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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들의 열망에도 대규모 시위는 왜 실패했을까

    시민들의 열망에도 대규모 시위는 왜 실패했을까

    2008년 촛불집회부터 2016년 촛불혁명을 거쳐 2024년 빛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21세기 한국은 공교롭게도 8년마다 대규모 사회운동을 겪었다. 한국뿐만 아니다. 2010년대 들어 전 세계에 거대한 사회운동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중동·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 칠레의 ‘사회 폭발’, 홍콩의 ‘황색운동’ 등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지위와 나이, 차별과 혐오를 넘어 광장에서 모두 하나가 됐고 새로운 세상을 열망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 내지 못했다. 미국 언론사에서 일하며 전 세계에서 일어난 시위를 취재한 저자는 “10개 국가 중 7개 국가가 실패보다 더 나쁜 결과를 경험했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2013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벌어진 시위를 꼽았다. 시 정부의 버스요금 인상 결정에 반발하며 ‘무상 대중교통 이용’을 주장했지만, 보수단체의 힘을 키우고 ‘열대의 트럼프’라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체제를 불러왔을 뿐이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사회운동의 요구와 개혁이 줄줄이 무산됐다. 황색운동과 아랍의 봄 역시 유사하다. 황색운동이 일자 중국 정부는 강력한 국가보안법을 도입해 민주 인사들을 체포했고 젊은이들은 망명했다.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에는 독재 정권이 들어섰고 아프리카에서 인간개발지수가 가장 높았던 리비아에는 노예무역이 부활했다. 저자는 이 원인을 수평주의에서 찾았다. “모두 지도자가 되거나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 운동”이라는 수평주의의 이상은 현실에서 지도력의 부재로 나타났다. 정부와 협상할 대표가 없고 앞에 나서려고 하면 권력욕 있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를 극복해야 시위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제언이다. 위계 있는 조직과 효과적인 대표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난 6월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촛불혁명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성공 사례”이지만 12·3 계엄을 겪으며 “좁은 의미에서의 성공”이라고 풀이했다. 지난 3년에 대해서는 ‘불평등, 엘리트 중심 권력, 부패를 극복해야 할 진보 정권이 지정학적 현실과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리비아 ‘대재앙 홍수’ 하늘서 보니…사망자 5300명, 실종자 1만명 넘어[포착]

    리비아 ‘대재앙 홍수’ 하늘서 보니…사망자 5300명, 실종자 1만명 넘어[포착]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 국가인 리비아에서 발생한 대홍수로 5000명 이상이 숨지고 1만 명 이상이 실종됐다. AP통신 등 외신의 12일(이하 현지시간)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일 리비아 동부를 강타한 폭풍우 ‘다니엘’의 영향으로 동북부 항구도시 데르나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데르나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고, 이로 인해 외곽에 있는 댐 2곳이 무너지면서 대홍수로 이어졌다. 댐에서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물이 데르나를 덮치면서 순식간에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1만 명이 넘는 실종자가 발생했다.국제 적십자사와 적신월사연맹(IFRC)에 따르면, 이재민도 4만 명이 넘는 상황이다. SNS에는 흙탕물이 집어삼킨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비명을 지르며 구조를 요청하는 주민들의 모습 등 아비규환의 현장을 담은 영상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홍수로 인해 강처럼 변해버린 거리에는 차들이 맥없이 둥둥 떠내려가기도 했다. 민간위성업체 플래닛랩스가 공개한 위성 사진은 대재앙에 가까운 홍수로 뒤덮인 피해 지역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댐이 무너지기 전에 촬영된 위성 사진에서는 물을 거의 볼 수 없는 건조한 마을의 모습이지만, 홍수가 발생한 뒤 12일에 촬영된 사진에서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물이 대량으로 흘러들어와 마을을 뒤덮은 모습을 볼 수 있다.리비아 당국은 “데르나 지역 전체가 물에 휩쓸렸으며, 많은 시신이 바다로 떠내려갔다”면서 “건물 잔해에 깔린 시신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어 “현재 시신 수백구가 공동묘지에 쌓여있지만 이들의 신원을 파악해 줄 생존자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리비아 동부 보건부는 이날 기준으로 시신 1500구 이상이 수습됐으며 이 가운데 절반이 매장됐다고 밝혔다. 국제적십자사연맹에서는 피해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왔다. 연맹의 타메르 라마단은 “최소 1만 명이 여전히 실종 상태”라며 “피해 규모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댐 붕괴는 자연재해 아닌 ‘인재’ 비난 나와 전문가들은 대홍수 참사를 부른 댐 붕괴가 예견된 재앙이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현지 전문가들은 이전부터 데르나 지역 댐이 무너질 수 있어 이에 대한 보수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경고했다”면서 “지난해 학술지에 발표된 보고서에는 ‘큰 홍수가 발생하면 댐 2개 중 하나가 붕괴해 데르나 주민들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이어 “오랜 내분과 부패, 외세 간섭으로 몸살을 앓는 리비아에서는 도로나 공공 서비스에 대한 투자가 줄었고 민간 건물에 대한 규제 또한 거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리비아는 지난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여파로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동부를 장악한 리비아 국민군과 서부의 통합정부가 대립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 사우디의 튀르키예 무인기 도입, 다른 무기 도입으로 이어지나 [최현호의 무기인사이드]

    사우디의 튀르키예 무인기 도입, 다른 무기 도입으로 이어지나 [최현호의 무기인사이드]

    지난 17일(현지 시각),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약 200명에 이르는 기업인들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 방문했다. 이번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은 지난해 6월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가 튀르키예를 공식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 형식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튀르키예 방산업체 바이카르와 사우디 국방부의 아큰지(Akinci) 중고도 장기체공 무인기 계약 체결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두 나라의 관계가 다시 급속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튀르키예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갈등은 2018년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쇼기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것이 시발점으로 알고 있지만, 출발점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사우디 등 일부 국가들이 위협으로 간주하던 무슬림 형제단을 튀르키예가 지원하면서부터다. 거기에 더해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이란과 우호적이던 카타르와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당시 튀르키예는 카타르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밀접한 관계였다. 리비아 내전에서도 튀르키예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가 지원하는 군벌 리비아국민군(LNA)와 대적하던 서부지역을 차지한 리비아통합정부(GNA)를 지지하고 있었다.두 나라는 십여 년 넘게 충돌했지만, 최근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사우디의 튀르키예제 무인기 도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3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에서 자국산 무장 무인기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밝힌 뒤, 튀르키예의 베스텔(현 렌타텍)이 생산하는 카라옐(Karayel)-SU를 사우디의 두 회사가 면허 생산하기로 했다. 사우디는 무인기 외에도 튀르키예가 생산하는 지상군 장비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우디는 2013년 알타이 전차 개발 초기에 이 전차에 관심을 보였었다. 최근 튀르키예가 우리나라 업체가 개발한 엔진과 변속기를 적용한 알타이 전차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수출 시장을 두드릴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튀르키예 업체들이 자체 개발한 다양한 방위산업 제품들이 사우디 시장에 진출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튀르키예는 무기 수출도 있지만, 걸프 지역 국가들의 도움으로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우디는 올해 3월 튀르키예 중앙은행에 50억 달러를 예치한 것은 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튀르키예의 중동 걸프 국가들과의 화해는 이들 지역에 대한 무기 수출로 이어질 것이며, 우리나라와 방위산업 수출 경쟁이 치열해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 ‘푸틴 치명상’ 프리고진 반란, 北 김정은도 뜨끔? “악몽”

