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간첩누명
    2025-07-06
    검색기록 지우기
  • 형벌
    2025-07-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
  • 허위 밀고로 간첩누명 쓴 고 김두홍씨, 43년 만에 명예 회복

    허위 밀고로 간첩누명 쓴 고 김두홍씨, 43년 만에 명예 회복

    1980년 친척 초청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가 간첩 누명을 쓰고 평생을 억울하게 산 고(故) 김두홍씨가 43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제주지법 형사1부(부장판사 오창훈)는 14일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등 혐의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김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불법 구금과 고문 등 인권침해로 이어진 자백은 증거로서 능력이 없고, 허위 진술 강요는 재판부의 오판을 야기한다”며 “고문 등 불법 행위에 따른 피고인의 허위 자백 말고는 (피고인의) 공소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31년생인 김씨는 일본 오사카에 터를 잡은 큰집을 대신해 제주에서 제사와 벌초를 도맡았고, 이를 고맙게 여긴 큰집 초청으로 1980년 4월 일본 오사카를 방문해 체류했다. 그러나 평소 김씨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던 지인이 “김씨가 일본에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소속 친척을 만나 간첩행위를 했다”는 허위 밀고를 하는 바람에 김씨는 1982년 7월 20일 영장 없이 옛 제주경찰서에 강제 연행돼 17일 동안 불법 구금됐다. 경찰에 잡혀간 김 씨는 잠을 자지 못하는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허위 진술을 해야 했다. 결국 김 씨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져 항소심에서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김 씨는 2006년 정부로부터 6·25 참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간첩 누명은 끝끝내 벗지 못하고 2004년 3월 눈을 감았다. 앞서 진실화해위는 2023년 12월 김씨에 대한 불법 구금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판단하고 재심 권고 결정을 내렸으며 고인의 아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무죄 판결 후 김 씨의 아들 병현씨는 “부친이 간첩 누명 벗어 기쁘다. (부친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34년 만에 누명 벗은 ‘김제 가족간첩단’ 장남 숨진 채 발견

    34년 만에 재심을 통해 간첩누명을 벗은 고(故) 최을호씨의 장남이 실종된 지 이틀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2일 경찰에 따르면 11일 오후 3시쯤 전북 김제시 진봉면 고사마을 인근 새만금 간척지 갈대밭에서 실종 신고된 낙효(63·지적장애 3급)씨가 숨져 있는 것을 수색 중이던 경찰 헬기가 발견했다. 시신에 훼손 흔적은 없었다. 낙효씨는 지난 9일 낮 12시 22분쯤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고사마을 뒷산을 찾았다. 34년 만에 ‘김제 가족간첩단 사건’의 당사자인 아버지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판결문을 들고 찾아가 제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뉴스 플러스] ‘간첩누명’ 유우성 동생 국가에 소송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유우성씨의 동생 가려씨를 대리해 국가와 원세훈·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상대로 30일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민변은 북한 화교인 가려씨가 2012년 11월~2013년 4월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불법 구금된 상태로 가혹 행위 등을 당했다며 인권침해 재발 방지를 위해 소송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 대법 “간첩누명 쓴 납북어부 가족 배상은 신중해야”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조작으로 간첩 누명을 썼던 정영씨와 가족 등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8일 밝혔다. 정씨에게는 국가가 당연히 배상해야 하지만 정씨 가족에 대한 배상은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라는 취지다. 정씨는 1965년 서해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중 납북됐다 귀환했다. 당시 안기부는 정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문해 간첩으로 조작했고, 정씨는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6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이후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 조작을 밝혀냈고 정씨는 재심을 청구해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정씨는 2011년 7월 11일 형사보상 결정을 받았고 이듬해인 2012년 3월 22일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냈다. 재판부는 “국가의 위법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돼 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국가의 항변은 허용될 수 없다”고 전제했다. 이어 정씨에 대해서는 “재심 확정 때까지 권리(손배소 제기)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가 있었고, 권리행사 기간을 연장할 특수한 사정이 있다고 본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인과 동생, 자녀 4명 등 다른 원고 6명에 대한 판단은 다소 달랐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죄 확정일로부터 민법상 시효정지에 준하는 6개월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며 “원심은 원고들이 6개월 내에 소를 낼 수 없었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심리·판단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뉴스 플러스] 간첩누명 재일교포 30년만에 무죄

