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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

    “모든 것을 내려놓게나.” 몸과 마음을 비우라는 전 화계사 조실 숭산(2004년 입적) 스님의 ‘방하착(放下着)’ 한마디에 미련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한국불교에 귀의한 무상사 주지 무심(無心·49·본명 조슈아 헨리 레아)스님. 미국 보스턴대 화학과를 졸업한 이 미국의 과학도를 한국 땅의 ‘눈 푸른 납자(衲子)’로 변신시킨 건 무엇일까. 이 푸른 눈의 과학도에게 많은 길 중에서도 하필이면 한국불교를 택해 한국 승가에 몸담게 한 것은 불법(佛法)인가, 아니면 거역 못할 인연인가. 언제 어디서건 “나는 전생에 한국사람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무심 스님.1984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아 한국생활을 한 지 23년째를 맞은 그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무상사(無上寺·충남 계룡시 두마면 향한리 산 51의9)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함께 한국의 선(禪)불교를 만방에 전파하는 양대 수행도량. 계룡산 국사봉 아래 국제선원과 대웅전, 요사채의 한옥식 건물 세 채를 갖춰 망집을 버리고 ‘참 나’(眞我)를 찾기 위해 물 건너 산 넘어 찾아드는 외국인 스님들을 맞아주는 이색지대이다. 지금은 미국, 말레이시아, 폴란드, 체코, 리투아니아, 홍콩의 스님과 행자 10명이 편하게 살고 있지만 안거 때면 참선 정진하는 20여명의 외국인 납자들로 선풍이 시퍼렇다. 이 무상사에서 4년째 외국인 수행자들을 이끄는 주지 겸 지도법사 무심 스님은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다. 평소엔 웃음 많은 넉넉한 친구이지만 흐트러진 수행승들에겐 어김없이 불호령를 내리는 ‘계룡산 호랑이’인 것이다. ●보스턴대 출신 미국의 과학도 ‘불교 입문´ 무상사(無上寺).‘부처님 앞에선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모든 게 평등하다.’는 대웅전의 ‘무상사’편액을 바라보는 스님의 각오는 날마다 새롭다. 대학시절 명상과 요가에 빠져 있던 그에게 숭산 스님과의 만남은 세상의 미명을 밝히는 큰 길로 불쑥 다가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힌두교 수행자를 따라 간 토굴에 불상이며 십자가며 힌두신이며 여러 종교 상징들이 있었는데 유독 불상에 눈길이 가더란다.“불교를 알고 싶다.”는 말에 돌아온 “불교를 배우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부처님을 찾아보라.”는 힌두교 수행자의 말에 호기심만 더 쌓일 뿐이었다. 케임브리지 선원을 찾아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도 의심이 풀리지 않아 귀찮을 만큼 끈질기게 수행법을 묻던중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수행이다.”는 말에 눈앞이 밝아졌다. 스님 말마따나 “수행기술이나 방편을 알려줄줄 알았는데 의외의 내려놓으라는 ‘방하착’ 한마디에 눈 귀가 열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품회사에 1년반을 다니면서도 ‘방하착’이 내내 머리에 휘돌아 결국 숭산 스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자가 됐다. ●수덕사 등 한국의 유명 선원에서 안거 34차례 화계사에 온 게 1984년 4월 말이다. 수덕사, 정혜사, 신원사를 비롯해 전국의 이름난 선원에서 안거에 든 것만 해도 34차례. 숭산 스님의 법문에 감화돼 머리를 깎고 한국으로 출가한 50여명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조계종 비구계를 받은 인물이다.‘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원을 받아들인 범어사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주었다.‘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유명한 현각 스님의 사형이기도 하다. 부산 흥법사 주지 심산 스님과 대구 관음사 회주 우학 스님은 당시 부산 범어사에서 함께 비구계를 받은 한국인 도반들이다. “나를 버리려 했던 내가 무거운 짐을 진 껍데기가 돼있음을 알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남의 생각과 손에만 이끌려 살고 있는 나였지요.”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장 시절이었다. 후배들 눈치도 보이고 해서 “내 손으로 뭔가 하겠다.”는 뜻을 숭산 스님에게 간곡히 알린 뒤 부산으로 내려가 무작정 시작한게 남산국제선원이다. 한국의 외국인 스님 가운데 가장 먼저 일선포교에 나선 것이다. 한국인 신도들을 직접 대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범어사 밑의 포교당으로 쓰이던 상가 건물의 방 하나를 빌려 ‘남산국제선원’ 간판을 붙이고 나니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엿하게 선원의 모양새를 갖춰갈 무렵 무상사의 주지 스님이 사정이 생겨 고국인 폴란드로 돌아가는 바람에 무상사로 옮겨와야 했다. “당시 신도들의 열성과 신심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요. 무상사에 와서도 신도들의 요청으로 매주 두번씩 부산에 내려가 법문이며 수행지도를 해야 했지요.” 이후 비구니 스님이 선원을 맡아 어렵게 꾸려갔지만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연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무상사에 와선 대웅전도 번듯하게 세워놓았고 지금은 건물들에 단청을 입히느라 바쁘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단청 불사에 매달려 손님 맞으랴 건물 손질하랴, 한참 만에야 스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의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상호를 떠올리게 하는 둥근 얼굴이다. 유난히 푸른 눈만 아니라면 걷는 폼새나 말하는 투며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런저런 불사들을 모두 도맡아 하자니 돈도 있어야 하고 사람도 있어야 하고 여간 어려운게 아니에요. 종단 지원 없이 모든 것을 다하려니 더 힘들어요.” 종각도 세워야 하고 숭산 스님 부도탑도 모셔야 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주섬주섬 늘어놓는다. “이젠 사판승이 다 되었다.”며 겸연쩍어하는 스님의 말끝을 잡았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물음에 한참의 침묵 끝에 날 선(?) 말을 돌려준다.“한국불교에서 무엇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무엇을 갚고 살아야할지를 고민 중입니다.” 한국의 불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수행전통을 오롯이 갖춘 채 염불과 불경 공부를 겸하는 통(通)불교의 성격을 갖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이 ‘귀중한 보물’을 잘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단다. 한 절집에서 이렇게 큰 일들이 어그러지지 않고 순탄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다그쳐 물었다. 발심(發心) 출가의 화두, 즉 ‘얼마나 내려놓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서슴없는 답이 나왔다.“말에 집착함은 곧 허상에 쫓기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려놓으라는 숭산 스님의 방하착도 길을 제대로 찾으라는 방편에 다름 아니지요. 끊임없이 묻고 의심하고 노력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무상사에선 남녀구별 없이 한방에서 함께 참선 ‘분별없는 말은 오해를 낳고 큰 화로 이어진다.’는 평범한 경계가 무상사에선 혹독한 묵언수행의 전통으로 서 있다.“묵언수행은 참회의 방편이 아니라 나를 찾는 수행의 큰 길”이라는 무심 스님의 지론을 따르는 무상사의 외국인 스님들은 보름,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간 묵언수행을 계속한다. 수행을 깨는 납자들은 가차없이 쫓겨난다. 구별과 차별 없는 ‘무상(無上)’의 큰 뜻은 수행공간에서 독특하게 살아 있다. 다른 한국의 선방들이라면 비구, 비구니, 남자신도, 여신도들이 각각 다른 방에서 참선에 들지만 이곳 무상사에선 한 방에서 모두가 함께 한다. 역시 무심 스님의 수행방식이다. 포교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무심 스님. 얼마전 아프간 피랍사건을 의식한 듯 불쑥 말을 꺼낸다.“한국인이 예루살렘에 가서 유대교나 기독교 포교를 하는 것과 내가 한국에 와서 불교 포교를 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인도에서 중국으로 간 달마대사도 처음엔 그곳 불교계에서 박대당했다는 비유와 함께 “나도 한국인들에게 무시와 질시를 숱하게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인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한국에 언제까지 살겠느냐.”고 물었다. 답은 생각대로였다.“불법을 위해 사는 사람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죽는 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한국과 인연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 살 수도 있지만 아직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고 넘긴다. 유대인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불가에 귀의하지 않았으면 나도 역사 교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무심 스님.“깨끗한 물이나 오염된 물이나 모두 허물없이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은 넓은 도량의 한국불교를 택하는 눈 푸른 사람들에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하는 게 내 소임”이라며 기자를 배웅했다. ‘내려놓으라.’는 방편과 함께 받은, 스님의 ‘이 뭐꼬.’ 화두풀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계룡산 무상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무심(無心) 스님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출생 ●1979년 보스턴대 화학과 재학중 숭산 스님 만나 발심 ●1980년 보스턴대 졸업 ●1984년 한국 입국, 화계사에서 법명 ‘무심´ 받음 ●1986년 범어사에서 비구계 수지 ●1985∼1989년 수덕사, 신원사 등에서 안거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 자격 받고 공안지도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 ●2002년 부산 남산국제선원 개원 ●2003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및 지도법사
  • [변양균·신정아 수사] 장윤스님 전등사 주지 사임

