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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
    202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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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군부모2/노주석 논설위원

    지난달 28일 자 길섶 난에 실린 ‘군부모(軍父母)’를 읽고 많은 분이 전화와 이메일로 사연을 주셨다. 신문에서는 군대의 문제점만 매일 보도하고, 군대의 좋은 점은 잘 알리지 않는다는 취지가 주를 이뤘다. 고위공직자 한 분의 군대 간 큰아들 얘기에 공감이 갔다. 첫 자대 면회를 간 날. 아들이 차려입은 군복의 ‘칼주름’과 군화의 ‘불광’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군기가 얼마나 세기에 이 정도인가 싶었다고 했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의 입에서 의외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선임들이 입고 나온 군복 다림질도 해주고, 군화도 닦아 주었다는 것이다. 며칠 뒤에는 두툼한 편지 한 통이 집으로 배달됐다. “아드님을 잘 보살피겠다.”라는 내무반원 전원의 다짐과 자필 사인이 들어 있었다. 제대할 때까지 아들과 더불어 건강하게 병영생활을 하겠다는 다소 뻔한 내용이지만 다른 백 마디 말보다 믿음이 갔단다. 이 분의 결론은 “군부모님들 안심하세요.”였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서울수복 60주년/노주석 논설위원

    한국전쟁(1950년 6월25일~1953년 7월27일) 기간 중 서울의 주인이 네 번 바뀌었다. 북진 통일을 한다고 큰소리쳤던 이승만 정권은 인민군이 남침한 지 사흘 만에 서울을 내주고 피란길에 올랐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도박이었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해 9월28일 수복할 때까지 서울은 인민공화국 치하였다. 백두산까지 치고 올라갔던 연합군의 등등한 기세가 중공군에 의해 맥없이 꺾이면서 1951년 1월4일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치욕의 1·4 후퇴이다. 1951년 3월15일 재탈환 때까지 서울은 ‘붉은 완장’에 의해 재장악됐다. 석 달마다 주인이 바뀌는 세상에서 서울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한 손에는 태극기를, 또 한 손에는 인공기를 흔들며 낮과 밤이 다른 생활을 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들어오면 인민군 편이 돼야 했고, 국군이 점령하면 국군 편이 돼야 했다. 전쟁발발 전 150만명이 살던, 동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서울인구는 1·4 후퇴 후 20만명으로 줄었다. 서울사람들은 마치 폐허 속 유령의 도시에 사는 야누스 같았다. 전쟁통 서울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글이 있다. ‘역사 앞에서’는 서울대 사학과 김성칠 교수가 서울에서 몸소 겪은 생생한 전쟁관찰일기다. 일생 30여권의 한국전쟁 관련 소설을 쓴 김원일은 체험기 ‘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을 통해 몸서리쳐지는 전쟁의 상흔을 절절히 토해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시각으로 보았다. 한국전쟁이 한국사람들에게 남긴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조명했다. 우익의 부역자 처단과 좌익의 인민재판이 번갈아 벌어진 배경을 분석했다. 학살에 대한 분류는 독창적이다. 제주 4·3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과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한 처형적 성격의 우익포로 학살로 나눴다. 개인에 의해 자행된 보복성 학살이 가장 불행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수복 60주년 행사가 어제 도심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즐겨 부른다. 한국전쟁은 미국인뿐 아니라 당사자인 한국인에게도 잊혀 가고 있다. 서울 사람, 나아가 한국민에게 서울수복 60년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동춘 교수의 설명처럼 권력에 대한 기회주의적, 순응주의적 태도의 기원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란 왜곡된 사회통념 말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군부모(軍父母)/노주석 논설위원

    공군 장군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남편이 근무시간 이외에 관용차를 이용할 때 지키는 철칙이 있다고 한다. 운전병의 먹거리를 손수 마련한다는 것. 차에서 대기하는 운전병이 먹을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만드는 게 일과라고 했다. 까닭을 물었다. 운전병을 아들처럼 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밥값을 주거나, 음식점에서 사주는 것보다 운전병이 훨씬 좋아해서 이젠 그만둘 수도 없단다. 다른 간부 부인들도 대개 그렇게들 한다고 했다. 상관보다 사모님 모시기가 더 어렵다던 군대의 속설은 옛날이야기가 됐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학부모가 됐다고 축하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콧물 닦으라며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아주면서 뿌듯해했다. 장성한 자식이 군대 가면 군부모가 된다. 치맛바람 휘날리던 학부모가 군부모로 신분이 바뀐다. 잘 다녀오라며 손 흔들고 떠나보내지 않는다. 아들과 함께 병영생활을 하겠다는 식의 극성 군부모도 있다. 한글사전에 ‘군부모’라는 단어를 올릴 때가 온 것 같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ARS/노주석 논설위원

    컴퓨터를 켤 때마다 바이러스 치료 사이트가 뜨기에 별 생각 없이 가입했다. 컴퓨터 안전을 위해 투자하는 셈 쳤다. 처음 며칠 보람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 월말 자동연장에다, 비용도 처음 제시된 액수보다 갑절이나 많이 들었다. 월말에 날아온 결제문자를 보고 시간을 내 전화를 했다. ARS(자동응답장치)였다.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이행했건만 결과는 “지금 상담원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뒤 다시 전화해 주세요.”라는 멘트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사흘 연속 반복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화할 때마다 10여분씩 진을 뺐다. 참다 못해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 문자를 남겼다. 감감무소식이다.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경험이 부지기수다. 대기업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공공기관이나 병원의 ARS를 무사히 ‘통과’해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ARS 전화 걸기가 두렵다. 짜증이 난다. 누구를 위한 ARS인가.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서울광장] ‘동북 4성론’을 경계한다/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 ‘동북 4성론’을 경계한다/노주석 논설위원

