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경제변혁’ 전문가 시각/“北 중국식 점진개방 착수”
근로자 임금과 물가의 대폭 인상,화폐제도 개선,심지어 사회주의 계획경제 운영의 근간인 쌀배급제 폐지설까지 북한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는 소식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징후의 배경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즉 경제의 사적 부분을 공적 부분으로 흡수,약화된 계획경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과 시장메커니즘을 도입,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는 신호탄이라는 두가지 가설이 엇갈린다.
북한 경제체제의 대지각변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구체적 사실 관계가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의 변화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다수의 북한연구 전문가들 역시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북한이 변하고 있고,북한 체제 전환의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대부분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이에 따라 우리의 대북 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어떤 변화가진행되고 있나. = 북한의 구체적인 변화는 ▲배급제 폐지 ▲‘태환지폐(외화와 바꾼 돈표)’폐지,인민지폐로 단일화 ▲환율 조정 ▲임금, 물가 인상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변화는 북한당국이 모두 1000여개에 이르는 농민시장(합법)과 장마당(불법) 등 시장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는 조치로 풀이하고 있다.다만 북한 당국이 이를 방치하거나 강력하게 단속하는 대신 배급제를 장기적으로는 폐지하는 방안과 장마당의 기능을 국영시장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안 등 두 갈래로 분석한다.
배급제 폐지여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세종연구소 이종석(李鍾奭) 남북관계연구실장은 “배급제는 사회주의 경제의 근간은 아니고 단지 공급과 수요가 불일치한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인 만큼 (북한이)배급제 자체에 집착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다른 전문가는 “그동안 근로자들은 장마당 등에서 높은 가격으로 생필품을 조달해야 했고 이는 북한의 계획 경제를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면서 “장마당 기능을 국영시장 기능으로 흡수하려는 적극적 조치”라고 해석했다.그는 “배급제 폐지는 지역,계층별로 부분 시험실시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정책 변화는 어떤 배경에서 나왔나. = 최근 4년 동안 북한 경제는 계속 플러스 성장을 해왔다.이는 지난 96년의 잉여농산물 처분 허용 조치,98년 개헌을 통한 가격·수익성 등 채산성 규정 명시 등 일련의 개혁 조치 때문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물가 체계와 국영시장,환율,사실상 기능정지된 배급제 등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진단했다.
고려대 북한학과에 출강하는 박현선(朴炫宣) 박사는 “북한은 공공부문 경제 기능 강화를 통해 오히려 경제 체제를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것”이라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며 부분적 개방을 택해 북한 정권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 조치”라고 해석했다.박 박사는 “북한은 중국식 점진적 개방을 꾀하는 것 같다.”면서 “북한 체제의 붕괴를 논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 정치·사회 체제 변화까지 불러올까. = 북한 당국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는 과정이 장기화되면 정치시스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동용승(董龍昇) 북한팀장은 “변화가 북한 당국의 의지속에서 추진되는 것이라면 경제 체제의 일부만 변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지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사회적 필요에 의한 변화라면 정치·경제의 변화가 약간의 시차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낮은 생산성과 함께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도입 국면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현선 박사는 남쪽의 대북정책의 변화 필요성에 대해서는 “북한이 점진적 개방의 길을 선택한 만큼 북한의 자생을 돕는 방향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화해·협력 기조의 대북정책이 바뀐다면 큰 갈등과 마찰,막대한 통일비용의 소모가 예상되는 만큼 지속적 화해·협력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록삼기자 youngtan@
■안방돈 끌어내려 네차례 화폐개혁
최근의 북한 경제 개혁은 국영상점 가격과 농민시장 가격과의 괴리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다.
북한의 모든 물가는 정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동안 물가상승률은 아주 미미했다.하지만 농민시장 등에서 매매되는 가격은 국영시장보다 5∼10배 ,심지어 몇백배까지 매우 높게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북한의 화폐는 사실상 폐지된 태환지폐 8종을 제외하고 지폐 5종(1원,5원,1 0원,50원,100원)과 주화 5종이 있다.
북한의 화폐 개혁은 47년 12월 처음으로 이뤄진 뒤 59년 2월,79년 4월에 이어 지난 92년 7월 등 네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최근 화폐 개혁설이 나오는 것도 최근 몇 년새 공식적으로 물가와 임금 인상이 이뤄진데 따른 것이다.북한의 화폐 개혁은 주로 주민들이 집에 쌓아놓은 화폐를 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왔다. 이와 함께 최근 북을 다녀온 소식통들에 따르면 1 달러당 2원∼2원20전이던 공식 환율도 암달러시장의 1달러당 190∼200원 수준에 가깝게 맞춰졌다.
