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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이 원조] (15) 근대식 염전

    [인천이 원조] (15) 근대식 염전

    1970년대와 1980년 서울의 대학가에서 ‘인천 당구’는 ‘짠물’로 유명했다. 거의 ‘공포 분위기’였다. 불과 100점대의 당구 실력만 돼도 고난도 기술인 ‘맛세이’를 마구 찍어대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인천에서 온 학생들의 당구는 대체로 ‘짜다’고 인식됐고, 경원시하는 풍조마저 생겨났다. 또 인천 사람들을 ‘짠물’로 불렀다. 하지만 ‘인천 짠물’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당구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인색해서도 아니며 인천이 소금의 원산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나라의 천일염(天日鹽·햇볕과 바람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은 전통적으로 품질이 좋았지만 소규모 생산이었다. 그런데 1885년 이후에 청나라에서 막대한 양의 값싼 소금이 수입되자 우리나라 소금 생산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이에 자극을 받은 우리 정부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최초의 근대식 염전을 만들었는데, 현 부평구 십정동 서울제강 정문 부근이었다. 처음에는 1정보(3000평) 가량의 천일염전을 시험적으로 축조했다. 이곳에는 지금 대형 공단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바닷가였다. 동시에 지금 인천의 중심가인 주안역 뒤쪽에는 소금 생산과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사는 주택들이 자리잡았다. 그해 9월에는 조정에서 관리들이 염전을 시찰하는 등 관심을 보였는데, 시험 결과 부산에 있는 재래식 염전보다 경제성이 훨씬 뛰어났다. 주안염전은 2단계에 걸쳐 규모가 확장됐다.1기(1908∼1911년)에 26만평,2기(1917∼1918년)에는 37만평을 각각 늘렸다. 또 1921년에는 남동염전 90만평이,1925년에는 군자염전 172만평이 만들어져 전체 면적이 325만평에 달했다. 이들 염전에서는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되는 연간 15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군자와 남동에서 생산된 소금은 바닷길을 통해 인천으로 실어나르고 주안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주안역전창고로 옮겨져 판매했다. 게다가 천일염을 정제해 새하얀 고운 소금으로 만드는 재염(再鹽)공장이 인천에 집중돼 거의 전국의 수요를 충당했다. 그래서 인천의 특산물 하면 언제나 소금이 첫머리를 장식했다. 최초의 재염공장은 1908년 인천항에 설립된 ‘인천제염소’다. 이 회사는 설립 초기에 소금을 굽는 솥이 하나밖에 없어 하루 생산량이 2500근에 불과했으나 수요가 늘면서 번창을 거듭해 한국인 97명과 일본인 11명을 고용하는 대규모 공장이 됐다.1910년에는 재염공장이 6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을 잃자 소금의 유통도 일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상인들의 유통망을 와해시키기 위해 천일염 제조 허가제를 실시했고, 전매국을 두어 도매·소매 행위까지 통제했다.1942년에는 한술 더떠 전매령을 실시해 소금에 관한 이권을 완전히 빼앗았다. 1960년대 들어서는 각종 가공소금이 등장하고 중국산 소금의 유입과 해안선 개발 등으로 염전이 줄어들면서 인천 소금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지금은 단 한줌의 소금도 생산되지 않아 주안염전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나 ‘우리나라 최대 천일염 산지’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천 사람들은 이제 듣기 좋지 않았던 ‘짠물’이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인천 남동구에 자리잡은 수도권해양생태공원에 가면 염전에 대한 향수를 느껴볼 수 있다. 이곳에는 채염작업을 재현해 놓은 체험용 염전이 있어 소금생산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2집이 맛있대] 인천 송도 우즈베크음식점 ‘아무르 티무르’

    [2집이 맛있대] 인천 송도 우즈베크음식점 ‘아무르 티무르’

