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노주석
    2025-10-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938
  • [세종로의 아침] 롯데와 바벨탑/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롯데와 바벨탑/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롯데가 지난주 잠실 제2롯데월드 저층부에 대한 임시사용 승인신청서를 서울시에 냈다. 업계에 떠돌던 7월 임시 개장설이 현실화한 것이며, 공이 서울시로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저층부란 현재 공정률 60%인 사무동 월드타워를 제외한 백화점, 쇼핑몰, 엔터테인먼트 등 알토란 3개 동이다. 재선에 성공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늦어도 이달 중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잠실은 본래 강북에 가까운 섬이었으나 1971년 강남 쪽 삼개나루(삼전도)의 물길을 막아 만든 땅이다. 병자호란 때 세운 삼전도비와 서울 유일의 호수 석촌호수가 이곳이 물길이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 이 호수변에 단군이래 가장 높고, 제일 큰 건물이 들어선다고 하자 잠실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공사 도중 석촌호수 수위가 급격하게 줄면서 지반침하와 건물 붕괴 우려가 있다는 식의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안전은 세월호 사건 이후 가장 뜨거운 화두다. 근거 없는 괴담은 뿌리 뽑아야겠지만 안전은 시험대상이 아니다. 제2롯데월드는 세계에서 6번째 높은 555m짜리 123층 건물이며, 유동인구는 20만명 정도로 예상된다. 어떤 유형의 안전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최악이다. 게다가 롯데는 신뢰감을 심어주지 못했다. 지난해 6월 이후 4차례의 크고 작은 다양한 유형의 사고로 2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기둥 11개에 균열이 생겨 안전점검을 받았고, 수백건의 문제점이 적발됐다고 한다. 제2롯데월드의 임시사용 승인을 안전에 관한 행정적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 게임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롯데의 집념, 엄밀하게 말하면 신격호 회장의 야심은 서울시 차원을 뛰어넘었다는 얘기다. 임시사용 허가를 내주도록 2000여개 입주업체를 사전에 선정했고, 100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키로 해 서울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영삼-김대중-이명박 등 세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서울공항의 활주로까지 옮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추진력으로 최종 건축허가를 받아낸 롯데 입장에서 임시개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박 시장 진영을 상대로 한 ‘30년 전쟁’의 화룡점정이라는 것이다. 임시사용은 롯데의 단골수법이기도 하다. 롯데는 1988년 잠실 롯데월드 호텔 동을 먼저 짓고 나서 백화점은 두 달, 쇼핑몰은 석 달, 테마파크는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개관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을지로 롯데호텔과 백화점 신축도 꼼수의 연속이었다. 강북억제책으로 백화점 허가를 내기 어렵자 호텔편의시설용 쇼핑센터로 허가를 낸 것이다. 우리가 아는 롯데백화점의 법인명은 지금도 (주)롯데쇼핑이다. 신 회장은 “서울에 세계 최대의 제2롯데월드를 짓는 것이 여생의 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기개장으로 번 푼 돈으로 공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예정대로 2016년 말까지 공사를 안전하게 마무리지은 뒤 문을 여는 정정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하늘을 향한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의 결정체 바벨탑은 오래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한다.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조선시대 도성 축조에 얽힌 두 가지 설화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얼개인 도성을 짓는 축조도감을 1395년 설치했다. 삼봉 정도전이 성 쌓을 자리를 정했는데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고, 두 번째는 성리학과 풍수학의 정면 대결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 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雪)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얘기다.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인 서울의 유래는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정설로 돼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에서 보듯 서울을 ‘으뜸가는 선’인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풀이다. 입으로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는 희극적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은 여전히 경기도 경성부였다. 미 군정청은 1946년 ‘서울은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 자유독립시가 된다’라고 발표했다. 영어 원문에는 ‘Seoul established Independent City’(서울독립시의 설치)라고 기록됐다. 하지만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 한국인 직원이 서울독립시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서울특별시’라고 고쳐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의 한판 대결이다. 두 사람은 경복궁 명당이 앉을 자리를 정해 줄 주산(主山)을 백악(북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에서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수용하지 않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는 설화를 전했다. 무학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200년 후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뜻한다.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면서 주산은 백악으로 결정됐다. 무학은 굴하지 않고 도성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선바위를 왕성 안에 집어넣어 불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또다시 삼봉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났다. 2전 2패를 당한 무학은 “불교가 망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얄궂은 운명인지 스님의 형상을 닮은 선바위 옆에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느라 쫓겨난 국사당이 자리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500년이 지나고 나서 한자리에서 해후한 셈이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이 한양도성 건설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은 물론 관아와 시장의 터를 잡았고 도성 성곽의 윤곽도 결정했다. 서울을 5부(동·서·남·북·중부), 52개 방으로 나누고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하는 일도 모두 그의 생각대로 였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교 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신라 천 년과 고려 오백 년을 풍미한 불교와 풍수도참설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양도성’ 명명 4년… 안내판에 ‘서울성곽’ 한양도성이란 무엇인가.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한성부, 한성, 한양, 서울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한양도성이 곧 조선이었다. 더불어 수도, 수선, 도읍, 도성, 왕성, 황성, 궁성, 경조(京兆), 경도, 장안, 사대문 안의 통칭이기도 하다. 서울을 나타내는 모든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이고 권위 있는 명칭이었다.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영국 런던이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했다. 규모로 보아도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서울을 둘러싼 성곽이 가장 크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우리는 ‘한양도성=서울을 에워싼 18.672㎞의 성곽’이라고 범위를 좁혀 해석하고 있다. 내용물은 다 빼고 도성을 둘러싼 성곽만 내세우는 축소지향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 내내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부 전체를 지칭하는 당당한 국가권력의 표상이었다. 도성 밖 10리를 나타내는 성저십리(城底十里)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사대문 안과 같은 권역을 나타내지만, 의미는 훨씬 공식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성곽은 유일무이의 대도시인 한양도성 안을 관리, 운영할 목적에서 세워진 상징 벽이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인 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의문(서소문)~돈의문~창의문(자하문)~숙정문~혜화문은 한양도성의 관문이었다. 상경(上京)과 낙향(落鄕)이 구분되는 시대의 경계선이었다. 궁궐을 에워싼 백악~낙타산(낙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도성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상징이었다. 외적의 침입과 방비, 농성을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탕춘대성 등 산성을 따로 외곽에 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울성곽이라는 용어를 쓰려면 ‘서울성곽=조선시대의 옛 서울인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개발연대 몰지각한 권력자와 도시행정가들이 한양도성에서 성곽만 따로 떼 ‘서울성곽’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도성 안 문화재와 유물은 마구잡이로 깔아뭉개면서 일제가 조선 정체성 지우기의 하나로 헐어버린 성곽은 잇는다는 앞뒤 맞지 않은 복원계획이 화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구자춘 서울시장이 1975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계획’을 세웠고,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한양도성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성곽이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박한 역사인식과 자가당착이 빚은 비극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문화재위원회가 2011년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의 명칭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눈이 어두워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 성곽’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고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어정쩡하게 명명하는 과욕을 부려 또 다른 오해와 시비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서울성곽이라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도성을 둘러싼 성곽과 8개의 대·소문이 한 몸이란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국보 1호, 보물 1호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들 문이 한양도성의 출입문이라는 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곽을 상실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왔고, 출입이 통제된 숙정문과 차량통행에 방해된다며 철거해 버린 돈의문을 아예 보지 못한 탓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고 정식 등재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송인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유산가치와 진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성곽의 영어표기가 ‘Seoul Fortress’인데 반해 한양도성은 문화유산 등재 때 ‘Seoul City Wall’이라고 표기됐다”면서 “Fortress가 방어 요새로서의 역할만을 제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City Wall은 역사도시의 도시성곽으로서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양도성을 둘러싼 전반적인 용어와 개념 정리를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이라고 명칭을 바꾼 지 4년째를 맞지만 성곽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여전히 서울성곽이라고 표기돼 있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용어나 명칭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식민시기 서울의 조상 산인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엉뚱하게 이름 붙임으로써 정체성이 훼손된 것처럼 용어의 변질은 의미의 변질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을 헛갈리고 있다. 묵은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안내판부터 제때 바꿨어야 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자치구는 서울성곽이라고 우기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이중도시 서울, 북촌·남촌에서 강북·강남으로 양분화 조선 내내 사대문 안 북촌과 남촌의 양촌 체제가 공고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고종이 중국의 천자나 일본 천황과 같은 황제에 오르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고서 북촌 체제의 중심인 경복궁을 버리고 서촌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정궁을 옮겨 가면서 상황이 변했다. 건국 500년 만에 나라의 중심이 백악(북악)을 중심으로 한 북촌에서 종로를 넘고, 청계천을 건너 서울시청 쪽으로 이전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이러한 정치권력의 공간이동은 이후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에는 없던 태평로를 서울의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건립돼 정치권력은 북촌으로 회귀했지만, 자본주의의 꽃인 경제권력은 태평로에 남았다. 확장된 경제권력이 1970년대 한강을 넘어 강남과 여의도를 향해 중심이동하기 전까지. 강남으로의 팽창과 더불어 서울은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수도 한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는 강북에 남았지만,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경제자본과 대의기관인 국회가 강을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서울이 강북 사대문 안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서울은 강남이 됐다. 사대문을 남북 체제로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하던 개천(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남·북촌이 하나로 통합되는가 했더니 급기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양분돼 버린 것이다. 서울의 남북 경계선이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옮겨 간 셈이다. 도시사학 분야에서 ‘이중 도시’(Dual City)의 개념은 식민지를 경험한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식민지 도시는 토착 집단에 대한 외래 집단의 지배 공간이었고 양자의 문화적 이질성은 사회적, 공간적 격리로 나타났다. 대체로 토착민들의 자생적 주거지는 전통적·전근대적 성격을 띠었고, 식민권력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주거지는 근대적·서구적 성격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민지 권력은 외래 식민집단의 주거지를 토착민들의 열악한 주거공간과 분리시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문명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양분 정치적 기획의 산물인가, 체제경쟁의 산물인가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북악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를 잡은 북촌, 낙산 아래 동촌, 인왕산 아래 서촌 그리고 남산 아래 남촌과 청계천변 중촌이 서로 아우르는 모습을 보였다면 식민 시기 경성은 일제의 의도적인 정치적 기획의 산물로서 남·북촌 체제로 양분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서·남·북촌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어울린 사색붕당(四色朋黨)이 식민지 사관의 혐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다른 풀이도 있다. 