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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연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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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외로움/김상연 논설위원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소설 ‘벽’은 짧지만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하숙집에 청년 A가 살고 있다. 그는 옆방의 여성 B를 남몰래 흠모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A는 얇은 벽을 통해 옆방에서 나는 B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A는 B가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 무너진 듯 괴로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런데 다음날 경찰은 옆방에서도 주검을 발견한다. 알고 보니 전날 홀로 있던 B가 외로움을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서 신음 소리를 낸 것이었다. 만약 그 오해가 발생하기 전에 A가 B에게 용기를 내 고백했다면 둘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크리스마스 같은 때가 되면 애인이나 가족이 없는 사람은 더 외로움을 느낀다. 다들 행복한데 자신만 외톨이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화려한 날을 혼자 보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연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에 겨워하는 그림은 매스컴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실상은 가족이 있는 사람마저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은 외롭다는 얘기다.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친구가 필요하다면, 연말을 함께 보내자고 용기 내 말해 보자. 인간은 모두 외롭다. 외롭지 않은 척할 뿐이다.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기적의 2020 한국 프로야구/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기적의 2020 한국 프로야구/김상연 논설위원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 3대 리그 중 역사가 가장 짧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100년이 넘고 일본 프로야구도 84년이나 되는 반면 한국은 38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 속도는 한국 경제의 그것만큼이나 경이롭다. 인구 1억명인 일본의 프로야구가 12개팀으로 굴러가는 반면 인구가 일본의 절반인 한국의 프로야구는 어느덧 10개팀 체제가 됐다. 연봉 차이와 리그 수준 때문에 세계의 야구 선수들은 여전히 미국→일본→한국 리그 순으로 뛰고 싶어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한일 간 프로야구 연봉 격차도 과거에 비해 줄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라는 복병이 한미일 3국 간 프로야구 질서에 동요를 가져 왔다. 미일에 비해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에 잘 대처하면서 올해는 3국 중 한국 프로야구만 제대로 시즌을 치른 것이다. 한국은 미일이 프로야구 개막을 엄두도 못 내던 5월 5일 가장 먼저 시즌을 시작했다. 그리고 3국 중 유일하게 정규 시즌 팀당 144경기를 모두 치르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143경기 중 120경기만 치렀고, 미국은 162경기 중 절반도 안 되는 60경기만 소화했다. 메이저리그 개막이 지연되자 ‘야구 금단현상’에 빠진 미국 야구팬들이 처음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관심을 갖고 시청하는 기현상도 나타났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가 코로나19의 광풍 속에서 144경기와 포스트시즌 경기까지 무사히 치른 것은 기적에 가깝다. 개막 전 144경기 강행이 결정됐을 때만 해도 일부 프로야구 감독들은 “한 달 이상 개막이 늦어진 점을 감안하면 체력적으로 무리한 일정”이라며 회의론을 폈다. 또 선수단에서 한 명이라도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면 리그가 중단된다는 점 때문에 결국은 144경기를 다 못 치를 것이라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시즌 내내 1군 선수단과 관중 가운데 단 한 명도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고 지난 24일 마침내 시즌을 완주한 것이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올해 고작 60경기를 치르면서도 확진자가 속출해 리그가 중단되기 일쑤였고, 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을 때는 저스틴 터너 선수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도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우승 세리머니에 참석해 빈축을 샀다. 사회 각 분야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가운데 한국의 대형 야구장이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선수단과 관중의 각별한 방역 의식 덕분이었다. 룰을 중시하는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평소 모범적 생활을 하고 사회적 수칙도 잘 지킨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국민 각자가 더도 덜도 말고 프로야구만큼만 하면 코로나19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택시/김상연 논설위원

    “기사님, 15분 안에 서울역까지 갈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중요한 약속에 늦어 다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재촉했다. 기사는 “글쎄요”라는 반응으로 잠시 애타게 하더니 이내 가속페달을 밟는다. 택시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처럼 긴박하게 내달린다. 마음이 급한 기사는 비상식적으로 끼어들거나 느리게 가는 차가 나타나면 욕설도 불사한다. 승객은 그런 기사를 내심 열렬히 응원한다. 택시 안엔 묘한 동지애가 흐른다. 여태까지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외면한 택시기사를 만난 적이 없다. 요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왜 ‘흑기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과 운전 실력에 대한 직업적 자부심이 결합된 것은 아닐까. 흑기사 택시기사는 외국에도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잡아탄 택시의 기사에게 기차 시간이 촉박하다고 호소했더니 엄청난 속도와 아찔한 곡예운전으로 목적지에 내려 줬다. 인상적이었던 건 배우 조지 클루니처럼 잘생긴 그 기사가 그 어떤 짜증이나 분노도 표출하지 않고 시종 미소를 머금은 채 운전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평온한 표정이어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사의 직업철학을 배울 수 있다면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을 텐데….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일산의 눈물/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일산의 눈물/김상연 논설위원

