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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헌 시장 “3·1운동 정신 가슴깊이 돼새겨야”

    신동헌 시장 “3·1운동 정신 가슴깊이 돼새겨야”

    경기 광주시는 1일 3·1절 100주년을 맞아 만세운동 재현 거리행진과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신동헌 시장과 독립유공자 후손,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500 여명이 참석했다. 기념탑 참배로 시작된 행사는 3·1독립운동 기념탑에서 광주시 노인복지관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100주년 3·1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특히 3·1만세운동 재현 거리행진은 대형태극기를 선두로 일본헌병과 독립투사들로 분장한 공연단원들이 100년 전 당시 상황을 생생히 재현한 퍼포먼스를 벌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거리행진이 끝난 후 노인복지관에서 진행된 기념식은 극단 파발극회의 창작 뮤지컬 ‘해공과 함께하는 대한독립 만세!’를 시작으로 3·1운동 경과보고,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사, 삼일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신 시장은 “3·1운동이 국민주권의 역사를 되살려냈듯이 3·1운동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며 광주시를 시민과 함께하는 소통과 화합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이항진 시장 “3·1운동의 자립, 자존, 자유 뜻 받아 새롭게 융성하는 여주시민이 되자”

    이항진 시장 “3·1운동의 자립, 자존, 자유 뜻 받아 새롭게 융성하는 여주시민이 되자”

    경기 여주시는 1일 오전10시 여주시민회관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과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는 이항진 여주시장을 비롯해 정병국 국회의원, 유필선 여주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시·도의원들과 박근출 여주시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장 등 독립유공자 후손, 유관단체, 공무원,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여주시민합창단의 독립군가와 뮤지컬 ‘여강은 흐른다’팀의 갈라쑈로 시작된 기념식은 독립유공자 후손 소개,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사, 붓글씨 퍼포먼스,3·1절 노래제창,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박근출 여주시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장은 기념사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보여준 민족적 정통성과 독립운동가의 삶이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확립했다”며 “이런 정체성을 바탕으로 여주만세운동의 숭고한 뜻을 이어가자”고 말했다. 이항진 시장은 “3·1 독립만세운동에서 외친 대한독립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지배를 당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도 누군가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자립, 자존. 자유의 본 뜻이다”이라며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스스로 존귀하다는 뜻” 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일제의 강압을 물리치고, 혹독한 전쟁도 이겨내고, 어려운 경제성장을 일으켜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그렇게 100년의 성장을 했다” 고 덧붙였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일본 정부 “문 대통령, 3.1운동 사상자 수 언급은 부적절”

    일본 정부 “문 대통령, 3.1운동 사상자 수 언급은 부적절”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사상자 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오늘(2일) NHK 등의 전날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 수를 언급한 것에 대해 “(한일 간) 견해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공적인 장소에서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했다. 문 대통령은 전날 기념사에서 “3·1운동 당시 7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해됐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어서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본과의 협력도 강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3·1운동의 사상자 수를 언급한 것을 문제 삼으며 항의했다. 일본 외무성은 전날 여당 자민당이 개최한 외교부회(위원회) 등의 합동회의에서 “역사가 중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며 견해가 일치되지 않은 것을 공공의 장에서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3·1운동 당시의 만행에 대해 아직 사죄하지 않고 있다. 또 최근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최근까지 이어져 온 과거사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거듭 불만을 토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란 나비가 되어 일본 사죄 받으세요” 나눔의 집 ‘3·1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추모제

    “노란 나비가 되어 일본 사죄 받으세요” 나눔의 집 ‘3·1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추모제

    3·1 운동 100주년인 1일 오전 10시 30분 경기 광주시 퇴촌 나눔의 집 1역사관 광장에서 ‘3·1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는 지난해 별세한 하점연·김순옥 할머니의 약력 소개와 헌화로 시작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위에는 현재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이옥선(92) 할머니가 먼저 분향과 국화를 바쳤다. 유가족 추모사에서 2013년 타계한 최선순 할머니의 아들 왕상문씨는 직접 쓴 시를 낭독했다. 그는 최 할머니를 ‘당당한 어머니’로 기억하고 목이 멘 소리로 “어머니, 노란 나비가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훨훨 날아 일본군 사죄 끝까지 받으세요.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외쳐 주위를 숙연케 했다. 나눔의 집 대표이사 송월주 큰스님은 성우 스님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법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원하는 대로 가해국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이라고 강조했다. 이옥선 할머니의 내레이션으로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 에움길(A long way around) 편집본도 상영됐다. 에움길을 만든 이승현 감독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 깨달음을 준 할머니들의 성장드라마이고 영웅의 일대기”라고 소개했다. 추모행사에서는 국악인 김태희씨의 추목곡 연주, 유경은씨의 대금 연주, 그리고 일본 음악인인 하타 슈지(기타)씨와 자이케 마사토(색소폰)씨의 공연도 이어졌다. 하타 슈지씨는 이옥선 할머니에게 사죄의 큰절을 올리고 “공연이 할머니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해 박수를 받았다. 그는 또 “3·1운동 100주년은 의미있는 날이다. 100주년을 계기로 해서 진정한 한·일관계가 회복되고 정치인이 아닌 일반 국민들의 교류를 통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추모제는 위령비 참배와 추모 나비 달기로 마무리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양아들이 되어 나눔의 집을 돕고있는 양기대 전 광명시장은 “3·1운동 100주년이라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지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가슴 아프다”면서 “정부와 국민 모두가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밝혔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참석한 이수민(광주 경화여고 3학년)양은 “3·1운동 100주년 이라는 의미가 가슴에 와닿는다. 100년 전 숭고한 희생을 한 분들께 감사 드린다”면서 “3·1절에 일제에 의해 고통을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뵈니 감회가 새롭고 뜻 깊다”고 말했다. 글·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3·1운동 100주년에 美신문 광고 나온 김복동 할머니