    ‘푸틴 치명상’ 프리고진 반란, 北 김정은도 뜨끔? “악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3년 철권통치를 위협한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도 악몽같은 소식이었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제를 다뤄온 60여년 경력의 미국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6일(현지시간) 정치전문매체 더힐에 기고한 ‘러시아 반란이 어떻게 북한 전복 영감을 줄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관련 분석을 전했다. 커크는 김 위원장의 은밀한 적, 즉 북한 지배 엘리트 계급 일부가 프리고진의 전략을 들여올 때가 됐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점이 김 위원장의 가장 큰 두려움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지배 엘리트 계급이 푸틴 대통령 통치력에 치명상을 입힌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에서 영감을 얻지는 않을까 김 위원장이 두려워한다는 분석이다. 커크는 특히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반란 관련 보도에 주목했다.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이 ‘36시간 천하’로 끝난 지난달 25일 북한 임천일 외무성 부상은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를 만나 러시아 지도부를 강력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관련 소식을 전하며 바그너 그룹이나 프리고진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고, 반란의 본질도 설명하지 않았다. 커크는 북한의 공식 논평의 모든 목적이 푸틴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확립된 통치 체제에 대항하는 모든 위협에 대한 영원히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에게 푸틴 대통령은 그만큼 ‘소중한 동맹’이라고 커크는 강조했다. 실제로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은 북러 관계의 폭을 급속히 넓혀 왔고, 북한은 이를 통해 러시아에 무기를 판매하고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이익을 봤다고 커크는 진단했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 군사반란으로 몰락하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 “재앙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이 새로운 러시아 통치자와 양국 관계를 기존처럼 복원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석유와 식량 등 정권 유지에 필요한 러시아의 지원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커크의 설명이다. 커크는 또 “반란 세력이 중요한 우방이자 이웃국가의 중앙통치시스템을 거의 전복할 뻔 했다는 소식이 북한에 흘러드는 일은 (김 위원장 입장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것”이라며 김 위원장이 프리고진의 반란 실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커크는 북한이 옛 소련의 몰락, 동유럽 등 옛 소련 위성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지도자 및 통치자들의 몰락을 초래한 혁명과 격변은 물론 10여년 전 아랍의 봄 당시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봉기에 대해 주민들에게 숨겨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것은 김씨 왕조에 있어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정치적 대격변”이라고 강조했다. 커크는 “바그너 그룹은 물러났지만, 반란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다른 단체가 일으킬 수도 있다”며 “김정은 정권은 그 위험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커크는 “김정은과 그의 왕조에 최악의 두려움은 저항 세력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결심하는 것”이라며 이 경우 저항 세력은 바그너 그룹의 사례에서 일종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 [윤경희의 동네 서점에 숨다] 천막과 다락 아래, 책방 한탸/문학평론가

    [윤경희의 동네 서점에 숨다] 천막과 다락 아래, 책방 한탸/문학평론가

    오늘날 미술의 범주 안에서 텍스트와 출판물 제작을 실험하는 미술인이 늘어나면서 책의 관념과 형태가 확장되고 글의 내용과 형식 또한 더 흥미롭고 다채로워지고 있다. 이들은 기성 출판계와 유통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독립 출판사, 독립 서점, 독립 출판물 행사를 통해 작업을 전시하고 감상자 집단과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소규모일지라도 훨씬 자율적인 도서와 담론의 생태계가 조성된다. 올해 부산 비엔날레에서도 미술인의 출판물 작업과 마주쳤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전시실을 돌아다니다 뾰족한 지붕의 둥근 천막에 이르렀다. 무니라 알솔이라는 레바논 여성 작가의 설치작이었다. 전시실은 다소 차가운 분위기에 어슴푸레했는데, 천막에서는 오렌지 빛깔의 얇은 천을 투과해 따스한 조명과 노랫소리가 새어나오니 들어가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천막 곳곳에는 손가락이 드나들 만한 작은 구멍이 뚫렸고, 구멍 가장자리마다 색실로 감치거나 작은 헝겊을 덧댔다. 작가는 내전 시기에 태어나 자랐는데, 어릴 때 아마도 전쟁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촛불 아래 잠옷에 구멍을 냈다가 꿰매는 행동을 반복했다 하고, 천막의 구멍은 그것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천막 안에는 낮은 탁자와 밀짚 방석이 있었고, 탁자에는 간단한 그림과 글 쪼가리들이 플라스틱 파일의 비닐 속지에 묶여 있었다. 기성 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어설펐다. 실망감은 탁자에 같이 놓인 한국어 번역본을 읽으며 풀렸다. 그림과 글을 수합한 종이철은 작가가 만든 비정기 간행물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작가는 2008년 봄 동료들과의 포럼에서 고무돼 동시대 현안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잡지를 창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베이루트에서는 정치적 제약 때문에 잡지를 배포하는 행위가 불가능했다. 잡지를 원하는 사람은 작가와 장소와 시간을 정해 일대일로 만나 실시간으로 읽어야만 했다. 무니라 알솔의 잡지 최신호는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튀니지 등 다양한 아랍 국가의 여성에게서 아랍의 봄 이후 팬데믹을 전후해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정치적 경험을 해 왔는지 청해 듣는 인터뷰로 채워졌다. 비엔날레의 천막은 아늑한 은신과 보호의 장소로, 작가와 독자가 위험한 출판물을 매개로 함께 수행하는 약속, 독서, 대화, 공연의 의의를 보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처럼 깨우치고 넓히는 텍스트라니. 책자 첫머리에서 번역자 소개를 보는 순간 반가움이 몰아쳤다. 부산 망미동 책방 한탸의 김석화 대표님을 포함한 페미니스트 일곱 명. 다음날 개점 시간이 되자마자 짙은 청록색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세상과 부딪치는 말하기와 책 읽기를 겁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천막만큼이나 아늑한 다락 아래의 서점. 한탸에서 간직할 기념품으로 나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창실 옮김ㆍ문학동네)을 골랐다. 번역자 후기에서 사미즈다트라는 러시아어를 배웠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비밀리의 자가 출판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 러 전쟁 엎친 데 리비아 정쟁 덮쳐… 유가 3주만에 최고

