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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와 차 한잔] 사교육 현장 보고서 ‘대한민국의 미친 엄마들’ 펴낸 정찬용씨

    [저자와 차 한잔] 사교육 현장 보고서 ‘대한민국의 미친 엄마들’ 펴낸 정찬용씨

    흔들리다 못해 붕괴의 낙담까지 요란한 공교육. 위기의 공교육을 메워 활개 치는 사교육. 그 틈새에서 ‘성공 신화’의 꿈을 먹고 맴도는 학생과 학부모. 이제 그 모순과 망국의 교육 부조리를 끊어야 하며 엄마들이 가장 먼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 게릴라’가 있다. 지난 1999년 베스트셀러 ‘영어공부 절대 하지 마라’로 센세이션을 불렀던 정찬용(58)씨. 그가 ‘내 자식도 빠질 수 없다’며 대책 없는 공부 대열에 휩쓸려 방황하는 이 땅의 모든 엄마들에게 방부제 같은 쓴소리를 쏟아낸 책 ‘대한민국의 미친 엄마들’(들녘)을 세상에 내놓아 주목된다. 출간에 맞춰 서울신문 편집국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저 같은 비전문가가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겸손 섞인 한탄으로 인사를 건넨 정씨는 작심한듯 불만을 쏟아냈다. “이 땅의 교육과 관련한 모든 이들은 비틀린 교육의 심각함을 다 알고 있어요. 문제는 아무도 나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쌓인 것이 많을까. 할 말이 그토록 많은 것일까. “교육 행정 당국은 물론, 교육 전문가, 사교육 담당자들이 기득권을 놓치 않으려는 게 큰 이유입니다. 시스템을 바꿔서 자신들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원치 않는 것이지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왜곡의 교육 시스템이라면 담당자들이 촛불시위라도 해서 바로잡아야 할텐데, 그렇지 않아요.” 정씨는 서울대 조경학과를 나와 독일 도르트문트대를 거쳐 하노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경학자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해 에버랜드 테마파크와 공원 설계 프로젝트를 마칠 무렵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제의 한국 교육에 눈뜨게 됐다고 한다. “처음 운동장 수업을 참관했는데 제식교육부터 시키는 것이었어요. 과제도 제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과 똑같은 수준인 걸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학교와 교사들에게 개선을 요구하고 부탁도 여러 번 했지만 ‘백년하청’의 무반응에 더 놀랐단다. 그래서 지인들과 함께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작은 대안학교를 세워 아들을 보냈고 직접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인터넷 강연을 하면서 만난 학부모들로부터 곪을대로 곪은 한국의 교육 실상을 알게 됐다고 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인생이란 도식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지요. 일류대학 입학 정원은 극소수로 한정돼 있어요. 공교육의 주체인 학교와 교사들은 진실을 말하지만 사교육 주체인 학원과 강사들은 그렇지 못해요. 어떻게든 이득을 남겨야 하는 학원, 강사들이 인성교육에 신경을 쓸까요?” 진실보다는 학부모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 허황된 꿈을 부풀리고 학부모, 특히 엄마들이 그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기 일쑤라는 것이다. “욕먹기를 각오하고 책을 썼다”는 저자는 인터뷰 도중 이 말을 자주 했다. “‘일부 몰지각한’이 아니라 ‘대다수의 지각 있는’ 이들이 더 문제입니다.” 알 만하고 많이 가진 이들이 더 극성이다. 서울 대치동 학생 대상의 한 조사에서 100%가 사교육을 받는다는 결과가 실린 기사를 보여준다. 그러면 왜 ‘미친 엄마’들이 틀을 깨야 할까. 남들은 다 사교육시키는데 나만 빠지면 손해 보는 것 아닐까. 저자는 그 대목에서 정색하고 말한다. “물론 왜곡된 교육의 1차적인 책임은 당국과 교육 전문가들이 져야지요. 하지만 가장 학생들과 밀접한 관계자는 엄마입니다. 책임질 사람들이 발을 빼는 상황에서 엄마들이 입시 공부가 아닌 사람답게 사는 교육을 요구하는 행동에 적극 나선다면 당국이나, 전문가, 사교육계도 어쩔 수 없이 방향 전환을 하게 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아이들은 하나하나가 작은 우주입니다. 존중과 인정,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그들은 지구라는 큰 우주 속 한 부분으로 잘 성장합니다. 엄마들이 아이에게 자신의 꿈과 욕망, 자존심, 심지어 과거의 복수심까지 투영시켜 사는 건 아닌지요.”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잊혀진 계절/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참 옷 가려 입기가 어렵다. 아침저녁으론 선선한데, 한낮엔 수은주가 30도 가까이 치솟는다. 널 뛰듯 요동치는 수은주에 장단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옷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것을 꺼내보고 저것을 만져보고. 아마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헷갈리는 심경들이 많을 듯싶다. 조금 두껍다 싶은 점퍼를 골라 입고 집을 나서는데 왠지 옛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어릴 적 이맘 때쯤이면 제법 찬 바람에 옷매무새를 다졌는데. 마을 뒷산 밤나무 사이로 번져오는 소슬바람도 꽤 삽상했고. 추석을 앞둔 동네 어른들의 가을걷이 몸짓들도 분주했었는데. 추수 끝 거둔 곡식이며 과일들을 돌려먹는 인심도 꽤 좋았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중추가절이 좋긴 좋은가 보다. 선물 나르는 배달의 물결이 벌써 요란하다. 도시 삶에 쫓기다 보니 고향의 삽상한 소슬바람을 잊은 지 오래다. 지금도 그곳에선 가을걷이가 한참일까, 나눠 먹는 정도 여전히 도타울까. 얼마 전 지나다 보니 마을이 많이도 변했던데. 가을 옷 한 벌 갈아입었을 뿐인데. 오늘 아침 참 많은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노숙인 문화제... 거리의 아빠들 희망을 선포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총무 김영주 목사)는 다음달 10일 오후1시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홈리스 문화제’를 마련한다. 지난해 개최했던 제1회 노숙인 창작음악제 ‘거리의 아빠들, 희망을 노래하다’에 이어,올해는 ‘거리의 아빠들, 희망을 선포하다’라는 슬로건아래 더욱 확장해 연다고 NCCK는 밝혔다.  특히 지난 해 단순히 ‘음악’ 만을 매개로 진행한 것과는 달리 올해 문화제는 ‘극’과 ‘전시’가 어우러진다. 서울 뿐만 아니라 대전 부산 등 지방에서도 함께 참여해 미니콘서트와 노숙인들의 이야기, 목회자및 봉사자들과의 대화 등으로 꾸민다. 대전에서는 노숙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당극 형식으로 풀어낸 ‘보석 같은 남자들이 만드는 마당극’(벧엘의 집·원용철 목사)을 준비하며 부산은 부산 NCC 노숙인사회복귀위원회에서 부산 밥퍼를 중심으로 꾸린 합창단이 참여한다.  이에앞서 NCCK 홈리스대책위원회(위원장 함동근 목사)는 지난 18∼19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팀비전센터에서 참여 노숙인들과 스태프들이 함께 모여 팀워크를 다졌다. 이번 문화제의 모든 준비과정은 영화 ‘괴물’의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김경모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NCCK는 노숙인에 대한 인식 개선 차원에서 10월 첫째 주간을 ‘홈리스 주간’으로 정했다고 23일 발표했다. NCCK는 이에따라 전국의 회원교회에 공동기도문과 예배문, 설교자료들을 보내 사회적 약자인 홈리스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고양시킨다는 계획이다.문의 (02)742-8981.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1700년간의 수행 경전 한문-한글본 나왔다