    전 동국대 교수 신정아씨 학력위조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장윤(56) 스님이 17일 강화도 전등사 주지직을 전격 사임했다. 장윤스님은 이날 조계종 총무원에 사임서를 제출,“신정아씨의 동국대 교수 임용을 둘러싼 가짜학위 의혹을 밝히려다 본의 아니게 종단에 누를 끼친 것에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고 주지직을 사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장윤스님의 사임서를 곧 수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윤 스님은 “주지직 사임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씨에 대한 검찰 수사와 무관하다.”며 지난 15일 중국으로 출국하려 했던 것 역시 개인적 일정으로 잠깐 나갔다 오려던 것이며 이 역시 검찰 수사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두남자의 ‘몸짓’ 가을 女心 유혹

    두남자의 ‘몸짓’ 가을 女心 유혹

    정동극장의 4번째 ‘아트프런티어 시리즈’ 주인공은 이정윤과 최문석. 두 사람은 15·16일 오후 4시 정동극장 무대에서 ‘짙어지는 몸짓을 만나다’라는 부제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새 흐름을 보여준다. 국립무용단 대표 남성무용수 이정윤은 30대 나이에 들어선 자신의 모습과 고민을 담은 신작 ‘Escape’, 지난해 젊은 안무가 창작공연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툇마루무용단원 최문석은 ‘Never say Never’로 관객들과 만난다. 이정윤의 ‘Escape’는 30대 무용수가 겪고 부닥치는 일상의 솔직한 단상들을 춤으로 옮긴 작품. 무용수이면서 안무자의 길에도 깊숙이 들어가있는 자신의 모습을 직접 안무한 몸짓으로 풀어낸다. 삶에 아등바등 매달려살면서 한편으론 어딘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이중적인 심경이 담겼다. 국립무용단 타악 뮤지션인 박재순이 무용수의 심경을 절박하게 표현한 북장단으로 분위기를 돋운다. 최문석의 ‘Never’는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엉켜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사라져가는 따뜻한 인간애를 다룬 무대. 최문석 안무로 최문석과 올해 동아무용콩쿠르 금상을 받은 전혁진과 정정아가 호흡을 맞춘다. 이와 함께 이정윤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별 장면을 통해 남녀의 사랑을 전하는 ‘Soul mate 춘향’을, 최문석은 전쟁으로 헤어진 형제 이야기를 통해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지난해 젊은 안무가 창작공연 최우수상 수상작 ‘두 개의 길 위에서’를 조금씩 보여준다.(02)751-1500.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거장·신예 감독 작품 만나 설레고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거장·신예 감독 작품 만나 설레고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새달 4일부터 12일까지 열린다.9일간 64개국 275편의 영화가 부산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 34개 스크린을 수놓는다.PIFF를 통해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 상영)되는 영화는 모두 66편으로, 작년의 기록(64편)을 또다시 경신했다.PIFF 유일의 장편 경쟁부문인 새로운 물결의 출품작 11편 모두는 월드 혹은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다.11년의 세월에 값하는 영화제의 위상을 보여준다. 거장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과 신예들의 데뷔 또는 두 번째 작품을 공개하는 플래시 포워든 섹션이 신설됐다. 올해도 어김 없이 칸과 베를린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 대거 초청돼 영화팬들을 설레게 한다. 어떤 영화들을 먼저 ‘찜’해야 할까. ●짱짱한 개·폐막작 영화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영화는 ‘집결호’와 ‘에반게리온-극장판:서(序)’다.‘집결호’는 ‘야연’을 만든 중국의 인기감독 펑 샤오강의 신작.1948년 국·공 내전을 배경으로 실종자로 처리된 동료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한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 휴먼 드라마다. 중국의 화이브러더스와 한국의 MK 픽처스가 공동 제작했으며 ‘태극기 휘날리며’의 특수효과팀이 실감나는 전쟁 장면을 만들었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서(序)는 1997년 첫 극장판 이후 10년만에 나온 극장판이다. 당시 모호한 결말로 논란을 낳았는데 새로운 해석과 결말로 무장한 이번 영화가 열혈 마니아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킬지 자못 궁금하다. ●올해의 화제작들 부산을 이제 작은 칸이라 해도 될 듯하다. 올해 칸영화제가 주목한 21편이 줄줄이 소개된다. 지난 5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비롯해 감독상을 받은 줄리안 슈나벨의 ‘다이빙 벨 앤드 더 버터플라이’,60주년상을 받은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 등이 포진돼 있다. 새로운 영상미학의 기대를 걸게 하는 이명세 감독의 ‘M’은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받았다. 정식 개봉을 앞두고 부산에서 먼저 베일을 벗는 영화는 첫사랑의 기억과 상처에 관한 미스터리 멜로를 표방하고 있다. 강동원, 공효진 등 인기 배우들의 출연도 영화의 관심을 높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신작 ‘빨간 풍선’, 싱가포르에서 드물게 시도된 음악영화 ‘881(로이스톤 탄 감독)’도 시선을 붙잡는다. 단골 손님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도 빼놓을 수 없다. 아시아의 창 섹션에서는 ‘린다 린다 린다’로 국내 영화팬들에게 낯익은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과 유명 배우인 리 캉셍의 두 번째 연출작 ‘도와줘 에로스’도 흥미를 유발하는 작품들이다. ●뭔가 색다른 걸 원한다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호평에 힘입어 단편 영화 ‘프랑스 중위의 여자(백승빈 감독)’,‘강변북로(유성엽 감독)도 부산을 연이어 찾았다. 박수영·조창호·김성호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판타스틱 자살소동’, 독립 장편 ‘은하해방전선’도 눈여겨 볼 만하다. 자폐증을 소재로 한 세 편의 다큐멘터리도 준비돼 있다. 트리시아 레건의 ‘자폐증:뮤지컬’과 미카 카우리스마키의 ‘소니 미러’는 음악을 통해 자폐증 환자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마니아들을 들뜨게 만들 만한 기획으로는 지난 6월 타계한 타이완의 거장 에드워드 양 감독의 회고전이 있다.1982년 데뷔작 ‘광음적 고사’부터 2000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마지막 작품 ‘하나 그리고 둘’까지 총 8편이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상영되는 소중한 기회다. ●더욱 쉽게 만난다 개·폐막작 예매는 18일 오후 6시부터 온라인에서만 가능하고 일반 예매는 20일 오전 9시30분부터 개시된다. 인터넷 예매는 홈피(www.piff.org)와 네이버(www.naver.com)에서 동시에 진행한다. 올해는 특히 전국 GS25 편의점의 현금인출기(ATM)를 이용해 24시간 예매·발권할 수 있으며, 예매시 관객이 직접 좌석을 지정할 수 있다. 현장 판매시 현금 결제만 가능했으나 올해부터는 신용카드, 예매권, 휴대전화(GS25에서만 가능) 등 결제수단을 다양화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최종찬기자의 시드니 뒤집어보기] (3) 영향력 키우는 교민사회