    인천시 연수구 송도에 있는 ‘아무르 티무르’는 보기 드물게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인 우즈베키스탄 요리를 전문적으로 한다. 이 집은 1994년 외국 주재원으로 발령난 남편을 따라 우즈베키스탄에 갔던 이순옥(48)씨가 2004년 귀국해 차렸다. 주방장을 비롯한 종업원들은 모두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우즈베크 요리는 튀기지 않아 기름기가 없이 담백한 데다 인공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아 요즘 지향하는 ‘웰빙음식’에 가깝다. ‘리표슈카’는 우즈베키스탄의 주식으로 밀가루를 ‘탄드르’에 7∼10분 구운 빵인데 아무런 첨가제를 넣지 않았음에도 딸기잼에 찍어 먹으면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탄드르는 우리의 화덕과 아주 비슷하다. 각종 고기를 구운 ‘사실릭’도 인기를 끄는 품목이다. 소·돼지·닭·양의 순살 부위를 꼬챙이에 꽂아 참숯에 굽는데 우즈베크에서 흔히 쓰는 향료는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넣지 않는다. 향이 너무 강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라그만’은 양파·당근·감자·피망 등의 야채와 국수를 함께 넣어 끓인 우즈베크 전통요리로 이탈리아 스파게티보다 깊은 맛을 자아낸다.‘비나그라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직접 들여온 호두와 찹쌀가루로 끓인 수프다. 이 집은 건물과 소품 자체도 특이하다. 건물은 이슬람풍과 유사한 우즈베크 양식의 2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에는 우즈베키스탄 벽화·인형·가방·모자 등을 전시해 놓아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 ‘피에라밀라노’ 유치 파란불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세계적인 전시장인 ‘피에라밀라노’ 유치가 가시화되고 있다. 인천시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피에라밀라노 유치에 손발을 맞추고 있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지난 3월 피에라밀라노 아시아지역본부를 경제자유구역에 유치하기 위해 국장 한명만을 대동하고 이탈리아 밀라노를 전격 방문했다. 이미 중국 상하이시가 아시아본부를 유치하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여온 터라 잘 짜여진 ‘작전’이 필요했다. 안 시장은 피에라밀라노의 페리니 회장 면담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안 시장은 포기하지 않고 카이올리 해외사업본부장을 만나 인천국제공항과 경제자유구역 등으로 동북아시아 중심도시로 뻗어가는 인천의 지정학적 이점을 들어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이는 피에라밀라노를 유치할 경우 경제자유구역 활성화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밀라노 외곽 12만평에 자리잡은 피에라밀라노는 전시뿐 아니라 물류창고 등을 갖추고 현지에서 직접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21세기형 물류센터다. 피에라밀라노는 아시아지역에서는 거점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파트너를 물색중이다. 안 시장에 이어 이번에는 이환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이 나섰다. 이 청장은 지난 5월 밀라노로 가 피에라밀라노 관계자들에게 집중적인 로비를 펼친 결과 페리니 회장이 곧 인천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피에라밀라노측은 또 아시아 파트너로 인천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이 원조] (14) 등대

    [인천이 원조] (14)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1903년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 떨어진 무인도인 팔미도에 세워졌다. 팔미도는 사주(砂洲)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팔자(八)처럼 양쪽으로 뻗어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로 불렸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미(八未)’로 표기돼 있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등대가 낭만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이 같은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세의 거친 파도는 팔미도를 조용한 섬으로 가만두지 않았다.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은 앞다퉈 이양선을 몰고와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인천항 길목에 위치한 팔미도는 그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섬이었다. 일본은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우리 정부와 맺은 ‘통상장정’에 있는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들어 1901년 등대 건설을 요구하고 나섰다. 등대의 효용을 모를 리 없는 조선 정부였으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하다 결국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팔미도 등대 건설에 착수해 이듬해 6월 완공했다. 등대는 높이 8m의 원통형으로 세워져 인천항을 찾는 배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관리는 일본인 기술자가 직접 맡았다. 팔미도 등대는 처음에 석유등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도깨비불 같아 사람들은 등댓불을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해방 이후 전기를 이용한 백열등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태양광 발전장치를 이용하고 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팔미도 등대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두커니 바닷가 바위 위에 서서 밤마다 그 큰 눈을 번쩍번쩍 굴리면서 밤길 가는 배들이 편안히 가도록 지켜주는 등대는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여기는 서울서 얼마 되지 않는 인천 바다에 있는 팔미도라는 섬에 있는 등대입니다.” 그런데 일제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팔미도 등대가 6·25전쟁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의 불빛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 10만 병력과 대함대가 인천에 상륙하려면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야 했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첩보부대인 ‘켈로’부대원들은 1950년 9월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에 들어갔다.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등대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살펴보니 전선이 끊어졌을 뿐 나머지는 멀쩡했다. 이 상황을 일본 도쿄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에 보고하니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날 밤 12시 정각에 등댓불을 밝혀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9월14일 밤 목숨을 걸고 팔미도에 잠입한 부대원들은 등댓불을 환하게 밝혔다. 수백 척의 함정들이 이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켰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2003년 팔미도 등대 건립 100년을 맞아 팔미도에 등대를 새로 설치한 뒤 기존 등대는 해양문화유산으로 영구보존키로 했다. 팔미도 등대는 일제하의 수난과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를 증언하면서 오늘도 인천 앞 바다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석모도 관광 ‘업그레이드’