    여름내 중국과의 외교갈등이 극심했다. 천안함 사건과 한·미 서해 연합군사훈련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가 인터넷 여론조사를 하면서 ‘한국을 힘으로 제압할 것인가’ 아니면 ‘설득해서 중국 편으로 끌어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누리꾼의 95%가 제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신문은 “한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중국이라는 급행열차에 타려고 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미국에 의존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다.”고 공격적인 기사를 실어 판매 부수를 늘렸다.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시각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지난달 24일은 한·중 수교 18주년이었다. 올해 양국의 교역규모는 17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는 수교 첫해보다 무려 22배 늘어났다. 한·미, 한·일의 교역량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두 나라를 오가는 방문객이 500만명에 이르고, 6만명 이상의 유학생이 상대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우리 무역흑자의 대부분이 중국에서 나온다. 한반도의 반쪽, 북한의 중국 경제의존도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북한은 원유의 90%, 소비재의 85%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자원의 70% 이상을 중국에 판다. 대외교역의 75%를 중국에 기대고 있다. 중국은 매년 2억~3억달러의 대북 무역흑자를 올린다. 중국과 남·북한은 과거 역사와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동북 3성 방문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5월 방문 이후 3달 만의 갑작스러운 재방문 경위도 그랬지만, 방문 목적과 후계자 김정은의 동행 여부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북한은 권력 대물림 승인과 대규모 경제지원을 얻는 대신 동해 나진항을 중국에 내주고, 6자회담 복귀를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손익계산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만성적 식량난에, 수해가 겹친 데다 김 위원장의 건강마저 좋지 않은 북한 쪽의 사정이 더 다급했던 것 같다. 60년 전 마오쩌둥에게 군대파견을 호소했던 아버지 김일성처럼 서른 살도 안 된 아들을 위해 중국 최고지도자를 만나러 간 김 위원장의 총총걸음은 현대판 조공·책봉 외교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했다. 김 위원장의 동북 3성 방문 이후 북한을 중국 일개 자치주로 편입시키자는 ‘동북 4성론’의 목소리가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굵어지고 있다.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지린성 등 기존 동북 3성에 북한성을 더해 동북 4성이라는 얘기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중국군이 투입돼 친중국 정권을 세우고 이후 중국에 예속시킨다는 터무니없는 설에 불과하다. 북한의 중국 경제예속이 가속화되면서 한국은 제압하고, 북한은 편입시키려는 중화 패권주의의 본색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동북 4성론은 동북공정의 다른 이름이다. 동북공정이란 알려진대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한국사에서 지우고 중국의 지방정부화해 중국사에 넣으려는 대대적인 국책사업이다. 우리 역사를 시간상으로 2000년,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에 몰아넣는 동북공정은 동북 4성론의 이론적,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동북 4성론은 동북공정의 경제 버전”이라고 단정 짓는다. 실제 중국은 공산당 주도로 지난 2004년 ‘신 조선전략’이라는 비밀문건을 작성했다. 40억~50억달러의 거금을 투입해 북한을 경제식민지화하고서, 궁극적으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도 ‘중국과 북한을 일치’시킨다는 계획이다. 중국이 사고뭉치 북한을 사사건건 싸고도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단순히 혈맹이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중국은 ‘북한땅도 중국땅’이라는 동북공정의 큰 틀 속에서 북한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포섭하고, 종속시키고, 일치시키려 하고 있다. 북한은 세자책봉과 경제지원에 눈이 어두워 동북4성론의 함정을 간과하고 있다. 까딱 잘못하면 한국도 편입시키자는 ‘동북 5성론’이 등장할지 모른다. joo@seoul.co.kr
  • [길섶에서] 119/노주석 논설위원

    난생 처음 119에 전화를 걸었다. 지리산에서 보낸 여름휴가 중 일어난 일이다. 친구가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리면서 계곡에 격리됐기 때문이다. “빨리 와 주세요. 사람이 계곡에 갇혔어요.” 다급한 구조전화에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지금 당장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죠?” “무슨 말씀이세요. 물이 점점 불어나서 언제 떠내려 갈지 몰라요.”라고 다그쳤다. 안타까운 답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런데 구급차가 없어요. 방금 발생한 교통사고 현장에 출동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소방대원의 속도 타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119 구급차가 1대밖에 없단다. 처리를 끝내고 오려면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119에 신고하면 바로 구해 줄 것으로 믿었다. 구급차가 없는 상황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엄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뒤져 구조장비를 찾아냈다. 친구는 우리 손으로 구했다. 조난당한 지 30분이 지난 뒤였다. 뒤늦게 출동한 소방대원을 원망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행정의 달인/노주석 논설위원