    러 전쟁 엎친 데 리비아 정쟁 덮쳐… 유가 3주만에 최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아프리카에서 원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리비아의 정정 불안으로 원유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국제 유가가 약 3주 만에 최고가를 기록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유가를 끌어올려 각국의 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8일 블룸버그·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브렌트유는 이날 선물시장에서 한때 배럴당 113.80달러에서 거래되며 지난달 30일 이후 최고가를 기록했다.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도 장 초반 108달러까지 올랐다. 북아프리카발 악재가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리비아 국가석유공사(NOC)는 17일 성명을 내고 하루 6만 5000배럴을 생산할 수 있는 알필 유전 지역에 시위대가 난입해 원유 생산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시위대는 압둘 하미드 드베이바 총리의 퇴진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 동부의 석유수출항인 즈위티나에서도 드베이바 퇴진 시위대가 원유 선적을 막고 있어 원유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리비아의 현재 원유 생산량은 일평균 100만 배럴로, 이미 지난해 평균 120만 배럴보다 17%가량 감소했다. 지난달 초에는 하루 생산량이 92만 배럴로 100만 배럴을 밑돌기도 했다. 외신들은 리비아의 새 총리 선출 문제에서 비롯된 정국 혼란에서 원인을 찾는다. 리비아는 2011년 아랍의 봄 혁명 이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무장세력이 난립해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 리비아 의회는 지난 2월 파티 바샤가 전 내무장관을 새 임시 총리로 지명했지만 드베이바는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있다. 러시아 원유 수입 금지 조치가 유럽연합(EU)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소식도 유가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EU는 지난 11일 27개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를 통해 차기 대러 제재에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를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이 지난달 9일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금지하고 영국이 연내 단계적인 원유 수입 중단을 발표한 데 이어 유럽도 에너지 제재 동참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이다. 미국과 일본 등 원유 수입국은 인플레 압력을 낮추기 위해 산유국에 원유 생산량을 대폭 늘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는 이런 요구를 거절하고 소폭 증산에만 합의했다.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정책으로 유가 수요가 줄더라도 원유 공급 부족에 대한 불안이 커 유가 상승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에 무게가 실린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50년 동안 팔레스타인 과격파 이끈 아메드 지브릴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50년 동안 팔레스타인 과격파 이끈 아메드 지브릴

    1970년대와 1980년대 이스라엘을 겨냥해 공중납치, 폭탄 테러 등을 기획하고 지휘한 팔레스타인 과격 지도자 아메드 지브릴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8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총사령부(GC)는 지브릴이 몇달 동안 숙환으로 고생하다 다마스쿠스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7일(현지시간) 밝혔다. 사망 일시나 원인 등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다른 팔레스타인 분파를 이끄는 칼레드 압둘메지드는 고인이 생전에 심장이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아버지와 시리아 어머니 사이에서 1938년 영국이 통치하던 자파에서 태어난 그는 시리아로 이주해 시리아 육군 장교로 임관하고 국적도 취득했다. 1950년대 말 PFLP를 창설햇는데 이념 분쟁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1968년 그는 친시리아 성향의 PFLP-GC를 세운 뒤 짧은 기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결합했다가 1974년 야세르 아라파트와 첨예한 갈등을 빚은 끝에 결별했다. 지브릴은 미국이 중재한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에 격렬히 반대했다. PLO에 견줘 정치적 영향력이 덜한 만큼 과격한 테러에 매달렸다. 1968년 엘 알 제트기 공중납치, 이듬해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서의 기관총 난사, 그리고 1970년 취리히를 출발해 텔아비브로 향하던 스위스항공 여객기 안에 시한폭탄을 장치해 4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그룹은 또 레바논 기지들에서 이스라엘을 겨냥한 공격을 감행했다. 1982년 레바논 침공 때 이스라엘 병사 셋을 억류한 뒤 3년 뒤 1100여명의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죄수들을 맞교환한 일로 눈길을 끌었다. 1987년에는 그의 부하 둘이 행글라이더를 이용해 레바논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에 들어가 6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살해하는 색다른 테러 공격을 펼쳤다. 이 공격은 인티파다(봉기)를 연 첫 도화선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물론 이 분파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로부터 테러 단체로 인식되고 있다. 고인의 아들 지하드는 2002년 베이루트에서 살해됐고, 이 그룹은 이스라엘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지하드는 PFLP-GC 군사조직을 지휘하고 있었다.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그의 분파는 바샤르 아사드 정부군을 지원해 다마스쿠스 야르묵 캠프에 있던 반군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유족으로는 네 딸과 세 아들을 남겼다.
  • 요르단 ‘왕자의 난’ 이틀 만에 봉합, 사우디 어떤 역할 했길래

