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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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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학(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학(중)

    ●서울학과 서울정치학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최대 도시가 아니라 서울이 곧 한국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67년 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상상하면서 “파리는 프랑스 그 자체”라고 표현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두 도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 이르는 한국정치를 분석한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한국정치의 본질을 정치권력을 향해 상승기류를 타고 몰려드는 소용돌이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는 한국인이 단일민족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오히려 원자처럼 분열돼 있으며 원자화된 한국인이 모두 정치권력을 향해 소용돌이처럼 몰려들기 때문에 중앙집중화가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한국정치는 당파성과 개인 중심의 기회주의를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이나 응집을 배양할 수 있는 토양이 황폐화됐으며, 이런 소용돌이 정치패턴에 대한 처방은 다원주의와 분권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동질성과 중앙집중화 현상을 무리하게 단순화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해방 후 혼란으로 점철된 한국 정치의 현상을 꿰뚫은 통찰력 있는 해석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두 도시는 시장 출신 대통령을 배출했다. 중앙집권화의 한 극단을 달린 프랑스 파리시장 시라크가 1995년 삼수 끝에 최초의 파리시장 출신 대통령에 올랐다. 이어 2007년 이명박 서울시장 역시 삼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중앙정치가 모든 것을 녹이는 특성 아래서 서울과 파리의 정치가 살아남는 데 성공한 셈이다. 중앙정치와 지방정치를 따질 때 서울은 중앙과 지방의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서울정치란 본래 중앙정치와 한 몸이었으나 오랜 관선 시장 시대를 거치면서 서울정치는 중앙정치에 무대를 빼앗긴 채 실체를 잃었다. 서울정치는 고유의 특성을 상실하고 일개 지방정치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정치의 상실은 서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서울은 2000년 이상의 생성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도(古都)이며,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전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도시이다. 지속적으로 한반도의 심장부 노릇을 한 지도 620년을 훌쩍 넘겼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논할 수 없듯이 우리나라 정치는 서울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서울정치의 제 역할 찾기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서울정치의 기본요소가 서울시장과 서울시 의회, 시민사회와 언론 등으로 구성된다고 보면 그중에서도 서울정치의 주 연구대상은 서울시장이다. 서울시장과 서울정치학은 분리할 수 없다. 서울시장의 위상은 이른바 서울정치학의 정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서울시장의 존재가치와 위상은 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울정치학과 더불어 성립하기 때문이다. 서울학 연구가 본격화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서울학과 서울학에 바탕을 둔 서울정치학은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1957년부터 펴낸 ‘항토서울’ 등 2009년까지 발간된 서울학 관련 논저 682편을 바탕으로 서울학 연구의 대상을 분류하면 기초연구, 서울과 공간, 서울과 정치, 서울과 사회, 서울과 경제, 도시문화와 표상, 기타 등 크게 7개로 구분할 수 있다. 기초연구는 다시 역사개설, 방법론, 사료 및 자료로 세분화되며 공간연구는 도시계획과 제 개발, 도시건축물, 주거지 및 도시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분야는 사회집단 및 사회문제, 도시민의 일상생활, 인구문제, 교통과 통신이 포함된다. 경제분야는 공업 및 상업, 무역, 노동 등이다. 도시문화와 표상 속에는 문화 및 교육, 종교와 사상, 도시의 정체성과 이미지 등이 들어 있다. 이 중 서울과 정치는 도시와 국가, 지역정치, 도시행정 및 정책으로 작게 분류할 수 있다. 도시와 국가는 천도, 안보, 정치동향, 대외관계, 군사, 치안 등이 포함된다. 지역정치는 의회와 지방자치이다. 도시행정 및 정책 속에는 도시 관련 각종 제도와 정책, 행정이 망라된다고 할 수 있다. 682건 중 2000년 이후 발표된 논저 33건이 정치 편에 속했는데 서울정치의 핵심을 벗어난 채 행정제도에 관련된 내용을 맴돌았다. 올해로 민선 서울시장을 시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지 20년을 맞는다. 그동안 6기에 걸쳐 5명의 민선시장이 배출됐지만 그 정치적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치권력론, 정치과정론, 정치리더십론, 정치문화론, 정치기구론 등 정치학의 분류를 서울학에 적용해 서울의 정치과정론, 서울의 리더십론, 서울의 정치문화론, 서울의 행정기구론 등으로 분류하는 등 서울정치학의 본격적 입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도의 입지와 의미 서울정치학은 1394년 조선 태조의 한양천도에서 비롯됐다. 천도와 안보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성립과 존망을 다루는 서울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양의 도시입지는 국토의 중앙에 있다는 점, 군사적 요충지라는 점, 교통과 수운이 편리하다는 점 등 지정학적 요인이 작용했다. 여기에 풍수도참적 측면이 강하게 두드러졌다. 유교적인 동양의 우주론과 풍수 조영 원리가 절충되어 한양 입지의 주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수도(首都·Capital)란 국가의 통치를 위한 여러 기관과 기능이 집중된 곳으로 다른 도시와 차별성을 갖는 도시이다. 수도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근대 국가 형성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근대 이후에 출현한 개념이다. 즉 수도는 정치의 일원화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권력 소재도시를 일컫는다. 수도에 있는 국가기관을 중앙정부, 그 외의 지역에 있는 행정기관들을 지방정부라고 부르는 식이다. 서울을 다스리는 한성부와 한성부의 우두머리인 한성판윤은 중앙정부에 속한 중앙직 관리였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그와 비슷한 개념어로 경향(京鄕), 중외(中外), 내외(內外), 경외(京外)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유럽에서는 16,17세기부터 수도라는 용어가 등장했지만 수도 개념이 일반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동아시아는 중앙집권체제가 일찍부터 형성되었고 지금의 수도와 유사한 개념 역시 일찍부터 실재하였다. 중국 중심의 국가별 위계가 존재하였고, 동일 국가의 지역 간에도 정치적, 신분적, 문화적 질서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사전에서 수도 항목을 찾아보면 한국은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도시’, 중국은 ‘국가 최고의 정권기관 소재지로 전국의 정치 중심’, 일본은 ‘ 그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도시’라고 각각 정의하고 있다. 세 나라 모두 국가를 단위로 수도를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영미권에서 수도를 나타내는 단어인 Capital에 대한 정의를 보면 ‘한 국가 혹은 지역의 정치행정 중심도시’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근대 이후 수도는 더는 신성한 장소가 아니게 되었고, 수도를 상징하는 성곽의 의미도 축소되었다. 또 제도상 특별한 지위를 갖지도 않으며, 교화의 기준으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수도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행정·권력의 중심지라는 의미와 함께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보편화의 기준이 되었다. 수도 그 자체로서 국가를 대표하기도 하며, 국민이나 국가의 형성에 필수적인 국어(표준어)도 수도의 말과 글을 기준 삼아 탄생하였다. 계서화된 국제질서가 만국 공법적인 국제관계로 재편되었듯이 차별적인 지역 간의 위상도 보편화를 지향하는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일원화되었다. 한국에서 수도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였다. 19세기 중반 Capital을 일본에서 번역한 이 용어는 1890년대 처음 들어왔지만, 서울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외국의 수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쓰였다.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근대 초기 통상조약을 맺을 때도 수도라는 용어 대신 도성이나 경사(京師), 한양, 경성, 경도(京都), 도읍, 수부(首府), 수선(首善), 경조(京兆), 황성, 경화(京華) 등이 쓰였다. 수도 서울은 전제군주와 독재자의 희생양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임금은 수도를 등졌으며, 구한말 고종은 신변보호를 위해 러시아공사관에 숨어들어 1년 동안 머물렀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 거짓부렁으로 피란을 떠나려던 서울시민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이때 생긴 트라우마가 한강 너머 강남 땅에 대한 부동산투기의 실마리를 제공했는지도 모른다. 1960~70년대 남북한 간 안보경쟁의 산물인 ‘서울 요새화 계획’이 또 한번 서울을 멍들게 했다. 북한 장사정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고자 정부를 과천청사와 대전청사로 분리했고, 끊임없는 수도 이전 시도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세종시 정부 이전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공습 때 서울시민 30만~40만명용 대피소를 만들 목적으로 남산에 1, 2호 터널을 뚫었고, 남산타워 또한 북한에서 보내는 전파를 방해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다. 을지로 지하보도 등 서울 곳곳의 지하보도도 대피용으로 만들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대전차 방어벽이 구축됐다. 홍은동 네거리 유진상가도 시가전용 엄폐물이었다. 여의도 광장과 북악스카이웨이, 한강 잠수교도 안보용이었다. 국가안보는 수도 서울에 숱한 생채기를 남겼다.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우리는 왜 원자력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왜 원자력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가

    한국의 원자력 에너지/김경민 지음/새로운사람들/270쪽/1만 8000원 대한민국 원자력 에너지 역사가 이 책 한 권에 다 들어 있다. 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펴낸 ‘한국의 원자력 에너지’는 원자력 옹호론자의 원자력 안전에 관한 집요한 추적이다. 20년 연구, 17년 집필의 결과물이다. 그의 글은 책상머리에 앉아 쓴 것이 아니다. ‘원자력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만큼 지구상 원자력 시설과 현장을 찾아다녔다. 한국과 세계의 원자력 변천사에 존재를 알릴 만한 곳은 다 다녔다. 대표적 현장으로 꼽은 곳만 30곳이 넘는다. 원심분리기와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재처리시설 내부까지 직접 눈으로 목격한 몇 안 되는 한국사람 중 한 명이다. 이 책은 원자력 에너지 왜 중요한가, 원자력 에너지의 수출, 안전이 가장 우선이다, 사용 후 핵연료와 지역 상생, 북한 핵에 대한 우려와 대응 등 5개 장으로 나눠 지난 17년 동안 언론에 기고한 칼럼 등을 정리한 글이다. 그는 지난 5월 ‘원자력과 사회소통상’을 받았다. 자연과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원자력학회가 인문학자에게 준 첫 상이었다. 노주석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학(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학(상)

    서울은 2000년 이상의 생성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도(古都)이며,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전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도시다. 지속적으로 한반도의 심장부 노릇을 한 지도 620년을 훌쩍 넘겼다.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라고 어느 시인은 읊었지만, 서울에는 읊을 기억이 별반 없다. 왜일까. 연식은 2000년을 넘겼지만, 마일리지는 환갑에 불과한 후진국형 신생 도시로 강제 성형수술을 당했기 때문이다. 서울은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고서 인구가 10만명에서 4만명으로 줄었지만, 18세기 후반 30만명이 사는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로 회생했다. 한국전쟁으로 도시의 4분의1이 파괴돼 폐허가 됐지만 6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초현대도시로 탈바꿈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서울학’이란 무엇이며 왜 서울학인가 우리는 회생과 개발의 논리에 파묻혀 민족의 역사와 공동체의 거룩한 자취를 유지하지 못했다. 서울은 역사도시의 향기를 잃었다. ‘서울에는 분명히 서울다운 면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른다. 사람들은 이것을 정체성이라고 하는데 서울은 바로 정체성이 없다’는 문제의식을 낳았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서울의 깊은 내면 세계를 파헤쳐 보고자 20년 전 고고성을 울린 것이 이른바 ‘서울학’이다. 서울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학문적으로 답하려는 시도다. 서울학은 어느 특정 분야에 속하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진면목을 살리기 위한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학술 활동의 총칭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얽혀 있다’고 한다. 서울학은 서울이 가진 장구한 역사와 서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모든 사물과 사실, 작용과 반작용 및 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 분야로 씨줄과 날줄이 짜였다. 시공간의 축으로 볼 때 매우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종합 학문의 영역이며 학문과 학문 간 학제(學際)적인 연구 분야 또한 무한대다. 역사학을 바탕으로 학문 간의 벽을 허물자는 아날학파(프랑스 역사학자 페브르와 블로크가 1929년 창간한 ‘경제사회사 연보’에서 유래된 역사학파)의 명제를 실행할 무대다. 지역 명칭을 사용하는 학문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57년 서울 시사편찬위원회가 ‘향토서울’을 창간하면서 돛을 올린 이후 1994년 서울시립대학교에 세계 최초의 수도학 연구소인 서울학연구소가 개설됐다. 서울의 역사, 정치, 지리, 문화, 도시, 건축, 경제, 자연환경, 생활 등의 분야에서 서울의 생성, 성장, 발달 및 변천과정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해 하나의 새로운 독자 학문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단순히 지역학에 머무르지 않고 서울의 문화와 역사를 총체적으로 밝히는 학문을 목표로 했다. 1995년 본격 지방자치시대의 개막과 함께 특정한 도시의 이름을 붙인 ‘부산학’ ‘인천학’ ‘강릉학’ ‘대전학’ ‘경주학’ ‘안양학’ ‘춘천학’ 등이 생겨났다. 더불어 특정한 지역을 단위로 하는 ‘영남학’ ‘호남학’ ‘경기학’ ‘충북학’ ‘제주학’ ‘강원학’ 등 다양한 지역 학문이 싹을 틔우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1985년 대구지역사회연구회를 기치로 부산지역사회연구회, 호남사회연구회, 전남사회연구회가 1988년부터 차례로 결성되면서 해당 지역사회의 역사 발전과 현안을 화두로 삼았다. 현재 전국에는 서울학(서울학연구소, 도시인문학연구소, 서울연구원, 서울 시사편찬위원회), 부산학(부산학연구센터, 부산발전연구원), 인천학(인천학연구원, 인천발전연구원), 경기학(경기문화재단, 경기도사편찬위원회), 충청학(충청학연구소, 충북개발연구원, 충북학연구소, 충북학연구센터), 강원학(강원개발연구원, 매지학술연구소), 대전학(대전학연구회, 대전발전연구원), 제주학(제주역사문화연구소), 호남학(호남문화연구소), 경주학(경주학연구원), 영남학(영남문화연구원) 등이 있다. 1980년대까지 서울 연구는 서울 내에 위치한 궁궐 및 도성, 도시건축물의 개별적인 건설 과정, 연혁, 건설 규모의 고증과 서울행정제도사의 파악에 머물렀다. 1994년 서울학연구소 발족 이후 도시공간 구조, 도시민의 주체적 행위 등 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도시사, 도시학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도시건축물의 개별적인 건설과정에서 벗어나 도시계획 및 주거지 분화에 따른 공간 확장이나 공간 분화 양상을 고찰했다. 도시화가 낳은 사회적, 문화적 도시공간의 구조 변동이 서울시민의 삶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그러나 서울학의 갈 길은 아직 멀다. 관동대 이규태 교수는 “지역이나 도시명을 사용하는 학문이 어떤 유형의 학문이며, 어떠한 학문적 성격을 가지고,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연구돼야 한다는 학문이론이나 연구방법이나 연구범주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화한 학문적 개념과 정의 그리고 이론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방학의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득세하는 편이다. 순서는 일본〉한국〉중국이다. 유럽에는 지역학의 전통이 없다. 있을 법한 프랑스 파리에도 ‘파리학’이라는 학문은 없다. 우리가 서울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에도학’이 제공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에 들어간 1590년 이래 만 400년이 되던 해인 1989년쯤 붐이 일었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의 지역 연구를 시작하는 ‘오사카학’도 1994년 뒤를 이었다. 에도학 또는 ‘에도도쿄학’의 정의는 “에도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도시형성 발전과 문화변용의 과정을 일관한 시점에서 파악해 그 연속성과 비연속성, 도시로서의 특성을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중국에는 베이징학이 있다. 2000년 중국 베이징연합대학교가 우리의 서울학과 서울학연구소를 모델로 연구소를 창립, 베이징학 연구가 첫 발걸음을 떼었다. 