     외길 김경호(54) 한국사경연구회 명예회장이 전통사경 교본 1차분 4권을 완간했다. ‘불교 경전을 옮겨쓰는 행위’쯤으로 알려진 사경(寫經)은 1700년간 수행의 방편으로 이어져왔던 문화유산이다. 합천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비롯한 다양한 목판과 금속활자 제작의 기초였으며 고려시대엔 원나라 요청으로 수차례에 걸쳐 사경 전문가 100여명씩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번 발간된 전통사경 교본은 단절 위기에 처한 사경을 대중에게 널리 전하는 노력을 해온 김 명예회장이 고생 끝에 세상에 내놓은 성과물.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한문본·한글본, ‘의상조사법성게(義湘祖師法性偈)’ 한문본·한글본으로 구성됐다. 불교의 전통적 수행법으로서 사경 이론을 설명하면서 사경에 쓰이는 도구와 재료를 관리, 보존하는 방법까지 정리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사경의 기본인 서예의 핵심 요소를 상세히 제시해 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꾸몄다. 특히 ‘의상조사법성게’ 한문본에서는 2000여년간 서예가들이 추상적으로 다뤄온 ‘俗書’(속된 기운이 있는 글씨)에 대해 최초로 12가지의 예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규명했다. 교본 중간중간에 ‘팁’과 ‘종합’이라는 설명을 통해 명쾌하게 이론을 제시한 것도 특징이다.  김 회장은 “사경은 아주 오래된 수행법임에도 불구하고 방법이나 기법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전무하다”면서 “단절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교본을 출간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서예 월간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전통 사경의 핵심개념 정리’와 ‘사경의 기법’도 펴낼 계획이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캔버스가 된 모래사장… 작품이 된 가을바다

    캔버스가 된 모래사장… 작품이 된 가을바다

    해변 풍경 속에 노를 단 두 개의 프레임이 설치됐다. 하나는 바닷물에 불안한 뗏목처럼 떠 있고, 다른 하나는 약간 불안정하게 기울어 모래사장에 세워져 있다. 부산 사상구 다대포에서 열리고 있는 ‘2015바다미술제’에 참가한 헝가리 작가 조셉 타스나니의 작품 ‘기억의 지속’이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28세에 헝가리로 이민한 그는 설치와 대지미술의 개념을 혼합한 이 작품에 대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과 그들이 두고 온 것에 대한 기억을 다뤘다”면서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전 세계의 난민들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 옆에는 네덜란드 작가 코르넬리스 알베르투스 아우언스의 철제 조형물 ‘바다의 메아리’가 설치돼 있다. 아우언스는 “세 개의 입방체를 표현한 이 작품은 바다를 배경으로 볼 때 완성된다. 중앙에 수직으로 세운 철 기둥을 통해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1987년 시작돼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부산의 대표적인 해양미술축제 바다미술제가 해운대, 광안리, 송도를 거쳐 다대포로 장소를 옮겨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난 19일 막을 올린 2015 바다미술제에는 16개국 34개팀이 참여해 ‘보다-바다와 씨앗’(See-Sea & Seed)을 주제로 10월 18일까지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행사는 ‘산포하는 씨앗’, ‘발아하는 씨앗’, ‘자라는 씨앗’, ‘자라는 바다’라는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본전시와 뉴질랜드의 피터린카이트사가 대형 연 퍼포먼스로 가을 바다를 풍성하게 꾸민다. 김원근의 조각 작품 ‘손님’과 김영원의 거대한 백색 조각 ‘그림자의 그림자’가 눈길을 끄는 해변에는 오노 요코의 ‘소망 나무’를 비롯해 관람객들의 사진으로 완성되는 앤디 드완토로의 ‘100명의 사람들’, 관객들의 호흡으로 완성되는 회화 퍼포먼스인 최선 작가의 ‘나비’, 어린이들이 만든 천 개의 바람개비를 그들이 바라는 꿈과 소원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설치한 노주환 작가의 ‘사랑해요ㅡ천개의 꿈’ 등이 모래사장에 설치돼 있다. 사진작가 이명호는 다대포의 돌에 캔버스를 설치해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라지면서 자연이 캔버스에 돌의 모습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전원길은 박스 형태로 제작된 틀에 보리 싹을 자라도록 하고 해변에 설치해 수직으로 자라는 보리가 수평선에 이르러 일체화되는 ‘녹색 수평선’을 설치했다. 영국의 조너선 폴 포어맨은 버려진 나무에 돌을 설치하고 날씨와 조류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해변 설치 작품으로 고독감과 고요함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는 밤에도 이어진다. 미디어아티스트 이경호는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물 ‘생명의 씨앗,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를 향한 일기’를 선보이고 이이남 작가는 레이저를 통해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과 패턴으로 몽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빛의 움직임으로’를 선사한다. 행사를 주관하는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의 임동락 집행위원장은 “예년과 달리 전시작품 모두 초청작으로 구성해 전시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높였다”며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관객 참여형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 색다른 미술 감상의 기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성호 전시감독은 “부산 동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가 소외된 다대포해수욕장에서 문화예술의 싹을 틔운다는 의미를 담았다”며 “사람과 바다, 예술과 지역, 미술가와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따뜻한 교감을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가을바다가 그대로 예술로 ... 2015 바다미술제

