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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투병 아들위한 기부금 1억 5000만원, 도박으로 날린 엄마

    암투병 아들위한 기부금 1억 5000만원, 도박으로 날린 엄마

    영국의 30대 여성이 암 투병 중인 어린 아들에게 쏟아진 온정의 후원금을 도박으로 탕진한 사실이 알려졌다. BBC 등 현지 언론의 5일 보도에 따르면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주 리즈에 사는 토비(6)는 2017년 1월, 신경아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신경아세포종은 신경계에 기원하는 악성종양으로, 부신수질이나 교감신경절에 주로 발생한다. 이후 토비의 어머니인 스테이시 워슬리(32)는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값비싼 의료비를 모금하는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평소 토비가 좋아했던 축구팀인 리즈 유나이티드FC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구단 측은 선수와 후원단체 등을 동원해 총 20만 파운드(약 3억원)의 치료비를 모금했다. 이 과정에서 토비는 꿈에 그리던 축구선수들과 만났고, 구단 측은 병마와 싸우는 어린 소년을 위해 리즈 유나이티드FC의 마스코트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토비는 빠른 진단과 치료 덕분에 2018년 7월, 골수검사에서 암이 사라졌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개월 후인 지난해 10월,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결국 지난 1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기부금을 운용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웨스트요크셔 경찰 측에 따르면 워슬 리가 후원금 10만 파운드(약 1억 4900만원)를 아들의 치료비가 아닌 온라인에서 도박을 즐기는데 사용한 정황이 포착된 것. 지난 4일 열린 재판에서 워슬리는 이러한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워슬리의 사취 행위가 어린 아들의 치료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치료비를 명목으로 받은 기부금을 엉뚱한 곳에 쓰인 사실만은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다만 워슬리가 편취하고 도박에 쓴 기부금 10만 파운드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받은 기부금이었으며, 구단 측은 리즈 유나이티드FC가 전달한 기부금이 모두 토비의 치료비에 사용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워슬리는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으며, 오는 29일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문화마당] 시험을 치르는 자세/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시험을 치르는 자세/강의모 방송작가

    시험 보는 날 아침엔 늘 아팠다. 아니, 아프고 싶었다. 천재지변을 기다리기도 했다. 학교 과정을 끝낼 때 무엇보다 신났던 건 지긋지긋한 시험들과의 작별이었다. 교문 밖에 더욱 고된 시험이 줄줄이 대기 중이란 걸 미처 몰랐으니까. 학교 시험을 벼락치기로 버텼다면, 이후엔 무모함과 배짱으로 통과했다. 해마다 연초에 방송작가협회 회원 건강검진이 진행된다. 이 시험은 벼락치기도, 배짱도 통하지 않는 영역이다. 평소 아무리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해도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을 막을 길은 없다. 게다가 노화에 따른 신체기능 약화를 어쩔 것인가. 그저 고분고분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읽은 책 중에 ‘드라이빙 미스 노마’라는 여행 에세이가 있다. 아흔 살 노마 할머니가 남편을 암으로 먼저 떠나보내자마자 자궁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암 투병 대신 여행을 선택한다. 이 책은 인생의 마지막 1년 동안 아들 부부와 함께 캠핑카를 타고 돌아다닌 미국 일주 기록이다. 마침 각별하게 지내는 지인의 아버지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입ㆍ퇴원을 반복하는 중이어서 더욱 절실하게 읽혔다. 노마 할머니는 수술과 치료, 재활 과정을 설명하는 의사의 눈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외친다. “난 아흔 살이나 먹었어요. 이제 길을 떠날 참이라오. 더이상 병원 진료실에는 1분도 있고 싶지 않아요.” 아들은 어머니에게 치료 대신 여행을 제안하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맥주나 와인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으면 그 정도의 기쁨은 얼마든지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로든 요양원 시설에서 나오고 싶으면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싶을 때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로 아침 식사에 나올 메뉴를 먹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맨발로 잔디를 걷고 싶으면 걸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현실에선 심히 이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과 대면하기 전까지 최소한의 자존감과 품위를 유지하고 싶은 건 누구나의 소망일 것이다. 그들은 여행기를 올리는 블로그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위도가 변한다. 태도도 변한다.’(Changes in Latitudes, Changes in Attitudes) 최근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고 저자 엄기호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통의 ‘곁’이라는 위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힘들고 외롭고 고단할 고통의 옆자리. ‘곁’이란 말이 새삼 애잔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고통의 당사자와 그 곁을 지키는 사람 사이에 고통을 매개하는 간극과 시야가 필요하다고, 함께 걷거나 같이 음식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역할을 해준다고 말한다. ‘드라이빙 미스 노마’를 처음 읽을 때는 노마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러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만난 후엔 여행이라는 완충지대를 마련해 고통의 곁을 훌륭하게 지켜 낸 아들 부부의 지혜 쪽으로 감동의 무게가 기울었다. 혹여 내가 중병에 걸린다면? 아직은 내가 겪을 고통보다 어쩔 수 없이 내 곁을 지켜야 할 사랑하는 가족의 아픔과 슬픔이 먼저 눈에 밟히니까. 어쨌든 올해도 조신한 자세로 정기고사를 치렀고, 이제 성적표를 받을 일만 남았다. 결과 메일이 올 때까지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일시 중단. 시험 끝나자마자 책가방 던지고 놀러 나가던 그 시절처럼 잠시라도 해방감을 만끽하자.
  • [단독] 나를 위해, 남은 이들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할 겁니다

    [단독] 나를 위해, 남은 이들을 위해… 안락사를 선택할 겁니다

    루게릭병 父, 절망하는 가족 보고 결심 이별 준비 필요… ‘죽을 권리’ 찾고 싶어한국인 2명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안락사(조력자살)를 허용하는 스위스에서 삶을 마쳤고, 107명이 같은 방법을 준비 중이다.<서울신문 3월 6일자 1면> 그들은 왜 스위스로 가려는 것일까. 서울신문은 지난 5개월간 답을 듣기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한국인 ‘디그니타스’ 회원 3명과 연락이 닿았다. 이 중 30대 남성과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죽음이 슬픔, 회한, 한탄으로 가득해야만 할까요. 헤어짐은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잖아요. 남은 사람이 각자의 삶을 잘 살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도 이별 준비가 필요하다고 봐요.” 6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모(37)씨는 디그니타스 회원이 된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씨는 3년 전 인터넷에서 디그니타스를 검색했다. 루게릭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였다. 근육을 차츰 퇴화시키는 이 병은 처음엔 아버지의 다리를 못 쓰게 했고, 이어서 입, 소화기관, 호흡기, 팔 등 차근차근 모든 기관을 잠식했다. 아버지는 말하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나중에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24시간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야 했고, 집도 더 작은 곳으로 이사했다. “3년 넘게 병으로 고통받는 아버지와 절망하는 가족을 보면서 안락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뇌암에 걸린 미국 여성이 조력자살이 허용된 주로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사를 읽게 됐지요.” 29살의 이 여성은 6개월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는 대신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를 만들고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 임종 전에는 조력자살이 허용된 오리건주로 가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가족과 친구들 속에서 눈을 감았다. 김씨는 아버지에게도 디그니타스 안내문을 보이며 스위스에는 조력자살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의 병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잘 아는 아버지는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은 ‘절대 안 된다’며 말렸다. 3년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현재 8개월째 요양병원에서 코에 연결된 영양 공급 기계에 의존해 버티고 있다. “일부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게 됐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는 말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것(신체발부수지부모)이라는 유교문화 영향도 큰 것 같고요.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이기적인 것 아니겠어요.” 김씨는 자신에게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아버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안락사를 선택할 겁니다. 아버지가 병을 치르면서 차츰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사람들이 멀어지는 걸 느꼈어요. 제가 죽고 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슬픈 모습으로만 기억되지 않았으면 해요. 요즘 사람들 열심히 운동해서 가장 멋진 모습일 때 프로필 사진 많이 찍잖아요.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 친구가 택한 존엄한 죽음, 내겐 존엄하지 않았다

