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대탐구] 제3부 실패자산을 공유하자(1)불행한 다리 성수대교
지난 94년 10월21일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는 ‘총체적 실패’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고를 ‘총체적 실패’로 규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붕괴를 사전에 알수 있었지만 막지 못했다. 둘째,다리 건설 결정과 수주업체 선정 과정에 정치권이 개입해 공사대금에서 거액을 정치자금으로 빼내갔다. 안전관리 담당자들의 무지와 무신경은 32명의 목숨을 희생시켰고,정치인들은 정치자금과 한국의 대외 신인도를 맞바꿨다.
[무심코 넘긴 붕괴의 증후] 성수대교는 무너지기 2년 전부터 붕괴의 증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 92년 최초의 증후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 곳을 자주 운행했던 택시 운전기사들이었다. 다리 상판의 연결부위에서 뒤틀림과 침하 현상을 발견해 서울시에 신고했다.
당시 성수대교 관리는 서울시 산하 동부건설사업소가 맡고 있었다. 신고를 접수한 사업소는 응급조치로 주저앉은 상판 연결 부위에 브래킷(철제 받침대)을 설치한 것이 고작이었다. 명백한 붕괴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전문가 그룹에 안전진단을 의뢰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리 상판의 뒤틀림과 침하 현상은 성수대교의 경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교량 전문가인 이태식(李泰植) 한양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다리가 차량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상판과 상판을 연결하는 핀이 손상된 것입니다. 특히 성수대교는 전쟁 발생에 대비해 손쉽게 폭파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이 때문에 준공후 다른 형태의 다리에 비해 훨씬 세심한 유지관리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설계상의 특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시됐습니다.성수대교의 경우 상판의 뒤틀림과 침하는 심각한 붕괴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업소측은 지휘계통에 따른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부패한 정치가 만든 불행한 다리] 김학재(金學載)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성수대교가 건설된 지난 70년대만 해도 시청에 집권당의 재정분실이 설치돼 있었다.”면서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에서 상근 직원을 두고 시가 발주하는 각종 공사를 업체별로 배분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낙점을 받은 건설업체는 수주의대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하는 것이 당시 대형 관급건설공사의 관행이었다. 정치권의 부패구조가 공사의 향방을 좌지우지했으며 이렇게 빼먹은 정치자금이 결국 시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부실공사를낳았다는 설명이다.
[동아건설이 한강 다리를?] 이런 배경으로 동아건설이 시공업체로 낙점됐다. 그러나 동아건설은 그때까지 농지정리사업을 주로 하던 업체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한강 다리를 시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잠실철교 가설공사 등에 관여했던 K(54)씨는 “동아건설을 시공업체로 선정한 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결정이었다. 설계도,시공도 엉망이었으나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그때의 분위기를 전했다.
[타당성 조사도, 감리도 없었다] 이후 공사의 진행과정과 안전관리 면에서도 성수대교는 ‘실패한 관급공사’의 전형이었다.대규모 건설공사에서는 필수 과정인 타당성 조사 조차 없이 설계도면부터 그린 것이 성수대교다.
성수대교의 공사 진행과정을 지난해 12월23일 개통된 가양대교와 비교해 보자.성수대교가안고 있었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94년 착공해 7년 만에 개통된 가양대교는 ‘타당성조사→기본설계→실시설계→설계감리→착공(상주 감리)→준공→유지관리’라는 7단계의 정상 수순을 밟았다. 반면 성수대교는 ‘기본 및 실시설계→착공(감리 없음)→준공’의 3단계만으로 모든 공정이 마무리됐다. 이는 다리 건설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타당성 조사와 준공후의 유지관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본설계와 실시설계가 분리·시행되지 않았으며,설계 및 시공에 대한 감리절차는 모두 생략됐다. 객관적 검증절차인 타당성조사는 고위층의 구두 지시로 대체됐다.