    이 얘기는 너무 유명해서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1990년대 초 1기 신도시 입주 때 서울의 집을 팔고 분당과 일산 가운데 일산을 택한 가정의 가장들 중엔 나중에 집값 때문에 배우자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심지어 이혼 위기까지 간 경우가 있다는 ‘웃픈’ 스토리다. 노태우 정부가 1기 신도시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일산은 분당과 난형난제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일산은 북한과 가까워 장차 통일시대에 뜰 미래성을 갖고 있었고 김대중(DJ)이라는 유력 대선 주자와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입주하면서 정치적·인문학적 분위기를 발산하는 등 주거지로서의 매력이 넘쳤다. 따라서 당시 일산을 택한 가장들의 판단력은 나름 합리적인 알고리즘을 갖고 있었다. 다만 분당에 비해 강남에서 멀다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교통난만 빼면 일산의 주거 환경은 대한민국 어느 동네보다 밀리지 않는다. 드넓은 평지에 여유있는 아파트 간 거리, 아름다운 호수공원을 비롯해 곳곳에 접근성 높은 공원들을 보유하고 있는 일산은 출퇴근 걱정만 없다면 평생 살아도 좋은 곳이다. 그래도 집값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시대여서 일산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크다. 2020년 공동주택 공시가격에 따르면, 서울이 14.75%, 분당이 7.31% 오른 반면 일산은 5.29% 떨어졌다. 그런데 일산에 아파트를 가진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자꾸 ‘팀킬’을 해 일산 주민들의 서운함이 폭등한다. 김 장관은 취임 이후 3기 신도시를 발표해 일산 집값을 떨어뜨렸다는 지탄을 받은 데 이어 며칠 전엔 ‘5억원 이하의 주택을 살 때만 지원하는 디딤돌 대출을 일산에서는 받을 수 있다’고 발언해 일산 주민의 신경을 건드렸다. 김 장관의 주소지인 일산 하이파크시티 아파트 주민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수도권에서 가장 저렴한 아파트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입주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물론 현재의 부동산 판세가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다. 일산 주민들은 출퇴근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줄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가 개통되면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까. 강북은 강남에 박탈감을 갖고, 일산은 분당에 박탈감을 갖고, 지방은 수도권에 박탈감을 갖는 나라는 정상일까. 부동산이라는 불로소득이 모든 소득을 압도하는 이 시대에 너도나도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집값이 오르면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는 걸까. 집은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일산의 눈물이 마르더라도 다른 어딘가에서는 눈물이 비처럼 흘러 내릴 것이다.
  • [서울광장] ‘민식이법’에 가해지는 폭력/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민식이법’에 가해지는 폭력/김상연 논설위원

    미국에 처음 갔을 때 횡단보도의 빨간색 신호등에서 보행자들이 스스럼없이 건너가는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선진국 시민한테서 뭔가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거기서 계속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적응하는 나를 발견했다. 차를 몰 때는 운전자 입장에서 파란 신호등이라도 언제든 보행자가 건너갈 수 있다고 보고 조심하게 된 것이다. 신호등이 없는 좁은 길을 건널 때 차와 ‘밀당’을 하기도 했다. 달려오는 차가 지나간 다음 건너가려고 멈춰 섰는데, 그 차는 멀찌감치서 정차한 채 내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선(先) 차량, 후(後) 보행자 문화’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황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물론 내가 운전자일 때도 보행자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밟고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줬다. 한국에서는 차와 인간이 교통법규상 동등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는 인식이 머릿속을 지배했지만, 미국인들의 행동을 보며 차는 책임을, 보행자는 권리를 더 많이 갖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에 비하면 인간은 지극히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와 충돌하면 천하장사처럼 몸이 단단한 사람이라도 응급실로 직행해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약한 존재다.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약하다. 아이들은 판단력이 떨어지고 천방지축이며 통제하기 힘들다. 일명 ‘민식이법’은 그런 어린이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운전자 처벌을 대폭 강화한 법이다. 그러자 일각에서 처벌이 과도하다며 법 개정을 요구하는 반발이 나왔다. 아무리 조심하며 운전해도 어린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아이를 못 챙긴 부모한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느냐, 생업에 바쁜데 시속 30㎞ 제한은 너무하다, 음주운전 사고와 형량이 똑같은 건 부당하다 등의 불만이다. 특히 며칠 전 민식군의 가해 차량 보험사에 대해 배상책임 90%를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자 또다시 반발이 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불만들은 모두 보행자는 약자, 특히 어린이는 약자 중의 약자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민식이법의 취지는 어린이가 언제든 불쑥 튀어나올 수 있음에 대비해 엉금엉금 기어가듯 운전하라는 것이다. 부모 손을 놓치거나 길을 잃은 아이가 갑자기 도로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운전을 해 보면 시속 30㎞도 급정거하기엔 빠른 속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주운전자와 똑같이 취급되는 게 부당하다는 주장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동기는 다르더라도 부주의에 따른 사고 확률이 높은 건 똑같다. 그리고 민식이법이라고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 운전자의 불가항력적 상황이 입증돼 무죄가 선고된 사례가 최근 나왔다. 미국에서도 어린이 관련 교통법규는 가장 강력하다. 거의 모든 주에서 스쿨버스가 멈춘 뒤 문이 열리면 아무리 넓은 도로라도 모든 차가 일제히 멈춰야 한다. 중앙분리대가 없으면 반대편 차선의 차들까지 올스톱해야 한다. 심지어 대통령이 탄 차도 예외 없이 서야 한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법이 만들어졌다면 반발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100개도 넘게 올라왔을 것이다. 사실 운전자들은 민식이법에 고마워해야 한다. 어린이를 치어 숨지게 한 운전자는 강력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민식이법 덕분에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조심해 사고율이 떨어지면 운전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민식이법 이전에 대부분의 차가 어린이 보호구역을 무시하고 쌩쌩 달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에서 차를 끌고 나오면 반드시 어린이 보호구역을 지나가도록 돼 있다. 어린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상황에 대비해 내 발은 대부분 브레이크 위에 있다. 속도계를 보면 시속 10㎞대를 넘지 못한다. 그렇게 해도 ‘생업’ 걱정할 필요 없이 금세 통과한다. 얼마 전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 위태롭게 걷는 아이를 앞세우고 어린이 보호구역의 인도 위를 걷는 한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려 다른 주민과 뭔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넘어진다 해도 내 차에 닿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한 마음에 차를 세우고 내려 “아이 손 좁 잡아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엄마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썩 유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아이 손을 잡는 것이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떠나는데 불쾌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한없이 강하고, 길가의 어린이는 한없이 약하니까.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쌍십일/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쌍십일/김상연 논설위원