    친구가 택한 존엄한 죽음, 내겐 존엄하지 않았다

    안락사 동행자 케빈의 고백 (하) 오랜 친구로부터 스위스에 함께 가 달라는 제안을 받은 케빈(가명). 암 투병 중인 친구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제안에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스위스 여정은 곧 조력자살(안락사)을 위한 마지막 여행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케빈은 일단 함께하기로 했다. 현지에 가더라도 어떻게든 친구의 극단적 선택을 말릴 기회는 생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친구는 구체적 안락사 일정과 사망 후 시신 처리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을 정도로 결심이 확고했다. 스위스에 도착한 케빈은 친구에게 그냥 돌아가자고 설득했지만, 극심한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그의 결정을 끝내 꺾지는 못했다. 당일 아침이 밝았다. 친구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안락사 장소인 ‘블루하우스’로 떠났다. 서울신문은 익명의 취재원 케빈으로부터 그가 경험했던 내용을 담은 편지를 받아 상하로 나눠 연속 보도한다.늘 형 같았던 친구에게 스위스까지 따라와 끝까지 설득해 준 네 뜻을 따르지 못해 미안하다. 날 위해 늘 기도하는 맘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네 마음만은 잊지 않을게. 미안하지만 난 여기서 삶을 마감하고자 한다. 너의 뜻이 신앙적으로도 옳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도 알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유약했던 거 같아.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야. 그 마음 영원히 간직할게. 부디 안녕하길. 스위스에서 박정호 올림 아무도 없는 호텔방에 돌아와 그가 남긴 편지를 읽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미친놈’.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죽으려는 놈이 무슨 걱정을 이렇게 하는지, 또 이런 글을 왜 썼는지, 그의 마음을 알기에 고마움과 함께 답답한 감정이 동시에 몰려왔습니다. 친구는 제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처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나 봅니다. 편지 속에 저를 마치 안락사에 반대하는 성직자인 양 적어 놓았더군요.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미리 써 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친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는 끝까지 저를 보호해 주려 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지금이라도 정호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급히 호텔방을 나서 렌터카를 몰았습니다.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약 먹기로 결정했어. 함께 스위스에 와 줘서 고마워.” 제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가라고, 우리 꼭 다시 만나자고도 했습니다. 전화를 끊었는데,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어 도로 갓길에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가슴이 저린다는 게, 울음이 터져 나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정호가 죽는다는 것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파란 이층집에 도착했습니다. 경찰 두 명이 다녀간 후 디그니타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중간 침대에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그를 봤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눈을 살짝 뜬 채 창백한 얼굴로 표정이 없었습니다.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터질 듯 아팠습니다. 얼굴도 만져 보고 손도 만져 봤지만, 온기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죽었을지 궁금했습니다. 끝까지 함께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습니다.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양복에 검은색 넥타이를 한 장의사 두 분이 들어왔습니다. 직원은 제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밖에 나가 하늘을 봤더니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는구나, 과연 이렇게 죽는 게 존엄하게 죽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이 사람은 고통과 걱정이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세상에서 그간 힘들었던 모든 것을 풀어놓고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하얀 천과 쿠션으로 꾸며진 서양식 육각 나무 관에 누워 있었습니다. 정호가 바라던 대로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의사들은 집 앞에 세워둔 검은색 영구차에 관을 실었습니다. 차 안에 관 하나가 더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날 옆방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인 남성의 관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디그니타스 직원은 크레마토리움(화장장)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갈 수 없다며 종이에 주소를 적어 주며 내일 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친구는 관에 누운 채 홀로 크레마토리움으로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시내 북쪽 화장장으로 향했습니다. 스위스 화장장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화장만 하는 게 아니라 고인을 모시는 빈소도 있고 장례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큰 장례식장도 있었습니다. 도착해서 5분 정도 기다렸더니 직원 한 분이 숫자 9와 고인의 이름표가 붙어 있는 방으로 안내해 줬습니다. 방은 1.5평 정도 크기입니다. 관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길쭉했습니다. 오른쪽 벽 탁자 위에 관이 놓여 있었고, 고인은 관에서 어제 봤던 그대로 편안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오른쪽으로 굵고 짧은 큰 촛불이 하나 타고 있었습니다. 방은 춥지는 않았지만 서늘했습니다. 화장장 직원은 제게 괜찮으냐고 물었고, 제가 괜찮다고 하니 인사를 하고 나갔습니다. 저는 말없이 그를 봤고, 정호의 얼굴과 손을 만졌습니다. 어제보다 더 차가웠습니다. 무엇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을까요. 어쩌면 그는 미래에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병의 특성상 앞으로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통증은 온몸으로 퍼져 나갔을 겁니다. 죽을 것같이 숨이 막혔겠지요. 결국 정신까지 온전하지 않게 될 거란 걸 알았을 때, 그는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또 기약 없는 투병과 간병으로 받게 될 가족의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까지 고려해 스위스에 오는 걸 결정했을 겁니다. 그는 똑똑했습니다. 물론 인간적 갈등도 그의 몫이었겠지요. 대학도 못 간 자식들을 뒤로하고 어떻게 비행기를 탔을까 생각하면 제 가슴이 무너지는 듯 아픕니다. 대단한 친구입니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저는 그의 죽음을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바랐던 바일 겁니다. 호텔에서 만난 의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떠한 고통도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말이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친구를 위해 준비해 온 옷을 갈아입혔습니다. 좀더 환하고 편해 보였습니다. 친구도 제 선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 제 마음도 편해지더군요. 며칠 후 그는 한 줌의 재가 됐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는 자기 삶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존엄한 죽음이었을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적어도 저에게 친구의 죽음은 존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친구 스스로는 존엄한 죽음을 택했다고 확신합니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안락사 동행자 케빈의 고백 (상) 결국… 저는 오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습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 안락사 준비하는 107명…“나는 왜 디그니타스 회원이 되었나”

    안락사 준비하는 107명…“나는 왜 디그니타스 회원이 되었나”

