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5공 특위/“「일해」 기금관련 기업특혜ㆍ보복 없었다”/재임중 친인척 관리 잘못한 점 뉘우쳐/국제그룹 해체는 부실기업 정리 차원
▷인사말◁
지난해 11월 참회의 고별사를 드리고 국민여러분 곁을 떠나 산간벽지의 한사에서 반성과 수도의 길을 걸어온 제가,오늘 이처럼 국회에 나와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언짢은 문제들에 관해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80년대를 마감하는 섣달 그믐날인 동시에 21세기를 향한 길목에서 밝아오는 1990년대의 첫 해를 맞이하게 되는 전야입니다.
송구영신하는 이 뜻깊은 시점에서,한때 이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제가,새 아침의 여명속에 희망과 기쁨의 말씀을 드리지는 못할 망정,지난 날의 어두웠던 기억과 아물어 가던 상처를 일깨우게 되는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이 다름 아닌 저 스스로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새길 때,새삼 저의 부도덕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3권분립주의의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아직 한번의 선례도 없는,전직대통령의 국회출석 증언이라는 오점을 우리 헌정사에 남기게 된 것은,저의 씻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오가 될 것입니다.
○사안별 증언 이해를
저는 이 모두가 원칙적으로 저로 인해서 초래된 하나의 업보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국민과 역사 앞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시리라고 믿습니다만 지난해 11월 서울을 떠나 사죄의 은둔생활을 시작하면서 국민 모두가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단합해서,새로 출범한 정부를 도와 국가발전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저와 저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일 때문에 가슴 깊이 한이 맺히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분들에게는,저의 은둔이 모든 아픔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그 당시 저는 그 이상의 어떠한 단죄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을 통해 나타난 여론이나 정치권의 요구는 「재임중의 과오를 사과하고 남은 정치자금이 있으면 헌납하고 고향에 가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과거청산문제가 마무리 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저는 그 제의를 전폭 수용해서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저 스스로 근신하는 뜻에서 낯설고 인적도 드문 백담사를 찾아 오게 된 것입니다.
그간 일부에서는 해외 장기여행을 권유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이 저로서는 죽음보다 오히려 감내하기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국민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수치스런 일인만큼 거론 되는 일조차 없어야 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이 제시한 해결책이 모두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려했던 바 대로 과거청산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저의 국회출석 증언문제가 또다시 제기되었습니다.
「5공청산」 문제는 정치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으며 저의 국회증언이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정치는 물론 경제도 계속 뒷걸음질 치게 되고 사회의 혼란과 갈등도 모두 저의 증언문제 때문이라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직대통령의 국회증언이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정치ㆍ사회의 안정과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저는 정치권이 바라는 바 그대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국회출석 증언이 하루속히 실현되기를 희망하였으며 또한 그 증언도 당초의 목적에 부합되는 증언이 될 수 있도록 증언의 방법ㆍ절차ㆍ시기 문제 등은 정치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밝힌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야가 합의하고 국회가 결정한 바에 따라 제가 오늘 이자리에 서서 의원 여러분의 질문에 대한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증언의 내용이 의원 여러분에게는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증언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입니다만,질문 자체가 실무자들이 한 일,실무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일,또는 저 자신이 당시에는 보고를 받았고 재가를 한 일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많이 지나서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일 경우 지금 이 시점에서 완벽하고 책임있는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질문중에는 간단하게 「아니다」 「모르겠다」 등의 한마디로 답변을 끝낼 부분도 있고 또 보다 정확히 이해 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줄거리를 갖추어 말씀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질문의 순서에 상관없이 사안별로 묶어서 말씀드리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바 입니다.
▷「일해」설립ㆍ자금조성◁
일해재단의 설립은 버마 아웅산 참사후 귀국하는 길에 본인과 동행했던 경제인들이 북한의 만행에 울분을 토로하고,이러한 비극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순국자의 유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시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그 당장에 23억원이 모금되었으나 『전액을 그대로 집행할 경우 세금 등의 문제로 유족 지원금이 상당부분 줄어든다는 것과 공익재단을 설립하게 되면 전액을 보조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 그렇다면 재단설립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에 대한 조의금 분배만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지나친 편법이 아니냐는 의견과 순국자의 유지를 받들 사업을 모색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의견이 제시 되었습니다.
○경제단체,자체 할당
유가족 지원사업은 설립이후 계속 확대되어 왔을 뿐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희생자의 유지를 받드는 작업을 한시라도 게을리 한적이 없었습니다.
