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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대 바꿔달라” 20여차례 욕설/「폭언전화」 첫 구속

    서울지검 북부지청 형사1부(검사 유일준)는 30일 전화로 욕설을 한 백광석씨(26·자동차정비공·서울 동대문구 전농동)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성폭력특별법 발효이후 음란전화를 건 사람이 처벌받은 적은 있지만 단순한 욕설전화를 한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백씨는 지난달 16일 상오7시쯤 서울 중랑구 면목4동 동사무소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A이삿짐센터로 전화를 걸어 용원으로 일하는 사촌형수를 바꿔달라고 요구하다 『자리에 없다』며 바꿔주지 않자 이 회사 경리여직원 백모씨(34)등 2명에게 20여차례 전화를 걸어 『죽여 버리겠다』는 등 심한 욕설과 폭언을 퍼부은 혐의를 받고있다. 검찰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별다른 죄의식없이 자행되는 전화폭력을 뿌리뽑고 사회적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에서 엄벌키로 했다고 밝혔다.
  • 한국대중가요 애창… 개방적 성격/혼춘 조선족들이 본 강명도씨

    ◎평소 활달한 언행… 북정보기관서 문제삼았을 것/벤츠타고 위세 당당… 무역실패로 질책받아 지난 5월 귀순해온 북한 정무원총리 강성산의 사위인 강명도씨(36)는 지난 92년부터 중국 동북지역을 자주 드나들어 이 지역의 조선족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다. 김일성의 외척으로 알려진 그는 처가와 외가의 배경이 말해주듯,한때는 북한 정보기관 요원들을 대동한채 벤츠 500을 타고다닐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는게 주변의 설명이다. 그가 주석궁 경리부 산하 무역회사의 부사장 직함을 갖고 중국을 빈번하게 드나들면서 주로 활동했던 무대는 혼춘.강씨는 이곳 무역업자들과 제휴,석탄등 몇몇 중국산 상품수입에 손을 댔으나 별 재미를 못보다가 92년부터는 골동품 거래쪽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는 것. 이때부터 그는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북한의 무산·회령·남양과 중국의 연길·도문·장춘·혼춘등지에 자주 모습을 나타냈으나 고미술품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어 역시 재미를 못본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92년 8∼9월쯤 혼춘에 지사를 차리고 중국과의 무역을 본격화할 생각으로 평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온 훈춘의 한 조선족인사에게 지사설립자금으로 10만달러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자금융통이 여의치않아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장인인 강성산은 물론 북한당국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 그의 활달한 언행이 결국 북한 정보기관 안테나에 잡혀 귀순으로 이어지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강씨와 여러차례 만난 적이 있는 한 조선족인사는 『그는 평소 한국물건을 좋아했으며 술자리에서는 한국 대중가요를 자주 부를 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타고난 성격이 화끈하고 개방적이어서 북한처럼 폐쇄된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사람』이라고 전했다. 이 조선족인사는 이어 『작년말부터 그와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올해들어 동북지방의 일부 유력인사들 사이에서 강성산의 사위가 중국으로 도망쳐 북한당국이 특별체포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뒤인 지난 2월북한당국으로부터 특별체포령 발동에 따른 협조요청이 연변 조선족자치주 공안국에 정식 접수됐으며 그 이후 강씨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 금강산 그룹 박경윤회장/일 주간문춘,통일교­김부자관계 보도

    ◎김일성­문성명씨 밀착의 가교 역할/80년대 중반부터 북한서 관광업… 북경머물며 대외 창구역/북에 “자금줄로 통일교 활용” 아이디어/문씨 “35억불 지원”… 북측 호텔운영 허가 일본 시사주간지 「주간문춘」은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8월4일자)에도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김일성부자의 기묘한 관계와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다음은 「김정일 경제비밀인맥을 폭로한다」는 제목의 기사 요약. 박보희 세계일보사장이 김일성시신에 조의를 표할때 그 바로 옆에 한명의 여성이 있었다.그녀는 「마담 박」으로 불리는 박경윤 금강산그룹 회장.금강산그룹은 북한의 사실상 대외경제창구이며 박회장의 사업은 김정일의 대외비밀인맥,그리고 통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경의 천안문광장으로부터 자동차로 약20분.국제무역빌딩 2층에 「금강원」이라는 조선음식점과 「후지」라는 일본요리집이 있다.금강산그룹과 중국의 합영기업이다.종업원은 대부분 중국인이지만 경영은 통일교가 맡고 있다.사장은 일본에서 파견된 통일교간부 나카타 미노루씨다.그는 지난해「금강원」 총경리(사장)로 북경에 부임했다. 「금강원」으로부터 약3백m 거리에 국무반점(호텔)이 있는데 그곳에 박경윤회장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그녀는 84년이후 1년의 절반정도를 중국에서 보낸다.북경은 박회장과 김정일인맥의 접촉 거점이다. 박회장은 86년 죽은 남편(재일동포 사업가 박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50억엔으로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우선 북경에 소유하고 있는 「고려주가」를 거점으로 여러명의 북한관계자들과 접촉했다.그 과정에서 알게된 박종근은 김정일과 직접 연결되는 북한의 대외창구중 한사람이었다.그는 공직은 맡고 있지않지만 부총리급으로 김정일의 신임아래 북경에서 대외경제공작을 맡고 있다. 박회장은 박종근과 알게된지 얼마안돼 북한에 「금강산국제무역개발회사」를 설립했고 이를 모체로 금강산국제관광·금강산국제항공·고려상업은행등을 설립,금강산그룹을 형성했다. 금강산그룹과 박회장의 이름이 갑자기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91년 4월 나고야∼평양간 직행 항공기를 운항시킨후 부터.북한 비자발급까지도 금강산그룹이 담당했다.북한방문 손님중에는 통일교도가 많았다.그러나 91년 여름이후 북한관광이 제한되자 금강산그룹은 개점휴업상태.그때 박회장과 김정일인맥은 자금이 풍부한 통일교에 눈을 돌리게 됐다. 박회장은 김정일쪽에 문선명교주의 북한유치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이에따라 91년 11월 8일과 16일 북경의 중국대반점에서 비밀회담이 열렸다.참석자는 통일교측 박보희,북한측 김달현 당시부총리(국가계획위원장)와 박종근.회의결과는 곧 김정일에 보고됐고 문교주의 북한방문이 이뤄졌다. 북한이 노린 것은 통일교의 자금.북한은 1억5천만달러의 헌금을 요구했다.이에 통일교측은 오히려 그 23배인 35억달러 투자등 지원을 제의했다.김일성과 문교주 회담에서 금강산 관광개발·두만강개발·통일교에 의한 호텔경영과 경제협력방안등이 논의됐다.통일교에 의한 북한 보통강호텔 경영도 바로 이때 구체화된 사업의 하나다. 통일교가 노리는 것은 관광개발등의 사업으로 신자들을 북한에 진출시켜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다.김정일과 문교주는 「경제는 돈」이라는 논리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 귀순 강명도·조명철씨 기자회견 일문일답