    한국인 2명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안락사(조력자살)를 허용하는 스위스에서 삶을 마쳤고, 107명이 같은 방법을 준비 중이다.<서울신문 3월 6일자 1면> 그들은 왜 스위스로 가려는 것일까. 서울신문은 지난 5개월간 답을 듣기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한국인 ‘디그니타스’ 회원 3명과 연락이 닿았다. 이 중 30대 남성과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죽음이 슬픔, 회한, 한탄으로 가득해야만 할까요. 헤어짐은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거잖아요. 남은 사람이 각자의 삶을 잘 살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도 이별 준비가 필요하다고 봐요.” 6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모(37)씨는 디그니타스 회원이 된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씨는 3년 전 인터넷에서 디그니타스를 검색했다. 루게릭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였다. 근육을 차츰 퇴화시키는 이 병은 처음엔 아버지의 다리를 못 쓰게 했고, 이어서 입, 소화기관, 호흡기, 팔 등 차근차근 모든 기관을 잠식했다. 아버지는 말하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나중에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어머니는 24시간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야 했고, 집도 더 작은 곳으로 이사했다. “3년 넘게 병으로 고통받는 아버지와 절망하는 가족을 보면서 안락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뇌암에 걸린 미국 여성이 조력자살이 허용된 주로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사를 읽게 됐지요.” 29살의 이 여성은 6개월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는 대신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를 만들고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 임종 전에는 조력자살이 허용된 오리건주로 가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김씨는 아버지에게도 디그니타스 안내문을 보이며 스위스에는 조력자살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의 병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잘 아는 아버지는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은 ‘절대 안 된다’며 말렸다. 3년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현재 8개월째 요양병원에서 코에 연결된 영양 공급 기계에 의존해 버티고 있다. “일부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게 됐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는 말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것(신체발부수지부모)이라는 유교문화 영향도 큰 것 같고요.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이기적인 것 아니겠어요.” 김씨는 자신에게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아버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안락사를 선택할 겁니다. 아버지가 병을 치르면서 차츰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사람들이 멀어지는 걸 느꼈어요. 제가 죽고 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슬픈 모습으로만 기억되지 않았으면 해요. 요즘 사람들 열심히 운동해서 가장 멋진 모습일 때 프로필 사진 많이 찍잖아요.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43년 간 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의 쓸쓸한 죽음

    43년 간 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의 쓸쓸한 죽음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의 한 동물원에서 43년간 독방 생활을 하던 코끼리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로 알려져 있는 플라비아는 몇 달 간의 투병 끝에 지난 1일(현지시간) 안락사됐다. 동물원 측은 2일 플라비아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플라비아는 3살 때 무리와 따로 떨어져 동물원에서 평생을 혼자 지냈다. 이 때문에 코끼리 사육에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의 캠페인에 자주 등장했다. 스페인 동물권리단체 PACMA는 지난 1년 반 동안 동물원과 협력해 플라비아가 다른 코끼리 무리와 지낼 수 있도록 유럽 내 사파리 공원을 물색해왔다. 그러나 플라비아는 결국 마지막까지 혼자였다.동물원 측은 플라비아가 지난 6개월 간 고열에 시달리는 등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밝혔다. 특히 사망 직전 2주간은 의식을 잃는 일이 잦았고 결국 안락사됐다. 플라비아는 인도코끼리과로 20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는 종이다.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인도코끼리의 수명은 약 70년이며 현재 야생에 남아있는 개체 수는 약 2만 마리에 불과하다. 동물권리단체 PACMA는 성명을 내고 “플라비아는 코끼리에게 필요한 환경적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 채 좁은 동물원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비판했다. 단체장인 실비아 바퀘로는 “플라비아는 나와 동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삶을 누리는 동안 플라비아는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여생을 보냈다”며 슬퍼했다. 이어 “안락사라는 가장 뜻밖의 방법으로, 최악의 죽음을 맞이한 플라비아를 애도한다”고 밝혔다. 지역 동물단체들 역시 플라비아가 동물의 슬픈 삶을 상징한다면서 동물원에 감금된 모든 동물들이 해방을 맞이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진=PACMA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왜그래 풍상씨’ 유준상, 수술대 오른 모습 포착 ‘이보희 간 받을까’

    ‘왜그래 풍상씨’ 유준상, 수술대 오른 모습 포착 ‘이보희 간 받을까’

    ‘왜그래 풍상씨’ 유준상이 오늘(6일) 밤 간을 이식받기 위해 수술대에 오른다. 이에 철부지 엄마 이보희가 유준상의 인사를 받고 먼저 수술장으로 향하는 모습과 수술 직전 유준상의 모습이 공개돼 관심을 집중시킨다. KBS 2TV 수목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는 6일 수술대에 오른 풍상씨(유준상 분)의 사진을 공개했다. ‘왜그래 풍상씨’는 동생 바보로 살아온 중년남자 풍상씨와 등골 브레이커 동생들의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일상과 사건 사고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볼 드라마. 우리 주변에서 있을 법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재밌고 뭉클하게 그려내며 인생 가족 드라마란 호평 속에 인기리에 방송 중이다. 특히 지난주 ‘왜그래 풍상씨’의 닐슨 수도권 시청률이 20%를 돌파, 수목극 1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뿐만 아니라 TV화제성 조사회사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지난 4일 발표한 TV화제성 드라마 부문(2월 넷째주 조사)에서 2위(점유율 10.24%)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해 인기를 입증했다. 이 가운데 지난 32회에서는 양심이 그동안의 뻔뻔하고 무책임한 엄마의 모습에서 벗어나 풍상을 살리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그려져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에 풍상의 인사를 받으며 수술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포착돼 시선을 강탈한다. 이어서 간 이식 수술 직전 풍상의 모습이 공개됐다. 간암 투병으로 초췌해진 그는 누구보다 깊게 원망하고 증오했던 엄마로부터 간을 받게 된 상황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셋째 정상(전혜빈 분)이 수술을 마치고 나온 강열한(최성재 분)과 긴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 이목을 집중시킨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풍상과 심상치 않은 정상, 열한의 모습이 대비되며 풍상의 간 이식 수술 결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왜그래 풍상씨’ 측은 “풍상이 드디어 간 이식을 위해 수술대에 오를 예정”이라면서 “간 이식 없이는 생명이 위태로운 그가 그동안 원망 많았던 엄마 양심의 간을 받고 행복한 일상을 찾을 수 있을지 오늘(6일) 밤 방송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왜그래 풍상씨’는 유준상을 필두로 ‘제2의 풍상씨와 그 가족들’을 응원하기 위한 네이버 해피빈 릴레이 굿액션을 종영일까지 이어갈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간암에 걸린 풍상씨에게 간을 줄 사람은 누구일지 의견을 내는 시청자 참여 투표 이벤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왜그래 풍상씨’는 오늘(6일) 수요일 밤 10시에 33-34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암 재발한 네 아이 엄마, 병원 갈 때마다 패션쇼하는 사연