    요르단 ‘왕자의 난’ 이틀 만에 봉합, 사우디 어떤 역할 했길래

    중동에서 가장 안정적인 나라로 손꼽히는 요르단의 정정 불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웃 나라들과 멀리 미국의 막후 중재가 성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의 이복동생 함자 왕자가 지난 3일(이하 현지시간)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는데 이틀 만에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봉합되고 있다.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일단 요르단 왕실의 내홍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곧이 들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압둘라 2세 국왕은 7일 성명을 내 “함자 왕자는 내 보호 아래 있으며 이번 사태로 상당한 충격을 받고 가슴이 아팠지만 이제 왕국은 안정되고 안전하다”고 밝혔다. 왕실이 5일 공개한 함자 왕자의 서한에는 “나에 대한 처분을 국왕 폐하에게 맡긴다”며 “난 사랑하는 요르단 헌법에 계속해서 헌신하고 국왕 폐하와 그의 (아들인) 왕세자를 돕겠다”고 했다. 함자 왕자의 변호인도 그가 충성 서약서를 썼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영국 BBC에 동영상 두 편을 보내 “합참의장이 찾아와 집 밖에 나가지 말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말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한 지 이틀 만이다. 요르단 정부는 “함자 왕자가 외세와 결탁해 국가 안정을 저해하는 행동을 했다”며 그의 측근 15명을 체포하고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접촉하지 않았느냐는 의심도 제기됐고, 국왕이 공개 비판한 부족들의 회의에 참석한 것이 빌미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1999년 압둘라 2세 즉위 이후 두드러진 권력 다툼이 없었던 왕실에서 불협화음이 노출되자 왕실 어른들이 서둘러 중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압둘라 2세의 삼촌인 하산 왕자의 중재가 결정적이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1952년 즉위한 선왕(先王) 후세인 1세는 1965년 동생 하산 왕자를 왕세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후세인 1세가 1999년 암으로 별세하기 3주 전 하산 왕세제의 왕위 승계권을 빼앗아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하산 왕자는 34년간 기다린 왕위를 눈앞에서 빼앗겼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형의 뜻을 따랐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하산 왕자가 조카들인 압둘라 2세와 함자 왕자의 갈등 조율에 나서자 모두 수긍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왕은 네 부인과 결혼해 11명의 자녀를 뒀다. 두 번째 부인인 영국인 무나 왕비와의 사이에 큰 아들이 압둘라 2세다. 이번에 문제가 된 함자 왕세제는 네 번째 미국인 부인인 누르 왕비와의 사이에 낳은 큰아들이다. 이복형은 2004년 이복동생 함자의 왕세제 지위를 박탈했다. 왕실이 공개적으로 천명하지 않았지만 압둘라 2세 국왕이 함자 왕자를 처벌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왕실이 이날 성명을 통해 “함자 왕자는 요르단과 아랍 세계에 기여가 높은 인물로서 기후변화 대응 이슈에 대해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힌 것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왕실 내부의 조율도 있었지만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우방이 일제히 압둘라 2세 지지를 선언한 것도 함자 왕자 운신의 폭을 좁힌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요르단 왕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고 미국과 동맹의 한 축으로서 중동지역의 갈등을 중재하거나 봉합해 온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3일 체포된 인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요르단 왕실법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제의 경제자문인 바심 아와달라이다. 두 나라 복수 국적자이며 사우디의 고위급 인사가 망라된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포럼’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일간 워싱턴 포스트는 사우디 외무장관이 이끈 사절단이 암만까지 달려와 아와달라를 데리고 리야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요르단을 아예 떠나지 않겠다고 압박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사우디 관리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와달라는 사실 국제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빈 살만 왕세제와 막역할 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리트(UAE)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무함마드 빈 자예드 왕세제와도 가깝다. 그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주변의 팔레스타인 토지를 UAE가 사들이는 데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나라 국경은 척박한 사막으로 싸여 있지만 이들은 유목 부족일 때부터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국경 근처 베두인 부족들은 수시로 사우디 영토를 넘나들었다. 아랍의 봄 봉기가 일어났을 때도 수니파의 두 맹주국은 서로를 챙기며 버텨냈다. 이스라엘이 요르단의 정정 불안을 바란다고 보기도 쉽지 않다. 1994년 중동 평화협정도 요르단 왕실의 중재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웃 나라들이 모두 꺼림칙해 하던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요르단은 천연자원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경제 토대에 충격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덮쳐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 지지율도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하셰미테 왕실이 무너지면 지역 전체가 격랑에 휘말릴 여지가 있다. 어쩌면 알카에다와 이슬람 국가(IS)는 그토록 바라던 일이 벌어질까 잔뜩 기대했다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지 모른다고 BBC는 지적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캐머런, 메이, 존슨… 4년 반의 브렉시트 협상 이끈 영국 총리들

    캐머런, 메이, 존슨… 4년 반의 브렉시트 협상 이끈 영국 총리들

    찬성 52% 대 반대 48%로 지난 2016년 6월 영국 국민투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선택했다. 그리고 4년 6개월 만인 2021년 1월 1일 영국은 정말로 47년 동안의 동거를 끝내고 EU와 결별한다. 브렉시트 관련 협상 지휘대를 잡아야 했던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등 3명의 총리의 행보를 되짚으며 브렉시트 협상의 결정적 장면을 돌아봤다.●국민투표 붙였으나 ‘찬성’ 나오자 사퇴한 캐머런2010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된 캐머런 전 총리는 브렉시트 투표를 강행한 장본인이지만,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국민투표 찬성 결정이 나오자 이에 책임을 지고 2016년 7월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캐머런 전 총리의 의중은 ‘브렉시트 반대 48%’에 서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대체 캐머런 전 총리는 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감행했을까. EU라는 커다란 경제권에 소속되어 얻는 수혜를 포기하는 결정을 국민들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73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지만 여전히 유로화는 수용하지 않고 파운드화를 유지하던 영국에선 사실상 독일이 주도하는 EU에 대한 반감이 있었지만, 막상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EU 경제권이어서 영국이 얻는 이득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2010년대 중반부터 서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이슬람 난민을 비롯한 이민자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감이 커지자, 이를 타개할 장치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것이다. 투표 전만 해도 EU 탈퇴, 즉 브렉시트라는 결과가 나올 것이란 예측은 적었다. 그러나 캐머런 전 총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영국 사회의 세대·지역·계층 간 불화가 투표에 투영되면서 브렉시트 찬성 결정이 나왔다.●‘소프트 브렉시트’ 추구하다 의회 외면당한 메이‘브렉시트 찬성 국민투표’라는 판정패를 당한 캐머런 내각이 사퇴한 뒤 테리사 메이 전 총리가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마거릿 대처 이후 26년 만에 나온 여성 총리다. 메이 전 총리의 임무는 어떻게 브렉시트를 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메이 총리는 2017년 3월 29일 EU의 헌법격인 리스본 조약의 50조를 발동했다. EU 탈퇴에 관한 규정인 50조의 1항은 ‘모든 회원국은 자국의 헌법규정에 의거해 EU 탈퇴 결정이 가능하다’고, 3항은 ‘탈퇴협정 발표일 혹운 탈퇴 통보 뒤 2년 경과시점부터 리스본 조약 효력이 중단된다. 단, 회원국 만장일치 시 2년 연장이 가능하다’고 규정되어 있다. 리스본 조약 50조 발동으로 영국과 EU의 ‘이혼’은 합의됐다. 그 다음 협상은 ‘이혼조건’을 결정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관세, 무역, 노동이동, 여행 비자 면제 등 맞춰야 할 조건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영국과 EU의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영국과 EU 회원국들의 동의가 필요한, 절차적으로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더욱이 메이 전 총리는 영국의 EU 내 잔류를 원했던, 즉 브렉시트 반대파들이 지지했던 ‘소프트 브렉시트’에 힘을 실었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처럼 EU 회원국은 아니지만 유럽경제구역의 일원으로서 EU 단일시장 접근 권한을 갖는 방식이 소프트 브렉시트이다. 결국 소프트 브렉시트 요소가 포함된 합의에 대한 영국 의회의 부결, 이후 영국과 EU의 협상 불발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브렉시트 실행은 늦춰졌다. 영국이 진짜 브렉시트를 원하기는 하는 것인지 EU 측의 비아냥도 나왔다. 그래도 ‘노 딜(합의 없는) 브렉시트’를 피하기 위해 메이 전 총리는 연거푸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하며 협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이 약화된 메이 전 총리는 사퇴했다.●원조 브렉시트 찬성파 존슨… 다음 과제는 ‘브렉시트에서 살아남기’메이 전 총리에 이어 지난해 7월 24일 취임해 브렉시트 협상을 이끌게 된 보리스 존슨 총리는 외무장관 시절부터 브렉시트 찬성파로 2016년 국민투표 당시 EU 탈퇴 진영을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존슨 총리는 2019년 10월 말 브렉시트 단행 의지를 고수했고, 결국 북아일랜드를 실질적으로 EU 관세 및 단일시장 체계에 남겨두는 양보를 하며 브렉시트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10월 말로 설정됐던 브렉시트는 올해 1월 31일로 연기됐다. 이 합의안 역시 하원에서 부결되자, 존슨 총리는 조기 총선 카드를 빼들어 의회 구성을 보수당 과반으로 바꾼 뒤 법적 절차를 마무리짓고 지난 1월 31일 오후 11시를 기해 브렉시트를 단행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포스트 브렉시트 협상’이 남았다. EU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무규칙 상태’를 대체할 새로운 규칙이 필요했다. 이번에도 브렉시트 실시일을 2021년 1월 1일로 미리 확정해두고 그 때까지 양 측의 조건을 맞춰가는 협상이었다. 협상은 여러 차례 시한을 넘긴 끝에 24일 마무리됐다. 이번에도 마지막 쟁점이던 영국과 EU의 어업권 문제에서 존슨 총리가 통 큰 양보를 해 협상을 매듭 지었다. 이제 영국의 다음 과제는 ‘브렉시트 체제에서 살아남기’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 92세 일기로 운명