    ◎북군부 오진우·오극렬파 암투 치열/김정일,85년부터 외교 제외 모든 권한 행사/전쟁 대비,마카오·스위스·일등에 외자 예치 27일 귀순 기자회견을 가진 강명도씨와 조명철씨는 『북한 김정일의 정치 체제에 회의를 느껴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귀순동기와 강성산총리에게 알렸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 ▲(강씨)89년 인민무력부 실장으로 있을때 군부고위계층의 권력다툼과정에서 18호 관리소에 2년간 수용된 적이 있었다.이때 죄없는 3만여명의 죄수들이 구타당하며 비참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김정일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품게 됐다. 부모친척중에 김정일의 측근이 많다.그래서 이들이 석방을 제의해 김의 지시로 석방된뒤 강성산의 도움으로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으로 발령받고 작년 12월 강재수출관계로 중국으로 가게됐다. 그러나 강재를 못 팔아 자금회수가 어려워 1주일로 예정했던 체류기간이 한달로 길어졌다.북한에서는 내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김정일에게 보고돼 체포명령이 떨어졌고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알게돼 탈출을 결심했다.강성산이나 가족들은 탈출사실을 모른다. ­한달간 머문 행적은. ▲(강씨)중국에서는 겨울이 지나야 강재값이 오르므로 팔지 않고 있었다.돈을 돌리기 위해 심양과 북경등지를 왕래했다.김일성 사후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했다.오늘의 귀순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면 강성산에 대한 대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군부내 권력다툼이 심각하다는데. ▲(강씨)북한 군부내의 권력다툼은 오진우·오극렬·이봉원파등 3개파로 갈라진다.그 밑으로 1군단과 2군단 출신파로 갈려 있다. 오진우파와 오극렬파가 갈려진 배경은 이렇다.87년에 오진우가 김정일과 함께 만찬에 참석했다가 대형 벤츠 승용차를 직접 몰고 돌아오다 가로수를 받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오진우는 거의 죽을 상태가 돼 후임을 오극렬이 대행하게 됐다.오는 이후 총참모부에 공군사령부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하는등 파벌을 형성하고 자기가 무력부장이 다 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오진우가 러시아에서 치료를 받고 1년만에 회복돼 복귀해 이봉원한테서 이런얘기를 듣고 분개했다.이봉원은 오극렬과 사이가 안좋았다. 원래 오진우는 혁명1세대이고 오극렬은 만경대학원 출신의 2세대인데 오진우는 오극렬을 키우다시피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김일성에게 교체를 요구해 결국 오극렬은 물러났고 그의 사람도 다 나가게 됐다. ­김정일의 후배로서 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정무원 간부들이 성향은.(강씨에게)김달현의 근황은.강성산이 88년 좌천이후 재발탁된 배경은.강성산과 김정일의 관계는. ▲(조씨)나는 북한에서 풍파를 격은 사람이 아니다.고스란히 자라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남산고등중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고등반 인민반 유치원반으로 나눠져 있고 장차관급이상 자녀들만 따로 교육하는 곳이다.이 곳에서나는 김정일의 동생 김평일,영일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졸업후 김일성대학 교원이 돼 상류생활을 하면서 행복에 빠져 자기만을 위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그러면서 김정일체제와 북한 사회를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김정일은 정치적 경제적인 업적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남쪽의 소식도 들을 기회가 많았다.나의 행동이 북조선 통치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김평일과 영일은 공부도 잘했다.김평일은 사람을 많이 끌었다.학교에서는 김정일을 치켜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결단코 제거하자는 운동이 미사여구로 미화됐고 정당성으로도 연결됐다.이런일도 있었다.학생들은 김평일과 영일과는 대면하지 못하게 돼 있으나 어느날 축구를 하고 선생들이 평일 영일과 식당에 가 식사를 같이 했다.서로 불문에 부치기로 했으나 어느 선생이 노트를 두고 나와 탄로가 나 많은 선생들이 물러났다. 정무원 각료들은 파벌은 없다.그러나 이들은 개방을 원하고 있다.정무원의 모든 부장들은 개방을 지향하고 있다. ▲(강씨)김달현은 나의 친척이다.할아버지는 강선욱인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아버지와 6촌형제이며 전부주석 강양욱과 친형제이다.김달현은 강반석의 오빠 강진석의 손녀 사위이다. 김달현은 대외분야를 많이 맡아 92년 12월 강성산이 총리가 되면서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에서 같이 승진했다.그런데 김은 강성산이 심장쇼크로 입원하면서 처음으로 총리를 대행하면서 경제를 책임지게 됐다.그때 군수공장의 전기를 30% 삭감해 탄광등지로 보냈는데 그 때문에 군수생산계획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김일성이 받게됐다.김일성은 대노해 『정신 있는 사람인가』 하면서 질책을 했고 김달현은 사상검토를 받고 도청도 당했다.김달현은 강성산과 때로 맞서기도 했다.강성산이 내놓는 방안을 놓고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결국 김은 작년 12월 함남에 지도원으로 내려갔다. 강성산은 경제문제등이 꼬여 집에 들어가지도 못해 당뇨병이 심해졌다. 그래서 김일성이 쉬도록 권고해 88년에 함북으로 휴양을 갔다.91년에 다시 총리가 되었는데 재기는 상상도 못했다.강성산은 어려서부터 김일성이 키운 사람이다.강은 중국 출신이고 아버지 강위련은 빨치산출신으로 김일성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강의 삼촌 강위룡은 아직 살아 있다.강위련은 기관총 분대장을 했는데 강이 죽자 김일성이 몹시 울었다고 한다.강은 혁명학원에서 공부하고 이근모 연형묵등과 함께 체코에서 유학도 해 체계적으로 키워져 김일성이 등용했다.강은 김정일과도 가깝다.김정일과 사이가 나쁜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비리를 들춰 낸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의 핵 상황은. ▲(강씨)김정일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핵이라 생각하고 있다.인민생활과 경제가 파탄상태인데도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핵이라고 여기고 있다.북한에는 군수공장이 민간공장보다 더 많다.핵이 개발됨으로써 군수공장의 투자를 민간으로 돌릴 수 있다는 논리이다.동구권국가가 허물어지면서 공격받지 않으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북한은 5개 정도의 핵폭탄생산을 완료했다.핵을 실어나를 로켓 생산은 실험단계이고 94년까지 완전 생산할 것이다.최소한 10개정도 확보한 다음에는 보유사실을 공개해 남북 대미 관계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핵폭탄은 이미 개발이 완료됐고 다만 갯수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이 이야기는 영변 핵단지에 있는 고위 간부가 아들 결혼식 때문에 나와 술과 담배 식료품등을 취급하던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들은 것이다. ­북한내 지식인이나 고위층주변의 김정일에 대한 평판은 어떠한가. ▲(강씨)북한의 지식인들과 일부 고위층 사이에는 김정일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이때문에 식량난과 경제난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김정일 체제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평소 김정일은 지나치게 즉흥적인 정치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일부 원로들에 대해서까지 너무 편견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이러한 내막을 알고 있는 지식인이나 고위층들은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조씨)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한 북한 이반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북한사회를 빠져 나올 경우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뿐 80년대 중반부터 노골화된 김정일체제를 인정하거나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체제는 얼마나 갈 것 같은가. ▲(강씨)20년전부터 정치를 해와 권력기반은 튼튼해 수명이 길 것으로 본다.75년부터는 정권기반을 닦았으며 85년부터는 김정일이 외교권 행사를 제외하고는 총지휘했다. 당정의 지시를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유일적 지도체제에서 당정은 사실상 김정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기본권력수뇌부인 당정 조직 지도부가 모두 김일성대학 출신의 2세대인만큼 권력기반은 확고하다.총비서,주석을 다 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청진시의 화학석유공장이 91년부터 지금까지 3년동안 가동이 중단됐고 작년 9월 한달동안 김책제철소가 가동되지 못하는등 경제의 70%정도가 파탄지경이어서 김정일 체제 수명은 주민 불만고조로 짧아질 수도 있다.