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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분단 45년… 북한의 생활상 어떻게 이질화됐나

    ◎다른 길로 달린 「남과 북」… “한핏줄의 이방인”/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한핏줄의 남북한은 하나의 역사,하나의 언어,그리고 공통된 생활관습 등을 지켜왔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길로 들어선 남과 북은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최대의 비극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됐고 이 결과 전쟁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삶의 모든면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왔다. 최근 동서독이 통독의 길로 나아가는등 세계의 냉전구조가 타파되면서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되고만 한반도에도 냉전의 장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는 변혁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 제각기 달려온 남과 북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됐고 이질화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언젠가는 맞이할 통일에 대비해 서로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삼고자 한다. ◎문화ㆍ예술/인간개조의 도구화… 순수예술 명맥 끊겨 지난해 우리는 두개의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그 하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지만 북경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한 남북단일팀 구성논의에서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데 양측이 비교적 손쉽게 합의,문화적 민족정서의 공유가능성을 확인한 일이다. 또 하나는 남북이산가족의 재회를 무산시킨 이른바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피바다」 공연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 실감했던 남과 북의 현저한 문화ㆍ예술관의 차이다. 이렇듯 남과 북의 문화ㆍ예술은 공감대를 같이하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분단이후 45년간 서로다른 이념과 사회체제 속에서 이질화의 과정을 밟아옴으로써 오늘의 남과 북사이에는 엄청난 높이의 문화적 장벽이 가로놓이게 됐다. 한국의 문화정책이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구상처럼 『후기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따른 세대간ㆍ계층간ㆍ지역간ㆍ성별간의 이질화와 갈등현상을 문화의 힘으로 치유』하는데 놓여져 있다면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주체사상과 3대혁명에 입각한 공산주의적 정치사회화의 수단적 목적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초하에 체제보위 및 최고통치자에 대한 우상화 및 공산주의적 인간개조를 위한철저한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전통적 순수예술의 성격은 물론 대중예술과도 거리가 먼 주체예술ㆍ혁명예술ㆍ이데올로기예술로 변모돼 있다. 가령 북한가요 45년사에서 3대명곡으로 꼽히고 있는 「조선의 별」,「김일성장군의 노래」「동지애의 노래」 등이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시작 「묘향산의 가을날에」,80년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는 「강선의 저녁노을」 등은 모두가 김일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북한의 문화ㆍ예술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사상성이 좋고 ▲가사가 좋으며 ▲선율이 부드럽고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후의 「혁명송가」라는 「조선의 별」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투쟁을 할때 그의 추종자들이 김일성을 흠모해 지었다는 노래이며,「동지애의 노래」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촉구한 노래이다. 「강선의 저녁노을」은 남포시 강선제강소를 소재로 김일성을 찬양한 조선화이며 주체예술의 상징인 5대혁명가극의 하나인 「피바다」는 항일혁명투쟁을 주제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앞세운 목적극이다. 특히 6ㆍ25전쟁 전까지 순수예술과 목적예술간의 대립속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지 못한채 주로 소련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전쟁중 전쟁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전쟁영웅 형상화에 몰두,목적예술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전후복구와 「주체」의 슬로건 등장등 상황적 요청에 따라 문예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에 역점을 두는 새로운 전형을 형상화하는 한편 소련식 문화활동에서 탈피,김일성체제를 뒷받침하는 혁명전통확립과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양을 주제로 한 창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또한 자연만을 노래하거나 예술지상주의 태도는 반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문화예술이라는 인식하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당성ㆍ계급성ㆍ인민성의 구현이 모든 창작활동중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으로 대두됐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러한 문화예술의 원칙과 과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작가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무용가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을 망라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란 조직이 결성돼 있으며 당은 이 조직을 통해 각 분야 종사자들에게 창작 및 공연활동계획서의 제출을 강요,▲혁명전통(30%) ▲전쟁(30%) ▲사회주의건설(20%) ▲조국통일(20%) 등 4개 주제별로 창작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의식구조/어휘마다 정치색… 전투ㆍ파괴적 성격 강조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과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로서 오늘 남조선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데 쓰이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다. 우리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오늘 평양말은 서울말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 김일성이 1969년 평양말을 「문화어」로 삼은 이유를 설명한 교시의 내용으로 북한의 언어정책을 잘 보여준다. 김일성은 또 「표준말」이란 용어 대신 「문화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도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이해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되지만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다』 특히 북한은 「언어를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힘있는 무기」로 보는 언어관을 토대로 일찍부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언어정책을 펴옴으로써 분단 45년이 지난 현재 남북한간에 벌어지고 있는 언어의 이질화는 단순한 언어 자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사고와 행동양식 및 의식구조의 이질화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실제 북한에서는 언어를 씩씩하고 힘있는 무기로 다듬는다는 명분하에 『미제의 각을 뜨자』『돌탕을 쳐 죽이자』는 등의 살벌하고 소름끼치는 말들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음을 감안할때,북한의 이같은 극단적인 언어관과 언어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북한주민자신을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잠재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언어이질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의 언어정책은 1949년에 단행된 한자폐지와 이에 따른 한글전용정책에서 시작된다. 문맹퇴치와 인민대중의 조속한 사상교육을 목표로 추진된 한자폐지는 결과적으로 한글전용화로 이어졌고 이결과 북한의 각급학교 교과서 문예작품 신문 및 대중매체에서 한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한자교육은 통일후 남한문헌을 읽기 위해 또한 고전연구를 위해 하나의 외국어처럼 전공과목으로서만 남게됐다. 한글전용에 이어 가로쓰기도 시행되었으나 한자어의 어원을 가진 낱말을 한글로만 표기,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말다듬기운동」이 새로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일제하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조선어철자법」이 생겨났고 1966년에는 「조선말규범집」과 함께 「문화어」라는 새로운 개념의 어휘까지 등장했다. 문화어의 등장은 남북한간 언어이질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고 말았는데 그 성격은 서울말을 배격하고 평양말을 토대로 다듬은 그들의 공용어를 표준어로 삼는 데 있다. 한편 한자폐지와 한글전용,말다듬기운동의 결과 새로운 사전의 편찬이 불가피하게 됐는데 1968년 나온 「현대 조선말사전」의 경우 18만어휘가 수록됐던 「조선말사전」(61년)에 비해 어휘가 5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한자가 하나도 없고 옛말 사투리 고유명사 및 이른바 「퇴폐적 사상표현」등을 완전히 제외했기 때문. 또 어휘마다 정치성이 담겨져 있어 김일성의 인용구는 굵은 활자에 별표까지 달아놓았다. 현재 남북한의 언어는 발음의 차이,리듬의 차이,억양의 차이 등과 같은 음성학적인 차이를 비롯해 어휘ㆍ문법ㆍ의미ㆍ문체 및 맞춤범 등 언어전반에 걸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차이는 어휘부문에서 나타난다. 예를들면 산책길→유보도 채소→남새 화장실→위생실 고기잡이→추어전 개고기→단고기 도시락→곽밥 레코드→소리판 대중가요→군중가요 투피스→동강옷 커튼→창문보 그룹→그루빠 소년단→삐오네르 주제→쩨마 등이다. ◎경제생활/「남농북공」무너져 GNP 남한의 12%/생필품 부족… 암시장 쌀값 배급의 18배 8ㆍ15해방 당시 남북한의 산업배치는 「남농북공」으로 일컬을 만큼 지역적 보완관계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남북분단으로 이같은 보완관계는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6ㆍ25가 남과 북 모두의 각종 산업시설을 파괴,경제활동의 토대조차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은 40여년간 천연자원 및 산업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악조건속에서 통합적 발전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분리적인 발전을 계속해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굳어진 한국과 북한은 각기 다른 경제질서를 형성ㆍ유지하면서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여왔고 이 결과 88년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액(GNP)의 차이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8배나 앞서는 비교우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한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개발도상국에서 일약 중진국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1960년 1백달러 미만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은 89년말 현재 5천달러에 육박해 있다. 반면 6ㆍ25로 인해 공업생산 수준이 1949년에 비해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했던 북한경제는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56년)과 뒤이은 5개년계획(1957∼61년)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으나 그후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70년대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비해 부분적인 비교우위내지는 형평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부터는 전분야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체제가 다른 북한의 국민총생산액등 각종 경제지표의 개념은 우리와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국토통일원이 북한의 각종 선전자료를 검토ㆍ분석해 추정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국민총생산액은 88년을 기준으로 2백6억달러로 우리의 1천6백92억달러에 비해 8분의 1 수준이며 1인당 GNP는 9백80달러(한국 4천40달러),자동차 생산능력은 연간 2만대(한국 1백70만대),TV보유율은 10%(한국 1백%),전화는 7%(한국 67%),냉장고는 6.5%(한국 79%) 등이다. 