    30년 철권 통치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 92세 일기로 운명

    30년 동안 철권 통치를 휘두르다 2011년 군부 쿠데타로 쫓겨났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카이로에서 9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지난달 늦게 수술대에 올랐고 회복 중 손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됐는데 25일 아침(이하 현지시간) 군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알와탄 웹사이트가 가장 먼저 보도했다. 나중에 국영 매체들도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앞서 아들 알라는 아버지가 지난 11일 응급실에서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1928년에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 공군에 들어가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년도 안돼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이 암살되자 대통령에 올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재직 시 군부에 엄청난 돈이 지원됐지만 실업률, 빈곤, 부패는 늘어만 갔다. 2011년 1월 이웃 나라 튀니지 대통령이 민중 봉기에 실각하자 이집트 국민들도 봉기에 나섰고, 단 18일 만에 그는 물러났다. 그 뒤 1년여 만에 무슬림 정치인 모하메드 모르시가 이집트에서 처음 치러진 민주 선거로 대통령에 올랐다. 하지만 모르시 역시 1년도 안돼 또다시 군부에 의해 축출됐고, 지난해 감옥에서 사망했다. 고인은 아랍의 봄 때 900여명의 시위대원들을 살해하라고 보안군에 지시를 내렸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중에 무죄로 번복돼 2017년 3월에 석방됐다. 한편 북한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이집트에 전투기와 조종사를 지원했고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무바라크는 이를 계기로 북한과 각별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바라크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오일 머니 덕에 50년 왕좌 지킨 카부스 오만 국왕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오일 머니 덕에 50년 왕좌 지킨 카부스 오만 국왕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50년을 한결같이 이슬람 왕국 오만을 통치한 카부스 빈사이드 알사이드(80) 국왕(술탄)이 세상을 떠났다. 아랍권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술탄이었으며 슬하에 자녀가 없는데도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 오만 국영 매체들은 트위터 계정으로 그가 10일(이하 현지시간) 저녁에 승하했다고 다음날 새벽에 알렸다. “신이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는 멋진 표현도 눈에 띈다. 그는 재발한 결장암을 치료하고 건강 검진도 받을 겸 지난달 말 벨기에를 방문했다가 예정을 앞당겨 귀국한 일이 있다. 그의 병세가 위중해져 왕위 계승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지만 결국 정하지 않았다. 카부스 국왕은 1970년 영국의 도움을 받아 무혈 쿠데타로 부친을 퇴위시키고 즉위한 뒤 50년 가까이 통치했다. 마침 유전 개발이 시작돼 오일 머니 덕에 나라를 통치하는 데 힘들 일이 없었다. 오만의 술탄국 기본법 6조에 따르면 술탄이 공석이 된 지 사흘 안에 새로운 술탄을 뽑아야 하는데 왕실은 곧바로 하이삼 빈타리크 알사이드 문화부 장관을 새 국왕으로 뽑았다. 그는 11일 국영TV로 방영된 연설을 통해 모든 국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외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펴 전임 국왕의 길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카부스 전 국왕의 사촌이기도 하다. 당초 역시 같은 사촌지간인 아사드 빈타리크 알사이드 부총리, 시하브 빈타리크 알사이드 전 해군 사령관과 각축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곧바로 승계가 순탄하게 이뤄졌다.술탄국 기본법 6조에 따르면 왕실은 술탄이 공석이 된 지 사흘 안에 후임 술탄을 골라야 한다.왕족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국방평의회, 최고법원 원장, 국가자문위원회와 국가위원회가 모여 술탄이 후계자를 적어 넣어둔 봉투를 열어 지명된 이를 새 국왕으로 정하는데 1979년 카부스 전 국왕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던 봉투를 이날 열어봤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나라의 술탄은 거의 전지전능한 통치자다. 총리를 비롯해 육군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재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을 모두 겸했다. 460만 국민 가운데 해외에서 이주한 사람이 43%나 된다. 스물아홉 살에 선대 국왕 사이드 빈타이무르를 퇴위시켰는데 그의 부친은 은둔형에 극보수였다. 국민들이 라디오도 듣지 못하게 했고 선글라스도 끼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국민들의 결혼, 교육, 출국 등까지 모든 것을 결정했다. 그나마 카부스는 실권을 장악하자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를 출범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또 당시만 해도 포장된 도로가 10㎞ 밖에 되지 않았고 학교가 세 군데 밖에 없었던 나라를 발전시키겠다고 다짐했다.초기 몇년은 이웃 예멘의 마르크스주의 민주공화국 지원을 받는 남부 도파르 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영국 특수부대의 손을 빌렸다. 중립 외교 정책을 펴 2013년 미국과 이란의 핵합의 비밀 협상을 주선해 2년 뒤 협정 체결에로 이끈 것도 카부스 국왕이었다. 카리스마도 있었고 나라를 이끌 비전도 겸비했다. 해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절대군주여서 반대 목소리를 잔인하게 눌렀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수천명이 거리를 점거하고 임금 인상, 더 많은 일자리, 부패 척결을 요구하자 보안군을 동원하고 최루탄, 고무탄, 실탄을 발사해 2명이 죽고 수십명이 다치고 수백명이 기소됐다. 죄명은 불법 집회 개최와 국왕 모독이었다. 그나마 카부스 국왕은 부패죄를 씌워 오래 재임한 각료들을 제거하고 국가자문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공언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을 과시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런 모습은 생색 뿐이었다. 그의 정부는 비판적인 신문잡지를 폐간하고 책을 몰수하고 활동가들을 고문했다고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는 고발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위성사진으로 본 2010년대 세계 주요 사건