    [최종찬기자의 시드니 뒤집어보기] (3) 영향력 키우는 교민사회

    # 사례1 미용원장 최미씨 시드니 김선영 미용실 원장인 최미(46)씨는 호주의 미용 한류를 이끌고 있는 교민 1.5세대다. 기능올림픽 수상자로 한국 유행의 메카인 명동 김선영 미용실의 베테랑 미용사였던 그녀는 팍팍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꿈꾸다 1989년 호주로 기술이민을 왔다. 그녀는 정착 초기에 ‘정신적 시차’로 많이 힘들었다. 미용실로 출근할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할 허드렛일까지 혼자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기에 뻑뻑한 호주 교민들과 미용코드도 안 맞아 결국 한달 만에 미용실을 그만뒀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해 그녀는 다시 가위를 들었다. 같은 해 스승인 서울 명동의 김선영 원장을 찾아가 미용실 브랜드를 쓰게 해달라고 간청해 끝내 허락을 얻어냈다. 그리고 호주로 돌아와 미용실을 열고 선진 헤어비법을 발휘하면서 손님을 끌기 시작해 ‘성공 열매’를 얻게 됐다. 지금은 목 좋은 네 곳에 미용실을 두고 있으며 직원도 50여명에 달한다. 자신의 숙원인 미용학교도 만들어 후배 미용사를 양성하고 있다. 최 원장은 “손님은 하루평균 400명에 달한다.”며 “손님의 30%는 교민들이고 70%는 아시아계와 백인들”이라고 설명했다. # 사례2 로펌 변호사 김성호씨 시드니 도심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성호(43)씨는 잘나가는 교민 1.5세대다. 그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78년 중학교 2학년때 가족 모두가 멜번으로 이민 오면서 호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게 됐다. 당시 멜번의 한국인은 350명에 불과했고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거주지역과 학교에서도 한국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외로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이용했다. 남들보다 몇 가마의 땀을 더 흘린 결과 호주사회에 빨리 적응하게 됐다.84년 시드니로 가족과 함께 이사한 김씨는 92년 뉴사우스웨일스대학에서 유기화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후 호주국립과학 기술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첨단 연구주제와 관련된 특허와 투자 전문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2000년 시드니 테크놀로지대 법대에 들어가 다시 학구열을 불사른 끝에 마침내 꿈을 이뤘다. 김 변호사는 “한국인 고객을 상대로 민사와 무역 관련 상담을 하고 있다.”며 “유학생들과 위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의 법적 문제에도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역사가 40년에 불과한 호주 교민사회가 척박한 환경에도 잘 자라는 유칼립투스처럼 호주대륙에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호주 방문자를 제외한 호주 교민의 수는 2006년 현재 5만 2763명이다. 유학생과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까지 합치면 10만명이 넘는다. 호주 교민들은 6개주 가운데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에 가장 많이 산다. 전체 교민의 62%가 몰려 있다. 빅토리아는 11.9%로 그 다음이며 남부 호주(4.1%), 노던주(4.1%), 타스마니아(1.7%) 순이다. 시드니엔 코리아타운이 5곳 형성돼 있다. 라이드, 캔터베리, 버우드, 광역시드니, 스트라스필드가 그것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이 스트라스필드다. 중심가 상권 70% 이상을 교민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민 역사 40년 이민자는 5만명 이들이 일년에 한 번 한 자리에 모인다.‘한국의 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작년엔 이스트우드 공원에서 열렸다.9월30일 알맞게 달궈진 남반구의 봄햇살이 나들이를 손짓하는 토요일, 푸른색 잔디가 눈시린 이곳에 9000여명의 ‘검은 머리’들이 모였다. 올해도 9월 마지막주에 이스트우드에서 열릴 예정이다. 앞서 9월22일부터 이틀 동안 시드니 도심 달링하버와 팜그로브 야외광장에서 한가위 축제가 열린다. 올해 처음 시도하는 행사로 이틀간 5만명의 관람객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된다. 달링하버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매일 몰리는 곳이므로 한국 알리기에 안성맞춤인 자리다. 호주 정·관계 인사, 외교사절 등 많은 귀빈들을 초청한다. 행사 첫날엔 꼬마 신랑신부의 전통결혼 가마행렬이 달링하버를 순회하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광장 중심무대선 축제 개막식과 난타 공연단의 특별공연이 있을 예정이다. 이어 한국 전통무용, 태권도 시범, 사물놀이, 강강술래, 아시아 민족 찬조공연이 진행된다. 특히 개막식의 피날레를 장식할 강강술래춤은 교민들과 호주인들이 함께 손잡고 친교를 기원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야외 광장 여기저기서 전통 도자기 제작시연, 연꽃 만들기 등 문화체험 행사도 진행되며 호주인들과 함께 제기차기, 윷놀이, 팔씨름 등 한국 전통민속놀이도 즐기게 된다. 교민사회가 이렇게 빨리 성장한 것은 교민들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다. 시드니의 신흥주거지 콩코드웨스트에 사는 이은석(43)씨는 “신이 내린 직장이란 공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2004년에 이민 왔다.”면서 “처음 1년간은 사업 아이템을 찾아 고생도 했지만 한국인의 근면함을 무기로 언어와 인종 장벽을 뚫고 지금은 홍보회사와 용역회사를 운영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핑에 사는 김인구(49)씨도 “아이들 교육과 여유 있는 생활을 위해 메이저 신문사를 그만두고 사업이민으로 왔다.”며 “교포신문의 간부로 부지런히 일해 현재 이 신문의 경영상태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교민 사회 성장비결은 성실 특히 그동안 깊은 반목과 갈등으로 한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한인회도 세대교체의 열망을 실현해 젊은 회장을 뽑고 교민사회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일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성장한 교민사회가 앞으로 정치권까지 발을 넓힌다면 교민사회의 위상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현재 지방의회에 교포 두 명이 입성해 있다. 캔터베리 시의원인 남기성(58)씨와 스트라스필드 시의원인 권기범(45)씨가 이들이다. 똑똑하고 패기 있는 젊은 교포들이 가능한 한 많이 정치권에 진출해 교민들의 권익을 위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낸다면 교민사회의 앞날은 ‘쾌청의 기상도’를 보일 것이다. siinjc@seoul.co.kr
  • 조계종 ‘신정아 불똥’ 차단?

