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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재는 제 자리 있을 때 최고의 가치” “저자세 외교 버리고 문화주권 행사를”

    “문화재는 제 자리 있을 때 최고의 가치” “저자세 외교 버리고 문화주권 행사를”

    지난해 10월 일본 대마도에서 국내 반입된 서산 부석사관세음보살좌상 등 국보급 불상 2점의 환수를 촉구하는 토론회가 30일 오후 ‘서산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봉안위원회’(봉안위) 주최로 한국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실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이들 문화재 환수를 둘러싼 양국 국민 감정이 악화되면서 반환이 답보상태라는 사실에 착안, 실효성 있는 반환 운동에 나설 것을 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주제발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한다. ●주경 스님(조계종 기획실장)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를 드러내고 종교적으로도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을 갖고 세상의 모든 구석진 곳을 다 살피는 자비의 화신이다. 700년전 서산 부석사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주조하고 극락전에 모셨던 조상들도 똑같은 발원을 했다는 사실이 일본에 남아있는 복장기에 분명하게 기록돼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유훈과도 같은 그 발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서산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은 본 자리인 서산부석사로 돌아와야 한다. ●김원웅 봉안위 공동대표(전 국회의원) 1965년 박정희 정부 당시 체결된 한일조약에 따라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를 일본 소유로 인정했다.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이 불평등한 한일조약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찾기가 한일조약을 재체결하기 위한 국민운동에 시동을 거는 문화운동의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 일본 측이 부석사 불상의 정당한 소장경위를 밝히지 못한다면 되돌려줄 수 없다. 우리 정부도 저자세 외교를 버리고 당당하게 문화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김경임 중원대 교수(전 튀니지 대사) 부석사 불상 문제는 오래전 약탈된 문화재가 절도라는 범죄를 통해 원 소유국에 돌아온 국제적으로도 희소한 케이스다. 원만한 해결에 도달해 국제적으로 전범을 세울 필요가 있다. 약탈이 증명된 경우 불법 문화재를 일본 문화재로 등록해 소유한 데 대해 피약탈국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불상 반환에 조건을 붙이는 등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약탈 문화재임을 증명하지 못한 경우에도 이 불상 반환에 앞서 일본정부에 대해 출처를 정식 요구할 수 있다.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교수 현재 대마도에 있는 조선 불상은 거의 화상을 입은 것이고 화상을 입지 않은 것은 당시 고가품으로 교토나 오사카로 방출된 것이라는 데 연구자들은 일치하고 있다. 화상을 입은 것은 왜구의 약탈품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한·일 양국의 교류품은 기증 시기와 주체와 관련한 문헌이 있다. 반면 화상 입은 불상은 아무 증거가 없다. 왜구가 방화하고 약탈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지운 스님(수덕사 주지) 일본 대마도에서 불상이 돌아온 후 도처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일본인들은 반한시위를 하는 등 몰상식한 행위까지 한다. 우리는 불투도(不偸盜)를 계율로 삼는 수행자로 범죄행위에 단호해야 하지만 불망언(不妄言)을 일삼는 행위에도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봉안위 조사에 따르면 일본엔 불상이 방치되고 대세자보살은 불두만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표기조차 잘못돼 있다. 현재 나타난 결과만 따져도 참회가 우선일 것이다. ●이명수 새누리당 국회의원 19대 국회와 새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현 시점에서 전 국민적 공감을 높이고 미래 담론 형성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문화재환수국회포럼’을 결성할 것을 제안한다. 18대 국회에서 추진했던 ‘약탈문화재환수특별위원회’ 구성도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 특위가 구성되면 민간단체, 지자체, 교민 등의 자발적인 활동 결집에 용이할 것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조선의 혼’ 사직단 원형 복원, 아직도 예산 타령만

    왕실이 토지와 곡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 복원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적 121호인 사직단은 올 초 문화재청에 의해 땅의 용도가 공원에서 사적지로 뒤늦게 바뀌었으나, 예산 부족을 이유로 원형 회복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조선의 500년 수도인 한양을 상징하는 ‘종묘사직’ 가운데 경복궁 동쪽의 종묘와 종묘제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지만 대칭점에 자리한 경복궁 서쪽의 사직단은 일제시대 이후 명예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사직대제는 삼국시대 이후 국가의 명운과 평안을 기원하며 땅과 곡식의 신에게 지낸 제사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자취를 감췄고 사직단은 빈터로만 남았다. 1922년 일제는 종묘사직의 맥을 끊으려고 사직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해 지위를 격하했고 사직단 부속시설도 철거했다. 1932년에는 대지 일부가 교육시설로 잘려 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잦은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문이 두 차례나 옮겨졌고 그 자리에 도서관과 수영장이 신축되는 몸살을 앓았다. 문화재청이 사직단 복원에 뒤늦게 뛰어든 것은 지난해 1월. 관리 주체도 종로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문화재청 산하 사직단지킴이인 재단법인 예올은 “‘사직대제’가 ‘종묘제례’ ‘석전대제’에 이은 대표 무형문화재인데도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사직대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형식적으로 복원된 이후 매년 9월 셋째 일요일에 거행되고는 있으되 지금까지 악무를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식이 전혀 다른 종묘제례의 노래와 춤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게 예올 측 주장이다. 지금은 사직단의 존재와 의미를 아는 시민도 드물다. 사직단 주변 황폐화도 심각한 문제다. 사직단 사적지 안에는 여전히 파출소, 도서관, 주민센터, 창고 등 여러 공공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 때 경희궁에서 이전해 온 황학정 앞에는 2002년 국궁전수관이 건설돼 지금도 사직단 쪽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그나마 모습을 갖춘 것은 제단과 정문, 담장 정도다. 문화재 관련 단체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일본식 돌담은 정리됐으나 조잡한 일본식 조경도 논란거리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사직단의 역사성 회복은 단순한 복원이 아닌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명 예올 이사장도 “사직단이 주말이면 인왕산 등산객들의 집합 장소쯤으로 변질돼 컨테이너 가건물이 들어서는 등 훼손 상태가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의 의지가 없고서는 복원은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복원을 추진한다는 종합계획을 마련했지만 정작 예산은 한푼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경희궁~사직단~경복궁을 잇는 역사로 정비 방안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 또한 수백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된다. 사직단 복원 작업은 여전히 시민단체의 몫으로 남은 게 현실이다. 예올은 분기마다 350여명의 회원들과 주변 청소 등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오는 10월에는 사직단 역사성 회복을 위한 대규모 포럼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위기의 공공의료] (중) 대안은 있다

    [위기의 공공의료] (중) 대안은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지난 2월 26일 진주의료원 폐업 방침을 밝힐 당시 만성 적자와 부채 등의 경영상 이유를 내걸었다. 반발이 거세지자 “진주의료원은 강성(귀족) 노조의 해방구”라며 책임을 노조에 돌렸다. 하지만 그는 진주의료원 직원들이 2008년부터 6년째 임금이 동결됐고 지난해 9월부터는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는 점은 외면했다. 홍 지사는 “진주의료원을 살리려면 매년 70억원씩 발생하는 손실도 보전해줘야 한다”고 언급하고 대신 매년 50억원을 편성해 이를 서부경남 의료 낙후 지역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진주의료원 시설 투자비는 한 푼도 없었다. 재정적자만 놓고 보더라도 홍 지사의 발언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남도 재정공시에 따르면 2011년 기준 경남도 지방채무는 1조 5226억원이었다. 경남도는 2011년 발행한 지역개발채권 2477억원과 상환·소멸한 1883억원의 차액 594억원이 지방 채무 증가액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진주의료원의 당기순손실은 63억원이었다. 경남도에서 지역 개발 사업을 하느라 늘어난 채무는 진주의료원 적자보다 10배가량 더 많은 셈이다. 경남도와 달리 지방의료원을 살리고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토론과 논의를 거쳐 대안 모델도 만들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시다. 서울시는 중랑구 신내동에 있는 서울의료원에 지난해 173억원, 올해 187억원을 지원했다. 1월부터는 전체 623개 병상 가운데 29%인 180개 병상을 ‘보호자 없는 병원’인 환자안심병동으로 전환했다. 서울시에서 별도로 36억원을 지원해 간호사도 대폭 충원했다. 서울의료원 역시 2011년 149억원에 이르는 당기손순실을 기록했고 누적적자가 315억원이나 됐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설 확충과 환자안심병동 등으로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환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경기도의 6개 지방의료원은 지난해 부채가 모두 442억원이었고 의료 수익 대비 인건비 비율도 88%나 된다. 인건비가 80%를 넘고 지난해 부채가 280억원 이상이라는 진주의료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문수 경기지사 역시 홍 지사처럼 ‘강성 노조’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김 지사는 도내 6개 의료원에 대규모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경영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는 점에서 홍 지사와 정반대 길을 걷고 있다. 김 지사는 2006년 취임 이후 지방의료원 신축, 리모델링 등에 836억원을 투자했고 올해부터 2018년까지 1363억원을 추가 지원할 예정이다. 강원도는 지난해 12월 도의회가 매각, 이전, 폐쇄 등의 고강도 대책을 요구하며 예산안 심의를 조건부 거부하기로 했을 정도로 5개 지방의료원으로 인한 갈등이 심각했다. 이에 대해 최문순 강원지사는 “위탁이나 매각은 없다”고 선을 긋는 한편 지난해 경영개선자금 50억원을 지원하는 등 투자를 늘렸다. 2011년 91억원이었던 당기순손실은 지난해 44억원으로 50% 이상 줄었다. 특히 강릉의료원은 인공관절 특성화사업에 집중하면서 전체 119개 병상 가동률이 90%를 넘는 등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지난달 도의회는 의료원 관련 추경예산 37억원을 통과시켰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가출 소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꿈 전도사로 거듭난 32세 스타 강사 김수영