    위성사진으로 본 2010년대 세계 주요 사건

    올 연말은 2019년이 끝나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2010년대 10년이 마무리되는 연말이기도 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2010년대에 수많은 사건으로 세계 곳곳 모습이 바뀌어버렸다. 우주기술업체 MAXAR는 최근 이렇게 달라진 지구촌 강산의 모습을 위성 사진으로 공개했다. AP통신은 지난 26일(현지시간) 이를 종합해 201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돌아봤다.허리케인2010년대에 수많은 대형 허리케인이 발생했지만 2016년까지는 미국 본토에 상륙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7년엔 이런 미국의 운이 다했다. 2017년 하비, 이르마, 마리아 등 강력한 허리케인 3개가 미국 곳곳을 강타해 4주 동안 2650억 달러(약 307조 6650억원)의 피해를 입혔다. 하비는 68명을 사망하게 했으며, 1200억 달러(139조 3200억원) 재산 피해는 2005년 카트리나에 이은 두번째를 기록했다.기름유출2010년 4월 미국 멕시코만 인근 해역에서 영국 석유회사 브리티시페트롤륨(BP)을 위해 시추 작업을 하던 딥워터호라이즌의 굴착장비가 폭발해 1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원유 최소 1억 갤런(약 3억 7854만 리터)이 유출됐다. 유출된 기름은 멕시코만에 쏟아져 들어왔고 복구 노력으로 2016년엔 정상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하지만 연 평균 63마리였던 돌고래 죽음이 2011년엔 335마리가 죽었고 이후 5년 간 연평균 200마리가 죽었다.빙하 감소연구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지구 빙하는 3억 8600억톤이 녹아 사라졌다. 이로 인해 얼음이 물 약 924조 갤런(약 3497조 리터)으로 변했으며 이 양은 미국 땅 전체를 약 36㎝ 깊이로 덮을 수 있을 정도다.산불지난 10년 간 세계 곳곳에서 경악할 규모의 산불이 일어났다. 최근엔 브라질과 호주에서 국가, 대륙 규모의 숲을 불태운 산불이 일어나기도 했다. 201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파라다이스 교외에서 캠프파이어가 일으킨 산불은 이 지역 역사상 최악이었다. 85명이 숨지고 건물 1만 9000채가 파괴됐다.이슬람국가(IS)의 탄생과 몰락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 IS 는 2014년 시리아와 이라크의 혼란 상황에서 등장했다. 무장세력은 빠르게 도시를 장악하기 시작해 두 나라 땅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국가를 선포하고 세계에서 추종자를 모집했다. 하지만 미국 주도 국제 연합의 군사 작전으로 IS는 2019년 3월 이라크 국경지대의 마지막 근거지를 잃었다.아랍의 봄튀니지의 한 과일 판매업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극심한 가난에 빠뜨린 아랍 국가들의 사회 체계에 항의하고 2010년 12월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숨졌다. 이 죽음은 튀니지에 거대한 시위를 일으켰고, 물결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예멘으로 퍼졌다. 기본권, 독재자 퇴출, 빈곤과 실업 해결이 이들의 요구였다. 이들은 구심점이 없었지만 이집트 호스니 무바라크, 튀니지 벤 알리 등 독재자들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리비아, 수단, 예멘 등에서 일어난 국가 분열은 결국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집트에선 군부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민주화 시위를 진압했다. 시리아에선 독재정부가 러시아 등 외세를 등에 업고 수년 간 국민 수십만명을 참혹하게 학살했다.동일본 대지진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지진과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을 비롯한 동일본 전역을 강타했다. 사망과 실종이 2만여명, 이재민 16만명이 발생하고 이 중 4만명은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이란 시위 유혈 진압에 팔레비 왕조 전철 밟나… 야당 “최고 지도자, 쫓겨난 팔레비 국왕 같아”

    이란 시위 유혈 진압에 팔레비 왕조 전철 밟나… 야당 “최고 지도자, 쫓겨난 팔레비 국왕 같아”

    인권단체 “유혈진압에 최소 161명 사망”야당 지도자 무사비, 가택연금 중 성명“살인자는 절대권력 가진 최고 지도자”이란에서 장기 가택연금 중인 야당 지도자가 최근 시위 유혈 진압과 관련해 최고 지도자인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를 쫓겨난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에 비유했다. 유가 기습 인상과 관련해 전국에서 발생한 시위를 이란 당국이 강경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보름 새 최소 161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당 지도자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77)는 웹사이트 칼레메를 통해 “조국의 상황에 국민이 좌절감을 표출하고 있다. 1978년 9월 국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과 똑같다”는 성명을 냈다고 AP·로이터통신 등이 1일 보도했다. 그는 또 “1978년 살인자는 비종교적 정권 대표들이었지만 2019년 11월 살인자는 종교적 정부의 대표들”이라며 “당시 최고지휘관은 국왕이었고, 지금 여기는 절대 권력을 가진 최고지도자”라고 직격탄을 날렸다.이에 대해 이란 정부나 국영 미디어에서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무사비는 수년 동안 미디어 노출이 가로막혀 있다. 무사비는 최근 소요 사태를 1978년 9월 수도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서 이란 군인이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대규모 사상자를 냈던 ‘검은 금요일’에 비유했다. 당시 유혈 진압으로 최소 89명에서 최대 4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분노한 이란 국민이 이듬해 1월 들고 일어나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 모함마드 레자 샤가 축출됐으며, 추방됐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귀국해 정부를 장악, 혁명에 성공하면서 이란은 신정 국가로 탈바꿈됐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합의 탈퇴 이후 미국의 제재로 경제난을 겪는 이란이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유가 50% 인상을 단행하자 지난달 15일부터 전국 100여개 도시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민생고 해결을 주장하던 시위는 곧바로 최고 지도부 퇴진을 요구하면서 정치적으로 변했다. 이에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는 시위를 “매우 위험한 음모”로 규정했다. 이란 당국은 이번 시위가 망명 중인 지도자 및 이란의 적인 미국과 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와 연계돼 있다고 비난했다.이란 당국은 체포되거나 부상 또는 사망한 시위자의 수치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유혈 진압 과정에서 최소 161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신한다. 이란 내무부는 그러나 사망자 수치가 과장됐다면서도 정확한 통계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란 의원들은 7000명 이상이 체포됐다고 주장한다. 무사비와 부인 자흐라 라흐나바르드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을 당하고 있다. 그의 테헤란 거처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공식 거처와 가깝다. 이란 총리를 지냈던 무사비는 2009년 대선에 나섰지만, 강경파 마무드 아흐마디네자드에 패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美전략비축유 6억 배럴, 텍사스·루이지애나 지하에 비축하는 이유