안창모(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청계천을 품에 안고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만명을 수용하는 계획도시로 출발한 한양이 6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강을 품에 안고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외견상 인구는 100배 이상 증가했고, 면적도 30배 이상 확대됐다. 600년 시차를 가진 조선의 한양과 한국의 서울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존재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서울은 계획됐다기보다는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려는 방편으로 확장됐고 결과를 추인하는 방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도시의 물리적 성장과 변화 배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북 분단과 강남 개발은 서로 얽혀 있다. 비록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이지만 1976년 건설된 잠수교로 말미암아 한강은 서해 뱃길이 끊어지면서 자연 울타리가 됐다. 유사시 30만~4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요새화 차원에서 뚫린 3개의 남산터널과 정부청사의 과천이전 등은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이 서울의 도시구조 변화에 남긴 대수술 자국이다.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건설로 강남이 개발돼 현대 서울의 모습이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나뉜 것도 결국은 남북 체제경쟁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어떻게 분열됐을까 서울은 식민시기 어떤 분열과정을 거쳤을까. 일본인의 서울 진출과 일본인 거류지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답이 보인다.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천연동 청수관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임오군란 때 소실되자 1884년 교동 박영효 저택에 공사관을 지어 사대문 깊숙이 진출했으나 같은 해 갑신정변 와중에 또 타버렸다. 1885년 남산 아래 예장동으로 옮긴 뒤부터 식민지배 권력의 본거지가 됐다. 남산과 일본을 잇는 역사의 끈은 질기고도 질겼다. 일본 사신이 묵었던 왜관(동평관)이 조선 초 자리 잡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7년 동안 진지를 구축한 왜장대가 있었다.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 조정은 일본공사관을 사대문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개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다.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夫婦有別) 따지듯 북남유별(北南有別)을 따졌지만, 결과는 남북 역전으로 나타났다. 남촌은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메인스트리트였다. 조선 신궁(남산식물원)이 일본 정신을 상징했고, 통감부(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헌병사령부(남산한옥마을)가 무력통치를 상징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인 충무로, 진고개 일대는 본정통(本町通)이라고 하여 조선의 유일한 동서 간 대로인 종로를 대신했다. 일제는 황토마루(黃土峴)를 광화문통, 구리개(을지로)를 황금정(黃町), 명동을 명치정(明治町),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다방골(茶洞)을 다옥정(茶屋町)으로 멋대로 바꿔 버렸다. 남촌에는 조선은행(한국은행)과 경성우체국(중앙우체국)이 들어서고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과 히라타(平田) 등 대형 유통업체가 진출해 상권을 장악했다. 2~4층의 현대식 상점 진열대에는 일제와 서구 외제 상품이 휘황찬란한 전등불 아래 진열됐다. 도로는 포장되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식재됐다. 광고탑과 마네킹,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뤘다. 본정통은 식민지 서울이 아니라 도쿄를 여행하는 듯했다. 지금의 강남 격이다. 한국인이 상권을 쥐고 있던 종로통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1935년 시인 임화는 ‘다시 네거리에서’라는 시에서 “번화로운 거리여/내 고향 종로여/웬일인가/너는 죽었는가/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라고 외쳤다. 별건곤 1930년 6월호에서 김화산은 “달리는 차, 매연, 여자의 스커트, 자욱한 연애, 주머니 속의 1전짜리 동전, 비애, 주점, 여자에 대한 증오, 정거장, 잡다한 사상을 가진 군중, 쇼윈도, 밤의 샹들리에와 카페의 홍수, 길에 버려진 영화광고지…”라면서 남촌의 화려함을 묘사했다. 당시 경성은 전차 120여대, 자동차 250여대(관용차와 자가용 제외), 승합차 70대, 버스 40대가 뒤섞여 달리는 혼잡한 대도시였다. 식민지 통치권력과 외국 자본에 의해 서울 사람은 서울의 객이 돼 버렸다. 1936년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과 시흥군, 김포군이 서울로 각각 편입됐다. 고양군 용강면(오늘의 공덕동, 아현동)과 연희면(신촌), 은평면(홍제동), 숭인면(성북동, 청량리), 한지면(이태원, 서빙고)이 서울 땅이 됐다. 시흥군 영등포와 노량진, 상도동이 서울에 포함됐다. 서울의 팽창은 인구 집중과 더불어 지역 분화를 재촉했다. 동소문 일대 주택지대를 문화촌이라고 했고, 광희문 밖 신당동에는 달동네가 형성됐다. 정동 일대에는 서양인촌이, 용산 일대에는 공업촌, 서울역과 봉래동 일대에는 노동촌, 다동·청진동·관철동 일대에는 기생촌 등 특수촌이 형성됐다.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에는 경성부가 운영하는 토막 수용 시설이, 종로와 본정통, 명치정, 장곡천정에는 다방과 카페, 영화관 같은 유흥업소가 밀집했고, 쌍림동에는 유곽이 있었다. ●서울·지방 나누듯 서울도 신분 따라 거주지 나눠져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서울(사대문)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오촌(동·서·남·북·중촌)과 양대(윗대·아랫대), 자내(성밖 거주지)와 오강(한강변 거주지) 지역의 문화가 달랐다. 18~19세기 양반문화만 놓고 보아도 동서남북 사촌이 다 달랐고, 그들 사이에는 쉬 해소될 수 없는 차별의식과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다”고 분석했다. 서울은 조선 500년 내내 유일한 도시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한양이라는 도시와 나머지 지방으로 나눠졌다. 중엽 이후 서울과 지방의 인적 교류가 막히면서 경인(京人)과 향인(鄕人)의 차이가 벌어졌다.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씨와 문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골 선비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영조 대 이후 지방 출신을 과거급제자에 할당할 정도였다. 심지어 고종 때 서울내기 군관이 시골뜨기 예조좌랑(교육부 사무관급)을 멸시하고 구타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졌듯 서울도 나눠졌다. 궁궐 주변인 북촌과 동촌, 서촌에는 고관대작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아전, 겸인배(집사)들이 살았다. 남산 아래에는 쇠락한 양반이나 무반이 거주했고, 인사동과 청계천 주변에는 역관이나 의관, 화원 같은 중인들이 중촌을 이뤘다. 상민은 윗대나 아랫대 혹은 사대문 밖 자내, 오강에 터전을 잡았다. 거주 지역에 신분과 지위, 직업 정보가 새겨졌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서울YMCA여 깨어나라/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서울YMCA여 깨어나라/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서울YMCA가 또다시 구설에 휘말렸다. 서울신문 단독보도 등에 따르면 서울YMCA는 청소년시설부지로 기증받은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풍동 일대의 토지 매각을 추진해 왔는데 최근 담당 관청인 고양시가 이 땅의 일부를 청소년수련시설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서울YMCA가 고양시와의 얽히고설킨 소송을 자진취하하고 나서 이뤄진 이 땅의 해제과정이 석연치 않을 뿐더러 애국지사 유광렬 선생의 기증정신에도 벗어난다는 게 기사의 요지다. 부동산업계에서는 땅의 용도가 바뀌면서 다가구주택이나 음식점 등을 지을 수 있게 돼 땅값이 4배 가까이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서울YMCA와 고양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도덕성을 먹고사는 조직이어야 하는 서울YMCA가 왜 이러는 것일까. 내부 균열과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3년 비자금 추문이 불거지면서 서울YMCA의 시민사회 운동체로서의 공정성과 종교, 교육단체로서의 신뢰에 상처를 입었다. 당시 15년 동안 이사장을 연임하는 등 28년 독재체제를 구축했던 표용은 목사의 이사장직 퇴진이 문제의 핵심으로 드러났다.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치부를 만천하에 내보인 이 사건으로 표 목사는 물러났다. 서울YMCA는 정상화됐을까. 이번 풍동 청소년수련원사건을 계기로 잊고 있던 서울YMCA를 다시 눈여겨본 결과 대답은 ‘NO’였다. 지난해 10월에 성대하게 열린 서울YMCA 발족 110주년 기념식 사진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국내 최초, 최고 시민사회단체의 생일을 맞아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오고, 감독기관장인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해 “서울YMCA는 이미 기독교의 역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가 되었다”라고 축하한 내용이 여러 매체에 실려 있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단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13명의 주빈 중 ‘그때 그 사건’으로 물러났던 표 목사가 있었다. 명예이사장이라는 직함으로 소개돼 있었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전직 임원에게 물어보니 “표 목사가 서울YMCA를 통치한 지 올해로 40년째를 맞는다”라고 말하고서 입을 닫았다. 이사회를 완전하게 장악한 표 목사 체제는 건재했던 것이다. 지난달 서울YMCA 직원들은 사상 처음으로 월급을 제날 받지 못했다고 한다. 기증받은 자산이 장부가로 3000억원을 넘는다는 서울YMCA가 월급을 제때 주지 못할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린다는 것은 경영 난맥상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풍동 사건은 이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삐져나온 여러 가지 무리수의 한 곁가지였다. 서울YMCA의 영원한 총무, 오리 전택부 선생의 저서 ‘Y새끼다리들이여’를 펼쳐본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5년 전인 2003년에 펴낸 책이다. ‘한국기독교청년회 운동사’라는 점잖은 제목 대신 ‘하나님의 씨(Y Secretary)’을 뜻하는 신조어를 제목으로 붙인 이유는 한 가지였다. 봇물 같던 서울YMCA개혁운동의 동참을 목청껏 외치기 위함이었다. 12년이 흐른 지금도 그 외침은 유효한 것 같다.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조선시대 한양은 ‘경조 5부’ 행정구역으로 구분 오늘의 서울에도 강·남북이라는 지역 차가 실재하지만, 전통적으로 서울은 지독한 지역색이 작용하던 도시였다. 대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양태를 보였다. 조선 500년 내내 개천(청계천)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 두 개 구역으로 양분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산아래 본정통(충무로) 중심의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진화했다. 광복 이후 갈라진 좌우 이데올로기는 결국 국토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끊어놓았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 전개된 남·북한의 체제 안보경쟁이 강남개발을 촉발했다. 이때 서울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양분됐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두 개의 도시로 이뤄졌다. 서구개념으로 치면 강북은 구도심(Old Town)이요, 강남은 신도심(New Town)이다. 한강은 나루터와 나룻배가 사라진 대신 다리로 촘촘하게 이어졌지만 두 도시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격차도 심화된 느낌이다. ‘한강의 기적’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한강 이남의 초고속 성장사였다. 양극화는 한강을 사이에 둔 남과 북 양극에서 빚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만큼 문화적 이질성도 고착화하고 있다. 몇 년 전 조사에서 강남과 강북 아파트의 평균매매가 차이가 3.3㎡당 무려 1337만원이었다. 강남이란 ‘나’와 ‘남’이 다름을 보여주는 주거의 ‘차별 짓기’를 통해 몸값을 부풀린 아파트 왕국이다. 서울 강남·북을 뺨치는 지역색이 조선시대 한양에 존재했다. 도시학자들은 서울을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이중 도시’(Dual City)로 분석한다. 도시사학적 시각에서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눠 본다면 근대 이전 서울은 남촌과 북촌으로, 근대 이후는 강남과 강북으로 양립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서울시청)는 ‘경조 5부’(京兆 5部)라고 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 다스렸다. 오늘날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경기도 시흥·과천·용인·광주였다가 서울로 편입된 한강 이남 10개 구를 제외한 한강 이북 15개 구 가운데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종로·중구·서대문·동대문 등 4개 구가 옛 경조 5부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경복궁과 사대문을 축으로 나눠보면 북부는 경복궁~창덕궁 사이, 동부는 창덕궁~흥인지문 사이, 서부는 돈의문~숭례문 사이, 남부는 숭례문~흥인지문 사이쯤이다. 5부(部)가 곧 5촌(村)이다. ●사색당파, 제사·옷고름·갓끈 등으로 차별화 경조 5부 가운데 북부(가회동·계동·안국동·재동·경운동)와 동부(이화동·동숭동·혜화동·충신동)를 북촌체제로, 서부(정동·새문안)와 남부(필동, 묵동, 남산동·주자동, 인현동)를 남촌 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천을 경계선으로 긋는다면 북쪽은 권문세가와 현역 벼슬아치 그리고 그들을 돕는 아전(衙前) 및 겸인(?人)들의 주거지구였다. 개천부터 목멱산(남산)까지 남쪽에는 지체 낮은 관리나, 퇴락한 양반, 별 볼 일 없는 무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서울연구가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남촌 사람들은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속담은 두 구역 사람들의 기질이나 처지가 그만큼 달랐음을 일러준다”고 분석했다. 동·서·남·북촌이 양반이나 관료 그리고 그들을 떠받치는 아전들의 거주구역이라면 중촌(中村)은 중인(中人)들의 터전이었다. 의관, 역관, 율사, 화원, 도사 등 중인에다 상인, 군속들이 중부(다동·무교동·수표동, 입정동, 주교동, 관수동)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오늘의 을지로와 청계천변이라고 보면 된다. 중인이란 용어도 중부 혹은 중촌에 사는 사람에서 생겼다. 케케묵은 조선의 행정구역인 경조 5부를 들먹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인이 사는 중촌을 제외한 4개의 양반 촌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사색당파(四色黨派)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동인의 거두 김효원(1532~1590)이 낙산 아래 동촌에 산다고 하여 그 일파가 동인(東人)이 되었으며, 이에 맞선 심의겸(1535~1587)이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았다고 하여 서인(西人)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동인 중 남산 아래 진고개에 사는 일파가 남인(南人)이 되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거주하는 몇몇이 북인(北人)을 형성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됐다가 노론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년 이상 득세했다. 노론의 거주지가 이른바 북촌이었다. 풍수에서 한양의 최고 명당은 백악 아래 경복궁이었다. 다음이 응봉 아래 창덕궁과 종묘, 성균관 자리다. 백악과 인왕산 사이 장동·청류계·백운동·옥류동·인왕산동도 빠지지 않았고, 백악과 응봉 사이 지금의 율곡로 일대도 최고 길지의 하나였다. 남산을 바라보는 풍광이 좋고 터가 넓어 권문세가들이 큰 집을 짓고 교류했다. 이에 비해 남산골은 음지였으나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해 하급관리들이 살 만한 곳으로 쳤다. 고종 대인 1864년부터 1887년까지의 기록인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썼다. 조선 말기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주로 남촌에 어울려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붕당(朋黨)은 제사 모시는 법, 옷고름이나 갓끈 매는 법을 서로 달리 하면서 차별 짓기를 했다. 