    [김문이 만난 사람] 가출 소녀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꿈 전도사로 거듭난 32세 스타 강사 김수영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그렇게 자랐나 보다. 어린 시절 무척 가난했다. 사람들은 철부지, 말썽쟁이라고 했지만 나름대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 또 너무나 외로워 가출을 했다. 싸움도 하고 죽도록 매를 맞아 깊은 상처도 입었다. 우여곡절 끝에 암울했던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꿈 많은 소녀로 변신해 보란 듯이 당당하게 살아갔다. 인생의 먹구름을 스스로 걷어내고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적었다. 그러다 보니 83개가 됐다. 그중 48개는 이미 이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작가, 배우, 요가 강사, 블로거, 기업인, 꿈쟁이 등이다. 올해 나이 32살의 김수영씨. 스타 강사로도 소문나 있다. 지난해 6월 이후 200여 차례의 강연에서 10만명을 만났다.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라는 책으로 30만명의 독자들과 만났고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책으로 20만명을 만났다. 그의 블로거에 찾아온 손님은 무려 150만명이다. 가출소녀였지만 지금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꿈 멘토’, ‘꿈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길지 않은 인생에, 남달랐던 그의 인생 이력을 간단히 짚어보자. 중학교를 중퇴한 가출 소녀였다. 집은 가난했다. 폭주족과 어울렸고, 싸움에 휘말려 칼을 맞기도 했다. 그러다 ‘아직 우린 젊기에, 미래가 있기에’라는 서태지의 노래 ‘컴백홈’을 듣고 ‘나도 열심히 살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갔다. 검정고시로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여수정보과학고에 입학했다. 1999년 학교에서 진행된 ‘도전 골든벨’ 방송 프로그램에서 골든벨을 울렸고 2000년 연세대에 합격했다. 졸업 후 골드만삭스에 입사했지만 8개월 만에 암세포가 발견돼 회사를 그만뒀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을 적어내려 갔다. 73개의 꿈 리스트. 첫 출발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2005년 무작정 영국으로 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쳤다. 2007년 로열더치셸에 입사해 연 800만 달러의 매출을 책임지는 카테고리 매니저로 일했다. 2010년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를 냈다. 30만부가 팔렸다. ‘사람들에게 영감 주기’도 73개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사이 암이 완치됐다. 2011년 6월부터 1년 동안 휴가를 내고 유럽·아시아 여행길에 올랐다. 지구 반 바퀴를 돌며 365명의 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를 펴냈다. 20만부나 팔렸다. ‘드림 파노라마’라는 회사를 만들어 꿈과 관련된 각종 이벤트를 열었다. 지난 2월엔 꿈을 이루도록 돕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버키 노트’도 출시했다. 오는 9월 다시 지구의 나머지 반 바퀴를 돌기 위해 떠난다. 이번엔 335명을 만나 꿈에 관해 인터뷰를 할 예정이다. 지난해 인터뷰한 이들까지 합하면 700명이 된다. 70억 지구의 0.0000001%다. 나름의 인류학적 보고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짧은 인생에서 이러한 이력들이 정말 가능했을까. 궁금해진다. 지난 27일 저녁 서울 홍대 앞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이 회관에서 젊은이들을 상대로 ‘미친(me-親) 꿈에 도전하라’는 주제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강연 내용이 뭔지 먼저 물어봤다. “오늘날 청년들, 대학생들은 너무 따지다 보니 결론을 잘 못내는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까지 모든 일을 엄마가 결정해 주다 보니 대학생이 되고 나면 멘토를 찾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멘토링 자체를 반대합니다. 멘토링 또한 그 연장선상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젊은 친구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는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그는 강연할 때 가끔 인도춤과 요가를 선보이기도 한다. 하여, 요가강사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여러 가지 수식어 중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즉각 ‘꿈쟁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다른 것은 세월이 지나면 변하겠지만 꿈쟁이만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이유다. 스타강사가 된 까닭을 물었다. “저는 연구를 많이 한 학자도 아닙니다. 더군다가 자기계발을 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로지 제가 걸어왔던 ‘실천’만을 얘기할 뿐이지요. 다른 분들은 강의할 때 훌륭한 사람들을 예로 들지만 저는 제가 직접 겪은 얘기만 합니다. 거기에서 다들 진정성을 느끼는 것 같아요. 꿈에다 영감과 씨앗을 불어넣어 주는 그런 차별성도 있고요.” 그가 꿈쟁이, 꿈 전도사로 나선 계기는 무엇일까. 2005년 입사를 앞두고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암세포가 발견됐다. 평생 건강하게 살 것만 같았던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큰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정신적 후유증이 너무 컸다. 방황했던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이젠 잃을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펼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적어 보았더니 73가지(지금은 83개)였다. 중매쟁이 같은 엉뚱한 꿈도 있었지만 모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73가지 목표 중 중요도와 긴급한 정도를 점수로 매겼고 이 두 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정렬을 했다. 목록의 첫 번째는 한국을 떠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한번뿐인 인생,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살아야만 할까. 인생의 3분의1 가까이를 한국에서 살았으니 다음 3분의1은 세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3분의1은 가장 사랑하는 곳에서 살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꿈쟁이’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지구 반 바퀴를 돌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꿈에 관해 인터뷰를 했던 얘기는 그때부터 이어진다. “이스라엘에서 63세 할머니를 만났어요. 네 살 때부터 노래를 했는데 10년 전 후두암 판정을 받았대요. 그래도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꿈이란 그런 것이구나 새삼 느꼈지요.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한 독립운동가는 ‘그동안 죽을 고비를 일곱 번이나 넘겼다. 독립이 되고 나면 반드시 의사의 꿈을 이룰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70여개국을 다녀 보니 우리나라처럼 꿈을 꾸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 좋은 나라는 별로 없었어요.” 그는 탈레반 사람들과도 꿈을 주제로 인터뷰했고 레바논에 가서는 TV에 출연해 아랍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꿈 리스트 가운데 48개를 이뤄냈다. 여자의 몸으로 혼자 20㎏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기가 불안하지 않으냐고 했더니 “다 사람 사는 곳이다. 사고가 나려면 우리 집 앞에서도 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걸 탓하지 말고 해결하려고 생각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업을 따라 여수에서 10세 때부터 지냈다. 초등학교 5학년 소풍 가는 날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당시 TV에서 유행하던 ‘민지의 일기’를 패러디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갈 때 덩치 큰 학생한테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후 그는 ‘왕따’를 당했다. 학교생활이 싫어졌다. 때마침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마저 매일 술을 마시고 툭하면 신경질을 부렸다. 학교와 가정,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자살할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외롭고 괴롭던 시절, 그나마 위안을 준 것은 바스콘셀레스가 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였다.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더욱 따가웠다. 소풍날 장기자랑 시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불렀지만 ‘까진 아이’라는 말만 들었다. 성질이 나서 담배도 피워 보고 술도 마시며 어설프게 호기를 부렸다. 선생님한테 찍혔다. 그래서 맞섰고, 돌아온 것은 매뿐이었다. 주먹으로, 발길질로, 몽둥이로 만신창이가 됐다. 학교 다니는 것이 점점 싫어졌다. 결국 가출을 하고 말았다. 친구집, 주유소 등을 전전했다. 패싸움을 하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다. 중학교를 자퇴한 지 1년 반 만에 검정고시를 거쳐 여수정보과학고에 진학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수능을 며칠 앞두고 ‘KBS 도전 골든벨’에서 실업계 고등학생 최초로 골든벨을 울리면서부터였다. 얼마 뒤 여수 진입 도로에 ‘여수정보과학고 골든벨 김수영, 연세대 인문계열 합격’이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미운 오리새끼가 어느 날 갑자기 백조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50여개 회사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세계 최고 기업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그가 적어놓은 꿈 중에 부모에게 집을 사주고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는 약속도 지켰다. 가출 당시 함께 지냈던 친구들도 지금은 장사를 하면서 잘 살고 있단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어떤 모습이고 싶냐고 물었다. “지금은 개인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고 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뭔가 나눠 주는 사람이고 싶어요.” 또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같은 소설도 쓰고 싶다며 웃는다. 앞으로 1년간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로 떠나 또 다른 꿈의 여정을 펼칠 예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꿈쟁이’ 김수영은 광주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자랐다. 여수정보과학고 3학년 때 KBS 도전 골든벨에서 실업계 고교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골든벨을 울렸다. 연세대에 진학해 영어영문학과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2005~2006년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학교(SOAS) 중국국제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로열더치셸 카테고리 매니저, 골드만 삭스 애널리스트 등을 거쳤다. 현재는 여행가, 작가, 사업가, 마케터, 강연가, 블로거, 번역가, 사진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요가 강사, 인도 발리우드 영화배우, 예술가, 기획자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꿈의 파노라마’ 대표 꿈쟁이다. 위촉사항으로는 여수시 명예홍보대사, 서울시 드림멘토, 한국장학재단&어린이재단 명예홍보대사 등이 있다. 저서로는 ‘멈추지 마, 다시 꿈부터 써봐’(2010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2012년), ‘드림레시피’(2013년 6월 예정) 등이다.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아랍에미리트연합, 인도, 싱가포르, 네팔, 레바논, 중국, 타이완 등 25개국 해외 매체에서 그의 활약상이 보도됐다.
  • [프로야구] 10전11기 끝에… 이브랜드 첫승

    [프로야구] 10전11기 끝에… 이브랜드 첫승

    대나 이브랜드(한화)가 ‘10전11기’로 국내 무대 첫 승을 신고했다. 넥센은 앤디 밴헤켄의 6승(3패)째 호투를 앞세워 롯데를 7-1로 제치고 사흘 만에 단독 선두로 복귀했다. 이브랜드는 올 시즌을 앞두고 영입되면서 많은 기대를 모았다. 구단 사상 최고의 미프로야구 경력을 자랑하며 류현진(LA 다저스)의 좌완 에이스 공백을 메울 재목으로 손꼽혔다. 지난 시즌 속을 썩였던 브라이언 배스와 달리 캠프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등 국내 야구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인 점도 김응용 감독의 기대를 부풀렸다. 하지만 시즌 10경기에 나와 거둔 성적은 4패로 초라하기만 했다. 지난 5일 대전 넥센전 이후 4연패로 김 감독과 팬들에게 실망만 안겼을 뿐이었다. 그런 이브랜드가 26일 대전에서 열린 프로야구에서 삼성의 막강 타선을 8이닝 동안 5피안타 7탈삼진으로 요리하며 무실점 역투, 3-1 승리를 이끌었다. 7.07이던 평균자책점은 5.94로 내려갔다. 그의 호투로 한화는 개막 이후 삼성전 5연패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잠실에선 정의윤의 극적인 끝내기 안타가 터졌다. LG가 SK와 0-0으로 맞선 9회 말 무사 1루에서 정의윤의 2루타 때 1루 주자 문선재가 폭주 기관차처럼 홈까지 쇄도해 경기를 끝냈다. 국내 무대에서 두 번째 선발 등판한 류제국(LG)과 크리스 세든(SK) 두 선발 투수의 호투로 전광판에는 0의 행렬이 이어지다 결국 LG가 시즌 11번째 끝내기 안타로 승리를 거뒀다. 9회 등판한 봉중근은 공 한 개를 뿌리고 승리투수가 되는 행운을 잡았다. 시즌 세 번째이자 통산 14번째 진기록이다. 세든은 8이닝 동안 6안타만 내주고 삼진을 11개나 빼앗으며 역투했지만 3패(5승)째를 안았다. 완투패는 시즌 네 번째 기록이다. SK는 5회 1사 만루를 만들고도 득점에 실패한 것이 뼈아팠다. KIA는 광주에서 NC에 0-1로 끌려가던 4회 2사 후 5점을 뽑는 응집력으로 7-4 역전승을 거두고 2연패에서 탈출했다. 한편 목동 경기에서 3회 1루 베이스를 향해 뛰다 밴헤켄의 태그를 피하려다 왼쪽 발목이 꺾여 병원으로 후송된 김문호(롯데)는 엑스레이 판독 결과 뼈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동화 ‘모모’에 숨은 이야기가 ‘돈의 맛’이었다?

