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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北 집필정지 명령·교도소 수감설… 최근엔 월북보다 납북설 유력

    여운형 계열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워 자본주의적 퇴폐풍조 모더니즘 작품 함께 월남한 가족들 두고 홀로 北으로김기림은 해방 공간에 북한으로 간 것으로 돼 있다. ‘간 것으로 돼 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190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그가 해방 이후 스스로 북행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의해 납치돼 북으로 끌려갔다는 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납북설이 유력하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건으로 좌익으로 분류되면서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해금된 1988년 이전까지는 자진 월북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기림 연구자인 서울대 국문과 김유중 교수는 “최근 여러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월북이 아닌 납북이라는 게 다수 의견”이라는 학계 분위기를 전한다. 좌익단체에 몸담은 것은 사실이나 순수 좌익이라기보다는 여운형 계열의 좌우 합작 노선에 가까웠던 점, 가족과 더불어 월남했고 북으로 갈 때도 가족과 동행하지 않은 점, 이미 북한에서 지주 계급이라는 이유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는 점, 북에서의 행적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른 월북 문인들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대우받은 흔적조차 없는 점, 결정적으로 임화나 김남천 등 좌익 문인들이 남로당 불법화 이후 북행길에 올랐을 때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도 월북하지 않았던 점 등이 그 이유라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김 교수는 신문 보도, 탈북자 정보, 김기림을 아는 지인의 얘기 등을 종합할 때 그의 북한 행적에 관한 두 가지 설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가 1958년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간첩죄로 체포된 북한군 정치부사단장 출신의 증언이다. 증언에 따르면 김기림, 정지용은 북한에 가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집필활동 정지 명령을 받았다. 김 교수는 이 내용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본다”고 했다. 북한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했으며, 자본주의적 퇴폐풍조로 분류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 창작활동을 한 그를 북한 당국이 좋게 봤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가 김기림이 북한에 가자마자 교도소 수감 생활을 했는데 친척, 지인, 제자들이 탄원서를 내 풀려났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한 차례 숙청을 당한 몸이라 좋은 보직을 얻지 못하고 평양에 있는 극장의 말단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이때 남편과 별거 중인 극장 아나운서와 눈이 맞아 연애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숙해도 못마땅할 놈이 부화뇌동해서 연애질이나 한다”고 당국의 눈총을 받고 재수감되었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까지 붙어 있다. 김기림은 7살 때인 1915년 임명 보통학교에 입학, 서울로 와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중퇴한 뒤 1930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 사회부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와 시론들을 집중 발표했다. 문인과 기자로서 한창 명성을 얻던 1936년, 신문사를 휴직한 그는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홀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 깊이 있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졸업 이후 조선일보에 복직한 그는 학예부로 소속을 옮겨 보다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개시를 전후하여 신문사가 폐간되고, 총독부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그는 고향인 성진으로 가 한동안 인근의 경성(鏡城)고보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무곡원’(武谷園)이라는 과수원을 운영하며 간간이 지면을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해방과 더불어 문단에 복귀한 그는 모더니즘의 실질적인 청산을 선언하며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한다. 서울대, 중앙대, 연세대, 조선대 등에서 강의했다. 1930년 ‘가거라 새로운 생활로’를 신문에 발표하면서 시단에 진출하였고, 시집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와 수필집 ‘바다와 육체’(1948), 시론집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49) 등을 냈다. 상당 기간에 한국에서는 ‘월북’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그의 시집의 소지조차 금기시됐으나 1988년 해금 조치되면서 출간이 잇따르고 연구도 활발하게 됐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편이 지난 14일 진행됐다. 여름 야행 세 번째 행사가 치러진 이날 여름의 마지막 몸부림이 느껴졌으나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예약하지 않고 현장으로 직접 오거나 현장에서 일행을 따라나선 이들도 있어 준비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과 쿨 스카프가 동났다.이날 투어는 집결 장소인 청계광장의 소음을 피해 한국관광공사 2층 관광안내센터 ‘K-STAR 존’으로 이동,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쾌적하게 시작했다. 서울 중구 다동 10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는 구보의 옛 집터(다옥정 7번지)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교까지 나간 뒤 화신백화점(종로타워)을 보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서 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소공로 낙랑파라(더플라자호텔)~숭례문~경성역(서울로7017) 구간을 걸었다. 해설을 맡은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구보의 동선을 안내하면서 소설 속의 적절한 장면을 낭독했다. 참가자들은 문학 향기를 음미하면서 몰입했다. 1930년대 경성과 박태원이라는 소설가, 주인공 구보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구보가 배회했던 1930년대의 서울, 식민지의 수도 경성은 어떤 도시였을까. 일제강점기의 암흑과 근대의 새벽이 공존하는 이 시기는 식민 잔재라는 이름으로 혹은 근대유산이란 이름으로 서울 도시 공간 곳곳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는 자연환경의 개조이고, 근대성의 임상실험이다. 이 시기 식민지 도시문화와 도시계획이 만들어 낸 지층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서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식민통치기 경성의 외관과 도시민의 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주입하는 일본식 전통과 일본이 도입한 서구 문물이 혼재돼 있었다. 중국식 전통이나 중국을 경유한 서구 문물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린 게 바로 1930년대 경성의 본질이다.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직접 가져오거나, 서구에서 전해진 게 아니라 일본을 거쳐서 받았다는 데 있다. 소설 속 식민지 지식인 구보가 걸었던 소공로와 남대문로의 이국적 풍경과 우울한 독백 또한 여기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구보가 소설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경성은 사실상 새로운 도시였다. 현대 서울의 기원은 조선의 수도 한성이 아니라 경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30년 동안 경성시구개수 계획과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경성의 간선도로망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전통적 도심 공간의 구조를 재편했다. 청계천 이북 종로 중심 도시구조를 청계천 이남 경성부청(시청) 중심의 격자형 도시로 뜯어고쳤다.광화문 네거리 정동 쪽을 막고 있던 황토마루(황토현) 고개를 밀고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남북 간 축선도로 태평로(세종대로)를 뚫었다. 종묘관통선(율곡로)을 만들고, 식민통치 기구와 일본인 거주지가 밀집한 본정통(충무로)과 황금정통(을지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망을 구축했다. 본정통과 남대문의 교차점인 조선은행(한국은행)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경성부청과 조선은행 앞 광장을 잇는 장곡천정통(소공로)을 뚫어 연결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 등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와 금융기관, 백화점이 명치정(명동)·본정통(충무로)과 이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월북 소설가 박태원(1910~1986)의 분신이다. 박태원은 이념을 배제하고 도회적인 풍물과 도시성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도시를 무대화하면서 전통의 몰락, 가족의 생성과 해체, 물질주의와 환락의 변주, 반복되는 일상을 묘사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개인의 일상을 그려 내면서 내면의식의 추이를 서술하는 모더니즘소설의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도시 문학의 전형이다. 소설 속 구보는 집을 나서 경성 최고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전차를 타고, 당대 대표적 건축물인 조선은행을 지나 경성역을 오간다. 낙랑파라로 대표되는 경성의 다방과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와 친구와의 만남은 욕망과 소비문화의 분출을 나타낸다. 박태원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설이 구구했으나 2016년 구보의 장남 박일영이 펴낸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 지성사)이 믿을 만하다. 조부 때부터 약방을 운영했고 부친이 약종상으로 공애당약방을 운영했으며 숙부가 양의로서 공애의원을 개업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개화한 중인가문 출신이라고 알려졌으나 밀양 박씨 양반 가문임을 족보를 통해 밝혔다. 구보의 첫 부인 김정애는 한약국집 무남독녀로 숙명여학교(숙명여고)를 수석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서울사대) 연수과를 수료한 뒤 진천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신여성이었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외손자이다.구보는 7살 때부터 소설책에 관심을 보여, 9살까지 춘향전과 심청전 등 집에서 구할 수 있었던 시중의 이야기책 50~60권을 독파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재학 중이던 17살 때 본명으로 시 ‘할미꽃’을 발표했고, 18살 때 춘원 이광수에게 사사했으며 스승의 글을 평한 ‘묵상록을 읽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걸 천재에게 정규교육은 불필요하다”면서 휴학, 집에 틀어박혔던 시절도 공개됐다.이상한 머리 모양과 친구 이상과의 우정, 월북 후 ‘갑오농민전쟁’ 출간 스토리가 대표적 이야깃거리다. 23세에 도쿄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구보는 빨간 넥타이에 지팡이를 짚고, 바가지 머리 모양으로 다니면서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됐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오갑빠머리’에 대해 구보는 ‘나는 내 머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 내 머리터럭은 그저 제멋대로 위로 뻗쳤다. 나는 수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 이것들을 다스리러 들었다.… 이마 위에 간즈런히 추려가지고 한일자로 짜르는 방법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상과 구보에 대해 ‘자신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장담한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저서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 이상의 더벅머리와 수염에 대해서 구보의 ‘오갑빠머리’가 한 쌍이었고, 언변에 있어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결말을 들으면 포복절도할 만담가의 흥행을 보는 것 같았고…둘이 다 한가한 몸이므로 밤낮 붙어 다니며 노닥거렸다’고 기록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여름야행 4=성수동(서울숲 밤마실) ●일시:8월 18(토) 오후 6~8시 ●집결장소: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역 구내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본식 가옥 점령 막은 북촌 한옥… ‘서울의 징표’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특별시, (사)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4회 서울사방 북촌 편이 6월의 첫 주말인 지난 2일 북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북촌의 기와집 처마 아래로 흐르는 초여름 바람이 시원한 하루였다. 이날 오전 9시 30분쯤 예약자들이 몰려오면서 집결 장소인 안국역 2번 출구 앞이 갑자기 북적였다. 신문 기사를 보고 예약 없이 무작정 나오거나, 친구 따라 온 몇 명도 무사히 투어에 합류했다. 다만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이 동나 진행 요원들이 양보해야 했다. 정순희 해설사는 일행을 ‘북촌 신세계’로 이끌었다.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백악산 아랫동네다. 저잣거리인 종로 운종가의 배후도시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족과 공신, 고위관료들에게 나눠준 알짜배기 땅이다. 왕조의 심장부 북촌은 개화의 발상지다. 근대의 활시위를 당겼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가장 뜨거운 변혁의 물결이 휩쓴 역사의 무대였다. 개화의 사랑방 역할을 한 박규수의 집이 지금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으로부터 개화 세례를 받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집도 반경 200m 안에 모여 있었다. 북촌의 사대부들로부터 발화한 근대 개화사상은 기득권 세력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북촌의 붉은 기운은 1919년 3·1운동으로 되살아났다. 계동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송진우·최남선·최린 등에 의해 싹텄다. 경운동 보성사(조계사 앞)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만장이 이종일의 집(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전국에 배포됐다. 천도교 대표 손병희의 가회동 집과 불교계 대표 한용운의 계동 집도 지척이었다. 계동 보현빌딩(현대 사옥 맞은편) 자리는 해방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본부가 꾸려진 곳이다. 계동에 살면서 12번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결국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했다.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는 박규수와 홍영식의 집터이고, 압류당한 홍영식 집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들어섰다. 1993년 헌재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성고등여학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고등여학교, 경기여고, 창덕여고가 맥을 이었다. 근대 교육과 근대 의료의 모태였다.북촌 한옥은 ‘오래된 도시’ 서울의 징표이자 존재 가치다. 북촌의 영과 욕이라는 우리 근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이 남긴 산물이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라는 선각자가 남긴 한옥은 현대 서울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유산이자 미래유산이다. 한옥을 조선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각종 문화재로 지정된 20여채를 제외한 모든 한옥은 1920~40년대 지어진 도시형 개량 한옥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도 1913년 준공됐다. 현존하는 서울의 기와집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북촌 한옥은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일제 통치기구와 수탈기구, 일본식 가옥의 북촌 진입을 차단한 민간 차원의 방어선이었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기농의 작품이다.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도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인 기농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발과 북촌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은 적산가옥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기와집이 없는 서울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경남 고성 출신인 기농은 북촌 한옥을 남긴 데 그치지 않고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해 조선어사전 편찬을 도왔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물산장려를 몸소 실행할뿐더러…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해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나는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가 백난 중에서 회관을 완성하고자 고군분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라고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에 치하하는 글을 보냈다.한옥은 남았지만 그는 잊혀졌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치른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건국훈장 애족장 하나뿐이었다.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고, 서울의 미래를 남긴 선각자 정세권을 기리는 날은 없다. 정세권 문화상도 없고, 정세권 동상도 없다. 한편 이날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참가자들은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내세운 참신한 기획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진행과 코스, 해설 내용에도 대만족을 표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종로(종묘에서 사직까지) ●일시 : 6월 9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종로3가역 11번 출구 종묘광장공원 앞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일제강점기 남녀 학생 일기장 전시