    3·1운동 100주년에 美신문 광고 나온 김복동 할머니

    정의기억연대, 워싱턴포스트에 광고“일본 정부, 사죄하고 배상하라” 촉구시민들 기부로 광고비 4387만원 모아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3월 1일 자에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광고를 게재했다. 1일 정의기억연대는 “우리의 목소리를 100년 전 3월 1일, 삼천리 강토를 만세소리로 뒤덮으며 세계에 해방과 평화의 외침을 만방에 알렸던 것처럼 우리의 공동성명을 미국의 유력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1/2 광고로 게재했다”고 밝혔다. ‘일본정부가 우리 민족과 아시아 여성들에게 감행한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광고에는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사진과 함께 남북·해외 여성단체의 공동성명이 실렸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단체들은 “일본정부는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과거 범죄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침략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면서 성노예범죄를 비롯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우리 민족과 아시아 여성들에게 감행한 반인륜적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국제사회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해결과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전시 성폭력 범죄의 재발방지를 위해 일본군성노예 범죄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이번 광고비는 기부금으로 마련됐다. 정의기억연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모금을 시작해 한국노총 금융산업노조가 3105만원을 기부하는 등 총 4387만 4100원이 모였다”며 “남은 1천여만원의 후원금은 세계에 남북 여성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활동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동식·백준기·송병철 등 다수경찰청, 독립운동가 경찰 유공자 추진‘순사’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경찰은 3·1운동 당시 민초들을 잡아들이는 등 암울했던 시대에 부역했다. 당시 조선인 경찰 다수는 광복 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 경찰로 재차 채용됐다.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을 해방 뒤 체포·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9)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에서 ‘경찰=부역’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기준으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가운데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 출신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뒤 경찰을 이끌었던 간부들도 많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2명을 발굴해 알리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면면을 보면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이들이 많다. 경찰 최고위직까지 오른 장동식 치안총감이 대표적이다. 그는 1943~1945년까지 광복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일본군 내 한국 병사들을 탈출시킨 뒤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54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된 뒤 1971년 6~12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또 광복군에서 적(敵)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백준기 경위,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근무한 송병철 순경, 천호인 등도 광복군 출신 경찰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결사 조직이나 학생단체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경우도 있다. 노기용 총경은 1920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 ‘군사주비단’에 가담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군자금 모금 계획 도중 일제에 체포돼 7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노 총경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24년부터 학생단체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노수 총경, 경찰이 되기 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체포되어 1년 복역했던 최철룡 경무관 등도 해방 이후 경찰조직에 몸 담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기도 한 안맥결 총경,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이었던 양한나 경감,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 경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경찰청은 자체적으로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에 대한 독립유공 심사를 보훈처에 요청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친일잔재 청산 의지 밝힌 문 대통령 “빨갱이 같은 변형된 색깔론 하루빨리 청산해야”

    친일잔재 청산 의지 밝힌 문 대통령 “빨갱이 같은 변형된 색깔론 하루빨리 청산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잘못된 과거를 성찰할 때 우리는 함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의 앞부분을 친일잔재 청산 의지를 밝히는 데 할애했다. 문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을 때 처음으로 박수가 터져 나온 부분도 친일 잔재 청산 의지를 처음으로 밝혔을 때였다. 문 대통령은 “이제 와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거나 이웃 나라와의 외교에서 갈등 요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친일잔재 청산도, 외교도 미래 지향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일본의 반발과 확대해석 등을 경계했다. 친일잔재 청산의 의미에 대해 문 대통령은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며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친일잔재 청산의 구체적 방향에 대해 잘못된 ‘색깔론’부터 없애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며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어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의식 부재를 직접 비판했던 것과 달리 올해 기념사에는 일본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없었다. 대신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본과의 협력도 강화할 것”이라며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역사를 거울삼아 한국과 일본이 손잡을 때 평화의 시대가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힘을 모아 피해자들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치유할 때 한국과 일본은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일본이 역사를 반성할 때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갈 수 있다는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한편 문 대통령이 이날 연설문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우리’로 40회였다. 그다음으로는 ‘평화’ 30회였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학생들이 직접 항일운동지 탐방팀 구성 ‘청소년 역사·문화탐구단’ 모집합니다