한편 북한주민의 의ㆍ식ㆍ주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평등한 방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직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는 임금과 그 임금에 따른 불균형한 소비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임금은 당간부 및 고위직 군인의 급료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사무직보다는 기술직이 높다. 또 경노동 보다중노동이,중노동 가운데도 위해노동종사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85년부터는 「사회주의적 노동보수제」가 도입돼 동일직종이라도 숙련도나 생산성 등 노동의 질에 따라 급수를 달리하는 「차등임금제」가 실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같은 화폐소득의 차이를 완화하기 위해 보건ㆍ교육분야를 국가예산으로 충당하는 한편 대중소비물자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사치품의 가격을 높게 매기고 있다. 이에 따라 쌀ㆍ채소ㆍ옷감ㆍ비누ㆍ치약 등 생필품의 경우 아주 싼값으로 공급되는데 가족수와 연령,직업에 따라 품목과 수량,종류가 정해진 구입카드에 의해 국영상점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먹는 문제」의 해결이 최우선 과제이듯이 국가에서 싼 값으로 공급하는 생필품의 배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부족분을 구하기 위해 1㎏당 8전에 불과한 쌀을 「장마당」이라고 부르는 암시장에서 이 가격의 18배가 넘는 1㎏당 15원에 구입하려해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택은 협동적 소유로 행정당국에 의해 직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배분되며 그 보급율은 70% 안팎. 북한은 주택건축률이 경제발전을 대변하는 전시적 기능이 크고 남북한 사회비교의 중요한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평양ㆍ남포ㆍ원산ㆍ함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현대식 고층아파트를 신축하는 한편 농촌의 문화주택을 2층 3가구용,3층 5가구용으로 다양화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등 주거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지난 40년간 중공업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 주민들의 소비생활이 크게 압박을 받아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를 「경공업의 해」로 지정하는 등 최근 경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활풍습/“봉건잔재 없앤다” 관혼상제도 통제ㆍ규격화 북한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예의범절에 대해 『봉건지배계급이 착취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규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 고유의 예절이나 유교적 도덕관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와 당의 이익에 맞도록 변형되어 있다. 또 관혼상제를 포함한 전통적인 민속과 세시풍속 등도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변질됐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철저히 동지적이고 혁명적인 관계에 의해 이뤄지며 일생을 동지로서 당과 수령께 충성할 수 있는 정신적 풍모가 조건이 된다』고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결혼연령도 노동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남자 29세 여자 26세로 제한해 놓고 있으나 불만이 많아 80년대 이후에는 조혼추세가 묵인되고 있다. 배우자선택은 중매(60%)와 연애(40%)가 병행되고 있으나 최근 북한의 남녀대학생들은 서로 손을 잡기도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등 연애결혼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계층의 남녀가 만나는 채널은 연애보다는 부모 친척 등을 통한 중매가 지배적이다. 신랑감으로는 직업에 관계없이 평양거주총각이 최고의 배우자로 꼽히고 있으며 길흉을 가리는 결혼의 택일 풍습은 사라져 대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치러진다. 회갑이나 생일,돌잔치는 50년대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와 식량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일체 금지되었으나 60년대 후반기부터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60청춘 90회갑」이라는 구호아래 공식적인 회갑잔치는 거의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고위간부의 경우에만 김일성이 하사하는 일정한 규격의 회갑상을 받는다. 장지는 지정된 공동묘지만을 쓰도록 돼있다. 상복은 따로 만들어 입는 것이 없고 머리에 건을 쓰고 팔에는 검은 천을 두른다. 장례식과 매장은 도시의 경우 녹화사업소,편의협동조합 등이 맡아서 처리해 주며 직계존속이 사망했을 경우 상주에게는 3일간의 공식휴가와 장례보조금 10원,쌀 1말이 배급된다. 제사도 다른 풍습과 같이 6ㆍ25전까지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으나 휴전후부터 단속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부터 추석에 성묘하는 것과 직계존속에 대한 탈상까지의 제사는 묵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60년대 중반까지 「봉건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추석등 고유의 세시풍속을 공식명절에서 제외하고 김일성의 생일,김정일 생일,북한정권 창건일,노동당 창건일,사회주의 헌법제정일 등을 「사회주의 명절」로 지정,공휴일로 해왔으나 지난 88년부터 추석 음력설 단오 한식 등을명절로 부활시켰다.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인민복,검은 통치마 차림이었던 주민들의 옷차림이 두드러지게 바뀌기 시작해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남자는 양복이나 잠바,여자는 양장이나 짧은 치마차림이 보편화됐으며 머리모양이 다양해지고 화장을 한 여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던 주민들의 부분적 여행자유화 조치가 전면 보류됨으로써 일반 주민들의 북한내 여행 및 휴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금강산ㆍ묘향산 등 유명관광지의 이용자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며 주민들의 경우 공장ㆍ직장별 단체관광 정도일 뿐 가족단위의 여행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의 주요한 오락수단은 TV와 라디오이다. 또 최근 바둑협회가 새로 결성되고 실내 골프장이 생기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으나 대중이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주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는 주패놀이로 불리는 서양식 카드놀이와 장기이다. 가정생활은 지난 80년 『셋은 양심이 없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하나가 좋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이후 가족계획이 보편화되기 시작해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 형태로 옮아가고 있다.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는 등 남녀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으나 실제로는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며 여자들이 가정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남편들이 봉급을 타서 여자들에게 넘겨 주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언론ㆍ교육/비판기능은 무시… 선전ㆍ선동의 매체로 활용 최근 북한은 소련언론들의 잇따른 대북한 비난보도에 대응,소련의 평양주재 기자들에 대한 취재봉쇄조치를 취한데 이어 타스통신기자 1명을 추방함으로써 내외의 관심을 끌었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 혁명을 지지하는 기사를 쓰라,그러면 당신들의 요청이 충족될 것』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소련언론들은 북한언론들의 보도태도와 관련,「목적지향성」보도에만 집착할뿐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북한과 소련의 언론관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현재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노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과 정무원기관지인 「민주조선」을 비롯해 도단위 일간지 등 모두 30여종. 방송은 TV의 경우 「조선중앙TV」(평양TV)「만수대TV」「개성TV」 등 3개가 있고 라디오는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구국의 소리방송」「평양인민 FM방송」 등이 있다. 북한에 있어 언론이란 「김일성의 교시와 당의 정책을 해설ㆍ선전하며 그것을 철저히 비호ㆍ관철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일층 강화하여 인민들을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정치사전(73년도판)의 규정처럼 정치선전도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기사가 아닌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써 사람들을 교양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1960년 11월)에 따라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범죄나 비행ㆍ사고 등의 기사는 신문ㆍ방송 등 언론매체에 일체 실리지 않는다. 우리의 언론들이 사회의 비리ㆍ부조리 등을 파헤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긍정적ㆍ모범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계도하겠다는 언론관을 고집하고 있다. 또 북한의 언론은 자본주의언론이 중시하는 속보성보다는 매스미디어의 이념적 이용,즉 당의 정책적 선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정론성」과 「당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정론성이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ㆍ선동ㆍ조직ㆍ교육ㆍ동원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하여 「사실」을 각색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북한의 방송은 정무원직속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지도아래 운영되고 있는데 이 기구는 조직ㆍ편제상 정무원에 속해 있지만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어 사실상 2원화 되어 있다. 북한의 새 학기는 우리와 달리 9월에 시작된다. 북한은 지난 75년부터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과정으로 된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의 취학연령은 만6세. 그러나 만4세부터 시작되는 2년과정의 유치원교육중 「높은반」부터 의무교육기간에 포함되므로 실질적인 의무교육은 만5세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11년제 의무교육기간에는 수업료는 물론 면제이며 교과서ㆍ교복ㆍ학용품이 무상 또는 일부 부담으로 지급된다. 16세부터 시작되는 고등교육단계로는 2∼3년 과정의 고등전문학교와 교원대학(3년),종합ㆍ단과ㆍ사범ㆍ공장대학(4∼6년) 등이 있다. 현재 북한에는 인민학교 5천여개,고등중학교 4천2백여개,전문학교 5백여개,대학 2백70여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은 80년중반부터 낙후된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각 시도별로 「제1고등중학교」를 세우는 한편 기술계 대학의 수를 크게 늘리고 있다. 학생들은 또 「한가지 이상의 기술과 기능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예능 또는 실업 등의 실기과목을 배우고 있으며 소년단이나 사로청 등의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단체활동을 한다. 특히 의무노동이 중시돼 인민학교는 연간 2∼4주,고등중학교는 4∼8주,대학교는 12주정도씩 생산현장노동에 참여한다.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것을 주체적,창조적으로 적용했다는 「주체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고있다. 또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인간」이,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기술적 인간」이,전쟁승리를 위해서는 「체력이 튼튼한 인간」이 바람직하다는 「이상주의적인 인간상」때문에 정치사상교양 및 과학기술교육,그리고 국방체육이 북한교육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중국 호남성 대홍수/40년내 최악/1백98명 사망… 이재민 2천만