    가을바다가 그대로 예술로 ... 2015 바다미술제

     해변 풍경 속에 노를 단 두 개의 프레임이 설치됐다. 하나는 바닷물에 불안한 뗏목처럼 떠 있고, 다른 하나는 약간 불안정하게 기울어 모래사장에 세워져 있다. 부산 사상구 다대포에서 열리고 있는 ‘2015바다미술제’에 참가한 헝가리 작가 조셉 타스나니의 작품 ‘기억의 지속’이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28세에 헝가리로 이민한 그는 설치와 대지미술의 개념을 혼합한 이 작품에 대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과 그들이 두고 온 것에 대한 기억을 다뤘다”면서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전 세계의 난민들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 옆에는 네덜란드 작가 코르넬리스 알베르투스 아우언스의 철제 조형물 ‘바다의 메아리’가 설치돼 있다. 아우언스는 “세 개의 입방체를 표현한 이 작품은 바다를 배경으로 볼 때 완성된다. 중앙에 수직으로 세운 철 기둥을 통해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1987년 시작돼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부산의 대표적인 해양미술축제 바다미술제가 해운대, 광안리, 송도를 거쳐 다대포로 장소를 옮겨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난 19일 막을 올린 2015 바다미술제에는 16개국 34팀이 참여해 ‘보다-바다와 씨앗’(See-Sea & Seed)을 주제로 10월 18일까지 설치,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행사는 ‘산포하는 씨앗’, ‘발아하는 씨앗’, ‘자라는 씨앗’, ‘자라는 바다’라는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본전시와 뉴질랜드의 피터린카이트사가 대형 연 퍼포먼스로 가을 바다를 풍성하게 꾸민다.  김원근의 조각 작품 ‘손님’과 김영원의 거대한 백색 조각 ‘그림자의 그림자’가 눈길을 끄는 해변에는 오노 요코의 ‘소망 나무’를 비롯해 관람객들의 사진으로 완성되는 앤디 드완토로의 ‘100명의 사람들’, 관객들의 호흡으로 완성되는 회화 퍼포먼스인 최선 작가의 ‘나비’, 어린이들이 만든 천 개의 바람개비를 그들이 바라는 꿈과 소원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설치한 노주환 작가의 ‘사랑해요ㅡ천개의 꿈’ 등이 모래사장에 설치돼 있다. 사진작가 이명호는 다대포의 돌에 캔버스를 설치해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사라지면서 자연이 캔버스에 돌의 모습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전원길은 박스 형태로 제작된 틀에 보리 싹을 자라도록 하고 해변에 설치해 수직으로 자라는 보리가 수평선에 이르러 일체화되는 ‘녹색 수평선’을 설치했다. 영국의 조너선 폴 포어맨은 버려진 나무에 돌을 설치하고 날씨와 조류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해변 설치 작품으로 고독감과 고요함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는 밤에도 이어진다. 미디어아티스트 이경호는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물 ‘생명의 씨앗,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를 향한 일기’를 선보이고 이이남 작가는 레이저를 통해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과 패턴으로 몽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빛의 움직임으로’를 선사한다.  행사를 주관하는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의 임동락 집행위원장은 “예년과 달리 전시작품 모두 초청작으로 구성해 전시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높였다”며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관객 참여형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 색다른 미술 감상의 기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성호 전시감독은 “부산 동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가 소외된 다대포해수욕장에서 문화예술의 싹을 틔운다는 의미를 담았다”며 “사람과 바다, 예술과 지역, 미술가와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따뜻한 교감을 나누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산 글 함혜리 기자 lotus@seoul.co.kr  
  •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뤄서 이룰 수도 있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뤄서 이룰 수도 있다