    학생들이 직접 항일운동지 탐방팀 구성 ‘청소년 역사·문화탐구단’ 모집합니다

    경기도 김포교육지원청이 학생들이 직접 해외 항일독립운동지 탐방팀을 구성하는 ‘청소년 역사·문화탐구단’을모집한다. 김포교육지원청은 초·중·고·특수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함께 걷고 성장하는 2019 김포 청소년 역사·문화탐구단’을 모집한다고 1일 밝혔다. 오는 22일까지 공모마감하고, 학생 10∼12명에 인솔교사 1∼2명로 구성된 팀 단위별로 모집한다. 최종 선정된 팀에는 2500만원이 지원된다. 파견기간은 4박5일 일정으로 오는 6∼10월 중이다. 자세한 모집요강은 김포교육지원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된다. 이번 역사·문화탐구단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추진하는 프로젝트다. 주목할 점은 학생들이 직접 주도해 임시정부 역사현장에서 지난 100년 여정을 성찰하고 애국선열의 자주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항일유적지 탐방으로 대한민국 미래 100년의 희망을 생각해 보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마련됐다. 학생들 스스로 구성한 역사문화탐구단을 중국으로 탐방하며 대한민국 항일 독립투쟁과 우리민족의 국난극복 역사와 관련 있는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조사·연구할 기회를 부여한다. 김정덕 김포시교육지원청 교육장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만 배운 선열들의 항일투쟁운동의 발자취를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재조명해 역사인식을 높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해 이번 청소년 역사문화탐구단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이 총리,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 첫 참배

    이낙연 국무총리는 1일 오전 3·1운동 100주년인 해를 맞아 서울시 중랑구 망우공원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한용운·오세창 선생의 묘소와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을 참배했다. 역대 총리중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이 총리가 처음이다. 지난 1월 손병희 선생 묘소와 지난달 26일 백범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데 이어 이번에 망우공원묘지를 찾았은 것은 100년 전 3월 1일 당시 뜨거웠던 만세 열기를 담아 애국선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의창 오세창 선생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두 선생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을 각각 받았다. 이 총리는 일제 침략에 맞서 서울을 탈환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고 순국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13도 창의군 탑에도 들러 참배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후손의 DNA를 확보하여 묘지를 확인하는 사업과 국외에 안장된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한용운·오세창 선생을 포함한 민족대표의 뜻을 기리자 학생과 국민들이 보다 쉽게 3·1독립선언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본을 보급하고 있다. 최광숙 선임기자@seoul.co.kr/
  • [시흥 3·1만세운동] 수암면 비석거리 성별·연령·계급 뛰어넘은 시흥 최대 만세운동지