    대구시교육청이 오는 6월 문을 여는 대구교육박물관에 일제강점기 남녀 학생이 일본어로 쓴 일기장을 전시한다. 시교육청은 최근 오타 오사무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교수가 소장한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북여고) 여학생 일기장 140페이지를 복제해 대구교육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여학생일기’라 이름 붙은 일기장은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여학생이 1936년 대구 양문사가 판매한 35전짜리 규격 일기장에 1937년 2월 18일부터 12월 12일까지 11개월 정도 일본어로 쓴 것이다. 일제강점기 교육 현실을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로 평가하는 이 일기장은 2007년 서울 한 헌책방에서 오타 교수가 사들여 2010년 국내 심포지엄에서 처음 공개했다. 당시 15∼16세 정도로 보이는 일기장 주인공 K양은 황국신민화 교육으로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에서 보낸 당시 학교생활을 기록했다. 일본군 병사 위령탑인 충령탑을 참배한 내용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일기는 모두 경어체로 쓰여 있으며 매일 담임교사에게 제출했는데 담임교사는 일기를 검열해 학생들 면학, 언동, 생활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시교육청은 밝혔다. 시교육청은 이와 함께 대구근대역사관이 소장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남학생 일기장도 똑같이 만들어 소개할 예정이다. 남학생 일기는 A 군이 같은 해 대학노트 5권 분량으로 쓴 것이다. K양이 쓴 일기와는 달리 일상을 장난기 있게 적은 내용이 많다고 한다. 두 학생이 일본어로 일기를 쓴 것은 당시 학교 차원에서 일본어 상용을 규정하고 강제한 결과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학생들 일기는 일제 식민지배 정책 아래 교육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줘 원본이 아니더라도 내용만으로도 전시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자연에 안겨, 그림에 빠져… ‘순수’를 만나다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자연에 안겨, 그림에 빠져… ‘순수’를 만나다