    암 재발한 네 아이 엄마, 병원 갈 때마다 패션쇼하는 사연

    리사 프라이(39)는 요즘 병원에 갈 때마다 마치 파티라도 가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치장한다. 의료진은 그녀를 ‘가장 매력적인 환자’라고 부르며 늘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은 범상치 않은 차림으로 병원을 찾는 잉글랜드 출신 여성의 이야기를 전했다. 리사는 서른 한살이던 지난 2011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셋째 아들 우디에게 모유를 수유하던 중 왼쪽 가슴에서 발견한 혹이 암 덩어리였다. 리사는 “그때를 떠올리면 끔찍하다. 정말 많이 아팠고 몰골은 형편없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양쪽 가슴을 떼어냈다. 화학요법 2년, 약물 복용 6년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12차례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종양 절제술을 거친 그녀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고 헬스 트레이너와 군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활동적인 일을 하며 건강에 자신이 붙은 리사는 임신 생각이 간절해졌다. 찰리(14), 말리(12), 우디(10) 세 아들을 낳은 그녀는 넷째 아이를 원했고 남편 웨인 프라이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벽에 부딪혔다. 의사는 항암치료 때문에 리사의 난자가 손상돼 임신은커녕 서른다섯에 폐경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리사는 “화학요법이 내 난소에 영향을 미쳤다.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는 말에 실망이 컸다”고 말했다.그렇게 임신을 포기하고 다시 군인의 삶으로 돌아간 리사는 훈련 중 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소총을 들고 숲을 기어 다니고 별 아래에서 잠을 자는 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 급격한 피로감이 엄습했다. 암이 재발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힌 리사는 병원을 찾았고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10주라고 확인해주었고 리사는 농담 아니냐며 끝까지 믿지 못했다. 그녀는 “불임 진단을 받았고 폐경이 될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임신이 돼 믿을 수가 없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  꿈에 그리던 넷째 아기를 갖게 된 리사는 임신 기간 내내 암이 재발해 아이를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녀는 “3주에 한 번씩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나에게 찾아온 작은 기적이 사라질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두려움이 너무 컸던 탓일까. 우려는 현실이 됐고 임신 39주 차에 그녀는 병원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출산을 2주 앞두고 암이 재발한 것. 임신 35주 차에 가슴에서 혹이 지방 덩어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바람은 무너지고 말았다. 암은 가슴에서 림프절, 흉골까지 전이됐고 의사는 그녀에게 치료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작은 기적 뒤에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리사는 좌절했다. 2주 후 뱃속의 아기와 만날 생각에 부풀어 있던 그녀는 결국 암 재발 진단 3일 후인 2018년 3월 25일 넷째 아들 재거를 유도 분만으로 출산했다. 이렇게 아기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태어났으나 남편 웨인은 죽음을 앞둔 부인 리사를 보며 오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갓 태어난 재거를 포함해 네 명의 아들과 남편이 있었다. 리사는 암 진행 속도를 늦춰 생존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화학요법에 돌입했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마다 가장 특별한 옷을 차려입고 치료에 임하고 있다. 리사는 “화학요법을 받을 때마다 내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그래서 항상 좋은 곳에 가는 것처럼 옷을 차려입는다. 화장하고 멋진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삶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깨우친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그녀는 “한껏 꾸미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고 건강에도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암 때문에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아이들이 상처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암이 나를 정의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이어 “가공식품과 설탕을 끊고 매일 가장 좋은 옷을 입어라. 특별한 날은 없다.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항암치료 때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리사는 이제 병원에서 ‘가장 매력적인 환자’라 불리는 유명 인사가 됐다. 사람들은 리사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며 덩달아 투병 의지를 다지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 43년 독방생활 끝 안락사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 43년 독방생활 끝 안락사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의 한 동물원에서 43년간 독방 생활을 하던 코끼리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코끼리’로 알려져 있는 플라비아는 몇 달 간의 투병 끝에 지난 1일(현지시간) 안락사됐다. 동물원 측은 2일 플라비아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깊은 유감을 표했다. 플라비아는 3살 때 무리와 따로 떨어져 동물원에서 평생을 혼자 지냈다. 이 때문에 코끼리 사육에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의 캠페인에 자주 등장했다. 스페인 동물권리단체 PACMA는 지난 1년 반 동안 동물원과 협력해 플라비아가 다른 코끼리 무리와 지낼 수 있도록 유럽 내 사파리 공원을 물색해왔다. 그러나 플라비아는 결국 마지막까지 혼자였다.동물원 측은 플라비아가 지난 6개월 간 고열에 시달리는 등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고 밝혔다. 특히 사망 직전 2주간은 의식을 잃는 일이 잦았고 결국 안락사됐다. 플라비아는 인도코끼리과로 20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는 종이다.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는 인도코끼리의 수명은 약 70년이며 현재 야생에 남아있는 개체 수는 약 2만 마리에 불과하다. 동물권리단체 PACMA는 성명을 내고 “플라비아는 코끼리에게 필요한 환경적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 채 좁은 동물원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비판했다. 단체장인 실비아 바퀘로는 “플라비아는 나와 동갑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삶을 누리는 동안 플라비아는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여생을 보냈다”며 슬퍼했다. 이어 “안락사라는 가장 뜻밖의 방법으로, 최악의 죽음을 맞이한 플라비아를 애도한다”고 밝혔다. 지역 동물단체들 역시 플라비아가 동물의 슬픈 삶을 상징한다면서 동물원에 감금된 모든 동물들이 해방을 맞이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사진=PACMA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 결국… 저는 오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 결국… 저는 오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호와 오랜만에 통화 통증 때문에 안락사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함께 취리히 교외 파란 2층 집에 갔습니다 시내에서 피자 한 접시를 먹는 친구를 보며 한참 더 살 수 있을 텐데, 죽는 게 말이 될까 서울로 돌아가자 했지만 그는 남았습니다 암 투병으로 고통을 겪는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 때문에 안락사하고 싶다고 합니다. 스위스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익명의 취재원 케빈(가명)은 실제로 스위스행을 결정했습니다. 타인의 자살을 도운 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기엔 친구의 부탁이 너무도 간절했습니다. 케빈은 스위스에서 극단적 선택을 끝까지 말렸지만, 친구는 결국 그의 방식대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스위스는 유일하게 외국인의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로, 영화 ‘미 비포 유’의 남자 주인공이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서울신문은 지난해 10월부터 약 5개월에 걸쳐 ‘한국인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외국인 조력자살을 돕는 글로벌 단체를 모두 확인하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을 감행한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스위스 현지와 한국으로 오가는 추적 끝에 어렵사리 케빈을 만났고, 오랜 설득을 통해 그는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케빈은 지난달 자신의 소회를 담은 편지 한 통을 서울신문 앞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는 물론 한국인이며,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을 선택한 한국인 두 명 중 한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가 처음 케빈이라는 이름을 썼기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케빈의 편지를 최대한 원문을 살려 상하로 나눠 싣습니다. 케빈의 요청 등을 고려해 안락사한 분의 나이, 가족 관계, 직업 등 구체적 신원과 사망일 등은 적지 않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저는 한국의 평범한 40대 가장입니다. 스위스에 다녀온 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지금도 제가 한 일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아니면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앞서간 제 친구의 선택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친구의 용기를 사회적으로 헤아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의 이름은 박정호(가명)입니다. 저는 정호와 함께 말기 암환자 등에게 조력자살을 도와주는 스위스에 있는 디그니타스라는 단체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친구는 더이상 이곳에 없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정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안부를 묻고 답하다가 대뜸 스위스에 같이 가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암투병을 해오던 걸 알았기에 저로서는 그 제안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기쁨이 잠시 뒤 눈물로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은 저는 너무나 떨렸습니다. 친구가 얘기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끄집어 내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워 다 기억나지는 않았는데, 처음에 인터넷에 입력한 단어는 ‘스위스’와 ‘안락사’였던 것 같습니다. 검색어 아래로 충격적인 글과 사진, 동영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검색된 글들을 읽다가 ‘조력자살’과 ‘디그니타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친구가 했던 이야기들이 이해가 됐습니다. 가슴이 뛰고 눈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디그니타스 직원으로부터 넘겨받은 약물을 환자가 스스로 마시고 곧 잠에 드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 친구는 시한부 삶 선고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병세가 더 심해졌을 때 나타날 고통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한 번은 저에게 물에 빠져본 적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상태가 더 악화되면 자신은 결국 익사하는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라며 그 전에 평화롭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가족이 겪을 고통과 경제적 부담도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스위스까지 같이 가줄 수 있느냐는 말에 ‘아니’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제가 법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안 가도 된다는 말도 했지만, 제가 가겠다고 하자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난 얼마 뒤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직접 보기는 꽤 오랜만이었지요. 친구는 이전보다 훨씬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말도 잘하고 고집도 있고 아주 똑똑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차를 운전해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만나서 그저 농담하고 이야기하니 예전처럼 즐거웠습니다. 친구와 죽음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스위스로 떠나는 날 아침에는 비가 쏟아졌는데, 출국장에 먼저 도착해 저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이미 친구의 몸이 많이 불편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탑승했고, 12시간이 넘는 힘든 비행 끝에 취리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스위스에서 보낼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사실 낯선 그곳에서 아픈 친구를 데리고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호텔에서 가만히 있기가 뭣해 빌린 차를 끌고 일단 나섰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며칠 후 그가 죽을 장소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차량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시내를 빠져 나와 한적한 교외를 한참 달리니 파란색의 2층 집이 나왔습니다. 그 집 앞에 도착하는 순간 차에서 못 내릴 정도로 몸이 오싹했습니다. 우리는 차에 앉은 채로 파란색 집을 바라만 보다가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기분이 묘했고, 안 좋았습니다. 다시 돌아와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양껏 시켜놓고 냄새 때문에 몇 점 먹지도 못한 스위스 퐁듀 맛도 보고, 피자도 먹었습니다. 피자 한 접시를 다 먹는 친구를 보면서 아직은 한참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 모레 죽는 게 말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들은 대로 디데이(D-day) 이틀 전에 디그니타스에서 보낸 의사 한 분이 호텔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의사는 제 친구가 정말 죽을 의지가 있는지와 온전한 정신 상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컵에 든 물을 스스로 마셔 보라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손으로 약물을 마실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의사는 다음날 또 왔습니다.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친구는 약을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고, 의사는 5분 안에 잠들어 30분 안에 죽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의사는 자신이 처방한 약이 내일 디그니타스에 가면 준비돼 있을 거라고 말하며 면담을 마쳤습니다. “서울로 돌아가자.” 이날 밤 제 입에서는 결국 참고 있던 말이 터졌습니다. 12시간이나 비행기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오고, 밥도 잘 먹고, 말도 잘하고, 나보다 더 똑똑한 친구가 이대로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됐습니다. 혼자서 한국으로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습니다. 일단 이번에는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함께 와주겠다며 친구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듯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친구는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친구가 택시를 부른 이유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자살방조죄로 곤욕을 치르게 될까 봐 배려한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마지막 배려를 말없이 받아들인 제가 창피하고 비굴하게 느껴집니다. 친구는 호텔방을 나서기 전 반으로 접은 메모지 하나를 주고 떠났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한참 후에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호는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차에 올랐습니다. 차창 너머로 저를 발견한 정호가 손을 내밀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손을 잡았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안락사 동행자 케빈의 고백 (하) 친구가 택한 존엄한 죽음, 내겐 존엄하지 않았다 ■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 [단독] 결국… 저는 오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습니다