    서울대에서 유학을 하던 중 간첩 누명을 쓰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재일교포가 30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재일교포 박모(63)씨에 대한 재심 사건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5일 밝혔다. 일본에서 태어난 박씨는 서울대로 유학을 왔다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1982년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은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씨를 불법 연행한 뒤 23일 동안 구금했다. 보안사에서 잦은 구타와 전기 고문을 당한 박씨는 결국 간첩 활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듬해 박씨는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확정 판결받았다.
  • 부친이 준 100만엔 받았다 간첩누명… 30년만에 무죄

    세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정모(75)씨는 1983년 일본 도쿄에서 42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때 업무차 일본에 갔다가 귀국 시기를 놓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당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조총련 산하 신용조합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정씨에게 생활비에 보태라며 일본돈 100만엔과 한 돈짜리 금반지를 건넸다. 짧은 상봉을 마치고 귀국한 정씨는 1984년 잠입 및 간첩 혐의로 기소당했다.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본 방문 목적 등을 사전에 상세히 신고했던 정씨로서는 느닷없는 봉변이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반국가단체 구성원인 아버지한테서 통일사업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정씨가 공작금을 수수했다고 판단했다. 재판 도중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도 이내 유명을 달리했다. 정씨는 수사 과정에서 50일간 불법 감금됐고 대법원 선고를 통해 간첩 누명은 벗었지만, ‘부자지간의 정’으로 받은 생활비는 끝내 유죄로 판명 났다. 금품수수 부분이 유죄로 인정돼 1985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정씨는 29년 만인 지난해 나머지 금품수수 부분의 누명도 벗고자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윤성원)는 5일 정씨의 금품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정씨의 금품수수 행위가 국가의 존립,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는 행위라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정씨가 받은 액수가 공작금으로서는 적은 점을 고려하면 혈육의 정에 기초한 것으로 보기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간첩누명 옥사 유족에 19억여원 배상 판결

    간첩 누명을 쓴 채 수년간 옥고를 치른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국가가 위자료 19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광주지법 제4민사부(부장 정창호)는 ‘조총련 간첩’으로 조작돼 옥고 끝에 숨진 김모(1986년 사망)씨의 딸(56)과 부인, 손자 등 유족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위자료 19억 9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판결했다고 2일 밝혔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간첩누명 북파공작원 국가 28억배상” 판결

    남한이 북한에 파견한 공작원이었지만 오히려 인민혁명당(인혁당)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북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 고(故) 김상한씨 유족들에게 정부가 28억여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부장 황적화)는 27일 김씨의 부인과 자녀 등 7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는 김씨가 1963년 북한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유족들에게는 2008년이 돼서야 알렸다.”면서 “이는 국가가 국민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인 만큼 유족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국가는 김씨가 특수임무를 위해 북파됐고, 남파된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음에도 인혁당 사건 당시 김씨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허위로 발표했다.”고 덧붙였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간첩누명 ‘29년 족쇄 인생’

    “한국사회에서 간첩행위는 살인보다 무서운 범죄입니다. 29년 만에 누명을 벗었는데…오히려 담담합니다.” ●갖은 고문에 지금도 악몽 시달려 1980년 2월 간첩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각각 징역 15년형과 10년형을 선고받고 만기복역한 신귀영(74)씨와 당숙 신춘석(72)씨 등 일가 4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법원이 21일 무죄를 선고하자 두 사람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신귀영씨가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된 것은 1980년 2월25일. 선원생활을 접고 장사를 하려고 새집으로 이사한 지 이틀 만이었다. 그는 “집에서 쉬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간첩 활동을 했다는 허위 자백을 요구받았다.”고 말했다. 간첩 혐의를 부인하는 그에게는 물고문, 전기고문, 몽둥이질 등이 쏟아졌고 결국 그는 허위로 죄를 인정할 때까지 68일 동안 불법감금을 당해야만 했다. ●수영비행장 기밀 유출 혐의로 기소 신씨는 “15년 형기를 마치고 1995년 6월 출소했는데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생계를 위한 가게도 열지 못했고 막노동꾼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면서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모질게 고문했던 사람들이 법정에서 끊임없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고 화도 났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이 양심선언을 한 덕분에 법원이 판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사촌동생 남편 복역중 사망 신씨와 함께 붙잡혀 9년을 복역한 당숙 신춘석씨도 “80년대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던 사회적 분위기 탓에 법관들도 용기를 낼 수 없어 우리처럼 온 국민이 고통을 받았다.”면서 눈가를 훔쳤다. 이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죄를 믿고 사비까지 털어가면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80년 일본 교포에게서 돈을 받고 부산 수영비행장과 관련된 국가 기밀을 넘긴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과 함께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사촌 여동생의 남편 서성칠씨는 출소를 앞둔 1989년 옥사했다. 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신씨의 형도 고문 후유증으로 9년 전 숨을 거뒀다. 피해자들은 1994년과 1997년 두 차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하급심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유죄를 뒤집을 만한 새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 잇따라 기각됐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조사로 재심이 이뤄졌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마침내 벗은 간첩누명