    무계획의 철학/카르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배명자 옮김/와이즈베리/332쪽/1만 4000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동서고금을 통해 미루기는 지양해야 할 게으름의 표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미루기와 무계획이 인류 절반의 본성에 가깝다고 한다면, 자책하고 없애야 할 악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무계획의 철학’은 쫓기며 계획을 미루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내가 힘든 이유는 못나서가 아니라 일이 많아서’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끝없이 더해지는 과업들을 완벽하게 수행해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슈만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대가들의 게으름이 어떻게 명작의 원동력이 됐는지를 들춰낸다. 슈만은 전공인 법학 공부는 하지 않고 피아노만 치며 음악과 작곡에 몰두했다. 그런가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하학 연구에 빠져 궁정 화가로서의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하기 일쑤였다. 세계적 온라인 이미지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 개발자는 당시 제게 맡겨졌던 게임 개발이 하기 싫어 오히려 플리커 개발에 매달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벼락치기’는 가끔씩 효율적이어서 초인적 집중력을 내게도 한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실제로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는 자신의 명곡들이 미루기와 벼락치기의 산물이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결국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와 같은 금언은 지키지 못해 생기는 강박감만 더할 뿐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일을 줄이고 완벽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야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스스로를 강박관념에서 해방시킬 것을 거듭 권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프랑스 ‘親獨 청산’ 아직 한참 남았다

    프랑스 ‘親獨 청산’ 아직 한참 남았다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이용우 지음/푸른역사/520쪽/2만 9500원 우리 민족에게 일제강점기는 가장 뼈아픈 역사다. 특히 강점기 친일이라는 반민족 행위에 대한 단죄와 청산은 미완의 문제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는 프랑스에서도 완성되지 못한 청산의 작업과 갈등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콜라보’는 흔히 예술가끼리의 협업을 뜻하는 미학적 용어로 통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콜라보’는 그다지 좋지 않은 개념이다. 오히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과거사의 상징이다. ‘점령군이나 적국에 협력하는 행위’의 뜻이 담긴 콜라보라시옹의 줄임말로, 1940∼1944년에 걸친 독일 점령기의 대독 협력자를 일컫는다. 그 기간 중 정부의 수반을 비롯한 고관대작은 물론 레지스탕스를 공격한 민병대까지 대독 협력자는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독일 강점에서 해방된 뒤 프랑스에서 나치 협력 혐의로 조사받은 사람은 줄잡아 35만명에 달한다. 반역 행위가 매우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이 콜라보 12만명 이상을 재판정에 세워 4만명에 가까운 인원을 단죄했다. 해방 전후의 혼란기에 걸쳐 9000명이 약식 처형되기도 했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연구에 천착해 온 저자는 그 콜라보 단죄와 협업의 청산 과정에 의문을 품고 있다. 1951년, 1953년 두 차례 사면을 통해 프랑스의 과거사가 일단락된 것으로 통하지만 실상은 “협력의 문제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거였다”고 꼬집는다. 이를테면 독일 강점기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 협력했던 경찰 총수인 르네 부스케는 가벼운 형을 살고 난 뒤 재계 유력인사로 승승장구했다. 프랑스 경찰이 유대인 1만 3000명을 체포해 수용소로 넘겨 죽게 한 이른바 ‘벨디브 사건’은 1992년에야 재조명됐고 3년 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2차 대전 독일 강점기 프랑스의 대독 협력과 레지스탕스, 전후의 과거사 청산을 다루고 있는 책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약간의 위로와 ‘반복하지 말자’는 짜릿한 교훈을 겸해 전한다. 프랑스의 독일 강점기 과거사 청산을 대독 협력자와 그에 대한 인식·처벌·사면, 국가적 협력과 홀로코스트, 레지스탕스 역사·기억·논쟁으로 구성해 흥미롭다. 주목할 부분은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와 레지스탕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댔다는 점이다. 독일 강점기의 비시 정부는 ‘의무 노동제’를 통해 65만명의 프랑스 국민을 강제로 독일 공장으로 보냈고 항독(抗獨)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특별재판부’를 설치하는가 하면 준군사조직인 ‘프랑스 민병대’를 창설했다. 저자는 비시 정부의 국가적 대독 협력이 낳은 최대의 비극이자 가장 끔찍한 측면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점령을 받지 않은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독일 측에 기꺼이 내준 유일한 국가였다. 독일이 요구하지 않은 16세 미만 유대인들까지 강제 이송 대상에 포함시킨 결과 7만 3000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저자는 비시 대독 협력을 거부한 채 점령 당국과 비시 정부에 끝까지 맞서 저항한 30만∼50만명의 레지스탕스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보인다. 비시 정부가 대독 협력 정부였으므로 항독 행위인 레지스탕스는 응당 반(反)비시여야 할 터. 하지만 초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비시 정부에 대해 모호하거나 우호적인 성향이 꽤 컸음을 밝히고 있다. 레지스탕스 자체 내의 배반 내지 실책으로 레지스탕스 최대의 영웅인 장 물랭이 체포된 칼뤼르 사건도 추적했다. 책을 읽고 난 뒤 의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사 청산으로 향한다.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에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총 682건을 취급해 이 가운데 221건을 기소했고 40건의 재판부 판결이라는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체형은 고작 14명이었고 실제 사형 집행은 단 1명도 없었다.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 점령과 협력의 기간, 정도, 성격은 프랑스와 매우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게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기장, 장로교단 중 첫 납세 결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국내 개신교 장로교단 중 첫 번째로 목회자 납세를 결의했다. 개신교 교단으로는 2012년 대한성공회가 처음으로 교단 차원의 성직자 납세를 결의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개신교 교단으로 성공회 이어 두 번째 기장은 지난 16일 강원도 원주 영강교회에서 제100회 총회 3일차 회의를 열고 종교인 과세와 관련, “근로소득세 납부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기장 교회와사회위원회는 총회에서 “종교인 납세에 대한 신학적·실정법적인 검토 결과와 사회적 여론, 정부의 시행 의지 등을 고려할 때 교단의 입장을 근로소득세 납부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헌의안을 제출했었다. 기장 측에 따르면 전날 헌의안 보고 당시 일부 총대원들이 예장통합 등 다른 교단들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 의견을 개진해 최종 채택에 난항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별 이의 제기 없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소득세법상 종교인 과세를 법제화하는 정부법안의 통과와 관련, 내년 총선에 앞서 교계의 눈치를 봐 온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정치권 법안 통과에 영향 미칠지 주목 기장 총회 측은 “종교인 납세를 관철하려는 정부의 태도나 사회 여론을 생각할 때 더이상 납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교감이 형성됐다”며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교육을 하고 자료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장 측은 이번 결의가 목회자 개개인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게 아닌 만큼 실제 납세가 어느 정도 이뤄질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기독교장로회 목회자 “근로소득세 내겠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국내 개신교 장로교단 중 첫 번째로 목회자 납세를 결의했다.개신교 교단으로는 지난 2012년 대한성공회가 처음으로 교단 차원의 성직자 납세를 결의한 데 이어 두번째다. 기장은 지난 16일 강원도 원주 영강교회에서 제100회 총회 3일차 회의를 열고 종교인 과세와 관련, “근로소득세 납부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기장 교회와사회위원회는 총회에서 “종교인 납세에 대한 신학적·실정법적인 검토 결과와 사회적 여론, 정부의 시행 의지 등을 고려할 때 교단의 입장을 근로소득세 납부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헌의안을 제출했었다. 기장 측에 따르면 전날 헌의안 보고 당시 일부 총대원들이 예장통합 등 다른 교단들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의견을 개진해 최종 채택에 난항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별 이의 제기없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소득세법상 종교인 과세를 법제화하는 정부법안의 통과와 관련, 내년 총선에 앞서 교계의 눈치를 봐온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기장 총회측은 “종교인 납세를 관철하려는 정부의 태도나 사회 여론을 생각할 때 더이상 납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교감이 형성됐다”며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교육을 하고 자료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장 측은 이번 결의가 목회자 개개인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게 아닌 만큼 실제 납세가 어느 정도 이뤄질 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NCCK에 소속된 기장은 종교인 납세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온 교단으로서 총회에서 현실화한 것일 뿐”이라며 개신교계 전체에 미칠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청년’ 아펜젤러, 실천 중시한 신학교서 ‘도전의 싹’ 틔웠다

