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실에도 직언 ‘가야산의 대쪽’ 큰스님
2001년 마지막날인 31일 입적한 ‘가야산의 대쪽’ 혜암(慧菴) 종정은 성철 스님 열반후 해인사 방장으로 원당암에주석(住錫)하며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숭앙돼왔다.26세의 나이에 득도한 뒤 줄곧 장좌불와(長坐不臥·등을 대고 눕지 않는 수행)를 계속해온 혜암 스님은 흔들림없는 기개로 설법의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던 한국 불교계의 큰 별이었다.
전남 장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원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특히 불교경전에 큰 관심을 가져 17세에 일본에 유학해 신·구약과 사서삼경,불교의 조사어록을 두루 섭렵했다.일본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중 일본의 ‘고승전집’을 읽다가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이루어지지 아니하였네,펼치면 한 글자도 없으되, 항상 큰광명을 놓도다’라는 대목에서 크게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했다.
전국의 제방선원을 다 돌아다니면서도 수덕사 선방에는비구니가 있다는 이유로 들르지 않았는가 하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평생 절살림을 맡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수행지침을 지키기로 유명하다.‘일일일식’을 철저히지켰으며 45년간 한 해도 빠짐없이 하안거에 들었다.
절의 가장 큰 어른인 조실에게도 거침없이 직언을 해 조실들로부터 ”혜암은 조실을 가르치러 다니는 사람”이란소리를 듣기도 했다.
일찍이 근기(根機)를 눈여겨본 성철(性徹) 큰 스님의 고임을 받아,죽음을 각오한 철저한 수행으로 한국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졌던 47년 문경 봉암사 결사(結社)에 성철 청담(靑潭) 법전(法傳) 스님과 함께 참여했다.
혜암 스님은 94년 서의현(徐義玄) 총무원장을 퇴진시킨개혁종단 출범의 정신적 지주가 됐고 이후 가야산에 기대어 세상을 관조해왔다.94년 서의현 총무원장 사퇴로 당시원로회의 의장대행이었던 스님은 종권을 인수,개혁세력의구심점 역할을 했고 월하(月下) 전 종정이 불신임당한 뒤꾸준히 ‘추대 0순위’로 거론돼다 99년 제10대 종정에 추대됐다.
성철 스님과 함께 “한번 깨치면 별도의 수행이 필요없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고 “밥을 적게 먹고,말을 적게 하고,잠을 적게 자고,돌아다니지 않고,책을 보지않는” 5가지 원칙을 후학들에게 강조해왔다.
종정 취임후에도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이 수행해온 백련암 인근 원당암의 재가불자 선원인 선불당에서 장좌불와로철야정진을 했으며 “신도들과 함께 참선하는 것만큼 확실한 포교가 없다”는 뜻에 따라 매일 신도들과 함께 오전 3시·7시 두차례 빠짐없이 죽비로 예불을 올렸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돼 미소굴(微笑屈)로 옮긴 뒤 시좌들외엔 일절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행장= ▲1920년 전남 장성 출생 ▲45년 도일,종교서적을접한 뒤 출가결심 ▲46년 해인사에서 출가,인곡(麟谷)스님을 은사로 득도.조계종 초대종정인 효봉(曉峰)스님으로부터 비구계 수계 ▲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 청담 우봉자운 도우 법전 일도스님 등과 결사안거 ▲49년 보살계 수계 ▲81년 정화위원회 부위원장 ▲83년 비상종단 개혁위원·해인총림 수좌 ▲85∼93년 해인총림 부방장 ▲91년 원로회의 부의장 ▲93∼96년 해인총림 방장 ▲94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99년 종정 취임 ▲2001년 입적.
■혜암 종정 임종게(臨終偈).
我身本非有요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心亦無所住라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鐵牛含月走하고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石獅大哮吼로다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김성호기자 ki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