[안전진단요? 그런 거 몰랐어요]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 정동진(丁東鎭) 교량관리부장은 “구조물이 한번 세워지면 붕괴되든, 헐어내든 없어질 때까지 치료는 고사하고 진료 한번 못받고 방치했던 게 당시의 관급공사 관리의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성수대교는 애당초 준공 후의 유지관리라는 개념이 없이 시작된 공사였기 때문에 사후 안전관리문제가 전혀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타당성 조사 단계에서부터 준공 후의 유지관리를 감안해 기획된 가양대교와는 달리 성수대교는 준공 당시 안전검사 요원들의 접근 통로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준공후 무너질 때까지 15년여 동안 단 한차례의 안전진단도 받지 않았다.
대다수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해묵은 사고를 다시 들춰보는 것은 여러 사람의 사소한 실패가 모이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지난 79년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가설된 성수대교는 ‘용서할 수 없는 실패’의 전범(典範)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특별취재반 yeomjs@
■日정부, 세계 첫 DB화.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 과학기술청(현 문부과학성)은 지난 2000년 8월 ‘실패지식활용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당시 과기청장관이 실패학의 권위자인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교수에게 자문을 받아 국가 예산을 투입,실패 지식을 체계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히타치(日立)제작소·도시바(東芝)·후지쓰(富士通)등 일본 초일류 기업의 현장 책임자와 경영자,도쿄대·게이오(慶應)대의 학자,정부 관계자 등 20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1년 동안 8차례의 회의와 미국 현지조사를 거쳐 ‘실패지식 활용연구회 보고서’를 냈다. 이 연구회는 현재는 ‘실패정보 수집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2005년까지 15억엔(약 150억원)의 예산을 들여 기계·재료 등 분야별로 실패 사례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marry01@
■김학재 서울시 부시장. 김학재(金學載) 서울시 제2부시장은 “성수대교야말로 부패한 정치와 사회구조가 낳은 사상누각이었다.”고 말했다. 성수대교가 붕괴한 지 올해로 8년.아직까지도 붕괴를 가져온 원인은 ‘과시욕에 쫓긴 무모한 시도’와 ‘사후 안전관리 부재’라고 진단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얘기는 다르다.“성수대교 붕괴는 정치인들이 시민의 생명과 정치자금을 맞바꾼 결과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관료의 한 사람으로서 성수대교 문제를 거론하기가 부끄럽다.”고 했다. 한사코 손사래를 쳐대는 것을 “실패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참된 실패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로 설득해 겨우 말문을 열게 했다.
김 부시장은 “솔직히 당시의 설계나 기술 수준으로 우리가 교량을 건설한다는 것은 무리였다.”며 “어떻게 핀 하나만 꺾이면 무너지는 교량이 버젓이 지어졌으며,이런 교량으로 사람들을 다니게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관료들이 비로소 ‘안전관리’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으며,이후 누구든 안전에 관한 한 ‘다른 소리’를 못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한강에 멋진 다리 하나 만들라.’는 정치권의 구두지시에 타당성 검토조차 없이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성수대교와 당산철교였습니다.” 그는 “지금은 공무원 의식이나 관련 제도들이 ‘안전’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개념으로 바뀌었지만 뒤집어보면 이런 성과도 참담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결과”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실패학 사전.
1.알려져 있는 실패 예방법과 해결책을 살피지 않은 무지.
2.평상심을 잃었을때 무심코 일어난 부주의.
3.결정된 약속사항을 지키지 않은 미준수.
4.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오판.
5.필요정보가 확보디지 않아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조사검토 부족.
6.최초에 설정된 제약조건이 변화했지만 이를 반영하지 못한 환경변화 미반영.
7.기획단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기획불량.
8.자신 또는 조직의 가치관이 잘못되어 일어난 가치관 불량.
9.일을 정확하게 진행할 만한 능력이 부족한데서 오는 조직운영 불량.
10.누구도 답을 모르는 미지. **특별취재반.
염주영 공공뉴스에디터(반장) 김용수 오일만기자(행정팀) 심재억 조덕현기자(전국팀) 구본영 김경운기자(정치팀) 김태균기자(경제팀) 강충식기자(디지털팀) 박홍기 확홍환기자(사회교육팀) 이종원기자(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