    “이제 법정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도 좋습니다.” 법원이 19일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확정받았던 피고인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이중간첩’으로 사형된 이수근씨의 처조카 배경옥(70)씨는 39년 만에,‘조작 간첩’ 고(故) 이장형(사망 당시 74세)씨는 23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 박형남)는 배경옥씨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에 대해 “이수근씨가 이중간첩이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어 이씨를 도왔다는 배씨의 혐의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씨 외조카 김세준(61)씨도 이날 무죄를 받았다.다만 배씨가 이씨의 변장 사진을 다른 사람 명의의 여권에 붙인 것은 공문서 위조라고 판단,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였던 이수근씨는 1967년 3월 판문점으로 귀순했다.그러나 69년 1월 위조 여권으로 캄보디아로 떠나다 중정 수사관에게 체포됐고 ‘이중간첩’으로 몰렸다.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씨는 항소했지만,항소심 재판이 열리기도 전인 그해 7월 사형이 집행됐다.배씨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89년까지 20년간 복역했다.김세준씨(61)도 이씨 도망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확정받았다. 재판부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피고인을 불법 구금하고 고문했으며 검찰은 피고인이 진술을 번복할 때마다 중정 수사관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인권 유린을 묵인했다.”면서 “법원도 증거재판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해 인권의 마지막 지킴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 이광만)도 이날 고 이장형씨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다만 이씨가 기준 환율을 따르지 않고 엔화를 원화로 바꿔 외국환 관리법을 위반했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이씨는 조총련 간부인 숙부에게 간첩 지령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85년 9월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13년간 복역했다. 이씨를 대신해 피고인석에 앉은 부인 임윤근(74)씨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재판 소식을 물으며 기다렸는데….”라며 눈물을 쏟았다.98년 8·15 가석방으로 출소한 이씨는 고문 탓에 허위 자백했다며 2005년 8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그러나 2006년 12월27일 이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지난 5월20일 진실화해위가 재심을 권고했고 지난 10월17일에 첫 재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구속 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57일간 불법 구금됐고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 허위 진술했다.”면서 “간첩 혐의를 자백한 진술조서는 신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성된 것이라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최태환칼럼] 이근안, 밀양, 문근영