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총정치국장을 겸하고 있는가. ▲정치국과 참모부간의 갈등이 많아 오진우가 겸임하고 있다. ­94년을 잘 넘긴다는 뜻은 무엇이고 핵수출 가능성은. ▲지난해 김정일은 북미회담과 IAEA핵사찰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진의,핵사찰에 대한 중국의 입장등을 파악하느라 집에도 가지못하고 청사에서 자면서 북미회담을 지휘했다. 이때문에 김정일은 당시 내년(94)만 잘 넘기면 북미회담및 남북회담에서 유리하다고했다.핵수출여부는 잘 모르겠다. ­외화보유고는 얼마나 되나. ▲대성은행이 전쟁에 대비해 마카오,스위스,일본은행등에 외화유치를 하고 있다. ­북한의 사로청과 한총련과의 관계는. ▲사로청 산하 조선학생위원회는 사로청의 외곽지도를 받고있으나 사실상 대남사업부인 통일전선사업부 6과에서 지도하고 있다.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럴싸한 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왜 남조선으로 오는 귀순자들이 있는지 학생들은 심각히 생각해봐야한다. 또 서강대 박홍총장의 얘기는 약과다.대남정보부에서는 공장의 노동자들보다는 흥분하기 쉽고 혈기가 있는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주체사상을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김정일의 성격,지식,지도력,건강,가족관계는.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이다.특히 측근들을 질책할 때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성질의 기복이 매우 심하다는 뜻의 「패났다」는 소릴 들을 정도다. 피아노를 전문가이상으로 치는등 예술에 매우 조예가 깊다.매우 건강한편이다. 또 초대소(별장)에서 동생 경희가 어머니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생을 나무라다가도 따라서 우는등 눈물도 많다. 김정일이 김평일등 곁가지등과의 식사및 사진촬영등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피해야한다는등 자신의 입지확보에 장애가 되는 이복형제들의 제거에 신경을 쓰는등 졸렬하다. 김정일은 또 평소 잘 웃지 않는다.83년 할아버지(강양욱 부주석)가 죽었을 때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왔으나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92년 11월 식품을 담당하는 경리부 시찰을 왔을 때는 신제품 음식을 보고는 『잘 됐다』는 의사표시로 미소를 지은 것이 고작일 정도로 거의 웃지않는 편이다.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은 대남정탐본부인 통일전선사업부 이동호 제1부부장이 김정일이 초대소의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78년 문수초대소로 초대,이때부터 기쁨조에 관심을 보였다. 또 외교부 산하에도 기쁨조를 두고 있으나 정·군을 장악하기 시작한 85년부터는 업무때문에 기쁨조를 축소시켜 현재는 각 도별로 3개씩 모두 72명의 기쁨조가 있다. 김정일은 유일한 동생인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을 제일 신임하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호위총국장 이을설등 항일 빨치산 세대인 이른바 「혁명1세대」는 대부분 존경한다. 가족관계는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 딸 2명과 아들 1명이 있으며 이들은 55호 관저에 있다. 두번째 처는 무용수출신의 고영희씨(40)이며 고씨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1명씩을 각각 두고 있다. 자식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정남(23·미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배우인 송혜림과의 사이에서 났으며 70년대 당시 결혼한 송씨를 차지하기위해 송씨의 남편을 프랑스의 유네스코 대표로 보냈다. 김군은 그러나 김정일 뒤를 이를 후계계승자도 아니고 김정일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며 식모등과 함께 문수구역에 거주하고 있다. 김군을 93년 9월 고려호텔에서 만났을 때 김군이 여자랑 노는등 타락한 생활을 해 호텔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남한에 대한 정보는 어떤 방법으로 입수했는가. ▲(조씨)남산고등중학교 시절에는 남한 신문을 볼 수 있었고 아버지가 건설부부장으로 일할 때 장관급 이상 고위직에게 보급되는 국제정세,남조선정세,과학기술정세등에 관한 참고통신을 아버지를 통해 볼 수 있었다.이 통신은 논평없이 있는 그대로 사실만 기록돼 있다.또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같은 정보가 비밀히 나돌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사망으로 집단 통곡하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하나. ▲(조씨)북한의 주체사상은 공산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고 주민들은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주민들은 주체사상이 대중과 민중을 위한 이론으로 알고 있어 이를 만든 김일성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또 주민들이 그토록 슬퍼했던 것은 앞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했다. ◎“장인 강총리 숙청될것” 괴로운 표정/“북뉴스 접촉기회” 내외신기자 2백명 몰려/귀순자 기자회견장 이모저모 27일 귀순한 강명도씨와 조명철씨의 기자회견이 열린 프레스센터 20층 회견장에는 두 사람이 북한고위인사의 친인척이어서 폐쇄적인 북한 내부의 고급 뉴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외신기자 2백여명이 한꺼번에 몰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였다. 특히 일본의 교토통신과 유럽의 로이터통신등 외신기자가 보도진의 절반을 넘었으며 국내 기자들보다 앞서 질문공세를 펼침으로써 최근 북한 내부 정세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강씨등은 시종 진지하고 또렷한 말투로 취재진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변했으며 종래 귀순자들과는 달리 고위층 내부의 비밀스런 활동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 이날 회견에서 강씨는 여유있는 태도와 달변에 가까운 말솜씨로 북한 내부사정을 조리있게 설명.반면에 조씨는 구체적인 답변보다는 학자풍의 원칙론적인 대답으로 일관해 대조적. ○…특히 강씨의 경우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지난 87년 음주교통사고를 낸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의 대형벤츠 승용차 번호인 216­5555를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도 해 기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이날 강씨는 3시간여동안의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나의 귀순과 기자회견으로 단기간내에는 강성산총리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만간 숙청등 그 대가를 치르고 상당히 곤경에 빠질 것』이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자회견도중 땀을 훔치는 등 다소 힘든 모습을 보인 조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동료들은 북한의 모순된 체제를 내부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비난할 것』이라면서 『다만 우리들의 귀순동기가 북한사회에 알려져 북한사회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끝을 맺었다. □인적사항 ▷강명도◁ ▲나이·생년월일:36세,58.12.4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1동7반 ▲직책: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 ▲학·경력 ­70.8∼76.9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졸업 ­76.10∼79.9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졸업 ­79.9∼82.7 중앙사로청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 ­82.7∼85.10 조선인민경비대원,평양시당 39호실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7.6∼92.2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연구실장 *외국인 무단접촉으로 90.3∼92.2 평남 북창군 「18호관리소」수용 ­92.3∼ 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대외명칭 「릉라888무역회사)산하 「릉영윤전합영회사」부사장 ▷조명철◁ ▲나이·생년월일:35세,59.4.2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당상1동 8반 아파트 20층1호 ▲직책: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92.8부터 중국 북경언어학원·천진시 「남개」대학 유학 ▲학·경력 ­71.9∼77.8 남산고등중학교 졸 ­77.9∼83.8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 학부자동조정학과 졸업 ­83.9∼87.10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졸업 *기업관리 현대화 전공,준박사학위 취득 ­87.10∼92.7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경제수학·기업관리 현대화 강의 ­92.8∼93.7 중국 유학,북경 언어학원 중국어 연수 ­93.9∼ 중국 천진시 남개대학관리학부 연수 *경영합분야의 정책결정론 과정
  • 강명도·조명철씨가 밝힌 「후계자의 사생활」