    【북경 AFP 연합】 중국 남부 호남지방에 큰 홍수가 발생,1백98명이 사망하고 1천5백20명 이상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호남성 외무당국의 한 관리가 20일 밝혔다. 이 관리는 지난 40년간 발생한 홍수중 최악인 이번 홍수로 이지방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재산피해액만도 2억1천2백만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관리는 이어 관공서와 학교가 이번 홍수로 문을 닫았으며 2백45만t 가량의 곡식이 떠내려가는가 하면 2만5천명의 주민들이 완전 고립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한편 이웃 광동지방에서도 18일 발생한 태풍으로 적어도 15명이 사망하고 19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차이나 데일리지가 보도했다.
  • 소언론,대한 조속수교 촉구/“한반도화해에 도움 북한반대 문제안돼”

    【내외】 소련정부는 노태우­고르바초프대통령간의 정상회담이 열린 만큼 한소 외교관계 수립을 빠른 속도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소련유수의 주간지인 「모스코프스키노봅즈」지가 최신호에서 촉구했다. 이 주간지는 지난 4일에 있은 노태우­고르바초프대통령간의 한소 정상회담에 관한 논평기사에서 이 정상회담 자체가 소련이 그동안의 냉전구조의 틀을 깨고 한국을 자주적인 국가로 사실상 인정했음과 함께 쌍방이 정상적인 외교관계로 발걸음을 내디딘 것임을 의미하는 데도 불구하고 『서울∼모스크바간의 외교관계 수립은 너무나 굼뜨게 실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주간지는 한소간의 외교관계 수립은 소련의 정치적ㆍ경제적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에 북한의 반대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한 한소 외교관계 수립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극동지역에서의 무기 및 병력 감축과정을 준수하기 위한 기초를 축성하는 관계』로 북한의 이익에도 부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한국전 기원과 성격」… 「6ㆍ25」 40돌 국제학술회의

    ◎스탈린,49년 3월 김일성 만나 “남침”확정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가 주최하고 통일원이 후원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소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등이 집중 토의됐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은 미소의 갈등으로 빚어진 특수한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고 주장하는 존 메릴 미국무성연구관의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 대답없는 질문」과 소련이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을 사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윌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교수의 논문 「소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개한다. ◎6ㆍ25의 기원/윌리엄 스투웨크 미 조지아대교수/크렘린,미ㆍ서구 밀착 저지 겨냥/극동에 긴장 조성… 미 경제난 유도 속셈도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주요 군사물자 제공자이자 군사고문단 및 병력의 결정적인 공급자였던 소련,그리고 중국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정보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에 소련이 이같은 모험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느냐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소련은 팽팽한 긴장속에 미국의 핵무기와 잠재된 기동력에 눌려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49년 가을 마샬플랜의 시행,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서독정부의 출범,미의회의 대서유럽군사원조결의 등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때 미국의 관심이 서유럽에 집중됐다고 판단,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단결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국내외 문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스탈린은 대외정책에 관한한 공개토론을 허용했다. 49년에서 50년에 걸쳐 프라우다지는 몰로토프,스슬로프와 같은 온건관료층의 견해를 주로 반영했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말렌코프,베리야와 같은 강경군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강경파들은 미국경제가 점차 퇴조하고 있으므로 소련이 서유럽에 압력을 가중한다면 미국은 곧 해외원조를 포기하고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와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강조,소련의 압력이 오히려 서방국가를 결속시켰으므로 긴장상태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유럽에서는 평화정책을 쓰는 대신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려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국제긴장상태 조성을 통해 ▲국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소련주변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분산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책전환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휘말리게 되면 미국의 경제적 위기가 촉진되고 상대적으로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북한의 남침 등 여러조치들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시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으로부터 미국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다. 49년 한햇동안 미국은 남한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50년 1월12일 연설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체계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1월 중순에는 미하원에서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안이 거부됐다. 스탈린은 이같은 상황이라면 남한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미국동맹국들의 집단적인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49년 3월 김의 모스크바 방문시 북한의 침공을 논의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이 철수하게 되니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격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과 군사원조 합의안에는 서명했지만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은 피했다. ◎6ㆍ25의 성격/존 메릴 미 국무성연구관/초강국갈등서 비롯된 「특수내전」/이해 엇갈린 미ㆍ소ㆍ중의 대리전 양상도 지녀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북한은 결코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폐쇄체제의 영웅적인 자화상을 훼손하고 평양 당국으로 하여금 1백5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를 스스로 인정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영웅적인자화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지속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평양에서 열리는 반미투쟁월의 경축행사를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관해 북한사람들이 형식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자신있게 변호하지도 않는다. 평양 당국은 전쟁초기의 며칠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한 설명을 결코 출판물을 통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토의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유심히 살펴본 비판적인 독자라면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호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평양을 격하하거나 40년전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남한과의 신뢰를 구축하고 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공유하려면 이러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남한도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 문제,즉 한국전쟁은 침략인가 아니면 민족해방전쟁인가에 대한 해답은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조전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강제적으로 가로놓여진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1950년에 국토의 분단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수단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승만대통령도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 들어왔던 것처럼 북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이 국제전인가 아니면 내전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해답은 양자가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분단은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강대국의 불간섭과 그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쟁적인 양체제의창출은 한국내의 좌익과 우익간 투쟁의 국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이제 소련이 미묘하게 표명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개입(현재 우리가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듯이 소련의 개입도 있었다)에 따라 국제화의 성격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두개의 한국이 상호 경쟁하는 국내적 성격이 다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 “중국의 고르비”상해시장 주용기