    조계종 ‘신정아 불똥’ 차단?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종전 입장과는 달리 자신의 학력 변조의혹 제기에 서둘러 해명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지관 스님은 13일 ‘중·고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금의 경남대 전신인 마산대학에 편입학해 졸업했다.’는 학력변조 의혹에 모르쇠로 일관하던 것과는 달리 해인사 주지와 총무원 기획실장을 대동한 기자회견을 자청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중·고등학교 나오지 않았다” “15세에 출가해 중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다는 언론보도는 맞지만 지금의 기여입학제처럼 특별전형으로 3학년부터 마산대학에 편입학해 졸업했고 당시 해인사 주지 스님 등 어른들이 학비를 대는 등 모든 절차를 진행해 (나는) 학적부 기재 내용조차도 아는 게 없다.”는 해명이었다. 동국대 총장 자리에 있던 1986년 학력문제가 불거져 당시 안기부와 문교부가 조사를 통해 걸렀던 것을 이제 와서 새삼 문제삼는 것에 “대응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왜 돌연 입장을 바꿨을까. 기자회견에 앞서 “최근 사찰을 둘러싼 잡음 등 종단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행정 책임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는 발언을 한 것처럼 아무래도 신정아씨 학력위조 파문을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회견중 신정아씨 사태가 불거진 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을 만났느냐는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다.”고 대답해 절박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장윤스님 수사에 압박감 신씨 학력 문제를 처음 제기한 장윤 스님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시점에서 장윤 스님과 같은 종책 모임 소속인 지관 스님은 압박감을 크게 받고 있는 것으로 측근들은 전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지관 스님도 학력위조 의혹

    지관 스님도 학력위조 의혹

    한국불교 장자(長子)종단 조계종의 총무원장인 지관(75) 스님이 중고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학에 편입학했다는 학력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최근 신정아씨 학력위조 사태와 맞물려 불교계에 파문이 클 것으로 보인다. 12일 불교계 일각에 따르면 지관 스님은 1954년 출가해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도 마산대 학적부에 진주농림중학교를 나온 뒤 건국대 국문학과에 다니다 3학년에 편입학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 지관 스님은 이날 긴급 해명서를 내고 “당시 흔하게 있었던 특별절차를 통해 마산대에 편입학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지관 스님의 학력은 1963년 경남대 전신인 마산대 종교학과를 나와 1969년 동국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6년 이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지관 스님은 이날 제기된 의혹과 관련,“일종의 대학과정인 해인사 불교 전문강원을 졸업한 뒤 해인사 강원의 강사(교수)와 강주(학장)로 6년간 후학을 지도하다 1961년 10월 신설된 마산대 종교학부에 편입학했다.”고 밝혔다. 불교계의 수행이력과 불교 교육기관에서 다졌던 교수 경력을 인정받아 마산대로부터 편입학을 특별히 허용받았다는 것이다. 지관 스님은 특히 마산대 학적부에 기재된 편입학 이전의 학력과 관련해선 “대학의 담당자가 정리한 것일 뿐 그 내용을 모른다.”고 해명했다. 불교계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당시 불교계에서 운영하던 마산대가 편입학 서류를 임의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지관 스님은 동국대 대학원을 거쳐 1975년 동국대 교수(선학과)로 임용된 뒤 불교대학장, 교육대학원장을 거쳐 1986∼1990년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1997년 동국대 교수에서 정년 퇴임했으며 2005년 조계종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조계종 총무원은 13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지관 스님의 학력문제를 공식 해명할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부흥운동 100년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됐다

    부흥운동 100년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됐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당이 복원됐다.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초지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영제 장로) 부지 안에 원 크기의 5분의1 규모로 들어서 오는 20일 오전 11시 이 박물관에서 예배당 준공 감사예배가 열린다. 평양 장대현교회는 1907년 한국교회의 회개와 부흥을 주도했던 이른바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중심공간. 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의 인사들이 부흥운동의 원 정신을 되새기자는 뜻을 모아 축소된 형태나마 그 예배당을 세워놓았다. “올해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숱하게 열렸지만 기념행사나 이벤트성 행사에 치우쳐 아쉬웠다. 장대현교회 복원이 100년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지난 5월부터 복원공사를 벌여와 예배당을 세워놓은 박물관측의 설명이다. 82.5㎡ 크기의 예배당 안에는 100년전의 선교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아 당시 평양 지역 복음전파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관련 사료를 토대로 강대상이며 헌금함·휘장도 복원해 놓았다.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시비와 마포삼열·이길함·한석진·길선주 같은 평양지역 선교 개척자들의 기념비도 들어서며 예배당 준공에 맞춰 박물관 본관에서는 길선주 목사의 친필 8폭 병풍도 전시한다. 지난 3일부터는 올해말까지의 일정으로 ‘빛바랜 사진, 부활하는 역사’라는 주제의 특별 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이 박물관 소장자료 중 200여점을 뽑아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자리. 이 박물관은 지난 30년 동안 전국의 고서점과 개인, 경매 사이트를 통해 10만여점의 사진과 그림엽서, 문헌들을 모아 한국 개신교박물관 가운데 가장 많은 희귀 자료를 갖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에는 세브란스 의학교 실험실 모습을 찍은 사진과 1906년 배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의 사진이 나와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건축 현장모습과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희년기념식,1930년대 동평양장로교회 주일학교 예배 모습을 담은 사진도 모두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913년 YMCA가 마련했던 성경 사경회에 교사로 참석한 몽양 여운형이 월남 이상재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박물관측의 설명대로 “흔히 좌익 인사로만 불려왔던 여운형 선생을 재평가할 수 있는 자료” 측면에서 관심이 쏠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한국불교 불기 1년 늦춘다