    [최태환칼럼] 이근안, 밀양, 문근영

    얼마전이다.신문 사회면에 나란히 실린 기사가 눈길을 잡았다.‘고문 기술자 이근안 목사됐다’,‘납북어부 24년만에 간첩 굴레 벗다’ 잠시 혼란스러웠다.고문,용공조작,신원,회개,하나님….아스팔트위의 뒤틀린 낙엽처럼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뒹군다.  이근안씨는 경찰 출신이다.대공수사 전문가였다.군사정권 시절 악명 높았다.물고문,전기고문은 기본이었다.숱한 민주인사가 그의 모진 잡도리에 무너졌다.무고한 시민이 간첩이 됐고,빨갱이가 됐다.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피해자였다.1985년,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필자는 당시 법원·검찰 출입기자였다.김근태 법정을 드나들었다.그는 어느날 상처 딱지 한움큼을 챙겨 나왔다.구치소에서 몰래 모았다고 했다.고문·가혹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고문 혐의의 이씨는 1999년 자수했다.수배 10여년 만이었다.그는 7년 복역생활 중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신앙인으로 거듭났다.이제 마음의 평화를 넘어,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납북어부 서창덕씨 사연은 가슴 아리다.그는 연평도 부근서 조기잡이를 하다 북한경비정에 피랍됐다.1967년이었다.124일만에 풀려났다.시련의 연속이었다.7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최근에야 간첩누명을 벗었다.24년 만의 무죄선고였다.그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린다.‘간첩’이 된 뒤 옥중 이혼당했다.몸은 망가졌고,가족은 해체됐다.지금까지 자식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이제 60대 초반의 그다.만감의 표정이었다.법정을 나서는 그의 애달픈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고문 피해자들은 이씨를 용서했을까.많은 사람들은 그의 목회자 변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인간적 잣대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살인자는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교도소에서 만난 하나님께 세상과의 화해를 간구하고 있다.하지만 아들을 잃은 주인공은 받아들이지 못한다.무너진 삶의 축을 견디지 못하며 방황한다.살인자는 교도소가 천국이고,피해자는 지금의 삶이 지옥인 현실.하나님이 만든 기막힌 상황에 피해자는 절망한다.하나님의 ‘밀양’(secret sunshine)은 누구에게 먼저 내리는 게 옳은 것일까.적어도 피해자를 통해 가해자에게 용서와 화해가 닿아야 한다는 인간적 절규가 가슴에 닿는다.  어떤 이들은 이근안씨 역시 ‘시대의 피해자’라고 안타까워한다.‘공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라고 주장한다.용서와 화해의 주문이다.인터넷에서 이씨를 향한 비난과 동정론이 각축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문·가혹행위는 지난 시절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것일까.국가권력이나 기관에 의한 폭력은 크게 줄었다.하지만 권력에 의한 폭력추방이 곧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또 다른 집단·개인으로부터의 유형·무형의 폭력이 유령처럼 우리사회를 떠돌고 있다.사이버에 의한 폭력도 그 하나다.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최근 배우 문근영의 기부행위가 빨치산 선전용으로 덧칠됐다.군사정권 시절을 회상케 하는 이념공세가 섬뜩하다.  인터넷을 통해 표출되는 내 안의 악마성 때문에 이웃이,타인이 인격살인을 당할 수 있다.고문이나 가혹행위에 의한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당신도 고문 기술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신문 사회면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최태환 논설실장 yunjae@seoul.co.kr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간첩누명 씌운 정부 책임져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간첩누명 씌운 정부 책임져야”

    “죄없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정신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4일 ‘송씨 일가 간첩사건’은 정보기관의 반인권적 간첩조작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자 피해자 송기복(74·여·서울 관악구 신림1동)씨는 “이제야 진실이 밝혀졌지만 지난 25년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 신광여중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82년 3월 아버지 송창섭씨에게 포섭당해 간첩활동을 했다며 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끌려가 4개월간 감금을 당한 채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당시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안기부 직원이 수업 시간에 들이닥쳐 ‘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끌고 갔다.”면서 “안기부에서 수사관이 손을 뒤로 묶은 뒤 욕을 하고 허리띠로 폭행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석방된 뒤에도 한동안 자다가 일어나 ‘나는 아니다.’라고 외치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치를 떨었다. 당시 안기부는 6·25때 충북도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후 남파된 그의 아버지 송창섭씨가 서울·충북을 거점으로 25년간 간첩 활동을 하며 기복씨와 그의 어머니 한경희씨, 동생 기수씨 등 자식까지 포섭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안기부 밀실에서 4개월간 불법 구금돼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주변 친구들도 ‘빨갱이’라며 등을 돌렸다. 공군 중령이었던 남편은 그 해 7월 강제 전역됐다. 남편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진실 규명을 위해 뛰어 다니다 2002년 진실 규명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편이 숨을 거두며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누구보다 건강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것이 유언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제야 간첩 누명은 벗었지만 고문과 거짓 재판으로 우리 가족에게 간첩혐의를 씌웠던 장본인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을 맺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씨줄날줄] 직파간첩/육철수 논설위원