    강화군 석모도에 골프장과 온천휴양지를 개발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13일 인천시에 따르면 강화군 석모도(삼산면 매음리) 일대 폐염전 부지 23만 5000평에 18홀 규모의 골프장과 객실 52실을 갖춘 콘도를 건립하기로 했다. 골프장 건립을 위한 사전환경성 검토 협의는 지난 5월 한강유역환경청과 마무리한 상태며,580억원 정도가 소요될 골프장은 민자유치를 통해 건설할 예정이다. 온천휴양지는 석모도 내 9만 3000평에 조성할 예정이며,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1000억원이 드는 온천휴양지 조성사업은 인천시가 2004년 11월 석모도 일대 3.3㎢를 온천원보호지구로 이미 지정했기 때문에 가능하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초대석] 조윤길 옹진군수

    조윤길(57) 옹진군수에게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인천시 공보관으로 재직하던 2004년 안상수 인천시장의 ‘굴비상자 2억원’ 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방송사 카메라가 시장 집무실을 비롯해 안 시장 자택까지 들이닥쳤을 때 그는 보도진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큰 덩치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마치 황소처럼 우직하게 보였다. 기자들에게 원성을 살 만한 사안이지만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다른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공직자답지 않게 육두문자도 곧 잘 쓴다. 하지만 솔직하고 담백한 데다 뒤끝이 없어 누구와도 오랫동안 인간관계가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그는 당선자 시설에 ‘인수위원회’도 꾸리지 않았다. 혼자 불현듯 군청사에 나타나 간부들에게 “앞으로 잘해 봅시다.”라고 어깨를 두드리고 나온 것이 전부일 정도다. 조 군수가 무게를 두고 있는 현안은 섬 교통문제 해결이다.25개의 유인도로 이루어진 옹진군에 해상교통은 문제를 풀어가는 시발점이자 전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섬에 쾌속선이 투입됐지만 관광객유치 등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이를 위해 쾌속선 추가투입 및 노선 다각화, 여객선 접안시설 정비, 일반인 및 수화물 운임 감면, 마을 공영버스 적자보전 현실화 등을 추진할 방침이다. 관광 활성화를 위해 관광휴양시설과 테마마을 조성, 체험어장 육성, 역사유적지 발굴 및 복원, 영종도∼신도간 연륙교 건설 등을 꾀하기로 했다. 민간자본을 유치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옹진군의 섬들은 천혜의 경관을 갖췄음에도 관광자원화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광상품 개발과 홍보 등을 통해 수도권 최상의 관광지로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조 군수는 중국 어선들의 불법조업 등으로 어자원이 고갈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접경지역인 서해5도서 어민들은 중국어선 때문에 피해를 보는 데다 야간조업마저 금지돼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관계당국과 협의해 성어기만이라도 야간조업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또 “직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하겠지만 비리는 엄단하겠다.”고 강조했다. 옹진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길섶에서] 술버릇/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인천 주안동에는 카페골목이 있다. 카페와 단란주점, 룸살롱 등이 몰려 있다 보니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하는 여종업원들에 의해 술버릇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손님 1순위로 꼽히는 부류가 있다. 판검사와 변호사 등 소위 ‘사’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녀들 표현대로 하면 ‘진상’이다. 다른 지역에서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 나름이겠지만 법조계 인사들의 술버릇이 구설의 대상이 되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의사도 만만치 않아…”라고 말하는 종업원들도 있다. 이들이 업무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기에 그럴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 한둘인가. 지인 하나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이 술을 늦게 배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술을 일찍이 ‘밝혔다면’ 험난한 관문을 뚫고 판검사나 의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이나 부를 성취한 시점에서 술을 배웠기에 아무래도 주위의 눈을 덜 살피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다면, 옛날 말대로 술은 일찍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하는가 보다. 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kimhj@seoul.co.kr
  • ‘돗자리의 왕’ 강화 화문석 없는 게 없다