    자그마한 화면 속에 아름다운 색채와 아기자기한 이미지들이 어우러진 장욱진(1917~1990)의 작품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단순함이다. 산, 집, 아이, 호랑이, 산, 까치, 나무 등 평면적이고 단순한 도상들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해서 들여다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저 맹숭맹숭하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인생을 달관한 선승의 그림처럼 작은 화면 속에는 깊은 내면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드넓은 이상의 세계가 공존해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화가 장욱진의 정신 담아 경기 양주시 장흥면 계명산 자락에 자리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욱진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양주시와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손을 잡고 설립한 미술관이다. 서울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미술관은 온전히 자연 속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매표소 건물을 나오면 야외 조각공원을 지나고 구름다리를 건너야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 개관(2014년 4월) 당시에는 개천 건너편 미술관 오른쪽이 주 출입구였는데 지난해부터 조각공원이 통합 운영되면서 조각공원의 매표소를 이용하고 있다. 봄여름 나무가 우거졌을 때엔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뭇잎이 다 지고 난 늦가을인지라 언덕 위의 흰색 건물이 파란 하늘 아래서 비현실적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외관은 현대와 전통이 적당히 버무려진 모습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고 심플하다. 알싸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미술관으로 들어서니 벽면에 커다란 장욱진의 흑백사진이 반겨준다.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원없이 그림만 그리더니 죽어서도 이렇게 훌륭한 자연 속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단 미술관을 가졌으니 참 복이 많은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장욱진은 시·서·화에 안목을 지닌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가까이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 중·고교)에선 미술반 활동을 하며 동경미술학교 출신 미술교사인 사토 구니오의 수업을 통해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인 역사교사에게 대들었다가 3학년에 중퇴한 그는 수덕사에서 3년간 수양의 시간을 보내고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한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공부했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얼마 안 되어 해방을 맞은 그는 1945년 가을 국립박물관 진열과에 취직했다가 1947년 사직하고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해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창작에만 몰두한 작가의 삶 닮은 심플한 미술관 그의 나이 34세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그의 작품에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장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지만 재직 6년 만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3년 덕소에 화실을 마련해 장장 12년 동안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중년의 시대를 보냈다. 1975년 봄 그는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명륜동으로 작업실을 옮겨 1979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서울의 번잡함을 벗어나 수안보로 다시 작업실을 옮겼다가 1986년 봄부터 마지막 5년을 경기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고택에서 보냈다. 자연과 더불어 창작에만 몰두하는 심플한 삶을 원했던 장욱진은 따뜻하고 정감어린 작품들을 남기고 1990년 12월 27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전통의 조화로 英BBC ‘8대 신설미술관’ 선정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의 작품처럼 작고 심플하지만 깊이가 있다. 장욱진의 그림 ‘호작도’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최-페레이라 건축에서 설계한 건물은 중정과 각각의 방들로 구성된 독특한 구조다. 대지면적 6204㎡에 연면적 1852㎡에 이르는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각층에 위치한 두 개의 전시실 외에 영상실, 강의실, 아카이브 라운지를 갖추고 있다. 매끈한 흰색 외관부터 내부의 마무리까지 현대적인 감각과 전통적인 디테일이 조화롭게 설계돼 있는 건물은 미술관이 개관한 2014년에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했고 한국건축가협회 올해의 베스트7, 영국 BBC의 2014년 8대 신설 미술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내년 1월까지 ‘행복’ 주제로 장욱진과 민화 전시 미술관은 벽화, 유화, 판화, 먹그림 등 장욱진의 다양한 작품 23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2014년 봄 개관 이후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국내외 근현대 미술에 대한 다양한 주제기획 전시를 열었다. 지난 9월부터 내년 1월까지 ‘행복’이라는 주제로 장욱진과 민화를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변종필 관장은 “개관 이후 지금까지 장욱진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를 다양하게 진행해 왔다”면서 “2017년 장욱진 탄생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장욱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상설관을 개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기 북부의 유일한 공공미술관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2년 6개월밖에 안 된 신생 미술관이지만 탄탄한 기획전시 외에도 시민들을 위한 교육, 공공프로젝트, 미술창작스튜디오(777레지던스), 전국 대학생 대상 드로잉 공모전 등의 운영을 통해 지역 문화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lotus@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자연 속에 ‘심플’하게 자리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함혜리 기자의 미술관 기행] 자연 속에 ‘심플’하게 자리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자그마한 화면 속에 아름다운 색채와 아기자기한 이미지들이 어우러진 장욱진(1917~1990)의 작품을 보고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단어는 단순함이다. 산, 집, 아이, 호랑이, 산, 까치, 나무 등 평면적이고 단순한 도상들은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해서 들여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저 맹숭맹숭하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인생을 달관한 선승의 그림처럼 작은 화면 속에는 깊은 내면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드넓은 이상의 세계가 공존해 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계명산 자락에 자리잡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http://changucchin.yangju.go.kr/)은 박수근,이중섭과 함께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장욱진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양주시와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손을 잡고 설립한 미술관이다. 서울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미술관은 온전히 자연 속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가는 것 만으로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매표소 건물을 나오면 야외 조각공원을 지나고 구름다리를 건너야 미술관이다. 미술관 개관(2014년 4월) 당시에는 개천 건너편 미술관 오른쪽이 주 출입구였는데 지난 해부터 조각공원이 통합운영되면서 조각공원의 매표소를 이용하고 있다. 봄 여름에 나무가 우거졌을 때엔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뭇잎이 다 지고 난 늦가을인지라 언덕 위의 흰색 건물이 파란 하늘 아래서 비현실적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외관은 현대와 전통이 적당히 버무려진 모습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고 심플하다. 알싸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미술관으로 들어서니 벽면에 커다란 장욱진의 흑백사진이 반겨준다.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원없이 그림만 그리더니 죽어서도 이렇게 훌륭한 자연 속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단 미술관을 가졌으니 참 복이 많은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장욱진은 시·서·화에 안목을 지닌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가까이 했다. 가족과 함께 상경한 뒤 공부보다 그림에 열중했던 그는 1926년의 보통학교 3학년 시절에 전일본소학생미전에 까치그림을 출품해 1등상을 받았다. 이 때 상품으로 유화물감을 받아 유화를 처음 시작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 중·고교)에선 미술반 활동을 하며 동경미술학교 출신 미술교사인 사토 구니오의 수업을 통해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인 역사교사에게 대들었다가 3학년에 중퇴한 그는 수덕사에서 3년간 수양의 시간을 보내고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가족은 미술을 본업으로 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지만 제 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특선을 하면서 집안의 반대도 수그러들었다.이듬해인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공부했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얼마 안되어 해방을 맞은 그는 1945년 가을 국립박물관 진열과에 취직했다가 1947년 사직하고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해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34세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그의 작품에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다. 전쟁과 함께 닥쳐온 불안과 공포, 육체적 고달픔 속에서의 그는 오히려 자신의 꿈꾸는 삶을 그렸다. 유학시절을 포함한 그의 초기 그림 색상, 형태 면에서 토속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1·4후퇴 때 고향인 충남 연기에서 작업하는 동안 색감이 선명해지고 형태가 더욱 간결하게 정돈된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누런 황금들판 사이를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담을 ‘자화상’이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장욱진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하지만 재직 6년만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3년 덕소에 화실을 마련하고 장장 12년동안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중년의 시대를 보냈다. 자연 속에서 밤 산책과 새벽의 신선미를 즐기며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는 그림과 씨름하다 건강을 해쳐 사경을 넘나들기도 했다. 덕소시절의 마지막 3년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한결 절제된 작품을 많이 그렸다. 1975년 봄 그는 덕소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명륜동으로 작업실을 옮겨 79년까지 머물렀다. 명륜동 시절 그의 작품에는 시골남자와 여자, 가족, 정자와 원두막, 산과 동산 등이 화면에 등장하고 색채는 동양화의 담채풍으로 묽어지고 단순해진다. 그는 서울의 번잡함을 벗어나 수안보로 다시 작업실을 옮겼다가 1986년 봄부터 마지막 5년을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고택에서 보냈다. 자연과 더불어 창작에만 몰두하는 심플한 삶을 원했던 장욱진은 따뜻하고 정감어린 작품들을 남기고 1990년 12월 27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80년대와 90년에 유난히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용인에서 지낸 마지막 5년간은 평생에 걸쳐 그린 720점의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20여점을 그렸다. 마지막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화가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천생의 화가임을 글과 말을 통해 자주 고백하곤 했다. “나의 지나간 40년은 오직 그림과 술 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었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 뿐이다.”(샘터 1974년 9월호)  장욱진의 작품들은 대부분 작다. 그가 끝까지 30호미만의 그림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장욱진 자신은 ‘세대’ 1974년 6월호에 이렇게 쓰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30호 이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하면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한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작은 화면에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들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해 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장욱진의 작품처럼 작고 심플하지만 깊이가 있다. 장욱진의 그림 ‘호작도’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최-페레이라 건축에서 설계한 건물은 중정과 각각의 방들로 구성된 독특한 구조다. 대지면적 6204㎡에 연면적 1852㎡에 이르는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각층에 위치한 두개의 전시실 외에 영상실, 강의실, 아카이브 라운지를 갖추고 있다. 매끈한 흰색 외관부터 내부의 마무리까지 현대적인 감각과 전통적인 디테일이 조화롭게 설계돼 있는 건물은 미술관이 개관한 2014년에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했고 한국건축가협회 올해의 베스트7, 영국 BBC의 2014년 8대 신설 미술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양은 단순한데 호랑이를 평면으로 그린 듯한 구조인지라 내부 공간은 단조롭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공간이 이어져 나타나는 1층 전시실을 지나 가파른 각도로 꺾어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영상실이 있다. 그 입구에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소 돼지 개 닭 등 동물을 그린 ‘동물가족’이란 제목의 벽화는 덕소화실에 그려졌던 것을 그대로 옮겨와 미술관에 영구기증한 작품이다. 장욱진은 덕소시설 우시장 구경가기를 즐겼는데 소 그림에는 실물 쇠 코뚜레와 워낭을 걸어놓아 웃음을 자아낸다.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의 벽면에는 덕소 작업실의 부엌 벽에 그려져 있던 ‘식탁’이 설치돼 있다.  미술관은 벽화, 유화, 판화, 먹그림 등 장욱진의 다양한 작품 23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2014년 봄 개관 이후 소장작품을 중심으로 국내외 근·현대 미술에 대한 다양한 주제기획 전시를 열었다. 지난 9월부터 내년 1월까지 ‘행복’이라는 주제로 장욱진과 민화를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변종필 관장은 “개관이후 지금까지 장욱진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기획전시를 다양하게 진행해 왔다”면서 “2017년 장욱진 탄생 100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장욱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상설관을 개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기 북부의 유일한 공공미술관인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2년 6개월밖에 안된 신생 미술관이지만 탄탄한 기획전시 외에도 시민들을 위한 교육, 공공프로젝트, 미술창작스튜디오(777레지던스), 전국 대학생 대상 드로잉 공모전 등의 운영을 통해 지역 문화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점·선·색·면의 자연… 그 속에서 찾은 자유

    점·선·색·면의 자연… 그 속에서 찾은 자유

    한국의 자연을 특징짓는 것은 구비구비 이어지는 산이다. 유영국(1916~2002)은 이런 한국의 자연이 지닌 정수를 아름다운 색채와 단순하고 대담한 언어로 그려 낸 화가다. 김환기와 함께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기록되는 유영국의 화업 60년을 보여주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 근대미술 거장 시리즈의 마지막 전시로 마련한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이다. 이번 전시는 1937년 유학시기 작품부터 1999년 절필작에 이르기까지 60여년 화력을 보여주는 작품 100여점과 유영국문화재단 소장의 아카이브 50여점이 총망라됐다. 작가 생존 시 열린 15차례의 개인전이나 사후의 전시를 통틀어 최대 규모다. 1978년 이후 공개되지 않았던 개인 소장 작품들 중 특히 작가의 최고 절정기로 장엄한 자연을 표현하기 시작한 1960년대의 대형 유화작품 30여점은 유영국 회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유영국이 가장 좋아했던 서양화가는 추상회화의 선구자 피에트 몬드리안이었다. 몬드리안의 작품이 “말이 없어 좋다”던 그의 작품 역시 말이 없다. 대신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름다운 색상으로 채워진 이 조형요소들은 서로 긴장하는 듯하면서도 묘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엄한 산맥, 깊은 숲과 계곡, 지치지 않는 붉은 태양, 푸른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추상적인 이미지들은 사실적인 자연의 모습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연의 정수에 다가가게 한다. 평생 400여점의 아름다운 유화작품을 남긴 그의 작품에는 특히 ‘산’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그는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고 했다.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부유한 지주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유영국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다 졸업을 1년 앞두고 자퇴한 뒤 일본으로 건좇가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자유로운 학풍을 자랑했던 문화학원에서 수학하며 재야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무라이 마사나리(1905~1999), 하세가와 사부로(1897~1957) 등 당대 일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추상미술 리더들과 교유했다. 사진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 문화학원 졸업 후에 오리엔탈사진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포화 속에서 귀국한 그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부로, 양조장 주인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양조장 사업이 꽤 번창했지만 “금산도, 금밭도 싫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1955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재개했다. 그의 나이 쉰 살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려는듯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며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한국의 전위적인 미술단체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다 1964년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스스로 선언하며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단체 활동을 접고 오로지 개인 작업에 전념했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해 8시부터 11시까지 작업하고 점심 식사 후 다시 2시부터 6시까지 작업하는 규칙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작품에 매달렸다. 스스로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좀 하고 그 후엔 부드럽게 자연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조형실험 과정을 거친 뒤 작가로서 정점에 도달했을 1977년 공교롭게도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후 심장박동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37번이나 입원하며 투병하면서도 그는 절필작 ‘작품’을 그린 1999년까지 부드럽고 평화로운 회화세계를 펼쳤다. 전시는 시기별로 크게 1937년 일본 유학기부터 1964년 개인전까지, 그가 그룹활동의 종언을 선언한 뒤 2002년 타계할 때까지로 나눠 작품들을 보여준다. 지난 4일 개막식 때 전시장을 찾은 부인 김기순(97) 여사는 “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면 작업실로 직행해 캔버스를 어루만지던 남편을 보면서 이런 것이 예술가의 삶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면서 “각자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남편이 병석에 있으면서 그린 작품들이 특별히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계속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빼곡한 빌딩숲 사이, 역사는 흐른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빼곡한 빌딩숲 사이, 역사는 흐른다