    ◎외국인에 토지임대ㆍ주식거래 개방 추진/작년 상해시 수출 악조건속 50억불 달성 중국권력구조 개편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요직등용설이 붙어 다니는 상해시장 주용기가 지난 8일 홍콩을 방문,상해개방과 관련해서 활발한 외국인 투자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자양전당총서기에 이은 경제개방ㆍ개혁의 기수로 서방언론에 의해 「중국의 고르바초프」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는 주는 지난해 중국경제가 전반적으로 악화된 가운데서도 상해의 수출실적을 50억달러로 끌어 올렸다. 이는 중국 전체수출의 8분의 1에 가까운 것. 주시장은 현재 등소평과 강택민당총서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상해시의 포동지구를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12일 홍콩 부려화호텔등지에서 잇따라 개최된 상해경제발전세미나와 홍콩정청주최 만찬회에는 대부분 홍콩에 거주하는 실업가와 각계 대표등이 무려 1천여명이나 참석,중국내에서의 그의 비중을 실감케 했다. 주는 이날 아울러 가진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해는 외국인에 대한 토지임대ㆍ주식거래ㆍ은행지점 설치를 비롯한 금융자유화를 완전 보장할 방침이며 자유무역항으로서 외국상사들이 재수출 업무를 취급케 허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84년이후 부분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주식거래를 연내 전면 자유화시켜 상해증권거래소를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외국인에 대한 중국기업주식의 매매도 가능하게끔 관련법규를 개정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주에 따르면 상해는 앞으로 5년동안 내자와는 별도로 35억달러의 외자유치계획을 달성,국제적인 상업금융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며 이러한 상해의 발전계획은 북경정권의 개방ㆍ개혁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그는 또 상해를 중점 개발할 경우 97년이후 홍콩의 기능과 역할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는 홍콩기업인들에게 『상해는 지난 30∼40년대의 옛 영광을 밑거름으로 국제경제무대를 향해 재도약하는 것일 뿐이며 중국당국의 홍콩발전 전략은 변함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시장은 지난해 6ㆍ4천안문사건발생 이후 홍콩을 방문한 최고 지위의 중국관리이다.
  • “남북대화 거부” 북한의 속사정

    ◎북방정책에 위기감… 한ㆍ소ㆍ중 접근 견제/남북 긴장감 조성,내부단속 겨냥/상식이하 용어로 한ㆍ소회담 노골적 비난/대화재개엔 북경태도가 변수로 한소 정상회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북한이 또 다시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나섰다. 북한은 13일 남북 국회회담준비접촉과 고위급예비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 앞으로 상당기간 남북회담에 불응할 뜻을 내비췄다. 북한은 특히 이날 전통문에서 노태우대통령을 「귀측 당국자」라는 상식이하의 표현을 사용하고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우리의 내부문제를 밖으로 들고 다니며 청탁,구걸하는 식으로 분별없이 처신했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불편한 심기를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북한은 지금까지 노대통령을 지칭할 때 「최고 당국자」 또는 「최고위급」이라는 표현을 사용,어느정도 우리측 집권자를 예우해 왔었다. 북한의 원색적 비난은 이밖에도 전통문의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민족 내부 문제를 남에게 의존하여 어느 한쪽으로만 끌고 가려는 것은참으로 민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사대행위이며 동족간의 대화를 안중에 두지 않는 반민족적 분열행위』라고 한소 정상회담을 비난한 데 이어 유엔가입문제에 대해서도 『유엔 단독가입이나 동시가입은 현 분열상태를 합법화ㆍ고정화하여 두개의 조선을 만들기 위한 책동』이라고 강변했다. 북한은 이와관련,지난 5월24일 김일성의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 시정연설에서 제기시 「남북 유엔단일의석 공동가입안」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사고의 편협성을 보였다. 결국 북한의 이같은 태도는 직접적으로 기존의 남북회담을 거부하고 간접적으로는 한소,한중간 관계개선에 제동을 걸려는 다목적용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테면 북한은 정상회담까지 갖는등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는 한소관계 발전속도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한중 관계개선을 자신들이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 생각,이를 견제한다는 차원에서 대화를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가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제도라는 환상에서 「우리식대로 살자」는 폐쇄정책을 고집해 나갈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이 이날 전통문에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필요한 사회개혁을 성과적으로,그것도 철저히 수행해 우리사회를 개방했으며 지금도 우리식대로 사회를 계속 개조하며 완성해나가고 있다』고 거듭 밝혔는데 바로 이 대목이 북한측의 경화된 자세를 대변한다고 분석된다. 북한은 또 남북대화를 거부함으로써 한소 정상회담이후 우리내부에서 일고 있는 「대북개혁ㆍ개방유도정책」 「남북 정상회담실현」 「유엔가입추진」 등 후속조치 마련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이를 희석시키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이 국가보안법철폐및 콘크리트장벽철거 등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데서 연유한다. 즉,북한은 국가보안법철폐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남한내 반정부세력에게 투쟁과제를 제시한 것으로 통일원측은 분석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대남강경노선을 견지,남북간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사상투쟁을 강화하고 내부결속을 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통일원의 한당국자는 설명한다. 한마디로 북한이 김일성시정연설의 다음 단계로 구체적인 대남제의를 연달아 발표하던 예년과는 달리 대화거부를 들고 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한소 정상회담의 여파로 대남전략궤도를 수정한 것으로 읽혀진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로 볼 때 당분간 남북대화의 재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련의 정치ㆍ경제적 대북압력과 오는 9월 북경아시안게임을 전후한 한중 관계개선등으로 인해 북한의 폐쇄정책이 장기간 지속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북대화의 활성화는 북경아시안게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남북문제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리고 소련은 대한관계정상화를 공식선언한 만큼 이제는 한중 관계개선에 임하는 중국측의 태도가 남북 대화재개의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리란 전망이다. 결국 남북대화재개 및 이에따른 한반도 긴장완화는 북한의 마지막 이념적 동지인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개선 정도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관측된다.
  • 소 원자재 직수입 확대

    쌍용은 소련과의 교역 활성화를 위해 소련으로부터 시멘트ㆍ철강재ㆍ펄프 등 원자재 직수입을 확대하고 있다. 쌍용은 소련산 시멘트 1만t을 6월중에 소련 극동지역 나홋카항으로부터 직수입할 예정이다. 쌍용은 또 올해 소련으로부터 철봉과 봉형강 5천t씩을 이미 수입한바 있으며 7월께에는 2만5천t을 추가로 수입할 예정이다.
  • 관광 농업지구 43곳 추가 지정

    농림수산부는 충북 단양과 전남 산동지구 등 43개 지구(휴양단지 3개소포함)를 관광농업지구로 새로이 지정했다. 11일 농림수산부에 따르면 새로 지정된 관광농업지구는 자연관광자원이 풍부하고 외부내방객이 많으며 지역특산품의 지명도가 높아 판촉이 가능하거나 관광객유치가 쉬운 곳으로 농원규모는 48만2백12평이고 참여농가수는 모두 2백41가구이다. 지역별로는 전남이 9개지구로 가장 많고 전북 6개소,경기ㆍ강원ㆍ경남이 각각 5개소,충남과 경북이 각각 4개소,제주 3개소,충북 2개소 등인데 농림수산부는 이들 지구에 총92억원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새로이 지정된 관광농업지구(휴양단지 제외)는 다음과 같다. ▲경기=쌍령 군남 외사 포승 퇴촌 ▲강원=기린 왕산 우천 둔내 강동 ▲충북=마로 단양 ▲충남=대산 홍북 남이 ▲전북=운봉 아동 주천 아산 수락 모항 ▲전남=북하 의신 고흥 관산 상기 신전 산동 유치 안양 ▲경북=임고 안강 ▲경남=군북 정동 상동 궁유 단성 ▲제주=저지 구좌 회수
  • 재소한인,소에 보상요구 방침/“53년전 강제 이주로 수천명 사망”