서울학연구소는 2010년부터 ‘동아시아 수도연구와 서울학’이라는 연구 주제로 연구영역을 국제적으로 확장해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 베트남 하노이와 교류하고 있다. ●서울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학문인가 서울학을 ‘서울지방학’이라고 호칭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국제지역학을 연구하는 학문인 국제지역학(International Area Studies)과 크게 나누는 의미에서 지방학(Local Studies)이라고 부르는 것이 연구범주나 학문의 개념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연구하는 데 지방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어색한 느낌이며 서울학이 더 잘 어울린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역할이나 기능에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학과 ‘한국학’의 연구범주도 다르다. 이 때문에 서울학을 서울지방학이라고 혼칭해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중국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분명하게 구분하려고 베이징시의 경우 ‘베이징시 지방 인민정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서울시 지방정부’라고는 하지 않으나 중앙정부 산하 기관은 서울지방국세청, 서울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경찰청처럼 ‘서울지방’이란 명칭을 사용한 지 오래다. ‘향토사’와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지역문화사를 이르는 향토사란 자연 지리적 공간과 전통문화를 결합한 공동체의 속성을 강하게 내포한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하여 지방학의 연구 목적이나 대상 혹은 범주가 주로 지역사회의 역사문화 전통으로 한정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계하자는 목소리이다. 국제지역 연구는 세계의 다른 국가나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국가 내부의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로서 지방학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방학의 연구방법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서울학은 국내 지방연구의 인식전환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서울이라는 상징성과 대표성 때문이다. 서울학을 학문 영역의 하나로 모색하면서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이 바로 ‘서울학이 학문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서울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던 안두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학 연구의 필요성과 가능성 및 그 한계’라는 논문에서 “서울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고 알고자 하여도 그 결실을 당장에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어느 누구도 서울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며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한 바가 없고 어느 학문 분야도 서울을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학 연구의 첫걸음은 서울의 정체성 찾기이며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연구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면 서울학의 연구 대상은 무엇인가. 공간적으로 행정구역상 서울은 물론 역사적으로 서울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던 지역공간 모두를 대상에 넣었다. 시간상으로는 서울의 역사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대상이다. 학문별로는 정치학, 국문학, 사회학, 도시행정, 지리학, 건축학, 도시계획학, 조경학, 생태학, 민속학, 역사학, 경제학, 행정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연계성이 모색됐다. 오늘날 서울을 구성하고 있고, 구성해 온 모든 요소들이 서울학의 연구 대상이다. 서울의 장소, 사람, 일, 문화를 만들어 내고 변화시키는 도시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밝혀냄으로써 더 나은 서울의 미래상을 그리는 것이 서울학의 연구 목적이다. 서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서울의 모든 것이 서울학의 연구 대상이요, 연구 목적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서울시장과 대권/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서울시장과 대권/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서울공화국’의 수장, 민선 서울시장의 역사는 대권 도전의 역사였다. 민선 서울시장 5명 중 대권 후보가 아닌 시장은 없었다. 1명은 성공했고, 2명은 실패했으며, 2명의 도전은 진행 중이다. 민선 1기 조순 전 시장은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 낸 인기의 신기루에 취해 낭패를 당했다. 대선 출마를 위해 2년 2개월 만에 시장직을 던졌지만, 공천의 벽을 넘지 못해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시장직을 대권의 징검다리로 여기게 한 잘못 채워진 첫 단추였다. 시장과 총리를 2번씩 지낸 관록의 고건 전 시장은 유력주자로 부상했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다.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다 당내 세력화가 어렵자 불출마를 선언했다. 3기 이명박 시장은 처음부터 대권을 염두에 두고 시장직에 도전했고, 시정을 청와대행 티켓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활용한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4~5기 오세훈 전 시장은 전임 시장과 판박이 행보를 유지하다 중도하차했다. 재선에 성공하고서 단숨에 유력 후보 자리를 차지하려고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정치 생명을 거는 자충수를 둔 것이다. 그러나 3년간의 정치 공백에도 불구하고 최근 여론조사에서 차기 유력주자 10명 명단에 이름을 다시 올림으로써 정치 복귀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새정치’ 바람을 타고 보궐선거에서 승리, 잔여 임기를 채우고 지난 6·4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5~6기 박원순 시장의 지지도는 고공행진 중이다. 다수의 차기 주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를 내달리고 있다. 서울시장직은 대권으로 가는 징검다리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서울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도 서울의 상징성과 위상 때문에 국가 최고지도자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큰 자리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언론은 서울시장을 차기 혹은 차차기 대선 후보로 여겨 왔다. 대통령 다음으로 많은 유권자가 뽑는 서울시장은 정치인일 수밖에 없다. 선출직 시장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고,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시정을 운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서울시장의 업무 수행이 대권으로 가는 치적과 인기를 높이는 정치공학적 과정으로 쓰이는 것을 문제 삼는다. 업적 쌓기와 인기 얻기가 공익성을 해치고 시정의 왜곡을 가져온다는 지적이다. 서울시장은 전형적인 행정가로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서울시장이 처리하는 정책 집행이나 각종 인허가, 관리감독 업무의 99% 이상이 행정 사안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제는 선출직 서울시장을 행정가로 위장하려는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임명직 관선 시장과 달리 민선 서울시장은 행정가가 아닌 태생적 정치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수행업무 99%가 정치업무라고 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갈등과 이해관계 조절 수요로 넘친다. 소통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도 정치력 부재에 대한 역설이다. 서울시장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울시장을 ‘대통령병’ 환자로 만드는 고질적인 시정의 과잉 정치화는 서울시장에 대한 공천 및 선출 과정 개혁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현행 서울시장 공천 및 선출 과정이 정치과정론의 선순환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시정 수행에 대한 잘잘못은 표로 심판하면 된다.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특별시장(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특별시장(하)

    ●유권자수 두 번째 많아 ‘선출직 빅2’로 꼽혀 민선 서울특별시장 시대가 열린 지 내년이면 20돌을 맞는다. 그동안 1기 조순(민주당·1995~1998), 2기 고건(새정치국민회의·1998~2002), 3기 이명박(한나라당·2002~2006), 4기 오세훈(한나라당·2006~2010), 5기 오세훈(한나라당·2010~2011), 5기 보궐 박원순(무소속· 2011~2014), 6기 박원순(새정치국민연합·2014~2018) 등 모두 6기에 걸쳐 5명의 서울시장이 선출됐다. 출신을 따져 보면 학자(조순), 관료(고건), 최고경영자(이명박), 법조인(오세훈·박원순)이다. 당선 당시는 관료(조순·고건), 국회의원(이명박·오세훈), 시민 운동가(박원순)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이명박)을 배출했고, 2명의 시장(오세훈·박원순)은 재선에 성공했다. 전직 총리 4명(정원식·고건·한명숙·김황식)이 출사표를 던졌지만 1승(고건) 2패(정원식·한명숙)의 초과한 성적표를 제출했다. 김황식 총리는 본선에도 나가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1995년 정원식 후보에게 경선에서 패했고, 1998년에는 선거법 위반 유죄가 확정돼 경선을 포기하는 등 2번의 예선탈락 끝에 시장직을 거머쥔 서울시장 ‘3수생’ 출신이다. ‘대권가도’ ‘제2의 권부’ ‘소통령’으로 인식되는 서울시장의 성공 여부는 대통령, 국회, 서울시의회 등 3박자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 이어 유권자 수가 가장 많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은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다. 지방선거의 시기적 특성상 대통령과 소속이 다른 야당 후보가 당선된 사례가 7차례 중 5차례였다. 조순 시장은 신한국당 김영삼 대통령(1993~1998) 임기 중 당선됐고, 고건 시장은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대통령(1998~2003), 신한국당이 당명을 바꿔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된 이명박 시장도 김대중 정권 아래 당선됐다. 고 시장은 김 대통령 임기와 겹쳤고, 이 시장은 노무현 대통령(2003~2008) 집권 때는 야당 서울시장이었다. 4기 오세훈 시장도 노 대통령 때 당선됐다. 박원순 시장은 이명박 대통령(2008~2013) 재임 때 5기 보궐선거에서 승리했고, 지금은 파트너를 바꿔 박근혜 대통령(2013~2018)과 6기를 동행 중이다. 고건·오세훈 시장은 여당 시장으로 밀월관계를 보냈지만, 조순·이명박·박원순 시장은 재임 기간 대부분을 불편한 야당 시장으로 보냈거나 보낼 예정이다. 그러나 영향력 측면에서 보면 집권 여당 대통령이 공천해 당선된 여당 시장보다 야당 시장이 센 경향이 있다.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기보다는 시민의 표심에 따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건 시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 ‘행정의 달인’ 역할에 만족했다. 오세훈 시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4기 야당 시장일 때 디자인 서울 등 서울의 얼굴을 바꾸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해 재선에 성공했으나 여당 시장이던 5기 때는 같은 당 소속이자 전임 시장인 이명박 대통령의 뉴타운정책이나 교통정책 등 뒤치다꺼리를 맡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서울시장의 힘은 유권자인 서울시민과 감시자인 서울시의회에서 나온다. 불특정 다수인 시민과 달리 서울시 의회는 서울시장이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대상이다. 서울시의회는 조례·예산 의결이나 행정사무 감사 등을 통해 서울시장과 집행부의 권한 남용과 독주 등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의회의 지배력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그때그때 달랐다. 조순 시장은 야당 시장이었지만 소속 민주당이 서울시의회 의석 147석 중 130석을 차지하던 시절이라서 끗발이 있었다. ‘서울 포청천’의 인기를 만끽했다. 당산철교 폐쇄와 여의도 공원화 사업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구청장도 강남과 서초 2곳을 제외한 23곳이 민주당 소속이었다. 고건 시장은 여당 시장이면서 시의회(104명 중 80명)와 구청장(25명 중 19명)까지 여당인 최고의 호시절을 누렸다. 이명박 시장은 임기 전반은 김대중, 후반은 노무현 대통령과 맞물렸다. 한나라당은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는 연속으로 졌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승리했고, 시의회(96명 중 81명)와 구청장(25명 중 23명)을 지배해 남부러울 게 없는 여건이었다. 청계천 복원, 뉴타운사업,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 주력 사업에 올인할 수 있었다. 오세훈 시장의 4기는 화려했다. 강금실 후보를 61% 대 27%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면서 시의회(106명 중 100명)와 구청장(25명 중 25명)을 석권했다. 디자인 서울, 한강르네상스 사업 추진에 힘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불행의 씨앗은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싹텄다. 자신은 한명숙 후보를 실낱같은 차(47.4%대 46.8%)로 이겼지만 시의회(민주 79명, 한나라 27명)와 구청장(민주 21명, 한나라 4명)을 내주었다. 무상급식 불협화음을 놓고 주민투표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나온 것은 의회와의 불편한 관계에서 불거졌다. 시의회를 지배하던 4기 시절의 달콤한 추억을 잊지 못한 탓이다. 그 결과는 2011년 보궐선거에서 안철수의 ‘새 정치’ 바람을 탄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승리와 지난 6·4선거에서의 재선으로 이어졌다. 안방을 야당에 내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의 장탄식이 광화문까지 흘러나왔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의 5기 잔여 임기와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한 6기 시정은 비록 야당 시장이지만 잔여 임기 2년 8개월에 이어 서울시의회(106명 중 77명)와 구청장(25명 중 20명)을 장악한 힘있는 시장이다. 게다가 소속 정당까지 지리멸렬이니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부 박 시장을 쳐다본다. 야당의 대통령 격이나 진배없다. ●민선 서울시장의 권한과 리더십 2013년 현재 서울의 인구는 1014만명으로, 면적은 국토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20%에 가깝다. 교육예산을 합친 올해 예산은 33조 원으로 우리나라 예산(376조원)의 10분의1쯤이다. 금융 등 경제력의 60~70%가 집중돼 있을 뿐 아니라 청와대와 입법·사법부가 자리 잡고 있어서 단순한 하나의 도시로 보기 어렵다. 서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수도권 인구(인천시 288만명, 경기도 1223만명)를 합치면 2527만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 4991만명의 절반을 넘는다. 초거대 도시인 메가시티이면서 인접 수도권 대도시와 연결된 거대한 도시띠 메갈로폴리스이기도 하다. 서울이 한국이고, 한국이 서울인 셈이다.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종합적인 요소와 기능이 작동하고 있어서 ‘서울공화국’은 단순한 상징 용어가 아니다. 서울시장이 시정과 관련된 사무를 통괄하는 의사결정권자이자 집행 책임자라는 점은 다른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과 같지만 1964년 시행 된 ‘서울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더욱 높은 위상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유일한 장관급 단체장이며, 조선시대 한성판윤의 전통에 따라 대통령과 당적이 달라도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서울시와 관련된 정책 수립은 물론 국가의 업무 배분이나 기획, 조정, 통제 등에도 참여할 수 있어서 국가정책 수립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시장은 서울시 본청과 25개 자치구, 서울시의회와 서울시 산하 국가직 5명을 제외한 시 소속 지방공무원 1만 6000여명의 임면·징계권도 행사할 수 있다. 정무부시장 등 정무직의 임면권도 마찬가지다. 서울메트로, 도시철도공사, 농수산물공사, SH공사, 서울시설공단 등 5개 투자기관의 사장과 서울의료원, 서울연구원 등 12개 출연기관장 역시 추천하거나 임명한다. 4만 8000명이 영향권 안에 있다. 정부, 여야 정당과 언론, NGO, 수도권 지방정부와의 관계 등 정치적 위상도 막중하다. 서울이 가진 수도의 상징성과 위상 때문에 서울시장의 리더십은 관심의 초점이다. 서울시장은 1000만 시민이 주주인 법인체의 CEO와 같은 위상을 가진다. 어떤 정책이든 입안하고 시행하기까지는 시의회, 시민단체, 수많은 이해집단과 갈등 해소를 위한 타협이 불가피하다. 고도의 비전 제시 기능과 출중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업무상 행정가로서의 역량이 더 많이 요구되지만, 선출직이라는 태생상 정치가일 수밖에 없다. 서울시장이 행정 경험과 지역 기반을 무기로 대권에 도전하는 일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 국회의원이 수상이 되는 내각제가 아닌 이상 서울시장이 대통령감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조순은 포청천 리더십·이명박은 코뿔소 리더십 역대 민선 시장의 리더십은 어떨까. 조순 시장이 보여 준 ‘포청천 리더십’은 다분히 유학자형이었다. 고건 시장의 ‘행정 리더십’ 또한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관료 스타일이었다. 이명박 시장의 ‘코뿔소 리더십’은 치밀한 코뿔소의 저돌성이 빛을 발해 대통령직까지 움켜쥐었지만 토건주의의 상처를 남겼다. 오세훈 시장의 ‘독불장군 리더십’은 세련된 외모와 언변 뒤에 감춰 둔 고집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박원순 시장은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시민소통 리더십’을 안고 완주할 모양이다. 그러나 NGO 시절 얻은 ‘협찬 인생론’의 습관이 혹여 주머니 밖으로 새나올까 우려된다. 리더십에 왕도는 없다. 대권 가도의 가시밭길이 있을 뿐이다. 현재 전적은 1승(이명박)3패(조순·고건·오세훈)로 열세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마음이 따듯해지는 인문학적 기획보도/이갑수 INR 대표

    [옴부즈맨 칼럼] 마음이 따듯해지는 인문학적 기획보도/이갑수 INR 대표