    북한에서 보낸 무장간첩과 남한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들 때문에 자나깨나 두려움에 떨던 시절이 있었다.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는 한 해에 무장간첩이 무려 200∼300명씩 출몰해 국민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8년 1월21일, 북한군 124군 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공비 31명은 청와대 뒤뜰까지 침투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기자회견장에서 “박정희 목을 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온 나라를 경악케 했다. 시민 속에 파고든 고정간첩은 더 골칫거리였다. 이마에 ‘간첩’이라고 써붙인 것도 아니고, 얼굴이 ‘빨갛게’ 생긴 것도 아니어서 색출이 여간 쉽지 않았다. 고정간첩 중에는 대학교수, 군장성, 정부 및 검찰·경찰 고위간부 등 믿을 만한 사람까지 끼어있어 더욱 그랬다. 오죽했으면 반공표어 중에는 ‘우리 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나 ‘사랑하는 애인도 알고 보니 간첩!’이란 게 있었을까. 체제경쟁에다 군사대립이 첨예한 준전시 상황이다 보니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누명을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국방부에 따르면 분단 이후 지금까지 검거 또는 자수한 간첩은 45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살된 무장공비도 1300여명이나 된다. 남북한간 화해무드로 간첩사건이 뜸했던 1998년 이후 지금까지도 해마다 적게는 1∼2명, 많게는 8∼9명씩 모두 34명이 붙잡힌 걸 보면 북한은 ‘두 얼굴’을 가진 게 틀림없다. 한동안 까맣게 잊었던 간첩 검거 소식이 눈길을 끈다. 국정원은 그제 북한 노동당 35호실 소속 정경학(48)이라는 ‘직파간첩’(북한이 직접 남파한 간첩)이 미군시설과 우리의 원전시설을 촬영했다가 붙잡혔다고 했다. 정씨는 태국·필리핀·방글라데시를 국적세탁의 우회무대로 이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남북한간 경협이 활발하고 수해지원품까지 보내주는 마당에 실로 뒤통수를 치는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설물 사진쯤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텐데, 요즘 시대에 간첩을 굳이 현장에 접근시킨 점도 석연찮다. 쌀을 줘도, 비료를 줘도, 북한은 틈만 나면 간첩을 침투시키고 있으니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가슴속 그림 한 폭] 콜비츠 ‘시립 구호소’

    [가슴속 그림 한 폭] 콜비츠 ‘시립 구호소’

    영양실조로 굶어죽기 직전 포대기 속에 잠든 듯 누워 있는 어린 두 아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내려다 보는 어머니의 고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독일 표현주의 예술의 중심에 서 있는 판화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시립구호소’란 작품이 담고 있는 애처로운 장면이다. 소설가 김원일은 “굶주림과 가난에 대해, 실오라기처럼 남은 목숨의 애처로움을 두고 이처럼 적확하고 절실하게 표현한 그 어떤 그림도 본 적이 없었다.”고 ‘시립구호소’를 처음 본 순간을 돌이킨다. 그때가 1984년. 그의 네번째 소설집 ‘환멸을 찾아서’의 표지화로 콜비츠의 ‘프롤레타리아’ 시리즈 중 한 작품을 채택할 때 화집을 들추다 발견한 에칭 판화 한 점이 바로 ‘시립구호소’였다. 이미 그 이전부터 작가가 성장기에 겪었던 가난의 체험을 통해 못가진 자들의 설움과 분노를 작품에 담아왔던 그는 “많은 문장으로 짜깁기하여 엮어내는 소설보다 한 장의 그림이 주는 전달력이 훨씬 감동적임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이후 김원일은 독일을 여행하면서 콜비츠 화집을 구입했다.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책상 서가에 두고 글을 쓰다 지치면 그 화집을 들추며 콜비츠의 세계에 빠져들어 신음을 삼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는 것. 케테 콜비츠는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생활하며 일련의 사회성 강한 작품들을 생산했다. 직조공들의 폭동, 농민전쟁의 참상과 수난의 농민상, 아들이 희생당한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 노동가족의 빈곤문제, 빈곤과 질병 속에 방치된 이름없는 그들의 죽음 등을 에칭·목판화·석판화로 제작하여 20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판화가로 평가받았다. 김원일 작가에게 그림은 못 이룬 꿈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재주를 인정받았지만 극심한 가난 때문에 엄두도 못냈던 것. 그래서 틈나는 대로 전시나 화집을 들추며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하고, 간혹 그리기도 한다. 그의 작업실 한 쪽 벽에 걸린 그림도 그의 작품이다. 마치 그의 어려웠던 어린시절을 표현한 자화상인 양 퀭한 눈의 어두운 표정이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유신정권 시절 간첩누명을 쓰고 희생됐던 젊은이 9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푸른혼’에서 보듯 김원일은 여전히 사회의 음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붙들고 있다. 절대빈곤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천명에 이르고 굶주린 탈북자들이 중국을 떠도는 것에서 보듯,‘시립구호소’는 여전히 현실로 남아 있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21년만에 벗은 간첩누명