    ◎「고려인 협회」부회장 밝혀 【도쿄 교도 연합】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데 대해 소련정부에 보상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재소고려인협회의 한 간부가 9일 밝혔다.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이 협회의 블라디미르 이 부회장은 이날 도쿄에서 가진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재소한인들은 그들이 받은 불법행위와 가옥및 개인 재산의 손실에 대한 소련정부의 보상도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블라디미르 이 부회장은 이 인터뷰에서 지난 37년부터 39년사이에 소수 민족들이 소련의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약 30만명의 한인들이 소련 극동지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됐으며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소련의 독재자 요시프 스탈린은 공산주의에 불만을 품은 소수 민족들의 반란을 우려,이들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2차대전 발발 하루전에 이같은 강제이주정책을 도입했다고 폭로했다. 이부회장은 소련 전역에 걸쳐 2천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고려인협회가 현재 소련정부에 제출할 자료들을 수립하고 있으며 내년에 열릴 이 협회의 제2차 전국대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거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김일성 독전 명령서」등 첫 공개/공보처

    ◎「6ㆍ25」 40돌 맞아 「한국전쟁」 펴내/수송ㆍ전투계획등 남침준비 한눈에/미공개 미국 무성자료 8점도 수록 공보처가 6ㆍ25 40주년을 맞아 6ㆍ25의 민족사적ㆍ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9일 펴낸 「실증자료로 본 한국전쟁」에 실린 자료중에 북한의 남침준비ㆍ전투훈련ㆍ수송계획ㆍ독전명령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공개자료가 8점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끌고있다. 북한의 남침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발간된 이 책자의 자료들은 그동안 전사편찬위원회ㆍ미국무성 및 미의회도서관ㆍ조지 타운대도서관에서 소장해 오던 것이다. 이 책자에 실린 미공개자료를 연대별로 살펴본다. ①46년 7월1일부터 3일까지 개최된 「북한보위국(내무성)회의록」. 이 회의록 목록 6번째에는 소련군 「주구루잔 대좌의 지시」가 포함돼 있는데 당시 북한이 소련의 지휘아래 있음을 밝혀주는 것으로 볼수 있다. ②북한군이 작성한 「1950년 하기전투 정치훈련계획표」. 부대장 안일성과 부부대장 조인석 명의로 된 이 계획표는 6ㆍ25남침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임을 보여주고있다. ③「371군부대 참모부명령」 50년 6월8일 철원에서 제00118호로 대대전술훈련실시에 관해 하달된 명령서에는 「포병부상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50년도 하기전 훈련계획을 일부 개정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대대계획표를 하달하면서 이를 원만히 진행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명령한다(중략). 군관 및 하사관 훈련은 이미 하달된 계획표대로 실시할 것」이라고 적혀있다. ④⑤「철도수송에 대한 명령서와 열차적재계획」 특히 50년 6월15일 남포에서 작성된 제466군부대 철도수송에 관한 명령의 전문에는 「현하조국이 조성된 정치정세하에서 우리 부대는 금번 보위성에 실시하는 하기 대연습에 참가하기 위하여…(이하 생략)」라고 쓰여있어 북한군이 치밀한 수송계획을 세워 병력과 보급품을 운송했음을 알 수 있다. ⑥북한보위성 전투훈련국이 50년 8월5일 작성한 「단기정치훈련계획」. 11번째 줄에 「우리조국을 통일시킬 시기는 왔으며 승리는 반드시 우리 인민들 편에 있을 것이다」고 명시돼 있다. ⑦⑧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이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전열재정비를 지시한 「독전명령서」와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 박헌영이 김일성의 독전명령서 집행을 위해 하달한 지령서. 김일성의 「명령서」(50년 10월14일작성) 서두에는 「지난 6월에 미제국주의자들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조직에 동족상쟁의 내란을 도발시킨 이승만 괴뢰군의 불의의 공격을 받고…」 운운해 6ㆍ25남침을 북침으로 호도하고 있다. 이 책자에는 이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선전성명서(41년 12월10일) ▲태극기가 걸려있는 48년 5월1일의 북한노동절행사 ▲인민군 총사령부가 50년 6월18일 각사간에 하달한 러시아어 정찰명령1호 ▲우리 6사단의 방어계획 ▲6ㆍ25당시 우리 주민진술서 등 6ㆍ25전후의 희귀한 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공보처는 이 책자가 정치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보고 시판도 계획하고 있다.
  • 소,아ㆍ태 핵감축협상 촉구/미ㆍ일외 1∼2국포함/로가초프 외무차관

    ◎극동군 12만 추가 감축계획 【콸라룸푸르 로이터 연합】 소련은 아시아ㆍ태평양지역의 현대적 핵및 해군전력에 우려,이 지역 군사긴장완화 방안에 대해 미국측과의 협의를 원하고 있다고 이고르로가초프 소련외무차관이 8일 말했다. 로가초프 차관은 이틀간의 말레이시아 방문을 마치면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아ㆍ태지역의 해군력 및 핵무기가 급속히 현대화되고 있는 반면 이에 대한 억지수단이 전혀 없다는데 우려,미국측과 이 지역내의 군사적대치와 긴장완화 문제만을 전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회담들을 시작하길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ㆍ소양국이 유럽에서 진행해온 재래무기 및 핵무기 감축협상과 유사한 협상을 이 지역에서도 시작해야하며 유럽지역의 협상시작후 협정안 체결까지 수십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아ㆍ태지역 협상 시작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이 협상에는 일본 및 다른 1∼2개국이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며 이와 관련,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외무장관은 올해말로 예정된 일본방문에서 이같은 제의를일측에 내놓을 것이라고 로가초프 차관은 덧붙였다. 로가초프 차관은 한편 소련측은 소ㆍ중,중ㆍ베트남간 관계개선등 아시아지역의 군사적 긴장이 완화추세를 보임에 따라 아시아지역 배치군사력을 감축해왔으며 오는 92년까지는 극동지역군 병력을 12만명 추가감축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이와 함께 금세기말까지는 모든 해외주둔군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 북방경제특위 회의

    전경련은 8일 북방경제특별위원회를 열고 앞으로 소련과의 경제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전경련은 이를 위해 올 하반기중으로 전경련회장단으로 구성된 경제사절단을 파견하는 한편 극동지역투자조사단ㆍ석유화학조사단등 지역별ㆍ업종별 교류를 강화할 방침이다.
  • 정상회담이후 동북아정세 일 교수 기고