    미국에서 매년 11월 넷째주 금요일은 연중 최대 할인행사와 대규모 쇼핑으로 떠들썩한 날이다. ‘블랙 프라이데이’로 불리는 이날 부지런을 떨면 고가의 새 전자제품을 아주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 잠도 안 자고 줄을 서는 사람이 많다. 특히 중국 유학생들이 목숨 걸듯 쇼핑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드디어 중국도 ‘중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를 만들어 냈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이맘때쯤이면 화제가 되는 광군제(光棍節)다. 매년 11월 11일인 이날은 얼핏 들으면 중국 역사의 거창한 황제를 기념하는 날 같지만, 그 뜻을 알고 나면 좀 허탈해진다. 광군제의 한국식 발음은 ‘광곤절’이다. ‘곤’은 몽둥이를 뜻하는데, 연인이 없는 싱글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몽둥이 모양, 그리고 숫자 1과 비슷하다고 해서 11월 11일에 광군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상형문자를 발명한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한국에서 연인들이 11월 11일을 길쭉한 모양의 과자 이름을 따서 ‘빼빼로데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광군제는 ‘싱글들의 날’이다. 다만 광군제는 ‘광’이라는 글자를 ‘몽둥이’ 앞에 배치함으로써 철학적 깊이를 가미했다. ‘빛나는 싱글’이라…, 싱글은 외로운 것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형용모순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광군제 대신 ‘11’자 2개가 나란히 있다는 뜻으로 ‘솽스이’(?十一)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고 한다. 한국식 발음으론 ‘쌍십일’이다. 광군제는 원래 1990년대 초 중국의 일부 대학에서 여자친구가 없는 남학생들이 모여 술 마시고 노는 날로 시작됐는데, 2009년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마윈 대표가 쇼핑으로 외로움을 극복하자며 할인 이벤트를 시작한 이래 쇼핑 축제일로 변모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경제의 규모가 커진 지금은 광군제의 온·오프라인 총거래액이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의 그것을 훌쩍 넘어서 세계 최대 쇼핑의 날로 발돋움했다. 알리바바는 지난 1일부터 시작한 할인 행사로 11일 0시30분 현재 우리 돈으로 63조원어치나 팔았다. 주택 80만채도 판매되는 등 블랙 프라이데이의 규모와는 차원이 다르다. 샤넬, 디오르 등 유럽 명품 브랜드와 삼성, LG 등 한국 기업들도 가세해 매출을 올린다니 코로나19로 휘청거린 중국과 세계 경제에 광군제가 효자 노릇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외로운 싱글들이 본의 아니게(?) 세계 경제에 기여하게 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신종 기념일인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등은 모두 연인들을 위한 날일 뿐 싱글들을 위한 날은 없다. 한국의 싱글들은 다 뭐하고 있나. 전국의 싱글들이여 단결하라!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큰누나/김상연 논설위원

    학교에서는 ‘형’을 영어로 ‘올더 브러더’(older brother), ‘동생’을 ‘영거(younger) 브러더’라고 배웠지만, 실제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나이에 민감하지 않은 그들은 그저 ‘브러더’라고만 하거나 굳이 형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빅(big) 브러더’, 동생은 ‘베이비(baby) 브러더’라고 한다. 베이비 브러더…, 너무 귀여운 말이다. 미국인들은 누나도 ‘빅 시스터(sister)’라고 하는데, 우리말에도 ‘큰누나’가 있어서 그런지 정감이 간다. 나중에 어머니가 세상에 안 계시는 막막한 날이 오면 누가 ‘어머니 대행’을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큰누나가 떠올랐다. 큰누나는 어릴 때도 어른스러웠고 나이 들어서도 어른스럽다. 큰누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탐진치(貪瞋癡)로부터 초월해 있는,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사이에 있는 중간자적 존재 같다. 한편으로는 장녀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평생 큰누나를 옥죄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큰누나가 며칠 전 감자 샐러드를 만들어 보내 줬다. 큰누나한테는 다 큰 동생이 여전히 ‘베이비’ 같은지 이것저것 챙겨 주려 한다. 큰누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진지하게 하고 싶은데 살가운 ‘베이비 브러더’ 역할이 여전히 힘들다.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미국의 사전투표 열기/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미국의 사전투표 열기/김상연 논설위원

    한국에서 사전투표는 기존 부재자투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부재자투표는 사전에 부재자 신고가 필요하고 시·군·구 단위로 투표소가 설치된 반면 사전투표는 사전에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투표소는 읍·면·동마다 설치된다. 투·개표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편리한 사전투표를 가능케 했다. 올해 4월 치러진 21대 총선 사전투표율은 26.69%로 전국 선거에 사전투표가 도입된 201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사람이 많이 몰리는 선거 당일을 피하려는 심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마침 이런 현상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11월 3일(현지시간) 미국 대선의 사전투표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선거 예측 사이트인 ‘미국 선거 프로젝트’에 따르면 미국 동부 시간으로 2일 오후 기준 9650만여명이 사전투표를 마쳤다. 그중 우편 투표자가 6113만여명, 현장 투표자가 3537만여명이다. 이런 추세라면 전체 투표자 대비 사전투표자는 60%를 넘을 전망이다. 선거 당일보다 사전에 투표한 유권자가 더 많았다는 얘기다. 기존의 최고 사전투표율이 4년 전 대선 때의 42%였다는 점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증가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코로나19로 분석됐다. 그런데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사전투표율이 급등한 건 오로지 코로나19 때문이었을까. 혹시 유권자들의 표심이 일찌감치 정해진 게 ‘선거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미리 찍자’는 열기로 나타난 건 아닐까. 이념과 진영의 골이 갈수록 깊이 파이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골치를 앓고 있는 현상이다. 기성 언론 다수가 좌우로 쪼개진 데 더해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와 팟캐스트 등을 통해 유권자들이 자기가 접하고 싶은 뉴스만 접하면서 양측 간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영악한 알고리즘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바쁘다. 그러니 둘로 갈린 유권자들로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사전투표를 선호하는 건 아닐까. 미국의 확증편향 현상이 더욱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민간인이 총기를 소지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부터 미국은 ‘선거 결과 불복’과 ‘물리적 충돌’ 등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다. 백악관에도 폭동을 우려해 외벽이 새로 설치됐을 정도다. 땅덩어리가 넓어 개표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주마다 선거 제도가 조금씩 다르고 관리 감독이 허술하다는 점도 선거 후 ‘카오스’를 우려케 한다. 민주주의 꽃인 선거가 자칫 민주주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위기에 처한 게 지금 미국의 현주소다.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007 시리즈/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007 시리즈/김상연 논설위원