    21년만에 벗은 간첩누명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 이호원)는 15일 위장 귀순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함주명(74)씨의 재심청구 사건에서 함씨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조작간첩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간첩사건도 재심 받아들여야” 재판부는 “1983년 함씨가 위장간첩으로 귀순했다고 자백한 내용은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근안씨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으므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함씨를 간첩으로 지목한 홍모씨의 진술도 시간이 흐르면서 엇갈리는 등 신빙성이 없다.”고 밝혔다. ●아들 혼사 막히고 집안 전체가 고초 겪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찬양 혐의에 대해서는 “함씨가 고향 친구들에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적은 있지만, 이를 두고 북한을 찬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함씨는 “간첩누명을 쓴 아버지 때문에 아들의 혼사길이 막히는 등 집안 전체가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이제 무죄를 선고받아 그동안의 내 말이 진실이었음을 인정받게 됐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신규영, 이장형, 박동운씨와 1985년 구미유학단 사건의 김성만·황대건씨 등 다른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재심 청구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가 피해자의 누명을 벗기는 데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말을 잘랐다. 그는 최후변론 당시 “1999년 서울지검에서 이씨와 대질신문을 했는데, 그가 미안하다고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위장자수 간첩조작에 16년간 옥살이 1954년 남파간첩으로 내려온 함씨는 “남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왔다.”며 자수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83년 남파되자마자 위장자수를 하고 고정간첩으로 활동해 온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수감 16년 만인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이듬해 이근안씨가 함씨에게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문을 했다고 검찰에 자수하자, 함씨는 2000년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를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의문사위 前조사관, 박근혜대표 고소키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전직 조사관 김모(39)씨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조선일보 간부 김모씨가 과거 간첩누명을 쓰고 투옥된 사실을 왜곡해 본인을 ‘간첩’으로 몰아 명예를 훼손했다.”며 이들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 혐의로 10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할 예정이라고 9일 밝혔다. 김씨는 이날 미리 배포한 고소장에서 “93년 이른바 ‘남매간첩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작임이 밝혀졌다.”면서 “그럼에도 박 대표와 김씨는 기자회견과 칼럼을 통해 ‘간첩이 현역 장성을 불러 조사한다.’고 악의적으로 비방,본인과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검찰 고소와 함께 서울중앙지법에 9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함께 제기할 방침이다. 김씨는 93년 군사기밀을 북한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4년을 복역한 뒤 99년 사면복권,지난해 7월 위원회 조사관으로 채용됐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눈에 띄네~ 이 얼굴]‘효자동 이발사’ 이재응

    “꼬마친구가 고생을 정말 많이 했어요.새벽 얼음판 위에 엎어져 있거나,입이 부르튼 채 러닝만 입고 떨고 있을 땐 가슴이 아파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효자동 이발사’에서 가슴 찡한 모성애 연기를 펼친 문소리가 극중 아들로 나온 아역배우 이재응(13)을 두고 한 말이다.영화는 1960∼70년 유신시대에 우연히 대통령의 이발사가 된 한 소시민의 인생유전을 그린 드라마.재응은 주인공 성한모 부부(송강호·문소리)의 어린 외아들로,대통령 이발사인 아버지 때문에 뜻하지 않게 시련을 겪는 캐릭터다. 송강호를 이야기의 기둥으로 삼은 영화여서 재응의 대사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하지만 그의 어눌하면서도 순박한 연기는 마음 약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송강호의 코믹연기에 화기애애하던 객석의 분위기가 번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해지는 화면도 모두 재응이 주도하는 대목들.간첩누명을 쓰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모진 고문 끝에 다리를 못쓰게 됐는데도 멍한 표정만 짓거나,용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뒤지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도 무심히 맑은 눈망울만 굴리는 장면들이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재응의 연기이력을 대충 짚어낼 것 같다.‘선생 김봉두’에서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꿋꿋하던 강원도 산골의 초등학생 소석이,‘살인의 추억’의 첫 장면에서 시골형사 박두만(송강호 분)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던 바로 그 아이다.그러고 보면 송강호와는 심상찮은 인연이다. “송강호,문소리 선배님에게서 연기를 배울 수 있어 무척 기뻤다.”며 숫기좋게 잘 웃는 재응이는 ‘선배 복’이 많다.최민식 주연으로 강원도 산골에서 한창 촬영중인 드마라 ‘꽃피는 봄이 오면’도 함께 찍고 있다. 황수정기자 sjh@˝
  • 역시 ‘깡호’... 송강호의 임전무퇴