    딸아이가 좋아하는 여름용 가죽 샌들의 조리 부분이 떨어져 수선하려고 발품을 판 일이 있다. 찾아간 구두 가게마다 고치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새로 사는 게 낫다는 핀잔성 조언도 들었다. 허탕을 치던 중 집에서 좀 떨어진 시장통의 허름한 구두 가게를 발견했다. 간판도 없는 코딱지만 한 가게였지만 수선의뢰 들어온 신발이나 가방 같은 가죽제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샌들을 내밀며 고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두고 가라고 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2시간 후 말끔한 샌들이 돌아왔다. 딸아이는 올여름 내내 그 샌들만 신었다. 고객만족도 100%였다. 가게 유리문 한쪽에 조그맣게 ‘구두수선의 달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달인이라는 용어의 쓰임이 부쩍 늘어났다. 칭호를 받은 사람도 기분 좋고, 불러 주는 사람도 부담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학문이나 기예에 남달리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 널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사전적 의미처럼 본래 고차원적인 인물을 지칭하던 달인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영상매체의 힘이다. 서울방송의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 덕분이다. 2005년 4월 첫 방영 이래 250회분이 방송을 탔고, 온갖 무수한 달인이 배출됐다. 달인의 조건은 대동소이하다. 표정이 밝고 긍정적으로 일을 즐기며,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끈기가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조지 레오나르드는 ‘달인-천 가지 성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에서 달인이 되는 다섯 가지 열쇠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훌륭한 스승을 찾아라, 둘째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 셋째 기꺼이 복종하라, 넷째 기계적인 것에 마음을 더하라, 다섯째 한계를 넘어서라 등이다. 어느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하루 3시간씩 10년 동안 1만여 시간을 투자해 몰두하면 누구라도 달인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비법도 있다. 서울신문사와 행정안전부가 공동으로 27만명에 이르는 지방공무원의 사기를 북돋고자 ‘지방행정의 달인’ 제도를 만들기로 하고 그제 서울에서 1차 설명회를 열었다. 청원경찰이나 환경미화원 같은, 법제상 지방공무원이 아닌 직종에도 문호를 개방한 점이 눈에 띈다. 맡은 분야에서 신바람 나게 일하는 지방공무원 30명을 뽑아 달인 칭호를 부여하고, 특별승진과 연수라는 선물 보따리도 안겨줄 예정이다. 행정도 서비스다. 지방행정 달인의 탄생은 대민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뜻한다. ‘달인 바이러스’의 즐거운 감염이 기대된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학봉장군 부부 미라/노주석 논설위원

    이탈리아 시칠리 섬 팔레르모에 있는 카푸친 프란체스코 수도회 지하 납골당에는 아흔 살 먹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기가 잠들어 있다. 로잘리아 롬바르도(1919~1920)의 미라(Mummy)다. 생전 모습 그대로다. 옆에서 보면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릴 듯해서 ‘20세기 기적’이라고 불린다. 카푸친회는 16세기 말 전성기를 누렸던 로마 가톨릭 수도회의 일파이다. 그들이 입었던 두건 달린 외투의 색깔에서 ‘카푸치노’라는 이탈리아 커피가 유래했다. 유명 관광지화된 지하 납골당에는 모두 8000여 구의 미라가 안치돼 있다. 롬바르도 장군의 딸 로잘리아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라로 만든 사람은 시체 방부처리업자 알프레드 사라피아였다고 하지만 시랍(屍蠟) 과정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최근 포르말린과 아연염, 알코올, 살리실산, 글리세린을 사용한 사실이 확인됐다. 알코올은 시신의 미라화를 촉진했고, 글리세린은 적당한 습도를 유지시켰으며, 살리실산은 균의 번식을 방지했다고 한다. 요즘은 사용하지 않는 아연염의 작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로잘리아가 살아 있는 듯 정교하다지만 이제 90년이 지났을 뿐이다. 기원전 2600년부터 만들어진 이집트 원조 미라가 겪은 세월에 비교할 바 못 된다. 영혼이 부활하려면 온전한 육신이 필요하다고 여긴 이집트 미라의 제조과정은 과학 그 자체였다. 뇌와 내장은 꺼냈지만, 심장은 그대로 뒀다. 심장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미라가 인조 미라라면 한국에는 천연 미라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미라 39구 중 21구가 충청도에서 발견됐다. 지형과 기후적인 특성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조선 초 유행한 독특한 매장법에서 비롯됐다. 한결같이 두꺼운 석회로 뒤덮인 회곽 속에서 미라가 나왔다. 목관 사방을 싸 바른 회반죽이 암석으로 변해 관 내부를 무산소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00년 묵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학봉장군’ 부부 미라를 첨단과학으로 규명한 연구결과가 어제 나왔다. 부부 미라의 사망연도와 당시 연령, 사망원인은 물론 생활양식과 질환까지 MRI 등 영상의학적 검사와 내시경,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치아 분석 등을 통해 밝혀냈다. 재미있는 점은 15세기를 산 부부 미라의 장기에서 간디스토마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는 사실이다. 목숨을 걸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민물 잉어 회를 먹었다는 조상의 옛말이 증명됐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과 柳宗悅/노주석 논설위원

    유종열은 일본 당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이자 ‘공예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식 이름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라고 일본이름 표기법대로 쓰지 않은 까닭은 그의 이름이 갖는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여느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특별한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명문가 출신의 종교철학자였지만 우연히 조선도자기 ‘청화모깎기초화문표주박형병’을 접한 뒤 인생항로를 바꿨다.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는 “깊은 존경의 마음을 조선에 바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조선의 민화, 조선의 석물, 조선의 연적, 조선 도자기의 특질, 조선의 항아리, 조선의 찻잔, 조선의 목공예품, 조선의 석공, 조선의 금공, 조선 도기의 미와 그 성질 등등이 남긴 글의 제목이다. 조선의 미학과 예술품에 대한 존경심과 찬미는 끝이 없었다. 우리가 모르던 우리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사람이다. 조선의 미를 ‘비애(悲哀)의 미’로, 지배적 정서를 ‘한(恨)’으로 정의한 것도 그였다. “가장 슬픈 생각을 노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가(詩歌)”라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셸리의 시구대로 비애를 미의 극치로 여겼다. 훗날 패배주의를 부추긴 또 하나의 식민사관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저술가 정일성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에서 “일제 식민통치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데 일조한 제국주의 공범이자, 민예운동가가 아닌 문화정치 이데올로그”라고 평가절하했다. 조선독립을 원하지 않은 문화통치의 브레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반면 깐깐한 민족주의자 송건호 선생 같은 이는 “유종열씨의 글을 통해 우리 민족의 예술에 대해 비로소 눈을 크게 뜨게 됐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광화문이 복원돼 광복절날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그의 광화문 연가는 유명하다. 1922년 일제의 광화문 철거계획이 알려지자 도요대(東洋大) 교수였던 그는 일본 월간지(개조)에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어찌하면 좋을까?/ 가령 일본이 쇠약하여 궁성이 폐허가 되고 에도성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주기 바란다.”라고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총독부는 여론에 굴복, 계획을 철회해 경복궁 동쪽으로 광화문을 옮기는데 그쳤다. 유종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광화문을 살린 일등공신임에는 틀림없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서울광장] 광화문 복원과 日帝의 조선왕궁 말살기/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 광화문 복원과 日帝의 조선왕궁 말살기/노주석 논설위원