    ◎“김정일성격은 급하고 저돌적”/「곁가지」 제거에 신경… 도마다 「기쁨조」 운영/세여인 사이 3남3녀… 23살 장남도 방탕 김정일의 성격은 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인 편이며 건강도 아주 좋다고 귀순자들은 밝히고 있다. 북한 정무원 총리 강성산의 사위 강명도씨(36)는 27일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의 성격과 관련,『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특히 측근들을 질책할 때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뭐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며,시시때때로 성질이 왔다갔다해 북한에서는 김정일을 「패났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초대소(별장)에서 동생 경희가 어머니(김정숙)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생을 나무라다가도 따라 우는등 눈물도 많다고 했다. 전건설부장 조철준의 차남이자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인 조명철씨는 김정일이 이복동생 김평일등 「곁가지」등과의 식사및 사진촬영등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피해야한다는등 자신의 입지확보에 장애가 되는 이복형제들의 제거에 신경을 쓰는 졸렬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정일은 또 평소 잘 웃지를 않는다고 강씨는 밝혔다. 83년 강씨의 할아버지(강양욱 부주석)가 죽었을 때는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왔으나 거의 말을 하지않았으며 92년 11월 식품을 담당하는 경리부 시찰을 왔을 때 신제품 음식을 보고는 『잘 됐다』는 의사표시로 미소를 지은 것이 고작일 정도로 거의 웃지않는 편이라고 전했다.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은 대남정탐본부인 통일전선사업부 이동호 제1부부장이 김정일이 초대소의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78년 문수초대소로 초대,이때부터 기쁨조에 관심을 보인 것으로 밝혔다. 또 허답의 외교부 산하에도 기쁨조를 두고 있으나 정·군을 장악하기 시작한 85년부터는 업무때문에 기쁨조를 축소시켜 현재는 각 도별로 3개씩 모두 72명의 기쁨조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한 김정일은 졸업뒤 선전선동부에 근무했으며 전문가 이상으로 피아노를 잘치는등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 밝혔다. 한편 김정일은 유일한 동생인 김경희와 그녀의 남편 장성택을 제일 신임한다고 전했다. 김정일은 또 권력서열 2위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호위총국장 이을설등 항일 빨치산 세대인 이른바 「혁명1세대」는 대부분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가족관계는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 딸 2명과 아들 1명이 있으며 이들은 55호 관저에 있다고 밝혔다. 두번째 처는 무용수 출신의 고영희(40)이며 고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1명씩을 각각 두고 있다. 자식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정남(23·미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배우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났으며 70년대 당시 결혼한 송씨를 차지하기위해 송씨의 남편을 프랑스의 유네스코 대표로 보냈다고 전했다. 김정남은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정일 후계 승계자도 아니고 김정일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며 식모등과 함께 문수구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를 93년 9월 고려호텔에서 만났다는 강씨는 당시 김이 여자랑 노는등 타락한 생활을 해 호텔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특히 전쟁시 사용하기위해 홍콩의 마카오를 비롯,스위스·오스트리아·일본은행등에 외화를 넣어두고 있다고밝혔다. 강씨는 김정일 체제의 수명과 관련,『20년전부터 정치를 시작,85년부터는 사실상 정권을 총지휘해 온데다 당정의 조직지도부가 모두 김일성대학출신의 2세대인만큼 권력기반은 확고하다』면서 『사실상 김정일은 총비서와 주석직을 다 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강씨는 그러나 경제의 70%가 파탄에 이르러 경제및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주민들의 불만고조로 어려운 지경에 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일성의 이종… 북 대표적 개방파/「사위 귀순」 강성산은 누구 귀순자 강명도씨(36)의 장인인 강성산정무원총리는 현재 북한 권력서열 3위에 올라있는 실세인데다 두번째 총리를 역임하고있는,김정일의 핵심측근.지난 8일 사망한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의 큰 언니 아들이어서 김일성과는 이종사촌관계. 올해 63세인 그는 북한 경제 테크노크라트의 대표주자이며 김달현등과 함께 북한내 몇 안되는 개방파 인물.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으로 만경대 혁명학원과 김일성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뒤 모스크바 종합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체코의 프라하공대에 유학하는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67년 자강도 당책임비서로 임명된데 이어 70년 39세에 평양시당 책임비서로 발탁돼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김일성부자의 각별한 신임으로 77년 정무원 부총리에 전격 임명된 이후 84년 최고인민회의 7기 3차회의에서 제1부총리자격으로 「남남협력과 대외경제활동을 강화하고 무역활동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대하여」라는 주요보고를 한뒤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이해 9월 합영법과 외국인소득세법등 개방정책관련법들을 마련하는등 광범위하고 파격적인 개방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그러나 경제개혁이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86년12월 총리직에서 해임돼 당비서로 자리를 옮긴뒤 88년3월 전직총리로서는 이례적으로 함북도당 책임비서로 일했다. 그는 여기서도 두만강개발계획을 창안하는등 개방을 계속 추진해왔으며 그의 이같은 경제개혁추진능력은 김일성으로부터 공개적인 칭찬을 받았고 92년 12월 총리로 재기용됐다. 사위의 귀순이 그의 정치적 입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되고 있다.
  • 조직폭력 목포파두목 구속/히로뽕 상습투약·탈세혐의