    비운의 흥화문… 혁명의 경교장… 낭만의 성우이용원 서울미래유산은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등 5개 분과로 나뉜다. 도시관리분과 세부 선정기준에 따르면 지어진 지 40년 이상 된 건조물로서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중 특히 근대 건축 특성이 잘 나타나 있거나 훼손·멸실 가능성이 높은 건물 위주로 선정한다. 서울의 도시 발전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조물이나 흔적도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이름난 건축가의 건축물 중에서는 시대별 대표작이나 인지도가 높은 작품이 대상이다. 다음 회엔 문화예술분과 세부 선정기준을 알아본다. 서울시는 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서울신문·문화지평과 공동 주관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총 20회 중 지난주까지 13회차를 진행했다. 오는 22일 답사는 웃대 일대 문화유산을 배건욱 서울미래유산해설사와 함께 돌아본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11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지난 1일 오전 10시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있는 경희궁에서 시작했다. 이날 해설은 한선영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맡았다. 이번 답사 경로는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서대문역~충정로역 라인과 많이 겹친다. 그 길 위에 놓여 있는 숱한 서울미래유산들을 이번 답사에서 확인했다. 광화문역에서 경희궁까지는 500여m를 걸어야 한다.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새문안로를 따라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걷다 보면 구세군 본영회관을 만날 수 있다. 회관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기독교 서점 ‘생명의 말씀사’가 있다. 1953년 팀선교회 선교사들이 만든 기독교 서적 전문 출판사다. 1985년 김재권씨가 인수한 뒤 아들과 함께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서울시는 “한국 교회 양서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기독교 서점의 대형화를 시도하는 등 기독교 서점 문화를 주도해 왔다는 데 큰 의의를 지닌다”는 이유로 이곳을 미래유산에 선정했다. 경희궁과 정문인 흥화문은 통째로 뜯기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유물이다. 조선조 광해군 10년(1618년)에 지어진 경희궁은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전각들을 헐거나 매각하고 일부는 이전하는 등 무참히 유린당했다. “동향이던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습니다. 박문사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만든 절인데요, 이때는 경춘문이란 이름의 현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박문각이 헐리고 신라호텔이 들어서자 다시 영빈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정문 기능을 하다가 1988년 가까스로 경희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엉뚱한 곳에 있다가 돌아왔지만, 흥화문은 끝내 제자리를 잡지 못했다. 흥화문이 간직한 비운의 역사를 한 해설사가 풀어내자 답사단에서는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경희궁 정전이던 숭정전은 한일합병 이후 세워진 경성중학교 교실 건물로 사용되다가 1926년 지금의 동국대 자리에 있던 일본 조계사에 매각된 뒤 옮겨져 본당으로 사용됐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 강의동으로 쓰이다 지금은 정각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이란 이름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날 답사에 나온 전수정(36·여)씨는 “지난 역사가 순조로웠다면 서울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 먹먹하다”며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여 빚어진 결과물이 역사라면 좀더 세심하게 주변을 기억하고 기록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흥화문에서 조금만 걸으면 강북삼성병원 앞에 있는 돈의문 터 표지를 만날 수 있다. 돈의문은 한양 4대 문 중 하나로 서쪽 대문이다. 서대문,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다. 신문로, 새문안로, 새문안교회 같은 명칭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1396년 한양도성 축조 때 만들어졌고 1915년 도로 개설에 따라 철거됐다. 한 해설사는 “당초 서울시는 2013년까지 돈의문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예산·원형 복원 등의 문제로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라고 설명했다. 강북삼성병원 안에는 경교장(사적 제465호)이 있다. 일제강점기 부호인 최창학의 저택이었던 경교장은 최씨가 친일 경력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헌납했다. 그 뒤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이자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건물로 사용했다.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해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서거하기까지 3년 7개월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건물 이름은 근처에 있던 경교라는 다리에서 따왔다. 백범 서거 후 외국 대사관저, 미군시설, 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년 원형대로 복원됐다. 현재 문화일보 자리는 옛 동양극장 터다. 이번 답사 주제의 한 축은 ‘영화 같은 역사’다. 동양극장 터를 비롯해 서대문 로터리에는 지금은 헐려서 사라진 화양극장이 있었다. 한 해설사는 “동양극장은 1935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으로 신파극을 공연했다”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연극이 공연될 때는 장안 기생들이 대거 모여들었다”고 했다. 동양극장은 광복 후 운영난으로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폐관된 뒤 1995년 철거됐다. 정면 길 건너에는 매끈한 대리석 건물의 4·19 혁명 기념도서관이 있다. 이 자리는 제1공화국 실세로 불리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가 살던 집이 있었다. 1960년 일어난 4·19 혁명은 이기붕이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3·15 부정선거가 발단이 됐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했고 이후 집은 국가로 환수됐다. 정부는 4·19 혁명 희생자 유족들에게 이곳을 무상으로 빌려 주다가 1982년 증여했다. 유족들은 1964년 사설 도서관으로 시작해 공공 도서관으로 발전시켰다. 한 해설사는 “4·19 혁명 기념도서관은 자유·민주·정의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4·19 혁명의 숭고한 이념과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도 계승, 발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설립된 특수 도서관”이라며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등 대비되는 두 역사를 모두 간직한 곳이라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고 설명했다. 충정로역 주변에는 우리나라 아파트의 효시라고 불리는 1932년 지어진 충정 아파트, 1900년대 초기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의 충정각, 1892년 세워진 약현성당(사적 제252호), 1940년 개교한 미동초등학교 등 고풍스럽고 이야기를 한껏 담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충정 아파트 내부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니 거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역정을 내며 “사진 같은 거 찍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유명세를 타다 보니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탐방객들이 답사할 때 거주민 입장을 배려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충정각은 문동수(46)씨가 임대해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다. “충정각 뒤 건물은 1906년 설립된 이명래 고약(명래제약)이 있던 자리”라고 충정각 직원이 귀띔했다. 답사단은 아현동 가구거리를 지나 한동안 걸어 만리시장으로 향했다. 그사이 답사단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국제KEY디지털’이란 열쇠 만물상과 손기정기념관을 지났다. ‘국제KEY디지털’은 1961년 현 위치에 창업주 최창윤씨가 개업해 1991년 아들에게 물려줬다가 2001년부터 최씨가 다시 운영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반세기 넘게 운영된 철물점으로, 만리동 1가 일대의 한 시대를 반추해 주는 장소다. 옛 양정고 자리에 들어선 손기정기념관은 2012년 개관했다. 양정고는 1905년 양정의숙으로 세워져 인재를 배출하다가 1988년 서울 목동으로 이전했다. 이 자리에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옹 기념관이 세워졌다. 만리시장 꼭대기에 있는 성우이용원에 들어서자 이남열(68) 사장이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냈다. 성우이용원은 슬레이트 지붕에 기우뚱한 외관이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 사장은 “서울시를 통해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받을 수 없느냐”며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다. 성우이용원 내부는 1960년대에서 시간이 멈춰 선 듯하다. 타일과 시멘트로 만든 세면대와 저수조, 그리고 연탄 난로가 당시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성우이용원은 1927년 이발 기술자였던 서재덕씨가 문을 열었다. 서씨 사위인 이성순씨가 1935년부터 이어받았고 현재는 3대째인 이 사장이 운영하고 있다. 이 사장은 이발만 56년째라고 했다. 성우이용원은 내년이면 창업 90년을 맞는다. 이씨는 “요즘 유행하는 ‘투 블록’ 머리 스타일은 유럽 거지들이 하고 다니는 것이고, ‘블루클럽’(이발소 브랜드) 커트 방식은 인도네시아, 미장원 방식은 대만에서 유행하는 이발법이지요”라고 농담 섞어 말했다. 그러면서 “정통 일본 이발 기술을 익히려면 적어도 15년이 걸리고 칼·가위를 제대로 갈려면 30년이 걸려요”라고 덧붙였다.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 재벌 총수와 대기업 임원들도 많이 찾아왔고, 동네 손님은 채 열 명이 안 된다고 했다. 이 사장은 자신의 이발 기술은 물론 이용원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데 자부심이 상당했다. 다만 낡고 불편한 시설 개선에 서울시의 지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답사에 참여한 박태백(64)씨는 “43년 서울살이를 하고 있지만 집과 직장만 알았다”며 “서울미래유산과 골목답사를 통해 서울의 애환 어린 인생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서 보람 있었다”고 말했다. 임윤재(65)씨는 “인천에서만 40년을 살지만 한양 도성과 성저십리 답사에 관심이 많다”며 “그동안 역사 유물 위주로 답사했는데 근대와 미래유산을 둘러보니 큰 공부가 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부산항일학생의거 숨은 주인공 10인 찾았다