재단이 그 출발은 희생자 및 그 유가족에 대한 위무책의 일환으로 구상되고 설립된 만큼,본인도 고인과 그 유가족들을 위한 일에 정성을 보태고자 5천만원을 출연했습니다.
기금 모금은 경제단체 대표들이 주관해서 대상을 정하고 금액을 할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단측에서는 한해 50억원 정도의 예산을 사용할 셈으로 5백억원 정도의 기금조성 목표를 세웠습니다만,본인은 규모가 너무 커 출연하는 기업에 부담이 될 것같아 대폭 줄이라는 의견을 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재단의 사업계획이 확충된데다가,일부 기업인들의 의견이 『계속해서 연간 사업비를 모금할 수도 없고,외부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 일단 기금을 조성한 다음 본격적인 사업전개 단계에서는 기금의 증식이자만으로 매년 예산을 충당하는 것으로 하자』고 하며 3차년도 기금모금을 진행시켜 기금의 총액이 처음 구상보다 커지게 된 것입니다. 재단명칭에 본인의 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아웅산 참변과 직접 관련이 있고 또한 지속적으로 유가족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재단명칭으로 사용하자는 건의가 있어 이를 승낙했습니다.
기금의 기탁과 관련하여 특혜가 있지 않았느냐,또는 이에 협조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 어떤 보복조치가 있지 않았느냐,심지어는 일해재단 모금자체가 정치자금을 조달키 위한 목적이 아니냐 하는 의혹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국제그룹 해체를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부실기업 정리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신동아그룹 등에서 기부한 35억원이 익명으로 처리된 것은 좋은 목적으로 써달라는 뜻을 살려 당시 재단의 사업계획에 자금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재단기금을 축내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 자금을 이에 충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항간에 재단과 관련,본인이 퇴임후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풍문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무근의 이야기입니다. 본인은 단임의지를 실천한 전임대통령으로서 재직시에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 연구소를 통하여 국내외 원로들과 교류하는 한편,동구권 등 비수교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민간외교 차원에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21세기에 대비하여 통일문제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연구할 국제적인 학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민간연구기관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유족을 돕기 위한 순수한 목적에서 본인이 발의했던 재단의 설립과정에 물의가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관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새 세대ㆍ심장재단◁
본인과 내자는 젊은 시절부터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유아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만 이 부문이 질량 양면에서 미흡하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 보고를 받아보니 정부의 예산사정으로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뜻있는 분들의 찬조로 사업을 일으켜 보자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업의 취지에 찬동하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기금이 조성되고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 세대 심장재단은 83년 11월 내한한 레이건 미대통령 부인 낸시여사가 우리나라 심장병 어린이 두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치료해준 일이 계기가 되어 국내의 심장병 어린이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의 기술과 비용으로 우리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81년 새세대육영회는 창립 당시부터 83년까지 2백여명의 불우한 선천성 심장병 환자의 수술지원 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 착안한 당시 보사부장관과 심장병 전문의 등 의학계 인사들이 육영회에서 기왕에 하고 있던 심장병환자 지원사업을 확대하는 뜻에서 별도의 재단설립을 건의해옴에 따라 이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취지찬동 기업 출연
그러나 새 세대 육영회나 심장재단 모두 기금조성 및 관리과정에서 너무 꼼꼼하게 취급하다보니 기금을 한푼이라도 더 증식코자 하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오히려 경리면에서 의혹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만 그 기금 모금과정이나 운영에는 조금도 잘못이 없었던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일해재단이나 육영회 심장재단 등은 본인 내외가 직접 설립했기 때문에 기금조성 과정에서 출연자들에게 반대급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으나 사업취지에 찬동한 기업인들의 출연에 의해서 기금조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본인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친인척비리ㆍ재산도피◁
본인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미국산 쌀 도입,쇠고기 및 석탄 수입과 관련하여 본인의 친인척이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이 문제는 당시 이미 문제화 되어 철저히 조사한바 있습니다. 국회 해당상임위원회에서도 조사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을 규명한바 있으나 전혀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그 결과에 대하여 국민들도 납득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호주 등에 막대한 재산을 도피시켜 놓았다는 유언비어가 일부 보도매체에도 실린 바 있으나,그러한 일은 터무니 없는 낭설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도 국회의 요청에 따라 해당국가에 정식으로 조사를 요청한 바,최근 그러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우리 정부에 통보해 온 것으로 저는 듣고 있습니다.