    ■ 송강호는 어떤배우? 스크린 스타의 특성을 가장 잘 파악하는 이는 물론 매니저일 것이다.그 다음은 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을 홍보아이템으로 개발하는 마케팅 담당자들.‘송강호가 어떤 배우냐.’는 물음에 그들은 십중팔구 단답형으로 말한다.“정말 부지런한 배우”라고. 느릿느릿,대충대충할 것 같은 선입견과는 달리 일맵시가 누구보다 깔끔하고 꼼꼼하다는 게 현장의 중평이다.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에 들어가면 녹음실과 편집실을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별난 배우.감독과 편집기사의 옆자리에 찰싹 붙어앉아 행여나 자신이 공들여 찍은 장면이 무참히 잘려나갈까,‘무언의 감시’를 하는 배우로 소문나 있다. 촬영이 끝나면 안면을 싹 바꿔 다음 스케줄에 매달리는 여느 배우들과 또 다른 점.기술시사회를 꼭꼭 챙겨보기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효자동 이발사’도 기자시사회날 새벽에 메가박스 극장을 찾아 스태프들과 기술시사회에 참석했다. 스태프들에 대한 자잘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편집실에 올 때는 곧잘 먹을거리를 챙겨들고 온다.”는 게 한 마케팅 담당자의 얘기.인터뷰에서 송강호는 “영화를 처음 보고 흐뭇한 마음에 스태프들에게 감사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황수정기자 ■ ’효자동 이발사’ 송강호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역할’이란 소리를 듣는 배우는 행복할 것이다.그만의 아우라가 있고 작품을 더할 때마다 ‘숨은 1인치’를 보여줄 수 있다면 축복받은 배우다. 배우 송강호(37)는 이 조건들을 누리는 몇 안되는 한사람이다.데뷔작의 조연 캐릭터로까지 기억되는 배우가 몇이나 될까.‘초록물고기’에서 나이트클럽 기도로 나온 장면장면들은 그의 골수팬이 아니어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이발사다.지난 5일 개봉한 ‘효자동 이발사’에서 그는 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폭압적 권력에 운명을 맡긴 힘없는 소시민을 연기했다.본의아니게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어 겪는 해프닝들을 때론 유쾌하게 때론 콧등 시큰한 감동으로 엮은 드라마다. “독재를 정색하고 비판한 영화도,그렇다고 코미디 영화도 아니란 걸 먼저 귀띔해주고 싶습니다.못 배우고 가난했던,그때 그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의 자화상을 담았어요.” “시대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라 아버지 세대를 ‘추억’하는 영화”라고 짚어준다.‘각하’의 머리를 깎아주는 자신의 캐릭터만 보고 무조건 코미디 영화로 넘겨짚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는 소시민의 삶을 질감있게 표현했다.간첩누명을 쓴 열 살짜리 아들이 고문을 당해 두 다리를 못쓰게 돼도 어찌할 수 없는 힘없는 이발사 아버지.순박하면서도 절절한 부정(父情)을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까.“실제로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어 연기의 깊이를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추억담도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소시민이지만 속깊은 정으로 자식 잘 되길 비는 마음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어요.영화를 찍는 내내 여고 미술선생님이었던 지난날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더라구요.” 가정사를 노출하지 않기로 소문난 그가 그 말끝에 서둘러 말머리를 돌린다.“이번 역할은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 박두만처럼 일방적으로 극을 끌어가진 않는다.지난 시대의 아버지상을 차분히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캐릭터를 설명한다. 단 한줄의 애드리브도 없이 시나리오대로 대사를 구사한 건 그래서였다.‘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며 논두렁에서 몸을 날리는 식의(‘살인의 추억’에서) 통쾌한 애드리브는 접었다.얄팍한 재미를 의식해 애드리브를 넣을수록 영화의 본래 의도가 훼손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이전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송강호가 덜 보일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고 보면 더더욱 신통한 배우다.자신의 무심한 동작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그동안 관객들의 감각을 길들여놓은 덕분일까.이번 영화에서는 웃을 대목이 아닌데도 번번이 폭소가 터지곤 한다.“그만큼 송강호란 배우가 유쾌한 이미지를 가졌다는 방증인데,무척 기분좋은 일”이라며 사람좋게 웃는다.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넘버3’때의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제 안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하지만 관객들에게 그건 이제 그만 잊어달라고 한다면 이기적인 거죠.불편하지 않아요.송강호가 팬들에게 사랑받는 방식이 바로 그런 거니까요.” ‘변신’은 그래서 앞으로도 자신에게 어울릴 단어가 아닐 거라고 잘라말한다. 억지스레 스타냄새를 피우지 않는 소박함이 좋다.“남자머리 깎는 건 웬만큼 자신있어요.남자 스태프들을 전부 빡빡머리로 만들어가며 열심히 연습한 덕분이에요.히,히,히” 하이톤으로 웃어제치는 기괴한(?) 웃음소리.“(웃음소리가)경박하죠? 안 고쳐져요.”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배짱이 그를 더 넉넉하게 만든다. 한달쯤 쉬고나면 다음 작품 ‘남극일기’를 찍는다.새 역할은 남극 탐험대장.“끝없는 설원을 배경으로 연기의 밀도 하나로 승부를 거는 영화”라고 귀띔한다. 황수정기자 sjh@˝
  • 수지김 유족 배상금 어디 쓰나/공권력 피해자돕기 2억 쾌척