    ‘돗자리의 왕’ 강화 화문석 없는 게 없다

    무더위가 다가오고 있다. 선풍기와 에어컨도 좋지만 등을 대고 누우면 그 시원함에 더위가 절로 가시는 우리 고유의 돗자리인 ‘화문석’으로 더위를 이겨보는 것은 어떨까.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강화토산품판매장’은 재래 돗자리 가운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강화 화문석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매장이다. 점차 빛을 잃어가는 재래시장의 한 형태지만 화문석의 장점을 아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서양에서 들어온 카펫이 편하기는 하지만 알레르기 등 인체에 각종 부작용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우리 몸에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라며 화문석이 부각되고 있다. 화문석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노인들은 자식을 앞세워 이곳을 찾곤 한다. 상인들은 이곳을 찾는 고객 대부분이 화문석을 사용해본 사람들이어서 긴 설명이 필요없다고 강조한다. ●특징 화문석은 논에서 재배한 왕골을 재료로 섬유를 짜듯 만든다. 왕골은 봄 모내기 전후에 논에 심어 추석을 전후해 수확한다.‘고드레’라는 왕골 짜는 물품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공정을 사람의 손에 의존하기 때문에 제작기간이 오래 걸린다. 화문석은 약품처리를 전혀 하지 않아 인체에 해가 없고, 여름에는 땀을 잘 흡수해 시원하고 겨울에는 냉기를 막아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시킨다. 오래 사용해도 윤기가 죽지 않고 부스러짐이 없으며 질긴 게 특징이다. 또한 봉황·태극·꽃 모양 등 다양한 무늬를 수놓아 장식용으로도 품격이 뛰어나다. 화문석은 다른 돗자리에 비해 제품이 우수할 뿐 아니라 인공섬유로 만든 카펫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가격 이곳 점포에서는 화문석뿐 아니라 왕골로 만든 소품·방석·베개·모자 등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팔고 있다. 화문석은 짜는 과정에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비싼 편이다. 하지만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고 몸에 좋기 때문에 가격만을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5자×7자짜리가 20만∼30만원, 6자×9자 25만∼45만원,7자×10자 35만∼55만원,8자×11자 50만∼70만원 선이다. 주문 생산할 경우 이보다 20∼30% 비싸지만 크기나 디자인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혼수용품으로 적합하다. 가을과 겨울, 이른 봄 등 비성수기에는 정상가격보다 20% 정도 싸게 판다. 왕골로 만든 다른 생활용품들은 이에 비해 싼 편이다. 물건을 담는 소품은 크기에 따라 1만∼5만원, 화방석 2만 5000∼4만원, 모자 8000∼1만원, 베개 3000∼1만원, 소쿠리(5개 세트) 5000∼1만원이다. 화문석 완제품은 강화특산품판매장에 있는 8곳의 매장에서 소매로 판매되거나, 전국에 있는 토산품판매장에 도매로 넘겨져 수요자에게 공급된다. ●현황 강화 일대에는 18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문석 재료인 왕골을 재배하는 농가가 1000여가구에 달했지만 지금은 120여가구(재배면적 12.4㏊)에 불과하다. 가구당 평균 재배면적도 100∼200평에 불과하며, 전업농가는 별로 없고 대개 부업으로 한다. 그나마 화문석을 직접 짜는 곳은 송해·양사면의 80여가구에 불과하다. 이처럼 왕골이 귀하기 때문에 질이 좋은 것은 화문석 제조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다른 생활소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이들 농가의 연간 화문석 생산량은 5000장 정도다. 이같은 현상은 1980년대 이후 주거 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대거 바뀌면서 재래식 돗자리보다는 카펫을 선호하는 풍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신세대 가정일수록 화문석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 이곳 상인 한금순(66)씨는 “화문석은 우리 조상의 기예와 정성이 담긴 제품”이라면서 “먹는 것뿐 아니라 가정용품도 신토불이가 좋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강화군은 지역 특산품인 화문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해 송해면 양오리에 ‘화문석문화관’을 설립했다. 화문석 명인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화문석 짜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체험관 등이 설치돼 있다. 강화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숯박사’로 불리는 친환경인