    전 세계에서 구글 검색자 수는 하루 약 10억명이며,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가입자 수는 13억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정보통신기술(ICT) 강국답게 일상에서의 많은 일들이 온라인과 스마트폰에서 시작하고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야흐로 아날로그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디지털 사회를 넘어 초디지털 사회로 가고 있다. 미디어 세계의 변화도 예외는 아니다. 온라인 매체에 이어 개인 미디어까지 넘쳐나는 요즘은 사람들이 인쇄 매체들에서 습득하는 정보의 의존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일간지의 경우 높은 제작비 부담과 광고 감소로 인해 제한적인 지면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보니 당장의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기사나 기획보도 위주로 지면이 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어려운 여건하에서 서울신문이 시의성 있는 사회적 문제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지만 우리의 삶에 문화·예술적 소양들을 더해 주는 기획보도 시리즈를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런 기획성 기사들은 바로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김주혁의 ‘가족 남녀’, 함혜리의 ‘미술관 건축기행’, 그리고 ‘김문이 만난 사람’과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 같은 시리즈물 들이다. 서울신문의 이런 기획들은 콘텐츠의 경쟁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시점에 신문의 경쟁력도 심층적인 분석력에 바탕을 둔 질 높은 콘텐츠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이런 시도는 서울신문만의 차별성을 유지하는 동력이며 나아가 독자들의 인문학적 감성을 채워 주는 양념 같은 기사들이자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1년 이상을 연재해 온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를 보자. 서울의 근간을 이루는 도로와 남산 그리고 한강에 얽힌 이야기에서부터 풍수지리, 서울특별시장, 도심 재개발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서울이 있기까지 다양한 기사로 이어지고 있다. 함혜리의 ‘미술관 건축 기행’은 문화 생태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고 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공간 구성과 역사 그리고 건축적인 배경과 에피소드까지 담아내어 마치 큐레이터를 따라 전시를 보는 듯한 전개가 돋보인다. 자칫 해외 여행 가서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나 둘러보고 끝내기 쉬운 것을 보완해 주는 내용으로 따스한 해가 비치는 창가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바람이 있다면 유럽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을 넓혀 주었으면 하는 점이다. 장기 연재가 끝난 ‘김문이 만난 사람’도 다른 인터뷰 기사와는 접근이 달랐다. 당대에 반짝 뜨는 화제의 인물이나 스타가 아닌,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열정과 헌신을 바쳐 자기만의 영역을 쌓아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는 점이 좋다. 김주혁의 ‘가족 남녀’ 또한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과 남녀의 문제는 물론 육아나 가사 분담 같은 이슈들에 대해 우리 사회의 전통적 관념과 제도, 사람들 간의 간극을 뛰어넘으며 합리적 대안과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울신문의 이러한 시도는 그 어느 일간지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앞으로도 인문학적 기획 시리즈들의 스펙트럼을 넓혀 독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주제들을 발굴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도와주는 알찬 기사로 풀어내 주기를 기대해 본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6) 서울특별시장(중)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시장, “공무원은 모두 도둑” 호통치더니…

    ●서울특별시장 변천사 ‘정부 속의 정부’ 서울특별시와 흔히 ‘소통령’(小統領)으로 일컬어지는 서울특별시장의 변천사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몇 가지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률적으로 파악하기엔 우리 근현대사의 진로가 너무나 복잡다단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외세강점기와 독립 쟁취가 아닌 강대국 협상의 산물인 미 군정 과도체제는 정부수립 전후 극단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후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격변의 파노라마가 이 땅을 휩쓸었다. 서울특별시장의 역할은 특별했다. 중앙부처도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라고도 할 수 없는 수도 서울의 독특함이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자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울시장의 위상 변화는 대략 5단계로 나눌 수 있다. 조선 500년을 관통한 한성부와 한성판윤의 명멸,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경성부와 경성부윤으로의 위상 격하, 한국전쟁과 두 번의 정변 과정에서 맞은 서울시정의 공백, 30년간 지속한 군사정권 아래 관선시장,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선출직 빅2’로 꼽히는 민선 서울시장의 탄생 등이다. 특히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정을 획일적으로 관선과 민선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구분 짓기엔 미흡하다. 왕조의 유물인 한성판윤과 일제 잔재인 경성부윤은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하겠으나 관선과 민선시장을 뭉텅 그려 역대 서울시장(1~36대)으로 묶기엔 무리라는 뜻이다. 같은 서울특별시장이지만 임명직 시장과 선출직 시장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장의 위상 변화에 따른 구분과 아울러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크게 1기와 2기로 떼는 것도 방법이다. 관선 1기는 1대 김형민(1946년 9월 29일~1948년 12월 14일) 시장부터 10대 장기영(1960년 5월 2일~1960년 6월 30일) 시장 재임기로 볼 수 있다. 이어 4·19 혁명의 희생으로 쟁취한 최초의 민선 시장인 제11대 김상돈(1960년 12월 30일~1961년 5월 16일) 시장을 민선 1기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5 ·16 군사정변으로 임명직 관선시장 시대로 되돌아간 제12대 윤태일(1961년 5월 20일~1963년 12월 16일) 시장부터 제29대 최병렬(1994년 1월 3일~1995년 6월 30일) 시장까지가 관선 2기이고, 본격 지방자치시대를 연 제30대 조순(1995년 7월 1일~1997년 9월 9일) 시장부터 제36대 박원순(2011년 10월 27일~현재) 시장까지를 민선 2기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관선과 민선시장이 혼재된 서울특별시장사를 정리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민선 서울특별시장사에 발자취가 뚜렷한 김상돈의 민선시대를 빼버리고 조순 시장을 민선 1기로 계산해 현 박원순 시장을 민선 6기로 치는 것은 잘못된 계산법이다. 엄연하게 서울시민의 손으로 뽑은 첫 민선 시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으로 모는 격이다. 말로는 ‘첫 민선 시장 김상돈’이라면서 민선시장 계보에서는 빼버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인 최초의 민선 시장기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의 영욕사 관선 서울특별시장은 권력의 꼭두각시였다.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제1대 김형민은 미군정이 임명한 구색갖추기용 한국인 시장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 영어교사를 거쳐 석유상을 하다 미군정 관계자와 인연을 맺어 해방 이후 첫 한국인 경성부윤인 이범승(1945년 10월 25일~1946년 5월 9일)에 이어 제2대 경성부윤으로 취임했다가 얼떨결에 벼락출세했다. 관선과 민선을 합쳐 역대 최연소인 39세 시장이다. 미군정청은 미군 시장 윌슨 중령이 한국인 시장을 지휘하는 ‘투 톱 체제’로 운영했다. 비록 허수아비였지만 김형민 시장은 ‘서울’이라는 지명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미군정청 군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서울시 헌장’(Charter of The City of SEOUL)을 제정토록 하고, 경성부를 서울특별시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는 일본식 동명과 가로명, 도로명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명으로 바꾸는 의미있는 일도 했지만 일제 잔재 탈피에 급급해 서두르는 바람에 옛 우리말 지명 되찾기에 실패하는 우도 범했다.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서울은 건국기의 혼란 와중에 우남(雩南)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시’(雩南市)로 이름을 바꿨을 개연성이 높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추종자들의 압력을 이겨냈다는 후일담이다. 이승만도 집권 후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지명 중 유일하게 한자로 표시가 안 되는 서울이라는 지명은 문제가 있다”면서 지명 변경 검토를 지시해 은연중 자신의 아호를 도시명으로 정하고 싶은 의도를 드러냈다.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면서 남산에 25m 높이의 세계 최대 동상을 세우고, 시민회관을 우남회관, 남산 팔각정을 우남정이라고 작명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이름을 바꾸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뿐더러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엔 민망하다며 차일피일 미루다 4·19를 만나 없었던 일이 됐다. 관선 시장의 면면을 보면 관선 1기에는 정치인출신(윤보선, 이기붕, 고재봉, 허정, 임흥순, 장기영)이 대부분 이었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윤태일, 김현옥, 구자춘)과 경찰(정상천, 박영수, 염보현)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이후 서울시 행정이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면서 행정관료(양택식, 김성배, 김용래, 고건, 이해원, 이상배, 이원종, 우명규) 출신이 자리를 잡았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제2대 윤보선(1948년 12월 15일~1949년 6월 5일) 시장은 취임 일성으로 “쓰레기를 청소하라”라고 지시했다. 제8대 허정(1957년 12월 14일~1959년 6월 11일) 시장은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모 야당의원에게 “깡패 같은 놈”이라며 호통을 친 뒤 수위를 불러 시청 밖으로 끌어냈다. 신당동 동회장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의 마지막 하수인 임흥순(1959년 6월 12일~1960년 4월 30일) 시장은 서울시 공무원 전원이 도시락을 싸오도록 해 ‘도시락 시장’으로 통했다. 첫 민선 시장이자 마지막 민선 시장이 될 뻔했던 김상돈 시장은 4·19 혁명이 낳은 비운의 스타였다. 등록상표인 카이저수염에 국민복을 차려입고 엄청난 거구를 흔들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서 전임 관선 시장 장기영을 꺾은 그가 얻은 표는 서울시 총유권자의 19.5%에 불과해 ‘2할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취임식장에서 터진 “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갈은 서울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록이다. 서울시는 복마전이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전부 도둑놈이라는 이 한마디 때문에 지금도 서울시는 복마전의 그림자를 벗지 못하고 있다. 시민과의 면담은 대부분 청탁이므로 면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취임한 제12대 윤태일 시장은 육군 소장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채 시장직에 취임했고 그만둘 때까지 군복차림이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한신(육군 소장) 장군과의 라이벌의식이 지방자치사를 바꿨다. 자신의 전용 지프 번호가 26번이고 한신 장관이 12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울시 번호판을 아예 바꿨다. 앞에 지역명을 넣어 ‘서울 1000번’으로 바꾼 것이다. 한신 내무부장관의 지휘를 받을 수 없으니 서울시를 내부무 산하가 아닌 총리실 산하로 바꿔달라고 박정희 의장에게 떼를 썼다. 이 덕분에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만들어져 서울시가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고, 국무회의에 배석하는 장관급이 됐다. 제14대 김현옥(1963년 3월 31일~1970년 4월 15일) 시장에서부터 15대 양택식(1970년 4월 16일~1974년 9월 1일) 시장, 16대 구자춘(1974년 9월 2일~1978년 12월 21일) 시장 등 3명의 시장이 재임한 15년 동안 서울의 지형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은 ‘한강의 기적’ 기반을 닦았고, 지하철시대를 열었고, ‘강남 아파트공화국’이 됐다. 제18대 박영수(1980년 9월 2일~1982년 4월 27일) 시장 이후 제21대 김용래(1987년 12월 30일~1988년 12월 4일) 시장까지 4대에 걸친 서울시정의 모든 것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를 마감하고 1990년대를 연 제23대 박세직(1990년 12월 27일~1990년 2월 18일) 시장부터 마지막 관선 시장 제29대 최병렬 시장까지는 개발시대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은 각종 비리사건으로 얼룩졌고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마감됐다. ●관선 서울특별시장들의 진기록 관선시장이 세운 기록도 다양하다. 최연소는 김형민(39) 시장이 유일한 30대를 기록하고 있고, 이어 김현옥(40), 구자춘(42), 윤태일(43), 양택식·김상철(46), 정상천(47), 김태선(49) 시장이 40대였다. 외세강점기와 전쟁, 혁명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젊은 인재 등용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김형민 시장은 마지막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이라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보유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림자 이기붕(1949년 6월 6일~1951년 5월 8일) 시장이 제3~4대를 연임했고, 미국 유학파로 경찰출신이던 김태선(1951년 6월 27일~1956년 7월 5일) 시장이 5~6대 시장을 연임했다. 이후 관선 시대에 연임은 없었다. 김태선 시장의 재임기간은 4년 11개월로 관선시장으로선 최장수이지만 관선과 민선을 합쳐 6년을 재직한 고건 시장에게는 뒤진다. 그러나 보궐선거로 오세훈 시장의 잔여 임기 2년 8개월을 채운 박원순 시장이 두 번째 임기 4년을 무사히 채우면 6년 8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갈아치울 전망이다. 최단명 시장은 그린벨트 훼손 문제로 부임 7일 만에 물러난 제26대 김상철 시장이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수습을 위해 임명됐다가 성수대교 부실 시공 책임을 지고 11일 만에 물러난 제28대 우명규 시장과 수서택지개발 특혜비리로 53일 만에 도중 하차한 제23대 박세직 시장이 뒤를 잇는다. 성수대교 붕괴 수습용 시장을 맡았던 마지막 관선시장 최병렬 시장은 이임식을 하러 가던 길에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제2대 윤보선 시장이 대통령에 올랐고, 제4대 이기붕 시장은 부통령에 선출됐다. 제8대 허정 시장은 4·19 혁명 직후 과도내각 수반, 대통령직무대행, 국무총리를 각각 맡았고, 제22대 고건 시장은 2년간의 관선 시장직에서 무사히 물러나고 나서 제30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2003년 다시 제35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대통령직무대행을 맡았다가 8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허정 시장과 고건 시장이 세운 시장, 총리, 대통령권한대행의 3관왕 기록은 앞으로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선 서울특별시장이 최고 권력자의 명을 받드는 꼭두각시 최고 집행자였다면, 이후 전개될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시민들의 명을 받드는 대신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자리가 되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15) 서울시장(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15) 서울시장(상)