사화(士禍)가 이 같은 지역색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금의 강·남북 구별 짓기가 무색할 지경이다. ●서촌은 새문안·정동, 상촌이나 윗대로 불러야 서울의 지역색과 구역분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1924년 발행된 개벽 6월호 ‘경성중심세력의 유동’에서 소춘은 “경성은 오촌(五村), 양대, 자내(字內), 오강(五江)으로 나뉜다”라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들어 신분과 계층이 세분화되고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이 정해진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촌은 경조 5부의 지역공간과 겹친다. 양대는 윗대(웃대)와 아랫대로 나뉜다. 윗대는 상촌(上村)이라고도 했는데 경복궁 주변의 육조 관아가 있던 사직동·내자동·당주동·도렴동·체부동·순화동·통의동에 살던 아전이나 겸인, 내시의 거주지를 일렀다. 아전이란 ‘관아 앞에 사는 사람’이라는 조어였고, 겸인은 권문세가의 경호원 또는 비서격이었다. 이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궁을 드나들었다. 인사동을 중심으로 중촌에 살던 중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상촌인은 평민 중에서 각 부의 서리 및 공경가의 겸인이 되는 자인데, 그들은 평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정래교는 ‘임준원전’에서 “경성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얻어먹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때때로 의협 있는 무리가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윗대의 풍속을 평했다. 또 이가환은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이다. 그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한 이 적다”라고 윗대의 지역을 구분했다. 요즘 서촌이라고 부르는 경복궁 서쪽지역이 바로 윗대이다. 일제강점기 옛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강제로 합쳐 만든 새로운 동 이름인 옥인동 쪽으로 흐르는 옥계천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에 빗대 서촌이라고 불렀지만 애당초 잘못된 지명이다. 서촌이란 조선시대 경조 5부 중 돈의문 부근을 지칭하던 지명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경복궁의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고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북촌은 동촌이 돼야 할 판이다. 구태여 새로운 지명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윗대 혹은 상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아랫대(下村)는 중촌과 남촌 중간지대를 지칭하는데 지금의 오간수문~광희문 사이쯤이다.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어영청이나 훈련원 소속 군병들이 주민을 이뤘다. ‘개벽’(1924년 6월)에서 “우대(웃대)는 육조 이하 각사에 소속된 이배, 고직 족속이 살되 특히 다방, 상사동 등지에 상고 통칭 시정배가 살았고…아래대(아랫대)는 각종 군속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대전별간파들이 살고…”라고 구역특징을 설명했다. 황성신문(1900년 10월 9일자)은 “사대부의 말투는 극히 화미절이하며, 북촌 사람들의 말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며, 남촌 사람들의 말투는 빠르며, 상촌사람들의 말투는 공경스러우며, 중촌사람들의 말투는 기민하며, 하촌사람들의 말투는 상스러우며…”라면서 조선말 오촌, 양대사람의 인적특성을 총정리했다. 자내란 한양도성을 쌓거나 보수, 경비하고자 한성부가 담당구역을 정한 구역을 말한다. 천자문의 ‘천(天)자’이면 이 글자가 적힌 구간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했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계란이나 채소, 장작을 팔았고 분뇨를 퍼다가 가축을 키웠다. 오강은 한강과 용산, 서강 등 3강에 마포삼개와 망원을 합해 오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강주민들은 나루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루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공, 짐꾼이거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떼다 파는 기가 센 사람들이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하)

    ●탈아파트 시대, 서울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아파트 전성시대가 저물고 있다. 1970년 서울의 단독주택은 전체 주택의 85% 정도를 차지했다. 40여년이 흐른 2014년 서울은 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이 전체의 85%를 넘는 거대한 공동주택의 도시로 역전했다. 아파트는 물경 60%에 이른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던 아파트의 기세는 밀레니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풀 꺾였다. 전국적으로 단독주택 건설 물량이 2005년 2만 7000여 가구에서 2010년 4만 4000여 가구로 6년 연속 늘어난 반면 아파트 건설 물량은 2008년 41만 5000여 가구에서 2010년 27만 6000여 가구로 내리 3년간 준 것이다. 아파트 중독에서 풀린 사람들이 마당이 있는 대안 주거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국토연구원이 2009년에 실시한 이상적인 주택유형을 묻는 설문조사에 응답 가구의 64%가 단독주택을 원했다.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일수록, 저소득층일수록, 60세 이상 고연령층일수록 단독주택 거주 욕구가 강했다. 아파트는 중소득층이나 30대 이하의 지지를 얻었다. 신한은행이 2011년에 실시한 주거유형 선호도 조사에서도 도시형 생활주택이 30%를 웃돌았고 뒤이어 타운하우스와 단독주택이 각각 25%를 나타냈다. 아파트를 원하는 사람의 비율은 20% 아래로 떨어졌다. 영원할 것처럼 여겨졌던 아파트공화국에 균열이 생겼다. ‘거주기계’(르코르브쥐에) ‘인간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이외수)에 질린 사람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그렇다면 아파트라는 거대한 덩치의 건조물이 지배하는 서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의 아파트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 논문을 ‘아파트공화국’이라는 책으로 펴낸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 교수는 “한국에서 아파트는 재화인 동시에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이며 상징이다. 동시에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어떤 의미에서 투기의 목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파트에 대한 한국인의 열광 역시 이 같은 투기 목적에서 발생한 측면이 크다”라고 한국 아파트의 흑역사를 들춰냈다. 줄레조는 아파트공화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아파트가 서울을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 것이라면서 머지않아 도심의 슬럼화가 진행되고 각종 도시 문제의 온상이 되리라고 예견했다. 아파트가 더는 그들의 구별 짓기를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고 여긴 중산층이 떠나는 순간 아파트는 버려진다고 했다. 이미 여러 연구자가 한국 아파트 문화의 특징은 획일화와 구별 짓기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아파트는 구획화가 가능한 건축적·공간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거주민들은 함께 살기를 거부하며 구별 짓기를 고수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공동체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었다. 서울 사람 열 명 중 여섯 명이 아파트에 산다. 만약 중산층이 서울의 아파트를 떠난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2005년 11월 프랑스 파리폭동의 진원지 방리외가 떠오른다. 대도시의 교외, 변두리를 뜻하는 방리외는 10~20층 고층 아파트와 자급자족 구조의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1960년대 집중적으로 지어졌지만 결국 빈곤층과 이민자들의 소굴로 변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영혼이 없는 거리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이들이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한 그곳이다. 우리의 뉴타운이나 신도시 아파트 단지 위에 방리외가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엄혹했던 군사정권 시절 임명직 서울시장들은 철권 통치자의 명에 따라 서울 곳곳에 아파트 단지를 마구잡이로 조성했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트리오가 관선시대 ‘아파트 입국(立國)’의 주역이라면 민주화 이후 민선 서울시장들도 재건축, 재개발, 뉴타운, 한강르네상스 같은 이름으로 아파트 건설의 전철을 밟았다. 특히 2002년 이명박 시장 시절 입안된 뉴타운 정책은 서울을 아파트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은평, 길음, 왕십리 3곳이 시범 지역으로 지정됐으며 2003년 용산, 한남, 마포, 아현, 동작, 노량진 등 12곳을 추가 지정했다. 뉴타운 정책은 후임 오세훈 시장까지 계승돼 금천, 시흥, 영등포, 신길, 흑석, 노원, 상계 등 11곳이 늘어났다.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도 사실상 압구정, 여의도, 합정, 성수 등 한강변 아파트 재개발 계획이다. 서울 시내 26개 지구 245개 구역에 이르는 뉴타운 사업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는다. 2011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뉴타운은 태생부터 잘못된 것”이라면서 뉴타운과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궤도를 전면 수정했다. 도시 정비라는 핑계로 아파트를 헐어낸 자리에 다시 아파트를 짓는 잘못된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서울시 도시정비사업 40년의 패러다임이 바뀔지 지켜봐야 한다. ●“20년 내 단독주택문화로 바뀔 것”… 新주거혁명 예고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 집은 가정과 사유재산의 보루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세포다. 집은 가치, 권위, 힘, 전통, 미의식을 표현한다. 그리고 집은 고정자산이다. 이용가치뿐 아니라 교환가치를 가진다. 개인의 투자 대상을 넘어 잉여자본이 스스로를 불리는 축적의 공간이다. 근대 이전 우리에게는 비교적 안정된 집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급격한 근대화로 이런 문화는 해체됐다. 재래의 집은 버림받았고 아파트가 등장했다. 시대적·문화적 출처를 달리하는 공간과 기호의 편린들이 도시 공간을 만화경으로 만든다.”(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 지난 40년 동안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는 서울과 서울 사람을 통째 바꿔 놓았다. 입주와 동시에 저비용으로 깔리는 광통신망 덕분에 우리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터넷 보급국이 됐다. 전립선 치료제의 부작용이 대머리에게 발모의 희망을 준 것처럼 아파트 문화가 정보기술(IT) 강국의 핵심 자양분이 됐다. 문단속과 가사부담이 줄면서 여성의 사회진출과 여권신장의 태풍이 일어났다. 아파트 주민은 이해관계 공약에 따라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정치 세력화했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아파트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최고 인기 주거공간으로 뿌리를 깊게 내렸다. 아파트가 주택의 메인 상품이 된 것은 수익성·안전성 그리고 환금성이 확실하게 뛰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차별성이라는 매력을 추가해 갖고 있다. 마치 대입 수능시험이 그러하듯이 아파트는 주거 수준에 관련해 전 국민을 획일적으로 서열화한다. 특히 고급 아파트 거주는 현대 한국인에게 중산층 이상이 되기 위한 일종의 자격증 혹은 스펙 같은 것이 돼 버렸다”고 분석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아파트의 투기·투자 상품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아파트 거주자들은 늘 이사 갈 준비를 하는 삶의 자세로 자신의 거주 지역을 대한다. ‘살 집’(house of live)이 아니라 ‘팔 집’(house of sale)이었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동산 침체 및 주택보급률의 확대는 재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아파트 매력을 반감시켰다. 1인 및 2인 가구의 급속한 증가, 저출산·고령화와 소득증대, 주5일제 근무제 등 사회경제적 변화는 주거문화를 바꿨다. 정부의 주택 정책도 대량 공급보다 다양한 수요 충족으로 전환됐다. 아파트가 서울을 점령한 지 40년 만에 탈(脫)아파트 시대가 온 듯하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 대량공급 방법이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과부족 시대가 끝났다. 주택의 수요 압박이 약화하면서 아파트 선호도가 약화하는 계기가 됐다. 아파트의 시대가 끝났다고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끝나 가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앞으로 20년 이내 현재의 아파트형 주택문화가 서구형 단독주택 문화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거 트렌드의 변화는 새로운 주거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아파트에 대한 로망은 단독주택, 땅콩주택, 외콩주택, 한옥, 동호인주택, 도시형 타운하우스 등 거주자의 개성을 살리는 주거 형태로 옮겨 가고 있다. 주택 소유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졌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닌 ‘사는(live) 곳’으로 변화했다. 2012년 한국갤럽 조사에서 ‘집을 소유하면 좋지만 소유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응답자가 50%에 이르렀고 20대와 30대로 내려갈수록 이용 개념이 뚜렷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에 대한 집착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줄레조의 예견처럼 중산층이 각자의 대안 주택을 찾아 아파트를 떠난 이후가 문제다. 지구상 최대의 아파트 도시 서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그것이 궁금하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 아파트(중)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만든 ‘아파트 공화국’의 흑역사 풍수학자 최창조(전 서울대 교수)가 “이제 모든 국토는 도시다”라고 선언하자 사회학자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사실인즉 우리나라 모든 도시는 아파트이고 따라서 모든 국토가 곧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화답했다. 산비탈과 논두렁, 밭두렁 일색이던 우리 땅이 ‘아파트 천지’로 변했다. 서울을 찾은 외국인의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경관은 산이나 강이 아니라 아파트가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에서 ‘상전금지’(桑田地)가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좋든 싫든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 출신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 두 대통령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작금의 아파트공화국은 박정희·전두환의 의지와 그를 맹신하는 추종자들이 내놓은 합작품이다. 박정희가 기획하고 전두환이 연출했다. 박정희가 ‘아파트지구 지정’을 통해 서울 강남을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했다면 전두환은 ‘택지개발촉진법’으로 대한민국을 아파트 밀림으로 만들었다. 아파트 발전사와 주거사회학, 아파트 문화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주거혁명은 5·16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 오른 1961년 시작돼 5~9대 대통령을 지내고 1979년 10·26사건으로 시해된 18년 동안 진행됐다. 그의 경제이데올로기는 ‘건설입국’(建設入國)이었고 그에 편승해 아파트는 지배적 주거 형태로 등극했다. 보릿고개에서 막 벗어난 신생 대한민국의 목표가 ‘먹는 것’에서 ‘사는 곳’으로 전환된 시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독재자의 선택이었다. 관계 당국의 조건 없는 정책지원과 아파트 건설 업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수직 폭발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의 의식주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많았음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생활혁명이 절실히 요청되는 소이가 있으며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은 이러한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데 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인구의 과도한 도시집중화는 주택난과 더불어 택지가격의 앙등을 가져오는 것이 오늘의 필연적인 추세인 만큼 이의 해결을 위해선 앞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이러한 고층아파트 주택의 건립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입니다.” 1962년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치사 중 일부다. 