    동화 ‘모모’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서평가들도 현대인이 여유 없는 생활에 쫓기며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정작 작가 미하엘 엔데는 “너무 외면적이고 표면적인 부분만 거론되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 화폐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려 했는데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데는 평소 현대사회가 돈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으며 자연파괴, 전쟁, 빈곤, 실업 등의 문제가 ‘화폐의 기괴한 자기 증식’과 ‘상품으로 매매되는 돈’에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에 이자가 붙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시간이 시간을 낳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이자로 손쉽게 살아가는 이자 생활자를 회색 신사에 비유했다. 이처럼 엔데는 작가뿐만 아니라 문명 비판가이자 사상가로도 활동했다. 1980년쯤 취리히에서 열린 경영인 회의에 초대받은 엔데는 그 자리에서 “100년 뒤의 사회가 어떠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인간의 삶에서 경제활동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모든 문제의 근본이 ‘돈’에 있다고 본 엔데는 경제를 움직이는 경영인들이 자식이나 손자를 위해 어떤 미래상을 그리고 있으며, 또한 어떤 경제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들은 대답은 “연 3%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파멸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엔데는 이렇게 눈앞의 ‘성장’에만 사로잡힌 현대인의 경제관에 대해 이미 제3차 세계대전은 시작됐으며 특히 이 전쟁은 영토나 종교를 둘러싼 전쟁이 아니라 우리들 자손을 파멸로 몰고 갈 ‘시간의 전쟁’이라고 경고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화폐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니와 후손들이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간 ‘엔데의 유언’(가와무라 아쓰노리 외 지음, 김경인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는 이러한 엔데의 대안적 경제사상을 깊이 다루고 있다. 아울러 엔데에게 많은 영감을 준 루돌프 슈타이너, 실비오 게젤 등 선구적 사상가들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모모’ 같은 판타지를 통해 현재의 돈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자 했던 엔데의 유언을 통해 다음 세대들을 위한 새로운 경제적 사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엔데의 문명 비평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1만 5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독도로 간 일본의 양심들 “한국땅” 3번 제창

    독도로 간 일본의 양심들 “한국땅” 3번 제창

    일본의 역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다케시마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시민모임’ 회원 3명이 23일 독도에서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선언했다. 2005년 3월 독도가 내외국인에게 개방된 이후 지금까지 70여명의 일본인이 독도를 찾았지만 일본인이 독도 현지에서 공개적으로 독도가 한국 땅임을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주인공은 구보이 노리오 모모야마 학원대학 전 교수, 구로다 요시히로 오사카 쇼인 여자대학 전 강사, 이치노헤 쇼코 아오모리 운쇼사 스님 등 3명이다. 이들은 동도 선착장에 내려 먼저 마중 나온 이광섭 독도경비대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이어 관광객과 독도경비대원 등과 한데 모여 ‘일본 지식인과 함께하는 독도 탐방단’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펼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도는 한국 땅”이란 구호를 세 번 외쳤다. 구보이 전 교수는 “독도가 한국 땅임을 문헌을 보고 연구하고 있는데 실제 와 보니 (독도가 한국땅임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면서 “일본에 가서 회원 400여명과 함께 다케시마의 날 제정 반대 운동을 더욱 적극 펼치는 동시에 제대로 된 역사 부교재를 만들어 독도가 한국땅임을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동행한 김문길(68) 부산외국어대학 명예교수에게 “일본이 러·일 전쟁 승전 이후 힘을 과시하기 위해 독도를 침탈했듯이 지금도 우경화 사상을 높이기 위해 독도 침략을 시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앞서 일행 가운데 사카모토 유이치 규슈 국제대학 전 교수는 사동항에서 독도행 배에 오르기 전 “독도를 한국땅으로 볼 수 없다”고 갑자기 입장을 바꿔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는 이어 “독도를 한국땅으로 볼 수 없다. 나는 독도 연구를 하러 왔다”며 독도학당이 마련한 ‘Dokdo is Korean Territory’(독도는 한국땅이다)라고 적힌 티셔츠 단체복 착용을 거부했다. 이에 독도학당 관계자가 그에게 승선권을 주지 않자 무단으로 배에 오르려다 해경 관계자 등에 제지당했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파독근로자기념관장 권이종

    [김문이 만난 사람] 파독근로자기념관장 권이종

    인간의 삶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태어난 그 자체도 경이롭고, 소리 내어 울고 웃는 것도 그렇다. 때로는 슬프고, 처절하게 고생하고,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온몸으로 역경을 이기며 살아 왔다. 이 강산에서 태어나 저 강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와서 인생의 숙제를 비로소 풀어 내며 살아간다. 막장 광부에서 교수가 되기까지 참으로 굴곡진 삶이다.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이 절로 떠올라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파독근로자기념관’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 권광수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장 등 30여명이 참석해 기념관 개관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방 장관은 “(파독 근로자의) 피와 땀과 외화가 우리나라 산업·경제 발전에 씨앗이 돼 이렇게 잘살고 행복한 오늘날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파독 근로자 기념관 건립은 파독 근로자들의 눈물겨운 역사와 의미를 다음 세대에까지 생생히 전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가 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 등이 독일에 파견된 지 꼭 50년이 돼 이래저래 의미가 깊은 자리였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맨 처음 눈길을 끄는 글귀가 보인다. ‘당시 파독 광부의 선발 조건은 20~35세 남성이며 1년 이상 탄광 경력이 있는 자였으나 실제 경력은 거의 없다. 대학 재학생, 국회의원 비서관 등 고학력자와 그 외 여러 분야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행을 지원했다.’ 파독근로자기념관 권이종(73) 관장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막장 광부로 독일에 갔다가 현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귀국 후 한국교원대 교수와 한국청소년개발원장 등을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막장 광부에서 교수가 돼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기념관 개관식을 하루 앞둔 지난 20일 오전 권 관장과 파독근로자기념관에서 만났다. 전시실에 진열된 자료들을 설명해 주면서 당시를 회상하는 눈빛이 자못 진지하다. 아울러 기념관 개관이 얼마나 뜻깊은지를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 연합회 상근 부회장을 맡아 2008년 연합회 창립 당시부터 준비했던 숙원 사업 중 가장 큰 일인 기념관을 이번에야 건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여 기념관 개관까지의 과정부터 먼저 물었다. “따지고 보면 독일 광부 시절 때부터 숙제였습니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꼭 기념관을 만들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후배들에게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독일 정부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독록 규정했으나 몰래 사진을 찍고 고생했던 하루하루를 깨알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았고, 또 유물을 가진 많은 분들의 협조로 이번에 개관을 하게 됐지요. 특히 주한 독일대사관의 적극적인 도움도 있었습니다. 독일 정부에서 관련 자료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파독 50주년, 한·독 수교 130년에 맞춰 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셈이지요.” 전시실에는 20대 초반의 권 관장이 50년 전 독일에서 남긴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막장에서 써 내려간 일기, 가족이 보낸 편지, 동료와 찍은 사진과 함께 향수에 젖을 때면 반복해서 들었다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음반도 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이러한 자료들을 훑어보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얼마 전 세상을 뜬 김태우 전 연합회장의 사진과 이야기는 살뜰히 더 챙긴다. 파독 광부는 모두 2만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약 2000명, 독일에 거주하는 사람이 4000여명, 나머지는 한국에 살고 있다고 권 관장은 설명한다. 앞으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파독 광부 출신이거나 2세, 그리고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기념관을 찾아 우의를 다지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중등 학생들의 견학 장소로 활용하고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더 나아가 이들을 위한 숙소와 쉼터까지 만들 계획이다. 권 관장과 연합회에서는 기념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600페이지가 넘는 파독 광부 45년사를 만들어 기증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더니 파독 광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1964년 12월이었습니다.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저희 광부들을 초청했지요.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독일 정부 관계자에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을 외교관 신분으로 해줄 것을 요청했고 육 여사는 이역만리에서 고생한다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광부들도 애국가를 부르며 모두 울었지요. 저는 그날 이후 애국가 대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며 향수를 달랬습니다.” 권 관장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민간인 대표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다. 이때 박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 떠올라 감개무량해져 역시 애국가를 부르지 못했다. 광부에서 교수가 된 자신의 인생역정도 그 순간 봇물처럼 한꺼번에 머릿속에 밀어닥쳤다. 파독 광부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 보면 이렇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960년대 초. 마땅한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인력을 수출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부는 독일 측과 광부 파견을 타진한 결과 1963년 첫 파독을 성사시켰다. 제1차 광부협정으로 1963년 12월 21일부터 1966년 7월 30일까지 2419명이 건너갔고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잠시 중단됐다가 제2차 협정으로 1970년 2월부터 재개됐다. 이들이 흘린 땀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는 초석이 됐다. 권 관장은 1940년 전라북도 장수 오지인 초장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마을 입구에는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는 기념석이 세워져 있다. 어릴 적 꿈은 학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장작을 만들어 파는 일, 그리고 신문 배달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때로는 닭 서리, 수박 서리, 버스 무임승차 등도 하며 가난을 이겨 내려 발버둥을 쳤다.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 군에 입대했다. 3년 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기다리는 것은 가난한 농사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척의 권유로 서울로 와 을지로 입구 건축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권형, 나하고 독일에 갈 생각 없소”라면서 당시 5급 공무원 월급(3600원)의 10배나 되는 고액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렇게 해서 1964년 10월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현지에 도착한 권 관장 일행은 4주간의 독일어 교육과 3개월간의 현장 실습을 받은 뒤 메르크슈타인 지역 아돌프 탄광에 배속받았다. 이때부터 ‘파독 광부’라는 낯선 호칭으로 지하 1000여m까지 파고들어가 석탄을 캐는 막장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했고 또한 자신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일단 갱도에 한 번 들어가면 작업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었고 식사는 과일 한두 개와 딱딱한 독일 빵이 전부였지요. 이런 곳에서 ‘코드넘버 1622’의 이름으로 석탄 가루 묻은 빵을 씹으며 3년을 지냈어요. 지하 갱도에서 일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맑은 공기와 밝은 햇빛의 진정한 고마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아침 인사는 ‘구텐 모르겐’(Guten Morgen)이다. 하지만 광산촌 지하 갱도에서의 아침 인사는 따로 있다. 각종 사고로 언제 어떻게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지 모르기 때문에 행운을 가지고 올라오라는 뜻으로 낮이건 밤이건 항상 ‘글뤼크 아우프’(Gluck Auf)라는 인사를 한다고 권 관장은 말했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불안한 날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권 관장은 파독 한국 광부들은 ‘동백 아가씨’, ‘비 내리는 고모령’, ‘꿈에 본 내 고향’ 등을 부르며 시름을 달래다가 스스로 ‘광부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회상했다. ‘이역 땅 머나먼 길 떠나오던 그날에, 희망도 부풀었고 눈물짓던 그날에, 지친 몸 부여안고 베갯머리 적시며, 눈물도 말랐더냐 한숨 서러워~.’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귀국을 며칠 앞두고 양어머니나 다름없이 친하게 지내던 로즈 마리 부인의 적극적인 권유로 독일에 남아 공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헨공대 교원대학에 진학한 그가 어릴 적 꿈인 교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이때였다. 이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6년 만에 귀국길에 올라 오늘에 이르렀다. 유학 시절 만난 한국인 여학생과 결혼해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광부에서 교수까지 됐으니 내가 가장 출세한 놈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권이종 관장은 194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전주 신흥고를 졸업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1964년 독일로 건너가 메르크슈타인 아돌프 광산에서 3년간 일했다. 그 후 독일 아헨공대 교원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최초로 한국 학교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 운동에 힘을 쏟기도 했다. 독일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후에도 청소년 운동과 교육 발전에 많은 활동을 했다. 문화관광부 청소년정책자문위원, 한국청소년연구소 연구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 대통령자문기구 청소년보호위원, 서울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와 한국파독근로자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국가발전과 사회교육’, ‘청소년지도의 실제’, ‘유럽 주요국 교육제도’, ‘맴도는 아이, 방황하는 부모’, ‘청소년의 두 얼굴’, ‘청소년학개론’, ‘파독광부 백서’, ‘독일에서 흘린 눈물’, ‘막장 광부 교수가 되다’ 등이 있다.
  • [저자와의 차 한잔] ‘통으로 읽는 논어’ 펴낸 고양 ‘불이학교’ 김재용 교사