    [시흥 3·1만세운동] 수암면 비석거리 성별·연령·계급 뛰어넘은 시흥 최대 만세운동지

    온 국민이 대한의 독립을 외쳤던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비폭력·평화를 표방한 전국적인 항일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며 민족 독립의 초석을 놓았다. 경기도 시흥은 3·1운동이 발생한 서울과 가까이 있어 시위 초기부터 열기가 고조됐다. 마을 곳곳에서 펼쳐진 단발적 만세 시위였지만, 철저한 사전 준비로 15일간 지속하며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흥시가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지사의 숭고함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펼쳐진 시흥지역 최대 만세운동 1919년 3월 30일, 통문을 전해 들은 수암면 주민들이 수암리 비석거리로 모여들었다. 당시 스물여섯 청년이었던 윤병소(1893~미상) 지사는 이 소식을 듣고 수암리로 갔다. 그는 각 리에서 모인 2000여명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했지만 계속해서 면사무소 근처까지 진출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수암면 비석거리에 울려 퍼진 ‘만세’는 시흥일대 최대 만세운동이었다. 이 지역은 현재 안산시 수암동이지만 군면통폐합 이전에는 시흥군 수암면이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시흥시 북부지역은 부천군 소래면, 중남부는 시흥군 수암면, 서남부는 군자면이 각각 설치됐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촉발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던 시기에 시흥도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3월 24일 소래면 주민들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수암면 비석거리와 군자면 장곡·선부·죽율리, 군자면 구장터 등 곳곳에서 독립의 열망이 피어올랐다. 윤병소 지사와 더불어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투쟁 시위를 이끈 또 한 명의 위인은 바로 윤동욱(1891~1968) 지사다. 흥분한 군중들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했지만 “독립하면 관공서는 국가의 재산이 되니, 국유재산을 털끝만큼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며 평화적인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는 시위를 진압하러 온 순사 임건호에게 오히려 시위 동참을 촉구했으나 임건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태형 90대의 가혹한 형벌을 받은 윤동욱 지사는 경찰 신문 과정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독립을 꾀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며 민족 자긍심을 높였다. ●일제에 맞선 군자면 김천복 지사 징역 1년형 선고로 옥고 해마다 시흥시 군자초등학교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열린다. 지금의 군자초등학교와 군자파출소 인근은 시흥의 3·1운동이 활발히 이뤄진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3월 29일 군자면 장곡리와 월곡리, 31일 군자면 선부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 4일 거모리에 수백명이 운집하면서 확대됐다. 특히, 군자면 죽율리(현 죽율동)에 거주했던 김천복(1897~1968) 지사는 당시 군자면사무소 앞에서 만세 시위에 합류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를 이유로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자면 구장터(서안산나들목 부근, 석곡산대장)도 기억해야 할 역사적 현장이다. 장현리에 거주하던 스무 살 서당 생도 권희(1900~1955) 지사는 그해 4월 7일 구장터에서의 만세운동 동참을 촉구하는 비밀통고를 작성했다. 장수산(1900~1981) 지사가 이를 마을 구장의 집 앞에 두고 주민들이 서로 돌려보게 하는 등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모의는 무산됐다. 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숭고한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내년까지 장수산·윤동욱·권희·윤병소 지사 기념비 건립 시흥시는 시흥의 3·1운동을 돌아보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1995년 8월 15일 군자초등학교에 ‘독립운동 유적지’ 비를 건립한 이래로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에는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워 시흥지역 만세운동 참여자들의 고귀한 독립정신을 알리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주도했던 독립유공자의 고귀한 희생도 기린다. 시는 지난해 7월 17일 시흥시 죽율동에 김천복 독립지사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 장수산·윤동욱·권희·윤병소 지사의 기념비가 역사적 현장에 들어설 예정이다. 기념비에는 무력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내던졌던 항일 열사 다섯 분의 애국정신을 기록한다. 2012년 윤동욱 지사 묘에서 처음 시작된 시흥시 3·1절 기념행사는 2013년부터 군자초등학교에서 진행 중이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원년인 올해는 3·1절 기념식과 더불어 주민이 일상 속에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린다. 시흥지역 3·1운동 소책자 발간, 유적지 탐방, 독립유공자 힐링캠프 등 3·1정신을 이어가는 행사가 준비돼 있다. 시흥지역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찾는 여정은 이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시흥시는 독립유공자 유족들로 구성된 광복회 단체를 설립해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정기적인 교육을 진행한다. 또 시흥지역 3·1운동 기초조사를 통해 3·1운동 관련 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힘쓴다는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성별과 나이·계급을 뛰어넘어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던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이 오늘의 시흥을 만든 초석이 됐다”며 “시흥시는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지사를 예우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울산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다채’