    ●관직명 판사-판부사-판윤-부윤-서울시장 등 13번 바뀌어 서울시장이란 어떤 자리인가. 서울의 역사는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달빛 아래서 흐릿하게 나타나는 야사(野史)가 대부분이다. 대낮에 떳떳하게 펼칠 수 있는 정사(正史)는 조선 개국 이후로 봐야 한다. 당시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사실상 국가 그 자체였다. 서울이 조선이고, 조선이 곧 서울이었다. 서울은 한성 또는 한양이라고 불렸는데 한성부(漢城府)가 오늘의 서울시청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이 서울특별시장이다. 일제 식민 시기 서울은 경기도에 속한 일개 지방도시였고, 경성(京城)이라는 생소한 지명을 부여받았다. 제국의 유일한 수도는 도쿄(東京)였기에 조선 사람의 뇌리에서 수도의 위상을 지우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서울시장의 지위 또한 경성부윤으로 깎아내렸다. 판윤(判尹)이라는 벼슬의 주인은 한성판윤 단 한 사람이었지만 부윤(府尹)은 여러 지방도시의 장(長) 중 한 명이었다.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야 서울과 서울시장은 어느 정도 권위를 회복했다. 한성판윤과 관선 시장이 왕조와 권위주의 시대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을 주로 수행했다면 민선 자치 20주년을 앞둔 지금 서울시장의 주가는 상한가를 치고 있다. 누가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어떠한 족적을 남겼을까. 서울역사박물관이 1997년 발간한 ‘한성판윤전’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추출해 정리한 ‘한성판윤 선생안’(先生案)이 수록돼 있다. 초대 성석린 판한성부사부터 민선 6기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에 이르기까지 620년 동안 거쳐간 1446명의 이름이 명멸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직 이름도 판사-판부사-판윤-부윤-서울시장 등으로 13차례나 변경됐다. 실록에 한성판윤의 이·취임 내용이 누락돼 한성판윤을 역임하고도 수록되지 않은 인물이 적지 않았고, 너무 자주 바뀌었고 중임자가 많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숫자와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또 일제강점기에 재임한 일본인 경성부윤 18명과 광복 이후 서울특별시의 관선 시장 29명과 민선 시장 5명도 포함된 숫자다. 이와 관련해 향토사학자 박희씨는 2005년 발표한 ‘역대 서울시장 연구’에서 “한성판윤을 포함한 서울시장은 모두 1427명이었으며 이명박 시장이 제2005대 서울시장”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중기 이언강이 무려 11차례나 중임한 것을 비롯해 한 사람이 여러 차례 시장에 재임한 사례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박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원순 시장은 제2008대 서울시장이며 역대 서울시장을 지낸 사람은 모두 1429명이다. 최고 권력자로 따지면 역대 조선왕 27명과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11명에 대통령직무대행 6명을 합쳐도 40여명에 불과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 165명과 조선 말 총리대신 및 의정대신은 물론 정부 수립 후 역대 국무총리 42명을 다 합쳐도 220명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한성판윤은 민선 서울시장보다 파워 막강했던 자리 조선의 중앙행정체제는 1부 6조 체제였다.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전원 일치 합의제 기구인 의정부(議政府) 아래 오늘의 정부 부처인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두었다. 현재의 부(部)를 조선시대에는 조(曹)라고 했다. 한때 지금의 광화문광장 KT 사옥 앞 옛 한성부터에 ‘경조(京兆) 아문터’라는 표석이 서 있었는데 이 때문에 6조와 경조를 유사 부서의 이름으로 잘못 알게 됐다. 2009년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면서 세종대왕 동상 옆에 한성 부터 표석이 새로 설치됐다. 한성부는 의정부와 맞먹는 파워 집단이었다. 한성부의 권한과 업무는 오늘의 서울시청보다 더 광범위했다. 정2품 한성판윤은 비록 임명직이지만 왕에게 신임을 얻었을 때는 지금의 민선 서울시장보다 힘이 더 셌다. 한성부는 지방행정조직이 아니라 중앙행정조직이었고, 한성판윤도 관찰사나 부윤과는 달리 중앙 관직이었다. 사법 기능과 수도 치안 유지 기능까지 한손에 쥐었다. 한성부는 행정기관이면서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의 하나였고, 포도청과 더불어 궁궐과 도성을 지키고 순찰하는 치안업무도 맡았다. 20만명이 거주하는 동시대 세계 최대 규모 도시의 하나인 한성의 도시 시설을 관리하는 관청인 동시에 한성 부민에 대한 목민관청의 역할을 했다. 지방의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거나 왕의 행차 때 어가를 안내하기도 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를 맡거나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니 외교업무마저 한성판윤의 몫이었다. 한성부는 전국의 호적 관리와 호패 발행을 통해 도성 안팎의 인구를 통제하고 군역과 부역을 관리했으며 궁궐과 한양 도성, 시장, 도로, 하천을 관리했다. 일반 행정 기능과 함께 사법 기능까지 수행한 까닭은 전국에서 발생하는 토지나 가옥, 채무 관련 소송을 한성부가 도맡아 처리했기 때문이다. 한성부 아래에 오늘의 구청인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5부를 두고 각 부 아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을 둔 것이 기본 편제였다. 한성부가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한 이유는 다분히 복합적이다. 판서가 다스리는 중앙부처는 6조였으나 한성부를 의정부와 함께 부(府)라고 칭한 것은 오늘의 정부(政府) 반열로 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시는 국방을 제외한 모든 종합 행정이 이뤄지는 기관이다. “한성판윤 되기가 영의정 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정승이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한성판윤의 집행 권한이 그만큼 많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켰다는 뜻이었다. ●낙점하기 전 친·외가의 3대까지 집안의 지체 살펴 한성판윤만 제대로 두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체제였다. 조선의 왕들은 한성판윤을 낙점하기 전에 친가와 외가의 3대까지 집안의 지체를 살폈고,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거나 성품이 편협되지 않은 인물을 고르고자 외가 쪽 3대까지 살폈다고 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육조거리 왼쪽에 의정부-이조-한성부가 나란히 위치한 것만 봐도 한성부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한성판윤을 지낸 다음 이조판서로 옮겨 가는 사례가 많았고 한성판윤 역임자 중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 유독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판윤은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이 보좌했는데 오늘의 서울특별시 행정 1부시장과 2부시장 격이다. 오늘의 장관에 해당하는 6조 판서는 참판이라는 1명의 차관을 두었지만 한성부는 예외적으로 차관이 2명이었다. 업무의 과중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성판윤은 중앙 관직이어서 3정승, 6판서와 함께 왕이 집전하는 어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인 서울특별시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유일의 전통이 여기서 비롯됐다. 지금의 도지사나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관찰사와 부윤이 종2품의 외관직이었지만 한성판윤은 수도의 시장 이상의 의미를 뒀다. 한성판윤은 판서를 지내거나 참찬, 대제학, 강화유수를 지낸 정2품이 가는 자리로 여겨졌고 종2품 참판이나 관찰사, 승지에서 발탁된 사례도 가끔 있었다. 한성판윤을 지낸 다음 승진보다 수평 이동을 할 경우 대개 이조판서로 옮겼다. 의정부 좌우참찬이나 관찰사, 대사헌으로 많이 옮겼으며 정1품 우의정으로 승진한 사례도 있었다. ●유명 인물로는 황희·맹사성·서거정·민영환 한성판윤을 지낸 유명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서거정, 권율, 이덕형, 박문수, 박규수, 박영효, 지석영, 민영환 등을 꼽을 수 있다. 4차례 이상 지낸 사람은 53명이었다. 무려 10번을 중임한 이가우는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취임과 퇴임을 거듭해 별칭이 ‘판윤대감’이었으나 재임 기간은 통틀어 1년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북벌을 추진했던 이완은 7번, 독립협회에 가담했던 이채연은 6번이나 한성판윤을 지냈다. 철종 때 김좌근, 고종 때 이기세, 한성근, 임응준은 1일 초단임 시장으로 끝났다. 한성판윤은 왜 그렇게 자주 바뀌었을까. 한성부를 다스리기보다 중앙정치에 지나치게 간여하여 적을 많이 만든 게 탈이었다. 송사를 다루는 사법업무도 수명을 재촉했다. 무엇보다 구경(九卿)이라고 하여 의정부 좌우참찬, 6조 판서, 한성판윤을 아홉 개의 명예로운 벼슬로 꼽았는데 9경 벼슬을 여러 번 거치는 게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골치 아픈 한성판윤직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이름만 올리고자 한 욕심이 자리 이동이 가장 심한 관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조선 513년(1392~1905) 동안 한성판윤은 평균 재임 기간 3.6개월의 ‘파리목숨’이었다. 광해군 때 오억령은 무려 13년 4개월이나 집권했으며 단 하루 만에 바뀐 사람도 5명에 이른다. 조선 말 순조대에 접어들면 1년 이상 자리를 지킨 인물이 1명도 없었다. 잦은 교체로 말미암은 공백을 채우려고 종5품 판관 중 1명은 장기 복무케 했다. 한성판윤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여흥 민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등 모두 35개 가문이었다. 왕족인 전주 이씨가 43명으로 가장 많았고 여흥 민씨가 35명이었는데 8명이 고종대 20년 동안 발령났다. 고종 27년인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25명이 바뀌었고, 고종 재위 43년 7개월 동안 모두 378명의 한성판윤이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홍상한과 아들 낙성, 손자 의모가 3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와 두 아들 명균, 명빈 3부자가 한성판윤에 오르기도 했다. 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내고 나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게 흠결이 되지 않는다. 서울시장을 지낸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례가 있고, 서울시장에 오르면 차기 혹은 차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것도 500년 이상 내려온 한성판윤의 오랜 전통과 내력의 힘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북한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등 5개 나라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 무렵 한성백제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토성을 쌓으면서 비롯됐다. 132년 백제 개루왕이 산성을 쌓아 북진의 기치를 높이 올렸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하여 남진의 발판으로 삼았고, 551년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여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1387년 고려 우왕이 중흥산성을 쌓았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 우리 전쟁사이다. 한반도의 목구멍(咽喉)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각축의 역사를 웅변하는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순수’(巡狩)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이며 순행(巡行)이란 용어가 일반적이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진흥왕은 가야 병합, 한강 유역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왕성한 대외정복사업을 기념하고자 4곳의 비석을 세웠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3번지 북한산 비봉 정상이 순수비가 서 있던 자리이다. 큰 비석이 있다고 해서 비봉(碑峰)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순수비는 함경남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경상남도 창녕비와 더불어 진흥왕 재위 말인 568년부터 576년 사이에 세워졌다. 1972년 옮겨질 때까지 최소 1400년 동안 한강과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풍상을 겪었다. 이 비석의 정체는 건립 1200여 년 후인 1816년에야 밝혀졌다.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로 서예가, 화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개조(開祖)였다. 실용학문을 연구하라는 스승 박제가와 박지원의 가르침을 좇아 금석학과 문자학, 음운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두루 연구했다. 그때까지 이 비석은 ‘고려 태조 비’ ‘도선국사 비’ ‘무학대사 비’ 등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의 비문을 고증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서 추사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 경도(한양)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154cm)이고 너비는 3척(71cm)이며 두께는 7촌(16cm )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 행 몇 자씩을 분별할 수 없다.…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그래서 마침내 이 비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의 비(無學之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라고 적었다. 북한산비는 1200년 만에 주인을 찾았다. 추사는 비석 왼쪽 측면에 ‘두 번 와서 비의 글을 읽었다’라는 내용의 글을 손수 새겼다. 순수비는 1934년 국보 제3호로 지정됐다. 1400년 역사에다 추사의 글씨까지 더해지니 ‘국보 중의 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국보 1호가 아니라 3호로 정한 일제의 간사함에 치가 떨린다. 문화적 열등감의 발호였으리라. 숭례문이 2008년 소실되고서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이 일 때마다 ‘국보의 번호는 관리번호일 뿐 가치의 순서와는 무관하다’고 변명하는 우리 문화재 당국의 순진함도 못마땅하기는 매한가지다. 추사는 비석을 발견했을 때 덮개돌이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고 적었지만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총알 세례를 받아 탄흔이 선연하다. 언제인지 모르게 몸돌 위쪽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잘렸고, 오른쪽 아래 귀퉁이는 뭉텅 떨어져 나갔다. 1972년 일단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 보존하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06년 10월 그 자리에 복제비를 세웠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 그리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이 서울을 지키는 대표적인 성곽이다. 우리나라에는 3000개에 이르는 산성이 있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대 도시 서울주변엔 숱한 성곽의 유허가 존재하지만, 규모나 형태면에서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성곽이 서울을 제대로 지켰나’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북한산성은 왜 쌓았을까. 한양도성의 북쪽 외곽 방어막인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단 한번도 서울을 사수하지 못했다. 서울을 남쪽에서 보호하는 남한산성이나 강화성과 달리 외적의 침입 때마다 무용지물이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추풍낙엽으로 무너졌고, 두 번의 반정(중종과 인조) 과 이괄의 난 때도 맥없이 뚫렸다. 한국전쟁 때 창동~미아리 전선을 형성했지만 서울사수의 최후 방어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자는 북쪽 외곽 방어선 축조에 집착했다. 고려의 영향이 컸다.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태조 왕건의 관을 옮겨둔 오래된 피란처였고, 1232년 몽골 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최영 장군의 전공이 있다는 점에서 경복궁의 뒤를 지키는 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성을 지키려면 곡성(曲城)과 돈대(墩臺) 그리고 해자(垓子)가 필요하다. 한양도성은 방어용 성이 아니었다. 임진, 병자 양란에서 경험하였듯이 군사적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개축한다면 몰라도 수축만 하게 한다면 나을 것이 없을 듯하다”라는 숙종의 고변이 비변사등록에 남아있다. 조선 왕들에게 성곽은 국가 권위와 통치의 표상이었다. 외적을 방어하는 국력의 표현이기에 앞서 내부의 적대세력을 물리치는 대내용이었다. 숙종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에서 구역을 나눠 성을 쌓게 했다. 축조공사는 불과 6개월 만에 끝났다. 북한산성의 넓이는 49만㎡로 한양도성의 14만㎡보다 3배 이상 넓다. 왕이 집무를 볼 수 있도록 1만㎡에 124칸의 행궁을 지었다. 2만 6000섬의 군량미를 확보하고, 저수지 26개와 우물 99개를 팠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나한봉~용혈봉~미륵봉(의상봉)~원효봉~영취봉 같은 험한 봉우리를 이어 구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숙종은 몸소 시단봉 동장대에 올라 9.73km에 이르는 산성의 위용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때 지은 성곽과 행궁은 1915년 대홍수 때 대부분 떠내려갔다.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 경기편에서 도성과 산성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했다. “비록 산세를 따라 성을 쌓은 것이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하다. 또 성 위에 작은 담을 쌓지 않았고, 해자도 파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난리 때 모두 지켜내지 못했다”라고 한양도성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북한산성에 대해서도 “숙종 때 조정에서 도성을 고쳐 쌓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동쪽이 너무 낮아서 만약에 강을 막아 그 물을 성에다 댄다면 성 안 백성은 모두 물고기 신세’라는 말이 있어 그 논의는 중지되고 말았다”라고 언급했다. 숙종 재위 기간 내내 이어진 산성 축조 논쟁을 지적한 말이다. 북한산성 축조가 처음 논의된 1675년부터 완공된 1711년까지 무려 36년을 끈 북한산성 축조논쟁을 비꼰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북한산성으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전략인가” “북한산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북한산성은 험준하여 지키기는 좋지만 도성민을 수용하기는 좁지 않은가”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니 강화성이나 남한산성 둘 중 하나는 포기하는 게 옳다” 등의 온갖 논의가 난무했다. 찬반의 논리는 단순했다. 찬성론자들은 유사시 왕이 피할 곳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고, 반대론자들은 병자호란 때 청과 맺은 정축조약의 ‘성곽을 수축할 수 없다’라는 조항을 위배해선 안 된다면서 맞섰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1710년 청으로부터 날라온 한 장의 외교문서가 결정적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니 연해 지방의 방어에 유의하라’는 문서가 성곽수축 금지조항을 해제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반대논리를 잃자 축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청화자 이중환은 비판적이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사현(무악재)이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녹번현이 있다. 당나라 장수가 여기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겠다’하였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벽제령인데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한 곳이다. 고개 두 곳과 벽제령은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 …천연적인 험한 곳을 버리는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벽제령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임진나루터이다.…아주 험하게 되어 있으니 참으로 지킬 만한 곳이다”라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소용도 없는 도성과 산성을 짓는다고 백성을 달달 볶거나 세금을 축내지 말고 지킬 만한 곳을 찾아서 지키라는 주장이었다.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대통령의 7시간/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대통령의 7시간/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오늘부터 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된다. 세월호법 처리로 죽을 쑨 야당은 ‘대통령의 7시간’을 쟁점으로 삼아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펼칠 모양이다. 발단이 된 4월16일 그날,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7시간의 일정을 청와대가 소상히 밝혔고, 대통령이 만났다는 정윤회씨의 알리바이도 수사기관에 의해 확인되면서 의문은 다 풀렸는가 싶었는데…. 