    [저자와의 차 한잔] ‘통으로 읽는 논어’ 펴낸 고양 ‘불이학교’ 김재용 교사

    우리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학원가라, 영어와 수학 성적은 왜 떨어졌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정작 자녀들은 ‘공부는 왜 해야 할까,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까, 마흔 살은 왜 불혹일까’라는 까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등 대안학교인 ‘불이학교’(경기 고양시 소재)에서는 ‘논어’를 통해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던져준다. 이 학교의 고전 교사인 김재용씨가 그동안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논어’를 읽고 나눈 이야기를 ‘통으로 읽는 논어’(이매진 펴냄)로 펴내 눈길을 끈다. “저는 논어와 몇몇 고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리 내서 함께 낭송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들려주고 있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고전 읽기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그리고 이런 말들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더군요. 단순히 지식을 주입받고 암기하는 공부하고는 전혀 다른 경험을 통해 아이들의 사고방식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씨는 이 학교에서 고전 강의를 4년째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논어’까지 공부하라는 말에 학생들이 거부감을 가졌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논어’에 대한 재미를 붙이더니 사물을 보는 시각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논어’를 가르치게 된 계기는 전임교사로 있을 때 학과일정을 짜면서 인문학을 강화해 보자는 취지로 논어를 필수선택 과목으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청소년기야말로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논어’ 공부를 가장 흥미로워합니다. 읽어 보니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뿌리를 찾게 되더군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이 생겨났고 또 조용하던 아이들이 질문을 하는 버릇이 하나 둘씩 나타나더군요. 어떤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논어’를 읽을 만큼 취미를 붙인 경우도 있습니다.” 김씨는 청소년들의 수준에 맞춰 직접 ‘논어’를 번역하고 별도의 해설까지 곁들였다. 이 같은 강의노트가 점점 많아지자 때마침 출판사의 제의를 받았고 이번에 책으로 펴내게 됐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하는 논어 끝까지 읽기’라는 부제를 단 책은 학이편에서 요왈편까지 모두 20편 499장, 논어의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담고 있다. 499장마다 한자 원문과 독음을 밝히고 해석을 붙인 뒤 해당 구절에서 유래한 사고방식과 가치관, 자주 쓰는 말과 속담, 격언, 동서양 고전과 철학사상, 역사, 영화 ‘매트릭스’와 ‘스파이더맨’의 대사까지 인용하면서 독창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10대 아이들에서 성인까지 모두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저는 논어를 철학교육의 연장선상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충성과 효도는 어떤 맥락에서 강조한 것인지, 공자의 사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또한 이런 부분이 서양의 다른 문화권과 어떻게 다르게 작용했는지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모든 것을 의심하는 행위입니다. 윤리가 어떻게 생겨나고 오늘날까지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지를 고민해보는 게 철학교육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서강대 철학과에서 우연히 접한 ‘논어’에 큰 매력을 느껴 동양고전에 빠져들게 됐다.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노자하상공주 연구’란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고 아들을 키우면서 대안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현재 불이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번 ‘논어’를 가르치고 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대중과 호흡하는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

    [김문이 만난사람] 대중과 호흡하는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

    인문학은 여전히 죽었다? 흔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한다. 아마 태생적으로 권력, 자본주의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일 것이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쇼핑해야 하는지에 세상은 관심이 더 많다. 그런데 인문학을 멀리할 만큼 지금 우리는 돈을 잘 벌고 쇼핑을 잘하고 있을까. 성추행, 학교폭력, 실직자, 추락하는 경제, 쓸쓸한 은퇴, 대책 없는 노년의 삶…. 말만 들어도 머리 아픈 일들만 늘어나고 있다. 왜 갈수록 고통과 어두운 그림자만 많아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철학에 담겨진 삶을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 요즘의 사회적 현상을 치유라도 하듯 새삼 철학의 중요성을 깨우고 그 온기를 열심히 데우는 사람이 있다. 철학 박사 강신주(47)씨. 흔히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대중과 호흡하는 ‘거리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10여년 전 홀연히 강단에서 내려와 전국을 돌며 대중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철학, 인문학의 속살을 한 꺼풀 한 꺼풀 흥미진진하게 벗겨 보여 주고 있다. 흔히 인문학 책은 2000부 이상 팔기도 힘들다는 출판계의 현실에서 2010년 그가 쓴 10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 ‘철학vs철학’은 3만부나 팔렸다. 또 2011년 출간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무려 10만부 넘게 팔렸다. 이 두 권 말고도 20권에 가까운 책을 펴내 철학과 삶을 꾸준히 연결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 집필 중인 책도 ‘정치철학’, ‘감정수업’ 등 4권이며 올해 안에 전부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하루에 2곳 이상 강의를 소화하고 한 달에 20일 가까이 지방 강연을 나간다. 요즘 들어 그의 철학 강연을 원하는 곳이 점점 더 늘어나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느라 분주하다. 철학 강연의 핵심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유, 그리고 ‘나의 단독성’과 ‘나다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대중들과 직접 마주하면서 단순히 고민을 위로하지 않고, 쾌도난마처럼 본질을 거침없이 건드리고 동강 내며 스스로 꿰매고 해결책을 찾도록 유도한다. 오프라인 매체는 물론 팟캐스트 등을 통해 그가 주창하는 ‘사랑과 자유의 철학’이 계속 번져 나가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신문로에 있는 집필실에서 그를 만났다. 간밤에 밤새 글을 쓰고 이제 막 정신을 차렸다며 반갑게 맞이했다. 어떤 글이냐고 묻자 “새벽에야 드디어 화두가 터졌다”면서 “사찰 선가(禪家)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사용되는 죽비(竹篦)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죽비라고 해서 안 되고 또 죽비가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럼 뭐라고 할래?’라는 화두를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었다”며 웃는다. 아니, 불교철학까지? 간화선은 화두를 근거로 수행하는 참선법이라는 설명도 이어진다. 그는 불교에도 심취해 있다. ‘선문답’ 같은 어록으로 생활 속 이야기를 밝혀내고 가끔 스님들을 상대로 강연 시간을 갖기도 한다. 불교와의 인연은 대학원 시절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접하면서 시작됐고 바수반두의 ‘유식’,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등 논서를 다양하게 읽었다. 그는 임제 선승을 좋아한다. 강연도 임제처럼 직설명료하며 결코 포장하는 일이 없다. 대화의 방향을 인문학 쪽으로 틀었다. 대체적으로 인문학 책이 여전히 잘 안 팔리는데, 정녕 인문학은 죽어 있느냐고 물었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인문학 책은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개성 없는 표준화된 인문학은 인터넷으로 대부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내야 합니다. 저자의 강력한 개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저자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으로 오케스트라처럼 버무려 나가는 강한 지휘자가 돼야 합니다. 니체 또한 ‘나’로 강하게 요리를 해야지요. 독창적이고 강한 ‘저자성’이 있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문학은 고유명사이며 궁극적으로 인문학자의 지향점은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강신주가 철학자라면 ‘강신주의 철학’을 만드는 것이란다. 니체가 니체의 철학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그는 연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지만 서울대와 연세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학 강단에 섰지만 곧 내려와 자신만의 ‘고유철학’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현장 철학자’, ‘거리의 철학자’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대해 그는 “남들이 뭐라고 불러 주든 그들의 자유가 아니냐”며 웃는다. 그는 서울 홍대 앞 ‘상상마당’에서 5년 동안 젊은이들과 철학으로 만났고 요즘에는 대학로 카페에서 대중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난다. 고상한 철학을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한 대중의 고민을 듣고 즉석에서 철학적으로 풀어 가는 ‘철학상담’이다.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보통 저녁 7시 30분쯤 시작하지만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일 만큼 열기가 뜨겁다. 왜 ‘강신주의 철학’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지를 물었다. “정직하게 얘기합니다. 고민의 본질을 피해 가지 않고 고상하게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정공법으로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산모다. 고통 없는 산모가 어디 있느냐. 나는 산파역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각자 집에 가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강하게 자극하지요. 사람들이 고민하는 속으로 들어가야 제 강연을 듣습니다. 결국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평화로운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강연 현장에서 5분 안에 그들의 고통을 읽어 내야 한다. 또 이들과는 다시는 안 만나겠다는 처절한 각오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야 한다는 강연 원칙을 지킨다. 대중이 ‘강신주의 철학’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 밝힌다. 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맡았을 때다. 70여명의 학생이 철학 시간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3분의1 정도가 잤지만 이들을 2주 안에 모두 깨웠을 때에도 이런 방법을 택했다. 대학 강의를 그만둔 까닭을 묻자 “강신주 식으로 강의를 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또 교수 사회의 자유롭지 못한 분위기, 학교 내의 권력과 권위 등이 싫었다. 아울러 후배들이 학위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대학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 단독 플레이를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한다. 그때부터 줄곧 현장의 남녀노소들과 철학적 소통을 해 오고 있는 것. 지난해 말에는 시인, 소설가 등 문학가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평소 시나 글이 잘 안 읽히는 이유에 대해 ‘나’(읽는 사람)라는 단독적인 삶이 거의 없고 어머니, 학교,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흉내 내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지난달에는 ‘강신주의 철학 콘서트’를 열어 철학과 음악의 만남 자리를 갖는 등 그의 철학적 활동 범위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화제를 바꿨다. 요즘 어두운 우리 사회현상에 대해 어떤 철학적 안경으로 들여다볼지 궁금했다. “모두 사랑의 상실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소유하는 것을 주게 됩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를 동사형으로 해석해 ‘없애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을 없애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지 않고 소유하는 것은 동물의 탐욕입니다. 공동체도 자기 탐욕 때문에 무너진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왕따’도 사랑의 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데리다가 주창한 환대의 철학도 ‘네 방을 내어 주라’는 것입니다. 병원을 뜻하는 ‘호스피털’(hospital)도 원래 타인에 대한 환대를 뜻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다 유아독존이며 그래야 자유로워지고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단다. 이 당당함이 곧 인문학이며 저마다 글을 쓸 수 있고, 때문에 표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아울러 인문학이 발달하면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사회가 밝아진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사랑에 빠지면 강해지며 자유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이게 공동체의 핵심 논리”라고 외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문학 책을 다독하면서 인문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취직이 우선이라는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전공과목은 뒷전이고 인문학에 푹 빠지면서 철학으로 다시 돌아섰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연구 끝에 오늘날 ‘강신주 철학’이라는 고유명사를 탄생시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 강신주의 철학 방향은 어떻게 전개되느냐고 하자 “최근 2~3년 사이에 (철학적) 판을 벌려 놨다. 그 판을 더 키우는 것”이라며 웃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철학자 강신주는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문학 책을 즐겨 읽었다. 연세대에서 화학공학과를 전공했지만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다시 철학을 공부했다.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잠시 대학 강단에 섰으나 10년 전부터 대중 강연과 책을 통해 ‘강신주의 철학’을 설파하고 있다. 주로 대중이 찾는 카페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한 달에 20일 정도 지방 강연을 나간다. 오프라인 매체에 틈틈이 칼럼을 쓴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VS 철학’ ‘김수영을 위하여’ ‘철학의 시대’ ‘회남자&황제내경’ 등 20여권에 이른다.
  •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엄벌과 관용의 활용법