    3·1절 100주년 기념식이 울산에서 다채롭게 열린다. 울산시는 1일 오전 11시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송철호 시장, 독립 유공자 유가족, 시민, 학생, 사회 각계 기관과 단체 대표, 경찰, 군인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한다. 기념식은 국민의례, 3·1운동 경과보고,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사, 기념공연 및 3·1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기념식에서는 독립유공자 유족인 남녀 초등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기념 공연은 33인의 시민뮤지컬단을 참여시켜 울산의 3대 3·1 만세운동인 언양·남창·병영의 만세운동과 울산출신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삶을 뮤지컬로 만든 ‘마지막 여정-고헌 박상진’을 선보인다. 기념식에 앞서 오전 8시 태화강대공원에서 시민 등 4000여 명이 모여 3·1절을 기념하는 제20회 울산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낮 12시 20분부터 문화예술회관 쉼터에서는 송철호 시장이 독립유공자 유족과 오찬을 함께하며 위문품을 전달한다. 민간단체 주관의 기념 행사도 다채롭다. 울주 청년회의소는 언양 3·1독립운동 사적비 앞에서 기념식을, 상북면 청년회는 상북면 3·1 독립운동 기념비 앞에서 3·1절 기념식을, 중구축구협회는 종합운동장에서 울산병영 3·1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중구청장배 축구대회를 연다. 울산시는 100주년 기념 분위기 조성과 시민참여 유도를 위해 지난 20일부터 일제강점기 애국지사가 사용했던 6종 태극기를 제작해 시청 가로변에 게양하고 있다. 구·군 1곳의 간선도로변에 기념식 홍보 배너도 설치했다. 한편, 이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정오를 기해 전국 동시에 만세소리가 울려 퍼진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활약상을 되새길 전국의 역사적 장소들이 후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짙게 배인 7개 지역을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우리 근대사가 기억하는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에 귀 기울여볼 때다.① 서울 독립문… 역사박물관·경희궁 등 일제강점기 흔적 서울에는 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시대별로 서울의 변화상을 전시한다.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도 열린다. 박물관 옆 경희궁은 아픈 역사가 서린 궁궐이다. 인현왕후와 혜경궁홍씨 등이 거주했던 궁은 일제가 집중적으로 파괴한 대상이었다. 경희궁을 나서면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이 금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심재생예술을 입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린 정동길 등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3·1운동 열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행촌동 딜쿠샤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 서울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위창 오세창 넋 기린 곳 망우리공원은 뜨거운 역사를 품은 야외박물관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보비를 읽다 보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해 9월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20년 전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약 83만 2800㎡(25만여평) 규모로 문 열어 1973년까지 운영됐다. 2만 85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장해 현재 7400여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는 나무를 심었고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곳에 5.2㎞ ‘사색의 길’도 조성됐다.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묘지도 있다.③ 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 1919년 1500명의 함성 생생히 독립운동가 홍범식은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택에 들어서면 홍명희가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사랑채를 만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9일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 안채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택을 둘러봤다면 진주성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 괴산호의 절경이 아름다운 연하협구름다리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④ 충남 천안 유관순 생가와 7개 전시관 있는 독립기념관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볼 수 있는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높이 51m ‘겨레의 탑’과 동양 최대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한 7개 전시관은 다양한 문헌자료와 체험시설로 방문객을 맞는다.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리니 미리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주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캠핑 공간에는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있어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돼 옥사할 당시 전소된 가옥과 헛간을 복원했다. 가까운 곳에 그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이 있다.⑤ 전남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본섬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소안도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 함경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릴 만큼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땅이다.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객선 이름부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가면 이곳이 어떻게 항일운동 성지가 됐는지 알 수 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과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을 알게 된다. 인구 6000여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성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몽돌해변 등도 소안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다.⑥ 경북 안동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지사의 투쟁사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사를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유림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고문시설인 벽관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흥미롭다. 기념관을 나서면 독립운동 성지로 알려진 내앞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등이 있다. 안동의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임청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가까운 월영교의 밤경치도 놓치면 아깝다.⑦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은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항일 독립운동 요람이다. 의열단은 식민지배자와 민족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지배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등 모든 투쟁의 배후에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지난해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영상과 자료들로 그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일대는 밀양의 만세운동으로부터 태극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이 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난 밀양 관아지와 보물 147호 밀양 영남루도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사설] 3·1운동 100주년 아침에 되새기는 민주주의의 가치

    3·1운동 100주년 아침이다. 100년 전 선대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던 독립만세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더는 식민지가 아니라고 해서, 독립된 나라에서 산다고 해서 그저 3·1운동을 과거의 일로 박제화해 역사 교과서에 가둬서는 안 된다. 정부는 2월 26일 3·1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진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유공자 1등급 서훈을 추가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영화 ‘암살’의 김원봉 등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의 공훈 및 삶을 재조명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3·1운동 정신의 정수는 평화와 국민 화합, 민주주의에 있다. 이는 21세기에 더 심화해야 할 가치들이다. 100년 전 오늘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전체 인구의 10분의1가량인 200여만명이 참가한 사실 등을 학자들이 새로운 역사적 증거로 찾아냈다. 총칼로 진압한 일본 헌병대에 맞서 비폭력으로 항거했던 탓에 7509명이 숨졌고 1만 5850명이 다치는 등 희생이 컸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받던 여러 나라 민중들에게 민족자주에 대한 깊은 감화를 주었다. 특히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 중국의 반제 반봉건 5·4운동 등은 3·1운동에서 비롯된 도미노 효과였다. 한반도는 66년간 ‘전쟁 중단’ 상태지만, 한반도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평화 통일은 3·1운동 정신의 정수와 맥이 닿는다. 실제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100년 전 독립선언문은 인류공영의 지혜를 담은 세계평화 선언문이다. 독립선언문 후반부에서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이는 과거 우익세력들이 강조했던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향후 새롭게 만들어질 동북아 평화질서의 패러다임 속 한국이 해내야 할 역할을 고스란히 적시한 100년 전 가르침이다. 어제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북미 정상은 기대했던 ‘종전선언’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반도는 물론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더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며 평화의 가치를 통해 공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 통합의 과제 또한 3·1운동으로부터 반드시 되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3·1운동에 나선 이들은 남녀노소, 직업, 계급, 지역, 종교의 구분도 없었다. 각자의 처지와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지만, 독립이라는 지상명제 앞에서 화합하고 일치단결했다. 진보와 보수, 종교, 노사, 남녀 등 여러 형태의 갈등과 대립이 얽혀 국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각자가 가진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범국가적 과제 앞에서는 국민 통합을 이뤄 내야 한다는 당위성은 3·1운동이 우리에게 준 또 다른 교훈이다. 특히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자발적으로 떨쳐 일어났다는 점은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주의를 확인하는 과정으로도 인식된다. 나라의 주인은 왕이나 양반과 같은 특권 계층이 아닌, 바로 국민이라는 인식은 2016년 대통령 탄핵의 촛불집회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듯 3·1운동으로부터 시작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100년 우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그 결과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경제와 문화, 정치 등에서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며 ‘한국식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이 아침 100년 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화합과 평화,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또 다른 100년을 향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할 때다.
  • ‘3·1운동 100주년 기념메달’ 2종 출시