    [단독] 결국… 저는 오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호와 오랜만에 통화통증 때문에 안락사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함께 취리히 교외 파란 2층 집에 갔습니다 시내에서 피자 한 접시를 먹는 친구를 보며한참 더 살 수 있을 텐데, 죽는 게 말이 될까서울로 돌아가자 했지만 그는 남았습니다암 투병으로 고통을 겪는 오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 때문에 안락사하고 싶다고 합니다. 스위스에 함께 가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익명의 취재원 케빈(가명)은 실제로 스위스행을 결정했습니다. 타인의 자살을 도운 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기엔 친구의 부탁이 너무도 간절했습니다. 케빈은 스위스에서 극단적 선택을 끝까지 말렸지만, 친구는 결국 그의 방식대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스위스는 유일하게 외국인의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국가로, 영화 ‘미 비포 유’의 남자 주인공이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서울신문은 지난해 10월부터 약 5개월에 걸쳐 ‘한국인의 존엄한 죽음’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외국인 조력자살을 돕는 글로벌 단체를 모두 확인하는 과정에서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을 감행한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스위스 현지와 한국으로 오가는 추적 끝에 어렵사리 케빈을 만났고, 오랜 설득을 통해 그는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케빈은 지난달 자신의 소회를 담은 편지 한 통을 서울신문 앞으로 보내왔습니다. 그는 물론 한국인이며,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을 선택한 한국인 두 명 중 한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가 처음 케빈이라는 이름을 썼기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케빈의 편지를 최대한 원문을 살려 상하로 나눠 싣습니다. 케빈의 요청 등을 고려해 안락사한 분의 나이, 가족 관계, 직업 등 구체적 신원과 사망일 등은 적지 않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저는 한국의 평범한 40대 가장입니다. 스위스에 다녀온 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지금도 제가 한 일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아니면 잘잘못을 따질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앞서간 제 친구의 선택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친구의 용기를 사회적으로 헤아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친구의 이름은 박정호(가명)입니다. 저는 정호와 함께 말기 암환자 등에게 조력자살을 도와주는 스위스에 있는 디그니타스라는 단체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친구는 더이상 이곳에 없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정호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안부를 묻고 답하다가 대뜸 스위스에 같이 가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암투병을 해오던 걸 알았기에 저로서는 그 제안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 기쁨이 잠시 뒤 눈물로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은 저는 너무나 떨렸습니다. 친구가 얘기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끄집어 내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워 다 기억나지는 않았는데, 처음에 인터넷에 입력한 단어는 ‘스위스’와 ‘안락사’였던 것 같습니다. 검색어 아래로 충격적인 글과 사진, 동영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검색된 글들을 읽다가 ‘조력자살’과 ‘디그니타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친구가 했던 이야기들이 이해가 됐습니다. 가슴이 뛰고 눈물이 콸콸 쏟아졌습니다. 디그니타스 직원으로부터 넘겨받은 약물을 환자가 스스로 마시고 곧 잠에 드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 친구는 시한부 삶 선고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병세가 더 심해졌을 때 나타날 고통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한 번은 저에게 물에 빠져본 적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상태가 더 악화되면 자신은 결국 익사하는 고통 속에서 죽게 될 거라며 그 전에 평화롭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가족이 겪을 고통과 경제적 부담도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스위스까지 같이 가줄 수 있느냐는 말에 ‘아니’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제가 법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안 가도 된다는 말도 했지만, 제가 가겠다고 하자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난 얼마 뒤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직접 보기는 꽤 오랜만이었지요. 친구는 이전보다 훨씬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말도 잘하고 고집도 있고 아주 똑똑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차를 운전해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만나서 그저 농담하고 이야기하니 예전처럼 즐거웠습니다. 친구와 죽음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스위스로 떠나는 날 아침에는 비가 쏟아졌는데, 출국장에 먼저 도착해 저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이미 친구의 몸이 많이 불편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탑승했고, 12시간이 넘는 힘든 비행 끝에 취리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스위스에서 보낼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사실 낯선 그곳에서 아픈 친구를 데리고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호텔에서 가만히 있기가 뭣해 빌린 차를 끌고 일단 나섰습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며칠 후 그가 죽을 장소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차량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시내를 빠져 나와 한적한 교외를 한참 달리니 파란색의 2층 집이 나왔습니다. 그 집 앞에 도착하는 순간 차에서 못 내릴 정도로 몸이 오싹했습니다. 우리는 차에 앉은 채로 파란색 집을 바라만 보다가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기분이 묘했고, 안 좋았습니다. 다시 돌아와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양껏 시켜놓고 냄새 때문에 몇 점 먹지도 못한 스위스 퐁듀 맛도 보고, 피자도 먹었습니다. 피자 한 접시를 다 먹는 친구를 보면서 아직은 한참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 모레 죽는 게 말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들은 대로 디데이(D-day) 이틀 전에 디그니타스에서 보낸 의사 한 분이 호텔 방으로 찾아왔습니다. 의사는 제 친구가 정말 죽을 의지가 있는지와 온전한 정신 상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컵에 든 물을 스스로 마셔 보라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손으로 약물을 마실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의사는 다음날 또 왔습니다. 친구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친구는 약을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고, 의사는 5분 안에 잠들어 30분 안에 죽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의사는 자신이 처방한 약이 내일 디그니타스에 가면 준비돼 있을 거라고 말하며 면담을 마쳤습니다. “서울로 돌아가자.” 이날 밤 제 입에서는 결국 참고 있던 말이 터졌습니다. 12시간이나 비행기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오고, 밥도 잘 먹고, 말도 잘하고, 나보다 더 똑똑한 친구가 이대로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됐습니다. 혼자서 한국으로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습니다. 일단 이번에는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함께 와주겠다며 친구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듯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친구는 택시를 타고 가겠다고 했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친구가 택시를 부른 이유를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자살방조죄로 곤욕을 치르게 될까 봐 배려한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마지막 배려를 말없이 받아들인 제가 창피하고 비굴하게 느껴집니다. 친구는 호텔방을 나서기 전 반으로 접은 메모지 하나를 주고 떠났습니다. 손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한참 후에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호는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차에 올랐습니다. 차창 너머로 저를 발견한 정호가 손을 내밀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손을 잡았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7일 2회에서 이어집니다. ■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글로벌 두산’ 기틀 닦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별세