    ‘청년’ 아펜젤러, 실천 중시한 신학교서 ‘도전의 싹’ 틔웠다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낯선 한국 땅에서 평생 봉사했던 아펜젤러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더욱 회자되는 초기 선교사다. 44살의 나이에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 실종됐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빈 무덤만 남아 있다. 첫 근대식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연 데 이어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한 아펜젤러.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새에덴교회 주관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에 나선 일행이 미국 뉴저지주 모리스카운티 매디슨시에서 만난 드루신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신학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랭클린&마셜대를 졸업한 그가 감리교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1882년 들어간 학교. 펜실베이니아주의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펜젤러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독일개혁교회에 다녔지만 프랭클린&마셜대 시절 한 부흥 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감리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리교의 뿌리라는 드루신학교는 학문적인 일보다 설교 같은 실천적인 일을 중시했던 학교로 꼽힌다. 학교 관계자들은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고 전한다. 종교다원론자로 이름난 고 변선환 목사가 공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강을 했던 곳이다. 감리교 교인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방문해 남긴 휘호도 걸려 있다. 아펜젤러는 1884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열린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ISMA) 총회에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때 언더우드와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 선교를 꿈꿨지만 친구가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되자 선교지를 바꿨다. 같은 해인 1884년 한국으로 발령받아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결행했다. 한국에 와서도 정동제일교회, 인천내리교회를 개척해 감리교 교회 전통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학교 고문서도서관에는 아펜젤러가 입학할 때 쓴 자필 소개서와 한국 선교 때 쓴 편지를 비롯해 아펜젤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 수북하게 보관돼 있다. 크리스토퍼 앤더스 고문서실장은 “아펜젤러의 글을 통해 한국 문화와 역사가 미국에 알려졌고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해외로 파견됐다”고 귀띔했다. 드루신학교를 떠나 일행이 다다른 곳은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가 독일개혁교단을 떠나 개인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감리교인이 된 뒤 다녔던 교회이다. 드루신학교 입학 전 이 교회에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고 한다. 7년 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들여 그의 선교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채플에 걸려 있다.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한국 교인들의 방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초창기 보고서를 이 교회에 보내왔는데 랭커스터 지역 신문에 그 내용이 실려 지역 주민들도 아펜젤러의 행적을 샅샅이 알았다고 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지프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뜨거운 체험을 전달하면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며 “우리 교회에서 해외 선교에 가장 기여한 분으로 평가받는다”고 전했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미국)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정동제일- 인천내리교회 개척... 바다 빠진 소녀 구하다 실종