    돌아오는 광복절날 제대로 된 광화문을 보게 될 모양이다.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본래 모습 그대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광화문은 조선왕궁 수난사와 궤를 같이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었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리저리 옮겨지는 과정에서 훼손되고 뒤틀렸다. 일제는 민족정기와 조선왕실의 권위를 훼절시키고자 궁궐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일제의 조선왕궁 말살정책은 용의주도했고 결과는 참담했다. 5궁 가운데 경복궁은 해체되다시피 했고, 창덕궁은 피폐해졌으며,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둔갑했다. 경희궁은 학교가 됐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퇴위한 고종과 순종의 거처로 쓰였다. 훼손되기 전 경복궁 전경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1915년쯤 촬영된 경복궁은 높은 담 뒤로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선 웅장한 궁궐이었다. 우리가 아는 쪼그라든 경복궁이 아니었다. 1867년 중건 당시 경복궁 전각은 모두 7226칸이었고, 궁성 밖 후원에 489칸의 전각이 따로 있었다. 모두 7715칸으로 규모 면에서 9999칸을 자랑하는 중국 자금성에 못지않았다. 창덕궁의 4500칸을 합치면 오히려 더 컸다. 일본 교토의 천황궁은 넓이에서 경복궁의 4분의1에 불과한 작은 궁에 불과했다.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1일 자에 ‘경복궁 없어지네’라는 제목의 가슴 아픈 기사가 실려 있다. ‘경복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변한 것은 모두 알지만 얼마 전 왕실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에서 경복궁 안에 공원을 짓고자 전각 4000여 칸을 경매에 부쳤다. 10여명이 한 칸당 15~27환씩에 샀다. 이 중 3분의1을 사간 일본인은 척식회사 총재의 첩자로 알려졌다.’는 내용이다. 경복궁 안에서 박람회를 열고, 총독부를 근정전 앞에 짓기 이전부터 왕궁의 전각들이 일본인의 손에 헐값에 부지기수로 넘겨졌음을 알 수 있다. 바다 건너 일본에 팔려간 전각은 개인 미술관이나 정자, 정원의 일부가 됐다. 심지어 상점이나 기생집 문으로 사용됐다. 경복궁의 파괴는 식민통치의 업적을 자랑하는 박람회 개최 과정에서 가속화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1926년과 1929년 조선박람회, 1935년 조선산업박람회 등 모두 6차례의 박람회를 통해 자행됐다. 경복궁의 유서 깊은 전각들은 유흥장소와 오락장으로 변했다. 행사 때마다 일본 총독이 근정전 임금의 용상에 앉아 상장을 주고, 훈시를 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이제야 자리를 찾은 광화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화문 제자리 찾기는 일제가 허문 조선 척추의 복구이다. 20년 걸려 광화문-흥례문-금천교-근정문-근정전-사정문-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등뼈를 겨우 맞췄다. 1990년에 시작된 복원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착수 당시 남아 있는 전각은 36개 동에 불과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89개 동을 지어 125개 동을 갖췄다. 중건 당시 500여개 동의 25% 수준이다. 조선법궁의 격을 떨어뜨리는 흉물스러운 민속박물관과 고궁박물관, 주차장의 철거는 별개의 문제이다. 경복궁과 나머지 궁궐을 완전 복원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광복절 즈음 사과 담화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사토, 종전 50주년의 무라야마, 종전 60주년의 고이즈미 총리에 이은 네 번째 공식 사과가 될 전망이다. 내용을 놓고 일본열도가 떠들썩하다. 1995년 무라야마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해 놓고 2개월도 못 가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정당했다.”라고 말을 바꿨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껌 한 통 살 수 없는 돈 99엔을 보상했다. 외교적 레토릭은 신물이 난다. 조선왕궁 말살 같은 정신적·문화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셈인가. joo@seoul.co.kr
  • [씨줄날줄] 고졸 인재 채용/노주석 논설위원