    한번 일 맡기면 끝까지 신뢰 ‘믿음의 경영’ 국내 첫 연봉제 도입·대단위 팀제 시행도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고인은 1932년 서울에서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동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자원입대해 해군에서 참전용사로 활약했다. 제대 후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1960년 4월 산업은행에 공채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산그룹에는 1963년 동양맥주 평사원으로 처음 발을 들였다. 그룹 회장의 장남이었지만 고인의 첫 업무는 공장 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고 한다. 이후 한양식품 대표, 동양맥주 대표,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고인은 한 번 일을 맡기면 끝까지 신뢰를 보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했다.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 주는 ‘큰 어른’이었다”고 말한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국내 기업에선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 휴무 제도를 시행했다. 박 명예회장은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1996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이응숙 여사와는 196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고인은 암 투병 중이던 아내의 병실에서 쪽잠을 자며 오랜 기간 병구완을 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원(두산그룹 회장), 지원(두산중공업 회장)씨, 딸 혜원(두산매거진 부회장)씨 등 2남 1녀를 뒀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발인과 영결식은 7일이다. 장지는 경기 광주시 탄벌동 선영이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남편 앗아간 건 메르스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회피였다”

    “남편 앗아간 건 메르스가 아니라 정부의 책임회피였다”

    “엄마, 아빠 이야기가 왜 책에 나왔어?” “아빠가 훌륭한 사람이라서 그래.” 지난해 11월 일곱 살 아들은 납골당에 잠들어 있는 아빠 곁에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가져다 놓았다. 아들은 네 살 때 떠나간 아빠가 ‘하늘나라’라는 곳으로 갔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왜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없는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김석주’.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종식’과 동시에 세상에서 지워져버린 아빠는 새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호명됐다. 김탁환 작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소설 ‘살아야겠다’(북스피어)를 통해서다. 메르스라는 병마와, 정부의 무능과 싸우다 쓰러져 간 이들을 기리는 소설에서 ‘김석주’의 이야기는 감히 헤아리기조차 힘든 무게감으로 읽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172일 동안 격리된 채 사투를 벌이다 눈을 감은 마지막 사망자. ‘메르스 80번 환자’라 불렸던 그의 진짜 이름은 ‘김병훈’(사망 당시 35세)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의 감염자와 유족들은 다른 여느 재난 피해자와는 달리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어버렸다. 구멍 난 방역체계의 피해자임에도 ‘바이러스 덩어리’라는 낙인이 찍힌 탓이다. 김씨의 아내 배윤희(40)씨는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족이다. “망망대해에 돌멩이라도 던지는 심정으로”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 응했고, 메르스 피해자와 유족을 수소문하던 김탁환 작가의 손을 잡았다. 소설이 출간된 뒤 반향이랄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죽고 없어져도 이 이야기를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제 남편은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가해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파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을 찾았을 뿐인데….” 배씨는 메르스 감염자들이 ‘전파자’로 매도당했던 기억에 가슴을 쳤다. 김씨가 폐렴 증상으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던 2015년 5월 27일. 응급실에 머무르던 사흘 동안 ‘메르스 슈퍼 전파자’라 불렸던 ‘14번 환자’도 같은 곳에 있었다. 14번 환자는 국내 첫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서 감염됐지만, ‘2m, 1시간’이라는 지침상의 밀접접촉자 기준에 해당하지 않아 격리되지 않았다. 배씨는 14번 환자를 탓하지 않았다. “‘슈퍼 전파자’라 손가락질을 받으셨어요. 그분이 받았을 상처가 어느 정도였을지….”김씨는 6월 7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배씨는 “폐렴 증상이 계속돼 병원에 메르스 검사를 요청했지만 1주일이 지나서야 검사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김씨에게는 1년 전 완치됐던 림프종까지도 다시 찾아왔다. 삼성서울병원에 1인실에서 메르스 대증(對症)치료를 받다 7월 3일 서울대병원 음압병실로 옮겨진 뒤 림프종마저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 면역력이 떨어져 메르스가 악화되고, 당장 메르스부터 잡으려니 항암 치료가 미뤄지는 상황이었다. 김씨의 투병 과정은 172일이라는 ‘세계 최장 투병기간’뿐 아니라 양성과 음성을 여러 차례 오갔다는 점에서 특수한 사례였다. 질병관리본부는 10월 1일 김씨가 PCR(환자의 침이나 가래 등에서 극소량의 유전자를 검출, 증폭시켜 바이러스를 검사하는 방법) 검사에서 ‘24시간 간격으로 2회 연속 음성’이 나와 최종 음성으로 판정돼 퇴원했다고 밝혔다. 배씨는 “8월에 이미 2회 연속 음성이 나와 격리해제가 이뤄졌어야 했지만 정부와 병원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양성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질본과 서울대병원으로부터 더이상 PCR 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9일 만에 고열로 걷기 힘든 상태가 돼 삼성서울병원을 다시 찾았고, 삼성서울병원의 PCR 검사에서 다시 양성이 나와 서울대병원 음압병실에 격리됐다. 김씨가 퇴원 뒤 다시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 질본은 “감염 또는 재발이 아닌, 환자 체내에 잠복해 있던 극소량의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된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감염력은 0%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림프종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사실상 죽은 바이러스 조각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김씨가 10월 초 퇴원해 집에 머무르는 동안 배씨와 아들을 포함해 김씨와 접촉했던 사람들 129명 어느 누구에게서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은 모호했다. ‘24시간 간격으로 2회 연속 음성’이라는 기준을 여러 차례 충족했는 데도 정부는 김씨에 대한 격리를 해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씨가 음압병실 안에서 메르스 치료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대해 질본은 11월 16일 해명자료를 통해 “10월 초 음성 판정을 받았을 때와 동일하게 감염력은 여전히 낮다”면서도 “양성과 음성을 반복하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가 환자에 대한 감염관리 철저를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질본이 근거로 든 한국·WHO 간 메르스 상황점검회의(10월 26일 개최)에서 WHO는 김씨에 대해 “감염력이 현저히 낮다(extremely low)”고 해석하며 메르스의 “전파 가능성 해소(the end of transmission)”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질본 10월 29일 보도자료). 정부 스스로 앞뒤 안 맞는 해명을 내놓은 셈이다.배씨는 “남편은 음압병실에 있다는 이유로 림프종 치료를 제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질본은 당시 “받아야 할 항암치료를 못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배씨는 “검사실로 이동해 받아야 하는 MRI와 CT 검사,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한 유전자 검사, 백혈구 수혈을 위해 주사를 꽂는 일 등을 가족들이 항의하고 언론에 제보해서야 이뤄진 적이 많았다”면서 “병원은 환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만에 하나 남아 있을지 모를 감염력이라도 차단하는 게 정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배씨는 믿었다. 