    서울지검 강력부(유창종부장검사)는 19일 히로뽕을 상습투약해온 폭력조직 「목포파」두목 강대우씨(46·폭력등 전과6범)를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또 강씨가 서울 서초구 잠원동 R호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면서 세금계산서를 조작,세금을 포탈해온 사실을 밝혀내고 조세범처벌법 위반혐의도 적용하는 한편 이 업소 경리상무 강민부씨(50)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강씨는 지난 5월 하순 히로뽕사범으로 당국에 수배중인 고모씨로부터 히로뽕 0.12g(시가 40만원)을 공급받아 서울 강서구 등촌동 모여관에서 투약하는등 지난 6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히로뽕을 투약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 대 물리는 가업(이탈리아 중소기업 탐방:16)

    ◎가족기업이 80%… “오순도순 경영”/“아버지는 사장·장남은 영업” 역할 분담/의사결정 빠르고 마찰 없어… 능력따라 딸이 사장되기도 이탈리아 북부의 교통 요지 베로나에서 여성 옷을 만드는 스티졸리사는 「아지엔데 파밀리아레」이다.가족들이 회사를 경영하는 「가족 기업」이란 뜻이다. 창업주인 아우렐리오 스티졸리 사장은 전반적인 경영을 맡고 장남인 알베르토는 영업을 책임진다.둘째인 아틸리노는 총무를,첫딸이자 셋째인 엔리코는 컴퓨터 및 섬유연구를,막내인 니콜라는 디자인을 각각 책임진다. 총 근로자 80명 중 관리직은 10여명.경리,비서 등 실무직 사원 5명을 빼면 가족들이 회사일을 모두 꾸려 나간다.지난 45년 속옷 생산업체로 출발할 때부터 철저한 「가족주의」였다. ○정으로 똘똘 뭉쳐 이탈리아의 중소기업들은 가족 경영이 보편화돼 있다.중소기업 협회에 등록된 업체 8만5천여업체 중 80%는 가족 기업이고 등록하지 않은 소규모 기업들까지 합치면 실제 비율은 90%를 넘는다고 한다.대부분 가족 이름을 상호로 쓰며 「정」으로똘똘 뭉쳐,경제계 「신로마 군단」의 선봉 역할을 하고 있다. 창업 2세들은 어려서부터 직장이 정해져 있다.큰 아들만 경영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딸을 포함해 사위까지 모든 가족이 경영 일선에서 일한다.4대가 함께 일하는 곳도 숱하고 장자가 꼭 대를 잇지도 않는다.자질만 뛰어나면 딸이나 사위도 사장이 될 수 있다. 가족 기업은 의사 결정이 빠르고 경영층간에 마찰이 없다는 게 큰 장점이다.또 가족끼리 업무를 분담,전문성을 살리면서도 의사 결정에는 총체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특색이다.그러나 근로자의 내부 승진이 어려워 생산 욕구가 떨어진다는 점,소유와 경영이 나눠지지 않아 전문 경영인의 영입이 어렵다는 것이 단점으로 꼽히고 있다.이런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최근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가족기업과 전문 경영인제를 혼합하는 기업이 있으나 일부에 불과하다.아직은 가족 경영이 큰 줄기이다. ○4대가 한 일터에 스티졸리사의 알베르토씨는 『어려서부터 이 곳에서 일할 생각을 가졌으며 대학에서도 이를 전제로 회계학을 공부했다』며 『가족들이 함께 일하니 호흡이 잘맞고 경영에 큰 잡음이 없다』고 말했다.사장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인사는 아버지의 고유 권한이라고 덧붙였다. 메다에서 3세에 걸쳐 전통 가구를 만드는 메데아사 역시 가족 기업이다.조반니 달리아부에 사장은 최근 경영에서 물러났다.장남인 체사르가 총괄하고 둘째인 엔리코가 재정과 생산을,셋째인 아우구스트가 영업을 담당한다. 엔리코씨는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고등학교에서는 회계를 배웠다고 한다.『다른 일을 할 생각도 시간도 없었다.10살때부터 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했으며 형이나 동생도 마찬가지 였다.가족이 함께 일해 사업계획을 짜고 비밀을 지키는 데 편리했다』고 말했다. 밀라노의 신발 생산업체 로렌조 반피사의 반피 사장은 『현재 큰 아들 루카가 영업을 담당하고 있으며 둘째 주니어 로렌조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며 『공부가 끝나는 대로 경영에 참여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경영의 분업화가 요구되며 더 많은 경영인들이 필요하다』며 『반피사는 세계적 규모의 토털 가죽업체를 지향하기 때문에 2명의 경영인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전문 경영인을 키울 포부도 밝혔다.가족 기업을 지향하면서 단점을 보완하겠다는 생각이다. ○내부 승진 어려워 설립된 지 20년 안팎으로 규모가 상당히 커진 기업들은 이같은 생각을 많이 한다.반피사도 지난 79년 설립됐다.이탈리아 섬유산업연합회 안젤로 파비아 회장은 『이탈리아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지 않는다.동양인 못지 않게 가족간 유대가 좋은데다 가내 수공업체들이 그대로 현대 기업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라며 『가족의 변천사가 바로 기업의 성장사다』라고 말했다. 밀라노에서 가방을 만드는 이산티사가 좋은 경우이다.현재 회장인 아마토 산티는 지난 46년 가죽가방공장의 직원이었다.그의 아버지 역시 가방 만드는 장인이었으며 어머니 또한 같은 곳에서 일했다. 이듬 해인 47년 아마토 회장은 자기가 영업을 맡고 부모는 생산을,삼촌은 관리를,부인 디바는 회계를 맡아 가족 경영의 깃발을 세웠다. 50여년이 흐른 지금 아마토는 경영을 맡고 장남인 마시모는 수출,며느리 안나와 큰 딸 에디드는 내수,사위 지노는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회장 부인 디바는 여전히 회계를 담당하고 막내 딸 수잔은 마케팅과 광고를 할당,전가족이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는 셈이다. 최근 경영 수업을 받는 마시모는 『대화의 벽이 없다는 게 가족 경영의 큰 장점이다.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잘잘못을 엄중히 따지고 서로의 의견을 부담없이 개진,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는다』며 『그러나 경영층으로의 승진이 막혀 근로자의 의욕이 떨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하오 6시에 근로자가 모두 퇴근하는 데도 산티 가족은 하오 9시까지 남아 하루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남성 정장업체 히트만사의 루이지 시스티 기술고문은 『형제 자매인 경영층끼리의 협조 관계를 노사간 협력체제로 바꾸고 소유와 경영을 어느정도 분리,일반 근로자도 열심히 일하면 회사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 잦은 폭음… 심장박동기 장착설/김정일 건강상태는 어떤가

    ◎심장질환에 긴장·위장 크게 손상/정상업무 지장… 정책결정 소외도/건강전담 「만수무강 연구소」 설치 운영 북한주석 김일성이 대표적인 성인병 심근경색증에 의한 심장쇼크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김정일의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정일이 성인병을 앓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으며 그가 이런 성인병 고위험인자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올해 52세의 중년인 그는 키 1백64㎝,체중 85㎏의 비만체형인데다 난폭성·콤플렉스·정서불안등 스스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게다가 평소 양주 같은 독한 술을 마실 때 작은 잔으로는 성이차지 않아 맥주컵에 그대로 따라 마실정도로 지나친 폭음을 일삼아 간장 또는 위장손상등 건강이 크게 나빠졌을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또 지난 93년 7월 모스크바의 한 소식통이 김정일당비서가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 몇달째 공식석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지난 1월에는 지나친 폭음 때문에 자주 정상집무를 못하는 사태를 빚고 있다고 북경및 서방소식통이 전한바 있다. 이어 5월에는 심장병등 중병으로 주요 정책결정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됐다는등의 보도가 잇따랐으며 심장박동기를 달았다는 설도 있어 그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현재 북한에는 이같은 김정일의 건강악화를 우려,당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에 「기초과학원」이라는 명칭의 김정일건강만을 전담·연구하는 「만수무강연구소」가 설치,운영되고 있다.이곳에서는 김정일과 나이·체질등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 생체실험을 통해 건강식품의 연구결과를 김정일에게 그대로 적용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여군사관후보 임관식

    제39기 여군사관후보생 임관식이 1일 상오 오영우교육사령관을 비롯한 군관계자및 후보생 가족등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 영내 여군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임관된 여군장교들은 보병·전산·정보·정훈·경리등 13개 병과별로 선발된 대졸출신의 전문인력으로 지난 3월12일 여군학교에 입교,16주간 훈련을 받았다. 임관식에서 국방부장관상은 이행숙소위(24·전남대졸)가 수상했고 육군참모총장상은 최성이소위(25·성심여대졸),교육사령관상은 정희형소위(23·전남대졸)이 각각 받았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1백불 위폐 10장/외국인 환전해가