    정동제일- 인천내리교회 개척... 바다 빠진 소녀 구하다 실종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낯선 한국 땅에서 평생 봉사했던 아펜젤러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더욱 회자되는 초기 선교사다. 44살의 나이에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 실종됐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빈 무덤만 남아 있다. 첫 근대식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연 데 이어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한 아펜젤러.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새에덴교회 주관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에 나선 일행이 미국 뉴저지주 모리스카운티 매디슨시에서 만난 드루신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신학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랭클린&마셜대를 졸업한 그가 감리교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1882년 들어간 학교. 펜실베이니아주의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펜젤러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독일개혁교회에 다녔지만 프랭클린&마셜대 시절 한 부흥 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감리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리교의 뿌리라는 드루신학교는 학문적인 일보다 설교 같은 실천적인 일을 중시했던 학교로 꼽힌다. 학교 관계자들은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고 전한다. 종교다원론자로 이름난 고 변선환 목사가 공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강을 했던 곳이다. 감리교 교인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방문해 남긴 휘호도 걸려 있다.  아펜젤러는 1884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열린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ISMA) 총회에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때 언더우드와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 선교를 꿈꿨지만 친구가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되자 선교지를 바꿨다. 같은 해인 1884년 한국으로 발령받아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결행했다. 한국에 와서도 정동제일교회, 인천내리교회를 개척해 감리교 교회 전통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학교 고문서도서관에는 아펜젤러가 입학할 때 쓴 자필 소개서와 한국 선교 때 쓴 편지를 비롯해 아펜젤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 수북하게 보관돼 있다. 크리스토퍼 앤더스 고문서실장은 “아펜젤러의 글을 통해 한국 문화와 역사가 미국에 알려졌고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해외로 파견됐다”고 귀띔했다. 드루신학교를 떠나 일행이 다다른 곳은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가 독일개혁교단을 떠나 개인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감리교인이 된 뒤 다녔던 교회이다. 드루신학교 입학 전 이 교회에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고 한다. 7년 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들여 그의 선교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채플에 걸려 있다.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한국 교인들의 방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초창기 보고서를 이 교회에 보내왔는데 랭커스터 지역 신문에 그 내용이 실려 지역 주민들도 아펜젤러의 행적을 샅샅이 알았다고 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지프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뜨거운 체험을 전달하면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며 “우리 교회에서 해외 선교에 가장 기여한 분으로 평가받는다”고 전했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미국) 글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필라델피아(미국)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가 처음부터 한국에 가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진홍 교수와 함께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언더우드가 한국행을 결심한 그 회심의 자리인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 필라델피아(미국) 글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산천에서 역사와 미래를 읽어 내다

    산천에서 역사와 미래를 읽어 내다

    산천독법/최원석 지음/한길사/360쪽/1만 8000원 “산은 오르고 정복해 내는 대상이 아니라 품은 이야기를 읽어 내야 하는 텍스트이다. 산은 그렇게 인문학이 된다.” 경상대 최원석 교수는 산을 연구하며 산과 더불어 살아온 인문학자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산가’(山家)로 부르는 그는 늘 “이 땅의 산은 굳건히 우리를 지키고 이 땅의 강은 도도히 흘러 우리를 아우른다”고 말한다. ‘산천독법’(山川讀法)은 인문학자 최원석이 느끼고 겪어 온 우리 산천을 통해 역사와 미래를 읽어 낸다. 지난해 펴낸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과는 사뭇 다른 산천 읽기로 다가온다.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쉬운 글로 자상하게 산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정서적으로 산과 허물없이 무척 친근했던 우리 민족. 그래서 우리 민족이 안겨 살았던 각각의 산과 그 산이 품은 이야기들은 아주 풍부하고 다채롭다. 어머니였고, 자연과 사람을 이어 주는 연결망이자 연결고리로 생사를 초월해 생명을 낳아서 기르고 포근히 안아 줬던 그 산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랄까. 우리와 그 산들의 관계성을 놓고 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산은 몸에 유전적으로 내장된 생명의 뿌리이자 큰 몸이다.” 그래서 삶과 공간의 관점에서 탐색하는 산의 의미가 책의 시작이다. 산이 안고 있는 동식물 이야기, 산에 담긴 생각과 역사 이야기가 다양한 시각 자료에 얹혀 차근차근 풀려 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흔히 써 온 산소가 대표적인 예다. 산의 순우리말은 ‘뫼’인데 산소도 ‘뫼’다. 살아서 의지하는 산과 죽어서 돌아가는 묘가 공교롭게 같은 말이다. “산의 심성과 문화를 송두리째 입고 있는 민족이 한국 사람들이다.” 저자는 한민족을 산을 어머니로 여겨 온 보기 드문 민족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를 드러내는 산 이름이 유난히 많다. 모악산, 대모산, 자모산, 모자산…. 한라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으로 통하는 지리산은 무려 7000여종의 생명을 품고 있다고 한다. 설악산 울산바위도 눈길을 끈다. 흔히 울산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는 와전 설화라고 한다. 정확히는 ‘울타리’와 ‘산’을 합한 ‘울산’이다. 울산바위의 옛 이름은 이산(籬山)으로 우리말로는 ‘울타리산’이며 이를 줄여 ‘울산바위’라고 했단다. “우리 산들이 인문적 세계유산의 가치로 온당히 평가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산천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다. 모두가 차곡차곡 저장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나는 산천을 거대한 메모리라고 생각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종교는 보수적인 영역으로 인식된다. 현실의 안정과 평화의 공존을 중시하는 속성 탓이다. 하지만 인류사를 보자면 보수보다 진보와 개혁을 추구했던 종교가 더 성했고 높이 평가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고 외쳤던 예수는 지배층과 권력이 아닌, 소외되고 약한 이의 편에 줄곧 서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실천적 개혁가로 평가되곤 한다. ‘성전을 허물라‘며 부패한 종교와 민심에 호통쳤던 파격은 변혁과 파격의 상징이다. 그러나 보편의 인식과 통념을 깨는 변혁의 측면에서 종교는 대체로 더딘 영역에 속한다. 특히 인간 생명과 존엄의 카테고리를 지키려는 의지와 집단의 대응은 확고하다. 종교계에서 ‘이단’의 대부분은 천부의 생명 가치를 저버린 파격에 대한 엄한 단죄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음에 이르게 한 안중근(토마스)을 신자로 공식 인정한 건 2010년의 일이다. 오래도록 지우지 않았던 ‘살인자’의 오명을 털고 일제에 대항한 천주교 형제로 받아들인 그 전환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었다. 그런가 하면 ‘순혈’이라는 초기의 원칙에 충실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국내 개신교계로부터 여전히 이단 취급을 받는다. 불교계가 우리 사회의 모순적 사안들에 대한 발전과 개혁의 실천적 대응에 나선 것도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종교계에 통념과 보편의 상식처럼 만연한 구각을 깨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보듬으려는 변혁의 몸짓들이 일어 일반의 시선을 잡아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禧年)’을 맞아 12월 8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내년 11월 20일까지 낙태 경험 있는 여성을 용서하는 권능을 사제에 부여하는 교서를 내렸다. 한시적 사면이지만 낙태를 언급조차 하기 어려운 금기로 여긴 천주교로선 엄청난 파격이다. 취임 이후부터 줄곧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교황의 또 다른 역사적 전환이 세계인들의 귀와 눈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 한켠에서 국내 개신교계 진보 교단들로 구성된 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동성애자에게 눈길을 돌려 주목된다. 천부의 성(性)을 거스르고 배반한다며 혐오 대상으로 여겨 왔던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자는 배려 운동이다. 우리 개신교의 뿌리인 미국 개신교계에선 많은 교단이 성소수자를 껴안고 있다. 동성애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목사 안수까지 주는 교단이 늘고 있다. 그런 추세 말고도 약자와 소수자 배려와 껴안기가 종교의 큰 가치라고 할 때 우리 사회가 그 파격에 관심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NCCK는 성소수자 보듬기에 나서기 앞서 고민이 많다고 한다. 우선 사회적 통념이 넘어야 할 큰 벽이라는 걱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같은 개신교 보수 교단들의 반대와 견제는 더 넘기 힘든 장애라고 호소한다. 실제로 보수 개신교단들은 크고 작은 집회나 예배에서 ‘동성애자 절대 불가’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 가고 있다. 개신교계가 함께 동성애자를 품어 안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진통과 곡절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kimus@seoul.co.kr
  • 한국철학으로 니체 읽기