    부산항일학생의거 숨은 주인공 10인 찾았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11월 23일 ‘경남 학도 전력증강 국방대회’가 열렸다. 학교 병영화 정책 가운데 하나로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무장행군, 수류탄 던지기 등 15개 종목을 겨루게 했다. 마지막 행군을 남긴 터에 한국인 재단인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가 우승을 확정하자, 심판장을 맡은 일본군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노다이 겐지 대좌가 총점을 조작해 일본인 학교인 당시 부산중학교를 1위로 발표했다. 분노한 동래고보, 제2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 학생들은 우리 민요를 부르며 보수동과 광복동 거리를 행진한 뒤 노다이의 집 앞에서 돌 세례를 퍼부었다. 오후 10시쯤엔 경찰이 귀가하던 학생 200여명을 검거했다. 83명(퇴학 21명, 정학 42명, 견책 14명, 근신 6명)이 징계를 받았다. 동래고보 학생 45명에겐 모두 중징계(퇴학 12명, 정학 33명)가 떨어졌다. 일제 대륙침략전쟁의 전초기지인 부산 한복판에서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일명 ‘노다이 사건’)에 참여한 학생 명단을 수록한 자료가 발굴됐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이를 통해 당시 항일운동 참여자 10명을 추가로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에 발굴한 기록물엔 두 학교 전체학생 1021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각자 처분을 받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이전엔 노다이 사건과 관련해 단편적인 신문기사와 참가자들의 회상, 경찰 조서에 의존해 내용을 파악했다. 이로써 동래고보 3학년과 4학년, 제2공립상고 4학년 각 1명(이상 정학), 제2공립상고 4학년 4명(견책), 4학년 2명, 1학년 2명(이상 근신)이 참여한 사실을 밝혀냈다. 노다이 사건으로 검거된 200여명 가운데 14명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부쳐져 징역 8개월 등 실형을 살아야 했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서동철 칼럼] 헌법재판소와 새 도서관

    [서동철 칼럼] 헌법재판소와 새 도서관

    지난주 서울 종로구 재동에 있는 헌법재판소 청사의 도서관 건축 예정지 지하에서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후반에 걸친 다양한 건물군(群)이 확인됐다는 소식이 TV뉴스에서 들렸다. 재동이라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北村)의 중심지다. 의미 있는 유적이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 조선시대 도성(都城) 내부의 핵심 주거지라 할 수 있다. 이 자리는 영조와 숙의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길 옹주가 1765년 능성위(綾城尉) 구민화와 혼인하고 하사받은 능성위궁 터다. 이후 개화파 지식인 민영익이 이곳에 집을 지었고, 1882년 외아문(外衙門)이라고도 불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들어섰다. 여기에 1922년 지어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건물과 1960년대 축조된 창덕여자고등학교 시설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발굴 조사에서는 이렇듯 다양한 역사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건물 6동의 유구가 드러났다고 했다. 조선 초 분청사기 조각과 중기 이후 백자 조각, 기와 조각 등도 출토됐다. 특히 ‘건물터 1호’로 이름 지어진 능성위궁 터에서는 건물의 장대석과 초석, 그리고 온돌 등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궁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뉴스를 보면서 이런 유적이 헌법재판소 부지에서 발견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간 개발의 경우 지하에서 확인된 유구의 역사성에 공감하기보다는 ‘어디에나 있는 하찮은 돌 몇 개’로 치부하기 일쑤다. 최소한의 유적 보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밀당’에 쏟아야 한다. 그러니 행정부나 지방자치단체라도 청사 신축 과정에서 중요한 매장 문화재가 발견됐다면 민간 건설 업자와는 차원이 다른 보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물며 헌법재판소임에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뉴스 말미의 소식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쉬웠다. 헌법재판소는 유적 보존을 논의하면서 ‘건물터 1호’의 일부인 15㎥는 보존이 가능하지만, 역사성 있는 유구가 드러난 일대 150㎥를 모두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서울시를 비롯한 문화재 당국이 ‘보존 및 활용 가치가 크다’며 ‘원위치 보존’을 요구한 넓이는 실생활에서 흔히 쓰는 단위로 45.5평 정도이니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을 것이다. 하지만 헌재가 새로 지을 도서관 내부에 보존하겠다는 4.5평은 누가 봐도 문화재 보호에 대한 기본적 의지가 있다고 평가할 수 없는 면적이 아닐까 싶다. 헌재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 땅속 문화재 보존과 관련해서는 가슴 아픈 일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개발 과정에서 역사성 있는 지하 유적이 발견되면 그 모습 그대로 보존이 이루어지는 경우란 거의 없다. 결국 최소한의 보존으로 결론이 내려지면, 유적은 아파트 단지 귀퉁이나 대형 건물의 작은 유리창 아래 지하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보존 조치가 내려졌다고 영구 보존이 되는 것도 아니다. 땅속 문화재는 발굴해 햇빛을 보는 순간부터 파괴가 시작한다. 복원을 한다고 해 놓지만 흙은 깎여 나가고 돌은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지속적인 유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 모습을 잃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이렇게 문화재 가치를 잃었다는 이유로 문화재청의 ‘매장문화재 보존조치 유적 재평가위원회’에 회부되는 유적은 한 해 수십 건에 이른다. 헌법재판소는 유적이 발견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다른 시설도 아닌 도서관을 짓는다고 한다. 지하에 조선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역사가 켜켜이 쌓인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서관이란 멋지지 않은가. 능성위궁의 장대석은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용도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헌재는 그렇게 역사성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적인 성공 사례를 새 도서관에 구현했으면 한다. 상당한 면적을 지하에 보존해야 하는 만큼 서울시는 건물 높이와 층수에서는 과감하게 인센티브를 주어야 한다. 예산 당국도 어디에나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기 바란다.
  • [기고] 호림 윤장섭, 개성 5걸에 등극하다/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기고] 호림 윤장섭, 개성 5걸에 등극하다/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개성상인으로 유화증권·성보화학 등을 창업하고 호림박물관을 설립한 호림 윤장섭이 94세로 영면에 들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호림은 간송 전형필, 호암 이병철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수장가로 알려져 있다. 호림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개성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의 특강을 들으면서였다. 이 자리에는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다. 1916년생인 최순우는 호림의 고향 6년 선배다. 혜곡이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던 1934년 늦가을 어느 날 박물관사(舍)에서 고유섭은 혜곡에게 박물관 일을 배우도록 권했다. 그리고 며칠 후 혜곡은 그 뜻에 따르겠다고 우현에게 밝혔다. 한국 미술사를 잇는 두 거장의 인연이 시작된 그 무렵에 호림도 있었던 것이다. 혜곡의 스승이 우현인 것처럼 호림의 인생에 큰 반향을 준 이도 우현이었다. 따라서 그때 그곳은 호림까지 아우르는 우리 박물관사(史)의 한 장면이었다고 봄이 옳을 것 같다. 호림은 평생을 근검과 절제의 엄격한 삶을 살았다. 손쉽게 뽑아 쓰는 휴지 한 장도 온전하게 쓴 적이 없었으며, 점심 식사도 일정한 금액 이상의 것은 철저히 절제했다. 2011년 11월 어느 토요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를 관람하고 있던 필자에게 검소하다 못해 남루하기까지 한 복장에 낡은 등산 모자를 눌러쓴 노인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던 그분은 다름 아닌 호림 선생이었다. 우리 나이로 91세를 바라보던 가냘픈 체구의 호림 선생은 수행원도 없는 혼자였다. “김 선생 호두과자 하나 드세요.” 왼손에 들려 있던 작은 봉투에서 호두과자 한 알을 건네주시며, 지하철로 왔다고 하셨다. 개성상인 특유의 소탈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호림은 평소 “회사를 광고할 돈이 있으면 문화재를 한 점이라도 더 수집하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문화재에 애정을 쏟았으며, 약탈 문화재 환수에도 관심이 컸다. 역시 고향 선배인 당시 황수영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일본에 있는 국보급 불교문화재를 찾아와야 한다고 하자 만사를 제쳐 두고 현지에 가서 거금을 들여 구입해 오기도 했다. 오늘날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8점의 국보와 52점의 보물 등 1만 5000여점의 문화재는 호림의 이런 열정이 일궈 낸 대업이다. 호림은 2012년 명지대에서 국내 최초로 명예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필자는 축사를 통해 “선생님! 더 장수하시어 남은 생은 미술사학자로 살아 주십시오”라고 덕담을 드렸다. 호림은 고유섭 개성박물관장과의 인연을 거쳐 최순우, 황수영과 더불어 역시 개성 출신 선배인 진홍섭 전 연세대 석좌교수 등 이른바 개성 3걸과 교류하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워 나갔다. 호림의 별세는 이미 고인이 된 전형필, 이병철을 이은 제1대 소장가 시대와 고유섭,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을 이은 개성 예맥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수록됨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를 고유섭과 윤장섭이 포함된 개성 5걸로 규정하고자 한다. 우리 박물관사에서 이들은 이미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됐기 때문이다.
  •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별세, 조선일보 이끌어 온 ‘신문 인생’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별세, 조선일보 이끌어 온 ‘신문 인생’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이 8일 오전 11시 7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88세. 방 상임고문은 고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의 동생으로 1970년 조선일보 신임 사장으로 임명됐다.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중앙문화학원(중앙대) 이사장, 한·독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93년에 조카인 방상훈 현 대표이사 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이후 지난 2010년부터 현재까지 조선일보 상임고문을 지내왔고, 지난해부턴 연세대제단 명예이사장을 맡았다. 고인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방응모 선생의 친형 방응곤 씨의 손자로, 1928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경성 경신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상과(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52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경제부 기자 등으로 일했다. 저서로는 ‘조선일보와 45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미수문집 ‘신문인 방우영’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별이 된 ‘KOREA’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