    【대구=김동진기자】 외국인이 호텔에서 1백달러짜리 위조지폐를 한국돈으로 바꿔간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18일 하오 9시쯤 대구시 남구 대명 2동 프린스 호텔 프런트에서 30대로 보이는 백인 1명이 1백달러 짜리 지폐10장을 한국돈으로 바꿔 달라고 해 경리직원 신창환씨(22)가 환율시세에 따라 한화 79만2천원에 교환해 주었다는 것이다.
  • 국조 오늘 마감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 법사위는 17일 민자당 단독으로 김영일전청우종합건설경리이사와 당병국우성산업개발대표등 4명을 불러 증인·참고인신문을 벌이려 했으나 이들이 출석하지 않아 신문을 하지 못했다. 법사위는 이에 따라 증인출석요구에 불응한 김씨에 대해서는 출석요구서 송달경위와 불출석 사유등을 파악한 뒤 국정감사및 조사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할 방침이다. 법사위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정치자금제공에 대해 엇갈린 진술을 한 조기현전청우회장과 이동영대로개발사장,김광현·이갑석전청우부사장등 증인 4명을 불러 대질신문을 벌이는 것으로 30일 동안의 국정조사를 마감한다.
  • 정보산업/21세기 지구촌 경제성장 이끈다(현장 세계경제)

    ◎80∼90년대 서비스산업 이어 「새주역」으로/선두주자 미,전체설비투자의 50% 육박… 수출증가 큰 몫/수많은 새사업·일자리 창출… 자동차산업보다 많이 고용 컴퓨터·통신등 정보기술의 혁명이 미국을 비롯한 90년대 지구촌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가고있다. 1세기전 철도는 미국 경제성장의 기관차였다.2차대전 후 수십년동안은 제조업이 성장의 열쇠였다.80년대는 의료·법률서비스·산매업등 서비스산업이 미경제를 이끌었다.그러나 90년대들어서는 컴퓨터·소프트웨어·통신등 정보산업이 미경제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미상무부 자료에 따르면 이들 하이테크설비산업 및 이에대한 소비자지출이 90년 이후 경제성장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금융서비스,오락산업등 정보처리 및 정보이동에 의지하는 산업의 번창은 놀랄 만하다.또 모든 산업분야의 기업체들이 리엔지니어링과 경쟁력향상에 정보기술을 이용하고 있다.「정보」가 경제의 근본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정보산업의 관점에서 볼때 미국은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에 저만치 앞서 있다.이 분야 세계1인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은 지난 10여년간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그 결과가 이제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고용창출과 경제성장을 위해 통신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일본은 미국이 지난 10년간 퍼스널 컴퓨터 및 정보네트워크에서 이룬 성과를 따라잡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중국·헝가리·태국과 같은 발전도상국들도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한 정보기술을 얻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정보산업위주 경제로의 이행은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미기업의 투자내용을 보면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기술에 들어가는 돈이 전체 설비투자의 50%에 육박하고 있다.이 수치는 기업이 매년 소프트웨어 및 프로그래머에 지출하는 수십억달러를 뺀 것이다.이에 반해 제조업의 심장이라는 기계류에 대한 투자는 75년 전체 설비투자의 38%에서 93년 18%로 떨어졌다. 정보기술 및 정보서비스가 수출증가에 기여하는 바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한때 항공기산업은 미수출의 빛나는 별이었다.그러나 93년 미국의 정보기술설비 수출은 6백20억달러에 이르러 항공기수출 3백30억달러를 멀리 따돌렸다. 또 미국은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수출국이다.지난해 주요 소프트웨어업체의 PC프로그램 해외수출은 25억달러였다.정보처리·정보데이터베이스등 컴퓨터 관련 서비스분야에서도 미국은 30억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낳은 두가지 다른 긍정적 부산물은 「효율성향상 및 가격하락」이다.80년대 경제학자들이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최근 조사는 컴퓨터에 대한 투자가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컴퓨터를 사용한데 따른 원가절감효과로 정보시스템에 대한 투자의 수익률이 50%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더욱이 지난 2년간 비농업분야 미국의 생산성은 76년이후 최고치인 4·9%의 성장률을 보였다.경제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정보기술을 과감히 수용한 결과로 평가했다. ○자본생산성 증가 또 전문가들은 가격하락이 정보경제와 이전의 경제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말한다.철도·기계등 과거의 기술진보들은 엄청난 양의 자본을 필요로 했다.그러나 정보경제하에서 기업은 정보기술 가격의 급속한 하락으로 생산성 및 품질 향상에 이전보다 훨씬 돈이 덜든다.이 결과 자본의 생산성이 최근 몇년사이 전후 처음으로 증가했다.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이중 가장 큰 문제가 기술혁신에 따른 실업자 양산이다.예를 들면 유에스 에어항공사의 경우 한때 경리부직원만 6백50명이었던 것이 계산과정이 전자동화 하면서 3백명의 인원이 잘려 나갔다.아이로니컬하게도 최대규모의 인원감축은 IBM·AT&T등 정보경제의 핵심인 컴퓨터 및 통신회사에서 발생하고 있다.이들 통신·컴퓨터회사들은 88년이래로 15만4천명을 감원했다.기업간 경쟁도 한 원인이지만 정보기술진보로 이들 기업이 더 적은 인원으로 충분히 해낼수 있게 된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비도시지역 발전 정보경제는 그러나 동시에 수천가지 새로운 사업과 일자리를 창출해 냈다.소프트웨어·데이터처리·정보검색 산업이 88년이후 31% 성장한 것이 그 예이다.이들 산업은 현재 자동차산업보다 더 많은 수를 고용하고 있다. 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근무가 가능해짐으로써 정보경제는 비도시지역의 발전을 유도하는 효과도 가져왔다.정보전달체계의 발달로 대도시의 서비스와 편의가 낙후지역까지 확산돼 도시문화를 보편화시켰기 때문이다. 전기가 없는 세계경제를 상상할수 없듯 내일의 경제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없이는 상상하기 힘들다.정보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에 비추어 볼때 세계경제가 지금 맞고 있는 정보혁명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 카사노바 쇠고랑찰듯/20대여자 “강간당했다” 고소(조약돌)

    ◎“뻔뻔한다” 헬스클럽선 제명 ○…한국판 카사노바」나모씨(46)가 10여년간 1백여명의 젊은 여성을 농락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모월간지 경리직원이었던 이모양(22·회사원)은 16일 『지난 4월 29일 서초구 잠원동 모레스토랑에서 나씨로부터 환각성분이 든 음료수를 받아 마신뒤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반포의 나씨 아파트로 끌려가 강간당했으며 나체사진까지 찍혔다』며 서울지검에 고소장을 냈다. 검찰은 이에 따라 금명간 이양에 대한 고소인조사와 함께 나씨를 소환,조사한뒤 혐의가 확인되면 강간 등 혐의로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이양은 고소장에서 『나씨가 본인의 직장 상사와의 친분을 이용,평소 전화로 성적인 농담을 일삼았으며 사건 당일에는 「차나 마시자」며 나오라고 해 강제로 승용차에 태웠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양이 고소장에서 『나씨를 감금·폭행한 혐의로 지난 11일 구속된 박민수씨(32)는 본인의 애인이며 나씨를 감금한 것도 나체사진을 빼앗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함에 따라 이 사건과의 관계 여부도 수사중이다. 한편 나씨는 지난 14일 자신이 다니던 남산의 모헬스클럽에서 회원들로부터 쫓겨난데 이어 이날 영구제명되는 수난을 당했다.
  • 민주 불참속에 맥빠진 신문/상무대국조 스케치