    ‘숯박사’로 불리는 친환경인

    이낙천(60)씨는 ‘숯 박사’로 통한다. 그는 인천시 서구 왕길동에 있는 미래챠콜 대표이다. ●참숯 초배지등 숯 관련 특허 18개 획득 1999년 참숯으로 만든 초배지(초벌로 하는 도배)를 개발한 이래 숯 관련 특허를 18개나 획득하면서 참숯 이용제품 방면에서 독보적 존재로 부각돼 왔다. “숯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뿐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에서도 인체에 유익한 성분으로 널리 알려져 ‘까만 마술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가 숯 신봉론자가 된 것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에서 가구업체를 운영했으나 무분별한 가구 수입으로 경쟁력을 상실하자 다른 사업을 구상하던 중 숯이 국내에서는 갈비집 등에서 제한적으로 쓰이는 반면, 일본에서는 숯침대 등 건강용품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1997년 무작정 일본 후쿠야마로 건너가 시장조사를 한 뒤 숯이 자신의 재기를 도울 ‘효자상품’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분석에서 테스트까지 도맡아 하지만 국내에는 숯에 대한 연구자료가 거의 없어 스스로 모든 것을 개척해야만 했다. 변변한 연구실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분석에서부터 테스트까지 직접 담당한 그는 2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한지에 참숯을 바른 초배지를 개발했다. 건강에 좋은 참숯으로 만든 도배지를 사용할 경우 주거환경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숯은 외부의 온도를 차단시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 또 냄새를 중화시키는 탈취작용과 음이온 방출, 곰팡이 등 유세세균 방지 등 다양한 효과가 입증됐다. ●국내 유수 건설사에 독점 납품 ‘기능성 지류(참숯 건강한지)’라는 명칭으로 실용신안등록과 특허를 낸 이씨는 이것을 들고 삼성물산을 찾아갔다. 이 회사는 1999년 2월 서울 돈암동 재개발아파트에 참숯 초배지를 시공한 결과 효능이 입증됐다. 이씨는 2000년부터 삼성래미안 아파트에 참숯 건강한지를 독점 납품했다. 이후 참숯 초배지는 유명 아파트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어 매출이 2001년 10억원,2002년 15억원,2003년 22억원으로 급속도로 늘어났다. ●인천 최초 신지식인으로 뽑혀 1999년에는 인천시 최초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됐으며, 대한민국 친환경 기술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밖에 참숯을 바른 쌀봉투와 딸기 포장지 등을 개발했다. 이 쌀봉투는 유해세균이나 쌀벌레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으며, 딸기 포장지는 원적외선·음이온 방출 등의 효과로 딸기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시킨다. 그러나 이씨는 요즘 큰 고민거리가 있다. 참숯 초배지의 효능이 입증되면서 이를 모방한 유사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가 만든 제품은 회배(가로 1m, 세로 1m)당 숯이 15∼20g 들어 있는 반면 유사제품들은 10g 이하여서 기능성이 떨어지며, 숯가루가 날릴 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씨는 “우리 제품은 진천 숯가마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참숯만 사용하는 반면 다른 업체들은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무늬만 참숯인 모방제품을 사용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 사진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현대 생활에서 날씨는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언제 어디에 설치됐을까? 공식적인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고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초대 인천관측소장에는 일본 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씨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경성, 대구,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다. 또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다. 인천관측소 및 지방 측후소에서는 매일 오전 2시,6시,10시, 정오, 오후 2시,6시,10시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상을 관측했다. 날씨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매 시간 또는 30분마다 임시 관측을 했다. 관측사항은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 강수량, 증발량, 구름의 투명도 등 중요한 기상요소를 비롯해 그외의 기상현상을 실측했다.1910년 4월에는 인천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관측소의 주요업무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시보와 오후 3시 천기 예보였다. 일기예보는 “서해로 구름이 창궐하고 태풍이 불 조짐이 보이나니….”라는 식의 고풍스러운 멘트였다. 특히 정오 시보는 포를 쏘아 알렸는데 포수가 손을 다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제로 손가락 8개를 잃은 포수는 얼마 전까지 동구 화평동에서 ‘전당포 조막손 아저씨’로 불리며 생존했다.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오포가 울리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인천 사람들은 관측소가 있는 응봉산을 오포 쏘는 곳이라 해서 ‘오포산’으로 불렀다. 인천관측소는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 산하기구가 되었는데,1912년 3월 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관측소는 기상에 관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실시했다. 인천관측소는 1939년 7월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에는 중앙기상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되고,6·25전쟁으로 중요한 기상관측 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된다. 그 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오늘의 눈] 단체장 측근비리 유감/ 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지난 3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안상수 시장의 취임식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안 시장이 취임사가 끝난 뒤 객석에 앉아 있던 친척 10여명을 일으켜 세워 소개한 것이다. 그는 이어 “앞으로 이들이 이권에 개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측근비리 단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가 무색해졌다. 6일 안 시장의 최측근으로 꼽혀온 홍모(54)씨가 조경업자에게 인천시 발주공사 수주를 도와주고 3570만원을 받은 혐의로 인천지검에 구속됐다. 홍씨는 안 시장 캠프의 좌장 역할을 하면서 공을 인정받아 시 산하 공기업 상임이사로 근무해왔다. 안 시장의 공언이 불과 3일만에 공염불이 됐다. 재선인 안 시장의 동생을 비롯한 측근들은 지난 4년 재임기간 중에도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안 시장측에서는 “악의적인 소문에 불과하다.”며 손을 가로젓지만, 측근들이 인사와 이권 등에 개입한 정황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느덧 민선 자치제가 도입된 지 12년째를 맞고 있다. 그동안 단체장이 뇌물을 받거나 이권에 개입했다가 사법처리된 일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는 묵묵하게 목민관의 길을 걸어온 대다수 단체장들의 빛을 바래게 하고, 지방자치의 당위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하고 암적인 것은 측근들의 발호다. 선거 과정에서 단체장을 도운 참모나 친척 가운데 도덕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단체장이라는 ‘과실(果實)’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소인배들에게 단체장이란 ‘각종 이권이 넘쳐나는 물좋은’ 자리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단체장과의 관계를 생색내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호가호위’하며 각종 이권과 인사에 손을 댄다. 임기가 보장된 단체장보다 오히려 “시간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체면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다. 때문에 비리내용도 추잡하기 그지없다. 민선 자치제도는 살쾡이와도 같은 이들에게 먹잇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단체장 측근비리에 대한 감시와 단죄가 더욱 철저히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kimhj@seoul.co.kr
  • 영종도 ‘음식문화타운’ 건립