    법무부가 항소를 포기함에 따라 살해당한 뒤 간첩누명을 썼던 수지김(본명 김옥분)씨 유족들은 이달 중순쯤 손해배상금 42억원을 받는다.살해범 윤태식씨가 5일 손해배상금 일부에 대해 항소했지만,국가가 항소를 포기한 만큼 배상금 액수는 변하지 않는다.유족들은 배상금의 일부를 기증하고,소송비용으로 쓴 뒤 남은 것을 똑같이 나눠 갖기로 했다. 지난해 5월 손해배상소송을 서울지법에 청구할 때 유족들은 배상금 가운데 2억여원을 사회에 기증하기로 합의했다.유족들은 최근 가족회의를 갖고 “판결의 사회적 의미를 고려,공익활동에 더 많은 배상금을 사용하자.”고 의견을 모았다.2000년 살해범 윤씨를 검찰에 고소한 뒤 뜻밖의 사고로 숨진 수지김씨의 오빠 김만식씨의 넋을 기리고,또다른 공권력 피해자들이 진실을 밝히도록 돕고 싶다는 게 유족들의 뜻이다. 유족들은 또 민사소송을 낼 때 흔쾌히 인지대 2700만원을 빌려준 독지가의 돈도 갚고,지난 3년간 민·형사 소송을 담당했던 모든 변호사 등에게도 수임료를 지급할 계획이다.나머지 돈은 6가족 10명이 골고루 나눠 생활기반을 마련하는데 사용하기로 했다. 한편 살해범 윤씨는 이날 “국가가 수지김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은폐했다.”면서 “결국 나도 희생자인데 1심에 충분히 다투지 못했다.”며 손해배상금 일부에 대해 항소했다. 서울고검 관계자는 “국가기관의 조직적 불법행위가 재발해선 안된다는 항소포기 취지에 변함이 없다.”면서 배상금 지급 방침을 재확인했다. 정은주기자 ejung@
  • 검찰 “항소” 국정원은 “포기” ‘수지김 위자료’ 엇갈린 행보

    살해된 뒤 국가정보원에 의해 간첩누명을 썼던 ‘수지김’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을 수행중인 서울고검은 31일 42억원 위자료 지급판결에 대해 항소하기로 했다.배상금이 10억원을 넘는 국가소송은 항소하려면 법무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항소할 때 예상되는 사회적 비난을 감안해 항소하지 말자는 취지의 의견서를 서울고검에 보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