박정희의 ‘생활혁명론’은 앞으로 집권기간 동안 그침 없이 추진될 ‘아파트 입국’의 미래를 웅변한다. 육사 8기생으로 혁명주체세력의 한 명이었으며 대한주택공사(지금의 LH) 총재를 두 번 지낸 장동운이 아파트 전도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동운은 미국 군사학교 유학시절 잡지에서 본 대단지 아파트 사진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김종필 등 혁명세력에 알렸다. 아파트에 대한 낮은 인지도와 ‘빈민굴’이라는 인식 탓에 그의 추진력과 혁명세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마포아파트 부지 확보와 건설자금 마련 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동운은 두 번째 주공 총재 임기 중이던 1968년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라는 우리나라 아파트건설사에 획을 긋는 대표 작품을 남겼다. 일본신문 광고의 80%를 주택광고가 차지하는 것을 보고 중산층 아파트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사상 첫 모델하우스의 등장과 아파트 분양제도의 도입이라는 신기원을 기록했다. 이후 현대건설 등 민간 건설사들이 뛰어들면서 아파트 건설시장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1994년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도 장동운의 작품이었다. 1970년 박정희에게 외국인 바이어 거주용 아파트의 필요성을 건의하자 박정희는 지도 위에 한남동 외인주택에서 남산공원까지 줄을 쫙 그으면서 “이 선 안쪽으로 아파트를 세우시오”라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남산 중턱에 16층, 17층짜리 초고층 아파트 2개 동 450가구가 들어섰다. 남산 하얏트호텔(지금의 그랜드하얏트서울)은 어부지리로 생겼다. 1972년 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가 건물 옥상에 설치된 대피용 헬기 포트를 시찰하다 눈에 거슬리는 군사시설이 보이자 “철거하고 호텔을 지으라”고 지시한 것이 하얏트호텔의 탄생 비화이다. 개발연대 남산에는 ‘3대 흉물’이 있었다. 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 하얏트호텔이 그것이다. 외인아파트는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으로 사라졌지만, 남산을 병풍처럼 막아선 하얏트와 남산맨션은 건재하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3인 ‘아파트 도시’ 밑그림 혁명세력을 등에 업은 주공이 마포아파트와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의 성공으로 서울에 아파트의 싹을 틔웠다면 꽃은 세 명의 서울시장이 피웠다. 주공은 주공아파트, 서울시는 시민·시범·시영아파트로 독재자의 입맛을 돋웠다. 박정희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서울에 건설바람을 일으킨 김현옥(1966~1970), 양택식(~1974), 구자춘(~1978) 등 세 명의 시장이 재임한 12년 동안 ‘아파트 도시’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김현옥의 시민아파트, 양택식의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잠실주공아파트, 구자춘의 반포아파트가 대표적이다. 김현옥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철거민을 근교로 집단이전시킨 뒤 철거 터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와 1971년 광주대단지 폭동사건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한강변을 아파트 택지로 조성했다. 한강상류에 소양강댐이 건설돼 물난리 걱정이 사라지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으로 강북지역에 대한 안보불안감이 높아진 게 일조했다. 양택식은 김현옥이 벌려 놓은 난제를 꼼꼼히 처리했다. 여의도개발과 시범아파트의 분양 성공은 서울시의 만성적인 재정난을 타개했을 뿐 아니라 아파트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시켰다. 구자춘의 뚝심이 강남을 아파트로 뒤덮게 했다. 1975년 3월 4일 서울시 연두 순시에서 박정희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을 지시했다. “영동이나 잠실을 막연하게 개발하는 것은 서울시의 인구증가 정책밖에 안 된다. 획기적인 방안을 내놔라”라는 것이었다. 구자춘은 시내에 흩어져 있던 고속버스터미널을 반포로 옮기고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것을 결심한다. 관료 출신으로 매사 신중했던 양택식과 달리 군 출신인 김현옥, 구자춘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외에 상전이 없는 듯 행동했다. 관계부처 장관과의 협의나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 관련 절차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허허벌판’ 강남을 아파트지구로 지정하는 일도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권력자의 지시를 받은 지 1년여 후인 1976년 7월 5일 구자춘은 천호대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를 구획정리가 한창인 영동지구로 안내한 자리에서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을 보고했다. 개인의 건축허가 행위가 금지되고 아파트만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설명이 끝나자 대통령은 아파트지구 지정계획이 그려진 도면 위에 특유의 사인을 했다. 이른바 윤허였다. 이때 반포·압구정·청담·도곡·이수·잠실·이촌·서빙고·원효·여의도·화곡 등 11개 지구 236만평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개인의 재산권 침해에 대해 누구도 가타부타할 수 없었고 나머지는 통과의례였다. 10여년 후 11개 지구에는 680개동 5만 가구분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남은 아파트 쑥대밭이 됐다. ●탈아파트 시대 성큼…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박정희의 시대가 지고 전두환의 시대가 왔다. 박정희와 추종자들의 아파트 입국 노력은 1980년대 전두환 시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서슬 퍼런 국보위를 통해 주택 500만호 건설이라는 경천동지할 공약을 내놓았다. 1981년부터 10년간 3조 6000억원을 투입해 아파트 151만호 등 주택 500만호를 짓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존재하던 대한민국 주택의 총량이 500만호였으니 그 배포를 짐작할 만하다. 공약을 시행하는 수단인 택지개발촉진법이 1981년 시행됐다.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관통한 아파트를 위한, 아파트에 의한, 아파트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택지개발촉진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정 공포된 6000여개의 법률 중 가장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법률”이라고 평가했다. 택지개발예정지구라는 이름으로 어떤 땅이나 수용해 택지로 개발할 수 있고, 다른 법과 처분의 적용이 일체 배제되는 법이다. 이후 20년 동안 1억 1380만평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됐다. 이 시기 남아 있던 모든 녹지는 택지로 변했다. 개포·고덕·목동·상계·중계지구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전두환의 ‘주택 500만호 건설’과 노태우의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에서 ‘주택’이란 아파트의 다른 이름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예의 ‘아파트 해법’으로 주택수요를 충족시켰다. 나아가 부의 축적과 차별적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중산층의 욕망을 채워줬다. 아파트 건설 업체들도 재벌그룹으로 성장하도록 배를 불렸다. 그 결과 우리나라 주택 열 채 중 여섯 채가 아파트로 둔갑했다. 고밀도 초고층 아파트 덕분에 2008년 주택보급률 10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집 부족에서 벗어나는 대역사가 이룩된 셈이다. 아파트는 고질적인 주거문제를 해결했지만 저출산·고령화와 나홀로 가구의 증가 등 산적한 문제 앞에 노출돼 있다. 아파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국보 1호’ 유지 혹은 포기의 함정/노주석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국보 1호’ 유지 혹은 포기의 함정/노주석 선임기자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영혼이 없다 못해 참 나쁜 문화재청이다. 국보 1호 숭례문 해제와 교체를 둘러싼 잦은 말 바꾸기 때문이다. 취임 3개월을 앞둔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지난주 “숭례문을 국보 1호로 유지할지, 포기할지에 대해 국민의 뜻을 묻겠다”라고 밝혔다. 공론화라는 절차와 연말쯤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해제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 행간이 읽힌다. 5년여 전 숭례문 복원에 들어가면서 전통방식으로 복원해 국보 1호로 유지하겠다고 큰소리쳤고, 올 초 파행이 드러나기 전까지도 국보 1호 유지에 이상 조짐이 없던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짝퉁 숭례문’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숭례문 파행 복원에 대한 목하 국민적 염증으로 볼 때 국보 1호 유지가 어렵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5년 3개월 동안 277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문화재청장이 바뀌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전가의 보도처럼 국보 1호 해제카드를 꺼내 드는 것이 속 터질 뿐이다. 숭례문 국보 1호 유지는 ‘죽은 자식 나이 세기’와 다름없다. 2008년 2월 숯검정으로 변했을 때 숭례문은 장렬하게 숨을 거뒀다. 숭례문 전소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었다. 국보 1호 무용론, 국보 1호 교체론에 대한 항의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제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숭례문을 국보 1호, 고니시 유키나가가 들어온 흥인지문은 보물 1호로 각각 지정했다고 주장해 상처를 입혔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숭례문이 숯덩이로 변하기 한 달 전 국보 1호 해제를 공개리에 진행했다. 그때 문화재청은 국보와 보물의 지정번호를 없애는 방향으로 문화재 등급 및 분류체계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했었다. 그전에는 또 어땠나. 1996년 교체논의가 처음 제기됐을 때 문화재위원회 심의 끝에 부결됐지만, 불씨는 살아있었다. 2005년에는 감사원까지 나서서 국보 1호와 보물 1호 교체의견을 냈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라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문화재청장이 교체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때를 놓쳤다. 흐지부지됐다. 해제 및 교체여론은 여전했지만, 숭례문 화재로 냄비가 펄펄 끓자 꼬리를 내렸다. 쏙 들어가버렸다. 오히려 전통방식으로 복원해 국보 1호를 유지하겠다는 엉뚱한 처방전을 내놨다가 문제를 키웠다. 다시 국보 1호 해제여론에 기름을 부은 신임 문화재청장의 평소 소신이 무엇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 차제에 국보와 보물의 일련번호를 없애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발언이 좀 과한 것 같아 걱정이다. 오버하지 말기 바란다. 국보 1호 교체면 충분하다. 전선을 확대하지 말고 한 가지에 집중하되, 여론에 기대 시간 보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답은 나와 있다. 만신창이가 된 숭례문엔 정말 미안하지만 올 것이 왔다. 국보 1호 해제와 교체에 대한 공론화를 당장 본격화하라. 그것이 상처 입은 숭례문을 위하는 길이다. 누구도 입을 댈 수 없는 ‘진품’ 국보 1호를 보고 싶다. joo@seoul.co.kr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얼음과 불의 땅’ 아이슬란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얼음과 불의 땅’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에 대한 오해 풀기 “아이슬란드에 간다”고 했더니 다들 혀를 찼다. “다녀왔다”고 했더니 머리를 흔든다. 왜 그럴까. 그런 험한 곳엘 왜 가느냐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이슬란드는 전체 면적의 20% 정도가 빙하지대일 뿐인데 ‘얼음의 땅’이라는 나라 이름 탓에 적잖은 불이익을 받는다. 진짜 얼음에 뒤덮인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섬이자 이웃인 그린란드의 국명은 ‘녹색의 땅’인 데 비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언제부터인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 보자. “춥지 않을까?” 대부분 아이슬란드는 북극권에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지도를 보면 남한 면적의 아이슬란드에서 북극권(북위 66도32분선)에 속하는 지역은 펭귄을 닳은 귀여운 새 퍼핀이 사는 최북단의 작은 섬 그림세이가 유일하다.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오히려 따뜻하다. 지난 2월 중순 아이슬란드의 평균 기온은 영상 3~5도였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한다면 추위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 “멀지 않을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아이슬란드는 스코틀랜드의 머리 위에 있고, 노르웨이와 그린란드의 사이에 있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중간쯤이다. 수도 레이캬비크는 양 대륙의 웬만한 도시와 거미줄같이 연결돼 2~3시간이면 닿는 허브도시다. 다양한 저가항공이 연중 운항 중이다. 다만 국내에는 직항이 없어 코펜하겐이나 헬싱키, 런던 등에서 갈아타야 한다. “볼 게 있을까?” 겉은 빙하로 뒤덮여 있지만 속은 펄펄 끓는 얼음과 불의 제전이 만들어 낸 대장엄의 세계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무가 없는 툰드라 지형이 빚은 벌거숭이 민둥 바위산은 신기원의 뷰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암흑의 모르도르 같은 분위기다. 30여개의 활화산과 780여곳의 온천, 헤아릴 수 없는 폭포가 오감을 만족하게 한다. 빙하를 체험하거나 영화 ‘프리 월리’의 범고래 케이코의 고향을 탐조할 수 있다. 애완견 같은 아이슬란드 토종 말 타기와 밀크블루의 노천온천이나 오로라 구경은 덤이다. 서구에서는 아이슬란드를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가 지키는 지옥의 문으로 여긴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쓴 쥘 베른의 또 다른 작품 ‘지구 속 여행’의 무대이며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2008년 영화화됐다. 영국 BBC 방송이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여행지 50곳’을 선정했는데 유럽 6곳 중에서 아이슬란드(44위)는 베네치아(18위), 파리(27위), 로마(35위), 바르셀로나(37위)에 이어 다섯 번째였고, 마터호른(46위)이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케이블TV에서 방영 중인 ‘왕좌의 게임’의 원작도 아이슬란드에서 모티브를 얻은 판타지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다. 레이캬비크 시내에서는 서울 못잖은 문화 예술의 향연과 쇼핑과 외식이 기다리고 있다. 바이킹의 피를 타고난 남자들은 멋지고, 금발 북구 여인의 미소와 물가는 살인적이다. 극야의 밤은 깊고 푸르다. 인구는 30만명에 불과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겪기 전 한때 세계 최고의 국민소득을 자랑하던 선진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행복지수 1위다. 영어 사용이 자유롭다. 링 로드(해안일주도로)를 벗어나면 거친 오프로드가 기다리는 젊은이들의 배낭여행 천국이기도 하지만, 온천의 휴식과 장엄한 자연경관 보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의 여행지로 더 적격일 수도 있다. ●레이캬비크 시내와 ‘골든 서클’ 둘러보기 ‘골든 서클’이란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대자연을 음미할 수 있는 핵심 여행지 3곳을 이른다. 성지(聖地) 싱벨리어 국립공원, 지하의 뜨거운 물과 수증기가 지표면을 뚫고 최고 60m 높이로 솟아오르는 게이시르와 환상의 3단 폭포 굴포스 등이다.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출발해 한나절이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다. 수도에서 동쪽으로 23km 떨어진 싱벨리어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AD 930년 아이슬란드인의 조상인 바이킹이 의회의 효시 ‘알싱’을 세웠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지질학적으로 유라시아판과 아메리카 대륙판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이시르는 간헐천(Geyser)이라는 영어 단어를 낳은 ‘원조 간헐천’이다. 