산케이신문 전 서울 지국장이 쓴 칼럼 한 편이 마른 섶에 불을 지핀 격이다. ‘일본식 에로티시즘’을 연상케 하는 글이었다. 이제 웬만한 막말과 까발리기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정도로 내성이 쌓였지만, 강제 위안부나 독도 문제로 각을 세워 온 일본 극우 신문의 ‘묘한’ 신상 털기는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의 원수를 그렇게 꼰 것은 명백한 외교 사안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며 발끈했다.. 대통령도 성녀(聖女)가 아닌 이상 도저히 묵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정도 없이 청와대에서 24시간을 생활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국정에 매진한다고 듣고 있지만, 독신 여성 대통령에게는 시시콜콜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도 있을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기자 같은 필부조차 매일 말 못할 사정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통령의 7시간’ 조선판 사례 2건이 나온다. 1404년 태종이 사냥 길에 사관(史官)이 따라오자 “오늘은 사사로운 일이니 따라오지 마라”라고 이르고 사냥터로 떠난 것이 첫 번째 사례다. 그런데 화살을 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다치지는 않았으나 창피했는지 측근에게 “이 일을 사관에게 알리지 마라”라고 지시했다. 행적을 좇아 손속없이 기록하는 사관 없이 호젓하게 사냥을 즐기고 싶었고, 낙마한 일을 굳이 알리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종실록에는 “임금이 사냥터로 떠나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임금이 말에서 떨어지자 주위를 살피며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두 번째 사례는 한국적 리더십의 최고봉 세종에게 닥쳤다. 부왕 태종의 실록이 편찬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실록을 좀 보고 싶다. 절대 고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청했다. “고치지 않으실 것은 아오나 장차 전하의 실록에 전하가 읽었다는 기록이 남습니다”라는 맹사성의 답이 돌아왔다. 세종은 “내가 미욱했다.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라”라면서 물러났다. 예상했겠지만, 세종실록에는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하라”를 포함한 문답이 모조리 남아 있다. 사관은 역사에 기록을 남긴다는 점에서 무소불위의 전제군주조차 두려워한 존재였다. 또 맹사성은 최고 권력자에게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직언을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왕이나 대통령에게 사생활이 없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우리 전통은 좀 고약한 구석이 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재위 379개월 중 화를 낸 횟수가 21차례에 불과했고, 사적인 일로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화가 날 때마다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키겠다’(施仁發政)라는 심정으로 감정을 조절했다. 박 대통령도 ‘어질 인(仁)’ 자를 화두로 붙잡고 역사의 시험대를 건넜으면 한다. 세종처럼. joo@seoul.co.kr
  • 서울의 궤적 좇는 ‘현대판 택리지’

    서울의 궤적 좇는 ‘현대판 택리지’

    서울 택리지/노주석 지음/소담출판사/304쪽/2만원 우리나라 지리서의 효시인 ‘택리지’ 저자 이중환이 오늘의 서울을 돌아봤다면 ‘서울 택리지’는 어떤 내용으로 구성됐을까. 저자가 옛날과 오늘날 서울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서울의 궤적을 좇게 된 화두다. 저자는 서울의 기원에서 시작해 강남 개발 비화로 글을 맺는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 따르면 서울은 기원전(BC) 18년에 조성됐다. 2000년을 훌쩍 넘긴 고도다. 임진왜란, 한국전쟁, 근대화 등을 거치며 민족의 혼이 서린 유적과 건물은 대부분 파괴됐다. 한강의 기적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불과 60년밖에 안 걸렸다. 저자는 이런 서울의 변화상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좇으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광화문, 운종가, 청계천, 궁, 성곽, 사대문 등 공간의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저자는 강북이 조선왕조의 도읍 한양이라면 강남은 우리 손으로 건설한 ‘진짜 서울’이라고 말한다. 18세기 인물인 이중환은 당대 서울을 풍속이 고르지 못하다며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평했다.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기에 사색당파의 본거지인 서울을 곱게 보지 않았던 것. 지금은 어떨까. 저자는 오늘의 서울인 강남을 한강의 기적이라는 축복과 천민자본주의의 저주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규정했다. 빈부 격차의 압축판이라는 의미다. 이중환이 정치적인 관점에서 서울을 비판적으로 봤다면 저자는 경제적인 시각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기자의 시각과 감각이 학술지의 딱딱함을 벗어나게 했다. 지난해 6~12월 서울신문에 연재한 칼럼에 외부 기고 등을 덧붙여 재구성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난공불락 요새 18세기 방랑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기도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광주부)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화가 결정되고 나서도 국도(한양)를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성이라 생각해서, 성 안에다 절 아홉을 세워 스님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녹을 주는 까닭에 스님들은 오로지 활과 살로써 업을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스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내려온 것이지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3세기 전 세계를 휩쓴 무적 몽골군의 두 차례 공격과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파상공세도 47일간 막아냈다. 해발 4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쳐 11.7㎞가 넘는 성벽을 쌓았는데 내부는 넓고 평평했다. 우물이 80곳, 연못이 45개에 이를 정도로 물이 풍부해 군량미와 소금만 잘 비축하면 수만 명의 병력이 장기농성할 수 있는 철벽의 금성탕지였다. 우리나라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다 합쳐 3000여개의 성이 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니 1리마다 1개의 성곽을 쌓은 셈이다. 가히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남한산성은 산성 축성기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성곽유산으로는 평지 성인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1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문화대국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등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와 독립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 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며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남한산성이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63%, 하남시에 24%, 성남시에 13%가 속해 있다. 광주는 고려 태조가 이름 짓기 이전까지 한강 남쪽의 넓고 오래된 땅 한산(漢山)이었다. 하남이라는 지명은 한강의 남쪽,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울과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공간적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남한산성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장처였다. 왕의 선택지는 대개 강화 섬이 아니면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광주행궁이라고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는 23곳에 이르는 행궁이 있었다.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했다. 전란에 대비한 광주행궁, 양주행궁(북한산성), 강화행궁, 전주행궁을 비롯해 능행을 목적으로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풍덕행궁을 지었다. 왕은 질병 치료와 휴양차 온양행궁, 청주행궁, 목천행궁, 고성행궁, 전의행궁 등에 행차했다. 온양행궁 가는 길인 과천행궁과 수원행궁에도 머물렀다. 행궁의 역사는 오래다. 백제본기에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라는 최초의 기록이 남았으며 고려사에는 40건의 행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했다.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임시 수도로서의 위상이다.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으며 광주부가 1917년 경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도시였다.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행궁은 두 개의 궁으로 나뉘었는데 상궐은 73칸, 하궐은 154칸으로 총 227칸의 당당한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 경복궁은 7715칸, 창덕궁은 4500칸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 북한산성 행궁은 124칸이었다. 대부분의 행궁은 말이 궁이지 왕이 실제 머문 횟수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모두 6차례 행차했고 머문 기간도 농성 47일을 비롯해 50일을 넘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가 서장대를 둘러보았고, 정조는 서성과 남성을 거쳐 북성까지 돌아보고서 서장대에서 군사훈련까지 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등 모두 6명의 왕이 찾았다. 남한산성이 몽골과 청은 물론 일제에 항거한 외세 저항의 본거지였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과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1, 2차 대몽항쟁의 승전지에다가 척화론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학사를 모신 현절사가 세워진 항청의 기운이 항일로 옮아붙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에 깃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열전이 있다. 정조실록 등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군사를 독려하다 앉아서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온조가 나타났다.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뭐하고 있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들어 군사를 보내 격퇴했으며 이에 감읍해 온조왕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서라는 장군이 배향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환궁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묘를 세워준 것이 고마우나 혼자서는 지내기 외로우니 이서 장군을 보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이서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온조가 이서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숭열전에 배향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정말 백제의 왕도였을까 남한산성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택리지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으론 입증된 바 없다. 18세기 홍경모가 지은 ‘중정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면서 “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는 다른 설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은 물론 남한산성에서도 백제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원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사 4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주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해서 신라가 쌓은 한강 이남의 방어거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돼 ‘주장성=남한산성’의 신빙성을 높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른 작명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역사상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함께 비운의 임금 1, 2위를 다투는 인조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했으나 반정공신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달아나야 했다.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내세우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등 세 번이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즉위 2년 만인 1624년 남한산성 축성을 명하였고 1626년 성이 완성되자 서부면에 있던 광주부를 옮긴 것도 인조였다. 남한산성은 축성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땅에는 3000개에 이르는 성이 있었지만, 성의 역할을 제대로 한 성은 평양성과 진주성, 강화성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세에 빼앗기지 않았던 ‘서울지킴이’ 같은 존재이다. 항몽, 항청, 항일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한국전쟁 최대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서울사수’를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발발 이틀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면서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150만 서울시민을 적지에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 머물면서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녹음방송을 내보내 국민을 속였다. 국회가 서울 사수 결의를 전달코자 했을 때 대통령은 경무대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그때 한강 다리를 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원한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져 오늘의 강남 아파트공화국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몽진(蒙塵)의 역사는 길다. ‘서울 사수’는 한국전쟁 때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고려 이후로 역사를 좁혀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도읍 송악(개성)이 함락돼 현종이 나주로 몸을 피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9차례 일어났다. 조선 선조와 인조, 고종 등 3명의 왕이 5차례에 걸쳐 의주와 강화, 남한산성,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몸을 피했다. 인조는 강화, 남한산성에 이어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도피한 비운의 ‘몽진 3관왕’이었다. 그 이전에 4명의 고려 왕(현종·고종·충렬왕·공양왕)이 거란과 몽골을 피해 강화, 안동 등을 30년 가까이 전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몽진이나,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는 파천(播遷) 같은 왕에게만 쓰는 고상한 용어로 헛갈리게 하지만 이승만식 야반도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성수성론 대 서울사수론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1712년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끝낸 숙종은 북한산성에 올라 “내 어찌 도성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념시를 지었다. 외침이 있으면 이곳에 들어와 백성과 더불어 성을 지키겠다는 얘기다. 이때 19살이던 연잉군(영조)은 부왕을 부축해 산성에 올랐다. 도성민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결코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도성 사수 의지가 가슴에 깃든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성윤음이 무색하게 200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남하 3일 만에 대통령은 서울을 버렸다. 영조가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도성 방어 전략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엽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상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도성의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고, 상공업의 발달로 서울은 거대한 소비도시가 됐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선비들의 낙향문화는 사라지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벼슬길 독점이 극심했다. 서울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대도시였고, 서울을 떠난 왕은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버릴 수 없는 속사정과 함께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향해 큰소리칠 때가 왔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숙종 이후 영조에 걸쳐 삼군부를 중심으로 도성 방어 군사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병력을 동원해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도성 방어체제가 비로소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서울 사수 방송은 대국민 사기극이었지만 영조가 직접 지어 반포한 도성 수성 의지는 탄탄한 국력의 과시이자 거듭된 환난에 고생한 대국민용 위로였다. ●북한산과 남한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조선 개국 이후 서울의 정식 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백성은 한양(漢陽)이라는 별칭을 즐겨 썼다. 