    ‘논어’의 ‘위정편’에 담긴 내용 한 토막을 들여다본다. ‘백성을 법령으로 이끌고 처벌로 다스리면 백성이 형벌을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이와 반대로 백성을 덕으로 이끌고 예의로 다스린다면 백성이 부끄럽게 여겨 바르게 된다.’ 백성을 법으로 강제하고 잘못과 일탈을 처벌하는 데에만 골몰하면 백성은 그저 이를 피하려고 하거나, 처벌을 받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니, 도덕 교화를 통해 부끄러움을 알도록 한다면 저절로 착한 경지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조선 후기의 사회질서는 어떠했을까. 도덕정치가 더욱 강조되면서 엄형보다는 교화와 감형이 선호됐고 죄인을 심리하는 흠휼(欽恤·죄수를 신중하게 심의함)에서 관용이 남발됐다. 이에 다산 정약용은 ‘흠흠신서’를 지어 흠휼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고자 했다. 당시 법관들이 흠휼이라는 말에 홀려 사람의 죄를 무조건 너그럽게 용서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다가 법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지적했다. 아울러 인명에 관한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뜻에서 ‘흠흠신서’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신간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김호 지음, 책문 펴냄)는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각자 다산의 ‘흠흠신서’를 들여다보면서 다산이 꿈꾼 정의로운 나라의 모형과 그가 말하고자 했던 정의에 대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흥미롭게 정리했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계층 간의 갈등은 심화했다. 다산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나가려면 중앙 관료들은 물론이고 지방의 관리들까지 솔선수범하고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아져야 가능한 일임을 강조했다. 이런 다산의 절절한 마음이 오늘날까지 울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공정한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폭력과 불의에 고통받는 것을 보면 다산이 정의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듯하다. 정의가 흐릿하고, 금권이 판치는 요즘 세상을 보면 다시 한번 다산이 꿈꿨던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백성이 소송을 통해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주먹이 법보다 가까웠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정의로운 정치는 사건을 먼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한 뒤 엄한 형벌을 적용하고, 관용을 적절하게 베풀 때 가능해진다는 대목 등에서 울림이 크다. 2만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인사]

    ■감사원 ◇3급 승진△재정·경제감사국 제2과장 이재호△공공기관감사국 제3과장 김광영△전략과제감사단 제3과장 전본희△지방행정감사국 제2과장 박성익△지방건설감사단 제2과장 김계중△파견 최달영 ■교육부 △장관 정책보좌관 변기용 ■통일부 △행정법무담당관 최영준◇과장△정책총괄 김병대△이산가족 황정주△정착지원 구병삼△정세분석총괄 박광호△정치군사분석 김창현△교류협력기획 이주태△남북경협 서정배◇남북회담본부△회담1과장 김기혁△회담3과장 윤민호△회담지원과장 강기찬△회담협력과장 하태만◇통일교육원△교육총괄과장 박철△지원관리과장 배윤수△교육협력과장 최용석◇소속기관△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교육훈련과장 윤현중△남북출입사무소 출입총괄과장 오충석 ■국토교통부 △장관정책보좌관 강충호 김문권 박병철 ■건국대 ◇학교법인△이사장 비서실장 신동준◇서울캠퍼스△관재처장 이병우△박물관장 한상도 ■BC카드 ◇본부장△전략사업 최정훈△고객지원 서만호△경영기획 천덕종◇실장△글로벌 이재용△고객지원1 장홍식△플랫폼 박춘영◇연구소장△지불결제 장석호◇팀장△DFS 박준권△UPI 조수현△COE 김정무 ■홈플러스 ◇전무 승진 <본부장>△영업개선TF 고재영△신유통서비스 현경일◇상무 승진 <본부장>△정보서비스&OM 박용석△홈플러스테스코1지역 백롱현△신선식품 안태환△3지역 윤양근△영업지원 이걸재△e-영업 이동일△하이퍼리프레시TF 전화수△홈플러스테스코2지역 주대중◇이사 승진 <총괄>△사회공헌 김영기△간편조리 김웅△홈플러스아카데미 장진호<본부장>△특판상품권영업 조익준△재무기획 최영조△4지역 홍화룡
  • 도자기관광 버스 타고 떠나볼까

    도자기관광 버스 타고 떠나볼까

    도자기를 테마로 경기 광주~이천~여주를 잇는 국내 최초의 도자기 관광 코스, ‘한국도자투어라인’이 10일 개통한다. 한국도자재단은 이날 광주 곤지암도자공원 개장에 맞춰 김문수 경기지사, 강우현 재단이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 축하식을 연다고 9일 밝혔다. 도자투어라인은 서울에서 관광객을 모집, 광주 등 3개 도시를 순회하는 버스투어상품과 3개 도시 도자테마파크를 무료로 운행하는 내부순환버스 등 2가지다. 재단은 우선 서울 유명호텔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모집, 도자테마파크를 순회하는 버스투어상품을 운영한다. 요금은 이달 한 달간 30달러, 이후에는 80달러. 이와 함께 10∼12일과 17∼19일 매주 금∼일요일 3개 도시를 순회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하루 두 차례 운행한다. 강우현 이사장은 “도자투어라인은 2010년부터 3년간 조성해온 것으로 도자기라는 독특한 소재를 테마로 한 국내 최초의 관광 코스”라고 말했다. 곤지암도자공원은 광주시 삼리 69만 2000여㎡에 조성됐으며 경기도자박물관을 비롯해 쇼핑몰, 복합문화홀, 구석기 체험마당 등 도자와 역사·문화를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섰다. 이천시 설봉공원 19만 7000㎡에 들어선 이천세라피아는 도자전문 미술관 세라믹스 창조센터와 박물관 토야지움, 도자전문 도서관 만권당 등 시설이 있다. 여주군 도자쇼핑문화관광지 3만 7000여㎡에 조성된 여주 도자세상은 판매관과 생활도자전문 반달미술관 등을 갖춘 국내 도자 유통 허브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호랑나비’ 리메이크로 돌아온 가수 김흥국