    한국철학으로 니체 읽기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박정진 지음/소나무/752쪽/3만 5000원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는 서구문명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긍정의 철학과 힘에의 철학을 애써 주장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니체는 시인과 철학자의 경계를 허물지 못해 번민했던 서양철학의 이단아로 더 친숙하다. 흔히 ‘서양 이성철학 전통의 간지(奸智)’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는 머리와 신체, 의식과 무의식이 엇박자였을 가능성이 높은 니체를 한국철학에 빗대 분석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으로 한국의 자생철학을 줄곧 강조해 온 시인 겸 인류학자. 그는 서구 철학자들의 니체 읽기를 그대로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대신 ‘한국에서 니체가 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 아래 파격의 니체 읽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니체 철학을 완성된 철학이 아니라고 본다. 니체 이전과 이후 철학의 교량 역할을 통해 후기 근대철학의 물꼬를 튼 서양 근현대철학 변곡점에 선 인물인 것이다. “서양철학의 마지막 광자(狂者)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무엇보다 그 치열함이 서양철학자를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그는 그래서 “‘장자’에 등장하는 푸줏간의 포정(?丁)처럼 뼈와 살을 갈라 발라내기로 했다”고 쓰고 있다. “니체는 서양문명의 생성과 존재의 극심한 대립 틈새에서 마장(魔障)을 떨치지 못한, 실패한 부처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은 신을 살려낸 니체는 인간의 정신을 살려내려 새로운 인간, 즉 초인을 탄생시켰지만 그 초인은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일갈한다. “서양에서 동양을 책으로만 접하고 그들의 영양분으로 섭취할 게 아니라 이제는 동양에서 직접 살아봐야 동양의 전인적인 삶, 욕망을 제어하는 선비와 군자 혹은 스님과 신선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잃어버린 문명의 바다’ 환동해를 일군 소민족의 삶

    ‘잃어버린 문명의 바다’ 환동해를 일군 소민족의 삶

    환동해 문명사/주강현 지음/돌베개/730쪽/4만원 환동해(環東海)라는 말은 냉전시대 이후 흔히 쓰이고 있고, 실제로 관계와 교섭 측면에서 아주 친근한 개념으로 통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선 여전히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해양 중심의 역사 쓰기에 익숙치 않았고 중국 중심 동아시아 역사나 농경문화 중심 역사를 해양문명사보다 중시했기 때문이다. ‘환동해 문명사’는 역사 쓰기의 초점을 동해 중심의 해양문명에 맞춰 신선하다. ‘잃어버린 문명의 회랑’이라는 부제대로 냉전시대 훨씬 이전 수천년 전부터 환동해가 밀접한 교섭과 관계의 개념이었고 앞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유라시아 변방인 환동해 영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복원했다. 환동해 해역은 한국, 북한, 러시아, 일본이 에워싼 ‘동해’, 홋카이도와 사할린 해협 건너 오호츠크해, 캄차카 반도 너머 아메리카 대륙과 연결되는 베링해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해를 둘러싼 해양문명사는 중화적 세계관과 패권적 역사관 탓에 오랫동안 잊혀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차원에서 일본 석학 아미노 요시히코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7세기 들어 만들어졌다”며 일본 역사를 농민이 아닌 카이민(海民) 중심으로 쓰고자 했던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지중해의 역사를 가장 잘 기억하는 이는 바로 지중해 자신이다”라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지적대로 환동해 문명사의 주인공을 이 바다의 생태적 순리에 따라 살았던 소민족들이라고 지목한 대목이 도드라진다. 환동해 문명사가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조건에 놓이는 것은 소사회와 소민족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작고 국가 없는 사회의 기록 없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매듭짓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흑인 수감률 백인의 7배 가난 벌 주는 법의 민낯

