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5) 리투아니아 출신 계룡산 무상사 입승 보행 스님
겨울철 스님들의 집단·집중 수행인 동안거(冬安居)의 끝, 해제(解制)를 사흘 앞둔 6일 오후 충남 계룡시 엄사면 계룡산 자락의 국제선원 무상사. 몸과 마음을 챙겨 ‘참나’를 찾기 위한 안거를 나기 위해 15개국에서 찾아든 60여명의 스님, 재가 불자들이 3개월의 수행 정진을 마무리하는 정중동의 엄한 분위기에 몸,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안거철엔 절대 외부인을 사찰 경내에 들이지 않는다.”는 주지 무심(미국) 스님의 물러서지 않는 완강한 거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찾아간 수행공간. 3개월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묵언 수행의 끝자락에 선 수행자들이 해제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주지 스님에게 간곡한 청을 들여 수행자들의 기강을 책임진 입승(立繩), 보행(48·본명 케스투티스 마르시우리나·리투아니아)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무상사는 외국인 스님들이 연중 수행을 하는, 국내 몇 안 되는 국제선원. 특히 안거철이면 ‘한국에서 집중수행을 하며 한 철을 살겠다.’는 외국의 스님들이 대거 몰리지만 이번 동안거엔 지난해보다 20여명이 줄었다는 주지 스님의 귀띔. 스님들이 모여 사는 이곳도 세계 경제불황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모두 자비를 들여 찾아온 무상사에서 숨막히는 3개월의 묵언 정진을 관통한 수행자들의 마지막 단도리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보행 스님이 굳은 얼굴로 기자 앞에 선다. 참선 때마다 시작과 끝을 알리는 죽비를 치며 선방 수행자들의 기강을 잡아온 입승 소임 때문일까. 스님이 좀처럼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오늘부터는 죽비를 치지 않고 묵언을 풀어 말을 할 수 있다.”며 불청객을 맞지만 외계인에 대한 경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눈치다.
화두를 들어 참구하는 수행자의 몸, 마음을 다잡는 입승 스님. 입승 스님은 죽비를 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거듭된 다짐일까, 아니면 도반들의 엄한 공부 챙김일까.
●묵언정진… 외국인 수행자들 기강 책임져
“선방의 마음 하나 몸 하나는 모두 말로 풀 수 없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 무상사의 가풍인 묵언 정진은 말로 인한 업을 짓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철저히 매달리도록 독려하는 방편이지요.”
스님이 매달려 참구하는 화두가 궁금해졌다.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 이전,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혹독한 싸움’의 근원이 무엇일까. “이 뭐꼬.” 본래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나는 무엇인가. 외마디로 객에게 던져주는 평범한 화두에 실린 삶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지금 리투아니아 공화국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 출신. 사회주의 소련 체제의 붕괴와 조국 독립의 격동기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고통과 혼돈에서 스님은 세상을 안정시킬 수 있는 ‘그 무엇’에 심한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때는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소련군 생활이 싫어 택한 게 고향 카우나스의 폴리테크닉 대학이다.
대학에서 전기공학과 공부를 마치면 군 대체복무가 수월하다는 생각에 원래 되고 싶은 연극 배우의 꿈을 잠시 미룬 채 진학했지만 결국 대학 졸업 후 2년간 소련 육군 병 생활을 해야 했다. 혐오하던 소련군 생활을 마친 뒤 결국 ‘테아트르 앤드 아츠 아카데미’에 들어가 6년간 공부 끝에 작은 극단까지 만들어 연극을 하며 살았다. 오랜 배회 끝에 마침내 올라선 연극 무대에서 배우 겸 연출자로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는 성취감에 마냥 행복했단다.
고등학교 시절 판토마임으로 이름난 선생님을 보고 연극배우로 살겠다는 절실한 꿈을 키웠던 보행 스님. 그 무대에서 막 빛을 보기 시작할 순간 인생 향로를 틀어 지금 무상사에서 죽비를 잡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그는 일찍부터 이른바 ‘무아(無我) 경계’에 눈떴던 것 같다. 고교 졸업후 러시아어로 된 불교 서적들을 읽던 중 ‘네가 너를 세상에 드러내 세우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결코 네 진면목이 아니다.’라는 말에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됐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 그토록 하고 싶던 연극을 하면서도 줄곧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지만 ‘내 자신이 완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회의가 계속됐다.