    별이 된 ‘KOREA’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

    광복 후 첫 올림픽 역도 동메달 14년 최장수 태릉선수촌장 지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이 지난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7세.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이며 장지는 경기 안성시 천주교 추모공원이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다. 김 고문은 대한민국이 ‘KOREA’란 이름으로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올림픽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낸 데 이어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첫 메달이었고, 첫 두 대회 연속 메달이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한국에 역도를 보급한 서상천이 쓴 ‘현대 체력증진법’을 읽고 역도를 동경해 중앙체육연구소에 발을 들이면서 역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역도 입문 2년 만인 1935년 제6회 전조선 역기대회 중체급에서 정상에 오르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출전을 위한 조선 예선에서 합계 317.5㎏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조선 대표로 전일본 역기선수권대회에 나서 다시 317.5㎏을 들어 챔피언이 됐다. 하지만 일본역도연맹은 “김성집이 만 18세가 되지 않았다”며 올림픽 출전을 허가하지 않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다. 광복 이후 김 고문은 런던올림픽 역도 대표팀 선발전에서 미들급 합계 385㎏으로 우승했다. 서울을 떠나 런던까지 20일이 걸리는 고된 여정 끝에 올림픽에 나선 김 고문은 합계 380㎏을 기록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헬싱키올림픽에서는 감독 겸 선수로 75㎏급 경기에 나서 합계 382.5㎏을 들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한 뒤에는 체육행정가로서 일했다. 특히 고인은 역대 최장수인 13년 7개월 동안 태릉선수촌장을 지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절제된 색채… 현실과 비현실 넘나들다

    절제된 색채… 현실과 비현실 넘나들다

    낭만이 살아 있던 시절의 대한민국 미술계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취향을 지닌 멋쟁이가 있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이자 초현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권옥연(1923~2011) 화백이다. 차분한 청회색의 풍부한 질감과 신비한 형태들로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했던 그는 서구식 로맨티스트였지만 누구보다도 우리의 자연과 전통미의 가치를 지키는 데 열과 성을 쏟았다. 민예품 애호가였던 그는 전통 목가구와 집기, 석물들을 수집해 늘 곁에 두고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부인인 연극인 이병복(88) 여사와 함께 1960년대 후반부터 금곡의 궁집을 비롯해 사라질 위기의 고택들을 매입해 경기도의 남양주에 이전 복원하고 자신의 호를 딴 무의자(無衣子)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다. 오는 16일은 그가 모든 것을 남기고 떠난 지 4주기가 되는 날이다. 가나문화재단은 권 화백의 4주기를 맞아 대규모 회고전을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고 있다. 별세 이후 처음 열리는 회고전에선 권 화백 특유의 조형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 50여점을 선보인다. 전시장 입구에는 40대 시절 권 화백의 사진과 함께 권 화백의 작업실을 재현해 놓았다. 아틀리에를 재현하면서 이 여사는 권 화백이 무대 소품으로 써보라며 만들어 주었던 달력 종이를 꼬아 만든 지승 작품들을 설치했다. 이 여사는 문화예술 공연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1966년 극단 자유를 창단해 100여편의 작품을 공연했으며 무대미술과 의상을 하나의 예술로 끌어올린 1세대 무대 미술가다. 함경남도 함흥의 명문가였던 권진사댁 5대 독자로 태어난 권 화백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에서 미술부 활동을 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와 프랑스 파리 유학을 거치며 상징주의, 후기 인상주의, 앵포르멜, 초현실주의 등 동시대의 주요한 미술사조를 접했다.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서구 미술에 한국적인 향토성을 융화시킬 수 있는 조형언어를 찾으려 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머물러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와 모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본격적인 그의 화업은 프랑스 체류기와 1960년대의 토속적 추상화 시기, 1970년대 이후의 초현실적 경향의 구상화 시대로 나뉜다. 그는 1958년 파리의 살롱 도톤과 레알리테 누벨전에 야생의 동물들과 마른 나뭇가지 같은 형상들이 두껍게 발라진 무채색의 추상 풍경화 ‘절규’를 출품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작품을 ‘현실을 넘어선 동양적 초현실주의’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1960년 귀국 후 절제된 색채를 바탕으로 한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청색, 회색, 녹색 등을 여러 번 덧칠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풍경은 특유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미묘한 회색조의 변화와 함께 상념에 빠진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인물화는 대부분 모델 없이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1970년대는 권 화백이 여성 인물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시기다. 대상이 없는 그림 속 인물들은 그의 추상화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권 화백은 전통적인 기물의 형상을 풍경 또는 추상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솟대, 호롱불, 당산나무와 오방색의 천, 달과 기러기 등 전통적인 소재 위에 특유의 회색빛 어두운 색조가 더해지면서 화면은 더욱 신비롭고 장중한 분위기를 갖게 된다. 평론가 김미정은 전시 서문에 “그는 시대에 따라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고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를 가리지 않고 그렸지만 초기 회화에 나타나는 염원하는 듯한 특유의 푸른 색조와 암시적인 사물의 묘사는 평생 일관되었다”고 적었다. 전시는 내년 1월 24일까지. (02)720-1054. 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한글 사랑한 외솔의 정신 ‘한글 특화’ 기념관서 만나자