    ◎군공사담당관 신문여부싸고 논란/“수주전제조건 청우에 유리” 추궁 11일 속개된 국회 법사위의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는 민주당 의원들이 끝내 불참한 가운데 절름발이식으로 진행됐다. 민자당은 이같은 파행국면에도 불구하고 조사시한인 오는 19일까지 단독으로라도 조사를 강행한다는 방침이다.민주당이 「보이콧」 방침을 철회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야당의 몫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정조사에서 야당의원 모두가 중도포기했으니 조사의 의미도 자동상실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조사자체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날 국방부에서 진행된 증인신문은 시종 맥빠진 분위기로 일관한 끝에 1시간30분만에 종료. 증인으로 나온 육군 중앙경리단의 전계약처장 정석용대령과 국방부 시설국의 전설계심의담당관 임명용공군중령이 엄격히 보면 조사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도 이같은 분위기를 뒷받침.이들은 상무대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특혜시비등에 연루돼 구속돼 있는 상태.국정조사의 목적인 정치자금 수수의혹을 규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증인신문에 앞서 민자당 의원들끼리도 신문을 벌일 것인가를 놓고 논란. 현경대위원장등은 본회의의 위임을 받은 이상 조사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본회의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법사위가 일정을 변경하거나 연장할 수는 없다는 견해였다. 반면 강신옥의원등은 이날 증인 2명이 민주당에서 요구한 사람들이므로,민주당 의원들이 나오지 않았으니 신문할 의미가 없다고 주장.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선 끝에 결국 현위원장의 중재로 증인신문은 하기로 결론. ○…의원들은 정대령을 상대로 상무대 이전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청우종합건설측에 대한 특혜가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를 집중추궁. 이인제의원은 『청우측이 특허를 갖고 있던 라크공법을 공사수주의 전제조건으로 한 처사가 위법이 아니냐』고 따졌고 박헌기의원은 『7%지분 밖에 없는 청우측에 현대측과 40대 60으로 지분을 과다배분한 것은 상부의 입김때문이 아니냐』고 질문. 박희태의원은 『2천억여원에 이르는 큰 사업결정을 정대령혼자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정대령은 상부의 지시는 물론 위법,특혜사실마저도 철저히 부인. ○…의원들은 이어 임중령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던졌으나 역시 별무성과. 임중령은 상무사업과 관련해 청우측으로부터 1천만원짜리 약속어음을 받았다가 되돌려 주었기 때문에 정대령에 비해 연루정도가 약해 시원스런 대답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 정상천,정장현의원등은 라크공법 채택과 관련,『청와대측이나 국방부장관등 상부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는 얘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적이 있느냐』고 질문. 이에 대해 임중령은 『장교의 명예를 걸고 지시를 받은 적도,지시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
  • 구소 한인의 수난/이호철(일요일 아침에)

    구소련 해체와함께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회오리에 휘말려 현지의 우리 동포들이 또다시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전체 고려인의 75% 정도인 35만여명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와 카자흐에 밀집되어 살고 있는데,각 공화국이 소련방에서 벗어나 독립하면서 고려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괄시를 받는 소수계로 전락,집단농장이나 교단에서 줄줄이 쫓겨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이 지역은 전통적인 회교권이어서 「이제 우리 나라는 독립국가이니 카자흐어로 강의하라.그렇지 못하면 강단에서 내려오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런 식으로 쫓겨난 교수도 한두명이 아니라고 한다.그리하여 그들은 오갈 데없이 옛날의 고토인 연해주 쪽으로 몰리며 떠돌이신세가 되고 있고 동족끼리 모여사는 신한촌 건설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지난번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 때도 현지의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관해 어떤 형태로든 건설적인 소식이 나오길 기다렸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들 태반은 지난날 어떤 형태로든 항일독립투쟁에 가담했던 선열의 후예들이거나 일제 식민치하를 거부하고 유랑을 했던 지사들의 후예들이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범도장군도 여직 그곳에 묻혀 있거니와 1937년 어느날,스탈린의 명령 한마디에 그곳 연해주 쪽의 동포들은 한사람 예외없이 쓰고 살던 집과 세간살이 일체를 그냥 고스란히 둔채 남녀노소 전원이 밀봉화차에 실려 몇날 며칠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채 낯선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던 것이다.그때 스탈린일당은 연해주의 동포들을 몽땅 일본첩자로 보았던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그러나 우리 민족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새 삶의 터전을 잡고 고려인의 기상을 떨치었다.특히 농사일에 들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지금까지 주위의 이민족과 잘 융화하고 근면한 민족이라는 호평을 받아왔다. 그런데 별안간에 이들은 오갈데 없는 신세로 떨어져 그 옛날의 고토인 연해주 쪽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시와 주변지역 한인사회도 중앙아시아출신,사할린출신,북한출신 등으로 분열되어 있어 새로 떠돌이신세로 쫓겨오는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은 온전하게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도와줄 길이 없을까. 현지 고려인들은 러시아정부로부터 1937년의 강제이주에 대한 사과도 받아냈다고 하며,러시아정부는 현지의 떠돌이신세가 된 고려인들의 정착을 위해 25㏊의 부지도 제공하겠다는 의사도 내비쳤다고 한다.다만 돈이 없는 러시아정부로서는 더 이상의 경제적인 지원에는 난색을 드러내고 있다. 우즈베크에서 경리담당 공무원이었던 한 중년여자는 두 자녀를 둔채 혼자 연해주쪽으로 쫓겨와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언제쯤에나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다음과 같이 푸념을 하더라는 것이다. 『자치공화국이 있는 독일민족,유대민족은 모두 그곳으로 갔지만 한인들은 갈곳이 없으니 천상 부모들이 살았던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친척이나 연줄이 있는 사람은 하바로프스크 변두리에 단칸방이나마 얻었지만 우수리같은 소도시나 시골로 흘러들어간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생사 소식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자,러시아 현지의 우리 선열들의후예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에 우리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뻗칠수가 있을까.「25㏊의 부지」! 그것이 확 눈에 들어온다.러시아정부가 지난날의 죄과도 있어 고려인의 정착을 위해 25㏊의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것을 제대로 받아낼 「기구」같은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LA의 한인들처럼 그곳의 한인들도 몇갈래로 찢겨져 으르렁거리고만 있는것 같다. 이참에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적극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심지어 북한에서조차 두고 있는 해외교포문제 전담기관이 우리 정부 안에는 아직 없다는 사실.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이 마련되면 북한 벌목공문제도 훨씬 쉽게,자연스럽게 풀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정부기구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러시아·중국·미국·일본 등의 교포문제를 다루는 「교민청」같은 것도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상무대국조」 단독진행/민자/“청우 특혜” 군관계자 등 집중추궁