    美전략비축유 6억 배럴, 텍사스·루이지애나 지하에 비축하는 이유

    16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선물시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유전에 대한 드론 공격 여파로 국제 유가가 치솟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략비축유를 방출하도록 지시해 그나마 등폭을 낮췄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대놓고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주의 소금 땅굴에 무려 6억 4000만 배럴의 석유를 비축해놓고 있다고 자랑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모든 회원국들은 90일치의 원유 수입량을 비축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비축량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수준이다. 이란과 이라크, 쿠웨이트,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가 1973년 아랍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미국이 지원하자 미국에 원유 수출을 금지해 기름값이 치솟자 미국 정치인들은 전략적으로 원유를 비축하는 시설이 필요하다고 봤다. 욤 키푸르로 불리는 이 전쟁이 딱 3주만 지속돼 같은 해 10월 끝났지만 원유 수출 금지는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됐다. 세계적으로 배럴당 3달러 하던 국제유가는 네 배인 12달러 수준까지 올랐다. 이렇게 되자 미국 의회는 1975년 에너지 정책 및 보존법을 통과시켜 전략비축을 시작했다. 현재는 텍사스주 프리포트와 위니 근처, 루이지애나주 레이크 찰스와 배턴루지 외곽 등 네 군데 비축하고 있다. 모두 인공 소금 땅굴이며 지하 길이만 1㎞에 이른다. 이렇게 지하 저장을 고집하는 건 지상에 탱크를 만들어 보관하는 것보다 비용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고 안전하기도 해서다. 소금의 화학적 성분과 지층의 압력이 누출 위험을 줄여준다고 방송은 전했다.프리포트 근처 브라이언 마운드의 비축고가 가장 큰데 2억 5400만 배럴을 보관하고 있다. 이들 비축고의 총 비축량은 지난 13일 현재 6억 4480만배럴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미국에너지정보청(USEIA)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지난해 하루 평균 2050만 배럴의 석유를 소비하고 있어 브라이언 마운드 한곳의 비축량만으로 31일을 버틸 수 있다. 1975년 이 법안을 서명한 이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으로 오직 대통령만이 비축유의 방출을 승인할 수 있다. 물리적 이유 때문에 매일 조금씩 빼내지는 못하고 시장에 영향을 주려면 거의 2주 정도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비축유는 정유되지 않은 원유여서 자동차나 배, 비행기 연료로 쓰이려면 정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릭 페리 에너지부 장관은 이날 CNBC 방송 인터뷰를 통해 사우디 공격 때문에 비축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조금 섣부른”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자주 비축유를 방출했을까? 가장 최근의 사례는 2011년 아랍의 봄 봉기 때 IEA 회원국들에게 방출을 권했을 때 6000만 배럴을 방출한 것이었다. 1991년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 때 여러 차례 방출했고,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입은 뒤 1100만 배럴을 방출했다. 그러나 미국의 에너지 생산이 늘어나는 시기에 이토록 엄청난 양을 비축해야 하는 것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워싱턴 정가의 일부는 완전히 비축된 것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2014년 미국 정부회계감독청(GAO)은 소비자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는 비축량을 절반 정도로 줄여 연방 적자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빌 클린턴 정부 때인 1997년 2800만 배럴을 매각해 연방 적자를 해소하는 데 쓰기도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100원을 팔았을 때 32원 10년 동안 4000억원 유출
  • 30년 독재자 몰아낸 수단, 아직 갈 길 먼 ‘민주화 봄’

    30년 독재자 몰아낸 수단, 아직 갈 길 먼 ‘민주화 봄’

    군부 “2년 안에 문민정부에 권력이양” 시위대, 과도군정 시사에 “후퇴 없다” 군부 자녀도 시위 동참… 진압 어려워30년 독재자를 끌어내린 수단 민중의 뜨거운 민주화 열망에 군부마저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수단 군부가 오마르 알바시르 전 수단 대통령을 축출한 지 이틀이 지난 13일(현지시간) 압델 팟타 알부르한 과도군사위원회 위원장(육군 중장)은 대국민 TV연설을 통해 “2년 만에 문민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면서 야간 통행금지 해제, 체포된 반정부 시위 관련자 석방을 지시했다고 알자지라 등이 보도했다. 알부르한 위원장은 지난 12일 군부 지도자가 됐다. 일각에서는 군부가 시위대를 의식해 알부르한을 선택했다고 분석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알부르한은 알바시르 정부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베테랑 군인으로 시위대에 친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군부가 문민정부 수립을 공언하면서도 2년의 과도 군정을 고집하고 있는 만큼 갈등의 씨앗은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다. 시위대는 군부의 양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즉각적인 문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이날에도 시민 수천명이 수도 하르툼의 국방부 청사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주도한 단체 수단전문직업협회(SPA)는 국방부 청사에서 7일간 연좌시위를 하기로 했다. 수단교수협회는 “권력을 문민정부에 이양해야 한다는 국민의 합법적 요구가 이뤄지도록 후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알부르한 위원장의 연설은 민주화 세력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시민들은 알바시르 정권을 재창조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알자지라도 “알바시르 정권에 충성한 세력이 군부에 너무 많아 시위대는 군부가 권력을 쥐는 것을 경계한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2011년 아랍·북아프리카를 휩쓴 민주화 운동 ‘아랍의 봄’에 빗대기도 한다. 이와 관련, 미 시사지 애틀랜틱은 “아랍의 봄 참가자는 주로 젊은 활동가, 대학생 위주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사, 기술자 등 좀더 다양한 분야의 조직, 단체가 시위에 참여했다”며 수단 시위가 폭발력이 큰 이유를 설명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4개월간 수만명이 참여한 수단 반정부 시위에 대해 “중산층은 물론 군부 인사의 자녀까지 시위에 동참해 군부가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바레인 송환될까 떨었던 난민 축구선수 알아라이비 “이제 호주인”

    바레인 송환될까 떨었던 난민 축구선수 알아라이비 “이제 호주인”

    “이제야 100% 안전해졌음을 느낍니다. 이제 누구도 날 미행하지 못할 것이다.” 태국 방콕에서 억류돼 조국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했다가 각국의 반대 캠페인이 이어져 호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바레인 출신 난민 축구 선수 하킴 알아라이비가 호주 국적을 얻었다. 알아라이비는 12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멜버른에서 진행된 귀화인 환영 행사에 다른 200명의 귀화인들과 함께 참석해 새 국적을 취득한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2014년 바레인을 탈출해 호주에 신청한 정치적 망명 요청이 받아들여져 멜버른을 연고로 한 호주 프로축구 파스코 베일 FC 선수로 뛰고 있었다. 지난해 겨울 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가 발부한 영장에 의거해 태국 당국에 76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었다. 태국은 그를 바레인으로 송환하려 했다. 바레인 정부는 그가 2011년 아랍의 봄 봉기 때 경찰서 시설을 약탈했다는 이유로 인터폴에 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조국에 송환하면 고문을 받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며 버텼고 호주 축구 레전드 크레이그 포스터 등이 이끈 송환 반대 캠페인이 각국 누리꾼들의 호응을 얻어 태국 당국은 입장을 번복, 그를 호주로 돌려보내기에 이르렀다. 그가 멜버른 공항에 도착하자 수백명의 지지자가 몰려나와 환영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FIFA 태국 정부에 “바레인 탈출 알아라이비 송환하지 말라”

    FIFA 태국 정부에 “바레인 탈출 알아라이비 송환하지 말라”