    한국불교 불기 1년 늦춘다

    ‘한국불교에서 잘못 쓰고 있는 불기(佛紀)를 바로잡는다.’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들은 최근 제174차 임시종회에서 지금의 불기가 잘못됐음을 인정,‘불기사용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특위)’를 구성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동안 불교학자와 몇몇 스님들이 한국불교의 잘못된 불기문제를 꾸준히 지적해왔으나 조계종 중앙종회 전체 차원에서 뜻을 모아 전격적으로 특위를 구성하는 등 본격적인 수정에 나서 불교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 불교계는 대부분 올해 기준 불기를 2550년으로 쓰고 있지만 한국과 한국불교의 불기를 그대로 받은 중국, 그리고 스리랑카, 베트남에서만 2551년으로 쓰고 있다. 이에따라 한국 불교계가 참가하는 국내외 각종 불교 관련 행사나 출판물 표기에서 마찰을 빚는 등 혼란이 계속됐지만 종단차원에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해묵은 과제로 남아 있었다.<서울신문 7월19일자 보도> “불기를 고쳐 쓸 경우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정체성이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 1월 조계종 새해 기자회견에서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불기를 고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중앙종회에서 전격적으로 수정결의를 한 것은 큰 행사를 줄줄이 앞두고 있는데다 세계 각국 불교계와 같은 불기를 쓰겠다는 입장발표가 잇따라 나온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의 불기를 계속 고집할 경우 세계 불교계에서 한국불교의 위상과 입장에 더 큰 손실을 불러올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내년 5월17∼18일 세계 각국의 불교학자와 단체들이 총집결해 동국대에서 열리는 제4차 불교학결집대회가 세계 공용불기인 ‘2551년’을 공식 채택키로 결정했다. 이에앞서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지부는 다음달 개최할 올해 ‘WFB 국제콘퍼런스’의 불기를 ‘2550년’으로 이미 결정해놓았다. 세계 불교국가들은 1957년 네팔 카트만두 WFB에서 1957년을 불기 2500년으로 책정해 공통불기로 쓸 것을 결의했었다. 한국도 1966년 조계종 임시중앙종회에서 이 ‘불기 2500년’설을 채택한 뒤 모든 종단이 써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한 해 앞선 불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이처럼 불기가 잘못 쓰이게 된 것을 놓고 1970년 9월 한 불교 교계지가 1년이 더해진 불기를 써 다른 나라보다 한 해 앞서가기 시작했다는 주장과 1970년대 스리랑카와 교류하면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특위는 불기 오류의 원인부터 밝혀낸 뒤 오는 11월 정기 중앙종회에서 불기 정정 결의를 공식 요구할 예정이다. 이번 임시종회에서 특위 구성을 주도한 주경(중앙종회 사무처장) 스님은 “한국불교는 오랜 선불교의 전통과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세계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며 “한국불교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고 활동하기 위해서도 불기 문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중요한 단초”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변양균 사퇴 파장] 장윤 스님 접촉 확인에 조계종 당혹

    신정아씨 학력위조 파문을 둘러싼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외압의혹과 관련한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조계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변 실장의 사퇴 소식을 전해 들은 장윤 스님은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고 심정을 밝혔다. 변 실장이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신정아씨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음이 밝혀지고 신씨 학력위조 의혹을 처음 제기한 전등사 주지 장윤 스님과의 접촉 사실도 확인되자 조계종은 향후 파장을 예의 주시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은 특히 청와대 불자모임인 청불회 회장을 맡고 있는 변 실장이 그동안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점을 의식, 불교계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변 실장은 고려대 재학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한 불교신자로 하버드대 출신인 현각 스님을 만난 뒤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불교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아 기획예산처 간부와 장관을 거치면서 조계종의 템플스테이와 사찰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정부예산 확보 등 굵직굵직한 불사에 적극 나서 불교계의 신임을 얻었다.변 실장은 청와대 정책실장 자리에 있으면서 불교계 책임자나 총무원 관계자들을 만나 불교계의 민원을 듣긴 했지만, 종단 관계 행사에는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계가 신씨 학력위조 사태 이후 외압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음에도 변 실장의 개입 여부에 반신반의했던 것도 그 같은 연유에서다. 학력위조 의혹을 제기한 장윤 스님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대리인을 통해 변 실장의 외압의혹을 강하게 부인한 터라 조계종은 사실상 내부적으로 외압의혹을 무시해 왔으나 10일 변 실장의 거짓행보가 밝혀지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장윤 스님이 ‘신정아 의혹’을 제기했다가 번복한 것이 변 실장의 부탁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에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조계종은 장윤 스님이 변 실장으로부터 신씨 문제와 관련해 직접적인 청탁이나 외압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선뜻 수긍하지 않는 분위기다. 변 실장의 사표수리 소식을 전해 들은 장윤 스님 역시 한 언론과의 전화통화에서 “충격이 크다.”면서도 회유성 외압 의혹에 대해서는 “그동안 밝혀온 것처럼 압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는 “신씨의 학력위조와 관련해서는 변 실장과 만난 이후에도 (언론 등을 통해) 일관되게 문제점을 제기했다.”면서 “검찰 출두는 변호사와 상의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전 법무장관 서울 강남에 ‘사랑방’ 마련

    김성호 전 법무장관 서울 강남에 ‘사랑방’ 마련

    지난 3일 퇴임과 함께 ‘야인’(野人) 으로 돌아간 김성호(57) 전 법무부 장관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무실을 마련한다. 내달 초 입주를 예정으로 한창 내부공사를 하고 있다. 김 전 장관 주변에서는 애초 변호사 개업을 고려했지만 당분간 지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 측근은 “퇴임 후 곧바로 사건수임을 하면 ‘전관예우’ 등의 비난을 받을 수 있어 이곳에서 소일할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사무장도 없이 여직원 1명만 둔 채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차 한잔 나누고 바둑을 즐기는 문화·모임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굳이 임대료가 비싼 강남에 사무실을 낼 이유가 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사무실은 사거리 이면도로에 자리했지만 대치동과 인접한 고급 사무실 밀집지역에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총선 출마 등을 염두에 둔 거물급 인사들은 퇴임 후 사랑방 역할을 할 사무실을 마련하곤 한다.”면서 내년 4월의 총선출마에 무게를 뒀다. 하지만 한 의원 보좌관은 “총선용이라면 출신지인 경남 남해에 뒀을 것이고 삼성동 인근에는 원래 변호사 사무실이 몰려 있다.”고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런 가운데 김 전 장관은 퇴임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대장부의 기개로 국가와 사회에 더욱 헌신하고자 노력하겠다.”며 고별사를 던진 이후 휴대전화 번호도 결번처리하고, 허물없는 지인들만 만난다. 한 관계자는 “정치권 인사보다 대학동기 등과 식사를 함께 한다. 때론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평소 취미인 바둑을 둔다.”고 전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종합하면 김 전 장관은 외부와의 접촉 대신에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새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의 정중동(靜中動) 행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관심이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자유인 황진이 “사내들은 물렀거라”

    자유인 황진이 “사내들은 물렀거라”