    흑인 수감률 백인의 7배 가난 벌 주는 법의 민낯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맷 타이비 지음/이순희 옮김/열린책들/544쪽/2만 2000원 ‘빈곤이 심해지는데 범죄는 줄어든다. 그리고 수감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난다.’ 웬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1990년대 감소 추세를 보였던 빈곤율이 2000년대 들어 가파르게 올랐다. 2000년대 초 10%가량이던 빈곤율이 2010년 무려 15.3%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비해 같은 기간 살인, 폭행, 강간 같은 중범죄는 44%나 줄었다.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같은 기간 수감률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1991년 100만명 수준이던 수감자가 2012년 2배가 넘는 220만명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흑인 노예제 시대를 훨씬 앞지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는 기업범죄 파헤치기로 이름난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경제논리에 지배되는 사법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한 책으로 눈길을 끈다. 금융위기를 유발한 금융회사의 고위 임원 중 수감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어긋난 사법 시스템을 발로 뛰어 통렬히 고발했다. 골드만삭스를 ‘인류에 들러붙은 흡혈 오징어’로, 리먼브러더스를 ‘사상 최대의 은행강도’로 각각 지목한 그는 그 파행과 일탈의 거대한 메커니즘을 한마디로 ‘부수적 결과’라고 집약한다. ‘부수적 결과’란 미국 법무부가 대형 금융회사를 형사 기소하거나 형사 처분할 경우 미국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 있으니 아예 기소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때 쓰는 말이다. 돈과 인맥의 비호를 받는 금융권력 범죄를 단죄하려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야 하고 그럼에도 실패할 확률이 지극히 높으므로 비효율적인 일이 된다. 그런 반면 변호사를 선임할 여유도 백그라운드도 없는 사람들의 범죄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심판할 수 있으므로 경제적이라고 설명한다. 그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적 해악은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없는 자들’에 대한 과도한 징벌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넘쳐난다. 그 대표적 희생자는 가난한 흑인이다. 2010년 기준으로 흑인은 미국 인구의 12.5%를 차지하지만 전체 수감자의 38.2%나 된다. 반면 인구의 56.1%인 백인은 수감자의 34.2%에 불과하다. 인구 비율로만 보자면 흑인 수감률은 백인에 비해 6∼7배가 더 높다. 저자의 리포트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경미한 질서 교란으로도 철창에 갇히기 일쑤다. 2011년 뉴욕의 불심검문은 총 68만 4724건으로 이 가운데 흑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게 88%였다. 사소한 위법 행위를 철저히 근절하는 게 강력범죄 억지에 효과가 있다는 ‘깨진 유리창’이론을 따른 것이라지만 과잉직무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저자는 이 불심검문의 증가가 줄어드는 경찰 급여와 예산을 충당키 위한 자구책이라고 지적한다. 저인망식 어획으로 수익을 올리는 기업형 어업형태와 같은 것이다.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 처벌에 수많은 경찰관을 투입하는 식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이 같은 파행과 모순의 원인을 관료제에서 찾는다. 너무나 미세한 나머지 눈에 띄지 않는 수천개의 불공평한 조치를 이용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고약한 관료주의가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사회가 가난을 멸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죄악으로 보고 처벌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소설가 조지 오웰이 작품에서 그렸던 디스토피아는 ‘생각 범죄’가 원죄였으나 새로운 기업형 디스토피아 사회에서는 빈곤, 특히 경제적 궁핍이 원죄로 전락했다고 질타한다. “경제 논리와 강자의 논리에 순종한 관료제의 사법 시스템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약자들을 쥐어짜서 더 작고 더 온순하고 더 열등한 종으로 만드는 반면 강자들의 근육은 온갖 방법으로 키워줌으로써 웬만한 공격 따위에는 끄떡도 하지 않도록 수수방관한다.” 법치주의가 퇴색하면서 실패한 자, 가난한 자, 약한 자는 범죄자로 몰아가는 대신 강한 자와 부유한 자, 성공한 자의 위법 행위는 눈감아주는 관료주의와 사법제도의 일탈은 분명 정의와 공정성을 상실한 디스토피아이다. 그 디스토피아는 미국만의 현상일까. 번역자는 역자 후기를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미국의 것이라면 쓰레기라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가 벌써부터 양분화의 길에 들어섰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부자들의 세계와 약자들의 세계로 양분된 미국사회의 현실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한국사회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느라 머리가 무거웠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전철지교/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아이고, 이렇게 귀한 것을.” “작은 성의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른 아침 지하철 객실 안 훈훈한 인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그마한 난() 한 분을 정성스럽게 건네고 받는 두 노인. 경로석에 앉은 60대 후반과 70대 후반 노인의 공손한 대화가 예사롭지 않다. 늘 같은 객실, 같은 좌석에 두 노인이 나란히 앉아 가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건 6개월쯤 전이다. 아랫벌 노인이 연상 노인에게 일본어 책을 보여 주며 뭔가를 묻고, 연상 노인은 자상하게 일러주고. 몇 차례 같은 모습을 지켜보자니 일종의 즉석 일본어 교습이다.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의 관계는 그렇게 지속된 듯싶다. 오늘 사연인즉 그간의 답례로 작은 난을 선사한 듯. 짧은 만남의 시간을 이용한 교습에서 싹튼 노인들의 정의가 고와 보인다. 생면부지의 남남끼리 우연히 같은 좌석에 앉아 나눠 온 인연이 난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으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고 급하게 객실에서 내린 노인. 건네받은 난을 들고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난을 한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뭔가를 적는 노인. 그 수첩에는 어떤 내용이 들었을까.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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