    영화 ‘007 시리즈’는 단순히 영화가 아니라 문화현상이다.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007 가방’이나 ‘007 작전’ 같은 단어를 보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끼친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둥그렇게 둘러앉아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면 양옆의 사람이 죽는 시늉을 하는 ‘007 빵’이라는 놀이도 있었다. 007은 영국 해군 정보부 중령 출신인 작가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2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영화 시리즈다. 007이란 명칭은 영국 첩보기관인 MI6 소속 첩보요원의 코드네임으로, 앞의 숫자 00은 상관의 지시 없이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적을 죽일 수 있는 권한(살인면허)을 의미한다. 영화 스토리가 시작되기 직전 말쑥한 양복 차림의 주인공이 무심하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관객 쪽으로 몸을 돌리며 권총을 겨누는 장면, 그리고 존 베리가 작곡한 메인 테마곡은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뀐 지금 보고 들어도 여전히 짜릿할 만큼 세련미가 넘친다. 제작은 영국 영화사와 미국 영화사가 합작으로 하지만, 주인공인 007(제임스 본드) 역할만큼은 영연방 출신 배우를 캐스팅하는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이 영화 시리즈의 초대 007역을 맡은 배우가 지난달 31일 90세로 별세한 숀 코너리다. 잘생긴 얼굴에 빼어난 슈트핏, 깔끔한 매너와 섹시한 미소, 그리고 어떤 위기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007의 매력은 거의 전적으로 코너리의 명연기에 빚지고 있다. 현재까지 6명의 007 주인공이 나왔지만 3대 제임스 본드인 로저 무어(2017년 89세로 별세) 이후의 주인공들은 007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배우들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차라리 톰 크루즈가 1996년부터 주연한 영화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이 더 007 영화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구상의 스파이 영화는 어떤 영화든 결국은 007의 아류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25편의 007 영화들 속에서 주인공인 본드가 죽인 악당은 360명이 넘는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살인면허를 연기한 배우들한테서 살기(殺氣)는커녕 훈남의 풍모가 느껴진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아버지와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코너리는 가족의 생계를 돕고자 학교를 중퇴한 뒤 우유배달을 하고 철강공장에서 일했지만 그의 얼굴에서 삶의 찌든 때는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에는 “나이 들어 더 멋진 배우”, “코너리처럼 늙고 싶다”라는 영화팬들의 선망 어린 애도가 넘친다. 007의 매력이 늙어서도 빛을 발하리라고는 58년 전 이 영화를 시작했던 제작자들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 [길섶에서] 자존심/김상연 논설위원

    “무슨 자존심이 그렇게 강합니까. 그냥 내려놓으세요.” 몇 년 전 배가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노년의 의사는 내 얼굴을 슬쩍 보고 청진기를 가슴에 대보더니 이렇게 철학적인 진단을 내렸다. 의학용어를 예상하고 있던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의사는 계속 뜬금없는 진단을 이어간다. “여기 병원 입구에 쓰레기통 있죠? 나는 출근할 때 거기에 자존심 같은 거 모두 버리고 들어옵니다. 그 많은 환자와 간호사를 상대하며 일하는데 일일이 자존심 따지면 내가 어떻게 살겠어요?” 그는 며칠치 약을 처방해 주면서도 약보다는 자신의 ‘말 처방’이 더 중요하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환자가 줄지어 선 병원을 나오면서 보니 입구에 정말 쓰레기통이 있었다. 그 후로도 내 성격은 잘 고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속이 아플 때는 ‘내가 또 자존심을 부리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 통증이 사라졌다. 얼마 전 모처럼 그 병원 근처를 지나가다 병원 건물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알아 보니 그 의사가 은퇴해서 병원이 폐업됐다고 한다. 그가 명의가 아니었다면 나는 또 아파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평생을 자존심과 싸워 온 그 의사의 노후가 이제 그만 편안하기를 평생을 자존심과 싸우고 있는 ‘전직 환자’가 기도한다.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크리스토퍼 크로스/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크리스토퍼 크로스/김상연 논설위원