    [명인·명물을 찾아서] 한글 사랑한 외솔의 정신 ‘한글 특화’ 기념관서 만나자

    지난 14일 울산 중구 동동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 초등학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삶과 업적을 메모하고, 한글 탁본과 틀리기 쉬운 한글 문제풀이 등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2010년 3월 문을 연 외솔 기념관과 생가를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념관 일대에는 한글마을도 조성되고 있다. 한글과 역사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외솔 기념관과 생가는 2010년 3월 23일 동동 613 일대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1개 동으로 건립됐다. 생가 3개 동도 복원됐다. 한글학자이자 교육가, 독립운동가로 한글연구와 보급에 평생을 바친 외솔 선생의 업적을 기리려는 것이다. 전국 유일의 한글학자 기념관이자 한글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주민과 함께하는 한글 교육, 문화 및 체험프로그램 등이 진행되고 있다. 최현배 선생은 1894년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를 창립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 등 한글 보급과 교육에 힘썼다. 해방 이후 교과서 행정의 기틀을 잡았고, 한글학회 이사장과 연세대 부총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쳤다. ‘우리말본’, ‘한글갈’ 등의 저서를 남겼다. 외솔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사업은 2001년 말 울산시 문화재위원회에서 선생의 생가터를 ‘울산시 기념물 39호’로 지정한 이후 2002년 10월 생가복원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화됐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유품과 관련 자료를 기탁하면서 2008년 3월 착공해 2009년 9월 준공했다. 기념관은 외솔의 업적과 유품, 저서 등으로 채워진 전시관과 영상실, 한글교실 등으로 만들어졌다. 선생의 저서와 한글 관련 서적 1만여점, 타자기·초상화 등 유품 30여점 등이 1층에 전시돼 있다. 2층 다목적 강당에서는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한글교실을 운영한다.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면서 관람객들에게 외솔 선생의 업적 등을 설명해 준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기념관에 가면 최현배 선생의 동상(높이 2.5m)이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는다. 한복을 입고 오른손에 안경, 왼손에 책을 든 모습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전시관부터 관람을 시작한다. ‘나라사랑의 길’, ‘한글갈’, ‘우리말 큰사전’, ‘조선민족갱생의 도’ 등 선생의 대표 저서와 지팡이, 노트, 타자기, 직접 쓴 원고 등 주요 유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전시관 코너를 돌면 선생이 방에서 책을 보는 모습과 일제에 의해 3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상황을 재현한 밀랍 인형을 만난다. 전시관 벽에는 ‘한글갈’, ‘우리말 큰사전’, ‘나라사랑의 길’ 등 선생의 주요 저서를 설명하고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학회수난사건, 교육자의 길, 한글기계화 등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보여주는 글과 사진으로 가득하다. 2층은 다목적 강당으로 사용된다. 노인 한글교실과 토요 문화학교 등이 열린다. 강당을 내려와 밖으로 나가면 초가집이 눈에 들어온다. 외솔 선생이 1894년 태어나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실제로 살았던 생가를 복원한 집이다. 안채, 아래채, 부속채 3개 동으로 이뤄진 생가는 아궁이와 가마솥, 장독대, 담, 디딜방아까지 세세하게 재현했다. 기념관은 울산시 지정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됐다. 울산지역 전문박물관은 외솔 기념관을 비롯해 울산박물관, 암각화박물관, 울산대 박물관, 대곡박물관, 장생포 고래박물관, 외솔 기념관, 울산해양박물관, 울산옹기박물관, 울주민속박물관 등 모두 9개다. 기념관 건립 이후 주변에 한글을 모티브로 한 건물들도 늘고 있다. 매년 10월 한글날 행사도 열려 주민들의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 또 이달 중 기념관 인근에 외솔 도서관(한옥도서관)이 개관한다. 지상 1층으로 된 외솔 도서관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원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지고 있다. 이곳에는 한글 관련 자료를 비롯해 다양한 일반 서적도 비치된다. 도서관 기능뿐 아니라 주변에 은행나무를 심고 돌계단, 흙길 등을 만들어 시민들의 쉼터로 활용될 전망이다. 외솔 기념관은 한글문화 확산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중구는 기념관을 확대한 한글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한글마을은 기념관의 취지에 맞게 한글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마을, 역사문화를 느낄 수 있는 마을, 체류하며 느낄 수 있는 마을 등 4개 주제별로 만들어지고 있다. 병영사거리에서 서동사거리까지 1250m 구간에 한글상징 가로등 46개와 잔디등 12개를 설치했다. 기념관 입구 주차장 일대에 설치한 정육면체 모양의 잔디등에는 선생의 저서인 우리말본 머리말 내용을 표기했다. 외솔 생가와 기념관을 중심으로 한글을 테마로 한 ‘외솔 탐방길’도 조성되고 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선생의 한글 사랑을 기리고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다. 외솔의 생가를 중심으로 병영교회, 병영초등학교 주변 1㎞ 구간에 조성되고 있다. 이 길에는 한글을 형상화한 벤치와 조형물이 들어서고, 자음과 모음을 형상화한 보도블록이 설치된다. 구 관계자는 “나라 사랑의 얼이 깃든 이곳에 평생 한글 사랑에 헌신한 외솔 선생의 한글마을이 조성되면 한글을 사랑하는 내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탐방길이 조성되면 외솔 생가와 병영성 등을 연결하는 2㎞ 구간의 도심 둘레길이 새롭게 구축돼 관광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생가 주변인 병영 사거리에서 병영성 지하터널 입구까지 840m 구간의 모든 간판도 한글로 교체한다. 연말까지 이 일대 163개 점포와 상징물을 한글거리에 맞게 바꿀 예정이다. 한글로 완전 교체가 어려운 외래어 간판은 한글과 외래어를 병행 표기하고, 한글의 크기를 키운다는 방침이다. 한편 외솔의 고향인 병영(동동)은 울산 3·1운동 순국열사 위패를 모신 ‘삼일사’, 병사를 양성하던 경상좌도 ‘병영성’, 울산 3·1운동 본거지인 ‘병영초등학교’, 병마절도사 공덕비가 있는 ‘병영1동 주민센터’ 등이 있다.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간직한 지역으로 꼽힌다. 글 사진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세상과 조용한 이별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됐던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 91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딸 이혜선(70·미국 거주)씨가 유골함을 들고 기증 작품이 전시된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한민국예술원은 22일 오후 “예술원 회원인 천 화백이 지난 8월 6일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후속 행정조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 8월 19일 서울시를 통해 미술관에 협조 요청을 하고 이튿날인 20일 천 화백의 그림이 전시된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다녀갔다.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던 천 화백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거동을 하지 못해 뉴욕 맨해튼에 있는 큰딸 이씨의 간호를 받아 왔다. 장기간 병석에 있던 천 화백은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으며 지난 8월 6일 새벽 의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의 시신은 화장했고 뉴욕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딸 이씨는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천 화백이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 주장해 왔지만 미술계에선 천 화백이 길게는 10여년 전 이미 사망한 게 아니냐는 등 추측성 소문이 무성했다. 2013년 이씨는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이 관리 소홀로 훼손됐다며 기증 작품을 모두 반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월 180만원의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하자 이에 반발해 탈퇴서를 제출했다. 한 예술원 회원은 “사망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상태에서 유가족이 천 화백의 사망 사실을 즉각 알리지 않고 감춘 것은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고인의 명예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다”고 말했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거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때 혼담을 피해 일본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인의 한(恨)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 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 화가였다. 꽃과 여인의 화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미인도’를 둘러싸고 1991년 일어난 위작 시비에 말려 심적 충격 속에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는 여인의 고독과 애틋한 사랑,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 이국에 대한 동경, 자신을 지탱하려는 나르시시즘이 복합적으로 묻어 있다는 평이 뒤따른다. 대표작인 ‘길례언니’(1973), ‘고’(孤·1974),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 ‘황금의 비’(1982) 등은 몽환적이고도 섬뜩한 눈빛의 여인이 등장하는 작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글솜씨를 지녔던 천 화백은 ‘언덕 위의 양옥집’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 등 수필집과 단행본 10여권을 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따라 작품 가격 추이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지난 10년간 경매시장에서 천 화백 작품의 호당 평균 가격은 1700만원으로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다.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은 2009년 K옥션을 통해 거래된 ‘초원Ⅱ’(1978, 105.5×130㎝)로 12억원에 팔렸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新 국토기행] <25> 강원 강릉시

