔다가 지금은 전설처럼 이름만 남았다. 2000년 34번의 상한가를 치고 올라갔던 리타워텍은 2001년 등록 폐지됐다. 코스닥지수는 2000년 이후로 다시는 그 지수에 도달하지 못했다. 닷컴 거품은 끝내 꺼졌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국정 과제로 제시한 뒤 다시금 테헤란밸리가 주목받고 있다. 최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창업)이 3만개란다. 창업 지원 기관들도 늘어나고 있다. ‘디캠프’가 2013년 3월 역삼동에 설립됐고, 지난해 4월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마루180’도 역시 역삼동에 설립됐다. 마루180에 입주한 번역앱 ‘플리토’의 이정수 대표는 “벤처기업들이 모여 있는 덕분에 한국의 스타트업을 소개하려는 외신들에 쉽게 노출돼 유리하다”고 했다. 해외 벤처캐피털의 스타트업의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 얼라이언스’도 지난해부터 활동한다. 다음카카오가 지난 1월 1000억원을 출자해 벤처투자전문회사 케이벤처그룹을, 네이버도 ‘스타트업 쇼케이스’를 만들었다. 코스닥지수가 2008년 10월 이래 7년 만에 최고치인 600선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자 테헤란밸리에서 IT를 기반으로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해외에서 투자를 받은 ‘배달의 민족’ 앱과 ‘500비디오스’ 등이다. 최근 야후재팬은 스타트업 투자기금 2억 달러를 조성했다고 한다. 대기업들이 수백조원의 유보금을 쌓아 둘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해 보면 어떨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향일암 ‘소원의 벽’/문소영 논설위원

    한국에는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 유명한 관음사찰들이 있다. 사찰 주변을 둘러보면 꽃으로 만든 보관을 쓴 해수관음보살이 중생 구제를 위해 유려한 모습으로 서 있다. 강원도 낙산사의 홍련암과 남해 보리암과 함께 여수 향일암(向日庵)도 관음사찰이다. 향일암은 행정구역으로는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금오(鰲)산에 있다. 659년 신라 사람인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주장하는데 백제 의자왕 시절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950년 고려의 윤필 거사가 원통암을 금오암으로 개칭했다는 설명도 역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학계는 판단한다. 조선 숙종 때인 1715년 인묵 대사가 향일암이라고 명명해 현재에 이른다. 향일암은 금으로 도배한 황금불사로도 유명했지만 2009년 큰불이 나 소실됐다. 가난하고 어려운 중생을 구제하는 대신 큰돈을 써 사찰과 법당 전체에 금박을 입힌 것을 부처와 관음보살도 싫어했을 것 같다. 향일암에는 동전을 붙이면 소원성취가 된다는 ‘소원의 바위벽’이 있다. 올 3월이면 고 3 학부모가 된다. 진학 정보에 정통한 ‘돼지 엄마’가 못된 미안한 마음에 동전을 붙여 놓고 왔다. 부처님! 반드시!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달동네 도서관/문소영 논설위원

    ‘달동네’는 하천변이나 산등성·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말한다. 달동네의 영어 표현이 샌티타운(shantytown)이거나 푸어 힐사이드 빌리지(poor hillside village)인 이유는 ‘가난’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달동네는 가난을 표현하면서도 산등성이의 집에서 밝은 달이 가깝다며 이름을 붙였으니 긍정적이고 또 낭만적이다. 달동네에서는 보름달이 뜨면 독서도 가능할 듯하다. 한국의 달동네 형성은 남북 분단으로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산등성이 등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을 읽어 보면 그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경기도 개풍 출신인 박완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이사 왔다. 달동네는 한국전쟁 종전 직후부터 청계천 등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급격한 이농 현상이 발생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1961년 8만 4440동에서 1970년 18만 7500동까지 배 이상 늘었다. 관악산과 도봉산, 북한산, 불암산, 낙산 등이 위치한 관악구, 도봉구, 은평구, 노원구, 성북구 등에 달동네가 많이 형성됐다. 동네로는 성북동, 신림동, 봉천동, 사당동 등이 대표적이다.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해외문화홍보원의 코리아닷넷(www.korea.net)이 영어 기사 표제로 ‘문 네이버후드 라이브러리’(Moon neighborhood library)를 올려 깜짝 놀랐다. 이런 영어식 표현이 있는지를 접어 두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달동네 도서관이 된다. 식당 메뉴에 소고기 육회를 식스 타임스(six times)로 번역해 표기한 것에는 ‘저런 콩글리시가!’