    ‘3·1운동 100주년 기념메달’ 2종 출시

    ㈜풍산화동양행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조폐공사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메달’을 선보인다고 28일 밝혔다. 31운동 100주년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기획된 기념 메달은 2종의 금메달로만 출시되며 수량은 각각 1000개이다. 기념금메달 I(31.1g)의 앞면은 탑골공원의 31운동 부조 가운데 수백명의 여성들이 주축이 돼 만세운동을 벌였던 경남 진주의 만세운동을 배경으로 중앙에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담았다. 기념금메달 II(15.55g)의 앞면은 31운동 개시 당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장면과 만세를 부르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실루엣 등을 담았다. 메달의 뒷면은 공통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는 남녀의 실루엣을 31운동 100주년을 나타내는 숫자 ‘100’ 안에 담았다. 가격은 기념금메달 I은 258만원, 기념금메달 II는 132만원이다. 예약접수는 4일부터 15일까지 풍산화동양행과 한국조폐공사, 국민은행, 기업은행, 농협은행, 신한은행, 우체국 전국 지점, 현대백화점 온라인몰 등에서 선착순으로 받는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법무부, 국내 거주 외국인 대상 독립기념관 탐방 교육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3·1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법무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내 거주 외국인을 대상으로 오는 5일부터 29일까지 15회에 걸쳐 독립기념관 탐방 교육을 실시한다고 28일 밝혔다. 전국 출입국·외국인청별로 결혼이민자, 동포, 유학생 등 600여명의 외국인들이 릴레이 형식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를 위해 독립기념관은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3·1운동 전시관과 역사전시관 관람을 외국인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도록 진행하는 한편 도자기에 태극기를 그리는 등 체험형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3·1운동부터 임시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을 현장 탐방을 통해 생생하게 경험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공유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사회통합을 다지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美 리버사이드시 ‘3·1 정신의 날’ 선언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 윌리엄 베일리 시장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을 ‘3·1 정신의 날’로 선언한다고 27일(현지시간) 밝혔다. 리버사이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펼쳤던 대한민국 독립운동 기반인 파차파 캠프가 있던 지역이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에 따르면 베일리 시장은 선언서에서 “3·1 대중 봉기는 일제강점하 한국 민중의 최초 저항이었다”면서 “오는 3월 1일을 ‘3·1 정신의 날’로 선언하고 이에 리버사이드 주민에게 3·1운동의 의미를 기리는 활동에 참여하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베일리 시장은 선언서와 별도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서한’에서 “리버사이드는 한국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곳은 안창호 선생이 최초의 한인타운을 건설한 곳이다. 그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를 따며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리버사이드에서 열리는 도산 동상 주변 행진과 뮤지컬 ‘도산’, 플래시몹 등의 행사를 소개했다. 리버사이드 시의회는 2016년 12월 도산이 세운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를 사적지로 지정했으며, 2017년 3월 현판식을 했다. 파차파 캠프는 1905년부터 1918년까지 초기 미주 한인사회의 중심지로 독립운동의 메카 역할을 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유관순 열사 사적지 밝힌 ‘독립의 횃불’

    유관순 열사 사적지 밝힌 ‘독립의 횃불’

    3·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충남 천안에 있는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앞에서 열린 ‘아우내 봉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천안 연합뉴스
  • 보안법·소요죄 적용… 수용시설 부족에 신속 처벌규정 신설도

    보안법·소요죄 적용… 수용시설 부족에 신속 처벌규정 신설도

    조선총독부 판사 재판… 대부분 일본인 3심제 속 고등법원 조선인 판사 1명뿐3·1운동을 주도하거나 가담한 이유로 형사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조선총독부 사법부 소속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았다. 논문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장신)’에 따르면 유죄 판결을 받은 3·1운동 참가자 7816명 가운데 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피고인이 5601명(71.7%)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내란·소요죄 1564명(20%), 출판법 위반(3.5%) 276명, 제령 7호 위반 161명(2.1%) 등으로 죄명이 적용됐다. 보안법·출판법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만들어져 조선인들에게만 적용된 대한제국 법령 17건에 속하는 법률이고, 내란·소요죄는 일본 형법의 내용으로 일제는 ‘조선형사령’, ‘조선민사령’을 통해 일본의 형법과 민법을 조선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너무 늘어나자 일제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1919년 4월 15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7호)’을 제정해 공포했다.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려고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규정이다. 감옥 수용시설도 부족해지자 단순 가담자들은 즉결심판을 거쳐 태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당초 구재판소(오늘날의 약식 재판)-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4급 3심제였던 재판은 1912년 이후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급 3심제로 이뤄졌다. 일제는 조선인 판·검사는 피고인이 조선인인 사건만 취급하고 일본인이 당사자인 사건을 심리하지 못하도록 차별했다. 반면 일본인 판·검사는 수많은 조선인 피고인들을 재판했다. 1910년대 고등법원에 몸담았던 조선인 판사는 1명에 불과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학생·주부·농부로 이어진 외침… 전국 곳곳서 “조선독립만세”