삼국시대 이래 지역명 한주(漢州), 한산(漢山)의 맥을 이어받은 지명이다.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가 터 잡은 이후 한강(漢江) 아래쪽 지금의 강남 땅이 중심이었지만 1392년 조선이 백악 아래 오늘의 사대문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강 이북으로 중심지가 북상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산은 북한산(北漢山)이요, 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삼각산은 세 개의 뿔(백운대·만경봉·인수봉)을 이르는 신령스런 산이름이지만 한강 북쪽 산은 모두 북한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본래 산이름이 희미해졌다. 한강 남쪽 산은 남한산(南漢山)이요, 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인 점도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세계 최강 10만 청군의 공격을 45일간 버틴 금성탕지(城湯池)이자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이었다. 남한산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강화도 함락과 주사파와 주화파의 분열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왕이 스스로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이 6번째 항복조건일 정도였다. 남한산(522m)이 최고봉이고 산성은 일장산과 주장산 두 산 사이에 걸쳐 쌓았다. 우리에게 북한산은 산의 개념이 강하지만 남한산은 산성이라는 인식이 더 세다. 서울의 성곽축조 역사는 한성백제, 삼국의 한강 쟁패,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도성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지금의 서울은 한성백제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 등 2000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기에 궁궐과 내성, 산성의 3중 체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중곡동·옥수동·삼성동·암사동 토성과 대모산성, 양천고성 등이 외곽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성·이성산성·금암산성·남한산성 또한 백제왕성의 방어기지로 파악된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각축지였다. 한강권에서는 주장성, 이성산성,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이 뺏고 빼기는 삼국의 격전지였다.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알린 까닭이다. 임진강권에도 칠중성·호로고루·고모리산성·당포성·아미성·계양산성 등이 산재했다. 고려시대 성곽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남경별궁을 세웠고, 최영 장군이 북한산성 자리에 중흥산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북쪽 해발 820m의 솟아오른 암벽 위 조촐한 산성이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첫 둥지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성(도성)은 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시대 초기 산성과 왕성의 이원적 구조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에서 나타났지만, 후기 들어 산성과 왕성의 일체화가 정립되었다. 고려 송악에 이어 조선 한양 도성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에는 한국형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은 자생적 문화유산이다. 평지의 도성과 산지의 산성이 짝을 이루는 조합은 고대 삼국 이후 한반도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성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자연지형의 최고 경계점에 성곽을 쌓아 지형의 높낮이를 성곽으로 이용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축조 기법과 다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창의문을 나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가 내려가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검정과 탕춘대 터가 있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대(총융청)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영동(新營洞)이다. 탕춘대 터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본래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파랑과 장춘랑 등 두 화랑을 기리는 사찰이었으나 연산군이 이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만들어 ‘질퍽하게’ 놀았다고 해서 탕춘대라고 이름 붙었다. 장의사 당간지주가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한 귀퉁이에서 1400년의 역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장의사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고,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장의동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장의문이라고도 불렀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이 개선문인 셈이다. 풍수 최양선이 숙정문~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곳이니 길을 내어 지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여 태종 때부터 폐쇄한 문을 인조반정 이후 열어 놓았다. 영조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창의문 현판에 새겼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경조 오부도 중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그려진 성곽과 ‘서성(西城) 한북문(漢北門)’이라는 기록이 곧 오늘의 탕춘대성과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4㎞ 길이의 산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에는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탕춘대성 안에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을 만들어 평창(平倉)이라고 하였는 데 평창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은 도성을 중심으로 3개의 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서쪽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원래 도읍은 궁궐과 내성 그리고 외성 등 삼중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조선은 궁궐과 해자도 없는 도성만으로 버텼다. 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란을 호되게 겪고서야 도성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고쳤다. 이를 본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을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고 찬탄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땅이름(지명)은 가장 겸허한 모국어이자 무형문화재이다. 지명 속에는 그 지역의 내력이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명이란 무언(無言)의 역사이다. 지명에 몇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 기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햇볕을 쬐면 역사요, 달빛에 물들면 야사’(野史)라는 말이 생겼다. 우리의 지명은 어떠한가. 한자와 이두(吏)와 우리글의 치열한 ‘3자 경쟁’에서 한자가 압승을 거뒀다. 순우리말 지명은 유일하게 서울이 살아남은 반면 소부리(부여), 한밭(대전), 솜리(이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은 땅속에 묻혔다.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 압축적으로 보여줘 지명은 지역의 내력과 곡절을 숨죽여 외친다. 삼국시대에는 오늘의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이두로 ‘제차’란 구멍, ‘파의’는 바위이므로 ‘구멍바위’이다. 이를 한자로 공암(孔岩)이라고 옮겼다. 옛 한강 공암진 나루요 양천 허(許)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허가바위의 유래가 깃들어 있다. 또 이 바위는 큰 홍수 때 이웃 광주땅에서 떠내려왔다고 하여 광주바위라고도 불렸다. 또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점인 노들나루가 있던 상도동에 전국 모든 장승의 우두머리 장승이 서 있다고 해서 장승백이(장승배기)라고 불렀지만, 지명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한 번의 잘못된 개명은 뜻을 일그러뜨리고, 사실을 비튼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땅이름은 우리말이었지만 기록에는 한자지명으로 남겼기에 우리말 지명이 홀대를 받은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 4단계였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자식 행정체계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마을을 ‘고을’이라고 했고,고을의 수령은 높든 낮든 모두 ‘사또’라고 불렀다. 토박이 지명은 조선시대 한자 지명화됐다가 일본 강점기에는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됐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으로 개악됐다. 물 수(水)는 호수 호(湖)로, 무쇠 철(鐵)은 금 금()으로 멋대로 바꾼 것이다. 금호동이라는 지명에서 옛 대장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가. 없다면 잘못된 지명변경이다. 1914년 강제 행정개편 이후 불과 100년 사이에 잣골→백동→혜화동, 모래내→사천→남가좌동, 한내→한천→상계·중계·하계동, 배오개→이현→종로4가, 진고개→니현→충무로, 구리개→동현→을지로2가, 박석고개→박석현→갈현동 등으로 전혀 다른 엉뚱한 지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붓골→필동, 삼개→마포, 두텁마위→후암, 물치→수색, 새내→신천, 노들→노량, 복삿골→도화동, 삼밭→삼전동, 미나릿골→미근동, 쇠귀바위→우이동, 서래→반포 등 순우리말 지명의 억지 한자화도 지역의 유래와 특색을 퇴색시키고 있다. ●무악이 안산, 아단산이 아차산으로 바뀐 까닭 지명은 시간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작품이기도 하다. 대개 안산(鞍山)이라고 불리는 무악은 서울 풍수의 알갱이를 이루는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 못잖게 중요한 산이었지만 지금은 존재감이 없다. 무악재라는 험한 고개에 도로가 놓이고 평평해지면서 안산이라는 평안한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초기 풍수 중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이 있었다. 무악을 서울의 주산으로 정하고 오늘의 연세대와 이화여대 자리에 경복궁을 앉히자는 하륜의 주장이었다. 터가 좁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백악주산론’과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뤘다. 태종이 종묘에 나아가 길흉을 점친 결과 백악이 우세하자 태종은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무악의 기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비록 성 밖으로 밀려났지만 연희궁이라는 이궁이 무악 아래 지어졌다. 정종과 태종, 세종이 차례로 거했다. 세조 때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여 양잠을 했고 연산군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조선 최악의 내란이라고 일컫는 이괄의 난을 진압해 왕조가 이어진 장소가 바로 무악이기도 하다. 또 오늘날 연세대가 연희전문학교에서 출발했고 연희동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왔으니 태종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싶다. 서울의 외사산(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 중 용마산 부분이 좀 헛갈린다. 어떤 이는 용마산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차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산은 다른 산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산이다. 서울의 외사산 중 좌청룡을 아차산으로 보고 아차산의 최고봉을 용마봉(348m)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고구려 유적지가 발굴되고 온달과 평강의 전설로 유명한 아차산의 지명 유래도 꽤 흥미롭다. 높을 아(峨)에 우뚝 솟을 차(嵯)를 써서 아차산이라고 하지만 높이가 285m밖에 되지 않으니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내가 잠시 빌려 쓴(我借)’의 뜻으로도 해석하는 등 설이 분분하다. 아차산의 원 지명은 아단산(阿旦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삼국사기에 ‘아침 해’(旦)를 의미하는 신성한 터, 아단산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이름(李旦)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비슷한 글자를 썼다는 풀이다. 이른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경북 대구(大邱)도 본디 대구(大丘)였지만 영조 때 공자의 이름(孔丘)과 같으므로 피휘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정조 때 바꾼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청운동·옥인동·인사동은 일제가 만든 합성 지명 서울역사 이천 년의 풍상보다 36년 일제 식민지배의 훼절이 더 엄혹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지 않는가. 해방 후 창지개명(創地改名)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서 우리 지명의 대부분이 원상회복되지 못했다. 개발연대 이후 우리 손으로 행한 개악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의 지명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합성지명이다.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인사동은 급조된 지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두 개의 지명을 합치면서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름이다. 일제는 행정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멀쩡한 두 개의 지명을 하나로 합쳤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뤄진 지명말살정책이었다. 지명 속에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얼과 문화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무서운 음모였다. 청운동은 청풍계(청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따 만들었다. 옥인동은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이다. 유서 깊은 청풍계와 옥동이라는 지명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과 ‘옥류동’이라는 글에서 비롯됐다. 청풍계천은 청계천의 발원지이며 청계천이란 이름의 연원이기도 하다. 인왕이라는 명칭은 인왕산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때의 기록에 따르면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 한양도성 안 최고의 경치 좋은 곳으로는 백악의 동쪽 삼청동천(삼청동)을 으뜸으로 쳤고 백악 서쪽 백운동천(청운동)과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옥인동) 그리고 낙산 서쪽 쌍계동천(동숭동), 남산 아래 청학동천(필동) 등 다섯 곳을 꼽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려한 골짜기를 이른다. 내 천(川)을 쓰지 않고 하늘 천(天)자를 쓴 것은 사람만 모여 즐기는 곳이 아니라 신선도 더불어 노닌다는 뜻이다. 우리가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르는 부암동 백석동천이나 관악산 자하동천도 풍광에서 빠지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진 청운동과 옥인동이 지명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네 개를 둘로 줄이면서 사라진 것들이 아쉬울 뿐이다. ●흐리멍덩한 지명 회복 실패의 교훈 잊지 말아야 서울을 찾는 외국인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인사동이다. 한국적인 정취를 품고 있으며 인사동이라는 지명도 발음하기 쉽고 어감도 좋다. 그런데 인사동은 관인방의 인자와 대사동의 사자를 강제 결합시켜 지은 것이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인데 옛날에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유래를 전한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때문에 탑동, 사동, 대사동, 탑사동, 탑골 등으로 불렸고 지금도 탑골공원이나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백동(잣골)은 숭교방의 동쪽이라고 해서 동숭동이라고 바꿨고 괴동(회나무골)은 의금부가 있는 자리라고 해서 공평동, 옥방동(옥방골)은 인의예지에서 따와 예지동, 사동(탑골)은 낙원동, 원동(원골)은 원서동, 상사동(상삿골)은 원남동이라고 작명했다. 15개 동의 새 지명이 생겼다. 수진방과 송현을 합쳐 수송동이 되면서 송현(솔골)이 사라졌고 옥동과 인왕산동을 합쳐 옥인동을 만든다고 옥동(옥골), 운동(구름재)과 니동을 합쳐 운니동을 만들면서 니동(진골), 육상궁과 온정동을 합쳐 궁정동을 만들면서 온천수가 나오던 온정동이 각각 사라졌다. 서울이라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은 미군정청이 해방과 함께 일방적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지명을 회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우리는 기존의 일본식 지명을 토박이 이름으로 되돌리지 않고 모조리 한자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강제병합 이전의 지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본이 멋대로 변경하고 왜곡하고 합친 일본식 지명에서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세종대왕, 이충무공, 을지문덕 장군, 원효대사, 이퇴계, 민충정공 등 6명의 선현의 시호를 채택해 세종로(광화문통), 충무로(본정통), 을지로(황금정통), 원효로(원통) 등으로 가로명을 변경하는 데 그쳤다. 사라진 숱한 지명의 원혼 앞에 어찌 이리 덤덤한가.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전쟁이다. 독도냐 다케시마냐, 동해냐 일본해냐는 모두 지명선점 다툼이다. 해방 후 흐리멍덩한 지명회복 실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성명(姓名)이 역사이듯 땅에는 지명이 역사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삼성동 한전부지 처리법/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삼성동 한전부지 처리법/노주석 사회2부 선임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은 조선 말까지 경기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였다. ‘삼성리’(三成里)라는 지명은 봉은사와 무동도, 저자도 세 마을을 합쳐 하나가 됐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0년대에 그린 서울지도 ‘경조오부도’를 보면 한강 너머 지금의 강남지역에는 지명이 몇 개 나오지 않는다. 