    [김문이 만난사람] ‘호랑나비’ 리메이크로 돌아온 가수 김흥국

    화려한 곡선보다는 단순한 직선이 낫다는 말이 있다. 견인질직(堅忍質直)이라고 한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꽃밭에 앉았는데 도대체 한 사람도 즐겨 찾는 이 하나 없네, 하루 이틀 기다려도 도대체 사람 없네 이것 참 속상해 속상해 못 살겠네~’ 노래 ‘호랑나비’에 나오는 대목이다. 24년 전에 발표됐다. 그래도 ‘즐겨찾는 이’ 여전하다. 이 노래는 40대 중년층 이상인 경우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쓰러질 듯 넘어질 듯하는 특유의 춤은 예나 지금이나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가수 김흥국이다. 물론 ‘59년 왕십리’ 등 여러 곡이 있지만 ‘호랑나비’만큼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곡이 별로 없다. 따지고 보면 ‘호랑나비’ 하나로 가수 김흥국의 직선 인생(1959년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이번에는 ‘호랑나비2’로 제2의 인생 시작을 선언하고 다시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호랑나비로 이어지는 ‘직선상의 아리아’를 들고 말이다. 그의 무대 복귀가 흥미로운 것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분개(?)해서 ‘강북스타일’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서울 인구의 반이 강북 사람인데 왜 강남 사람만 ‘대표적 스타일’이냐고 항변하면서 내놓은 곡이어서 눈길을 끈다. 또한 원래 호랑나비 춤이 싸이의 말춤보다 훨씬 앞선 선구적 춤인데 ‘유튜브’를 활용하지 못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했을 뿐이며 따라서 이번에는 유튜브에 뮤직비디오 동영상을 먼저 내보냈다. 반응은 ‘베리 굿’이다. 강북스타일로 새롭게 들이대는 김흥국씨를 지난 3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미국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가기 하루 전날이었다. 화창한 5월답게 밝은 옷차림에 까만 안경을 썼다. 늘 그렇게 안경을 쓰고 다니냐고 하자 “싸이도 쓰고 있지 않느냐, 김흥국은 원래부터 썼다”며 웃는다. 라일락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에서 잠시 사진 촬영을 하자고 했더니 “호랑나비는 꽃을 좋아하지요. 허허”라고 응수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이어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한국프레스센터 엠바고룸에서 마주 앉았다. 녹음이 짙어가는 바깥 경치가 좋다는 말로 시작했다. 이어 ‘호랑나비2’를 만들게 된 계기를 물었다. “기러기 아빠된 지 10년이 됐어요. 방학 때면 미국에 있는 딸한테 가거든요. 13살된 딸인데 나중에 커서 세계적인 유튜브 스타가 되겠다고 자꾸 하더라구요. 예쁘게 가꾸고 사진도 찍고 자신만의 멋과 장기를 세계에 알리겠다고 해요. 춤도 잘 춰요. 아빠 닮아서 그런지 끼가 많구요. 그러면서 아빠도 유튜브를 활용하라고 하더군요. 호랑나비가 얼마나 멋있느냐고 해요. 그걸 다시 리메이크해서 유튜브에 올리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3년 전이었습니다. 그래야겠다고 마음 먹고 준비하던 차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에 쫙 번진 것이지요. ‘아이고 이것 참 속상해 속상해 못살겠네’라고 할 수밖에요(웃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최근에야 ‘호랑나비’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새로 입혀 리메이크 작업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이래뵈도 10대 가수 출신인데 그동안 노래를 부를 시간이 많지 않았으며 뮤직비디오 한 번 못 찍은 가수라는 점에 큰 자극을 받았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딸이 뮤직비디오 제작에 살짝 동참은 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고향인 강북구 번동 주변에서 찍었다. 어릴 때 놀던 장소도 등장시켰다. 번동을 비롯, 왕십리, 인사동 등이 주요 무대이다. 호랑나비는 봄에 나오니까 계절의 타이밍도 맞췄다. 그런데 싸이의 ‘젠틀맨’이 나왔다. 주위에서는 “좀더 있다가 내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젠틀맨’과 ‘호랑나비2’는 스타일이 다르다. 24년 전 먼저 했던 호랑나비 춤을 리메이크해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강행했다. 그랬더니 여러 사람한테 “잘했다. 재미있다. 싸이보다 훌륭한 원조다”라는 평을 들었다. “때마침 조용필 형님도 훌륭한 신곡을 냈어요. 요즘 중년들이 대세 아닙니까, 하하. 좋은 작품을 들고 나오면 됩니다. 중년에 맞게 우리 문화, 우리 음식, 우리 가요 등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순순한 자연 그대로 비디오 촬영을 했습니다. ‘호랑나비2’로 제2의 가수인생을 신나게 해볼랍니다. 자신있어요, 기대하셔도 됩니다.” ‘호랑나비2’로 ‘강북스타일’을 세계 만방에 떨치겠다는 각오를 거듭 밝힌다. 또한 “김건모, 이정, 박상민 등 여러 후배들도 ‘어릴 적 호랑나비를 들으면서, 또 그런 춤을 흉내 내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싸이도, K팝 스타도 물론이다. 가왕 조용필도 ‘호랑나비’가 처음 나올 적에 ‘야, 굿 아이디어다. 이 시대에 그런 노래가 필요하다.’며 칭찬해줬다”며 껄껄 웃는다. 아울러 “최근에 나온 용필 형의 ‘헬로’도 얼마나 훌륭한 곡이냐. 바야흐로 중년 이상의 시대가 왔어요, 왔어~”라고 흥을 다시 한 번 돋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가요 평론가 등에 따르면 조용필씨가 10년 만에 발표한 앨범 ‘헬로’가 K팝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다. 여기에 김흥국과 이용씨 등 조용필 이후 세대들이 잇달아 돌아오면서 K팝 또한 새롭게 태어나려는 준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시 귀환하는 중장년 가수들의 경우, 젊은 층이 선호하는 음악의 트렌드를 도입해 다양한 연령대를 아우를 수 있는 시도를 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평가한다. 김흥국씨는 호랑나비 리메이크 외에 내친김에 신곡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문득 24년 전 ‘호랑나비’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지 궁금했다. “보컬로 무명 10년을 보내던 중 ‘배따라기’의 이혜민씨한테 ‘호랑나비’를 받았어요. 고생했던 세월을 한방에 날렸습니다.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까 스타가 됐습니다. 전 국민에게 호랑나비를 강타했지요. 그때는 뮤직 비디오 찍을 여건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아시아 쪽에서는 다 알더군요. 이제 ‘호랑나비2’로 세계를 강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 막내가 ‘호랑나비’ 하나로 온 가족을 먹여살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번동 사람들은 한결같이 “번동에서 스타가 나온 것이 기적이다”라며 많은 찬사를 보냈다. 어머니는 무명 시절을 보내는 아들이 안타까워 매일이다시피 절에 가서 불공을 들였다. 그는 서라벌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부 생활을 했고 해병대에서 전역한 후 ‘오대 장성’ 그룹을 결성, 음악활동을 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 인생은 30년을 훌쩍 넘는다. 앨범 13집, 발표한 곡은 100곡이 넘는다. 이러는 동안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느라 노래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후회 섞인 고백을 한다. 그는 월드컵 경기때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응원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서 ‘응원의 원조’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2년 월드컵때에는 봉은사에서 월드컵 성공 기원을 위해 2002배를 할 만큼 축구에 열성적이다. 당시 새벽 3시부터 5시간 가까이 스님한테 ‘네가 쓰러지면 월드컵이 잘되겠느냐’고 죽비로 맞아가면서 2002배를 꽉 채웠다. 그의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는 여전히 ‘2002’다. 뿐만 아니다. 2010년 6월 2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면 콧수염을 깎겠다고 약속한 후 정말로 16강에 진출하자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는 말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30여년간 애지중지 길러온 콧수염을 깎았을 정도다. “아버지가 평소 콧수염을 길렀다. 결혼식때에도 안 깎았던 수염을 월드컵때 처음으로 깎았다”고 술회한다. 내년에 브라질 월드컵때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라며 웃는다. 월드컵때마다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털어 현지에 가서 직접 응원에 합류한다. 그는 축구 외에도 장학재단을 만들어 13년째 불우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1000원, 1만원, 5만원 등 주변 지인들의 십시일반으로 모여진 장학금이어서 더욱 값지다. 자신은 술값을 줄여 통장에 입금시킨다. 한때는 밥차를 만들어 전국에 돌아다니며 ‘밥퍼’ 봉사활동을 했다. 다시 ‘강북스타일’로 화제가 돌아온다. “아마 앞으로는 강북 땅값이 좀 올라가지 않겠어요. 어릴 때 추억, 고고 춤, 관광 춤, 해병대 춤 등으로 막 들이댔거든요.” 그는 1985년에 발라드 풍의 노래 ‘창백한 꽃잎’으로 솔로로 전향했다. 데뷔 시절부터 코털을 가지고 있어 별명은 코털 가수이고 나중에는 월드컵 가수가 됐다. 1989년에 3집 앨범을 발표하고 ‘호랑나비’ 열풍으로 대한민국 가요계를 휩쓸어 단번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주로 방송 진행과 축구 등에 관심을 쏟으면서 노래활동은 뜸하다시피했다. 이제 ‘제2의 가수인생’을 선언한 그가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과 친숙해질지 기대된다. 체력관리를 위해서는 매일 아침 108배를 하고 주말에는 지인들과 함께 축구모임에 참여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흥국은 1959년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태어났다. 서라벌고등학교 시절 밴드부 생활을 했다. 해병대 전역후 그룹 ‘오대 장성’을 결성해 본격적인 노래 인생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1985년 발라드 풍의 노래 ‘창백한 꽃잎’으로 솔로로 전향했다. 데뷔 시절부터 코털을 기르고 있어 별명이 코털 가수였다. 10년 가까이 무명생활을 하던 중 1989년에 3집 앨범 ‘호랑나비’를 발표하면서 혜성같이 나타나 가요계를 휩쓸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1992년 ‘59년 왕십리’로 정통 트로트 장르까지 선보이며 인기가도를 이어나갔다. 1994년 ‘레게파티’를 발표, 처음으로 레게장르를 한국 대중가요에 접목시켰다. 1996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한동안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했다. 영화와 드라마에도 다수 출연했다. 이 밖에 월드컵때마다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위해 열띤 응원을 펼쳐 ‘월드컵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밥차’를 만들어 ‘법퍼’ 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현재 ‘김흥국 장학재단’을 통해 매년 불우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김흥국의 축구이야기(2002년)’, ‘김흥국의 우끼는 어록(2005년’) 등이 있으며 주요 수상으로는 MBC 10대가수상·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1989년), 국민봉사 장려상(1993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6년), MBC 라디오 골든 마우스상(2010년) 등이 있다.
  • 한국 신무용 100년 역사 한눈에

    한국 신무용 100년 역사 한눈에

    100년 역사를 만들어가는 한국 신무용의 흐름을 한눈에 보는 ‘춤의 귀환-아름다운 발자취, 신무용가들을 위한 헌정무대’가 9~10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다. 한국공연예술센터와 근현대춤연구소가 주최한 이 공연은 한국춤을 무대화한 시점부터 예술화에 이르는 과정을 일군 무용가들의 예술세계를 만나는 시간이다. 헌정무대에는 박지홍(1889~1961), 이동안(1906~1995), 조택원(1907~1976), 최승희(1911~1969) 등 신무용 시대를 연 예술가부터 박금슬(1922~1983), 송범(1926~2007), 김진걸(1926~20 08), 김백봉(86), 김문숙(오른쪽·85), 최현(왼쪽·1929~2002), 황무봉(1930~1995), 한순옥(81)까지 폭넓게 재조명한다. 9일 공연에는 김문숙류 ‘대궐’(최정임 전 정동극장장), 송범류 ‘황혼’(이지선 발림무용단 대표), 김백봉류 ‘부채춤’(안병주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은방초류 ‘살풀이’(서영님 서울예술고 교장) 등을 올린다. 10일에는 최승희류 ‘옥적곡’(최정임 전 극장장), 최현류 ‘비상’(전순희 서경대 무용과 교수), 김진걸류 ‘내 마음의 흐름’(유정숙 효산무용단 예술감독), 박금슬류 ‘바라승무’(김승일 중앙대 무용과 교수) 등을 선보인다. 조택원류 ‘가사호접’(김충한 정동극장 예술감독)과 한순옥류 ‘검무’(양승미 태평무보존회 부회장), 이동안류 ‘신칼대신무’(김영희 전 국립국악원 무용단 예술감독), 박지홍류 ‘달구벌 덧배기춤’(백현순 한국체대 무용과 교수), 황무봉류 ‘산조’(한명옥 국립국악원 예술감독)는 9일과 10일 모두 만날 수 있다. 이 공연에서는 각각의 작품을 손글씨전문가 강병인이 개성을 담은 캘리그라피로 재해석한다. 캘리그라피 작품은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2만~10만원. (02)3668-0007.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10년째 ‘재즈 아리랑’ 해외공연… 유럽 한류음악 원조 세계적 재즈가수 나윤선