    미국 가수 크리스토퍼 크로스의 노래 ‘아서의 테마’를 들으면 윤이 반짝반짝 나는 구두와 멋진 재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린 뒤 외출하고 싶어진다. 고급스러운 선율과 가사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뉴욕’이라는 단어, 크로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우러져 ‘사치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 같다. 육중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미성의 소유자인 크로스는 1979년 혜성같이 등장해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는 청춘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노래들을 선물했다. 크로스는 아서의 테마에서 ‘사랑(달)과 출세(뉴욕) 중 무엇을 택할지를 놓고 고민스러울 때 최선의 선택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주문처럼 반복함으로써 부박한 세태에 일격을 가했다.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내과의사의 아들로 유복하게 태어난 크로스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다분했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1979년에 낸 데뷔 앨범으로 그래미상 5개 부문을 석권하는 경이로운 역사를 썼으며 아서의 테마로 아카데미 주제곡상까지 거머쥔다. 그로부터 강산이 네 번 바뀐 20일(한국시간) 심각한 정치 뉴스 일색이던 CNN 방송에서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아서의 테마가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앵커인 에린 버넷(44)은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한 뒤 크로스를 화상 통화로 연결했다. 인터뷰를 위해 화면에 등장한 크로스는 놀랍게도 초췌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올해 69세인 크로스는 지난 3월 멕시코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로 내 생애 최악의 열흘을 보냈으며, 저승 문턱에까지 다녀왔다”고 토로했다. 온몸에 마비 증상이 와서 걸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했다. 3주간의 투병 기간을 보낸 뒤 지금은 지팡이를 짚고 마트에 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지만 언어 능력과 기억력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겪은 일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게 의무라고 생각해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며 “코로나19는 심각한 병이다. 마스크를 쓰고 조심해야 한다. 누구든 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위태롭게 길을 걷는 화면 속 그의 모습에서 왕년의 카리스마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젊어서 영원한 사랑을 설파했던 팝의 구루(guru)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무너져 내린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치 우리의 청춘과 사랑마저 훼손된 듯하다. 그래도 지금 백신은 구루의 노래밖엔 없는 것 같다. 이 역병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 [서울광장] 화투판 경제/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화투판 경제/김상연 논설위원

    고매하신 경제학자들한테는 불경스럽게 들리겠지만 경제는 화투판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투판에서 실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 돈을 모두 땄다고 하자.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돈을 챙겨 집으로 가는 것과 개평을 나눠 주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하면 화투판은 종료되고, 후자를 택하면 화투판은 계속 돌아간다. 현실 경제에서도 능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 많은 돈을 번다. 그렇게 부자가 된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이 안 나오면 경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은 거부는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게이츠는 매년 천문학적인 돈을 기부한다. 그럼에도 그의 부는 갈수록 늘어난다. 버핏은 자신 같은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으라고 정부에 촉구한다. 토마 피케티의 역작 ‘21세기 자본’을 한 줄로 요약하면, 역사적으로 전쟁(1, 2차 세계대전)이 났을 때만 빼고 빈부격차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에 따른 파괴, 누진적 소득세 도입, 연평균 3%의 고성장 등으로 1914~1945년에 불평등이 개선됐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으니 정부가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그런데 1914~1945년의 예에서 보듯 고소득층 중과세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경제성장이 병행돼야 빈부격차를 제대로 줄일 수 있다. 돈이 돈을 버는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으면 자본을 많이 가진 부자들의 부는 가만히 있어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이 거의 멈춘 시대에 살고 있다. 성장이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말하는 경제학자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지금은 중앙권력이 슈퍼맨처럼 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성장을 자극하는 정책이 대세가 됐다. 심지어 수십년을 반목해 온 케인스주의(정부의 재정지출)와 통화주의(중앙은행의 통화정책)가 의기투합해 쌍끌이에 나서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판돈 자체가 줄면 외부에서 돈을 수혈해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는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소신을 세 차례의 양적완화로 실천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연준이 2014년까지 양적완화로 시장에 푼 돈은 무려 4조 5000억 달러에 달한다. 올해 3월 코로나19로 경제가 휘청하자 현 연준 의장인 제롬 파월 역시 “우리는 빚을 창출할 수 있다”며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를 거침없이 꺼냈다. 국민들에게 일정액의 돈을 나눠 주는 개념의 ‘기본소득’도 성장이 멈춘 시대에 판돈을 외부에서 투입하는 고육지책이다. “사회주의 아니냐”고 지적해도 반박할 도리가 없어 보이는 이 개념에 민주당 소속 이재명 경기지사는 물론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동의를 표한 건 현실성 여부를 떠나 지금 시대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보여 준다. 대표적 자본주의 기업가인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도 기본소득에 찬성할 정도다. 이렇게 보면 극렬한 정쟁의 와중에도 4차 추경을 여야 합의로 기한 내에 처리한 것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그 과정에서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줄 것이냐(경기부양 개념) 취약계층에게만 줄 것이냐(복지 개념), 통신비로 줄 것이냐 다른 방식으로 줄 것이냐의 논쟁이 일어난 건 모처럼 수준 높은 정치였다. 반면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놓고 ‘베네수엘라식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거나 통신비 2만원씩을 코 묻은 돈처럼 나눠 줄 바에는 국고에 아껴 둬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지금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시대착오적 사고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100%대)보다 한참 낮은 한국(40%대)이 베네수엘라라면 다른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전에 베네수엘라가 됐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돈을 나눠 주면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알코올중독과 노름에 빠질 것이라는 주장도 국민을 단세포 수준으로 얕잡아 보는 오만한 발상이다. 특히 취약계층 대상 복지가 게으름을 유발한다는 우려는 기우라는 사실이 멕시코의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인 ‘프로그레사’ 등 여러 사례를 통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해 돈을 뿌리는 것은 포퓰리즘이다. 역으로, 써야 할 돈을 쓰면 안 된다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선동하는 것도 포퓰리즘이다.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먹방/김상연 논설위원