    학생·주부·농부로 이어진 외침… 전국 곳곳서 “조선독립만세”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에서 촉발된 불꽃은 민초(民草)들에게 옮겨붙으며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들어야만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은 독립선언서를 베껴 써 이웃에 뿌리고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민중의 판결문에는 일상에 뿌리내려진 독립운동이 그대로 남아 있다.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 종로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었다. 민족대표 33명을 비롯한 초기 주도자들이 2월 하순부터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조직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거대한 만세운동을 경험한 이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흩어져 독립운동의 ‘불씨’를 전파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박충서(당시 22세)는 3월 1일 오후 2~4시 수천명의 군중과 몰려다니며 만세를 부른 뒤 3월 5일 서울역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에도 참여했다. 김포 고향집으로 돌아가서는 이웃들과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마을 곳곳에 격문을 붙였다. 3월 19일 시장통에서는 수백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체포 당시 그의 가슴엔 태극기가 있었다. 고종 황제 국장을 보기 위해 2월 28일부터 3월 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공주 출신 이수욱(30)은 귀향하자마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날인 13일 오전 9시쯤 태극기 150개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 줬다. 이수욱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잇따라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심인 고등법원 재판에서 “조선민족이 열성으로 만세를 부른 것은 인정(人情)이 발발한 것으로 부끄러울 게 없는 행동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월 5일엔 순종의 고종 반우식(신주를 모셔오는 일) 행차를 보기 위해 경기 고양군 청량리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림들도 모였다. 유림 유준근(60)은 “유생이 젊은 학생들과 같이 만세를 부를 순 없다”며 동료 6명과 함께 순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했다. 순종의 가마에 접근해 상소문을 전달하려고 할 때 경찰에 체포됐다.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유림 대표로 참석했던 어대선(59)은 5일 청량리에서 군중에게 독립사상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이후 유생 김백원(60) 등 7명은 3월 12일 서울 종로의 음식점 영흥관에서 만나 조선 13도의 대표자 명의로 “조선의 독립은 2000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는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 조선의 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은 ‘애원서’를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낭독했다. 함경남도 함흥 청년들은 3월 3일 만세운동을 벌이기 위해 5~100원의 운동자금을 모았다. 학생들이 운동에 나서는 게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청년들은 함흥고등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과 함흥 농업학교 기숙학생들에게도 계획을 알렸다. 이근재(27) 등 주도자들은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 3000부를 인쇄했고 태극기도 제작했다. 그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 판사 지토우는 “학생들을 선동해 지방의 치안을 방해한” 행위로 판결문에 기록했다.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은 학생 도상록(16)은 훗날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교수를 지내며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린 인물로 추정된다. 뚝섬 공립간이농학교 학생인 손흥복(16)·조병직(21)·김동건(17)은 학생 30명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주도해 1심에서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3월 중순 경북 영덕에서는 강우근(40) 등의 주도로 읍내 시장에서 예수교 교인 등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외쳤고, 강원 원주에선 이현순(41) 주도로 4월 면사무소와 뒷산에서 주민 40여명이 모여 독립을 염원했다. 만세 운동에는 나이와 직업, 계층, 종교가 따로 없었다. 김유인(28)은 4월 25일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장채극·이철 등이 풍선을 사들여 ‘조선독립만세’, ‘공화만세’라고 써서 서울 시내에 띄우려고 하자 100원을 주며 풍선을 사서 모으도록 한 혐의(보안법 위반)로 1920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대규모 군중시위는 줄어들었지만, 외침은 질기게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특히 종로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낙타산(현재의 대학로 낙산)이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학생 이병철(18)과 공수명(17)은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들과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이 열리는 1920년 7월 16일을 앞두고 “요즘 경성부내(서울 시내)는 조용하고 평온하여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하는 자가 없는데 다시 기세를 높이자”고 계획했다. 7월 15일 이들은 큰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그 위에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써 낙타산에서 가장 높은 소나무 꼭대기에 이틀간 매달았다. 조선총독부 순사 아베·사가는 신문 과정에서 “18척이나 되는, 낙타산 가장 높은 곳으로 군중이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태극기를 발견하고 즉시 내렸으나 일반(민중)이 태극기를 바라보고 다시 어떤 사건이 돌발하지 않을까 암담했다”고 말했다. 이병철·공수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재심(再審). 확정된 판결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행위나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이 확인되면 사건을 다시 심판할 수 있다. 군부독재 시절 불법 감금과 고문에 못 이겨 토해낸 거짓 자백과 거짓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은 국가보안법 관련 피고인들은 반세기에 이르러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만든 법으로 일제 사법부에 의해 내란범·치안방해범·강도 등으로 몰린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재심이 이뤄지길 바라며, 일제의 판결문에서조차 고스란히 드러난 투사들의 독립 의지를 재구성했다.