라며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달동네를 문 네이버후드로 직역해 옮긴 것은 같은 오류라도 허용할 마음이 생긴다. ‘달의 친구들이 사는 동네’라니, 가난이 아니라 낭만에 방점을 찍은 듯하기 때문이다. 유종필 관악구청장의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정책’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관악구는 2014년 재정자립도가 25.3%에 불과하고 25개의 서울 자치구 중 하위권인 18등이니 그 지역 전체를 달동네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인 대부분이 책을 읽지 않고,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도서정가제로 책은 더 팔리지 않아 중소서점과 중소출판사들이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마을 도서관을 더 많이 지으려는 구청장의 노력이 가상하다. 도서관의 증가는 책 판매의 증가이자 독서 인구의 증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관악구의 도서관 카드 발급 건수는 2010년 7만 3000건에서 최근 13만 8000건으로 늘었다. ‘지식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식의 보급은 중요하다. 특히 달의 친구들이 사는 동네, 관악구에서 도서관을 중심으로 펴는 ‘지식 복지’ 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면 좋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佛 세브르박물관의 한국전 유감/문소영 논설위원

    ‘한국 마니아 여행가의 소설’이란 제목으로 프랑스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세브르박물관)이 고려청자와 조선청화백자, 한국 현대도자기, 가구, 탱화 등 190여점을 지난달 21일부터 전시했다. 7월 20일까지 장기 전시다. ‘한국 마니아 여행가’는 조선의 초대 프랑스 공사인 콜랭 드 플랑시(1853~1922)를 말한다. 플랑시는 소설가 신경숙의 장편소설 ‘리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리진’은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궁에 들어갔다가 공주를 잃고 상심한 명성황후의 눈에 띄어 각별한 사랑을 받던 19세기 말 조선의 궁중 무희다. 플랑시는 궁중 연회에서 리진의 춤에 반해 고종에게 결혼을 요청해 허락을 받았고 리진을 데리고 프랑스로 함께 돌아갔다. 플랑시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가 문화재 관계자들의 원성을 산다. 세브르박물관에서는 리진과 플랑시의 매혹적인 사랑을 근간으로 2015년에 한·불 수교 130주년 한국도자기 특별전을 열고자 2011년부터 애썼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3월에서야 한·불 수교 130주년 행사 전문위원 구성을 했으니 손발이 안 맞았다. 플랑시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수집한 도자기와 도자기편, 또한 고종이 궁중 연회 중에 선물한 발톱이 5개인 용 무늬 청화백자항아리 등 280여점 중 250점을 세브르박물관에 기증했다. 특별전은 세브르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도자기를 최초 공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2013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방문한 당시 세브르박물관 관장은 지하 수장고에 보관 중인 한국 도자기 220점을 2015년 공개하고, 한국 순회 특별전을 열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2013년 늦가을 출장길에 세브르박물관 수장고에 찬장 속 그릇처럼 쌓여 있는 한국 도자기들을 보고 난 뒤 혹여 문화재급이 아니라 남의 나라에서 홀대받는 것 아닌가 해서 찜찜했다. 130년 만에 세브르 수장고의 조선 도자기 100점이 복원을 마치고 올 1월 마침내 최초 공개됐다. ‘한·불 수교 130주년 특별전’이 아닌 박물관 기획 전시다. 3~4년 공을 들였지만 한국 정부나 기업의 후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한국쪽 전시 파트너가 없었던 탓인지 문제가 나타났다. 전시장의 도예공방은 ‘동예공방’으로, 궁중 무희는 ‘공중 문희’로 표기했다. 한글 가로쓰기가 아니라 중국어나 일본어처럼 세로쓰기로 제목을 달아 오해도 발생한다. 한국어 표기 감수가 없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는 프랑스어판 전시 해설서에 품위 있는 고급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며 분노했다.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할 한국 문화 상품도 준비가 미흡하단다. 지난달 21일 개막식에 파리 주재 한국문화원과 대사관의 고위직들도 참석해 그 문제점을 확인했단다. 그런데 전시가 보름 가까이 진행됐는데도 낯 뜨거운 오류가 수정되지 않는 이유가 뭔가. 그 정도 오류는 하찮은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오동도 동백/문소영 논설위원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 덕분인지 여수를 떠올리면 왠지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가 본 적이 없는 도시다. 