    열다섯의 나이에 자신을 연모하던 사내가 상사병으로 죽자 집을 떠나 기적에 이름을 올린 황진이. 빼어난 미색에 한시와 시조, 노래에도 뛰어난 명기(名妓)로 석학·예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했던 예인이자 자유인으로 통한다. 이 황진이가 무대 위에서 되살아난다. 경기도립무용단이 2007년 기획공연으로 18∼21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장 무대에 올리는 무용극 ‘황진이’. 이 무용단 예술감독 조흥동이 2001년 선보였던 것을 전혀 다른 감각의 레퍼토리로 꾸며 6년만에 다시 내놓는 역작이다. 무대의 포커스는, 기녀이지만 결코 천하지 않은 안목으로 남성들의 세계를 꿰뚫어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황진이의 인물상 살려내기. 봉건적 윤리의 껍데기를 떨치고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꿈꾸며 살았던 드라마와도 같은 삶이 무용만이 아닌 노래, 연극적 대사, 영상으로 풀어진다. 자신을 사랑하다 죽은 젊은 영혼을 달래는 몸짓으로 시작해 집 떠나는 여인의 심경, 벽계수·서화담과의 만남, 지족선사와의 일화가 다양한 볼거리들에 얹혀 차례로 이어진다. 무용수가 춤은 물론 창과 대사까지 맡아 종전의 전통무용극과는 아주 다른 무대. 전통무용을 토대로 30여개의 장면으로 처리한 극적인 에피소드가 빠른 템포로 전개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출신 작곡가 3명이 호흡을 맞춰 만든 창작곡이 작품 내내 흐르며, 음악도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섞어 현대적 분위기를 살렸다. 황진이 인물에 대한 전문가 고증을 거쳐 경기도립무용단원들의 기량에 한국 고유의 장단·음악을 실은 문화콘텐츠로 다듬어 세계 무대를 향한다는 제작진의 만만찮은 욕심이 담겼다.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 김효경이 연출을 맡았으며, 타이틀롤 황진이 역에 경기도립무용단원 박정미와 김주연이 더블캐스팅. 오후 7시30분.(031)230-3440.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조계종 공익기부재단 만든다

    조계종 공익기부재단 만든다

    불교계에선 처음으로 조계종이 공익기부재단을 설립한다. 조계종 총무원은 5일 “재난 구호와 소외계층 지원, 환경 보전 등 불교계의 대사회활동 활성화를 위해 올해 안에 기부재단을 설립키로 했다.”고 밝혔다. 공익기부재단은 최근 종무회의에서 추진을 공식 결의한 것으로 기부금품 모연과 운영을 맡는 독립법인 형태로 발족될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에선 지금까지 대사회활동 자금을 교구본사 분담금으로 충당해 왔으며 신자들이 십시일반 격으로 갹출해 모은 자비나눔기금으로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한 불우이웃과 장애인돕기 봉사, 재난구호활동을 제한적으로 진행해 왔다. ●3년내 70억원 기금 조성 조계종 총무원은 우선 이 자비나눔기금 3억 2000만원을 기본재산으로 출연해 공익기부재단을 설립한 뒤 3년내 70억원의 기금을 조성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 이달 중 관련 전문위원을 위촉해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뒤 공청회에서 종단 안팎의 의견을 수렴해 본격적인 설립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총무원은 공익기부재단에 인사를 비롯한 행정, 집행과 관련한 권한을 모두 위임해 별도의 독립기관 성격을 갖도록 한다는 원칙 아래 기금모연 전문가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구성, 사회의 저명인사를 상임이사로 추대하고 기업체의 동참 등 종단 밖의 개인이나 단체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공익기부재단이 설립되면 ▲국내외 재난구호와 기아예방 등 ‘구호’▲소외계층 및 여성·노인 후원의 ‘복지’▲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 문화재 보호의 ‘통일’▲숲 가꾸기, 백두대간 및 국립공원 보전의 ‘환경’▲해외 교육·의료시설 건립, 문화교류의 ‘국제’ 등 5개 영역에서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사회부장 지원 스님은 “종단 안팎에서 불교계의 대사회활동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많아 활동 증대를 위한 공식 모금창구 마련 차원에서 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라면서 “종단 예산만으론 활동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기부재단이 설립되면 지속적인 기금 모금을 통해 국내외의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을 다양하게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단 투명성·신뢰성 확보 중요” 한편 불교계에서는 공익기부재단 설립과 관련, 재단의 투명성과 신뢰성 담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재단의 성격도 불교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사회활동을 넓혀가는 쪽에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이 재단이 모델로 삼은 기독교 계통의 월드비전과 굿네이버스가 구호사업에 선교활동을 병행하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종단 내부의 재정과 관련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참여불교재가연대 정웅기 협동사무처장은 “사찰 분담금 관리와 예결산 보고, 일반 신도들의 재정 관리 강화 등 종단 재정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더 시급하다.”며 “공익기금재단 설립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조계종 동국대 이사 추천 파행