    경제자유구역인 인천 영종도에 대규모 `음식문화타운´이 건립된다.5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2010년까지 30억원을 들여 영종지구내 부지 500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음식문화타운을 짓기로 했다. 이곳에는 음식박물관과 음식체험관, 인천 대표음식 판매식당, 관광상품 판매점, 위생교육관, 부대시설 등을 갖추게 된다. 이를 위해 내년에 인천시 지정 음식업소와 시내 각 구·군을 대상으로 우리 음식을 대표할 대상업소를 조사할 방침이다. 또 외국인 이용이 편리한 음식점 200곳을 발굴하고, 향토 전통음식 30가지를 선정할 예정이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29만평 뉴타운 사업 활성화”

    안상수 인천시장은 3일 취임사에서 “지난 4년간 인천은 국내외 이목이 집중되는 가장 역동적인 도시 중 하나로 자래매김했으나, 도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면서 “향후 4년간을 구체적인 성과 달성의 기간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경제자유구역의 비즈니스 환경조성과 도시 재생사업을 통한 구도심의 균형발전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했다.29만평에 이르는 서구 가정오거리 뉴타운 조성사업과 도화개발사업 등 구도심권에 대한 개발사업이 붐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안 시장은 5가지의 시정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동북아의 경제중심’을 위한 기반 구축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해 나가겠으며,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의 주거ㆍ교통ㆍ환경여건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함께 사는 ‘자활형 복지도시’, 문화ㆍ예술과 스포츠가 어우러지는 관광도시를 만들겠으며 마지막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인천인’을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안시장은 이어 20만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인천형 뉴딜정책’과 청년 인턴제 운영, 편리한 신교통체계 구축,300만평 공원조성사업 등도 착실하게 추진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오늘의 눈] ‘아픈 기억’ 잊은 대우차/ 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GM대우자동차 노조가 산별 노조로의 전환을 결의한 것을 보자 ‘기억 상실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잦은 파업 등으로 회사가 망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시점에서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는 파업’을 유발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한 것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노조의 힘이 강했던 대우차는 1990년대에 파업을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카리스마가 대단한 김우중 회장이 당시 경영을 맡았지만 자신의 약점 때문에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달래기로 일관했다. 그 결과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들의 임금은 매년 올라 생산비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11%에 달했다. 정상적인 비율은 6∼7%선이다. 때문에 ‘대우가 좋은 대우차’라는 말도 나돌았지만, 결과적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격이 됐다.2000년 12월 최종 부도가 나 1750명이 정리해고되고 1250명의 강제성 희망퇴직자가 발생했다. 자생력을 완전히 잃은 대우차는 결국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거쳐 2002년 10월 미국 GM사에 인수됐다. 이후 근로자들이 노력한 결과 지난해에는 역대 최고 판매 대수를 기록하는 등 회생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에 힘입어 과거 해고됐던 직원 대부분이 복직됐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 노조로의 전환은 안정을 찾기 시작한 이 회사에 암초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노조 형태가 산별로 바뀔 경우 협상 구조가 중앙교섭 및 개별기업 교섭으로 이원화돼 파업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또 회사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공동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상정할 수 있다. 대우차 노조원들은 77%의 찬성으로 산별 노조 전환을 결의했다. 현대차 71%, 기아차 76%에 비해 오히려 높은 수치다. 대우차 노조원의 상당수는 해고됐다가 복직된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들이 산별 노조를 선택한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지난날의 아픔을 딛고 서서히 ‘파이’를 키워가는 시점에서 또다시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학준 지방자치뉴스부 차장 kimhj@seoul.co.kr
  • 인천시 마이너스 옵션제 시행