다만 림프종 치료가 한시라도 급했기에 언제 격리가 해제될지에 대한 확답이 절실했다. 배씨는 정부에 “남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격리 기준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병원은 “결정권은 정부에 있다”고 했고, 질본은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배씨가 계속해서 항의 메시지를 보냈던 질본의 한 관계자는 배씨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했다. 골수이식에 희망을 걸었던 김씨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됐다. 급기야 병원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제안해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배씨가 격리 해제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던 11월 25일 새벽 3시 6분 김씨는 결국 눈을 감았다. 사인은 메르스가 아닌 악성 림프종이었다. 김씨는 족쇄 같았던 소변줄과 콧줄을 치렁치렁 단 채로 관에 담겼다. 차가운 비닐팩이 김씨의 몸을 이중으로 감쌌다. 관에 탕탕 못을 박는 소리가 마치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내딛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처럼 배씨의 가슴에 박혔다. 관이 음압병실을 나와 화장터로 향하는 길에 노란 줄이 쳐졌다. “몇 미터 밖으로 떨어지라”며 밀치는 통에 배씨는 남편의 관을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못했다. “이게 남편과의 이별 방식이어야 했을까요. 병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나요.” 배씨가 서울대병원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절규하던 그날 아침, 포털사이트는 “메르스 제로” “메르스 종식” 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뒤덮였다. 배씨는 보건복지부와 질본으로부터 위로의 전화나 문자메시지 한 통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공중 보건과 환자 개인 사이에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겁니다.” 감염력이 사실상 0%였고 더이상 메르스 치료를 받지도 않는 김씨를 계속 음압병실에 가둬놓았던 건 정부와 병원의 책임 회피가 아니었냐고 배씨는 되묻고 있다. 배씨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도움으로 정부와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김씨의 생명을 앗아간 게 메르스가 아닌 정부와 병원의 무능과 무책임이 아니었는지를 따져 물으려 한다. 소송은 아직 1심도 열리지 않았다. 소송의 첫 단추인 의료감정을 해줄 기관을 찾는 데서부터 난관이었다.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남편의 죽음에 애도가 아닌 안도를 한 세상과도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배씨는 말했다.정부로부터 사과를 받는 게 끝이 아니다. 배씨는 ‘감염병 환자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낼 생각이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바깥 공기 한 번 쐬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남편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다. “남편이 음압병실에 갇혀있는 동안 그리워한 건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소음,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싶어했어요.” 김씨는 음압병실에 갇혀 있는 동안 아들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침대 위에 누운 채 용변을 해결해야 했다. 극심한 우울증이 김씨의 몸과 마음을 파고드는 동안 어느 누구도 살펴보지 않았다고 배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소변줄과 콧줄을 빼내주지 못한 게 가슴에 사무친다”는 배씨는 대학원에 진학해 환자의 인권에 대한 고민을 박사논문으로 풀어낼 계획이다. 비행기를 타고, 로켓을 타고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던 아들은 이제 떨어진 속눈썹을 후 불며 소원을 빈다. “아빠를 돌려달라고 빌었는데 이뤄지지 않아… 엄마, 다음엔 우리 같이 소원 빌자.”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이 언젠가 장편소설 한 권을 읽을 나이가 될 때까지 배씨는 해야 할 일이 많다. “남편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잊혀지고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계속 목소리를 낼 겁니다. 이렇게라도 사랑했던 남편을 추모하려고 합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조성모, 방송서 눈물 펑펑 흘린 이유

    조성모, 방송서 눈물 펑펑 흘린 이유

    조성모가 아픈 아버지를 찾았다. 3일 방송된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가수 조성모가 아픈 아버지를 찾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서 조성모는 아들 봉연 군과 함께 아버지가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았다. 조성모와 손주 봉연 군을 본 조성모의 아버지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조성모는 5년째 투병 중인 아버지의 재활 치료를 도우며 정성스레 간호했다.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를 본 조성모는 콘서트 때문에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그를 대신해 아버지가 최고 인기 가수상을 대리 수상했던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를 기억하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기억이 안난다”고 하자 조성모는 눈물을 흘렸다. 이어 조성모는 어릴 적 아버지가 자신을 자전거 뒤에 태우던 일과 도시락을 싸주던 일들을 언급하며 아버지의 사랑에 고마움을 전했다. 이후 조성모의 아버지가 “아범이 건강해서 참 좋다. 너하고 봉연이하고 건강해서 한이 없다”며 아들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자 조성모는 “살아만 계셔 달라”며 아버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아버지 역시 조성모를 끌어안고 눈물을 지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자아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94세, 기다리고 기다렸지만…끝내 못 들은 일본의 사과

    94세, 기다리고 기다렸지만…끝내 못 들은 일본의 사과

    60여년 中생활에도 조선 국적 지켜와 2004년 국적 회복했지만 폐암 투병 위안부 피해 생존자 22명밖에 안 남아광주·전남에 유일하게 생존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가 3·1절 100주년 하루 뒤 세상을 떠났다. 94세. 3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 따르면 곽 할머니는 전날 오전 9시 별세했다. 지난 1월 28일 김복동 할머니와 이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3일 만이다.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었다. 곽 할머니의 빈소는 전주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장지는 천안 망향의동산에 마련된다. 곽 할머니는 1925년 전남 담양에서 2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만 19세 때인 1944년 봄, 동네 여성 5명과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다가 일본 순사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됐다. 중국으로 끌려간 곽 할머니는 1년 반 동안 일본군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세 차례씩 방에 있는지 검사를 받아야 해 도망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풀려난 곽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구걸하는 삶을 살다가 중국 안후이성 숙주에 정착했다. 60여년을 중국에서 살면서도 조선 국적을 바꾸지 않는 등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이후 한 방송사의 공익예능프로그램과 한국정신대연구소의 도움으로 2004년 국적을 회복하고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곽 할머니는 2015년 12월 폐암 4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 병환이 더 진전되지 않아 3년이 넘는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봉침 목사’로 알려진 한모 목사가 곽 할머니의 수양딸이 된 것을 두고 시민단체가 “곽 할머니를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석연찮은 일에 휘말리기도 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월드피플+] 母 대신…父 금혼식에 ‘웨딩드레스’ 입은 여섯 자매