    동국대 재단이사 후보 추천을 위한 조계종 종립학교관리위원회(종관위) 회의가 종단내 계파간 갈등으로 후보 추천을 못한 채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종관위는 4일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회의를 열어 이사 후보 6명을 이날 개회된 제174차 중앙종회 임시회에 추천, 인준 절차를 밟을 계획이었으나 전체 위원 15명 중 5명만 참석하는 바람에 회의가 열리지 못했다. 동국대 재단이사회 비주류측 8명의 종관위원은 전날 투표 방법을 놓고 설전을 벌인 끝에 후보 추천을 못하자 “이사후보 추천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면서 현 재단 임원진에게 “신정아씨 학력 사건으로 동국대의 위상과 교계의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종관위는 일단 8일까지 예정된 중앙종회 기간 중 회의를 한 차례 소집할 계획이지만 성원이 안될 경우 이사후보 추천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두봉(78·본명 렌 뒤퐁) 주교는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로 통한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여는 맘씨 좋은 푸른 눈의 프랑스 선교사. 목사님이나 스님이나 거리낌없이 방 안에 들어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꺼내도 껄껄 웃으며 들어주는 외국인.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문화마을에 두봉 주교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2004년 11월 이 봉양마을에 왔으니 올해로 4년째.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며 거침없이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는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하느님이 명령한 선교 임지’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1954년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53년간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서슴없이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두봉 주교. 그에게 과연 한국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이토록 한국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능력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을 따른 선교사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선교사의 사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절절한 심중이 읽힘은 왜일까. 프랑스 오를레앙,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그 고장에서도 한참 벗어난 궁벽한 농촌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두봉은 저 멀찍한 한반도의 부름에 이끌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형제, 아니 사촌형제 두 명까지 모두 7형제가 한 집에서 살며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두봉은 형제 중에 유일하게 ‘성소’의 뜻을 밝혀 신학자, 목회자의 길을 밟았다. 한국이라는 동양 끝 저쪽 나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쌓았던 그가 털어놓는 한국과의 인연은 거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오를레앙 신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병영생활을 하던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가 한국에 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그였다. 당시만 해도 ‘위험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한국은 신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먼 나라일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6·25전쟁으로 성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디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해 5명의 신부가 배정됐던 것.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 처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묻히겠다.”는 변함없는 소신을 준 것은 과연 믿음일까, 삶일까. 전쟁의 끝자락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폐허만 눈에 띌 뿐” 어느 한 곳 번듯한 게 없었던 한국 땅.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은 게 한국 사목의 시작이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흥동 본당 주임이었던 오기선 신부가 지어준 이름.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자에 맞춰 지었다고 하는데 두봉 주교는 “중국의 두보와 같은 성씨”라며 은근히 이름 자를 치켜세운다.“두견새가 큰 봉우리에서 우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등학교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활동을 했던 때문일까,‘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50명쯤 되는 어려운 집 아이들이 집을 나와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전 JOC 청년회원들이 1년 넘게 같이 어울리며 살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일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전 MBC 라디오를 통해 진행한 ‘5분명상’ 프로그램은 대전 지역 가난한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돼 초대 교구장을 맡을 무렵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두달 뒤 주교서품을 받았는데 주교 서품 때 응당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주교라면 12사도 후손의 반열에 오르는 천주교의 큰 명예인데 굳이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마다한 까닭은 무엇일까.“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 한사코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안동교구장 자리를 고사했지만 교황청의 내리누름에 밀려 할 수 없이 눌러앉았다. 지난 1990년,22년 만에 안동교구장 자리를 내놓을 때까지 “한국인 사제를 교구장으로 임명하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청에 탄원을 낸 인물이다. 전통 문화의 고집이 센 ‘유림의 땅’ 안동에서 22년간이나 큰 탈 없이 천주교 교구장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든 것을 비롯,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운 일,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 “지금 생각해도 그 의롭고 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도 안동은 전통이 살아있는 유별난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더군요. 천주교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지요.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잊지 못할 큰 사건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들고 일어서 전국에 폭로한 것.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교구장 두봉 주교의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젠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교구장에서 은퇴한 게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둔 채였다.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성직자와 수도자 신도들의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이곳 봉양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향격인 안동 지역에서 살게 해달라는 주문이 받아들여져 이곳에서 살게 됐는데 너무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진다.”며 한사코 번듯한 집을 마다했던 그다. “한국 천주교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은 나의 모범 선배”라는 두봉 주교. 그 10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한다. 사목표어는 만들지 않았지만 마음속 표어는 있지 않으냐는 짓궂은 물음에 마지못해 떠듬떠듬 말한다.“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기도 많이하고 남과 함께 살다가 주님의 뜻이 뚜렷해지면 주님 뜻대로 하겠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고추며 가지며 텃밭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챙긴 주교가 거실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킨다. 두봉 주교 은퇴 후에 안동교구 사제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란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 출생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1년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3년 사제 서품 ▲1954∼1955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1955∼1965년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 ▲1967∼1969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 주 교 서품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훈장 ▲1990년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1∼2003년 행주외동 행주공 소 피정 지도 ▲2004년∼ 봉양문화마을 거주
  • 개신교 “무리한 해외선교 반성” 참회기도회

    무리한 해외선교로 비난을 받아온 개신교계가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 목사 100여명은 서울 종로5가 연동교회에서 참회기도회를 열고 아프간 피랍 사태로 불거진 한국 교회의 폐해를 고백했다. 김형태 연동교회 원로목사는 “목사들의 물량적 교회 성장 정책은 파송 선교사 수의 증가를 과시하거나 외국 자원봉사자 수와 업적을 성과처럼 선전하는 전투적 선교활동을 부추기고 있다.”며 뉘우쳤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대장부 기개로 국가에 헌신할 것” 김성호 법무장관 퇴임

    소신 발언으로 유명한 김성호(57) 전 법무부 장관은 3일 “대장부의 기개로 국가에 더욱 헌신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정부 과천청사 지하대강당에서 진행된 퇴임사에서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다. 김 장관은 “청탁이 보편화된 현실사회에서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다 보니 가까운 사람에게 섭섭하거나 노여운 감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라며 “사적 이익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로 국민을 빙자·기만하거나, 오도·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어 “공직자는 모름지기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을 고르라면 ‘공정무사’를 들고 있다.”고 말했다. 퇴임사 도중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바이레이, 맹자, 정약용 선생 등의 발언을 인용해 ‘공평무사’ ‘지조’ 등을 거듭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최근 불거진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세무조사 무마 청탁 의혹, 변양균 청와대 정책비서실장의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비호 의혹과 맞물려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김 장관은 또 “기업이 국민경제에 기여한 공적을 폄하하면 안 된다. 기업인의 노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삶의 질은 상상할 수 없다.”면서 기존의 기업친화적인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한편 퇴임식에선 법무부 국·실장들이 비용을 갹출해 김 전 장관의 홈페이지 ‘김성호의 행복세상’(www.ihappyworld.net)을 선물했다.‘국민’ ‘원칙’ ‘열정’이란 표어 아래 김 전 장관을 나폴레옹에 비유해 그린 캐리커처와 방명록·블로그·언론인터뷰·동영상자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신정아 파문’ 조계종 갈등 비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가짜 학위 파문이 조계종내 파벌 싸움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씨 학위 위조 문제를 처음 제기한 장윤 스님이 속한 조계종 무량회는 지난 31일 동국대 이사회 전원의 사퇴를 결의,4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조계종 중앙종회의 안건으로 채택한다는 방침이다. 조계종 중앙종회는 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최고 의결기구로, 중앙종회 종책모임에는 무량회, 보림회 등 4개 모임이 있다. 불교계에서 ‘직지사단’으로 불리는 무량회는 동국대 재단이사회 주류인 영배·영담 스님이 속한 보림회와 대립관계로, 이들은 조계종 총무원과 동국대를 번갈아 장악해 왔다. 동국대 재단이사 13명 가운데 7명은 11월22일 임기가 만료된다. 이 중에는 신씨의 가짜 학위 문제를 처음 제기한 장윤 스님을 비롯해 영담·종상·현성 스님 등 승려이사 4명이 포함돼 있다. 나머지 3명은 당연직인 총장, 개방형 이사, 총동창회 추천 이사 등으로 종단과는 관련이 없다. 승려이사 4명은 중앙종회 종립학교관리위원회(위원장 광조 스님)가 3일 회의를 열어 2배수를 추천하고 중앙종회의 인준을 거쳐 동국대 재단이사회에서 선출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번 중앙종회 인준 과정에서는 신씨 채용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대립해온 영담 스님과 장윤 스님의 재선임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한편‘신정아 미스터리’를 풀어줄 핵심 관계자인 장윤(전 동국대 이사·현 전등사 주지) 스님이 검찰에 출석해 더 할 얘기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 스님과 더불어 또 다른 핵심 관계자인 홍기삼(동국대 국어국문과 명예교수) 전 총장은 현재 지방 모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신씨 고소사건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호 임일영기자 kimus@seoul.co.kr
  • 대안은 없나