    국제축구연맹(FIFA)이 태국 정부에게 구금 중인 바레인 축구 선수를 조국에 송환하지 말도록 의견을 전달했다고 영국 BBC가 24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문제의 축구 선수는 2014년 호주로 탈출해 3년 뒤 정치적 망명이 허용돼 난민 지위를 얻어 멜버른 연고의 파스코 베일에서 뛰고 있는 하킴 알아라이비(25)로 지난해 11월 27일 휴가를 즐기던 방콕 공항에서 바레인이 발부한 국제형사기구(인터폴) 영장이 집행돼 방콕 교도소에 지금까지 구금됐다. 파트마 사모우라 FIFA 사무총장은 프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바레인 선수가) 조국에 돌아가면 그릇된 대우를 받을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며 조속히 사태를 해결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FIFA는 적절한 국제적 기준에 따라 가능한 빠른 시간에 알아라이비가 호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태국 왕국이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으면 좋겠다고 촉구한다”며 FIFA, 프로축구선수협의회(FIFPRO) 대표단과 태국 정부의 고위 책임자들이 만나 협의를 갖자는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알아라이비는 바레인에서 경찰서를 습격한 혐의로 궐석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10년형을 언도받았지만 본인은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국에 송환되면 고문을 당하거나 살해될 수 있다며 자신은 “겁에 질려 있으며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알아라이비는 바레인 정부당국에 대표적인 반체제 인물이며 휴먼 라이츠 워치(HRW)는 형의 정치적 행동 때문에라도 바레인 당국의 타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그는 2012년 아랍의 봄 시위 이후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고 HRW에 밝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법정서 마주한 두 전직 대통령... 권력이 무상해

    법정서 마주한 두 전직 대통령... 권력이 무상해

    권력이 무상하다. ‘아랍의 봄’ 시위 당시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과 쿠데타로 실각한 무함마드 무르시 전 이집트 대통령이 각각 증인과 피고인으로 카이로의 법정에서 대면했다고 26일(현지시간) AP통신 등이 전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은 반(反)무바라크 시위 초기,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2만여명의 탈옥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약 30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이날 지팡이를 든 채 두 아들의 도움을 받아 90세의 노구를 이끌었다. 그는 증인 신분이었다. AP는 “무바라크 전 대통령은 때로 말이 더뎠지만, 몸이 건강했고 정신도 맑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3월 시위대 유혈 진압 등 주요 혐의에 무죄 판결을 받아 구금 6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무바라크는 2시간에 걸쳐 당시 정보기관장과 부통령으로부터 최소 800명의 무장세력이 무슬림형제단의 도움을 받아 가자지구 터널을 통해 시나이반도 북쪽으로 침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AP에 따르면 무르시 전 대통령은 무바라크 전 대통령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무르시 전 대통령은 2015년 탈옥과 스파이 혐의 등으로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항소법원이 이 판결을 기각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무르시는 아랍의 봄 시위 후 이집트 사상 첫 자유 경선으로 치러진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집권 1년 만인 2013년 7월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이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 감금됐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바레인 돌아가면 고문받을텐데 난민 축구선수 “송환 막아달라”

    바레인 돌아가면 고문받을텐데 난민 축구선수 “송환 막아달라”

    바레인 출신으로 호주에 망명해 멜버른 축구 클럽에 몸담고 있는 선수가 태국 당국에 의해 바레인으로 송환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호주는 물론 국제축구연맹(FIFA), 인권단체들이 일제히 송환만은 막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킴 알아라이비(25)는 지난달 27일 휴가를 보내던 태국을 떠나 호주로 돌아오려고 방콕 공항에 나타났다가 체포됐다. 그가 바레인의 한 경찰서를 파괴한 혐의로 궐석 재판 결과 10년형이 선고된 데 따라 국제경찰기구(인터폴)가 발부한 수배 영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바레인 축구대표이기도 했던 그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조국에 송환되면 고문을 받을 것이라며 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조국을 탈출해 4년 전 호주에 도착한 뒤 지난해 정치적 망명이 허용돼 멜버른 축구 클럽 파스코 베일에 몸담고 있었다. 그는 11일 방콕 법원 법정에 섰고 구금 기간은 60일까지 연장됐다. 태국 주재 바레인 대사관은 트위터에 알아라이비가 “안전 이슈 때문에“ 수배됐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주 트위터에 “고문을 받아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을 고백하게 될 것이란 점을 잘 안다”며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HRW)에 2012년 아랍의 봄 시위 때 이미 한 차례 고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또 형제 가운데 한 명이 정치적으로 왕성한 활동가여서 본인이 타깃이 됐다고 주장했다. 태국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호주는 그의 석방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리즈 페인 외무부 장관은 “그의 구금을 우려하고 있으며 즉각 호주로 귀국시킬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파스코 베일 클럽도 태국 총리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호주에서 공인받은 난민으로서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태국은 바레인과 범죄인 인도 협정을 맺지 않았지만 어떤 나라도 수배된 국민을 추방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다. 국제법으로는 박해나 고문, 부당한 처우를 받을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송환을 거부할 수 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태국은 2014년에 인터폴 영장에 근거해 21세 남성을 바레인에 추방한 적이 있다며 “바레인에 귀국한 그를 고문했다는 신뢰할 만한 보도가 여럿 있었다”고 설명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UAE, 아랍어 모르는 英대학원생에 간첩이라며 종신형 선고

    UAE, 아랍어 모르는 英대학원생에 간첩이라며 종신형 선고

    영국인 대학원생이 연구차 방문한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으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UAE 법원은 21일(현지시간) 매튜 헤지스(31)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고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헤지스는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중동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헤지스의 가족은 이날 그가 변호사도 대동하지 못한 채 재판에 출정했으며, 심리에 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부당함을 호소했다. 헤지스는 지난 5월 연구차 UAE를 방문한 후 두바이 공항에서 출국하려다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6개월간 독방에 수감됐다가 지난달 보석으로 석방됐지만 이날 판결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UAE 정부는 헤지스가 UAE 사람들에게 민감한 사안에 대해 질문하고 민감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 내용은 설명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하마드 알샴시 UAE 법무장관은 “헤지스는 해외국의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기소됐다”면서 “그가 UAE의 군대와 경제, 그리고 정치 안보를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지스가 연구를 위장해 자국에 들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헤지스의 부인은 그가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시민과 군대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이번에도 관련 인터뷰를 위해 UAE를 방문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헤지스가 UAE 왕정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정부 관계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을 해 본때를 보여려 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헤지스의 부인은 “그가 감금됐을 때 UAE 당국이 아랍어로 된 서류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는데, 알고보니 죄를 자백하는 내용이었다”면서 “헤지스는 아랍어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 헤지스의 더럼대 지도 교수인 존 윌리웜스도 BBC 인터뷰를 통해 “헤지스는 스파이가 아닌 무고한 학생이며 이번 재판은 어떤 적법성도 없다”면서 석방을 촉구했다. 영국 정부는 UAE의 판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깊은 충격과 실망을 받았다”며 “UAE가 이번 판결에 대해 재고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말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도 헤지스의 판결에 대해 “깊은 실망과 우려”를 나타내며 “UAE 최고위 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라고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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