    인천시는 아파트 입주 예정자가 마감재와 주방용품 등을 직접 선택, 시공할 수 있는 ‘공동주택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키로 했다. 이는 아파트 분양계약시 입주자가 옵션 품목을 신청하면 해당품목의 설치비용을 제외한 가격으로 분양받은 뒤, 아파트 완공 전후에 입주자가 직접 품목을 구입해 시공하는 제도이다. 시행은 인천시가 건축심의 기준을 확정한 후인 7월 중으로 예상된다. 시는 이 제도 시행에 따른 마감재 가격 논란을 막기 위해 건설교통부의 ‘총사업비산출 총괄표’에 의해 마감재 및 일부 시설의 가격을 결정할 방침이다. 또 사업승인 요청시 사업자는 산출기초 자료를 제출해야 하며, 필요하면 분양승인권자가 견적 전문업체에 확인을 요청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계획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아파트 입주 전후 마감재 교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고 다양한 입주자 취향을 고려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시흥 신천 어떻게 변했지?

    시흥시는 신천의 자연형 하천 만들기 1단계 구간 공사가 끝남에 따라 신천을 시민들에게 개방키로 했다. 1단계 구간은 사천교∼신천2교 500m로 29억원이 투입돼 자연형 호안블록이 설치되고 차집관거 시설이 보수됐다. 또 2∼3m 너비의 산책로와 수질 및 대기 정화기능을 갖춘 수변 식생대가 조성돼 있다. 시는 이에 따라 내년 2월 70억원을 들여 나머지 2차 구간(신천2교∼소래포구 상류) 5㎞에 대한 공사를 시작해 내년 말 끝내기로 했다. 2단계 구간에는 달리기는 물론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산책로와 농구장, 배드민턴장 등 체육시설, 꽃길과 숲지대가 곳곳에 조성된다.시흥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에 특목고 3곳 추가 설치

    인천시 부평구와 계양구 등 2곳의 구도심과 신도시인 소래·논현지구에 특수목적고가 건립된다. 인천시는 29일 우수한 학생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수목적고 3개교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는 이에 따라 시교육청과 특목고 설립을 위한 협의를 갖고 학교 위치와 개교 일정, 시비 지원규모 등을 확정짓고 내년 말쯤 특목고를 신축할 계획이다.현재 특목고 예정지로 거론되는 곳은 부평구 경찰종합학교 부지와 계양구 군부대 부지 등 교육환경이 다소 열악한 지역이다.또 ㈜한화가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학교 부지를 기부채납키로 한 소래·논현지구가 유력시되고 있으며, 사업 방식은 시가 부지를 지원하고 시교육청이 학교를 신축하는 방식이다.시는 우선 우수학생들이 선호하는 외국어고등학교를 신축하고 과학계열 및 국제학교 등 특성화 학교를 신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이 원조](12)정미소