굴포스는 빙하 녹은 물이 32m 아래로 떨어지면서 나이아가라 폭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장관을 연출한다. ‘세상 끝의 수도’ 레이캬비크는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3이 모여 사는 메트로폴리스다. 백미는 용암분출로 만들어진 검은 폭포를 형상화한 할그리무르교회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미 대륙을 발견한 ‘전설의 바이킹’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의 동상이 교회 앞을 지키고 있다. 언덕을 내려가면 동화 같은 상점과 카페가 번화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정부청사와 시청사는 우리나라 구청이나 동사무소 같은 작은 규모지만 시청 옆 호수에는 백조가 노닐고 2월의 햇살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붐볐다. 항구에 정박한 푸른색 유리 배처럼 보이는 하르파 콘서트홀은 빌바오의 구겐하임 박물관에 비견되는 걸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고 공사비는 더 많이 들어갔지만 외양이나 효율성의 격이 떨어지는 서울시청사를 가진 한국인 관광객을 부끄럽게 만든다. 바이킹 배를 형상화한 ‘태양원정대’ 조형물과 함께 도시를 북구의 예술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다. 1986년 10월 11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옛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만나 지긋지긋한 동서냉전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담판을 벌인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장도 피오르가 그림같이 펼쳐진 항구를 배경으로 서 있다.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쪽으로 40분쯤 달리다 보면 그린다빅이 나온다. 이 나라에서 쓰는 에너지의 60% 이상을 만들어 내는 지열발전소의 굴뚝과 거무튀튀한 현무암 석호 무더기에서 뿜어 나오는 자욱한 수증기가 말해 주듯 세계 5대 온천으로 꼽히는 거대한 노천 해수온천 블루라군이다. 펄펄 끓는 지하수를 끌어다 발전에 쓰고 물을 식혀 온천수로 제공한다. 형광 빛을 띤 우윳빛 온천수는 흡사 물아래에서 푸른 조명을 쏘는 듯하다. 몸이 물에 뜰 정도로 미네랄이 풍부하고 발바닥에 밟히는 하얀 진흙은 피부 미용에 최고다. ●활화산과 빙하의 조우 설원의 여명을 뚫고 떠오른 오렌지색 태양은 해탈의 경지 그 자체다. 인간의 흔적이라곤 실 가락 같은 왕복 이차선 도로와 전기를 머리에 인 전신주 세 가닥뿐이다. 남쪽 해안으로 난 링 로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의 형상을 한 헤클라화산이 나타난다. 8세기에 처음 불을 뿜은 이후 1104년 바이킹촌락을 사라지게 했고, 1970년 이후 10년 단위로 모두 15번 폭발한 아이슬란드의 심장이다. 중간 기착지 비크로 가는 길에 헤클라화산 남쪽의 나지막한 빙하가 석양에 물들어 신비한 자태를 보인다. 2010년 4월 14일 폭발해 전 유럽 공항을 2주일가량 마비시킨 에이야퍄들라이외퀴들이다. IMF 금융위기와 함께 아이슬란드를 유명하게 한 장본인이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화롭기만 하다. 비크는 100여 가구가 사는 그림엽서 같은 마을이다. 화산암이 풍화된 ‘블랙비치’가 거대한 아스팔트 활주로처럼 펼쳐졌고, 거대한 오르간 같은 바위와 외돌괴가 바다 위에 떠 있다. 미국의 한 여행잡지에 의해 세계 10대 해변으로 선정된 절경이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에서 요쿨사를론까지 100km는 빙하드라이브 길이다. 바트나요쿨의 촉수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아이슬란드어로 ‘바트나’는 물, ‘요쿨’은 빙하를 뜻하는데 빙하가 바다로 떠내려가는 장소라고 이해하면 된다. 요쿨사를론은 빙하호수인데 손을 씻을 수도, 발을 담글 수도 있다. 바다로 떠밀려 가다 해변으로 조난당한 빙하의 정박지다. 빙하를 뚫고 나온 용암이 흐른 길을 따라 걷는 빙하 트레킹이나, 빙봉 턱밑까지 모터 스키를 타고 가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 중이다. 아이슬란드에는 역사도 종교도 뛰어넘는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있다. 무엇을 보든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이런저런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거나, 세상사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떠나라.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손때 타지 않는 자연과의 조우를 통해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지상 최후의 유의미한 여행이 될 것이다. 글 사진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노주석 선임기자 joo@seoul.co.kr ■문의 유로타임 02-778-3933 eurotime@eurotime.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서울은 넓고 그리고 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장기연재한 ‘서울택리지’가 서울의 윤곽을 더듬는 도시학적 탐사였다면 이번에 후속으로 선보이는 ‘서울택리지-테마기행’은 서울의 속살을 찬찬히 살펴보는 풍물적 탐사의 성격을 띨 것입니다. 먼저 세계 최고,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서울의 아파트와 아파트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어 서울의 극장, 백화점, 호텔, 공원, 시장의 명멸사(明滅史)를 추적할 작정입니다. 서울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상가와 지하도, 고가도로와 육교의 부침이나 한강 다리와 나루의 변천도 들여다보기의 대상입니다. 물난리와 하천복개, 전차, 판자촌과 달동네, 다방·댄스홀 같은 유흥업소에 얽힌 흘러간 추억도 되새김해 볼만할 겁니다.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이내믹이 지배하고 있는 서울의 변화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어쩌다 아파트가 서울의 압도적 주거문화가 됐을까 아파트는 서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한국사회를 읽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사람 열 명 중 여섯 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고, 서울 도시경관을 아파트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성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교수가 2007년에 출간한 ‘아파트 공화국’은 파리의 아파트가 아니라 서울의 아파트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줄레조는 1990년 서울 방문길에서 공룡처럼 군림하고 있는 아파트와 아파트단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서울의 아파트’를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주제로 선택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의 아파트 건설 이유와 한국인들의 아파트에 대한 열망을 분석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0년 넘게 걸린 긴 조사과정을 통해 그녀는 왜 아파트가 서울의 지배적인 주거형태가 됐으며, 한국의 중산층은 왜 아파트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이방인의 눈에는 희귀한 이상현상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은 덤덤했다. “그런 것도 연구대상인가”라는 조롱 섞인 핀잔을 극복하고 줄레조는 200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아파트문화 분야연구의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받는다. 유수 기관들이 그녀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다. 줄레조의 의문에 한국사람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서울은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의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우리가 알고 생각하는 대로다. 그러나 줄레조의 연구결과는 달랐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압축된 현대성’(compressed modernity)의 반영이었다. 아파트는 돈이나 주식과 비슷한 환금성을 가진 재화인 동시에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0~80년대 산업화를 담당한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중산층이 맺은 ‘3각 동맹’이 아파트를 상위 계급화했다고 주장한다. 아파트는 서울사람, 나아가 한국인 욕망의 상징이며 3각 동맹이 건재하는 한 아파트에 대한 환상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아파트와 아파트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비평한다. 영화평론가 이형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집의 역사’와 다름없다”라면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갖는 것을 중산층 평균적 삶의 실현으로 봤다. 주거지역과 평형, 아파트 건설회사의 브랜드가 신분을 드러내고, 재개발이나 뉴타운 공약이 선거 판세를 좌지우지하고, 아파트 정책이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2004년에 출현한 초고층 최첨단 주상복합 아파트는 또 다른 성공과 신분을 상징하는 ‘욕망의 바벨탑’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칼럼리스트 우석훈도 줄레조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중산층의 욕망과 개발독재의 획일성이 결합된 부동산정책과 아파트공화국의 파국을 예고했다. ‘아파트 한국사회’를 펴낸 건축가 박인석(명지대)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고 비판의 대상을 좁혔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담장을 둘러친 ‘단지’가 문제라는 인식이다. 그는 아파트를 열악한 도시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私設) 오아시스’라고 명명하면서 오아시스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임대아파트 단지, 분양아파트 단지, 주상복합아파트 단지처럼 아파트 단지가 재산가치에 따라 계급화하면서 계층적으로 폐쇄성을 띤다고 보았다. ‘단지 해체’가 왜곡된 아파트문화를 바로잡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충정아파트부터 와우아파트까지… 아파트의 부침 아파트가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였다. 일제는 회현동에 3층짜리 공동주택(미쿠니아파트)을 지은 데 이어 1932년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충정아파트(도요타아파트)를 지었다. 혜화동과 적선동 등에도 아파트가 선보였다. 주로 일본인 임대·거주용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당장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아파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 건축물이었다. 이 아파트는 한때 호텔(트레머호텔, 코리아관광호텔)로 개조됐다가 다시 아파트(유림아파트)로 되돌아갔다. 1979년 충정로 8차선 확장으로 건물 절반이 뜯겨나가는 곡절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지난해 충정아파트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공인, ‘100년 후의 보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정부 수립 이후 지어진 최초의 민간아파트는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세운 종암아파트였다. 17평짜리 4층 건물에 152가구가 살았다. 정식명칭은 ‘종암 아파트먼트 하우스’였지만 ‘종암아파트’로 줄여 부르면서 ‘아파트’라는 용어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잘나가는 기업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입주했으며 최초의 옥내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장안의 화제였다. 특히 양변기로 대변되는 화장실 문화의 대혁명을 알린 옥내 좌식화장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 해괴망측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온돌이 깔린 침실이 현관이나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은 특이한 구조였다.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도화동 삼성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사이에 아파트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입주 초기 연탄보일러 중독사고가 연발하고 부유층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주변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격리시키는 ‘자폐적 공간’을 조성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세계 유일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모델등장이었다.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유입은 주택난을 부채질했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의 산비탈과 국공유지변 하천부지를 꽉 메운 토막집과 판잣집을 밀어내고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지은 낙산 시민아파트 등 대부분 시민아파트는 경관훼손 사례로 낙인 찍혀 1990년대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현옥 시장(1966~70년 재임)이 주도한 시민아파트는 본래 철거민 수용용이었다. 시민아파트 1호는 천연동 금화아파트였다. 한 서울시 공무원이 해발 203m의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짓는 이유를 묻자 김 시장은 “이 바보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볼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전해진다. 1968~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는 어김없이 산허리 또는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그래서인지 경관 하나는 끝내주는 금화아파트는 아직도 살아남아 개발연대기의 암담함을 나타내는 영화촬영장으로 쓰인다.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 뚫린 물길은 막을 수 없었다 도심재개발 차원에서 이뤄진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롯데백화점 청량리점)는 요즘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격이다. 특히 세운상가 아파트는 1960년 후반부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1970년대 초까지 상한가를 쳤다. 18~25평의 작은 평수였지만 대규모 상가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이 아파트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했다. 사대문 안에 밀집된 직장에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상류층 집결지였다. 세운상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으로 알려졌던 ‘종삼’과 무허가 판자촌 철거로 얻어진 1만 3000평의 공지 위에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까지 무려 1km를 8개의 건물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심의 괴물이었다. 아파트의 고급화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처음 시도됐다.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에 지은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첫 호화 아파트였다. 시민아파트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으려고 ‘아파트’ 대신 ‘맨션’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계약 1호는 27평형을 구입한 탤런트 강부자였다. 고은아, 문정숙, 패티 김 등 연예인들이 줄지어 입주했다. 분양이 대박 나자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장동운 주공 총재에게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현대를 비롯한 대형 건설업체들이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1970년 4월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위기를 맞았지만 뚫린 물길을 막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의 문턱을 막 넘어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역사는 누구 편도 아니다/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역사는 누구 편도 아니다/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역사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국사 교과서 논란이 풀린다. 임진왜란을 예로 들어보자. ‘임진년(1592년)에 왜구들이 일으킨 난리’가 우리식 해석이다.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쯤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지만 소수의견에 머물렀다. 왕이 중국으로 도망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과 일본인을 우습게 아는 한국인의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이다.