    아무리 ‘바보상자’의 노예로 살지언정 ‘먹방’만은 보지 않기로 결심한 지 꽤 됐다. 남이 음식을 먹는, 지극히 원초적인 장면을 입을 헤벌쭉 벌리고 시청하는 내 모습이 한심해서다. 먹방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서 채널을 건너뛰기 쉽지는 않지만 신속하게 리모컨을 돌려 가며 그런대로 결심을 실천해 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동물의 세계’를 시청하던 중 사자가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보는 나를 발견했다. 가만있어 봐라. 이것도 먹방 아닌가. 인간 먹방을 차단하자 동물 먹방으로 쏠리는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먹방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유튜브 채널 상위권도 대부분 먹방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 말고도 먹방에 끌리는 인간들이 많다는 얘기다. 사실 기나긴 진화의 시간에서 인간이 지금처럼 문명 생활을 한 기간은 극히 짧다. 대부분의 인류사에서 인간의 삶은 ‘먹는 것’이었다. 지금 동물들이 하루 종일 뭐하며 지내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먹방에 볼모 잡힌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 말자. 그저 진화의 먼 궤적을 추억할 뿐이라고 위안하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시 먹방을 보겠느냐고? 안 볼 것이다. 슬기로운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carlos@seoul.co.kr
  • [씨줄날줄] 남편 리스크/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남편 리스크/김상연 논설위원

    톨스토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는 말을 선뜻 수용할 수 없다. 행복한 가정도 제각각의 모습이지 않을까. 다시 말해 모든 가정은 행불행을 막론하고 모습이 저마다 다르지 않을까.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래서 ‘부부의 일은 그 부부만 안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남편이 요트를 사러 미국 여행을 떠난 것은 비판받을 만했다. 국민에게는 여행을 자제하라고 해놓고 정작 모범을 보여야 할 공직자의 가족은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부부가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전제 아래서 더 정합성을 갖는다. 만약 부부가 이심이체(二心異體)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직자의 배우자가 생각이 달라 여행을 떠나려 한다면 완력을 써서 주저앉힐 수도, 가택연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강 장관도 이런 속사정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 7일 국정감사장에서 “남편을 만류했어야 했다”는 야당 의원의 추궁에 “제가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고요”라고 토로했다. 그 솔직한 답변에 장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은 “배우자께서 다분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며 “솔직히 측은지심이 든다”고 했다. 국민들도 ‘부부간의 일은 부부만 안다’는 쪽을 유념하는 것 같다. 한 여론조사에서 ‘강 장관 남편의 미국 여행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52.5%)는 의견이 찬성한다(34.5%)는 의견보다 많이 나왔다. 사실 피를 나눈 부모 형제도 일심동체일 수 없듯 부부 역시 일심동체일 수는 없다. 단지 일심동체를 지향할 뿐이다. 지난해 과도한 주식 투자로 논란을 빚은 이미선 헌법재판관 부부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 재판관의 남편이 보유 주식을 전부 처분하겠다는 서약서까지 써놓고 임명 1년도 안 돼 해외주식 1억 6306만원어치를 새로 사들인 사실이 7일 확인된 것이다. 이 역시 이 재판관은 반대했는데 남편이 밀어붙인 이심이체 케이스일까. 고위 공직자가 남성 일변도였던 시절엔 ‘아내 리스크’가 회자됐지만, 여성 공직자가 늘어난 지금은 ‘남편 리스크’도 나타나고 있다. 조금 다른 건 남편들은 뻔히 논란이 될 만한 일을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만약 공직자의 아내였다면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끝내 ‘마이 라이프’를 관철했을까. 그리고 공직자의 아내가 그렇게 했다면 국민의 이해심도 공직자의 남편에게 베풀어지는 만큼 너그럽게 발현됐을까. 남녀를 바라보는 편견은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섭다.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일상의 반복/김상연 논설위원

    군대에서 전역한 직후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경제적 이유 외에도 ‘철이 들었음’을 공인받으려는 호기가 작용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흘(4일이 아니라 3일이라는 뜻) 만에 근육통, 관절통 등 온갖 통증으로 앓아누웠다. 번 돈보다 병원비가 더 들어갔다. 그런데 노동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건 정신적 지루함이었던 것 같다. 첫날 주어진 일은 온종일 1층의 벽돌을 지게에 지고 2층으로 나르는 것이었다. 점심 때 쉬면서 오후에 똑같은 일을 반복할 걸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아, 인간의 건축물이란 무수한 반복 끝에 완성되는 거구나.’ 건설 노동자들의 인내심이 존경스러웠다. 살다 보니 모처럼 연락이 닿는 지인들의 일상이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도 놀랍다. 오랜 세월 똑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나도 크게 보면 달라진 게 없는 일을 하며 산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어떻게 지내?” “나? 나야 늘 똑같지 뭐.” 세상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현재의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산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이 세계는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 [씨줄날줄] 진격의 K9 자주포/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진격의 K9 자주포/김상연 논설위원