▷부실기업 정리◁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데에는 해당기업을 부도처리하여 도산시키는 방법이 가장 원칙적인 것이겠지만 대기업을 도산시키는 경우 하청기업과 계열기업의 연쇄부도 등으로 인한 대량실직 등의 커다란 사회문제가 초래될 수 있고 또한 대출금 회수불능으로 금융시장 전체가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는 등 국민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할 것으로 우려되었습니다. 또한 부도처리 대상기업이 국외에서 상당한 공신력을 갖고 있는 재벌기업일 경우에는 해외시장에서의 한국기업 전체에 대한 평가절하 또는 신용실추 등이 염려되어 수출에 국가적 사활을 걸고 있는 우리 입장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실기업 정리의 또 다른 방법으로는 해당기업에 계속 추가 금융지원을 하여 부도를 막아 주는 것도 있겠으나 정상화 가능성이 없는 기업에 금융지원을 계속한다는 것은 이미 위험수준에 도달해 있던 부실채권의 규모를 더욱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산업전반의 체질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사회정의에도 배치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써 해당기업도 살리면서 능력있는 제3의 기업을 찾아 인수를 종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입니다만 그 과정이 비공개로 처리되어 많은 의혹이 발생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실기업을 공개경쟁 방식으로 정리할 경우 부실의 내용이 공개되어 즉각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어려워지게 되는 등 부실이 가속화될 우려가 있으며 인수자 선정에도 애로가 있어 부득이 내부적인 기준을 설정하여 정부에서 인수자를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사심 작용한 적 없다
인수기업의 결정은 경영능력,재무구조,업종 관련성,지역연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재무부장관 주관하에 주거래 은행과의 협의를 거쳐 산업정책 심의회에서 최종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그 최종단계에서 재무부장관이 본인에게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만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각종 의혹과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이 몇가지 방안중에서 결정을 해야 할 경우도 있었으나 예상되는 문제점을 충분히 검토하여 결정을 내렸었습니다.
피인수기업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등의 감정을 지니게 되고 정리절차의 비공개성으로 인해 일부 의혹이 초래될 가능성도 있으나 대통령이란 직책은 이러한 비난보다는 국가경제란 측면을 더욱 고려해야할 입장이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가 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부실기업 인수와 관련한 부채경감,세제지원,금융지원 등이 특혜라는 오해는 자산의 몇배가 되는 부채를 인수하는 기업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조치로써 상당수의 기업이 인수에 소극적임에도 국민경제적 측면을 고려하여 떠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은행감독원장이 부실기업 정리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주장에 대해 주거래은행과 재무부가 협의하는 과정에서 은행감독원장으로서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나 질문과 같이 총괄지휘 등은 정치적인 오해라 생각합니다.
국제그룹 정리과정에서도 본인은 당시 재무부장관으로부터 국제그룹 정리의 필요성과 그 처리대책을 보고받고 이를 재가한 사실은 있으나 이는 부실기업 정리라는 일반원칙에 따라 행해졌던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10대 재벌에 속하고 있었던 국제그룹의 정리는 정부로서도 신중한 결정을 필요로 하였으며 해외에서의 한국기업의 이미지 실추 등을 고려하여 부도처리에 의한 정리보다는 부분별 제3자 인수방식을 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그룹의 부실은 부채비율이 거의 1천%에 이르렀고 그 중 상당부분이 단기고리인 완매채에 의존하는 등 부채의 성격 또한 악성이었다고 보고 받았었습니다. 정부는 84년 가을부터 85년 2월까지 2천5백억원의 자금지원을 함으로써 그룹의 회생에 노력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계속 경영상태는 악화되어 경제부처의 관계장관들이 수차에 걸쳐 본인에게 회생불능의 보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한선주의 정리과정도 통상의 정리절차와 마찬가지로 재무부장관의 건의를 승인한 것이며,당시 해운업의 부실규모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여서 선사별로 합리화 조치로 부족운영자금 지원,자구노력추진 등으로 경영정상화를 모색하였으나,대한선주의 경우 제1차 해운합리화 조치시 금융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실규모나 당시 해운시장 여건 등으로 보아 자체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정리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한진해운에 인수시키는 과정에서 조양상선과 경합시킴으로써 인수조건을 유리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실기업 정리는 당시 경제여건상 기업 및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절차의 비공개,피인수기업의 불만 등으로 많은 의혹이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결코 개인적인 사심이 국가정책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