    ◎한ㆍ소 「경협의 축」따라 새질서 등장/「고르비쇼크」의 평양… 미ㆍ일서 적극 달래야 「역사적 제1보」「평화와 통일에의 길」이라고 일컬어지는 한소수뇌회담이 끝나고 양국은 관계개선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회담 직후의 「바람」(풍)이 잠잠해지려는 지금 관련보도를 근거로 이 회담에 이르렀을 당시의 한소의 생각,앞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아시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번 회담은 한국의 적극적인 소련에의 작용에 의해 실현됐다. 한국의 목적은 무엇인가. ①한소관계 수립에 의해 평양이 개방정책을 취하도록 하려는 구상이 있었다. ②한국경제는 올림픽이후 성장이 둔화됐다. 이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이룩,한소협력에 의해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경제적 실리를 얻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③한국이 대미관계를 배려했다는 측면이 있다. 한국의 대소정책은 대미관계와 가장 밀접히 맺어져 왔다. 회담의 실현을 조언했다고 보여지는 미국의 입장을 생각하면 회담을 미국내에서 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이 북방정책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해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이다. 이번 회담은 소련쪽에서 회담에 응했기 때문에 실현됐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소련이 회담에 응했다는 것은 소련이 외교상의 이데올로기 일색을 배제하고 「외교정책의 경제화」를 한반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는 결과이다. 그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이데올로기가 시간과의 경쟁으로 되어왔기 때문에 소련극동지역의 개발을 소련은 서두를 필요가 생겨났다. 그 때는 한국의 협력이 필요하다. 둘째로는 일본에 대한 측면이다. 일본이 시베리아개발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한국과의 교류를 선행시켜 일본을 개발교섭의 테이블에 끌어내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소련의 북한에 대한 정책변화의 결과이다. 이번 회담은 일찍이 서방측에 있었던 「닉슨쇼크」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북한에 대해 「고르바초프 쇼크」라고도 할만한 것이다. 지난 6개월간의 소련매스컴의 보도에 나타났던 바와 같이 소련은 최근의 북한의 사상투쟁 강화에 불쾌감을 표시해 왔다. 지난 2월경부터는 소ㆍ북한간의 불협화음이 두드러졌다. 올 2월을 경계로 소련은 『대북한관계에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한소관계를 개선한다』라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스통신은 6월 5일 『소련외교의 이데올로기 배제 및 기타 제국과의 경제교류ㆍ정치대화의 확대는 소련의 기본입장의 포기 및 제3국의 이익침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소련에 있어 한소회담으로 북한에 예상밖의 쇼크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소련은 한소회담에 의해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최근 수년간 소련은 대북한군사원조를 계속해 왔다. 그것은 중국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협력이다. 경제원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89년의 북한의 대소무역량은 수출입 합쳐 23억8천만달러이며 무역액 전체의 6할 가까이를 차지한다. 『북한으로서도 소련과의 경제관계를 끊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북한의 반발은 어느 정도 이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소련입장에서는 가능했다. 한편 조약문제는 어떠한가. 1961년 7월에 체결된 소ㆍ북한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은 91년7월 5년마다 한번씩의 경신시기가 닥쳐온다. 이 조약을 어떻게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소련은 북한에의 영향력을 남겨두기 위해 조약의 계속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조약경신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북한이 이 조약의 경신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앞으로 소련지원의 근거를 잃게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하고 싶기 때문에 조약이 폐기될 가능성은 적다. 한소수뇌회담 이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내려진다. 우선 회담당초 보도됐던 것처럼 『소련이 북한을 버렸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은 정치적 이슈에 관해서는 남북한양쪽을 보아가면서 추진될 것이다. 따라서 한소관계개선은 소련의 극동지역개발에 한국의 경제협력을 받는다는 점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소수뇌회담에서 쌍방이 군사문제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피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군사문제」라는 말에 한국은 소련이 대북한군사원조를 중지하는 것에 기대를 갖고 있다. 소련도 이에 대해 주한미군문제로 한반도군축논의의 이니셔티브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소련에는 주한미군삭감문제가 나온다면 미국과 한국사이에 주한미군을 둘러싼 평가가 갈라질 가능성이 있으며 동시에 북한을 소련쪽에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군축문제로 소련이 이니셔티브를 잡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양쪽은 이같은 문제에서 직접 충돌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더욱더 국내 사상투쟁강화에 열을 올릴 것이다. 소ㆍ북한관계는 동구관계와는 기본적으로 달라 매우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해방직후의 역사 및 6ㆍ25,군사ㆍ경제협력의 경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사는 쌍방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 미소데탕트시대를 보더라도 여전히 소련에 남겨진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비추어 북한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이런 관계를 아는 북한은 소련과의 관계를 끊기보다는 소련의 대한접근에 대한 「보상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 단 소련이 어디까지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동시에 한소회담은 앞으로 북한이 더욱 중국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때 중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최근 1년간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변화에 의해 중국의 대북한역할이 증대하고 있다고 중국은 보아왔다. 중국은 한소간의 급속한 전개에 당황해하면서도 북한에의 지지강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한소관계의 진전이 중국의 대한자세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경우 경제관계는 확대되더라도 정치관계는 보다 신중하고도 소극적이 될 공산이 크다. 동아시아지역은 한국과 소련의 경제협력을 축으로 주변제국이 관계를 조정해가는 양상을 보였다. 즉 한소관계는 개선되어가지만 중국과 북한이 거기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다. 동시에 일본과 북한의 관계개선은 진전이 없으며 미ㆍ북한관계도 실질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았다. 지금의 한반도정세는 크로스교류의 진전이라기보다 더욱 리얼한 실리주의와 정치상의 흥정이 얽혀 복잡한 양상을 띠어 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남아공,비상사태 해제/대통령발표/흑백인종 차별 완화위해 4년만에

    ◎「소요」나탈주엔 계속 발효 【케이프타운 로이터 AFP 연합】 남아공 백인정부는 흑백분리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지난 4년간 실시해온 비상사태령을 오는 9일 0시(현지시간)를 기해 해제한다고 7일 발표했다.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이날 의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남아공의 4개주중 폭력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나탈주를 제외한 3개주에 대해 이같이 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선언했다.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전국으로 TV중계된 비상사태 해제선언 발표에서 『남아공 정부는 그동안 폭력이 통상적인 법률로 다스려질 수 있을 경우 정상적인 상황으로 되돌린다는 최선의 목표를 위해 온힘을 기울여왔다』고 주장하고 『이제 이같은 상황이 실현됨에 따라 공공의 안녕이 아직 위협받고 있는 나탈주를 제외한 전국의 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말했다.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또 이같은 비상사태 해제조치로 흑인들과의 흑백분리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둘러싼 정치협상의 주요 장애물이 제거됐다고 강조했다. 피타 보타 전대통령은백인통치와 흑인 인권탄압에 대한 흑인들의 확산되는 항의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지난 85년 거의 전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이 조치는 남아공 보안군에 대해 아무런 혐의없이 체포ㆍ구금ㆍ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흑인들의 저항운동을 분쇄하는 무기로 활용돼 왔다. 비상사태 해제문제는 남아공의 흑인 민권운동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백인정부와 흑인들간의 공식협상 개시를 위해 제시한 주요 전제조건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아공 경찰들은 그러나 비상사태와 관계없이 반체제 인사들을 무기한 연금할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으며 구체적인 혐의없이도 사람들을 무기한 감금할 수 있는데 남아공에는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1백여가지의 법률이 마련돼 있다. 한편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정부가 비상사태령을 해제해도 남아공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를 계속 촉구할 방침이라고 이날 말했다. 6일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계속 시켜주도록 요구하기 위해 6주간에 걸친 13개국 순방에 나선 만델라는 이날 비상사태 해제선언이 발표되기전 파리에서 기자들에게 『만약 정부가 비상사태 해제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바로 남아공 국민의 승리는 나타내는 것이나 그같은 조치가 나의 인식을 바꿀 수는 없다』면서 남아공 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행사를 계속 요구할 뜻을 분명히 했다.
  • 컬러TV브라운관 제조설비/소,한ㆍ일ㆍ불에 수출요청/일지 보도