    [김문이 만난사람] 10년째 ‘재즈 아리랑’ 해외공연… 유럽 한류음악 원조 세계적 재즈가수 나윤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영혼을 울린다. 들어도 들어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 식이 아닌 ‘재즈’로 풀어내기에 더욱 그렇다. 잠시 ‘재즈’를 얘기해 본다. 아프리카 음악과 미국 흑인, 그리고 백인 유럽인들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즉흥 연주와 창조성, 활력이 독특하다. 미국에서 탄생했지만 유럽 등 세계적인 현대 음악의 한 장르로 발전했다. 이러한 재즈의 세계 무대를 한국인이 섭렵하다시피 활동하고 있다. 서양의 재즈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까지 재즈로 편곡해 불러 인기를 모은다. K팝 스타들보다 일찍 유럽에 진출했으니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44살의 나윤선씨가 주인공이다. 그가 잠시 한국에 왔다. 아리랑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재 등록 기념 콘서트,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재즈의 날 기념 공연, 8집 앨범 ‘렌토’(Lento) 발매 기념 등등을 위해서다. 아울러 4월 한국 공연을 시작으로 다음 달부터 미국 등 세계 17개국 52개 도시 순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1년에 평균 100여 차례 이상 해외 공연을 갖는다. 동양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오라는 곳이 많으며 이미 세계적인 재즈 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음을 입증한다.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호원아트홀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임시로 노래 연습하는 곳 근처이다. 먼저 8집 앨범 타이틀곡 ‘렌토’에 대한 얘기부터 나왔다. ‘렌토’는 음악적으로 느리게 연주하라는 ‘빠르기 표’라고 설명한다. 7집 앨범을 낸 지 2년 반 만에 새 앨범을 냈으며 우리의 아리랑도 삽입곡으로 있단다. 지난 3월 한국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발매됐고 이어 4월 22일에는 유럽 전역에서 발매돼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6월에는 미국에서도 발매되며 이를 위한 여러 도시의 순회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7집 앨범을 냈을 때 280여회 초청 순회 공연을 가질 만큼 많은 팬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재즈 앨범으로는 보기 드물게 10만장 이상 팔렸다. 나머지 1~6집도 10만장 가까이 팔렸다. 유럽 재즈음반 시장에서는 경이로운 기록이다. 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8집 앨범 또한 그만큼 기대가 되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벨기에, 노르웨이 재즈차트 1위에 올랐으며 프랑스 아마존닷컴 음반 순위는 현재 1·2·3위가 모두 나윤선의 앨범이다. 8집 앨범은 거의 연습 없이 이틀 만에 녹음을 마쳤을 만큼 특유의 순발력으로 이루어졌다. 같이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 울프 바케니우스(기타), 라르스 다니엘손(베이스·첼로), 뱅상 페이라니(아코디언) 등과도 5년 넘게 손발을 맞춘지라 연습 없이 녹음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저 평상시 라이브 공연을 하던 대로 했단다. ‘아리랑’은 7집부터 들어가 있다. 어떻게 해서 ‘아리랑’을 재즈 무대에서 부르게 됐을까. 10년 전 같이 연주하던 스웨덴 출신의 울프 바케니우스가 ‘한국의 아리랑이 감동적이지 않으냐’며 먼저 제안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스웨덴 출신 연주자가 직접 아리랑을 편곡한 것이 오히려 특이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무대 중간중간에 아리랑을 불렀더니 다들 울었다. ‘참으로 한이 많다’ ‘너무 아름답다’라는 평을 들었다. “제가 아리랑을 안 하더라도 자기네(연주자들)끼리 아리랑을 연주합니다. 왜냐 하면 유럽 현지 팬들이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요청도 하고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감성이 와닿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반응을 보고 눈물이 찡하지요. 제가 한국에 있었으면 아리랑의 소중함을 몰랐을 텐데 이제 외국 아티스트들도 서로 좋아 부를 정도가 됐습니다. 7집에는 ‘강원도 아리랑’이 들어가 있고 8집에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일반 ‘아리랑’이 삽입됐어요. 울프 바케니우스 등의 연주자들은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등 한국에 몇 차례 와서 공연도 했고 한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는 아리랑의 매력으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꼽았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멜로디가 장점이라는 것. 재즈 아티스트들이 연주를 할 때 기본 재료가 되는 ‘재즈 스탠더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10년째 해외 공연에서 아리랑을 전파하고 있다. 그가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가 된 것은 우연으로 시작됐다. 건국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카피라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란 생각에 8개월 만에 그만뒀다. 마침 1994년 ‘지하철 1호선’ 뮤지컬 배우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디션을 봤다. 그가 노래했던 경력은 대학 때 프랑스문화원 주최 ‘샹송대회’에서 수상을 한 경험이 전부였다. 기분 좋게 합격했다. 그런데 노래는 좀 됐지만 연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이 됐다. 친구한테 ‘프랑스나 가서 노래 공부할까’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친구는 ‘응, 거기 가면 샹송도 있고 유럽 최초의 재즈학교도 있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나윤선은 재즈가 뭔지 몰랐다. 친구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 1995년 무작정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또한 프랑스의 재즈학교 등 네 군데 음악학교에 동시 진학했다. 왜냐 하면 클래식과 성악, 컨서버토리 등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수업을 다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틈틈이 개인교습까지 받으면서 서서히 재즈로 방향을 굳혔다. 그렇게 3년만 공부하려고 했으나 학교(CIM)에서 장학금을 주고 나중에는 교수 제의까지 받았다. 학교 측에서 ‘아시아에서 온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재즈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학생들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재즈 명문 CIM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했고 그동안 품어온 음악적 이상을 현실로 이루게 된다. 피아노 트리오 편성에 비브라폰과 나윤선의 보컬이 더해진 ‘나윤선 퀸텟’이 결성되면서 프랑스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아울러 각종 페스티벌과 레코딩에 참여하면서 많은 매체로부터 극찬을 받기 시작했다. 2001년 나윤선과 퀸텟 멤버들은 첫 데뷔작 ‘러플레’(Reflet)를 발표했고, 국내외 재즈 팬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재즈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신들린 듯한 나윤선의 음성이 통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를 찾는 공연장이 늘어나면서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2009년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고, 2010년 7집 ‘세임 걸’로 독일 에코 재즈 어워즈 해외 부문 ‘올해의 여가수’로 선정됐다. 유럽에서 ‘소녀시대’ 등 K팝 스타 이상으로 유명한 한국인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런 그에게 재즈란 무엇인지 물었다. “한국인인 저도 할 수 있는 음악입니다. 국적과 종교, 인종을 떠나 전 세계인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세대 간 구분 없이 무대에 같이 설 수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어느 나라에 가도 그쪽에 있는 뮤지션과 함께 언제든 무대에 오를 수 있지요. 또 한 가지. 재즈를 하노라면 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동안이잖아요(웃음). 살아서 움직이는 음악이죠.” 유네스코에서 재즈페스티벌을 주관하는 것도 바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소통과 교류의 음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의 재즈 뮤지션들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오고 싶어 한다. 한국에 오면 불고기도 먹고 한국의 재즈팬들과 함께 만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재즈팬들이 많다는 것을 유럽 재즈 뮤지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재즈페스티벌이 1년에 200회 정도 열릴 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그는 지난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무려 160여 차례 공연을 가졌다. 올해만 해도 벌써 100여회가 넘는다. 주로 프랑스에서 지내고 한국에 들어오는 시간은 1년 중 넉 달이 채 안 된다. 남편인 인재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예술감독도 거의 못 본다고 한다. 가끔 외국 일정이 맞으면 그때 반갑게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바빠서일까. 아이는 아직 갖지 못했다. 이런 궁금증에 “무대에 서는 것이 행복하다”며 웃어넘긴다. 그의 아버지 나영수씨는 한양대 명예교수로 음악감독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어머니 김미정씨는 뮤지컬배우 출신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언제 고국팬들과 다시 만나느냐고 했더니 “연말쯤이 될 것 같다. 고국 무대는 항상 떨린다. 가족이랑 친구들이 다들 보러 오기 때문”이라며 수줍게 웃는다. 꿈이 무엇이냐고 하자 “음악은 내 정신이기 때문에 계속 음악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나윤선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일반 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1994년 ‘지하철 1호선’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듬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재즈 명문학교 CIM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 후 2000~2001년 이 학교 교수로 몸담았고 줄곧 퀸텟(5인조 밴드 구성)으로 프랑스의 현지 매체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2001년 첫 정규 앨범 ‘러플레’(Reflet)에서 최근 8집 ‘렌토’(Lento)까지 음반을 발표, 왕성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2005년에는 일렉트로닉 재즈밴드와 파격적인 음반을 발표했고, 2007년에는 팝 음반을 내기도 했다. 7집 앨범 ‘세임 걸’(Same Girl)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프랑스 재즈 차트 1위, 80주간 스테디셀러, 프랑스 골든디스크 수상, 10만 장 이상 판매 실적을 올렸다. 2009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고, 2011년 프랑스 재즈 어워드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독일 레코드산업협회가 주는 ‘에코 재즈 2011’ 시상식에서 해외 아티스트 부문 ‘올해의 여가수’에도 뽑혔다. 지금도 유럽 주요 대형 음반매장의 재즈 코너에는 대부분 나윤선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관광부,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음반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 경기도, 개성공단 입주 32개 기업 100억~200억원 자금 지원 검토