박록삼기자
◇주변국이 본 北경제변혁은
■日, 태환지폐 폐지 주민 반길듯(도쿄 황성기특파원)“평양에서 엔화를 인민 원으로 바꿔서는 개성에서 쓰지 못할 정도입니다.” 지난달 중순 평양을 다녀 온 북한 문제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의 외화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그는 “평양의 호텔에서 엔을 바꿔 개성에 갔더니 개성 호텔에서 ‘이 돈을 어디서 바꿨느냐.’고 물어봐 평양에서 바꿨다고 했더니 ‘이곳에서 다시 엔을 교환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내화(인민 원)로는 일반 주민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살래야 살 수 없기 때문에 외화 구하기에 필사적”이라면서 “평양에 외화가 몰리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외화를 구하기 위해 외국인이나 재일 동포들에게 새로 외화를 바꾸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에 따라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외화를 다시 바꾸지 않으면 인민 원을 쓰기가 힘들 정도가 됐다고 덧붙였다.
또 외화 구하기가 치열해짐에 따라 평양의 호텔 주변에는 외화를 구하려는 ‘암달러상’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소식통은 “평양에서 당국이 지정한 호텔 등의 외환거래소에서 돈을 바꾸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공정 환율과 암시장 거래 환율과는 큰 차이가 난다.”고 전했다.지난 6월 이 소식통이 평양의 호텔에서 1만엔에 바꾼 인민원은 158원.그러나 암달러상은 1만 엔에 250∼300원 가량을 준다고 했다고 그는 말했다.그나마 최근에는 엔보다 달러의 인기가 높아져 엔화를 거래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그는 이어 “근로자의 월급이 올랐다는 얘기는 듣긴 했으나 물가(국영상점)가 대폭 인상됐다는 말은 직접 듣지 못했다.”면서 “사실상 배급제가 없어져 가고 있어 근로자의 월급을 올릴 수밖에 없는 처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배급제 폐지설과 관련,“북한 주민에게 ‘배급이 제대로 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웃었다.”고 덧붙였다.
또 북한 정부가 외화와 교환가능한 태환지폐를 폐지키로 했다는 보도와 관련,“그것이 사실이라면 북한 주민들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일 것”이라면서 “‘아리랑’ 축전을 계기로 원화의 가치를 높이자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는 북한 관계자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전했다.그는 “태환지폐의 폐지는 북한의 통화가 원화로 단일화된다는 뜻”이라며 “원화로는 생필품을 구하기 힘든 현재 상태에서 외화가 없어도 누구나 공평하게 물건을 구할 수 있게 되는 조건이 일단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marry01@
■美, 시장경제 도입 아닐것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미국은 북한의 움직임이 시장체제로의 개혁은 아니라고 본다. 식량과 전력 부족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일 뿐 북한 스스로 배급제를 철폐했다고 보지 않는다.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은 23일 미국을 방문중인 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을 만나 북한이 시장개혁을 시작했다는 외신보도를 거론했다.그러나 미국은 관심만 보였을 뿐 체제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보도에 회의적이라고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들은 전했다.
지난 5월 평양을 다녀온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한 관계자는 “도시 근로자들이 공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으면서 배급을 받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미 평화연구소의 연구원인 헤이젤 스미스 영국 워익대 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북한 주민과 외국인을 상대로 두가지 화폐를 발행하던 이중통화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며 “대부분의 거래에서 달러화 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암시장의 존재를 주장했다.
지난달 북한을 다녀온 한 교포는 “평양에서 배급권을 받지 못한 게 한달 반은 넘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한 소식통은 1997년 식량난 이후 지방에서 배급제는 거의 중단됐고 이듬해 나진·선봉지구에서 1달러당 200원의 환율이 시범 실시되면서 이중통화제도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mip@
■中, 경제난 타개 일시조치
(베이징 김규환특파원)중국은 배급제 폐지 등 최근 북한의 경제적인 변화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현 상황으로서는 중국식 시장경제 체제 도입을 위한 선행조치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계획경제 틀 안에서도 자유로운 물품거래를 허용하는 등 중국식 현실주의 노선의 도입을 위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북·중관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의 경제적 변화가 중국의 개혁·개 방정책을 전적으로 수용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북한이 체제변화를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이같은 변화는 장마당이나 암시장에서 유통되는 돈을 공식 경제영역으로 흡수할 수 있는 데다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도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 조치가 긍정적인 사실임은 분명하나 북한 당국의 적극적인 개혁 의지라기보다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고육책일 가능성도 있어 사태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는 시각도 우세하다.
세계식량계획(WFP) 베이징 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언론에 보도된 북한의 변화상이 사실이라면 북한 체제수준으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 .”며 “북한 당국이 공식 발표를 유보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경제난을 타개하려는 일시적인 조치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kh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