    전두환·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현 대통령의 공통점은? 닮은꼴을 찾기 어려울 것 같지만 뜻밖에 네 명의 전·현직 대통령은 실업계 고교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 김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 노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이 대통령은 동지상고를 나왔다. 고려대와 육사에 진학한 이 대통령이나 전 전 대통령과 달리 김·노 두 전직 대통령의 최종학력은 고졸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세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의 교명이 전부 바뀌었다는 것. 목포상고는 전남제일고, 부산상고는 개성고, 동지상고는 포항동지고로 각각 변경됐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상고에서 인문고로 정체성이 바뀌어 버렸다.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만 바뀐 게 아니다. 산업입국과 기술보국의 인재를 배출하던 지역의 명문 상고와 공고, 농고들이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학교로 둔갑한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덕수상고는 덕수고, 충주여상은 한림디자인고, 대구농고는 대구자연과학고, 강릉농공고는 강릉중앙고로 변신했다. 충남제일고는 강경상고, 용마고는 마산상고의 새 교명이다. ‘다이나믹 코리아’의 그늘이다. 학벌 지상주의에 따른 뿌리깊은 학력차별 풍토의 산물이다. 역사와 전통의 단절이기도 하다. 어설픈 학력제한 철폐가 전문계(옛 실업계)출신의 취직을 차단했다. 고교졸업자 열 명 중 여덟 명이 진학하는 무분별한 대학진학률이 문제다. 1970년대 8.4%에 불과하던 대학진학률이 2008년 68%, 2009년 82%로 높아졌다. 미국, 일본, 독일의 65~75%를 훨씬 앞지르는 수치이다. 그러다 보니 전문계고 학생들도 대학진학에 매달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전문계고를 졸업하고 나서 취업(16.7%)보다 진학(73.5%)의 길을 선택한다. 대학졸업자들이 널려 있다 보니 고교졸업장으론 취업의 좁은 문을 뚫지 못하는 탓이다.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한국동서발전(사장 이길구)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정원의 30%를 고졸자로 채용하겠다고 어제 발표했다. 대졸자에게 유리한 입사전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고졸자를 일정 비율로 뽑는 ‘고졸 할당제’의 도입이다. 올 하반기 채용 때 마이스터고생 20명을 선발키로 했다. 에너지, 반도체장비, 의료기기, 뉴미디어콘텐츠 등 12개 유망분야에서 특성화된 전국 21개 마이스터고가 대상이다. 공기업이 나서서 고졸 인재 채용을 정례화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다른 공기업들도 동서발전을 벤치마킹하라.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아시아문화전당/노주석 논설위원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 별관에서 시민군과 대치 중이던 계엄군이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시민군 14명의 꽃다운 생명이 쓰러졌고, 164명이 다쳤다. ‘마지막 싸움터’ 전남도청 별관은 점령됐고,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렇게 강제로 막을 내렸다. 옛 전남도청 본관, 민원실, 도 경찰청, 상무관 등 부속건물과 분수대 그리고 금남로로 이어지는 광주의 심장부는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한 민주화 성지(聖地)로 새겨졌다. 정부가 전남도청 별관을 부분 보존하는 방식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키로 어제 결정했다. 설계원안과 10인 대책위원회, 5·18 시민단체의 의견 등을 절충한 조정안이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에 의해 광주 문화수도 안이 대선공약으로 처음 제시된 지 8년, 2008년 공사의 첫삽을 뜬 지 2년 만의 진전이다. 아시아문화전당 건립은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면서 공동화된 인권·예술·평화의 도시 광주를 살리자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계획의 핵심이다. 7000억원을 투입해 올해까지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지식문화원, 문화정보원, 예술극장 등 5개 건물을 짓는다는 계획이었다. 광주를 한국의 문화수도, 나아가 아시아 문화교류의 마루로 만들겠다는 정부 최대의 문화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전남도청 별관의 철거와 보존을 놓고 5·18 관련 단체와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 국제공모에 따라 당선된 설계원안은 별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진입로를 만들기로 돼 있다. 별관 외 다른 역사적 현장은 대부분 보존된다. 관련단체들은 상징성이 있는 별관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형 보전돼야 한다며 “벽돌 한 장 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대책위가 제시한 별관을 그대로 살리되 1·2층 중앙을 뚫어 통로화하는 게이트(오월의 문) 안 역시 안전진단결과 최하위등급인 E등급을 받아 수용불가 판정을 받았다. 길이가 54m에 이르는 별관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도심과 전당의 소통이라는 설계의 컨셉트가 무너진다는 데 정부의 고민이 있다. 더 이상의 표류는 막아야 한다. 공은 관련 단체로 넘어갔다. 지역여론은 찬성과 반대를 놓고 사분오열돼 있다. 시민들도 지친 기색이다. 과거만 부둥켜안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양보안을 내놓은 만큼 관련단체들도 화답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살아 숨 쉬는 광주를 만들려면 소모적인 논란은 그만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세종벨트/노주석 논설위원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는 템스강 북쪽, 레스터 스퀘어와 코벤트 가든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100여개의 공연장과 30여개의 뮤지컬극장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런던 구시가지를 기준으로 서쪽 끝에 위치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영국은 영화, 음악, 미술, 건축, 뮤지컬 등 문화 관련 창작산업으로 먹고산다. 창작산업의 규모는 2005년 기준으로 연간 785억파운드에 이르며 국내총생산의 8% 이상을 차지한다. 고용인구의 7%인 195만명이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웨스트엔드는 캐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 세계 4대 뮤지컬의 발상지이다. 뮤지컬시장 규모만 연 4조원에 이른다. 2007년 1360만장의 티켓을 팔았다. 매년 20억파운드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런던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 42%가 뮤지컬을 보려고 웨스트엔드를 찾는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웨스트엔드와 함께 세계 뮤지컬시장의 양대 산맥이다. 웨스트엔드가 음악을 중시하고 사변적인 주제를 다룬다면, 브로드웨이는 감각적이고 화려하다. 브로드웨이는 브로드웨이, 오프 브로드웨이,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 등 3개 지역을 총칭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브로드웨이는 맨해튼 타임스퀘어를 중심으로 좌석 수 500석 이상의 대형 극장 40여개가 몰려 있는 시어터 디스트릭트를 지칭한다.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다. 2007~2008년 시즌 동안 1227만명이 관람, 93억 7000만달러어치의 입장 수입을 거뒀다. 서울시가 광화문 일대를 한국의 브로드웨이, 한국의 웨스트엔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광화문 주변의 역사문화시설과 문화예술공연장을 한데 묶어 서울의 대표 관광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름하여 ‘세종벨트’다. 벨트 안에는 광화문광장을 중심축으로 5개의 공연장, 6개의 박물관, 5개의 미술관, 5개의 고궁 등 30여개의 문화·예술시설이 포함된다. 이를 50여가지의 공간별, 시간별, 테마별 패키지상품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구상이다. 통합 티케팅&인포센터가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 들어선다. 서울관광의 시작 페이지가 생긴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선거과정에서 관광객 1200만명 유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돌아갔다며 상대 후보들에게 심하게 추궁당했다. 성과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모쪼록 세종벨트가 공약실천의 성공적 시발점이자 종착역이 되길 기대한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공중 화장실/노주석 논설위원