몇 개 중 하나가 봉은사와 압구정이다. 봉은사 앞에 ‘저자도’(楮子島)라는 큰 섬과 ‘무동’(舞童)이라는 섬도 아니고 뭍도 아닌 나지막한 모래 언덕이 그려져 있다. 세 개의 지명 중 닥나무가 우거진 왕실소유의 큰 섬과 춤추는 소년을 닮은 작은 모래 언덕은 한강개발과 강남개발 과정에서 섬을 메워 아파트를 짓고, 강변 자투리땅에 길을 내면서, 아파트 단지와 올림픽대로 속에 포함돼 사라졌다. 삼성동은 우리가 흔히 한강에서 사라진 대표적인 아름다운 섬으로 꼽는 저자도와 무동도를 메운 땅이다. 말죽거리에서 시작된 강남발 부동산 광풍이 절정을 이룬 강남의 핵심지역이다. 1970년 10월 서울시가 군사정권의 실력자이던 옛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이낙선 장관의 압력성 청탁을 받아 상공부 청사와 산하기관이 들어갈 수 있는 단지 10만평을 평당 5000원에 마련해준 바로 그곳이다. 봉은사 땅이었으나 지금은 동국대 캠퍼스가 된 장충동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지에 웃돈을 얹어 맞바꾸면서 정부 소유가 됐다. 상공부가 정부 과천청사에 입주하면서 한국전력공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무역협회 등이 차지했다. 봉은사 앞 허허벌판 10만평은 평당 1억 3000만 원을 호가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금싸라기 땅이 됐다. 한전 본사가 자리한 서울 강남구 삼성동 167부지 약 2만 4000평의 처분을 놓고 ‘총성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달 말 공개입찰이 시작되면 가격이 최대 4조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 재벌 순위 1~2위인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승부가 예상된다. 서울시가 코엑스~한전~한국감정원~서울의료원~잠실종합운동장 일대를 ‘국제교류 복합지구’로 조성할 것이라는 계획을 지난달 발표하면서 후끈 달아올랐다. 상업지구로 종상향돼 용적률 최고 800%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립이 허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남 나주로 이사하는 한전은 이 땅을 처분한 돈으로 부채를 갚는다고 한다. 한전의 부채는 95조원으로 연간 이자만 2조 3000억원에 이른다. 4조원이 큰돈이지만 서울시에 부지 40%를 기부채납하고, 양도세를 내고 나면 1년 이자에 불과한 돈을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코끼리 비스킷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한전부지는 한전이 손 안 대고 코 풀어 얻은 땅이다. 줄지도 않는 부채를 땅 팔아 줄이는 시늉을 하느니 차라리 대한민국 부동산 폭등의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부지 전체를 기부채납하는 것은 어떤가. 재벌기업 좋은 일 시킬 것이 아니라 서울시가 공영개발을 통해 제대로 된 MICE산업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한전은 30여년 동안 삼성동 땅을 사용한 것에 족해야 한다.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창지개명은 단군 이래 최악의 민족정기 말살 사건 서울의 지명은 다중(多重)적이다. 대부분 지명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지명에는 그렇게 부르게 된 명명(命名) 동기가 있는 데 이를 지명의 유래라고 한다면 서울의 지명은 2000년 동안 성쇠와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생성과 소멸 과정을 거친 적자생존의 산물이다. 서울의 지명은 산이나 물, 고개, 풍수, 바위, 들, 땅 모양, 인물, 식물,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정겨운 토박이 이름이 주를 이뤘다. 훈민정음 창제(1446년) 이전까지 비록 우리 글이 없었지만 한자(漢字)를 빌려 이두(吏)로 적었기에 소리 체계는 살아 있었다. 더욱이 수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깊숙이 배어 있다. 예컨대 사간동, 내수동 같은 관아 지명이나 동소문동 같은 성문 지명을 비롯하여 왕십리나 답십리 같은 전설 지명, 압구정동 같은 누정 지명과 정릉동, 효창동 같은 능원 지명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신라 경덕왕(757년) 때 모든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로 바꾸면서 가해진 변형이 첫 번째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인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일제는 조선 사람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창씨개명), 땅이름도 제멋대로 바꿨다. 단군 이래 최악의 사건이라 할만하다. 서울의 지명에는 이 모든 영욕이 담겨 있다. 서울은 조선 개국 이후 한성부(한성)가 공식 명칭이었지만 한양 또는 서울이라는 지명이 더 널리 쓰였다. 뿐만 아니라 도성, 수선(首善), 도읍, 경조(京兆), 경도(京都), 사대문 안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다. 오늘의 서울을 있게 했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삼각산과 백악산은 북한산, 북악산이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남산과 청계천의 본명도 목멱산과 개천이지만 잊혀진 이름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는 옛 이름보다 오히려 정겨운 것이 사실이다. 인위적인 지명의 전이(轉移)가 아니어서 그렇다. 역사학자 안재홍은 목멱(木覓)은 남산의 우리말인 ‘마뫼’의 이두 표기라고 풀었다. 우리말 마뫼의 ‘마’는 앞이고 ‘뫼’는 산이므로 남산의 남(南)자는 ‘남녘 남’ 자가 아니라 ‘앞 남’자이며 결국 남산은 앞산이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산은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앞산이요, 왕이 사는 경복궁의 앞 산이었다. 지금은 서울이 확장되면서 강북과 강남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중앙산(中央山)이 됐지만…. 그러나 청계천 개명은 사정이 다르다. 옛 이름인 개천(開川)보다 청계천이 더 청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사성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청계천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였다. 개천의 발원지로 ‘청풍계천’(?風溪川)이 본명인데 청계천이라고 줄여 불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천의 상류가 청계천인 셈이다.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청계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청계천변 시찰’이라는 기사에서 “개천, 일명 청계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10년이 흐른 192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하천령’을 제정하면서 청계천이라고 바꿔 버렸다. 조선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명당수이자 하수구였던 개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처럼 조선 개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명명한 사대문의 정식 명칭을 두고 남대문, 동대문, 북대문, 서대문이라고 즐겨 불렀다.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또한 수구문(시구문), 동소문, 자하문(북소문), 서소문이라는 별칭을 주로 썼다. 인위적인 엄숙한 지명보다 방향이나 쓰임새 위주로 호칭하기를 즐겼다. 한강도 지금은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호, 경강, 노들강, 용산강, 서강, 조강 등 지역별로 세분해서 불렀다. 그중에서 3개의 강이 주를 이뤘다. 경강은 지금의 한남대교~노량진 구간, 용산강은 노량진~마포, 서강은 마포~양화진 구간을 각각 지칭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5강, 8강, 12강까지 세분했으니 우리 지명의 다중성은 일일이 예로 다 들 수 없을 정도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지명의 다중성은 어디에서 연유됐을까. 역사의 곡절 때문이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이 역사를 창조하기도 한다. 지명학(Toponymy)의 어원이 그리스어 토포스(Topos·장소)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를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다. 지명이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수록 역사 연구에서 지명 의존도는 높다. 지명이 복잡하다면 그만큼 역사가 고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이 여럿이라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고단함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성명학(姓名學)에 빗대 보면 사물에는 하나의 이름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명(名)이 있다. 성년이 되면 자(字)를 가지며 사람에 따라 호(號)를 가진다. 죽은 뒤 시호(諡號)를 받는 사람도 있다. 왕은 사후 묘호(廟號)와 능호(號)를 가진다. 성명학에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나 호를 부르도록 한 것은 이름을 귀히 여기는 존명 사상 때문이다.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국휘(國諱)라고 하고, 존속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했다. 자와 호가 없는 일반인들도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에 ‘안동댁’ 같은 택호(宅號)를 두어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이름이 여럿이듯 땅의 이름인 지명도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네 사고방식이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별칭이 따로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지명 왜곡은 차원이 다르다.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말살하고자 획책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하는 어마어마한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이루던 우리의 마을 방(坊)을 폐지했다. 서울은 186개의 동(洞)-정(町)-통(通)-정목(丁目)으로 정리했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북촌은 동으로, 일본인이 모여 살던 남촌은 정으로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번화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이 이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와서 머문 것을 기념한다면서 ‘황공하게도 다녀가셨다’는 의미의 어성정(御成町·남대문)이라는 지명을 붙였고, 술집과 찻집이 많던 다동을 일본식 다옥정(茶屋町·다동)이라고 개악했다. 일본군 육군대장의 이름을 따서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이라고 명명하거나,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대화’를 넣어 대화정(大和町·남산)이라고 하는 등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지기수로 붙였다. 22년간 지속된 동-정-통-정목 제도는 1936년 경기도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지역이 서울(경성)로 편입되면서 모조리 정-통으로 통일됐다. 서울의 면적은 4배가 늘었고 186개의 동-정-통이 259개의 정-통이 됐다.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마포구 등 8개 행정구가 생겼다. 원동이 원서정, 동세교리가 동교정, 아현북리가 북아현정, 홍제내리와 홍제외리가 홍제정, 한지면 신촌리가 응봉정, 수철리가 금호정, 두모리가 옥수정, 동막상리가 용강정, 동막하리가 대흥정, 여율리가 여의도정으로 각각 변경됐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우리 지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절정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남대문을 거쳐 원효로를 따라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천을 그들이 내세우는 ‘욱일승천기’에서 ‘해돋을 욱’(旭) 자를 따 욱천이라고 마음대로 바꿨고, 흑석동 일대에 고급 주택을 지어 분양한 일본인 업자가 붙인 주택단지 명수대를 지명화했으며, 노들섬을 중지도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표기된 단 두 개의 길 이름도 퇴출당했다. 육조대로(광화문광장)와 운종가(종로)라는 양대 지명의 소멸이다. 육조가는 의정부와 육조가 자리한 관청거리였고, 운종가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던 시장거리였었다. 일제는 유서 깊은 지명을 역사와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개천을 청계천으로 개명하거나, 인왕산(仁王山)의 한자를 엉뚱하게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친 것도 역사 말살의 속셈이었다. 해방 후 육조대로와 운종가를 왕조의 유물로 생각해 원상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후회막급이다. 삼각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정기가 깃든 아름다운 이름도 되돌리지 않았다. 태평로를 닦느라 고갯마루가 사라진 세종로 네거리 황토마루(황토현)의 이름도 청사에 남겼어야 했다. 우리의 조급함이 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북악인가 백악인가… 조선 초기부터 명실공히 백악산 경복궁 뒤에 피지 않은 한 떨기 모란 꽃송이처럼 솟구친 수려한 산의 이름은 둘이다. 백악(白岳)이기도 하고 북악(北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 산을 놓고 면악, 공극산 등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지만 결국 두 개의 이름만 살아남았다. 이 산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도록 결정지은 산이기 때문이다. 이 산이 있었기에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우리는 이런 중요한 산 이름을 별 생각 없이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백악인지 북악인지 헷갈린다면서 뭉뚱그려 북한산이라고도 부른다. 곡할 노릇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조가 중 무학(무학 대사)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삼각산)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개의 돌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온다)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도선(신라 도선국사)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경복궁)궁성 터를 정하였는데, 곧 고려 때 오얏(자두나무)을 심던 곳이었다”고 한양천도 당시 주산 백악과 명당 경복궁 택지에 얽힌 일화를 전한다. ‘오얏을 심던 곳’이라는 표현은 고려 중엽 때 비롯된 것이었다. 도선의 ‘도선비기’에 전해지는 ‘목자득국’(木字得國·이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얻어 한양에 도읍 하게 된다)의 도참설을 깨고자 삼각산 면악(백악) 남쪽에 오얏(李木)나무가 무성하자 윤관 장군 등 벌리사(伐李使)를 보내 싹둑 잘라 기를 누른 사례를 말한다. 이 마을을 ‘벌리’라고 불렀는데 ‘번리’(?里)를 거쳐 지금의 강북구 번동으로 변했다. 오패산 혹은 벽오산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북서울 꿈의 숲’ 공원이 조성됐다. 이렇듯 한양천도는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백악을 주산(主山)으로 정하고서 산 아래 명당 혈 자리에 남쪽을 향해 왕궁을 짓기로 하면서 현실화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이 산의 이름은 명실공히 백악이었다. 산꼭대기에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여신(女神)을 모신 백악신사(白岳神社)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남긴 ‘수선전도’나 ‘경조오부도’ 등 대표적 지도에도 백악이라고 기록돼 있다. 백두산이나 태백산이 그렇듯 산 이름에 ‘흰 백’(白)자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흰 백자를 ‘밝다’ 또는 ‘으뜸’이라는 의미로 썼다. ‘흰 머리를 인 으뜸가는 산’이라고 풀 수 있다. ‘북녘 북’(北)자는 꺼렸다.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지도, 눕지도 않았다. 북망산(北邙山)처럼 죽음을 나타낼 뿐 아니라 패하다, 등지다, 분리하다, 도망하다는 뜻이 들어 있어 금기시했을 법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북악산 또는 북악이 지배 지명이 됐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지도와 책에 이 지명이 자리 잡았다. 단서를 찾아보니 중종 때(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앞에는 남산이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다”라고 적었다. 이 산의 수호신이 한양의 풍수를 관장하는 북 현무(北 玄武)이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남산이나 한강의 북쪽에 자리 잡은 산이어서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후 나온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백악부아암도’ 등 그림이나 지도에서는 어김없이 백악이라고 썼다. ●삼각산이냐 북한산이냐… 일제에 의해 잊혀져간 삼각산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시도한 일제가 사전 정지작업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내세워 대대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꾀하면서 성스러운 산 이름에 분탕질했을 것으로 의심된다. 무엇보다 서울의 조상 산인 ‘세 개의 뿔’ 삼각산(백운대·인수봉·만경대)을 북한산이라고 의도적으로 바꿔 버린 명확한 증거가 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이마니시 류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는 삼각산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북한산이라는 지명을 보고서에 사용했다. 한양과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구려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불렸으며, 백제 개루왕 때 북한산성을 쌓았고, 조선 숙종 때 북한지(北漢誌)를 발간하는 등 북한산이라는 지명이 생경한 것은 아니지만, 삼각산이라는 민족정기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지명이 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83년까지 두 이름이 혼용됐지만, 정부가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삼각산은 힘을 잃었다. 일본인 학자만 책망할 일이 아니다. 역사의식 없는 행정 당국의 잘못이 더 크다.