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일본과 중국은 어떻게 볼까. 일본은 임진왜란을 ‘문록·경장의 역’이라고 부르는데 문록·경장은 당시 일왕의 연호이다. 문제는 정벌을 뜻하는 역(役)이라는 용어이다. 이 명칭에는 조선을 혼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리가 세종 때 이종무의 출병을 ‘대마도 정벌’이라고 부른 것과 대동소이하다. 중국의 임진왜란에 대한 명칭은 ‘항왜원조(抗倭援朝)전쟁’이다. 왜구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뜻이며, 중국이 6·25전쟁을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북한)을 도운 ‘항미원조(抗美援朝)의 전쟁’이라고 명명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역사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신대륙 발견’이나 ‘십자군 전쟁’은 유럽식 역사인식의 전형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착륙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1300만명의 원주민이 버젓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 처지에서는 총으로 무장한 ‘백색 괴물’의 침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기독교 측이 벌인 9차례의 십자군 전쟁에서도 이슬람 측 시각은 철저히 무시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역사교과서 역사왜곡도 마찬가지 아전인수격 해석의 소산이다. 역사를 읽는 방식이 중요해졌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E H 카가 갈파한 역사인식은 구닥다리가 됐다. 적어도 키스 젠킨슨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식의 역사읽기에 적응해야 ‘지진아’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젠킨슨은 역사를 과거의 실체적 진실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역사란 역사가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과거에 대한 일종의 재구성일 뿐이며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산물로 보았다. 역사가가 전달하는 것은 승자의 역사이며 자신의 시각이다. 한 가지의 역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상대적인 역사의 가치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것이 고교 국사 교과서를 검정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국정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본다. 검정교과서의 독보다 국정교과서의 독이 더 해로울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역사를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역사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누구’를 위한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다면 여럿의 처지가 반영된 다양한 역사가 낫다. 조금 혼란이 있더라도,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취사선택이 가능한 다양함이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국사 교과서 검정과 체제 개편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논란에 함몰돼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역사의 다양한 시각과 행간을 읽는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줄 수 있을지에 집중해야 한다. 지식전달보다 역사를 판단하는 시각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 joo@seoul.co.kr
  • [인사]

    ■서울신문 ◇승진 <국장급>△독자서비스국 부국장 겸 공보전략1부장 정치록△논설위원 정기홍△편집국 사회2부 선임기자 노주석△편집국 정치부 선임기자 이춘규<부국장급>△사업단 부단장 박현갑△사업단 투자개발부장 김철홍△경영기획실 인사부장 류기혁△논설위원 진경호△편집국 산업부장 최용규△독자서비스국 공보전략2부 부장급 박종덕△광고국 광고제작팀장 김영환△광고국 광고제작팀 부장급 이경수△제작국 제작지원부장 양승현<부장급>△편집국 편집2부 김은정△경영기획실 인사부 이장훈△경영기획실 재경부 윤상윤△독자서비스국 독자지원부 이경옥△사업단 문화사업부 고은영△제작국 편집제작부 이현희<차장급>△경영기획실 총무부 김선희 △경영기획실 설비팀장 한명구△편집국 사회2부 한상봉△독자서비스국 공보전략1부 박근성△광고국 영업2부 김윤근△사업단 BTL마케팅부 박홍규△온라인뉴스국 온라인뉴스부 신성은△제작국 윤전부 이남윤 서승필 서기석△제작국 기술관리부 CTP운용팀 백의철◇전보△편집국 국제부 차장 이창구△문화부 차장 최여경△온라인뉴스국 온라인뉴스부 의학전문기자 심재억 (2014년 1월 1일자) ■외교부 ◇국장 <국립외교원>△외교안보연구소 경제통상연구부장 신성원△기획부장 윤상수◇과장 <담당관>△기획재정 정병하△감사 김병권△창조행정 장서익△정보화 강근형△의전행사 박영서<과장>△동북아2 강상욱△동북아3 정영수△북미1 임상우△서유럽 김재휘△중동1 김은정 ■안전행정부 △전자정부국장 박제국◇부이사관 승진△민원제도과장 김형만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 공공보건정책관 권준욱 ■국세청 ◇부이사관△중부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 김대지△광주지방국세청 조사1국장 김세환△국세청 김용준 이은항 신수원 최정욱 ■서울시 ◇과장급 <담당관>△사회혁신 배형우△인권 김태명△시민소통 김진만△기획 김태균△예산 한영희△평가 송정재△국제교류 정환중△여성가족정책 박종수△외국인다문화 윤희천△감사 강석원△경영감사 임동국△조사 권해윤<반장>△해외도시협력 이수연△도시재생추진 이정화△건설공정개선 한선희<과장>△경제정책 이해우△소상공인지원 배현숙△투자유치 김정선△민생경제 정광현△노동정책 이병수△복지정책 엄의식△희망복지지원 정진일△동물보호 박범△환경정책 강필영△친환경교통 강희은△체육진흥 오제성△재무 김홍기△학교지원 김영성△평생교육 김정호△주택정책 최경주△공원녹지정책 최현실△공원조성 오순환△생활보건 이상례△보도환경개선 송상영△도로계획 형태경△물재생계획 이진용△공공디자인 양용택△지구단위계획 김승원△공동주택 박경서△주거재생 안재혁△건강증진 유정애<협력관>△농수산식품공사 이재덕△서울메트로 양현모△시설관리공단 정경효<소장>△서부공원녹지사업 신시섭△동부공원녹지사업 이춘희△난지물재생센터 정흥순△강북아리수정수센터 박기석△광암아리수정수센터 이철해△서부도로사업 김만수△품질시험 최진선△남부도로사업 최동필△강서도로사업 변봉섭△남부도로사업 민승기△강서도로사업 이규상△농업기술센터 김영문△중부수도사업 안운길△북부수도사업 이종백△남부수도사업 전영석△강남수도사업 김광식△강동수도사업 원응연△구의아리수정수센터 오세영<직무대리>△시민봉사담당관 원권식△장애인복지정책과장 윤재삼△장애인자립지원과장 고경희△택시물류과장 김규룡△기후대기과장 최영수△생활환경과장 박희균△디자인정책과장 유보화△38세금징수과장 임출빈△교육격차해소과장 이해선△강서수도사업소장 이상래△서울시립대 교무과장 임원빈△서울시립대 기획담당관 박영헌△인재개발원 인재양성과장 기봉호△서울시립미술관 경영지원부장 이성규△뚝도아리수정수센터소장 김동기△자원순환과장 최홍식△마곡조성담당관 한민희△한옥조성추진반장 윤호중<파견근무>△서울장학재단 김영기<관리장>△하천 한유석<지방기술서기관>△임창수<행정국>△구종원 변태순 김영란 전명수 박형중 강선섭 최원석 양완수 김혜정 조조익 이구석 박동석 김재진 김철수 정영준 심동섭 이종만 이인근 하종현 신중수 이계섭 국승열 권영찬<도시기반시설본부>△건설총괄부장 강홍기△도시철도설비부장 정찬웅△토목부장 노우성△도시철도토목부장 이은상△건축부장 이병석△도시철도공무부장 한동근<상수도사업본부>△경영관리부장 이대현△요금관리부장 이종욱<한강사업본부>△총무부장 서영관△운영부장 조원준△시설부장 차광재<서울시립대>△총무과장 성문식<인재개발원>△인재기획과장 박기용<서울역사박물관>△경영지원부장 김소영<구청>△관악구 이재철△구로구 이정휴△성동구 안대희△광진구 김홍길△동대문구 이덕기△도봉구 이재홍△강동구 김길남△송파구 박효석△서대문구 이명균△도봉구 이재홍△성동구 안대희△강동구 김길남△노원구 백종년<보건환경연구원>△대기부장 어수미 ■부산시 ◇2급△창조도시본부장 이종원△국방대 교육훈련 파견 김영환◇3급△감사관 김경석△기획재정관 김광회△안전행정국장 이갑준△복지건강국장 송근일△상수도사업본부장 성덕주△부산시 이병석 조성호△인재개발원장 김영기△문화체육관광국장 신용삼△건설방재관 우정종△대변인 이병진<교육훈련 파견>△중앙공무원교육원 안종일△지방행정연수원 박중문<부구청장 요원>△동래구 송성재△북구 정수현△연제구 정영노△사상구 이경희 ■대구시 ◇국장급△문화체육관광국장 서상우△세계물포럼지원단장 진용환△정책기획관 구본근△상수도사업본부장 권태형△총무인력과 김대권 김철섭 배기철 ■대전시 ◇3급 승진△인재개발원장 이중환△건설관리본부장(직대) 윤기호△정책기획관 정관성△총무과(고위정책과정 파견) 박용재◇3급 전보△문화체육국장 김상휘△상수도사업본부장 김영호△총무과 강철식(고위정책과정 파견) 이강혁(국방대 파견) ■울산시 ◇2급 승진△경제통상실장 허만영◇3급 승진△감사관(개방형) 이영우△기획관 정호동△총무과 장한연(교육파견) 임상진(교육파견) 김문규(전국시도지사협의회 파견)△도시국장 조한희◇3급 전보△안전행정국장 김선조△상수도사업본부장 이종환◇인사교류 <3급 전출·부구청장 요원>△중구 김지천△북구 곽상희 ■충남도 ◇3급 전보△경제통상실장 이필영△농정국장 김돈곤△환경녹지국장 채호규△내포신도시건설지원본부장 공범석△공무원교육원장 정효영△황해경제자유구역청 투자유치본부장 정병희△서산시 김영인△아산시 강익재△충남문화재단 파견 최운현△충남발전연구원 파견 추한철△공로연수 파견 김석중◇3급 승진요원 <직무대리>△복지보건국장 김현규△건설교통국장 이현우△해양수산국장 조한중△정책기획관 오세현<교육 파견>△지방행정연수원 이상영 조경연 맹부영 ■강원도 △경제진흥국장 최중훈△강원테크노파크 행정지원실장 이태은△총무과 안계영 허해구(교육입교) 전용수(교육입교)△기획관 김한수△강원도의회 의사관 김두식△동계올림픽추진본부 건설추진단장 최기호<강원발전연구원>△정책연구위원 조광수△평생교육진흥원 설립추진단장 윤순근<직무대리>△동해안경제자유구역청 행정개발국장 최형규△문화관광체육국장 유재붕△농축산식품국장 고윤식 ■국민체육진흥공단 ◇실장△홍보비서실장 주정돈△감사실장 이명호△경영지원실장 오장수△기념사업실장 이성철◇스포츠산업본부△투표권사업실장 김인하◇경륜·경정사업본부△사업전략실장 김윤수△대전지점장 허정석△경정관리실장 선종채◇체육과학연구원△행정지원실장 이태현 ■KOTRA ◇처장 승진△조직망지원팀장 권용석△쿠알라룸푸르무역관장 김상묵△동남권KOTRA지원단장 전병제△공공조달팀장 김기중△암만무역관장 조은호△홍보실장 양국보△투자총괄팀장 노철△리야드무역관장 김형욱△취리히무역관장 한상곤 ■한국조폐공사 ◇하부기관장 임용△ID본부장 성낙근◇1급 <승진>△해외사업1단장 이혜복△ID본부 생산처장 김기동<전보>△노사협력부 이종일 ■한국은행 ◇승진 예정 <1급>△법규실 이희원△비서실 정상돈△전산정보국 전경진△경제통계국 조용승△거시건전성분석국 신호순△통화정책국 김남영△외자운용원 강성경△경제연구원 정규일△감사실 신수용△전북본부 박진욱△북경사무소 오인석 ■한국도자기 ◇승진△부사장 민경혁
  • [인사]

    ■서울신문 △편집국 부국장 주병철 송종길△사업단 부단장 박현갑△사업단 수석기획위원 육철수△온라인뉴스국 부국장 임창용△논설위원실 논설위원 박홍환 박찬구◇부장 <편집국>△편집1 이경숙△편집2 김중열△정치 오일만△정책뉴스 김경운△국제 이순녀△경제 김성수△사회 이종락△체육 최병규△사진 남상인<온라인뉴스국>△나우뉴스 권혜정△온라인뉴스(연예·영상팀장 겸임) 김태균◇선임기자△편집국 김인철 김주혁△편집1부 손석구 이호준△문화부 함혜리 유상덕△사회부 임태순△사회2부 노주석◇전문기자△편집2부 박주목 장상옥△국제부 이기철△경제부 안미현△정보지원팀 김명국 ■특허청 ◇과장급 승진△정보고객지원국 등록과장 정익△특허심판원 심판관 김춘석 백온기 정성중 조병도◇과장급 전보△특허심판원 심판관 전승철 ■서울시 ◇국장급△도시교통본부장 김경호△상수도사업본부장 남원준△인재개발원장 문홍선△도시안전실장 조성일△산업경제정책관 정수용△문화체육정책관 황치영△서울시립대 행정처장 강병호△도시철도국장 김준기△보도블록혁신단장 정유승<직무대리>△기후환경본부장 장혁재△도시기반시설본부장 천석현△정책기획관 주용태△경영기획관(채무감축추진단장 겸임) 김상한△국제교류사업단장 유연식△일자리기획단장 김의승△복지정책관 최홍연△교통운영관 서성만△상수도사업본부 부본부장 정득모△상수도연구원장 구아미△시설안전정책관 정시윤△주택건축정책관(임대주택추진단장 겸임) 한규상 ■국민연금공단 ◇본부 부서장·부장△4대사회보험정보연계센터장 임병환△기획조정실 김창균△총무지원실 권대식△고객지원실 김철환 이여규△연금급여실 김정희△장애인지원실 이기현 이인태 형용욱△정보시스템실 이태갑 최병섭△감사실 정원영△기금운용본부 이재영△장애심사센터 김현성 류정영△국제협력센터 김영일△기초연금실무추진단 최우용◇지사장 전보△천안아산 안향문△용산 김학기△마포 박희곤△춘천 손정락△안양과천 김홍성△군포의왕 이창△광명 박상규△시흥 최호열△북대전 최재붕△옥천 김중희△충주 이경구△공주 유인규△홍성 조성규△진안 김기영△익산군산 최희정△정읍 김정후△안동 이재수△구미 김청태△중부산 장통령△동래금정 이정호△통영 이종회△진주 조영진△거창 우성봉 ■K-water(한국수자원공사) ◇본부장△미래기술안전 황필선△해외사업 양해진△경인아라뱃길사업 윤보훈△수도권지역 최재웅△강원지역 윤병훈△충청지역 김진수△전북지역 고양수△광주전남지역 배상식△경남부산지역 안효원△시화지역 노명근◇원장△K-water교육 권형준△K-water연구 최병만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지원총괄 전무 임광호△기획조정팀장 홍승일△경영지원팀장(경영지도팀장 겸임) 이창섭△글로벌협력파트장(커뮤니케이션앤브랜드파트장 겸임) 박소영◇중앙일보△대기자 전무 박보균△부발행인(제작총괄 전무 겸임) 김교준△중앙일보·JTBC 광고사업총괄 전무 민병관△대기자 상무보 김진국△논설주간 상무보 이하경△마케팅본부장 상무보(중앙엠앤씨 대표 겸임) 김종혁△편집국장 최훈△수석논설위원 이철호△논설위원 오영환△선데이편집국장 남윤호△통일문화연구소장 강영진◇JTBC△대표이사 사장 김수길△대표이사 부사장 홍정도△경영지원총괄 부사장 반용음△편성실장 전무(QTV 대표 겸임) 김영신△보도총괄 상무보(보도국장 겸임) 오병상△제작총괄 상무보 김시규△심의실장 고윤희◇제이콘텐트리△대표이사(내정) 전무 조인원△m&b부문 1본부장 상무 김수근△m&b부문 2본부장 상무 오구석△경영지원실장 안성호◇관련회사 대표△허스트중앙(상무) 윤경혜△중앙북스 노재현△미주 뉴욕법인(전무) 한상진△중앙일보미디어플러스 이양수△에이프린팅 고대훈△미주 워싱턴법인 배종육◇중앙일보시사미디어△이코노미스트 포브스본부장 김광기◇중앙엠앤씨△DS부문장 하윤수△JCC부문장 우진홍△전단사업부문장 강원효△경영기획실장 김맹호◇중앙일보미디어플러스△경영지원실장 김영환 ■LIG투자증권 ◇이사 승진△ECM팀장 황양구△SF팀 최원철△PF영업1팀장 김명환△채권운용팀 문복수 ■메리츠화재 ◇승진△전무 강태구 윤종십△상무 임원일 박용주 윤여일 윤두열△상무보 윤덕제 주명규 김재형 이용우◇전보△자산운용총괄 전무 김종대 ■메리츠종금증권 ◇승진△상무 길기모 김석순△상무보 박관표 신진수 손종민 장재범◇전보△경영관리총괄 상무 김수광 ■LIG에이디피 △부사장 신동찬△상무 이종태△이사 조현우△이사(연구위원) 황창훈△중국법인장 김갑일 ■한샘 ◇승진△사장 박석준 강승수△부사장 이영식△이사 김용하 김덕신 최진호△이사대우 김죽천 이민경 이승호 김광춘 김주선 장윤섭 황인철 ■정식품 ◇전무△청주공장장 최홍석◇상무△기획관리부문장 신승렬△청주공장 관리부무장 김태형◇상무보△영업총괄부문장 이경재◇감사△김대권 ■자연과사람들 ◇부사장△대표이사 이순구◇상무△영업관리총괄부문장 최종호◇상무보△담양공장장 송용복 ■동원시스템즈 ◇승진△대표이사 사장 조점근 ■동원건설산업 ◇승진△대표이사 부사장 김영현△해운대호텔현장소장 김소환◇신규 임원 선임△PM사업부장 이명운 ■스타키스트 ◇승진△전무이사 최용석 ■동원엔터프라이즈 ◇승진 <상무이사>△경영지원실장 송재권◇신규 임원 선임△상무보 홍보실장 서정동△IT사업부장 장재기 ■동원홈푸드 ◇승진△식재사업부장 김성용 ■한진피앤씨 ◇승진△인쇄수지사업부장 임봉진 ■동원F&B ◇신규 임원 선임△창원공장장 권상동△온라인사업부장 강용수 ■동원데어리푸드 ◇신규 임원 선임△정읍공장장 김명식 ■동원시스템즈 ◇신규 임원 선임△아산공장장 강화수 ■동원T&I ◇신규 임원 선임△통신연구소장 이주연 ■동원CNS ◇신규 임원 선임△HRD사업부장 김인철 ■성신양회 ◇승진△부회장 김영찬△대표이사 사장 김태현<전무>△경영기술부문장 김상규△단양공장장 전병각<상무>△영업총괄본부장 천무찬△재무관리본부장 김영환<이사대우>△성신VINA법인장 안영엽 ■동서 ◇승진△부사장 윤세철 김진수△전무 최은성△상무 이상발 전병무 하인호 ■동서식품 ◇승진△부사장 이정철△전무 김광수 박효식 송만호△상무 박영순 양헌모 오도엽 안경호
  • “보행자 전용 한강 다리를”… 노들섬 활용 공개토론

    “보행자 전용 한강 다리를”… 노들섬 활용 공개토론

    “노들섬을 통과하는 보행 전용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요?” 한강예술섬(오페라하우스)으로 조성하려다 보류된 뒤 현재 텃밭으로 쓰이는 서울 용산구 노들섬의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민 공개토론회가 20일 서울시 신청사 태평홀에서 열렸다. 전문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놨다. 노주석 서울신문 선임기자는 “한강엔 29개 다리가 있지만 차량이나 전철을 위한 것이다.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한 다리’는 없다”며 “한강대교가 원래 인도교였고, 노들섬이 한때 서울 3대 유원지로 꼽혔던 점 등을 고려하면 보행 전용 다리를 지어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성종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도 “건강한 자연, 건강한 도시, 건강한 삶을 위한 연장선상에서 활용돼야 한다”며 “인도교도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경 환경재단 사무총장은 “노들섬은 시민들에게 희미해진 존재”라며 “어떻게 활용되든지 먼저 스토리텔링이 이뤄져야 길이 남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환경생태적·역사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가치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은 “고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노들섬은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가 세워지며 생긴 인공섬으로 12만㎡ 넓이다. 2005년 당시 이명박 시장이 이곳에 오페라하우스를 만들려는 계획을 짰다. 후임 오세훈 시장은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나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못잖은 예술섬을 만들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예산이 551억원이나 들어갔지만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며 추가 재정부담을 꺼려 백지화했다. 시는 공공 주도가 아닌 시민 참여로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해 지난 8월부터 각계 전문가 등 23명을 노들섬 포럼위원으로 위촉해 논의를 하고 있다. 이날 노들섬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웹페이지 ‘e-노들섬’도 문을 열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포토] ‘노들섬’ 활용에 대한 시민 공개토론회

    [포토] ‘노들섬’ 활용에 대한 시민 공개토론회