    국산 무기 ‘K9 자주포’의 한자를 자주(自主)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스스로 움직인다는 의미의 자주(自走·self-propelled)다. 역사적으로 대포는 한 곳에 고정돼 있거나 인간이 끌어서 이동시켜야 했지만, 자주포는 엔진을 갖춘 차량에 장착돼 움직인다는 점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도 차량을 운전하는 건 인간인데 마치 포에 발이 달린 것처럼 의인화한 데서 작명가의 문학적 소양이 엿보인다. 자주포는 탱크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역할은 다르다. 탱크가 최전선에서 직사포를 쏘며 돌격한다면 자주포는 후방에서 곡선으로 포를 쏘아올린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자주포의 포신이 탱크의 그것보다 길고 크다. 한화디펜스가 만드는 K9 자주포가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수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호주가 최근 K9을 수입 계약(1조원 규모)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것이다. K9은 한국산 무기 중 유일한 세계 수출 1위 품목이며, 2000년 이후 세계 자주포 수출 시장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을 만큼 압도적이다. 1위 비결은 가성비다. 품질이 좋으면서 가격도 비싸지 않다. 2위인 독일산은 일부 성능에서는 K9보다 낫지만 고장이 잘 나고 가격이 2배 이상 비싸다. 1999년 납품을 시작한 K9이 처음부터 ‘명품 자주포’였던 것은 아니다. 2010년 고장과 사고, 납품 비리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다. 이에 회사 수뇌부는 문제가 된 장면들을 일일이 촬영해 회의를 열었다. 자기가 만든 자주포가 사고를 내는 영상을 보고 속상해 눈물을 흘리며 자책한 직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임직원 80여명이 사표를 냈고, 전사적인 품질관리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졌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 전문 조사 기관인 ‘JD파워’의 분석 기법을 적용할 경우 K9의 2018년 사고율(VDS)은 대(문)당 0.2로, 웬만한 고급 승용차 사고율보다 낮다고 한다. 실제 K9에 탑승해 보면 육중한 덩치(47t)에 궤도형 바퀴로도 승용차만큼 빠른 속도로 코너링을 완벽하게 하는 걸 체감할 수 있다. 개발자들의 희생도 있었다. 1997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시험장에서 화력 성능 시험을 하던 중 자주포 뒷문에 불이 나면서 내부에 있던 직원(당시 34세 정동수 대리)이 화상을 입고 숨졌다. 대포 소리에 청력을 잃은 개발자도 숱했다. 이런 역사를 알고 보면 K9의 가치를 1조원이니, 2조원이니 하며 돈으로 따지는 것은 경망스럽다. K9은 제조사와 120개 협력사, 정부가 합심해 이뤄 낸 열정의 결정체다. 그들이 쏟은 피와 땀, 눈물의 총량을 헤아리는 건 신의 영역이지만, 거기에 경의를 표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 [씨줄날줄] 온라인 유엔총회/김상연 논설위원

    [씨줄날줄] 온라인 유엔총회/김상연 논설위원

    미국 뉴욕 유엔본부 내 유엔총회장을 몇 해 전 처음 들어가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기자석에서 내려다보는 회의장의 크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이다. 한국 국회의 본회의장보다 작아 보였다. ‘이렇게 작은 곳에서 전 세계의 현안이 논의되다니’라는 생각에 한참을 감상에 젖었다. 회의장은 작지만 유엔총회가 열리는 매년 9월이면 세계 각국에서 외교관과 정상들이 몰려들어 북적북적하다. ‘외교의 슈퍼볼’로 불리는 유엔총회야말로 다자외교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맘때 뉴욕 맨해튼의 호텔에 묵으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올해 유엔총회는 코로나19로 예년보다 썰렁한 분위기다. 대부분의 각국 정상과 외교장관 등은 이미 올해 뉴욕행을 포기했다. 유엔본부에 들어가려면 미국 입국 후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엔총회엔 현재 뉴욕에 주재하는 각국 유엔대표부 대사들만 참석할 전망이다. 그리고 총회의 하이라이트인 각국 정상의 연설은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대체된다.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화면을 통해 연설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별도의 다양한 부대행사도 올해는 모두 화상으로 열린다. 75년 역사의 유엔이 졸지에 ‘사이버 국제회의’가 된 것이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각국 정상 중 유일하게 유엔총회에 직접 참석해 연설에 나서는 프리미엄을 누릴 전망이다. 미국 대통령은 자가격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유엔총회장 연단에 선 트럼프 대통령이 무주공산의 좌석을 내려다보며 스스로를 세계 유일의 정상이라고 잠시라도 착각할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셀프 칭찬, 과대포장의 대가인 그가 올해는 어떤 자화자찬을 늘어놓을지도 관심이다. 2년 전 유엔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못 말리는 자화자찬으로 다른 나라 참석자들을 웃겼고, 그 웃음소리에 자신도 머쓱하게 웃으며 혀를 내밀자 폭소와 박수가 터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각국 정상에게 기업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이 요구되면서 정상들이 직접 외교전을 벌이는 다자회의체가 최근 늘었다. 정상은 움직일 때마다 의전과 경호에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단박에 그런 흐름을 끊어 버린 것이다. 물론 온라인 회의보다는 직접 만나는 게 친분을 다지고 밀담을 나누는 데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비용이 거의 안 드는 온라인 회의만으로 세계가 꾸역꾸역 굴러가는 것도 사실이다. 미래에 언젠가는 작은 유엔총회장마저 필요 없는 날이 올 수도 있을 듯하다.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뭔가를 알려 주는 것도 같다.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엉뚱한 상상/김상연 논설위원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지구상의 인류가 모두 사라지고 나만 혼자 남는 것이다. 사람만 없을 뿐 생활 시스템은 그대로 누릴 수 있다. 뭐부터 할까. 우선 값비싼 자동차 매장에서 최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나와 최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산해진미를 맛본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 가서 고가의 멋진 옷들을 입어 본다. 그리고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프리미엄 순면 100수 이불을 덮고 잔다. 이렇게 하면 과연 나는 행복할까. 아닐 것 같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앞날이 막막하고 공포감이 엄습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행복이란 다른 인간의 존재에 기반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타인이 있어야 나의 삶이 성립되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싫어 세상을 등지고 산에 들어간 ‘자연인’도 저 멀리 속세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상상으로 돌아가 보자. 홀로 남겨진 당신이 터벅터벅 대도시 한복판을 걷고 있다. 그때 거짓말처럼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당신 외에 유일하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는 아직 당신을 보지 못했다. 당신은 그를 외면할 수도 있고 달려가 반갑게 악수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carlos@seoul.co.kr
  • [서울광장] 진중권과 김제동/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진중권과 김제동/김상연 논설위원