그러던 중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건너온 폴란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조금씩 머릿속의 안개가 걷혀가는 듯했다. 결국 하던 극단 일을 접고 빈 집을 얻어 친구들과 함께 고향 카우나스에 고봉사라는 사찰을 마련했다. 지금도 고봉사엔 매일 법회 때 30여명의 리투아니아 신도들이 모인다고 한다.
고봉사에서 생활하다 유럽 한국불교 포교의 핵심인 폴란드 바르사뱌의 도암사로 건너가 매년 결제에 참가하는 등 행자생활을 했다. 그러다 만난 게 숭산 스님과 지금 무상사의 주지인 무심 스님. 고봉사 생활중 읽은 숭산 스님의 책 ‘부처님께 재를 털면’을 보며 숭산 스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하니 도암사로 찾아온 숭산 스님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을까.
“‘부처님께 재를 털면’은 미혹에 빠진 일반인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편을 쉽게 쓴 책이었지요. 미궁에서 길을 찾던 저에겐 벽력처럼 쳐들어온 이정표였던 셈이지요.” 숭산의 법문에 빠져있던 중 결국 무심 스님의 “한국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출가를 결심했다. 생활이 어려워 비행기 표 사기도 힘들었던 시절, 한동안 접었던 극단 일을 틈틈이 해 모은 돈으로 한국에 온 게 1999년. 이후 화계사 국제선원에 8년간 몸담아 행자부터 살림살이를 맡는 원주, 입승 등 온갖 소임을 두루두루 거쳤다고 한다.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사미계를 먼저 받았지만 부산 범어사에서 조계종 사미계를 다시 받고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컴버랜드시 프로비던스 선센터에서 비구계를 받아 지금은 한국 조계종의 공식 비구계 수지를 기다리는 중. “언제쯤 한국의 비구계를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답 대신 작은 웃음만 보여 준다. “비구계 받는 것이 전부인가요. 끊임없이 공부할 따름이지요. 1000년 이상의 선 불교 역사를 가진 한국 사찰에서 배우고 수행하는 것만도 얼마나 큰 일입니까.”
●한국 온 지 10여년… 온갖 소임 두루 거쳐
이곳 무상사에 옮겨 산 지는 1년 남짓. 절집 살이를 놓고 보면 미국인 조실 대봉 스님과 주지 무심 스님에 이어 세 번째 높은 소임을 맡고 있다. 대봉 스님과 무심 스님은 대하기 아주 어려운 스님들. 몸짓 하나, 말 한마디에서 깍듯한 예의가 묻어난다.
불교의 대표적인 화두 ‘염화미소’(拈華微笑). 스님은 염화미소 화두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곤 한단다.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이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 화두에 스님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염화미소의 사연을 처음 듣는 순간 마치 집을 떠나 오랜 세월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삶은 인연짓기의 반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순간의 만남도 오랜 인연의 공덕 때문이겠지요.”
‘온전하지 못한 내가 남에게 무엇을 내세워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에 절실한 꿈이던 인기 연극배우의 허물을 벗고 인생 향로를 틀었던 스님. ‘이 뭐꼬’ 화두 참구는 언제까지 할 예정이냐는 기자의 우문에 “오직 모를 뿐, 그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순간 순간 나를 버려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만 돌려준 채 자리를 뜬다.
글ㆍ사진 계룡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보행 스님은
▲1961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출생 ▲1983년 카우나스 폴리테크닉 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1989년 빌뉴스 테아트르 앤드 아츠 아카테미 졸업 ▲1990~1995년 카우나스에 리투아니아인들과 불교사찰 고봉사 창건, 수행 ▲1995~1997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선원 도암사서 수행 ▲1997년 숭산 스님 설법에 감화, 출가결심 ▲1999년 한국입국 ▲1999~2007년 화계사 국제선원서 수행 ▲2001년 화계사 국제선원서 사미계 수지 ▲2003년 부산 범어사서 조계종 공식 사미계 수지 ▲2005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 선센터서 비구계 수지 ▲2007년말~ 계룡산 무상사 입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