    [인천이 원조](12)정미소

    농촌에서 수확한 벼를 쌀로 만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이 바로 도정(쌀을 찧는 일)이다. 이 도정 작업을 하는 곳이 정미소다.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미소가 없어 연자방아나 물레방앗간에서 쌀을 찧었다. 그러던 중 1892년 인천 용동에 정미소가 생겼는데, 사람들은 이를 ‘담손이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이는 스팀 동력 즉, 증기를 이용하는 근대식 시설을 갖춘 최초의 정미소였다.‘담손이’라는 말은 ‘타운센드’의 우리식 발음으로, 미국인 월트 타운센드가 세운 ‘타운센드 상회’가 정미소를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타운센드 상회는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영국 이화양행, 독일 세창양행과 더불어 인천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 무역회사였다. 이 회사가 인천에 진출한 것은 1884년인데, 처음에는 타운센드가 미국인 모스의 무역상사 인천대리점을 운영하는 형태였기에 ‘모스·타운센드’라는 상호를 달고 영업을 했다. 그 후 1995년 타운센드가 모스의 권리를 인수해 회사 명칭을 ‘타운센드 상회’로 바꿔 1930년까지 운영했다. 타운센드는 상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1885년 인천의 ‘순신창 상회’를 인수한 뒤 서상집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미곡 무역에 종사했다. 그는 한국인 객주와 상인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무기를 구입해 조선 정부에 납품하기도 했다. 또 왕실에서 쓰는 사치품과 전기 관련 용품을 납품했으며,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자 자금을 대는 등 큰 부를 축적했다. 조선 개항 초기 최고의 ‘큰손’이자 ‘마당발’이었던 셈이다. 그러던 중 인천항이 미곡 집산지여서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늘어나자 1892년 재빠르게 일본인들을 앞질러 정미업에도 손을 댔다. 당시 사용한 정미기는 1889년 미국 뉴욕에서 제작한 신안특허품으로 쌀을 곱게 마찰시켜 표면이 깨끗하고 광택이 나는 것은 물론 돌이 섞이지 않는 최상품의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농부들은 담손이방앗간에서 나오는 쌀이 뽀얗다고 해서 ‘수정미’로 불렀다. 이 정미기는 60마력으로 12시간 사용하는데 석탄 1.5t이 필요했고, 하루에 쌀 16가마를 찧을 수 있었다. 정미기가 모두 4대였으므로 64가마를 생산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생산량이었다. 물론 그 쌀은 대부분 일본과 연해주 등으로 수출돼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정된 쌀을 직접 먹어보기 여려웠다. 어쨌든 담손이방앗간은 그 시절의 명물로 등장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쌀 찧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고 한다. 이 방앗간을 계기로 정미소가 급속히 늘어나 당시 인천항에는 대형 정미소가 19개에 이르렀으며, 하루 생산능력이 7000석으로 1년 동안 300만석을 도정할 수 있었다. 소규모 정미소도 21개에 달해 인천은 정미업의 대명사로 통했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정미소는 1924년 유군성이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정미소’가 최초로 정미기 5대를 갖추고 남녀 직공 70명이 하루에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고 한다. 비록 시설은 소규모였으나 유씨는 당시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미업계에 홀로 뛰어들 만큼 상업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사진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
  • 인천 2010년 ‘국제도시 엑스포’ 개최

    인천시는 2010년에 ‘국제도시 엑스포’를 개최키로 했다. 28일 시에 따르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발전상을 세계에 알리고,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계 엑스포’ 특수를 흡수하기 위해 2010년 9월20일부터 10월30일까지 40일간의 국제도시 엑스포를 준비하고 있다. 시는 올 하반기에 구체적인 행사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용역을 발주하고 내년 상반기 중 준비기획단과 조직위원회 등을 구성하기로 했다. 송도국제도시 내 컨벤션센터에서 열리게 될 국제도시 엑스포는 2009년 10월과 12월 각각 준공 예정인 인천대교와 아시아트레이드타워 등을 선보이며, 각국의 투자유치를 유도할 계획이다. 시는 세계 최초의 U-City(유비쿼터스 도시)로 조성 중인 송도국제도시가 IT 강국 대한민국의 중심지라는 홍보를 통해 투자가치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또 같은 기간에 열리는 중국 상하이 ‘세계 엑스포’에 참가하는 유럽과 미주 바이어들을 최대한 끌어들일 예정이다. 시는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 정보통신부와 공동주최를 추진하는 한편 기업체와 대학교, 연구소 등의 참여도 유도하기로 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인천 마니산 국민관광지로

    인천시는 500억원을 들여 강화군 마니산 일대를 국민관광지로 재개발키로 했다.시는 이를 위해 현재 44만 70000평인 마니산 관광지를 33만 6000평으로 축소하고, 내년 문화관광부에 관광지 리모델링 시범사업 대상지 지정을 요구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마니산 함허동천지역은 ‘숙박과 야영지구’로, 상방지역는 ‘문화와 관광지구’로 각각 조성된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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