    주말 동네 뒷산 공원 산책 길에 화장실을 찾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굿’이었다. 다소 꺼림칙한 기분으로 들어간 공중 화장실을 상쾌한 발걸음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문을 여는 순간 조명이 켜졌고,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납세자 대접을 제대로 받은 기분이다. 공중 화장실에 대해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10년 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베이징시내 극장에 갔는데 칸막이만 있을 뿐 앞문이 달려 있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북3성 쪽 사정은 더 열악했다. 수세식 화장실을 찾기가 어려웠다. 호텔이 아니면 볼일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군대시절 야외훈련을 나가면 임시 화장실을 설치했다. 땅을 파고, 널빤지를 두 개 놓고, 천막을 둘러치면 끝이었다.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기본으로 비치되면서 화장실에서 겪던 촌극과 일화가 사라졌다. 화장실이나 야외에서 휴지가 없을 때, ‘응급 처치법’ 정도는 알아둬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공중 화장실의 기분 좋은 진화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남중국해/노주석 논설위원

    한국국방연구원이 운영하는 세계분쟁 데이터베이스 WOWW에 따르면 1989년 이후 2004년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각종 분쟁은 모두 99건이었다. 아시아지역의 분쟁건수는 16건으로 아프리카의 34건에 이어 두번째를 차지했다. 유럽 15건, 중동 13건보다 많았다. 남북한 대립, 아프가니스탄 내전, 중국·인도 국경분쟁, 중국·타이완 대립, 중국·러시아 국경분쟁 등 세계를 요동치게 한 굵직굵직한 분쟁이 특징이다. 남중국해의 패권을 둘러싼 남사군도(스프래틀리 군도)와 서사군도 (파라셀 군도) 분쟁도 그 중 하나이다. 금기시됐던 남중국해 분쟁이 지난 24일 폐막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처음으로 국제이슈화됐다. 미국이 남사군도와 서사군도에 이해관계가 있는 아세안국가의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남중국해의 상당부분이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해당하며, 남중국해는 타이완, 티베트와 함께 중국의 주권·영토보존과 관련된 핵심사안이라는 중국정부의 입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중국 또한 미국에 대해 남중국해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 일촉즉발의 국면이다. 남중국해상에 존재하는 140여개 섬 중 상당수가 영토분쟁 지역이다. 남사군도는 중국, 타이완,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6개국이 섬 100여개를 분리 점령한 채 무장대치 중이다. 여러 차례 군사적 유혈충돌을 빚었다. 서사군도는 40여개 섬에 대해 중국과 타이완, 베트남 등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하이난섬에서 남쪽으로 330㎞ 떨어진 서사군도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으며 관광지로 개발 중이다. 중국은 15세기 명나라시대의 환관 정화의 남해원정을 근거로 남중국해 영유권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1405년 함선 62척에 승무원 2만 7800명을 태우고 원정길에 오른 정화는 이후 29년 동안 7차례에 걸쳐 중국~베트남~수마트라~말라카~스리랑카~인도~페르시아~아프리카를 돌아오는 대항해를 통해 남해항로를 개척했다. 많은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들에게 남중국해는 양보할 수 없는 생명줄이다. 에너지 수입물량의 85%가 통과하는 해상교통 및 군사상 요충이다.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며, 원유 2000억배럴이 묻혀 있는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세계 제3차 대전은 자원전쟁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남중국해에서 G2(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매장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기싸움일지도 모른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 전자책 vs 종이책/노주석 논설위원

    2000년대 초반 전자책 시대가 도래했으며, 종이책이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얘기가 시중에 떠돌았다. 일부는 지상의 모든 출판사는 문을 닫을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출판사와 종이책은 여전히 건재하다. 헌책방이 주는 영감과 서지향(書之鄕)에 대한 향수, 지향(紙香)에 대한 본능, 책벌레에 대한 호감,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撤)하는 독서법을 배운 구세대에겐 차라리 다행스러운 기간이었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전자책 붐이 심상찮다. 미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에서 전자책 판매량이 처음으로 하드커버 판매를 추월했다는 것이다. 신간을 기준으로 하드커버 100권을 팔 때마다 전자책 143권을 팔았다는 통계다. 15년간 하드커버를 팔아온 아마존닷컴이 전자책을 판 지 3년 만의 대변화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모든 책 중 인쇄된 책은 25%에 그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스티븐 코비 같은 인기 작가들이 앞다퉈 전자책 출판계약을 맺고 있다. 스릴러 작가인 제임스 패터슨의 ‘키스 더 걸스’시리즈는 114만 권의 판매를 기록, 전자책 중 첫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아이 패드와 킨들 같은 책 읽는 단말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미국의 얘기다. 국내 관련업계는 올해를 ‘전자책 원년’으로 삼겠다며 기세등등하다. 지난해 1300억원에 머물렀던 시장규모를 올해 1900억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콘텐츠 확보와 불법 다운로드 해결, 단말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전자책 독자층을 창출하기보다 기존 종이책 독자를 대체하는 제 살 깎아먹기가 우려된다. 소설 ‘덕혜옹주’는 전자책과 종이책 모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지만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첫 동시출간된 박범신의 ‘은교’는 종이책 대비 전자책 판매율이 0.1%에 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본의 IT저널리스트 사사키 도시나오가 쓴 ‘전자책의 충격’은 전자책의 부상과 종이책의 미래에 대해 명쾌하게 해설하고 있다. 저자는 전자책의 등장이 출판문화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돌에서 파피루스와 양피지, 종이로 활자 기록형태가 계속 바뀌었지만 콘텐츠의 내용은 여전했다는 것이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변화도 콘텐츠를 담는 그릇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논지이다. 전자책에 대한 이유없는 거부반응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이제 전자책은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일지도 모른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도시고속도로 유료화/노주석 논설위원