    【도쿄 연합】 소련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일본의 도시바(동지),프랑스의 톰슨 등 한국과 일본,유럽의 3개 가전메이커에 컬러TV용 브라운관 플랜트 수출을 요청해왔다고 닛케이(일경)신문이 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소련 라디오 수출공단이 소련제 TV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94년부터 4백억∼5백억엔(약1천8백60억∼2천3백2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간 1백만∼1백50만대 규모의 중형브라운관 공장을 세운다는 계획하에 이들 3개사에 플랜트 수출을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소련이 한소정상회담에서 국교정상화에 합의한 배경에는 한국기업과 일본 기업간의 경쟁을 붙여 풍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을 흡수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있다고 소개하고 이번 플랜트 수출요청은 그같은 상담의 첫번째 사례라고 말했다. 소련은 모스크바와 리보프 등 3개소를 공장건설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일본 유럽의 3개사로부터 견적을 제출받아 금년 연말이나 내년봄쯤 이중 1개 사에 일괄 발주할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 한ㆍ소 경제인 바쁘게 오간다/정상회담 계기로 잦은 「발걸음」

    ◎경제단체ㆍ지방상공인들도 “진출”타진/소 2개사 서울지사 허가 신청,10여개사 “준비”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의 한소정상회담을 계기로 국내 경제인들의 소련행과 소련기업들의 국내 진출움직임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경제인들의 소련행은 그룹회장이나 사장등 그룹 또는 개별기업의 최고 경영자들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부터 경제단체 또는 업종별 단체를 중심으로한 단체방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특히 소련연방상의 서울사무소에서 지난달 28일부터 「소련주간행사」의 상품전시회개막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자발급을 시작,이제까지 일본등 제3국에서 비자를 발급받던 불편이 해소됨으로써 경제인들의 소련행 발걸음이 한결 잦아지고 있다. ○…소련진출에 가장 적극적인 정주영명예그룹회장은 이달중순께 이명박현대건설회장,주강수현대종합상사전무 등 건설과 종합상사,종합목재 등의 관계자 5∼6명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할 예정. 이들은 방소기간중 최근 가스전개발유망지로 각광 받고 있는 극동지역의 야쿠츠크지역을 둘러보는 한편 소련측 관계자들과 만나 스베틀라야삼림개발,슬라뱐스크 및 나홋카수리조선소,블라디보스토크의 개인용 컴퓨터공장,하바로프스크의 비누공장 등 현재 추진중인 사업들을 최종 마무리지을 계획. 삼성그룹은 신현확삼성물산회장이 소련국가경제원 초청으로 9일부터 17일까지 소련을 방문,소련과학아카데미의 마르초크원장을 비롯해 소련극동연구소의 티타렌코소장,말케비치소연방상의의장 등 정ㆍ재계인사들과 두루 만날 예정.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회장은 삼성이 최근 소련에 투자하기로 한 전전자교환기사업등 굵직한 프로젝트에 대한 새로운 사업개척임무도 띠고 있을 것이란게 업계의 관측. 쌍용그룹은 현재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정영우 ㈜쌍용상품본부장이 오는 20일쯤 귀국하는대로 현지조사를 분석한뒤 김기호 ㈜쌍용사장이 다시 소련을 방문,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진전시킬 계획. 두산그룹은 고종진동양맥주사장이 성우경부사장과 함께 오는 9일까지 소련을 방문,소련의 주류유통업계를 둘러보고 있으며 박승일 두산산업사장도 소련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현재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방문하고 있다. ○…이에 앞서 남덕우무역협회회장을 단장으로 김인호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을 정부측 대표로 24명의 관ㆍ재계인사들로 구성된 대소경제사절단이 지난 2일 모스크바로 출국,오는 16일까지 모스크바ㆍ레닌그라드ㆍ하바로프스크ㆍ나홋카 등지의 국영기업 및 국가기관ㆍ단체ㆍ조합 등을 둘러볼 예정. 이 사절단의 일원인 정세영현대그룹회장은 공식일정이 끝나는대로 대소자동차수출 문제를,김항덕유공사장은 유전개발참여 및 원유ㆍ석유제품 수입가능성을 각각 타진할 것이라고. 경제단체 가운데 정춘국 대구상의감사를 비롯한 상공인 15명과 황대현 대구시지역국장 등 모두 17명의 대구지역 경제사절단이 오는 23일부터 7월1일까지 소련 카자흐공화국을 방문해 교역ㆍ기술협력 합작공장 설립문제를 협의할 예정. 또 마산상의에 소속된 부산ㆍ마산지역의 중소업체대표 25명도 7일부터 22일까지 방소길에 오른다. 이밖에 섬유ㆍ철강ㆍ플라스틱ㆍ해운ㆍ석유화학 업계도 제각기 소련방문단을 구성했고 기계공업진흥회도 곽정현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소련ㆍ동구권 방문단을 파견한다. ○…한편 국내종합무역상사인 삼성물산ㆍ럭키금성상사 등 5개사에 이어 쌍용ㆍ효성ㆍ코오롱상사가 이달중 소연방상의로부터 모스크바지사설립허가를 받아 지사를 개설할 예정인데 이어 소련업체들도 서울지사설치를 서둘고 있다. 지난 1월 우리측에 지사설치의향을 타진해 왔던 소련의 3개 FTO(국영무역공단)가운데 라이센스트르그(기술특허관리공단),스탄코임포트(공작기계수출입공단) 등 2개사가 최근 한은에 지사설치허가 신청서를 제출했고 테크노임펙스(기술ㆍ기계류수출입공단)도 곧 지사신청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3일 폐막된 소련상품전에서 많은 수출계약실적을 올린 니즈네캄스크네프스테킴(화학제품관리공단),달린토르그(장신구수출입공단),보노엑스포트(모피ㆍ자기류수출입공단),라스노임포트(비철금속수출입공단) 등 10여개사가 무공등에 지사설치를 문의했다. 이밖에 목재ㆍ펄프ㆍ선철ㆍ비철ㆍ금속ㆍ화학원자재관련 소련업체들이 주모스크바 무공무역관이나 주한소련상의에 잇따라 대한진출문제를 타진하는등 소련기업들이 서울로 몰려오고 있다. 소련기업들은 그동안 국내업체들과 총대리점계약 또는 업무제휴방식으로 간접상사활동을 했을뿐 지사설치를 한곳은 하나도 없었는데 외국상사 인ㆍ허가권을 쥐고 있는 재무부ㆍ한은이 한소정상이 완전수교 원칙에 합의한 만큼 소련상사들의 서울지사설치를 조만간 허용할 방침이어서 한소간 경제인들의 나들이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 외교수립 일정과 전망(한·소 새 시대:5·끝)

