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폐단 극복 자연으로 돌아가자”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귀농’하면 지친 도시생활을 접고농촌지역으로 살 곳을 찾아 이주하는 막연한 도피쯤으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요즘은 다르다.‘농사나 짓자’는 패배주의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치관을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2∼3년 전부터 종교계를 주축으로 확산되는 ‘귀농’운동은 체계적인 준비 교육과 공동체마을,도농협동 체제까지 갖춰 제법 틀이 잡혀가는 추세다.
종교계가 시도하고 있는 귀농은 종교가 지닌 생명존중 사상과 상생(相生)의 정신,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의 시원처인 땅으로의 회향(回向)의지를 담고있다.그런 만큼 이들은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철저하게자연의 힘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유기농업을 강조한다.나를 위한 농촌생활에서 비롯해 도시민들의 건강과 삶에도 해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다.
불교계의 인드라망생명공동체,천주교의 가톨릭농민회·전국귀농운동본부,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감리교의 생활협동조합(생협) 등이대표적인 예.이들은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운영,전문 귀농교육과 정착지 주선을 해주고 있어 30∼40대 귀농 희망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국내 종교계에서 귀농운동을 벌여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천주교의 경우 20여년 전부터 각 교구 성당별로 농촌생활 정착을 주선해왔고 지금도 그 맥이 탄탄하게 살아있다.가톨릭농민회를 주축으로 시작된 천주교계의 귀농운동은 70∼80년대 도시빈민과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의식화운동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난 96년 가톨릭농민회에서 분리독립한 전국귀농운동본부만 하더라도 지금은 천주교계에선 가장 주도적인 순수 귀농단체다.창립이래 해마다 4차례씩 귀농학교를 운영해와 지금까지 1,800여명이 교육을 받았고 이가운데 200가구 이상이 농촌에 정착해 살고있다.본부장인 이병철(51)씨의 경우 가톨릭농민회의 주역으로 농촌살리기 운동을 주도해오다 그 자신 올해초부터 경남 함안에 정착,농민으로 변신했다.
불교계는 천주교보다 늦게 귀농운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가장 실속이 있다.지난 95년부터 조계종 실상사와선우도량 총무원 사회부의뜻있는 스님들이 소규모 귀농학교를 운영해오다 마침내 지난해 9월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탄생시켜 정기적인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불교 귀농학교와 농장공동체를 운영중이며 생활협동조합도 공식 발족을앞두고 시험가동중이다.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 강의때마다젊은 직장인들로 만원이다.생활협동조합 결성에 앞서 현재 서울 봉은사 능인선원 영화사 등과 수원포교당에 전국의 귀농자들이 올려보낸유기농산물도 팔고있다.
강의를 마친 이들을 위해 지리산 실상사 귀농전문학교도 세웠다.이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한 귀농자 실습과정.예비 농민들이 3개월간 합숙하면서 농촌정착 실습을 하게 된다.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생명민회 등 전국 10여개 지역의 여러 단체가 주선하는 귀농학교 이론강좌 수료생들이 모여 예비농민 생활을 체험중이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이정호씨(32)는 “요즘 귀농은 IMF사태이후 일시적으로 일었던 현상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며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나는 물질적인 폐단을 극복하고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절실하고 소박한 욕구를 몸소 실천하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남원 실상사 봄·가을 두차례 20명씩 농민수업.
전북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은 실상사(주지 도법스님).요즘 종교계에서 일고있는 귀농운동을 이상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모델로,귀농 희망자들이 꼭 찾아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3만여평의 농지에 주지 도법스님을 비롯한 예비 농민들이 오순도순모여살며 논도 일구고 작물도 직접 키워낸다.불교계 뿐만 아니라 전국의 귀농학교 수강생들이 정기적으로 현장실습을 하고 있는,그야말로 귀농의 요람격으로 자리잡았다.실상사가 지금의 위상을 갖춘데는물론 여러 사람의 노력이 스며있다.일찍부터 자연친화와 자연보존에목소리를 높여온 도법스님과 수원포교당 주지 성관스님,봉은사 주지원혜 스님이 그들이다.
‘농촌을 살리는 것이 도시를 살리는 것’이라는 공통인식을 토대로 어떻게 농장공동체를 일궈내느냐 고심끝에 지난 98년 8월 불교 귀농학교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봄 가을 두차례에 걸쳐 20명씩이 3개월간 합숙하며 농민수업을 쌓는다.지금까지 110명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이곳 수료자들은 연고지로 귀향하거나 2∼3명씩 희망지로 가 정착한다.이 가운데 10명이 이곳에 남아 살고있다.
실상사가 최종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것은 명실상부한 공동체마을을일궈내는 일.단순한 귀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귀농자들이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가꿔내는 토양을 만들어 내겠다는 각오다.땅에서 살고땅에서 거두며 땅을 무대로 한 삶의 양식을 다지겠다는 것.
그래서 우선 귀농자와 농촌 주민 자녀를 위한 대안학교 설립에 나섰다.내년 신학기부터 60명의 중등교육 과정을 시작하는데 초등학교 졸업자와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학생모집 중이다.
실상사 주지 도법스님은 “이곳에서 귀농교육을 받은 수강자들은 귀농 여부에 상관없이 꼭 필요한 교육임을 인정하고 있다”며 “위기에 직면한 생명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운동에서 시작했지만 농촌 지역사회가 경제 교육 문화 복지를 균형있게 충족시킬 수 있는 자립공동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