    [新 국토기행] <25> 강원 강릉시

    천년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고 청정한 자연자원, 풍성한 먹거리가 어우러진 강원 강릉시는 사람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간직한 고장이다. 동쪽으론 푸른 동해를 끼고 서쪽으론 장엄한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 관동팔경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빼어난 자연을 품고 있어서일까,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비롯해 김시습, 허균, 허난설헌 등 예부터 지금까지 뛰어난 문인 등 인재 배출이 끊이지 않는다. 아흔아홉 구비의 전설이 깃든 대관령과 대한민국 명승 1호인 소금강, 국내 첫 모자 화폐로 등장한 신사임당과 율곡의 오죽헌,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인 경포대,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정동진역,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 등 유구한 역사 흔적과 전통문화가 살아 있다. 최근에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변혁을 꾀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과 1시간대의 복선전철이 놓인다. 세계인들의 축제인 올림픽이 열리면 세계 속의 도시로 우뚝 설 것으로 기대된다. 30분 거리의 양양국제공항까지 활성화되면 22만명에 머무르고 있는 인구도 급증할 전망이다. 전철 길과 비행기 길을 따라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힐링 도시가 될 강릉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볼거리] ●시심 자극하는 관동팔경 중 으뜸 ‘경포호·경포대’ 바다와 맞닿은 잔잔한 경포호수는 경포대와 함께 많은 일화를 간직한 최고의 명승지다. 경포대 누각에 앉으면 낮에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물새들의 오가는 모습이 호수에 비쳐 신선들의 세계를 맛보게 하고 밤에는 달빛이 하늘과 바다, 호수, 술잔, 임의 눈동자에 비치며 시심(詩心)을 자극한다는 명소로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호수 안에 외딴섬으로 떠 있는 월파정과 물 위로 꽃비를 내리는 아름드리 벚나무도 운치를 더한다. 경포호 둘레를 따라 조성된 4㎞ 남짓의 걷는길과 자전거길에는 언제나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2012년 조성을 끝낸 호수변 경포가시연습지는 또 다른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특수한 지역의 생물서식지를 보호하고 관광자원화한 습지에는 희귀종인 가시연 군락지가 조성돼 생태탐방지로 인기다. 호수를 따라 잘 보존된 방해정 등 정자와 경포대 인근 참소리 축음기·에디슨박물관도 가 볼 만하다. ●신사임당·율곡의 흔적 고스란히 간직한 ‘오죽헌’ 우리나라 대표 어머니상인 신사임당과 율곡이 살았던 오죽헌(보물 제165호)을 빼고 강릉을 얘기할 수 없다. 당대 최고의 학자 율곡이 탄생한 집 주변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아 오죽헌이라 이름 붙였다. 건물은 바깥채와 안채, 어제각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조선 초기 건축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관심을 더한다. 오죽헌 남쪽에는 강릉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박물관이 있고 동쪽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강릉예술창작인촌이 있다. 주변은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전통 기와집촌까지 만들어진다. 오죽헌과 지척에서 마주한 곳에는 조선시대 아흔아홉 칸 전통한옥인 선교장이 잘 보존돼 있다. 아름드리 노송들이 빼곡히 둘러선 선교장은 300년 전통을 간직한 곳으로 족제비 무리를 쫓다가 이곳에 이르러 집을 지어 번창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경포해변 쪽으로 좀 더 가다 보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여류시인 허난설헌 생가도 만날 수 있다. ●고려 숨결 배인 ‘강릉대도호부관아·강릉향교’ 고려 때 창건한 강릉대도호부관아(임영관)는 왕의 전패를 모시고 의례를 치르기도 하고 중앙 관료들이 강릉으로 내려오면 머물던 객사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크고 배흘림 기둥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 말,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물 솜씨가 살아 돋보인다. 지금은 국보(51호)로 보존된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고등보통학교로 쓰이다 일부 철거된 것을 2012년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등 현재의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 복원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강릉향교(보물 제214호)도 가 볼 만하다. 고려시대 세워진 강릉향교는 완벽한 규모와 기능을 갖춘 유교식 건축물로 분묘대성전을 비롯해 명륜당이 옛 그대로 남아 봄·가을 석전제를 지내며 문화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나주향교, 장수향교와 함께 3대 향교로 꼽힌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 ‘정동진역’ ‘최고 동쪽 나루터’라는 뜻의 정동진역은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고 해돋이 명소,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지금도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을 잇는 기차가 해돋이 시각에 맞춰 운행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추억의 여행지로 찾는다. 특히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모래시계공원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시계를 만날 수 있다. 해마다 새해 첫날 일출과 함께 열리는 모래시계 회전행사도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모래시계공원에는 기차를 활용해 동서양의 다양한 시계 관련 유물을 선보이는 정동진 박물관이 있다. 주변에는 5.1㎞에 이르는 폐철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정동진 레일핸드바이크가 있고 산 위에 떠 있는 육상 유람선 모양의 썬쿠르즈리조트도 명물이다. 그닥 멀지 않은 곳에는 신라시대 수로부인의 전설을 간직한 헌화로가 있어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느끼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다. ●북한 무장공비 잠수함 보존된 ‘통일공원’ 1996년 바다로 침투한 북한잠수함과 해군 퇴역함(4000t급) 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통일공원이 주변의 임해자연휴양림과 함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강동면 바닷가에 이르면 바닷가 쪽으로 함정과 잠수함이 전시돼 있고 산 쪽 언덕에는 각종 항공기 등이 전시돼 있다. 잠수함 내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체험전시관으로 개방된 이곳에는 국난극복사, 6·25전쟁, 이산가족 찾기, 통일환경 변화 등을 주제로 한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통일공원에서 임해자연휴양림으로 가다 보면 바다를 마주하며 새벽 일출을 보기에 좋은 등명락가사가 있다. 신라 때부터 이어져 왔다는 고찰로 오백나한상을 모신 영산전 등이 있어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등명락가사 인근에는 또 자연환경을 이용한 10만여㎡ 넓이의 하슬라아트월드(피노키오미술관)가 있어 산책 코스로 인기다. ●천년 역사의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단오제’ 천년을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해마다 음력 5월 5일을 전후해 풍성한 전통행사가 펼쳐진다. 예부터 영동지역 사람들은 높은 대관령 고개의 신이 주민들 삶을 보호해 준다는 믿음에서 출발해 천년이 넘게 원형을 잘 보전하며 지역축제로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 강릉단오제는 단오 한 달 전 신에게 올릴 술을 담그는 신주빚기행사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 이어 대관령 산신에게 행사를 알린 뒤 대관령 국사성황신을 여성황신이 있는 사당으로 모신다. 분위기는 행사 전날 성황신 부부를 남대천 임시제단으로 모시는 영신행차가 시작되면서 한껏 고조된다. 축제가 열리는 동안 제례, 무당굿, 관노가면극, 씨름, 그네, 창포 머리감기 등 다채로운 행사와 공연을 만날 수 있어 인류학, 민속학, 역사학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전통축제로 자리 잡았다.[먹거리] ●‘강릉의 상징’ 감자옹심이 음식문화가 발달된 강릉지역에서 가장 대표음식으로 꼽히며 유명세를 타는 음식이 감자옹심이다. 다양한 감자요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먹거리에 앞서 독특하고 재밌는 이름부터 사람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자극한다. 감자를 갈아 물기를 짜낸 뒤 가라앉은 녹말가루와 섞어 새알처럼 작고 동글동글하게 감자수제비로 빚어 끓여 낸 음식이 감자옹심이다. 삶아 낼 때 감자 전분을 적당히 섞어 만들어 쫄깃하고 씹는 맛이 일품이다. 메밀로 밀어 낸 메밀 손칼국수나 일반 칼국수를 넣어 함께 끓여도 좋다. ●바닷물로 간 맞춘 초당순부두 가장 자연에 가깝고 신선한 웰빙 두부하면 강릉 초당순두부가 떠오른다. 조선 광해군 때 강릉지역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엽이 집 앞의 맛 좋은 샘물로 콩을 갈고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들게 한 게 초당두부의 기원으로 알려진다. 이때 만든 두부의 맛이 좋아 소문이 나자 허엽이 자신의 호인 ‘초당’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혀끝에 감기는 부드러운 초당두부는 지금도 바닷물로 간수를 해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강릉 경포해변 인근 초당마을에는 순두부, 모두부, 두부전골 등의 두부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초당두부 전문 음식마을이 성업 중이다. ●전통방식으로 정성 가득 ‘사천과줄’ 청정지역 사천마을에서 재배한 사천쌀과 조청 등으로 만들어 내는 사천과줄은 1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과줄은 쌀가루로 만들어 말린 얇은 바탕을 기름에 튀겨낸 뒤 꿀이나 조청을 발라 튀긴 쌀이나 깨알 등 온갖 영양 곡식을 붙여 만들어낸 달콤하며 영양이 풍부한 전통과자다. 워낙 정성과 시간이 많이 가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에 전통 기법 그대로 과줄을 만들어 내는 곳은 강릉 사천마을이 유일하다. 명절 등 수요가 많을 때 전통방식으로 한정 수량만을 생산한다. 사천마을에는 집집마다 과줄 생산이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술꾼 유혹하는 문어 숙회·오징어 물회 주문진항과 사천항 등 항구를 끼고 있는 마을에는 싱싱한 횟감이 넘쳐난다. 오징어, 문어, 가자미, 가리비, 멍게, 해삼 등 동해안에서 나는 횟감은 모두 올라온다. 특히 오징어 철에는 쫀듯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인 오징어회와 오징어 물회 등이 술꾼들의 숙취 해소에 그만이다.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문어는 숙회로 만들어 술안주로 안성맞춤이다. 뼈째 썰어 먹는 가자미회도 달짝지근하며 꼬득꼬득 씹히는 맛에 마니아까지 생겨날 정도다. 동해안 양식으로 제법 물량이 많아진 가리비와 해삼, 멍게도 동해안의 빼놓을 수 없는 횟감이다.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부고] ‘최장수 외교 수장’ 박동진 전 외무장관 별세

    [부고] ‘최장수 외교 수장’ 박동진 전 외무장관 별세

    우리나라 최장수 외교 수장이었던 박동진 전 외무부 장관이 11일 별세했다. 91세. 박 전 장관은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 주오대를 졸업한 후 1948년부터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 등에서 근무했다. 1951년 외무부에 입부 후 의전국장, 차관, 주월남 초대 대사와 주브라질·주제네바·주유엔 대사 등을 거쳐 11~12대 국회의원, 국토통일원 장관, 주미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75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외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후 1980년 9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재직했다. 1979년 10·26 사건과 신군부의 12·12 쿠데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현직 장관으로 대미 관계를 진두지휘했다. 이 기간에 한국 외교는 격동기였다. 1976년 10월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씨가 미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매수 공작을 벌인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한·미 갈등을 수습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주미 대사관에 근무했던 중앙정보부 소속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 한국 정부가 미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 등을 포섭하기 위한 ‘백설작전’을 벌였다는 폭로 사태를 무마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박 전 장관은 도덕주의를 표방한 미 지미 카터 행정부와 유신체제 간의 반목으로 불편했던 한·미 관계를 조율하는 데 기여했다. 정부는 그에게 수교훈장 광화장·흥인장,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2010년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전문에 따르면 박 전 장관은 1979년 10·26 사건 후 권력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해 “소극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미국에 전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에는 현민(玄民) 유진오 선생의 딸인 유충숙씨와 1남3녀가 있다. 장례는 외교부장(葬)으로 치러지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발인은 14일 오전 8시.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부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최순덕 여사

    [부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최순덕 여사

    광주·전남 지역에 생존한 마지막 여성 독립 활동가인 최순덕 여사가 2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103세. 고인은 1929년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전남여고 전신)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광주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일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에서 많은 학생이 구속되자 고인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전교생이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 사건을 주도했다. 고인을 비롯한 46명의 학생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 퇴학 처리됐다. 유족으로는 이재웅(전 완도경찰서장)·재민(순천향대 교수)·재균(치과 원장)씨 등 6남 1녀가 있다. 빈소는 광주 한국병원, 발인은 24일 오전 10시. (062)380-3041.
  •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박근혜 당선자의 당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록도 만들었다. 청와대에서 영애(令愛)로 유년기를 보낸 퍼스트레이디 대리는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됐다. 박 당선자의 삶과 정치 여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박 당선자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는다. 그는 1990년 일기에서 “비범하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것부터가 험난한 내 인생 길을 예고해 주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20대에 부모님을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전차 타고 등교한 대통령의 딸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고 육 여사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대구 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해 재직 중이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일했다. 박 당선자의 외조부인 육종관은 육 여사가 과거 혼인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육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딱딱한 군인 이미지와 달리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 “젊은 시절 아버지는 로맨티스트”라고 회상했다. 육 여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고 할 만큼 신뢰와 애정을 가졌다. 특히 육 여사에 대해서는 단아한 외모와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을 떠올린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의 어린시절 의장 또는 대통령의 자녀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평범한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이었다.”고 적었다. 박 당선자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어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2였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가 사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박 당선자는 산업 역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자공학을 택했다. 졸업 직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친 뒤 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육 여사 장례 6일 만에 퍼스트레이디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자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영문도 모른 채 귀국길에 올랐다가 가판대에 놓여진 신문 1면에 육 여사의 사진과 ‘암살’이라는 글자를 보고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 왔다.”고 회상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청와대에 들어온 민원을 점검하고 영세 기업, 소외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수행했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 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주고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며 외교적 식견도 넓어졌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당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박 당선자가 로절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원활하게 풀어가 ‘근혜·카터 회담’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육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맏딸인 박 당선자에게 많은 의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너를 두었는가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974년 11월 일기에서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27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박 당선자는 가장 먼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박 당선자는 장례를 치른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공개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박 당선자는 이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가 청와대 시절 자신들에게 겸손을 강조한 이유도 신당동에 돌아와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 중심부인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당시 박 당선자가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고 배신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반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1989년 1월 17일) 등 박 당선자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 기간도 오래 지속됐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등 기념사업회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청와대를 떠난 18년의 세월이 은둔, 칩거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박 당선자는 “쓴웃음이 나온다.”면서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으로 1980~1990년 사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박 당선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마음의 평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박 당선자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뿌리 깊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따라 경제 안정에 주력했고 가까스로 일으켰는데 무너져 내렸다는 허탈함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 당선자의 정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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