    ◎경협과 맞물린 수교… 「택일」만 남아/소서 차관요구… 우리측 「카드」가 관건/「조속」은 확실… 대사급여부 관심 집중 세계의 시선은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한소 정상회담에 쏠리고 있다. 4일 하오 4시(한국시간 5일 상오 8시) 페어몬트호텔에서 열리는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간의 한소 정상회담은 동북아질서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한소 양국은 당연히 수교문제를 논의할 것이고 그만큼 양국수교는 냉전시대를 종식시킨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외교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의제인 이 문제에 대해 양국 정상이 어떠한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할 지는 미지수다. 이번 회담자체가 청와대와 크렘린간의 성층권 사이에서 이뤄짐에 따라 양국 실무진간의 교섭을 통해 정상회담 토의내용에 대한 「기본틀」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다 소련측도 그동안 보다 비중있는 미소 정상회담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정상이 이번 회담에서 양국간 수교를 이른 시일내에 달성하기로 합의할 것이라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자유분방한 성격의 담판형인 고르바초프의 외교스타일로 볼 때 현지 회담장 분위기에 따라 구체적인 수교일정시한까지 전격 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양국간 국교정상화는 미수교상태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이례적 측면과 최근 양국간의 우호적인 분위기로 볼 때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고르바초프를 수행중인 니콜라이 쉬슬린 소공산당 중앙위외교고문겸 대변인과 미하일 아르바토프 소과학원의 미국­캐나다연구소장 등 고르바초프의 외교분야 「싱크탱크」들도 이같은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측에서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조기 수교달성」과 소측의 희망사항인 「경협확대」의 조화가 수교스케줄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경협증진문제에 있어 우리측이 만족할 정도로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고 판단될 경우 소측은 파격적으로 국교정상화의 구체적 일정에 합의해올 수도 있다. 소측은 지난달 31일 미소 정상회담개최와 관련,배포한 자료에서 소련내 극동지역을 새로운 국제경제협력의 특별지역으로 선정,합작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또 소련극동의 나홋카항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소측은 특히 수교합의와 함께 우리측의 50억달러 상당차관공여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측은 이같은 소측의 움직임에 대해 아직까지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만 소측에 제시할 협상카드로 상당한 액수의 차관공여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외무부의 고위당국자는 4일 『양국간 교섭 특히 수교문제를 논의할 때는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소련의 무한한 잠재력을 감안해 보면 소측에 차관을 줘도 무방할 것』이라고 밝혀 차관공여를 중요한 협상카드로 사용할 방침임을 시사한 바 있다. 더불어 투자보장협정,이중과세방지협정,무역협정 등의 체결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럴 경우 양국간 수교는 더이상 미룰 수 있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만큼 빠르면 7월중에 달성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외교소식통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양국정상은 또 이번 회담에서 수교일정에 합의하고 이에대한 구체적인 실무협상은 양국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한 수교교섭단을 통해 타결토록 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상회담까지 개최된 마당에 양국외무장관회담은 너무나도 공식적이며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최호중외무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외상은 서울과 모스크바를 교환방문하든지,유엔본부등 제3국에서 2,3차례 공식접촉,양국정상간의 합의를 구체화할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정황으로 볼 때 최장관이 6월말이나 7월초쯤 모스크바를 공식방문,수교의정서에 서명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또한 수교단계는 중단단계없이 곧바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것이 우리측의 시종일관된 입장이나 소측이 중간단계를 굳이 주장한다면 「이른 시일내에 수교를 달성한다」는 전제아래 상주대표부를 설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상주대표부가 설치될 경우 양국간 국교수립은 당초 기대보다 1·2개월 늦은 8·9월경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관련,정부일각에서는 소측의 지나친 경협요구를 피하면서 북한및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으로 상주대표부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너무 이른 시기에 한소 수교가 달성된다면 북한­중국 관계의 밀착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초래되고 이는 한소 관계개선에도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양국정상회담의 결과는 개별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양국간 수교는 단지 시간문제일 뿐 기정사실이라고 판단된다. 양국간 수교와 함께 서울과 모스크바에 상주대사관이 연내 설치될 것으로 예상되며 우리측은 이외에도 레닌그라드,블라디보스토크,타슈켄트(한인교포가 가장 많은 지역) 등지에 총영사관을 설치할 것으로 전망된다. 때맞춰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대통령간의 수교기념 상호교환방문도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한소관계는 수교직후인 올 하반기부터 정치·경제·문화·체육등의 분야에서 본격증진될 것으로 보이며 한반도의 긴장완화및 평화정착에도 커다란 기여를할 것으로 예상된다.
  • 미ㆍ소 정상,대결시대 종식 선언의 의미

    ◎아태지역 새질서 구축의 “청신호”/“북한개방이 평화정착 열쇠”판단/소도 냉전구도 청산을 강력 희망/크렘린,한ㆍ일 등과 경협 확대… 긴장완화 추구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은 3일 양국정상회담을 마무리짓는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정상회담으로 미소양국의 대결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회담의 구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들이 있겠지만 이번 회담으로 전후냉전체제를 이끌어온 두나라는 대결시대를 마무리하고 상호협조의 터를 다지는 하나의 이정표를 마련했다. 통일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입문제에 대해 양측의 이견이 아직 좁혀지지 않았으나 지난 6개월여 계속돼온 동유럽의 변화는 이번 미소의 만남으로 사실상 마무리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제 세계의 관심은 한반도를 비롯,중국ㆍ베트남 등 마지막 남아 있는 아시아공산국들의 변화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도 3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미와의 새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태평양권에도 새질서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해 다음의 외교목표를 아시아지역에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아태국들과의 경제협력체 구성을 위해 내년초 일본방문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노태우대통령과의 전격적인 한소정상회담 합의와 대한수교의사는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정책의 구체적인 첫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새 질서모색을 위해 정기적으로 여러 제안들을 내놓았다. 지난 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중국과의 화해를 천명한 것을 비롯,그해 11월에는 아태지역의 비핵화 등 군축을 제의한 「뉴델리 선언」,그리고 88년에는 이 지역국들의 경제협력과 집단안보 구상을 골자로 한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을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프가니스탄과 캄보디아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이뤄졌고 89년 5월과 금년 4월 두차례에 걸쳐 중국과의 수뇌회담이 성사돼 양국 국경의 병력감축 합의가 발표됐다. 그동안 동유럽에서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페지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일대 변혁이 진행됐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등 아시아 공산국들은 좀체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80년대 들어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경제적인 변화만 추구한다는 소위 「위로부터의 개혁」방식을 도입,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했지만 그 정도는 너무 미약했다. 정치와 경제체제를 한꺼번에 바꿔버린 동유럽의 변혁물결이 일자 이들은 결국 체제안보를 위해 변화시도 자체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북경의 천안문 사태가 그 단적인 예이다. 북한은 동유럽 각국에서 유학생들을 불러들이고 남북대화를 교착상태에 빠지게 했다. 소련으로서는 아시아지역에서 유럽에 상응하는 군축,그리고 시베리아를 포함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변화노력을 이곳에서 펼칠 때가 된 것이다. 아시아에서 동서대결구도가 청산되지 않는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가치를 소련은 포기하기 어렵다. 북한은 주한미군과의 대치지역이고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발진한 소태평양함대가 태평양으로 빠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소양국은 한ㆍ미ㆍ소 3국이 북한을 설득,개방을 촉진함으로써 남북한 대화와 미ㆍ북한관계개선 그리고 이 지역의 군축에 진척을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데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과의 수교를 단기적으로 북한에게는 충격이겠지만 결국 이지역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게 소련의 판단인 듯하다. 북한의 충격완화를 위해 일시적으로는 주한미군철수,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등 북한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소련이 한반도에서 바라는 것도 결국은 독일식의 해결방안일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북방4개섬 반환문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아시아지역의 새질서 구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과의 본격 협력시대를 열어 새 아태협력체를 구성시키겠다는 것이 소련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북한ㆍ중국을 포괄하는 구상이다. 고르바초프의 내년 방일은 이런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유럽의 변혁물결과 본격화될 소련의 아시아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유럽대륙에서와 같은 화해의 새바람이 불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오는 9월 북경아시아게임을 고비로 중국도 대외개방과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란 전망들이 있으나 아직은 뚜렷한 변화조짐이 없다. 노대통령은 3일 한소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면서 출국인사를 통해 『우리의 분단상황은 결코 21세기로까지 이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안에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남북한과 미ㆍ소ㆍ중ㆍ일 등 관련국이 무엇보다 먼저 할일은 이 지역의 긴장완화와 대결구도 청산일 것이다. 남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 주는 이번 미소정상회담의 의의는 바로 이런 노력의 첫발을 내딛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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