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창군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주제발표 요지
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김우전)는 오는 17일 광복군 창군 60주년을앞두고 14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3층 대회의실에서 기념식과 학술세미나를 갖는다.‘한국광복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주제로 한 이번 세미나에서는 광복군의 역사적 정통성과 의의 등을 확인하는 여러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이중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김행복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한시준 단국대 교수 등의 주제발표문 3편을 요약한다.
■광복군의 정통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김삼웅 대한매일 주필)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은 역사성·정통성에도 불구하고 해방후 창군과 건국과정에서 소외·배척됐다.그 이유는 크게 4가지로 분석할수 있다.
첫째,수적인 열세이다.해방전 일본군·만주군에 복무했던 한국인은39만여명이었으나 광복군 출신은 3만5,000여명에 불과했다.
둘째,미군정이 일본군 전력자나 영어 구사가 가능한 학도병 출신들을 중용했다.
셋째,광복군 계열의 분열현상이 심했다.광복군출신 가운데 오광선은광복청년회,이범석은 조선민족청년단,이청천은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이념적으로도 임시정부 우파계열을 중심으로 대한무관학교,좌파계열로 조선국군학교(중앙육군사관학교) 등이 대립했다.
넷째,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인사정책이 편파적이었다. 이승만은 임정요인들과 광복군을 건군 참여에서 배제했다.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이국무총리겸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임정 배척 노선을 극복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맞아 국군의 정통성과 ‘국군의 날’ 재정립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군사(軍史)를 광복군으로 소급하여 정통성을 확보하고 국군의 날 역시 광복군 창건일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광복군 정통성의 국가승인 문제(한시준 단국대 교수) 광복군은해방후 국내와 중국에서 건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중국측은 공산당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광복군의 건군 활동을 불안요소로 간주했다.또 미군정은 임정과 광복군의 존재를인정하지 않았다. 광복군이 미군정의 건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 창설과정에서 광복군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정 하의 통위부와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와 국군으로 개편되었는데,통위부장 유동렬은 모든 권한을 국방부장관 이범석에게 이양하였다.
광복군에 의해 미 군정의 군권(軍權)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넘겨진것이다.정부수립후 광복군 출신들은 창군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재 국군은 광복군의 역사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국군의 뿌리를 국방경비대,육사의 연원을 군사영어학교에 두고 있다.이제우리 군의 뿌리와 연원을 되찾아야 한다.
■광복군의 군사적 특성(김행복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 광복군은군사령부가 먼저 편성되고 예하부대는 차후 구성됐다.인적자원은 중국 관내에서 양성된 군사간부와 만주에서 이동해온 독립군 세력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이른바 초보활동에 의해 장병을 모집해 1년만에 3개사단을형성하려고 했다.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소탕작전, 병력모집의 곤란성, 중국의 간섭 등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미얀마에 파견된 공작대원들은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고 미국 첩보기구 OSS와의 훈련도 마쳤다.
광복군은 임정의 국군이었으나 정규군이라기보다 비정규군·특수전부대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데 머물렀다.이 점 때문에 광복군의의의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망명정부가 이국 땅에서 만든 광복군은 조직적·통일적·지속적인 군사활동을 수행했으며 이는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