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가 경복궁 뒤 고려 이궁 터에 틈입했고, 경무대와 청와대가 이어받으면서 백악이라는 이름은 잊혀 갔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갈 수 없는 산이 돼 버렸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터널이 상류층의 드라이브 코스나 요정 가는 길로 인기를 끌면서 북악이라는 지명의 사용 빈도가 높아졌다. 2006년 폐쇄됐던 숙정문을 38년 만에 열고 난 뒤 문화재청은 백악신사가 있던 산마루에 ‘백악산 342m’라고 새긴 돌비석을 세웠다. 또 2009년 백악산을 국가지정 명승 제67호에 올렸다. 이 산의 명칭을 백악산이라고 공식 인정한 것이다. 더불어 삼각산도 명승 제10호로 제 이름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백악은 북악, 삼각산은 북한산이라고 부른다. 안내 표지판과 안내책자, 역사책에도 여전히 그렇게 적혀 있다. 이름을 찾은 건 다행이지만 제 이름으로 불러야 산의 영험함이 살아난다. ●백악산·삼각산 공식 인정… 국가 지정 명승지로 지명(地名)이란 땅 이름이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듯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인명이 사람의 뿌리라면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인 것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땅 이름도 사람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가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식과, 그 장소가 쓸모가 있어서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다는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지명의 존재성과 유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지명학(地名學)에서 지명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과 삼라만상의 이름’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를 둘러싼 향토 역사문화가 집대성된 기록인 셈이다. 사람을 둘러싼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유전자적 특성과 흔적이 지명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다. 우리말의 어휘 중 가장 숫자가 많고 사용 빈도가 높은 것도 지명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까지 말과 글이 달라 그 전까지 존재했던 우리말 자료가 거의 없다. 우리말 소리에 맞는 한자를 빌려 표기한 향가 25수를 제외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옛 지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 역사의 수수께끼 푸는 열쇠 지명은 한 번 붙여지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서울은 고대 부여의 도읍 소부리와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서 음운 변화된 유일한 우리 고유어 지명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이천 년 이상을 버틴 하나밖에 없는 우리말 지명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성’(漢城)이라고 적고 ‘한청’이라고 읽는 불편을 없애겠다면서 ‘수이’(首爾)라는 억지춘향식 한자 이름을 붙이고 ‘셔우얼’이라고 읽도록 했다. 얼빠진 발상이다. 우리는 이미 백두산정계비에 쓰인 ‘토문강’(土門江)이라는 두 개의 지명 탓에 드넓은 동간도를 중국에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도 독도 대 다케시마(죽도), 동해 대 니혼카이(일본해)라는 지명을 놓고 일본과 피 터지게 다투고 있다. 불명확한 지명 표기 탓에 겪은 숱한 불이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경복궁과 종묘·사직 그리고 한양도성 성곽을 축성했다. 궁 이름은 물론 근정전과 광화문 등 전각의 이름을 명명했다.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 등 사대문과 보신각, 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덕문 등 사소문의 이름이 그때 붙여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북 간 축선상에 육조거리(광화문광장)를, 동서 간 축선에 운종가(종로)를 두고 시전행랑을 들였다. 도읍건설을 완성한 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고 도성의 위용을 읊었다. 삼봉은 한양(한성부)을 5부 52개 방으로 행정구역을 나눴고 이름도 직접 지었다. 이때 지은 52개 지명 중 현존하는 지명은 적선, 서린, 가회, 안국 등 4개밖에 없다. 몇몇 지명은 길 이름이나 학교 이름 등에 남았지만 나머지 지명은 다른 지명과 합쳐지거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거나 멸실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가 수반됐지만 40년에 불과한 식민시대에 벌어진 지명 훼손과 왜곡은 뼈저렸다. 일제는 단군 이래 5000년 내려온 지명의 역사를 갈아엎었다. 지명에 담긴 사람과 자연의 역사를 짓밟았다. 한국땅이름학회 조사에 따르면 서울 중심 8개 구의 법정동 명칭 중 3분의1이 그때 일그러졌다. 종로구 지명의 3분의2가 난도질당했다. 광복 후 빼앗겼던 사람 이름은 되찾으면서 비틀린 땅이름은 바로잡지 못했다. 남은 지명은 유래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선임 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한양도성은 어떻게 훼철(毁撤)됐나 한양도성은 일제 히로히토 황태자의 1907년 10월 서울 방문을 계기로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다. 천황이 될 지엄한 몸이 보호국의 성문(숭례문) 아래를 지날 수 없다며 헐어냈다는 설이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히로히토를 보호한다고 호들갑을 피웠는데 숭례문 밖 남지(南池)를 전염병의 온상으로 몰아 메워 버렸다. 고니가 유유히 노닐던 연못은 이때 사라졌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서대문)을 다 헐고자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대포를 쏴서 파괴하겠다고 하자 조선거류민단 단장 나카이 기타로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전승 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식민 통치가 무르익었던 1925년에는 히로히토 결혼 기념 행사를 치를 장소를 만든다면서 흥인지문 양쪽 성곽과 청계천 수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훈련도감과 하도감을 허물어 땅에 파묻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으로 옷을 갈아입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다. 이간수문과 성곽은 복원됐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들춰 보면 진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등장한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사람들이 붐비고 거마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 매양 전차와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니…문루의 좌우 성첩(성가퀴·城堞)을 각각 8칸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훼철은 일제의 강압이 아니라 우리 정책인 것처럼 적혀 있다. 사실이라면 성곽 철거는 백성의 통행 불편과 사고 예방 차원에서 각부 대신이 연명으로 건의해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시행됐다고 볼 수 있지만 여느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식민 시기에 집필, 편찬된 고종실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히로히토의 방한과 도성 훼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후인 ‘1907년 6월 24일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가퀴와 성벽 일부를 철거토록 통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맡을 ‘성벽처리위원회’가 7월 30일 내려진 ‘내각령 제1호’에 의해 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황태자’를 쓴 송우혜 작가는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서 “성벽이 실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황태자가 서울을 다녀간 지 5개월이 지난 뒤였다”고 주장했다. 실제 성곽 철거 기사는 황성신문 1908년 3월 10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2일자에 각각 실렸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 유발용으로 일본 황태자 원인설을 조작,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① 한양도성 낙산 구간 흥인지문~혜화문 가는 길의 서울디자인지원센터에 자리 잡은 한양도성박물관의 전경. ②~④는 내부 전시공간. 서울시는 2015년까지 한양도성 성곽을 복원해 끊어진 전 구간을 연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등 한양도성 복원 종합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 비록 히로히토 방한 시기에 성곽이 손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원회가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부인 못 한다. 성벽처리위원회는 민간 전문가 조직이 아니라 정부의 차관급 인사로 구성됐는데 당시 각 부 차관 전원이 일본인 관리였다. 이들은 간선도로변의 성벽을 철거키로 하면서 교통 방해를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다. 저의는 딴 데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도쿄나 교토와 비교할 수 없는 한양도성의 위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성벽처리’라는 사무적인 기구 명칭에서도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느껴진다. 쭉정이가 머리 드는 법이고, 어사는 가어사(假御使)가 더 무섭다고 했다. 백성을 위한다면서 전찻길을 따로 내자고 건의한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성벽처리위원회 설치를 명하는 내각령 1호를 발동한 이완용은 이근택과 함께 우리에게 ‘을사오적’으로 더 익숙한 매국노들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학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이지용은 내부대신, 권중현은 농상공부 대신이었다. 백성을 팔아 일제의 환심을 사려는 사리사욕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벽처리였다면 우연치곤 너무 고약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10년 병탄에 앞서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도성의 해체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들은 태조가 행했던 나라 세우기의 역순으로 와해를 꾀했다. 도성 성곽 해체가 식민지 건설의 첫 단추라고 본 것이다. 일제가 성곽을 거느린 위풍당당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문루만 덩그러니 남은 도심의 외딴섬으로 만든 까닭이다. ●도성 성곽의 해체는 국권 상실의 다른 말 도성 성곽의 해체는 왕조의 멸망과 외세의 지배를 백성에게 피부로 느끼게 했다. 무장해제된 도성문의 초라한 행색이 우편엽서로 만들어져 전국에 뿌려졌고 전국 각 읍성의 성곽도 뒤이어 철거됐다. 오백년 동안 익숙했던 도성 출입 시스템이 바뀌면서 생활상도 급변했다. 매일 새벽 4시와 밤 10시를 기해 도성문을 여닫으면서 통행금지 해제(인정·人定)와 통행금지(파루·罷漏)를 알리던 보신각 종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성 출입과 하루의 시작 및 끝을 알리던 전통적인 통제 장치가 사라지면서 일상이 무너졌다. 성곽이 없는 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지엄한 권위도 힘을 잃었다. 도성 해체는 국권 상실을 뜻했다. 한양도성 성곽의 전체 둘레는 모두 18.627㎞이지만 남아 있는 산악 지역 성벽을 제외한 도심 구간 5.471㎞는 멸실됐다. 12.4㎞만 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으로 지정돼 있다. 훼손이 가장 심한 구간은 돈의문~숭례문~흥인지문 구간이다. 일제와 친일파는 처음 숭례문 양쪽 성곽 8칸을 허물어 전찻길을 낸다고 했다가 야금야금 다 허물었다. 남산~숭례문 구간도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지형을 변형시켰다. 최근 회현지구 정비가 마무리돼 남산 자락 성곽이 위용을 드러냈고 옛 조선신궁터 복원이 진행 중인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창의문(자하문)~백악(북악)~숙정문~혜화문 구간은 대부분 복원됐지만 서울과학고와 경신고 사이 일부 구간은 성벽이 담장이나 축대로 쓰이는 형편이다. 숭례문은 화재 소실을 계기로 성첩 일부를 복원했지만 흉내에 그쳤다. 소덕문(서소문)~돈의문 구간에는 잔존 유구가 지하에 묻혀 있다. 정동구간 중 주한 러시아 대사관과 창덕여중 등에 성곽이 포함돼 복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직터널에 이르는 돈의문~창의문 구간에는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 흥인지문~광희문 구간은 운동장을 헐고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복원이 이뤄졌다. 광희문~남소문 구간 중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 지역 성곽은 대부분이 주택가에 포함돼 복원까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 구간은 박정희 정권 시절 타워호텔(반얀트리)과 자유센터를 짓도록 허가를 내 주면서 망가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알려진 김수근은 두 건물을 설계하면서 한양도성 성곽을 완전히 해체했으며 그 돌로 도로변 석축을 쌓는 만용을 부렸다. 일제에 못지않은 훼철을 저질렀다. 문루가 희생된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은 큰 도로가 자리 잡아 원상회복이 어렵다. 청계천의 수문인 오간수문터는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소외돼 발굴 상태로 방치돼 있다. 혜화문과 광희문도 도로에 자리를 빼앗겨 한옆으로 밀려나 있다. 도시화에 밀려 엉거주춤한 상태인 한양도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보수와 복원 그리고 재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무너진 성곽을 원재료로 다시 쌓는다면 보수이며 발굴 등을 통해 드러난 기저부에 새 돌을 다시 쌓아 본래 모습으로 되돌린다면 복원이 될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거나 없어진 부분이 기록과 고증에 의해 문화재적 가치를 되찾으면 재건이다. 홀랑 타 버려 다시 세운 숭례문을 재건했듯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의 재건 방안을 찾아야 한다. 자리를 옮김으로써 역사 가치를 상실한 광희문과 혜화문은 원위치 이축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임기 내 청계천 복원 사업을 끝내고자 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서 버림받은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에서 본디 자리로 돌아오고 오간수문도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처럼 순성길 이어져야 미국 보스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은 ‘프리덤 트레일’에 담겨 있다. 건국과 독립전쟁 유적지로 가는 4㎞의 길 위에 붉은색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줄만 따라가면 사적지를 만날 수 있는데 트레일은 보스턴 국립역사공원의 일부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은 이어지지 않는다. 토막 나 있고, 흔적도 없다. 도성 길라잡이의 안내가 없다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한양도성 복원과 재건은 서울의 정체성 회복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 해 1000만명이 넘는 서울 방문 외국 관광객들은 빌딩숲과 아파트단지,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가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한강이나 남산을 서울의 랜드마크로 지목하는 사람도 많다.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2000년 고도 서울의 정체성 확립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역사문화도시 서울의 정체성은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에서 흘러내려 사대문을 울타리처럼 감싼 한양도성 성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가파른 고갯길과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한옥 처마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내사산과 그에 겹쳐진 고색창연한 성곽이 곧 서울이다. 내사산과 도성 성곽의 어울림이 서울을 상징하는 도시 경관의 결정체다. 한양도성 순성이 서울 관광의 알갱이라는 사실을 웬만한 외국인은 다 알고 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38선은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 탓

    38선은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 탓

    한반도 분단론의 기원과 러·일 전쟁/박종효 지음/도서출판 선인/437쪽/2만 9000원 38선은 언제부터, 왜 한반도의 분단선이 되었나. 우리는 한반도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38선과 비무장지대가 한국전쟁의 산물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38선이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에서 기인하였고, 이를 이어받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을 거쳐 한국전쟁에서 실현됐음을 낱낱이 보여준다. 모스크바대 교수를 거쳐 현재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로 있는 저자는 1896년 6월 9일 러시아의 로마노프와 일본 야마가타 사이에 체결된 의정서에서 처음 제기된 이른바 ‘한반도 분할론’의 기원과 막전막후를 러시아문서보관서의 먼지 낀 서고에서 건져올렸다. 제정러시아 외무성 대외정책 문서보관소, 군 역사문서 보관소 등에 소장된 외교문서를 통해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를 무대로 대륙세력 러시아와 해상세력 일본이 벌이는 약육강식의 실체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야마가타는 “북위 39도 선으로 한반도를 분할해 39도 이남은 일본이, 이북은 러시아의 영향권에 두자”고 제안했다. 청나라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두 나라가 러일전쟁으로 부딪치기 전까지 조선을 사이좋게 분점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때 일본은 대동강~원산을 잇는 39도 선을 최초의 분할선으로 제안했다. 러시아의 거부로 백지화됐지만, 모스크바 의정서의 비공개 조항에는 ‘분할 대신 중립지대를 두고 동시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무장군 사이의 충돌 방지책으로 중립지대를 두자’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 분할론과 비무장지대(DMZ)설치론의 기원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38선까지 내려온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는 정전협정 장소로 39도 선상의 원산항을 원했지만, 마오쩌둥이 38도 선상의 개성을 역제안하면서 남과 북을 끊는 분단선이 남으로 내려왔다. 노주석 선임기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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