#손병희 외 47명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 일본 형법상 소요죄 “피고인들은 조선이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형성하는 것을 기도했다. 조선민족 대표자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전 도(道)에 배부했다. 민중을 선동하여 왕성하게 조선독립 시위를 일으켰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가 쓴 판결문에 담긴 공소사실 일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 초기에 ‘3·1운동’을 주도한 48명은 일제의 판결문에 ‘치안 방해를 선동한 자’로 비교적 가볍게 규정됐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한때 친일파에 속했다가 병합(한일합병) 이후 자신에 대한 대우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불쾌감이 있던 자로,…(중략) 교당 신축 기부금을 반납하라는 명을 듣자 크게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폄하됐다. 그러나 일제는 판결문 속 “독립의 희망을 품은” 48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불러온 힘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불온한 문서”로 지목된 독립선언문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았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판사들은 사건 관할에 관한 결정서에서 “독립 사조가 조선에 널리 퍼져 인심이 동요했고, 100만 신도의 추앙을 받는 천도교 손병희의 이름을 거명한 독립선언서는 민중 선동의 커다란 효과로 나타났다”면서 “독립만세의 소리가 도시와 시골을 뒤덮었다”고 두려워했다.●결정·판결문 4건 모두 “최후의 1인” 대목 인용 천도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종교와 계층을 아울렀고, 전국에 만세운동을 촉발시켜 독립의 불씨를 키워냈다. 손병희,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도사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핵심 인사들은 1918년 말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그해 초 미국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 제안한 ‘새로운 전후(戰後) 질서의 14개조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를 빌려 세계에 조선의 식민지배 상황과 독립 의지를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독립운동 원칙은 손병희가 세웠고 구체적인 실행은 최린이 맡았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최남선은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승훈(판결문엔 본명 이인환)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도 천도교와 함께하기로 했다. 1919년 2월 21일 최린은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 종교가 다르고 같음에 관계없이 합동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 기독교계가 합류하기로 했고, 장로교 길선주·양전백 목사, 감리교 신흥식 목사, YMCA 간사 박희도 등이 이승훈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27일엔 강원 양양의 신흥사 승려 한용운과 경남 합천 해인사 승려 백상규(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도 동참하기로 해 종교계 연합을 이뤘다. 별도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등 학생 대표들도 종교계의 운동에 합류했다. 2월 27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이 인쇄됐다. 48명 가운데 인쇄소 사장 이종일과 공장 감독인 김홍규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헌법 문란의 문서를 인쇄(또는 방조)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인쇄가 끝나자마자 선언서는 서울은 물론 전남, 전북, 충북, 강원, 함경, 평안 등 전국으로 퍼졌다. 48명 중에는 독립선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한 지 2~3일이 지나 일본 도쿄와 만주에서 체포된 교사들도 있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들은 경찰에 자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가운데 “최후의 일각(一刻), 최후의 일인(一人)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뜻을 밝혀 완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48명에 대한 법원의 결정문과 판결문 4건에는 모두 이 대목이 인용됐다. 일제는 이 문장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가늠했다.●일제, 3·1운동 초기 주도자들 극형 시도 일제는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민족대표 등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을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들을 수사한 일제 검사는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1919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 예심을 청구했고,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나가시마는 일본 형법 77조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고등법원의 특별 권한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나가시마는 “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목적으로 전 조선인에게 교란을 선동하고 헌법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게시하게 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고등법원 판사 와타나베, 요코다, 이시카와, 미즈노, 하라는 1920년 3월 22일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표현으로 독립의사를 발표했으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교사한 문구는 없다”며 내란죄가 되지 않는다고 봤고, 사건의 관할이 경성지법에 있다고 결정했다. 민족대표들을 강하게 처벌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감을 키울 것을 우려해 일제 의회 등이 법원에 가벼운 형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사건을 맡게 된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는 1920년 8월 9일 “공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고등법원의 결정문에서 이 사건이 경성지법 관할이라고만 했을 뿐 경성지법에 사건을 송치한다고 밝히지 않았다”는 허헌 변호사의 ‘관할 위배’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사의 불복으로 경성복심법원으로 다시 재판이 넘어갔고, 그해 10월 20일 48명 중 37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승훈·함태영·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 배포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한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보안법 위반 혐의의 최고 형량이 2년, 출판법 위반이 1년으로 이들은 혐의별 최고 형량을 선고받았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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