    개그맨 김제동씨를 직접 본 건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2012년 미국 메릴랜드대학 강당에서였다. 한국 정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으로 확인된 김씨를 취재하기 위해 특파원들의 경쟁이 붙었다. 김씨는 유학생 등을 대상으로 토크쇼를 하며 미국을 순회 중이었다. 토크쇼 무대 위에 선 김씨는 달랑 마이크 하나 쥐고 무려 2시간 동안 입담을 과시했는데,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웃어 본 적은 없다. 그야말로 그는 천부적인 개그맨이었다. 신이 천상의 목소리를 모차르트를 통해 인간에게 들려준다면, 천상의 유머는 김씨를 통해 인간에게 들려준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취재 본분을 잊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개그쇼가 끝나고 무대 뒤에서 만난 김씨에게서 방금 전 무대 위의 카리스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연신 숙이며 “저같이 보잘것없는 사람 얘기가 무슨 뉴스가 되느냐”며 말을 아꼈다. 기삿거리가 될 만한 말을 좀처럼 안 하는 걸 보면 그런 상황이 부담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시종 만면에 웃음을 띤 것을 보면 그런 상황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씨를 직접 본 적은 없다. 나는 그를 매스컴이 아닌 책을 통해 먼저 만났다. 그가 쓴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 그를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금세 빠져들 만큼 그의 책은 흡인력이 있다.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장, 차원이 다른 스토리텔링은 미술이라는 따분한 주제를 ‘해리 포터’ 같은 판타지성 드라마로 변신시켰다. 진씨와 같은 유능한 미학자가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하지만 진씨는 미학자로 책만 쓰고 있기엔 재능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매스컴에 갈수록 자주 등장했고 정치 관련 발언을 늘려 갔으며 진보정당 활동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정쟁의 한복판에 등장한다. 그가 전에 ‘오른쪽 ’을 주로 비판할 때는 ‘왼쪽 언론’의 고객인 것처럼 보이더니 ‘왼쪽’을 주로 비판하는 요즘엔 ‘오른쪽 언론’의 고객이 된 듯하다. 김씨와 진씨가 정치와 깊숙이 연결될수록 나의 상실감은 커져 갔다. 김씨는 이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볼 기회가 거의 없는데, 그건 많은 국민이 웃을 기회를 그만큼 잃었다는 얘기다. 진씨는 정치적 발언을 키워 가는 와중에도 전공과 무관하지 않은 책을 펴내는 모습이지만, 정치적 이미지가 강해져서인지 그의 책에 손이 잘 안 간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다. 때로는 진씨나 김씨처럼 비(非)직업 정치인이 직업 정치인보다 더 예리한 식견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언행에서 통렬함보다는 비애를 느낀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이 나라 정치는 이미 ‘공급 과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굳이 말을 더 보태지 않더라도 충분히 피곤할 만큼 너무 많은 말이 난무하는 게 작금의 정치판이다. 수익 구조를 잃은 정치에 천부적인 개그맨과 천재적인 미학자를 빼앗기는 건 국민적 손실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비직업 정치인들이 정치적 언행을 한다. 조지 클루니 같은 할리우드 배우는 때로 과격한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비직업 정치인이 거의 상시적으로 정쟁의 주공격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는 걸까. 왜 한국에선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태두들이 굳이 정치에 뛰어들어 오물을 뒤집어쓰는 걸까. 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으로 성공한 이공계 전문가는 하루아침에 유력 대선주자가 돼야 하는 걸까. 왜 자영업자들에게 꿈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요리 전문가는 느닷없이 대선후보감으로 회자되는 걸까. 왜 코로나19 퇴치에 공을 세운 간호사는 반드시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 걸까. 왜 정치인들을 벌벌 떨게 만들 힘을 가진 어느 검사와 판사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안달인 걸까. 왜 시중의 중후장대와 경박단소를 두루 다뤄야 할 언론인은 대통령과 중앙정치를 비판해야만 스스로를 그럴듯한 언론인으로 여기는 걸까. 왜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개그맨과 미학자는 국민의 절반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으며 정쟁의 한복판에서 싸워야 하는 걸까. 도대체 왜 한국인의 궁극은 정치여야 하는 걸까. 혹시 사농공상의 신분제 아래서 과거 급제로 중앙의 관직을 얻어야 가문의 영광이라는 조선시대의 DNA가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 슬픈 일이다. carlos@seoul.co.kr
  • [길섶에서] 병문안/김상연 논설위원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뿐만 아니라 무릎연골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어머니가 지난주 무릎수술을 받았다. 어머니는 재활기간까지 꼬박 한 달을 입원해 있어야 한다. 자식 입장에선 모처럼 병문안이라는 가시적 효도를 통해 평소의 불효를 만회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병문안이 쉽지 않다. 점심과 저녁 때 2시간씩만 면회가 허용되고 그나마도 동시에 한 명만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 병원 후문에서 전화하면 간병인이 나와 교대하는 식이다. 언제 한번은 간병인한테 전화 연결이 안 돼 면회도 못 하고 쓸쓸히 발길을 돌린 적도 있다. 방문 사유서 작성과 발열체크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겨우 어머니를 면회해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다. 혹시 내가 어디선가 바이러스를 묻혀 와서 어머니한테 옮기는 건 아닌지. 이쯤 되면 병문안을 가는 게 효도인지, 안 가는 게 효도인지 고민이다. 환자복에 마스크를 쓴 어머니와 비(非)환자복에 마스크를 쓴 아들의 대화 주제도 ‘바이러스’다. 서로 상대방 얘기는 안 듣고 자기가 준비한 얘기를 하느라 바쁘다. “엄마, 안 씻은 손을 무심코 입에 가져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얘야, 마스크 꼭 쓰고 다니고 절대 사람 많은 데 가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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