    20일 오후 서울시청 태평홀에서 열린 ‘노들섬 활용에 대한 시민 공개토론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석한 노주석(왼쪽) 서울신문 선임기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안찬모 경기대학교 교수의 노들섬 형성과 근현대기 변화에 대한 발표를 듣고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노들섬에 관한 상념/노주석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노들섬에 관한 상념/노주석 선임기자

    노들섬은 한강대교를 떠받치는 밑받침처럼 생겼다. 한강에는 토사 퇴적을 통해 10여개의 크고 작은 하중도(河中島)가 풍광을 뽐냈지만, 개발 과정에서 물밑으로 사라졌다. 여의도와 잠실, 뚝섬, 난지도는 이름만 섬이다. 저자도, 무동도, 부리도는 다른 섬을 뭍으로 만드는 데 온몸을 바쳤다. 밤섬과 선유도가 겨우 살아 남았다. 노들섬은 족보가 없다. 18세기 정선이 그린 실경산수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100만평이 넘는 한강백사장 중 두툼한 모래 언덕이었을 뿐이다. 한강인도교를 거쳐 제1한강교로 불린 한강대교가 세워지면서 생긴 인공섬이다. 이촌동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대교는 평균 1000m 이상의 드넓은 한강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 지점이었다. 1960~70년대 강변북로를 깔고 동부 이촌동과 서부 이촌동에 아파트를 짓느라 백사장 모래를 다 퍼내 쓰고 남은 자투리다. 1995년 일제잔재 지명을 청산하면서 중지도(中之島)에서 강 남쪽 노들나루(鷺梁津)의 이름을 따서 노들섬이 됐다. 별 존재감이 없던 노들섬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오페라하우스 건립계획 때문이다. 배턴을 이어받은 오세훈 시장이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나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에 버금가는 예술 섬을 만들겠다며 의욕을 보였으나 2011년 박원순 시장이 지휘봉을 잡자 백지화됐다. ‘임시’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지만 서울을 세계 제1의 도시농업수도로 만들겠다는 계획에 따라 도시텃밭으로 변신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신세다. 서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치열한 변화를 경험한 도시이다. 한강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한강개발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노들섬의 유전(流轉)을 보면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공간을 놓고 한 시장은 오페라하우스를 떠올렸고, 또 한 시장은 도시텃밭이라는 극과 극의 선택을 했다. 6000억원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만든다는 발상도 과했지만, 달랑 592명이 전원생활을 즐기는 도시텃밭도 또 다른 전시행정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노들섬의 미래를 위해 제안하고자 한다. 자동차전용도로와 아파트 숲에 가로막힌 한강의 접근성을 높여 노들섬을 시민 품에 돌려주자는 취지다. 오페라하우스를 지을 자금 일부로 노들섬을 통과하는 근사한 보행전용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 한강에는 29개의 다리가 있지만 차들의 질주에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보행교가 없다. 한강대교가 본래 인도교였으며 노들섬은 한때 창경원(창경궁), 남산과 더불어 서울시내의 3대 유원지였다는 자료를 참고하면 근거를 알게 될 것이다. 대중교통 이외에 자동차 통행을 금하고, 강 양쪽 한강둔치에 주차한 뒤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록 하면 될 일 아닌가. 박원순 시장은 ‘No more landmark’를 슬로건으로 외친다. 노들섬 다리는 또 다른 랜드마크가 아니다. 서울을 지리적, 심리적으로 양분하고 있는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한강 상에서 하나로 잇자는 것이다. j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20·끝) 강남(하)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20·끝) 강남(하)

    강 남은 탄생 비화보다 조성 과정이 더 드라마틱하다. 택지 마련과 경부고속도로 편입부지의 무상취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닻을 올렸던 강남개발은 정치자금 조성과 상공부 단지 제공이라는 ‘검은 거래’에 의해 변질됐다. 강북 억제라는 명분도 결과적으로 남북긴장 조성이라는 안보논리로 위장한 측면이 강하다. 강남은 현대 한국이 가진 모든 병리현상의 총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특혜와 듣도 보도 못한 정책 지원이 탄생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개발촉진지구 지정으로 강남에 건물을 지으면 각종 세금이 면제됐다. 지하철 2호선이 강남 연결을 위해 직선노선에서 순환선으로 탈바꿈했고, 아파트 이외에는 지을 수 없도록 멀쩡한 땅을 규제하는 정책도 등장했다. 고속버스터미널이 반포로 강제로 옮겨졌고,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으로 말미암은 8학군의 형성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서울의 확장이라는 시대적 산물이었지만 정권이 부동산 투기를 부추김으로써 강남개발의 선의는 빛을 잃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청와대와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돈을 내고,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하수인으로 토지를 매점하고, 서울시장이 땅값 빨리 올리라며 깃발을 흔들고, 많은 시민이 동참했으니 생각해 보면 온 국민의 분통터지는 웃지 못할 만화요, 연극이었다. 연극이라면 그것을 희극으로 볼 것인가 비극으로 볼 것인가”라고 말했다. 군사정권은 정치자금 조성과 상공부 단지 조성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윤진우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 1월 초 김현옥 시장의 지시로 박종규 경호실장을 만났다. 박종규가 누구인가. 김종필 국무총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인방이었다. “강남지역에서 가장 장래성이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 곳이 어딘가”라는 박종규의 질문에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오늘의 강남구)”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쪽 땅을 사 모으지”라는 한마디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5억 5000만원을 받아서 땅을 사 모으고 땅값이 어느 정도 오르면 되팔았다. 박종규·김현옥이 이듬해 4월에 치러질 제7대 대통령선거(박정희 대 김대중)에 대비해 강남 땅을 투기대상으로 삼아 정치자금 마련 노름판을 벌인 것이다. 윤진우 도시계획과장은 그 뒤 1년 동안 25만평을 확보, 매각해 1971년 5월쯤 20억원을 상납했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50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1963년 평당 300원 하던 땅값이 1970년대 초반 3만원으로 껑충 뛰는 과정에 정권 실세가 개입한 것이다. 이것이 강남 부동산 신화의 출발점이며 이후 강남은 평당 3000만원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김현옥은 또 비슷한 시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시절 비서관을 지낸 이낙선 상공부장관의 민원을 해결하라고 윤진우에게 지시했다. 강남에 상공부청사와 산하기관이 들어갈 부지 10만평을 물색하라는 것이었다. 오늘의 삼성동 코엑스부지가 이때 등장한다. 이 부지는 봉은사 땅이었으며 처분권은 조계종 총무원장이 쥐고 있었다. 마침 정부가 팔려고 내놓은 남산 중앙공무원교육원을 사들여 동국대 교육원으로 쓰려던 조계종 측과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금싸라기 땅 10만평은 평당 5300원씩 모두 5억 3000만원에 상공부 수중에 넘어갔다. 상공부 단지는 조성되지 못했다. 정부의 1976년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에 따라 정부과천청사에 입주했다. 대신 무역센터와 아셈타워, 공항터미널, 한국전력 등이 들어서게 됐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김현옥이 물러나면서 설거지는 후임 양택식 시장이 맡았다. 윤진우는 도시계획국장으로 승진해 잠깐 좋은 시절을 누렸으나 1974년 공무원 숙정자 명단에 포함돼 희생양이 됐다. 강남 부동산가에 파다했던 “서울시장 도둑놈, 도시계획국장 도둑놈”이라는 소문을 피해갈 수 없었던 탓이다. 윤진우가 맡았던 악역은 이 정도에 그쳤지만 하수인은 과연 그뿐이었을까. 부동산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1968년 처음 등장한 이래 몇 년에 한 번꼴로 투기억제책이 발표됐지만 우성, 한신공영, 한양, 삼호 같은 강남 부동산재벌의 등장과 복부인의 횡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남에 부동산이라는 DNA가 깃든 것이다. 박 정희 대통령은 1975년 3월 4일 서울시를 연두 순시하면서 “영동·잠실지구를 개발하여 도시시설을 완비하고 주택을 많이 들어서게 하는 것은 서울시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정책밖에 안 된다. 강북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해갈 때는 주택분양이나 토지불하 때 우선권을 준다든지 해서 서울시의 인구증가 없이 강북의 조밀 인구를 강남에 소산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적인 방안이 깊이 연구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정책의 신호탄이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물러난 양택식으로부터 강남 신시가지 조성 임무를 물려받은 구자춘 시장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 이전, 지하철 2호선의 순환선 건설, 강남구의 신설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받았다. 서울을 사대문 도심과 강남·잠실, 여의도·영등포 중심의 다핵(多核)도시로 개발한다는 이른바 ‘3핵도시론’이었다. 김현옥(1966~1970)이 여의도 및 한강개발과 한남대교 건설로 강남개발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양택식(~1974)은 택지를 조성하고 아파트를 들이는 초석을 놓았다. 방점은 구자춘(~1978)이 찍었다. 신천지 강남을 아파트공화국, 유흥가공화국, 부동산공화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2년 9개월 동안 서울과 강남의 얼개가 완성됐다. 군인 출신 김현옥·구자춘이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일을 벌이고, 마무리했다면 관료 출신이던 양택식은 중간계투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뒤에는 독재자 박정희가 버티고 있었다. 서울 상공을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일일이 지적하고 지시했다. 싫건, 좋건 간에 강남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부터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21년 동안 질풍노도처럼 불어닥친 변화의 한 중심에 있다. 개발의 합법성과 절차의 민주성을 따졌다면 지금의 강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은 한국적인 특성, 쉽게 끓고 쉽게 식는 ‘냄비 근성’과 ‘빨리빨리 문화’의 합작품이다. 이들 문화의 긍정적 요인을 활용해 벤처와 인터넷, 제2금융권의 요람이 되었다. 온갖 특혜와 정책적 지원이 뒤따랐다. 구시가지 대부분을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해 건물의 신·증축과 개축을 금지했다.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시설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동·무교동 일대 술집과 다방, 카바레 등 유흥업소는 된서리를 맞았다. 규제가 없고 세금을 감면해주는 강남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불야성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974년 서울지역에 고교평준화가 시행되면서 경기고 등 명문학교들도 낡고 협소한 강북 교사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의 등장이 강남폭발의 비등점이었다. 사평리라고 불리던 침수지역 반포로 구자춘의 시선이 쏠렸다. 1977년 강북 여러 곳에 산재했던 터미널을 폐쇄했다. 잠수교와 남산3호터널을 뚫었지만 1981년 터미널이 완공될 때까지 강북 가는 길은 고생길이었다. 1976년 반포·청담·이수·압구정·도곡·잠실을 ‘아파트지구’로 지정했다. 지정된 지역에는 아파트 이외에는 짓지 못하게 했다. “터미널 주변을 아파트단지로 조성하라”라는 구자춘의 지시 한마디에 5만 가구의 아파트가 10년 만에 들어섰다. 터미널 주변이 순식간에 아파트 숲으로 덮였다. 지하철 2호선은 본래 1970년 지하철 1호선 노선결정 때 교통량 조사와 투자비 회수계획에 따라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노선을 뚫기로 정해져 있었다. 3, 4, 5호선 노선도 대체로 정해진 터였다. 구자춘의 즉흥적인 을지로순환선 계획은 강남에 바치는 찬가였다. 포병 장교 출신답게 계획에도 없던 종합운동장~삼성~선릉~역삼~강남~교대역 노선을 지도에 그려 넣었다. 성수~을지로, 사당~서울대입구~문래~을지로로 각각 연결하는 순환선이었다. 총연장 60㎞의 지하철 2호선은 1978년 착공해 6명의 서울시장이 3번의 기공식을 했고 5번의 개통식을 가진 끝에 1984년 완전 개통됐다. 2호선이 개통됐을 때 강북과 강남의 인구비는 54대46으로 균형을 맞추게 됐었다. 우 리에게 강남이란 무엇일까. 새서울도, 제2서울도, 남서울도, 영동도 아니다. 강남이 서울이다. 강북이 조선왕조의 도읍 한양이라면 강남은 우리 손으로 건설한 ‘진짜 서울’일는지 모른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은 강북에서 조선을 느끼고, 강남에서 현대 한국의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하지 않는가. 불과 50년 전에 시작된 한강의 기적이 곧 강남신화이며, 코리안드림이었다. 18세기를 살았던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21세기 강남의 낮과 밤을 필설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왕국도 식민지도, 독재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진정한 서울은 바로 강남이 아닐까. joo@seoul.co.kr ■지난 6개월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서울을 지리 중심으로 살펴본 ‘서울 택리지’는 이번 20회로 맺습니다. 서울을 테마별로 집중조명하는 ‘서울택리지-테마기행’으로 2014년 신년에 찾아뵐 예정입니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9) 강남(상)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380개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우이동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지척에 둔 수유리, 서쪽으로는 인천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도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370만명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소설가 이호철이 1966년 2월부터 신문에 연재한 ‘서울은 만원이다’의 한 대목이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67년은 우리나라에서 보릿고개가 사라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해방 전후 100만명 선을 유지하던 서울 인구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팽창하기 시작해 1959년 200만명, 1963년 300만명, 1970년 550만명을 넘어섰다. 매년 큰 도시 한 개(30만명)씩 인구가 불었다. 서울 곳곳은 공식통계상 13만채, 비공식적으로는 20만채 이상의 볼썽사나운 판잣집으로 뒤덮였고 시민들은 교통지옥에 시달렸다. 택지난과 교통난 해결이 급선무였다. 서울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고 비상구가 필요했다. 한강 너머 ‘신대륙’ 진출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강남은 논밭과 과수원, 초가집이 어우러진 한갓진 농촌이었다. 서울 사람들이 먹을 과일과 채소를 공급하는 초식(草食) 농사가 주를 이뤘다. 손수레에 채소와 과일을 싣고 강을 건넌 뒤 돌아올 때는 배설물을 실어다가 거름으로 썼다.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가 자라기 좋은 모래 토질이어서 단무지 농사가 성황이었고, 서초동은 미군과 서울 사람이 사갈 화초가 만개한 꽃동네였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골, 도곡동은 도라지 특산지, 청담동은 물 맑은 청숫골이었다. 이때 강남 사람들은 강 건너 강북 사람을 ‘서울사람’이라고 부르며 마치 상전 모시듯 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이 ‘강남신화’의 틀을 제공했다. 서울은 종전보다 2배 이상 확장돼 오늘의 모양새를 갖췄다. 지금의 강남 지역과 중랑, 강북, 노원, 은평, 강서, 구로, 금천, 관악구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이다. 양주, 의정부, 고양, 광주, 과천, 시흥 등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알토란 같은 땅이 서울 품에 안겼다. 5·16 쿠데타 주도 세력으로 현역 육군 소장이던 윤태일 서울시장의 공이 컸다. 군복을 입고 다녀서 ‘군복시장’이라고 불린 그는 박경원 내무부 장관, 박창원 경기도지사와의 기 싸움에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교수는 “이 구역 확장이 없었더라면, (만약) 구역 확장이 늦게 이뤄졌더라면 강남 개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지지부진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강남’은 불과 50년 전 공중전화나 전신전화취급소조차 없는 ‘깡촌’이었다. 서울로 편입되고 나서는 남서울, 제2 서울, 새 서울 등으로 띄워졌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한때 강남 지역의 통칭은 영동이었다. 문희옥의 유행가 가사처럼 ‘여기는 남서울 영동’이었다. 