따뜻한 바닷바람이 가득한 여수의 밤바다를 ‘너’와 함께 손잡고 걷는다면 늙은 가슴도 다시 뛰고 시름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회사원의 야근 덕분에 아름답다는 서울의 야경과 달리 여수 밤바다에는 낡은 사진 같은 낭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던 차에 여수에 갔다가 밤바다의 낭만을 누리진 못했지만 대신 붉은 동백꽃에 홀딱 반해 버렸다. 노란색 수술은 금가루처럼 깜찍한데,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춘향이가 광나루에서 그네를 뛰는 모습에 넋을 놓은 이몽룡 같은 심사가 됐다고나 할까. 오동도에는 오동나무 대신 동백이 많았다.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오동나무를 정권 교체를 우려해 고려말 신돈이 다 베어 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백의 최대 군락지인 오동도는 10월부터 동백이 피기 시작해 4월이면 3600여 그루의 동백으로 온통 뒤덮인다. 꽃잎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야 할 지경이 된단다.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붉게 피어난 동백꽃에 봄이 뛰어올 것만 같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네티즌 수사대/문소영 논설위원

    경찰청에도 사이버 수사대가 있지만 민간에도 ‘사이버 수사대’가 있다. ‘네티즌 수사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명예훼손 등의 우려로 가명 처리한 기사를 탐구해 실명을 공개하는 등 보통 사람들의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노력은 때때로 인터넷 포털 등에 떠오른 ‘실시간 검색 순위’나 ‘연관 검색어’에 반영되기도 한다. 네티즌 수사대는 익명의 다수가 공동으로 협업한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에 ‘집단 지성’의 긍정적 측면을 볼 수도 있다.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함께 언론에서 뉴스 가치가 작다고 생각해 취급하지 않는 사안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공유하고 댓글을 달아 여론을 환기시키는 덕분에 사회적 어젠다가 형성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짐을 옮기는 할머니를 도와준 여성이나 지하철에서 애완견의 분비물을 치우지 않고 떠난 여성에 대한 문제 제기 등도 그랬다. 주요 기사 밑에 활발하게 댓글을 달아 이른바 ‘댓글 공론장’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구현’이라는 과도한 의욕 탓에 연예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신상털기’ 등의 부작용이 발생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네티즌 수사대의 일원으로 이 일을 하려면 인터넷 활용과 해킹 등에 대한 상당한 재능뿐 아니라 날밤을 새우며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집요함과 체력, 많은 시간을 투여할 만한 ‘잉여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때론 ‘키보드 워리어’(악성 댓글 작성자)라는 조롱도 감수해야 한다. SBS의 ‘K팝스타’ 시즌4에 출연해 세상에 찌든 아저씨들을 힐링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박윤하양이 한국의 대형 출판사인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손녀라는 사실도 네티즌 수사대가 알려 줬다. 오디션 프로 참여자가 누구의 손녀라는 사실이 왜 그리 궁금하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부정적인 개념도 있지만, 인류의 진화는 소소한 사안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씩 전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올 초 네티즌 수사대의 최대 성과는 ‘크림빵 뺑소니 운전자’가 자수한 것이다. 1월 10일 새벽 청주시 흥덕구 무심천 변에서 임신 7개월 부인이 좋아하는 크림빵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던 남편을 차로 치고 도망가는 뺑소니 사고가 발생했다. 영구 미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유가족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호소했고, 네티즌 수사대가 나섰다. 경찰도 수사본부를 꾸렸다. 폐쇄회로(CC)TV가 유일한 단서였는데 지난 28일 ‘판독불가’로 나와 크게 낙담한 상황에서 결정적 단서가 인터넷 댓글로 올라왔다. 근처 차량등록사업소 직원이 ‘우리 회사에도 도로변을 촬영하는 CCTV가 있다’고 한 것이다. 경찰이 이 CCTV를 확보해 사고 차량을 ‘윈스톰’이라고 고지하자 뺑소니차의 부인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남편에게 자수를 설득했다. 인터넷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옳은 일을 하려는 사람의 선한 마음에 기대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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