    일본에서 차를 몰아본 사람들은 살인적인 통행료에 질린다.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거리는 약 500㎞인데 14만원 정도의 편도 통행료를 물어야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일본 정부는 지난해 3월 수도권을 제외한 고속도로의 주말 통행료를 1000엔 미만으로 내렸다. 고속도로변 유명 음식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요즘은 더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고속도로 무료화 실험’이다. 일본 집권 민주당이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달 28일 0시부터 오는 2011년 3월 말까지 일본 전국 37개 노선 50구간에서 통행료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전체 도로의 20%에 해당한다. 교통량이 60% 정도 늘어나는 등 경기활성화 낌새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야당인 자민당은 세금의 수익자 부담원칙에 어긋나며, 23조원의 증세가 불가피하고, 자동차 배출량이 늘어나고, 항공과 철도교통량이 줄어든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특이한 사례지만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는 차량정체나 교통사고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 전역에 혼잡통행료 징수 시스템을 갖춰놓고 통행료를 자동부과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총량을 정해놓고 자동차 구매를 제한한다. 자동차를 사려면 폐차의 차량등록증을 비싼 웃돈을 주고 공매방식으로 사들여야 한다. 차량은 오토바이를 포함해 80만대 선을 유지하고 있다. 차를 운전하려면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한다. 서울시의 싱크탱크인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어제 내놓은 보고서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이름하여 ‘도시고속도로 유료화 정책 도입방안 및 효과분석 연구’이다. 요약하면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유료화해 정체를 줄이고, 유지관리 재원도 마련한다는 내용이다. 1㎞당 통행료를 401원으로 잡으면 평일 출근시간대 두 도로의 총통행량이 32~35% 준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통행속도가 21~24% 빨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연간 200억원 이상의 순수입은 덤이다. 반발의 목소리가 높다. 서울시는 “내부 연구보고서에 불과할 뿐”이라며 정책 추진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냄새가 난다. 떠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결코 효과만 계산해서 추진할 사안이 아니다. 두 도로의 유료화가 주변도로와 시내교통에 미칠 치명적인 악영향을 두루 고려해야 한다. 싱가포르식 철벽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일본의 고속도로 무료화 배경을 생각해 보라.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서울광장] 3軍 합동성 강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 3軍 합동성 강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노주석 논설위원

    혹시 ‘물오리론’을 들어보셨나요? 육군, 해군, 공군 3군의 합동성 강화를 얘기하면서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들어보시죠. “한국군이 자칫 물오리가 되자는 얘기처럼 느껴진다. 물오리는 물에서 헤엄도 치고, 땅 위에서 걸으며, 공중으로 날기도 한다. 얼핏 보면 이런 군대가 바람직하다는 논리로 합동성이 얘기돼서는 곤란하다.” 천안함이 폭침된 바로 그날인 지난 3월26일, 육군 교육사령부에서 열린 ‘합동성 강화 대토론회’에서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이 한 말씀입니다. “물에서는 상어처럼, 땅에서는 호랑이처럼, 공중에서는 독수리처럼 싸우는 군대여야 한다. 각 군의 전문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합동성이라는 명분으로 다 섞어 놔서 결국 물오리가 되자는 얘기는 아닌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물오리까지 등장할지는 몰랐습니다. 합동성을 강화하자고 마련한 자리에서 나온 얘기치곤 수위가 높습니다. 주로 해군과 공군의 입장입니다. 육군에 대한 상대적인 피해의식입니다. 한민구 합참의장 내정자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창군 이래 36명의 합참의장이 배출됐는데 그중 35명이 육군 출신입니다. 이양호 의장이 유일한 공군입니다. 42명의 국방장관 중 타군 장관은 단 6명이었습니다. 해·공군의 불평불만을 이해할 만합니다. 합참의장 내정자께서 대토론회에서 하신 말씀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합동성을 명분으로 착수된 합참의 2단계 조직개편으로 전력발전본부가 신설되었으나 합동직위에 육군의 비율이 너무 낮다.”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합참 주요직책 18자리 중 육군이 14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곧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오르시면 얽히고설킨 문제를 어떻게 풀 요량인지요. 이명박(MB) 대통령이 얼마 전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를 처음 주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전장(戰場) 환경에 맞도록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합동성을 높여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합동성이 MB 정부 국방개혁의 화두로 등장한 셈입니다. 자군(自軍)이기주의가 암 덩어리입니다. 현대전을 바라보는 3군 간의 현격한 시각차도 큽니다. 육군은 지상군 위주의 작전운용이 필요불가결하다고 봅니다. 한·미 동맹 체제에서 지상전력의 유지와 합참의 육군 위주 구성 및 운영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지요. 해·공군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라고 코웃음 칩니다만.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합동성 강화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고 봅니다. 한국적 현실에 맞는 합동성 강화를 꾀해야 합니다. 합참 내 3군 자리안배라는 대증요법으론 답이 안 나옵니다. 3군 교육기관의 통·폐합과 각종 지원부대의 통합부터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모든 군 관련 교육훈련기관을 통합운영해야 합니다. 3군 사관학교의 통합은 기본입니다. 위관급 장교가 받는 초등군사반과 고등군사반의 통합이 다음 차례입니다. 육군·해군·공군대학을 하나로 합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합참대학에서 영관급 장교의 융합을 이루면 됩니다. 국방대 안보과정에서 대령 이상의 3군 통합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때는 늦습니다. 초급장교부터 영관장교까지 어울려 교육훈련을 받으면 합동성 강화를 따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리와 예산도 줄어듭니다. 군수, 인사, 경리, 복지, 공보 등 여타 지원부대의 통합은 그다음 단계이지요.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국방개혁입니다. ‘5년 주기설’입니다. 다들 심드렁합니다. 피로도가 높습니다. ‘정권안보용’ 개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안보용’ 개혁이어야 명분과 공감대가 생기는 법입니다. 국방개혁 기구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면 일은 쉽지만, 정권의 입맛에 맞는 한시적인 방안밖에 내놓지 못합니다. 개혁은 독립적이고 장기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교육과 지원부대의 통합을 통해 하나된 국군을 보고 싶습니다. joo@seoul.co.kr
  • [씨줄날줄] 새만금 통선문(通船門)/노주석 논설위원