    ◎“국조법 개정전 영수회담 불응”/이기택대표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 법사위는 11일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국방부에 나가 증인신문을 계속했다. 법사위는 이날 공사수주과정에서 청우종합건설측의 로비를 받고 특혜를 준 혐의로 군 검찰에 구속된 정석용 전육군중앙경리단계약처장과 임명용 전국방부시설국설계심의과장등 2명을 신문했다. 의원들은 이들에게 청우측에 특혜를 주도록 상부의 지시,개입이 있었는지등을 추궁했으나 이들은 부인했다. ◎임시국회 연계 추진 민주당의 이기택대표는 11일 상무대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국정감사및 조사법의 개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야영수회담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자청,지난 8일의 청와대 여야영수대화 내용을 설명하면서 『영수사이의 합의마저 파기,결과적으로 국민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영수회담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대표는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회동에서 국정조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국정감사및 조사법의 개정을 약속했다』고 거듭 주장하고 『그럼에도 여권측에서 딴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김영삼정권의 도덕성과 신뢰에 커다란 문제가 아닐수 없으며 앞으로의 여야관계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대표는 『대통령의 약속대로 상무대의혹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더 이상의 법리논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관계법이 빠른 시일안에 개정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오는 1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6월 임시국회와의 연계및 대통령 탄핵소추등을 포함한 모든 투쟁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 국조 증인심문 무산/민주 중단선언 따라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 법사위는 10일 차동렬현대건설전무,김영일전청우종합건설경리이사,당병국우성산업개발대표,서의현전조계종총무원장등을 증인·참고인으로 불러 신문할 예정이었으나 민주당의 조사중단 선언으로 회의를 열지 못했다.
  • “공사비3% 로비자금요구”이동영씨진술/「상무대국조」증인신문 이틀째

    ◎18일 조기현·이갑석씨와 대질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 법사위는 9일 조기현전청우종합건설회장을 사기혐의로 고소한 이동영대로개발사장과 이갑석·김광현전청우부사장등 5명을 증인및 참고인으로 불러 조씨가 고위층에 수십억원을 로비자금으로 제공했는지 여부를 집중신문했다. ○…이동영사장은 조전회장이 상무대 전공사등과 관련해 90년부터 91년까지 청와대및 정부고위관계자들에게 로비명목으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모두 13억2천만원을 받아갔느냐는 질문에 『공사로비자금으로 공사비의 3%를 제공해달라는 조씨의 부탁에 따라 이갑석부사장이 여러차례 자금을 요청,어음 수표등을 제공했다』고 시인. 이씨는 청우의 배서어음 명세표의 비고란에 고위인사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과 관련,『우리회사 경리장부에도 같은 지출액수와 일자가 적혀 있으나 검찰은 장부가 조작된 것이라는 조씨의 말만 믿더라』고 언급. 그는 민주당의 정대철·나병선의원이 『어제 조씨는 증인을 모해꾼이라고 하더라』고 자극하자 『중소업체 청우가 현대와의 공동도급을 40%나 따낸 배경에 아무것도 없다면 전국의 건설업체가 웃을 것』이라면서 『조씨는 천하의 사기꾼』이라고 분개. ○…그러나 김광현전청우부사장은 『조씨가 고위층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지난 대선때 김영삼후보에게 10억을 전달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느냐』고 민주당의원들이 묻자 『그런 사실이 결코 없다』고 강력 부인. 김씨는 군검찰부에서의 진술조서 사본과 고무인까지 제시하는 강철선·강수림의원(민주)등에 대해 『나는 조회장을 음해할 이유가 없다』면서 『듣지도 않은 얘기를 대통령에게 누가 될지도 모르고 함부로 얘기하겠느냐』고 일축. 이에 민주당의원들은 『군검찰관계자와 김씨를 대질시켜 김씨의 위증여부를 가리자』고 주장했으나 민자당의원들은 『전해들은 것에 불과해 증거능력이 없는 진술을 놓고 무슨 대질이냐』고 맞서 한동안 설전. ○…이갑석전부사장의 신문은 본인의 요청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그는 『배서어음 명세서에 있는 로비대상 고위층의 명단은 조씨가 요청할 때마다 나와 조회장 김영일경리이사가 작성한 것』이라고 군검찰부에서의 진술을 확인한뒤 『그러나 대상자들의 당시 직책이 조씨가 말한 것과 틀리는 사례가 많아 조씨가 실제 로비자금을 전달했는지는 의문』이라고 언급.
  • “시재원 동화사지원 특혜 아닌가”/「상무대국조」 대구시 문서검증

    ◎야의원들,노전대통령 지시여부 추궁/검찰에 넘긴 핵심 5개 문건 검증 못해 상무대 의혹사건에 대해 국정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회 법사위는 7일 대구시와 동화사를 방문,조기현전청우종합건설회장이 횡령한 공사대금 1백89억원 가운데 논란의 핵심인 통일대불 시주금 80억원의 행방과 내무부·대구시가 34억원을 특별지원한 배경등을 집중조사했다. ○…함석재·박희태·강신옥·박헌기(이상 민자),정대철 정기호 나병선(이상 민주),유수호(국민)의원등 8명으로 구성된 조사반(반장 함석재)은 이날 하오2시 대구시청에 도착,내무부 특별교부세및 시세의 동화사 지원근거,공사비 집행지원요청서,사업도면·사업계획서등 대불공사관련 3종류,10여건의 문서를 검증. 정대철·나병선의원 등은 『내무부특별교부세 26억8천만원및 대구시세 8억8천만원을 보수공사도 아닌 신축공사에 특별지원한 것은 노태우 당시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냐』고 지원배경에 의혹을 제기. 조해령대구시장은 이에대해 『통일을 기원하고 지역개발및 관광진흥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당시 행정책임자들이 전통사찰보존법,대구시보조금관리조례 등에 근거해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뒤 『노전대통령이 지원을 지시한 문서상의 흔적은 없다』고 답변. 그러나 민주당의원들은 『당시 대구시와 동화사에서 공사진척상황을 청와대 이모과장에게 수시로 보고했다는 정보가 있다』(나병선의원) 『시의회의 심의조차 없이 내무부로부터 5차례나 지원을 받아낸 것은 정부 고위층의 각본을 입증하는 것』(정기호의원)이라고 주장. ○…하오4시부터 시작된 동화사 문서검증에서는 대구시에 제출한 사업집행현황보고서등을 빼고는 통일약사대불건립 시주자명부,대불공사 경리장부,공사대금 지출장부,공사집행계획서등 핵심문서 5건이 모두 검찰에 제출된뒤 회수되지 않아 검증에 실패. 무공주지스님은 『현철스님이 지난 4월 서울지검에 조사받으러 가면서 3∼4차례에 걸쳐 특별회계장부등 대불관련서류들을 모두 가져갔다는 실무자의 보고를 받았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명. 이에 정대철·정기호의원은 『검찰의 압수수색대장에 그런 장부가 없고 임의제출때 끊어주는 보관증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서의현·현철스님등이 조작된 장부를 은닉했을 것』이라고 주장. 무공스님은 공사비규모와 관련,『91년 당시 대불 외형공사에 75억원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판단,정부보조금 34억8천만원을 확보한뒤 나머지는 서의현전총무원장이 구해왔다』면서 『서전원장은 그 출처에 대해서는 함구했다』고 설명.또 『공사비 추가소요액은 통일대전공사 22억원,좌대조각비 23억원등 모두 1백55억원으로 늘어난 것으로 최근 보고받았다』고 언급. 그는 이어 『이 지역 교구장으로서 의혹의 전말을 파악해나가겠다』면서 『그러나 80억이라는 거액의 행방을 산사의 수도승에게 추궁하는 국회의 양식도 의심스럽다』고 속세의 간섭에 불쾌한 표정. 그러나 야당의원들은 『국방예산을 횡령한 이적행위자의 돈이 불사에 들어왔다고 믿을수 없다』(나병선의원) 『불교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대금장부 회수및 자금입출금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유수호의원)면서 협조를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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