    ‘미시오 크리스티(Missio Christi)’와 ‘미시오 데이(Missio Dei)’ 기독교에서 크게 나누는 선교의 두 형태다.‘미시오 크리스티’가 예수의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는 교리적 선교라면 ‘미시오 데이’는 교리와 상관없이 하나님 사랑의 참 뜻을 나누는 선교로 구별된다. 궁극적인 예수의 복음전파를 앞세우는 ‘미시오 크리스티’에 비해 ‘미시오 데이’는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존귀한 모든 사람을 조건없이 섬겨야 한다.´는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중시한다. 흔히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의 봉사와 사랑은 이 ‘미시오 데이’로 여겨지며, 그래서 기독교인이면서 종교를 초월한 성자·성녀로 추앙된다. 한국 주류 개신교의 선교는 ‘미시오 크리스티’에 치우쳐 있다.‘땅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전통 보수의 구원관이 짙은 교회와 선교단체일수록 ‘미시오 크리스티’에 충실하다. 한국 개신교계에서도 종전의 교리 지상주의를 벗어나 사랑과 평화를 앞세운 봉사로 접근하는 교회와 선교단체는 늘고 있다. 이번 피랍사태를 낳은 분당샘물교회도 비난과 질시를 받긴 했지만 교계에서는 비교적 앞선 형태의 선교방식을 택한 대표적 교회로 인식되어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역에 중점둬야 교단 가운데서도 외국의 현지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현지교회가 필요로 하는 선교에 치중하거나 현지 에큐메니칼 기구며 교회협의회와 협의를 통해 선교활동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사역을 위해 해당 국가의 목회자를 국내에 초청하기도 한다. 모두 현지인과의 신앙갈등을 줄여 협력체제를 지키는 공통점을 갖는다. 문제는 ‘예수의 지상명령’을 따라 대상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복음전파에 무한경쟁을 벌이는 교회의 목회자와 선교사, 교인들이다. 바로 교계에서 이번 피랍사태를 계기로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다. 지난달 27일 박종화(경동교회), 손인웅(덕수교회) 목사 등 중진 목사 7명은 “한국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선교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며 “무엇보다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역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국 선교의 문제점을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방향틀기를 제안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해외선교협의회는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교리 선교를 다시 주장했다.‘선교는 예수의 지상명령이자 기독교인의 당위’임을 확인한 것으로, 개신교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어떻게 선교하느냐’이다.“하나님 복음의 절대진리를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한다.”며 ‘개인의 구원’이 아닌 ‘함께하는 구원’을 강조하는 한국 주류 개신교계의 입장에서 그 해법 찾기는 간단치 않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남의 문화와 정서를 인정하지 않는 선교는 ‘문화적 폭력’인 만큼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신앙은 개인의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강제해선 안 된다.”“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선교가 자기 삶을 던져 헌신하는 희생을 전제로 할 때 이왕이면 사람들 간의 분노와 적개심을 해소하고 평화를 찾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포교보다 일상속 봉사실천에 관심을 그런 점에서 전문가들은 초창기엔 공격적이었지만 성찰의 단계를 거쳐 토착지에서 신앙갈등을 줄여나간 북유럽 중심의 개신교나 천주교 선교에 주목한다. 정복지역에서 토착화와 피식민지인의 교화역할을 선교사가 맡았던 점이다. ‘미시오 데이’를 실천하는 ‘개척자들’이나 ‘작은예수회’같은 단체들도 조심스럽게 거론된다.‘개척자들’은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지만 포교나 교회성장 전략이 아닌 자발적 가난을 통해 고통받는 지역에 평화를 심는다는 원칙을 지켜나간다. 1937년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이 시작해 전 세계에 퍼진 천주교 ‘작은 형제회’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분노하지 않고 종교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일상속에서 실천해가는 단체 중 하나로 꼽힌다. 채수일 한신대 교수(선교학)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를 정당화하는 근본주의 성경해석에 치우친 한국 주류 개신교의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국내 교파의 교리를 그대로 이식해 해외에서 갈등이 심해졌다.”며 “타종교, 타문화의 존중과 대화야말로 오히려 신앙을 풍성하게 하고 정체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아프간 피랍이후 해외선교 어디로] (3) 침묵하는 신학자들

    ‘예수천당 불신지옥’, ‘예수 믿고 천당가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한국 개신교계가 주관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선 이런 말과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지하철 열차 안을 비롯, 대중이 모이는 많은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말들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고 다른 모든 형태의 종교나 사상은 이 구원의 절대진리에서 배제됨을 알게 모르게 암시한다. 바로 한국 주류 개신교의 교리를 드러내는 문구들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구원과 관련한 입장은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된다.‘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전통의 보수 배타주의와 ‘예수 안에서만 구원이 있지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 그리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다원주의이다. 이 가운데 비록 교회 안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는 삶을 사는 익명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나, 다른 종교에 구원의 길을 여는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는 차별화된다. 한국 개신교계의 경쟁적 해외선교의 문제는 바로 이 배타주의에 익숙한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한계에 큰 원인이 있다.‘예수가 구원의 길이며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 바로 선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인식은 현지인, 특히 ‘미전도지역인’들의 신앙을 바꿔놓으려는 헌신으로 이어지고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도 비켜나있지 않다. ●한국 개신교계 80%가 배타주의 지난해 아프간에서 1300여 개신교도가 참가한 가운데 이벤트를 벌이려다 출국조치 당한 한 선교사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 “아프간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는 무너져 내릴지어다.”는 속내야 어쨌든 공격적 선교의 방향성을 보여 준다. 봉사활동을 표방한 활동도 궁극적으로 전도와 선교라는 질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에 힘을 실어 주는 예이다. 안타깝게도 순수한 열정을 갖고 전도에 나선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의 뜻까지도 가리게 한다. 구원과 관련한 신학과 실천이론을 볼 때 지금 한국 개신교계의 80%가 배타주의에 속한다는 데 전문가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현지의 문화와 전통을 고려해 토착화와 교화에 주력하는 유럽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나 미국 기독교의 절반을 차지하는 포용과 다원주의 선교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제 신학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를 수용하지 않는 한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의 참극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 보수 교리에 반대하며 선교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적지 않다.“배타적 구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필요에 의해 도입된 교리여서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나 “공격적 선교방식은 세상을 다양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독교인 스스로 제한하고 파괴하며 획일화하는 신앙적 범죄행위”라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심지어는 “한국 교회 교우들이 진정으로 섬기고 따라야 할 분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교회와 목사가 아니다.”라든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에 가두는 교리주의자들은 종교를 팔아 잇속을 챙기는 장사꾼”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2000년전 잘못된 원시교리 얽매어” 이들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구원관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교회의 진정한 역할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인도하려 한 게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구원의 의미로 당시의 율법과 로마 식민지상태의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삶을 뜻했지만 후대에 교회 조직이 생존을 위해 공격적인 선교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구원관이 개선을 위한 대안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형교단이 설립한 신학교에서 공부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결국 교단의 교리에 빠질 수밖에 없고 취업 등 사회활동에서도 영향받는 상황에서 이런 구원관과 입장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2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감리교단에서 출교된 변선환 목사는 지금까지도 복권되지 않고 있다. 류상태 목사(종교자유정책연구원 지도위원)는 “2000년 전의 잘못된 원시교리에 얽매인 교회와 신자들을 더이상 무지의 감옥 속에 가두어선 안 된다.”며 “이번 피랍사태는 신학자들에게 해외선교와 구원의 방향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큰 숙제를 남긴 계기”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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