    통선문(通船門)이란 말 그대로 배가 드나드는 ‘열린 나루’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통선문이 설치된 곳은 영산호다. 1981년에 준공된 영산호 갑문은 높이 13.6m, 너비 30m로 당시로서는 동양최대 규모였다. 물을 바다로 빼내 범람을 막고, 담수호의 수위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갑문 옆에 문을 만들어 30t급 선박이 수위에 관계없이 출입을 하게 한 것이 통선문의 시초였다. 정부는 4대 강 사업을 추진하면서 영산강의 죽산보에 통선문을 설치해 배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하겠다고 밝혔다. 황포돛배와 고대 나주선이 오갈 수 있고, 내륙에서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는 리버크루즈선을 띄우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들어 있다. 그러나 ‘수중 보의 설치는 대운하의 전제’라면서 반대하는 시민·환경단체들은 통선문 확장사업에 대해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통선문도 만병통치약은 아닌 셈이다. 전북 군산시 비응도와 부안군 변산반도를 잇는 길이 33㎞의 새만금 방조제의 일부를 허물어 통선문을 내기로 했다는 정부의 계획이 어제 언론에 보도됐다. 지난 4월27일 준공될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그 방조제에 구멍을 내겠다는 것이다. 19년 동안 3조 8000억원을 투입해 지은 방조제에 ‘작은 문’을 내는 비용은 물경 7900억원이다. ‘막자마자 트는 주먹구구 공사’ ‘새만금 방조제는 모래성’이란 비난과 질책이 뒤따르고 있다. 욕을 먹어도 싸다. 사정을 알고 보면 더 기가 막힌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로 새로 생긴 세종시의 5.7배에 이르는 땅을 메울 흙을 운반하려고 새 방조제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만금 간척지를 메우려면 4대 강 전체에서 파낸 흙 5억 2000만㎥보다 많은 7억㎥의 흙이 필요한데, 운반비용을 계산해 보니 통선문을 만들어 배로 바닷모래를 운반하는 것이 가장 싸게 든다는 얘기다. 이 경우 매립비용은 3조 7000억원 정도로 추정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노무현 정권 때인 2008년 새만금매립지가 농업용지에서 명품복합도시로 용도가 바뀌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관계자들은 용도를 바꾸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방조제 공사는 사실상 완료단계였다고 변명하고 있다. 서울시내 초등학생과 중학생 전원에게 1년간 무상급식을 제공할 수 있는 예산이 4300억원이라는 통계가 지방선거 과정에서 제시됐다. 관리들이 멀쩡한 방조제를 허물지 않도록 잘 챙겼으면 2년간 무상급식이 가능했다. 책임질 자 누구인가.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씨줄날줄]軍과 문민통제/노주석 논설위원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맥아더(1880~1964) 원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전설적 군인이자 당대 누구 못지않은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정치감각은 좀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초기 3개월 동안 태평양사령부에서 나온 언론성명서 142건 중 109건이 맥아더 장군의 이름으로 공식발표됐다. 다른 장교의 이름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모든 공문서 표지에 ‘맥아더사령부’라는 겉표지를 따로 붙였다. 이 시기 사령부는 공식 명칭 대신 맥아더사령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병력감축 문제를 놓고 맥아더와 갈등을 빚던 트루먼 행정부는 1945년 9월과 10월 두 차례 맥아더에게 귀국을 요청했다. ‘요청’이라는 격식을 갖췄지만 사실상 군통수권자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최고 연장자이며 선임 장교인 맥아더는 불응했다. 맥아더는 너무 바쁘고 위험하기 때문에 도쿄를 떠날 수 없다는 이유를 대 트루먼을 격앙시켰다. 야심만만하던 맥아더는 자신이 워싱턴과 링컨 대통령에 필적하는 위인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그저 그런’ 대통령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이 사안의 중요성과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역사상 본국으로 소환하려는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한 첫 번째 군인이 될 거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할 작정이야.”라고 보좌관에게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후에도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미국의 타이완 정책을 놓고 정부와 장군 간 불협화음이 계속됐지만, 맥아더의 대중적 인기가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대통령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51년 4월11일 마침내 트루먼은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관한 함구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한 맥아더를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했다. 트루먼은 탄핵위기를 맞았고,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하는 여론에 의해 미국에는 헌정위기가 닥쳤다. 그러나 미국 국민과 의회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Civil Control )’ 원칙을 수호했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군은 항상 민정당국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지 않으면 민정당국의 군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됐다고 미국 국민이 비난할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서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아프간 정책을 비판한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군 사령관을 소환해 전격 경질했다. 맥아더 이후 60년 만의 항명장군 파동이지만 미국의 문민통제 원칙에는 흔들림이 없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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