    경기도가 개성공단 입주기업에 특별경영지원자금을 지원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개성공단 입주 123개 업체 중 경기지역 업체는 32곳이다. 도는 1일 도청 상황실에서 경기지역 업체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업체들의 피해 실태와 함께 건의사항을 들었다고 밝혔다. 도는 정부 부처별 지원대책 마련을 위한 정부·입주기업회의를 지켜본 뒤 도 자체 지원책을 논의하고 미흡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요구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도는 이미 경투실, 2청 기획행정실, 자치행정국 관련 공무원들로 지역의 32개 개성공단 입주기업 지원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또 개성공단 입주 32개 기업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이미 조성된 1조원 규모의 중소기업육성자금 가운데 100억~200억원대의 특별경영안정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경기신용보증재단을 통한 대출보증도 지원책의 하나로 논의하고 있다. 도는 투자액의 90%까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남북경협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지역의 개성공단 입주기업이 8개 업체로 나타나면서 이들 기업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다. 간담회에서 김문수 지사는 “그동안 개성공단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해 왔으며 유관기관과의 긴밀한 공조하에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인력 철수 등을 포함한 긴급 상황 발생 시에 대비해 입주기업 지원대책을 면밀히 검토해 왔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껴”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껴”

    토요일인 지난 27일 오후 3시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아파트 앞 작은 편의점. 아이스크림을 사러 온 아이들 3명이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어? 이건 ‘1+1’ 상품이네요. 가서 먹고 싶은 거 하나 더 가져오세요. 그리고 사탕은 보너스.” 꼬마 손님들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편의점 아저씨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보통 사람’ 김능환(62)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요즘 일상은 이렇다. 30년 공직자의 권위는 찾아보기 어렵다. 입가에 진 잔주름이 소탈한 웃음을 닮은 그의 삶의 궤적을 대변한다. 김 전 위원장은 아내 김문경(58)씨를 위해 지난해 4월과 9월 상도동에 각각 편의점과 채소가게를 열었다. 지난 3월 5일 퇴임한 뒤 평일엔 아내의 ‘운전기사’, 주말엔 ‘편의점 알바생’으로 8시간씩 가게 일을 돕고 있다. ‘청백리’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다는 그는 “별다를 것 없어요. 그냥 내 처지와 상황에 맞게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언론에 자꾸 노출되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봐 부담스럽다”고 했다.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부하던 그는 기자가 이날 오후 편의점에 불쑥 찾아가 손님들 틈에서 꾸준히 질문을 던지자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 권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다. 김 전 위원장은 ‘착한 아저씨’로 통했다. 주민들에게는 대법관, 중앙선관위원장 출신이라는 그의 ‘과거’보다 인심 좋고 친절한 아저씨라는 ‘현재’가 훨씬 강하게 부각된 듯했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김정원(16)군은 “이 분이 전직 대법관과 선관위원장이었다”고 말해 주자 “진짜 몰랐어요. 그냥 되게 착하셔서 인상 좋은 편의점 아저씬 줄만 알았다”며 깜짝 놀랐다. 김 전 위원장은 모든 손님에게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를 잊지 않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인사를 받지 않고 그냥 나갔지만 그는 이런 무반응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기계 조작이 느린 그에게 욕설과 함께 “짜증 나네”라고 말하며 나가는 20대 손님도 있었다. “가게 일을 하다 보면 상처를 받을 때도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손님은 왕이잖아요.” 복지카드를 들고 온 할머니가 카드 한도 초과로 사려던 빵을 제자리에 놓고 그냥 가려 하자 그는 빵을 다시 할머니의 손에 쥐여 줬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갑을 열어 계산을 했다. “내 가게는 아니니까 돈은 채워 놔야죠. 전 알바생인데….” 이곳 계산대 앞에 막대사탕통 두 개가 놓여 있다. 파는 게 아니라 편의점을 찾는 아이들에게 공짜로 주기 위한 ‘사은품’이다. 사탕을 종류별로 담아 놓고 먹고 싶은 걸로 가져가되 ‘한 명당 한 개씩’이란 원칙이 있다. 아이들은 다들 “우와, 저 아저씨 되게 착하다”며 좋아했다. 때로는 대법관 출신다운 잔소리도 했다. 로또 복권을 사러 온 여성에게는 “저희는 로또는 취급을 안 합니다. 사행성 게임은 하지 마세요. 좋을 게 없어요”, 담배를 사는 학생에게는 “담배는 몸에 해로워. 벌써부터 피우지 않아도 돼. 잘생긴 얼굴 미워져”라고 말했다. 공직에서 물러났다는 편안함 때문일까. 손님들 외에 김 전 위원장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날도 초등학교 동창 김길용씨가 편의점을 찾아왔다. 49년 만에 처음 본다고 했다. “예전부터 방송, 기사 등을 통해 활약상은 봐 왔지만 공직에 있을 땐 혹여 누가 될까봐 내가 먼저 연락을 못 했어요. 이제는 편하게 자주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능력 있는 친구가 이러고 있는 게 마냥 좋은 건가 싶긴 하죠.” 김 전 위원장을 보려고 먼 곳에서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못생긴 얼굴 보러 여기까지 와 주시는 분들 보면 고마울 따름이죠. 편의점에 직접 오시거나 편지를 보내 법률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도 많아요. 소송을 대리해 주고 싶은 안타까운 사연들도 많지요.” “전 그냥 비정규직이에요. 뭔가를 보여 주려는 생각도 없고, 탐험하듯 완전한 자유인으로 지내고 있어요. 편의점 하면서 잔돈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죠.” 그는 아내로부터 용돈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가게 경영은 철저히 아내의 몫이다. 그는 관여하지 않는다. 돈에 집착하기 싫어서다. “내가 경영에 관여하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신경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운영을 잘하니 못하니 잔소리하고 싸우게 마련이죠. 그냥 필요할 때마다 뭐 사달라고 얘기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돈에 연연하지 말고 서비스를 하자는 뜻에서 바로 옆 채소가게에도 ‘영업시간’ 대신 ‘업무시간’이라고 적힌 팻말을 붙여 놨다. “영업시간이라고 하면 장사한다는 느낌이 많아서 그냥 서비스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거죠.” 김 전 위원장은 조심스레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지금은 저도 아내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고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연하지 않아요. 다만 후배 법관들이 ‘아, 퇴직하면 저렇게 살아야 되나 보다’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이에요.” 가게 사정이 어렵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라면서 “집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집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민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손님이 없는 가게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편의점 가맹주들이나 아르바이트생들의 어려움도 알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하며 의욕을 갖도록 정치권이나 기업에 계신 분들이 더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다음 직업으로 변호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제가 아는 게 법이니 그걸 활용할 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결정된 건 없고 방향만 모색 중입니다. 지금도 법률 상담은 무료로 하고 있지만 변호사로 일한다면 서민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글 사진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봄, 고궁마다 전통 음악 활짝 핀다

    봄, 고궁마다 전통 음악 활짝 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주말마다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를 진행한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종묘에서 열리는 ‘고궁에서 우리 음악 듣기’는 궁중음악, 풍류음악, 창작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우리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5일부터 6월 9일까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와 11시에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후원과 낙선재에서 ‘풍류음악회’가 열린다. 제한적으로 개방되는 후원을 산책하면서 김문식 단국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에게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낙선재에서는 궁중정재, 판소리 등 공연이 이어진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와 4시에 국립국악원의 연주와 춤으로 선보이는 궁중음악이 펼쳐진다. 5일 어린이날에는 가족 관람객을 위한 ‘마술과 함께하는 전통음악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우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무형유산의 하나인 종묘제례악을 이해하는 시간도 준비돼 있다. 11일부터 6월 22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훈정동 종묘 재궁에서 ‘해설이 있는 종묘제례악’을 열고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가치, 구성 악기, 문묘제례악과의 차이점 등을 소개한다. 11일부터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매주 토·일요일 오후 7시 30분에 창작 국악과 동화가 어우러지는 공연이 열린다. 주관사인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고궁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무대 제작과 음향, 조명은 최소화했다”고 설명했다. 입장료만 내고 들어오면 관람료 없이 모든 공연을 즐길 수 있다. (02)580-3275.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부고]

    ●신훈식(전 보건사회부 감사관)씨 별세 동원(삼성전자 부장)동석(써트렉아이 상무)성주(강남구약사회 부회장)씨 부친상 오우택(한국투자증권 전무)씨 장인상 김수영(전북대 교수)씨 시부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8시 30분 (02)3410-6915 ●김영필(부산아쿠아리움 대표이사)씨 모친상 29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7시 (02)2258-5940 ●장영일(HK터빈 상무)씨 모친상 김문석(사업)이경호(동탄예치과 원장)안덕호(삼성그룹 그룹법무실 전무)씨 장모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8시 30분 (02)3410-6901 ●성창진(대한설비건설공제조합 상임감사)창규(전 대구경찰청 과장)창본(전 대구축협 상무)씨 모친상 29일 대구의료원, 발인 5월 1일 오전 8시 (053)560-9570 ●윤영선(클라크 과장)현정(숭의여대 교수)씨 모친상 조중래(SK차이나 부총재)씨 장모상 28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8시 (02)2227-7547 ●조운홍(메리츠화재)운(용인 송담대 교수)씨 모친상 유재준(LG화학 여수공장 주재임원 상무)손형국(목포시청)씨 장모상 29일 광주 그린장례식장, 발인 5월 1일 오전 9시 (062)250-4455 ●윤봉선(신한은행 압구정갤러리아지점장)씨 부친상 2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6시 (02)3010-2236 ●장준섭(전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씨 별세 문상(삼성에버랜드 부장)웅상(범한정수 전무이사)유경(호주 거주)씨 부친상 28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7시 (02)2258-5940 ●한민석(자영업)씨 부친상 김승두(연합뉴스 콘텐츠평가실 평가위원)씨 장인상 29일 울산 동강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9시 (052)241-1442 ●원윤희(서울시립대 정경대학장)영귀(지이워터프로세스 이사)명희(사업)씨 부친상 조숙희(중앙대 인문대학장)권혜영(교사)김우정(애지약국 약사)씨 시부상 29일 중앙대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5시 (02)860-3510 ●윤성호(무안 부군수)씨 장모상 29일 전남 무안 제일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11시 (061)454-9341 ●홍기범(펜드롤코리아 부장)전홍기혜(프레시안 편집국장)씨 부친상 안주식(KBS 다큐멘터리국 PD)씨 장인상 29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9시 20시 (02)2227-7572 ●장세환(전 충청은행 지점장)봉환(미국 거주)씨 부친상 김법진(국민대 홍보팀 실장)씨 장인상 29일 서울대병원, 발인 5월 1일 오전 9시 (02)2072-2010 ●지철호(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씨 부친상 2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5월 2일 오전 7시 (02)3410-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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