강남이라는 지명은 1975년 성동구 언주출장소와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합쳐져 강남구가 생기면서 대세로 굳었다. 초창기 강남은 자체 지명을 갖기보다는 이웃과의 지리적 관계 속에서 존재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행정편의적 작명이었고, 남서울은 단순히 ‘서울의 남쪽’이었다. 지금의 강남 지역을 이루는 광주군 언주면과 대왕면, 시흥군 신동면 등 옛 지명은 도로(언주로, 대왕 판교로)와 학교(대왕초·중교, 언주초·중교, 신동초교) 이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서울의 초식 재배지였던 과거사를 가능하면 지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늘날 부와 권력의 정점을 이루는 강남이라는 지명에는 또 다른 차별적 통념이 존재한다. 강남은 최초 ‘한강의 남쪽’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강남구·서초구·송파구·강동구 등 4개 구로 범위가 좁혀졌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1990년대 이후에는 강남구·서초구·송파구 3개 구를 강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강남구·서초구 2개 구나 강남구 1개 구를 ‘진정한 강남’이라고 여기는 시각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강남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는 곡절이 많다. 화신백화점 재벌 박흥식의 1962년 남서울 신도시계획구상이 강남 개발의 첫발이었다. 1966년 1월 서울시가 내놓은 남서울계획이나 같은 해 8월의 새서울백지계획도 ‘박흥식 프로젝트’의 복사판에 그쳤다. 본격적인 강남 개발은 2년 뒤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닻을 올렸지만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서울=사대문’이라는 600년 묵은 등식이 그리 쉽사리 깨지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뜨는 강남, 지는 강북’의 시대가 ‘훅’하고 왔다. 강남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다. 1969년 12월 한남동과 신사동을 잇는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개통과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이 결정타였다. 1964년 서독 방문길에 아우토반을 달려 본 박정희가 1967년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자 고도 경제성장의 혈류인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것이다. 고속도로 편입 용지 매수비용이 문제였다. 정부가 용지 매입비를 줄이려고 고속도로의 기점인 제3한강교에서 양재동에 이르는 7.6㎞를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무상확보토록 조치하면서 강남 개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동1지구는 도로·학교·공원 등 공공용지 확보를 위해 세 차례나 구역 확장을 되풀이한 끝에 1971년 2월 최종적으로 1695만㎡(513만평)까지 늘어났다. 강남이라는 빈 땅을 부산~대구~대전~강남~한강~사대문에 연결함으로써 허허벌판의 개발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 영동2지구 개발계획은 1970년 11월 5일 발표됐는데 1206만㎡(365만평)의 엄청난 부지와 너비 70m에 길이 3.6㎞, 너비 50m에 길이 6.9㎞의 광폭 간선도로가 놓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첨단 격자형 가로계획이 선보였다. 대표적인 계획도시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도 볼 수 없는 넓은 길이었다. 광화문길(세종대로)보다 70배나 긴 길이 강남 땅에 ‘쭉’ 그어진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1, 2지구를 합쳐 2901만㎡(878만평)의 광활한 신천지가 개벽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강남은 4개의 산(내사산)에 둘러싸여 더 뻗어 나갈 곳이 없는 사대문 구시가지의 더할 나위 없는 대안이었다. 구시가지를 대궐과 성곽이 살아 있는 역사문화도시로 남겨 두고 현대적 신시가지로 개발할 만한 여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옛 도읍지이자 다가올 황해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대화와 도시화가 판친 1970~80년대의 시대정신에 딱 맞았다. 한 건을 노리는 조급주의와 독재정권을 향한 충성 일변도 정책 그리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부동산 투기의 흑막이 없었더라면 환상적인 도시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남의 성공 배경에는 ‘말 못할 안보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올랐던 서울 사람들에게 한강인도교 폭파와 강을 건널 수 없어 발을 구르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다리 건너편 강남은 다시 재현될지도 모르는 피란길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안도감을 제공했다. 남북 긴장 조성을 통해 권력 연장을 획책했던 박정희 정권이 강북 억제와 강남 이전을 부추긴 점이 작용한 것이다. 강남은 폭발했다. ‘말죽거리 신화’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세계 최대 규모의 아파트공화국으로 우뚝 섰다. 서울 거주자의 절반, 우리나라 전체 주거자의 절반이 아파트에 사는 아파트 시대가 이때 촉발된 것이다. 강남발 부동산 광풍으로 남한의 땅값 총액은 올 현재 5000조원이 넘는다. 남한 땅을 팔면 우리보다 42배 큰 미국의 절반을 살 수 있고, 100배 큰 캐나다를 여섯 개나 살 수 있다고 한다. 말죽거리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동남쪽 말죽거리가 강남 부동산 투기의 원조이자 온상이었다. 말죽거리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도망가던 인조가 말에서 내릴 새도 없이 안장에 앉아 죽을 먹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60년대 초 3.3㎡당 300~400원 하던 땅값이 10년이 지난 1970년 초 최고 50배 올라 2만원을 호가하더니 1970년대 말에는 1000배 이상 뛰어 50만원을 훌쩍 넘어섰다. 같은 시기 강북의 신당동과 후암동은 10배, 25배 올랐을 뿐이다. 강남 땅값은 2003년 1000만원을 넘어선 이후 현재 3000만원을 호가한다. 달랑 300원 하던 땅값이 무려 10만배 오른 셈이다. 강남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군사작전식 초고속 압축성장의 유일무이한 모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축복과 국내 최대 규모의 판자촌인 구룡마을 재개발 논란에서 보듯이 부동산 투기의 그늘에서 비롯된 천민자본주의의 저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j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풍수 (하)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풍수 (하)

    >>> 치산치수·종묘사직 보전 위해… 풍수도 성형 인공산·연못 만들고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까지 통제 풍수학의 고전 ‘청오경’에 “명당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조성될 수도 있고 인위적으로 조성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완벽하지 않은 땅을 사람과 환경이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비보(裨輔)라고 한다. 장승을 마을 어귀에 세우거나 물새를 앉힌 솟대를 물가에 꽂거나 물길이 흘러 나가면서 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돌탑을 쌓거나 마을이 외부로 훤히 트여 있으면 나무를 심는 당숲 등이 우리가 흔히 보는 신앙 비보 사례다. 물에 관련된 수구(水口) 비보와 연못을 파거나 해태상, 돌거북을 설치해 불길을 누르는 화기(火氣) 비보, 땅의 힘이 부족하거나 훼손되기 쉬운 곳을 가다듬는 산천(山川) 비보, 이름을 바꾸는 지명(地名) 비보 등을 통틀어 비보풍수(裨輔風水)라 이른다. 한국의 비보풍수는 도선 국사(827~898)에게서 비롯됐다. 고려는 산천비보도감, 조선은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 차원에서 운영했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는 “비보풍수는 국토의 지형 지세를 살펴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자 하는 일종의 국역 조경”이라고 평가했다. 한양은 풍수지리학상 완벽한 도읍이 아니었다. 결점을 보완하고자 나무를 심고 인공산(가산)을 쌓고 연못을 팠다. 한양은 중세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인구가 개국 초기 10만명에서 후기 20만명까지 늘어나면서 주택 공급, 생활 하수 처리, 산림 녹지가 급선무였다. 그래서 풍수는 승려나 풍수학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왕과 성리학자들이 풍수서를 읽고 연구했다. 가장 중요한 국가정책인 치산치수와 종묘사직의 보전이 곧 비보풍수였기 때문이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란 소나무를 베거나 돌을 캐거나 무덤을 쓰거나 사찰을 짓는 행위를 금한 영역표시 지도이다.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고 민가나 사찰을 철거했다. 지맥과 수맥을 보호하기 위해 법제화한 강력한 통제책이었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라고 볼 수 있지만 훨씬 적극적인 개념이다. 금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철거하거나 공사를 해 보존했다. 삼각산(백운대, 만경봉, 인수봉)~보현봉~백악(북악)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을 보호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숙종과 영조에 이어 정조 때도 보현봉에 흙을 쌓았다. 김정호는 ‘수선전도’에서 보현봉 아래를 ‘보토소’라고 표기했다. 북한산 여러 봉우리 중에서 구준봉(구봉) 뒤쪽의 잘록한 고개를 보토고개(보토현)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삼각산~보현봉~백악을 잇는 급소라 하여 중점적으로 관리한 것이다. 사산금표도를 보면 한양의 행정구역이 보인다. 금표 지역과 사대문 밖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 성저십리는 도성으로부터 정확하게 10리는 아니었다. 5리도 있고 10리가 넘는 지역도 있었다. 대개 우이동~장위동~석관동~중랑천~전농동~살곶이다리~옥수동~용산~마포~망원동~성산동~역촌동을 잇는 선이다.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이 경계다. 행정구역상 한강 이북의 6분의5에 해당하며 강남 개발 이전의 서울 면적과 비슷하다. 금산과 금표는 조선 전기 엄격했고 연산군대에 최고조에 오른 이후 느슨해졌다. 왕권과 신권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영향을 미쳤다. 성종실록에는 임금과 신하 간 풍수 기 싸움에서 임금이 패한 이색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성종 12년 창덕궁 뒤편 응봉산 남쪽 기슭에 세도가의 가옥 100여채가 들어서 궁궐을 억누르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왕이 철거를 명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치자 흐지부지됐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혜화동쯤인데 이 지역에 사는 권신과 유생들의 조직적 반대에 왕이 한걸음 물러난 것을 의미한다. 서울의 관문에 얽힌 풍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울성곽을 축조할 때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새 통로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물자와 사람이 가장 많이 오가는 한강나루(한남동)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남산을 빙 돌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세조 3년 숭례문(남대문)과 광희문 사이에 남소문(南小門)이라는 길을 열었다. 장충단길 국립극장과 반얀트리호텔(옛 타워호텔) 사이쯤이다. 13년 후인 예종 1년에 남소문 폐쇄론이 제기됐다. 황천살(黃泉殺)이 열려 세자가 요절하고 임금도 시름시름 앓는다는 풍수설이었다. 그 후 200여년간 폐쇄된 남소문이 당쟁의 대상이 됐다.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득세하고 닫으면 서인이 권세를 잡는다며 개문파와 폐문파로 나뉘어 다퉜다. 태종 13년 돈의문(서대문)을 경희궁이 있던 남쪽 언덕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고쳤다. 풍수 최양선이 경복궁의 지맥 보전에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세종 4년 백성의 통행 불편에 대한 원성이 잇따르자 본래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되돌렸다.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이다. 최양선은 도성의 북쪽 큰 문인 숙정문(숙청문)과 작은 문인 창의문(장의문, 자하문)도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지맥 보호를 위해 폐쇄할 것을 건의해 관철했다. 숙정문은 원주 가는 길이지만 산이 높고 길이 험해서 이용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주로 혜화문을 통했다. 숙정문을 폐쇄한 이설(異說)이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전해진다. “이 문을 열어두면 성 안에 음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폐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양의 세시풍속에 ‘정월 보름 이전에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세 번 다녀오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하여 부녀자들의 북문 나들이가 성황을 이루자 남자들이 모여들었고 급기야 ‘사내 못난 것 북문에서 호강받는다’는 속담이 생겼다는 것이다. 풍기 문란 탓에 북문을 걸어 잠그게 됐다는 얘기다. >>> 물 확보 위해 ‘공사다망’ 했던 조선의 왕들 광화문 해태상·숭례문 세로현판으로 불기운 막아 조선의 역대 왕들은 물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공사를 일으켰다. 풍수학의 고전 ‘금낭경’에서 ‘풍수지법(風水之法) 득수위상(得水爲上) 장풍차지(藏風次之)’라 하여 장풍보다 득수를 중시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경복궁에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므로 도랑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태종), 소격서 골짜기에 못을 조성하고(세종), 숭례문 밖에 못을 파고(세조), 흥인지문 안에 인공산 3개를 조성하고(성종), 동지를 파고 인공산을 쌓고(명종), 관왕묘를 흥인지문 밖에 짓고(선조), 흥인지문 밖에 못을 파고(광해군), 두모포(옥수동)의 채석을 금지(인종)했다. 특히 동지(연지동), 서지(천연동), 남지(숭례문), 북지(삼청동 소격전) 등 4개의 큰 연못을 조성했다. 동지(東池)와 서지(西池), 남지(南池)는 물론 경회루와 성균관 연못, 광화문 앞 해태상, 숭례문의 세로 현판이 모두 불을 막기 위한 풍수 장치였다. 숭례문 밖 남지에 대한 기록은 1629년 이기룡이 그린 ‘남지기로회도’에 잘 나타나 있다. 연못에는 연꽃이 무성했고 버드나무가 보인다. 남지는 지금의 서울역 광장과 대우빌딩 자리쯤으로 어림된다. 1899년 일제가 서울역을 확장하면서 메워 버렸다. 동지는 흥인문 밖과 경모궁 밖에 있는데 두 곳 다 연꽃을 심었다고 ‘동국여지비고’에 기록돼 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는 경모궁 앞, 연동 앞, 흥인문 앞 등 3곳에 연못이 그려져 있다. 돈의문 밖 지금의 영천시장 자리에 서지가 있었다. 태종 및 세종실록에는 ‘길이가 100m, 폭 122m의 네모진 못에 낮은 담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었다’라고 적혀 있다. ‘한경지략’에는 ‘돈의문 밖 서지가에 천연정이 있는데 꽃이 무성해서 여름철 성안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제일’이라고 적었다. 경복궁의 명당수 역할을 위한 삼청동 북지(北池)를 제외한 동·서·남지가 백성의 출입이 잦은 큰 문 앞에 자리한 것은 화재 방지용 방화수는 물론 경관 조성을 통한 유희용 등으로 두루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풍수 개념상 내(內) 명당수인 개천(청계천)을 둘러싼 풍수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명당수냐 아니면 도시의 배수구냐의 다툼이었다. 세종 26년 집현전 수찬 이선로가 “개천물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하여 물이 늘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나이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중신들과 논의한 끝에 한성부(서울시)가 나서서 개천에 오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고 어기는 자는 사헌부로 하여금 엄벌토록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개천의 오염은 지리적인 특성과 도시 생활 하수 배출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풍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세종은 하수구를 잃게 된 백성의 원성을 대변한 어효첨의 손을 들어 줬다. 세종은 “풍수서라는 것은 다 믿을 것이 못 되나 옛 사람들이 다 풍수서를 알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풍수설을 자문할 것이고 어효첨 같은 자는 마음으로 풍수설을 그르게 여기니 그것에는 일하지 말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풍수대왕’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머금고 태조가 정한 명당수를 하수구로 판정한 것이다. 항상 열려 있어야 할 개천(開川)이 복개와 복원을 반복한 통한의 과거사를 상기시키는 문답이다. joo@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