    [월드피플+] 母 대신…父 금혼식에 ‘웨딩드레스’ 입은 여섯 자매

    중국 장쑤(江苏)성에 거주하는 여섯 자매가 부모님의 금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연이 공개돼 화제다. 장쑤성 피저우(邳州)에서 버스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할 수 있는 산간 벽촌에 거주하는 가오씨(68)는 올해 아내 진씨 대신 여섯 딸과 금혼식을 치렀다. 산간 벽촌에서 태어난 가오씨는 지난 1968년 무렵 아내 진씨와 결혼, 슬하에 7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둔 다복한 가정을 꾸려왔다. 결혼 당시 가오씨 부부는 자가 소유의 집과 밭이 없는 소작농 출신이었다. 소위 ‘남의집살이’를 하면서도 부부는 매년 열심히 일했고 그 덕분에 결혼 20년이 되던 해 직접 지은 집 한 채와 논 몇 마지기를 통해 자녀들만큼은 도시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가 가졌던 여덟 남매 중 둘째 딸과 아들은 각각 10세, 7세가 될 무렵 심각한 전염병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줄곧 가오씨는 자신과 결혼 후 일생을 부침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아내 진씨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선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가오씨는 결혼 50주년이 되는 올해 아내 진씨를 위해 금혼식을 선물할 궁리를 시작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결혼식을 치르지 못했던 아내를 위한 가오씨의 선물은 맞춤형 ‘웨딩드레스’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는 곧장 올해 진행될 예정이었던 금혼식을 앞두고 자녀들과 논의 끝에 아내 체형에 맞는 맞춤 웨딩드레스와 결혼사진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금혼식을 앞둔 지난해 말 아내 진씨는 말기암 진단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투병 생활 4개월 만의 갑작스러운 변고였다. 더욱이 도시에 거주하는 자녀들 형편 탓에 진씨가 사망할 당시 그의 곁에는 남편 가오씨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씨가 사망한 직후 자녀들은 아버지 가오씨의 거처를 도시로 옮겼다. 사별한 아내의 빈자리를 잊지 못하는 가오씨가 줄곧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등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기 때문. 하지만 가오씨는 도시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식음을 전폐한 채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 자녀들의 안타까움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가오씨를 위해 자녀들은 앞서 그가 아내 진씨를 위해 계획했던 ‘금혼식’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생존한 6명의 자매와 웨딩드레스 대여 업체에서 근무하는 지인 1명까지 합세, 총 7명의 여성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아버지의 금혼식을 진행한 셈이다. 웨딩드레스 대여 업체 직원은 자매들이 진행하는 금혼식 사연을 접하고, 앞서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난 둘째 딸을 대신, 일곱 자매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이번 이벤트에 흔쾌히 참여한 것으로 전해졌다.이처럼 사망한 어머니 대신 여섯 딸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아버지 가오씨의 금혼식을 진행한 사연은 곧장 중국 전역에 공개되며 큰 이목이 쏠렸다. 현지 동영상 공유 플랫폼 ‘더우인’(抖音)을 통해 번진 해당 영상에 대한 화제성은 동영상 열람 수 1억2000건, 좋아요 9000만 건 등을 기록 중이다. 특히 영상 속에는 사별한 아내를 위해 턱시도 차림으로 금혼식에 참여한 남편 가오씨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담겨있다. 이를 본 중국 네티즌들은 “하늘이 갈라놓은 인연을 자녀들이 다시 이어준 가슴 따뜻한 사연”이라면서 “15초 남짓한 짧은 영상물을 보고 같이 목놓아 울음을 터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번 금혼식 이벤트를 기획한 가오씨 부부의 장녀 가오링씨는 “어머니와 사별하신 후 평소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내시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크게 울고 웃는 시간이었다”면서 “평소 감정 표현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사별 이후 멍한 모습을 보이거나, 심한 경우 정신을 잃고 앓아눕는 일도 잦았다. 이번 이벤트를 통해 자매들이 처음으로 자식으로의 도리를 다한 것 같아서 기쁘다”고 말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왜그래 풍상씨’ 유준상, 종잡을 수 없는 전개에도 “갓준상”

    ‘왜그래 풍상씨’ 유준상, 종잡을 수 없는 전개에도 “갓준상”

    KBS2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에서 이풍상 역으로 열연 중인 유준상이 종잡을 수 없는 전개에 힘을 보태며 ‘갓준상’의 면모를 드러냈다. 지난 27일 방송한 ‘왜그래 풍상씨’ 29-30회에서는 간 이식 여부를 둘러싸고 풍상의 아내 간분실(신동미 분)과 동생 진상(오지호 분), 화상(이시영 분) 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이 와중에 풍상은 “나 때문에 싸울 거 없다”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여 시청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풍상의 간암 투병 사실을 알게 된 분실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이혼까지 결심했던 풍상의 진심을 깨닫고 다시 풍상의 곁으로 돌아왔다. 풍상을 지켜주고 위로하는 것은 물론 진상과 화상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진상은 자신을 정신병원에 넣은 풍상에게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화상은 본인의 간을 이식받으려고 풍상과 정상이 함께 간 검사를 계획한 것으로 오해하여 간 이식을 계속해서 거절했다. 이에 풍상은 “동생들 키운 것도 어쩌면 날 위해, 내 마음 편하자고 한 게 아닌가 싶어”라며, 간 이식을 해주지 않는 동생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간이고 쓸개고 다 내 줄 거라던 풍상의 말과는 달리 각자의 이유로 간 이식을 해주지 않는 동생과, 그런 동생들을 이해하는 동생 바보 풍상, 동생들이 아닌 다른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는 분실 등 예측 불가능한 전개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갓준상’의 진정성 넘치는 연기는 이풍상이라는 인물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며 ‘왜그래 풍상씨’에 힘을 보태고 있다. 중후반으로 치닫고 있는 ‘왜그래 풍상씨’가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KBS 2TV ‘왜그래 풍상씨’는 매주 수,목요일 밤 10시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아내의 맛’ 유상무♥김연지 “암 투병→결혼, 역경 뚫은 러브스토리”

    ‘아내의 맛’ 유상무♥김연지 “암 투병→결혼, 역경 뚫은 러브스토리”

    대장암을 함께 이겨낸 개그맨 유상무가 작곡가 김연지와 TV조선 ‘아내의 맛’에 전격 합류, 4년 만에 방송에 복귀한다. 유상무는 지난 2004년 KBS 19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후 KBS2 ‘개그콘서트’에서 활약했고, 장동민, 유세윤과 함께 ‘옹달샘’으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이후 다채로운 방송활동을 하던 중 2017년 3월, 청천벽력 같은 대장암 3기 판정으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김연지는 작곡가로서 유상무의 디지털 싱글 ‘녹아버린 사랑’, ‘얼마나’, ‘잘못했어요’ 등을 공동 작사-작곡하며 유상무와 인연을 맺었다. 이와 관련 유상무♥김연지는 26일 방송되는 ‘아내의 맛’ 36회에 첫 출연, 매일 더 건강하게 사랑하고자 열심인 5개월 차 신혼 라이프를 공개한다. 유상무는 2017년 대장암 판정 이후 같은 해 4월 수술을 마쳤고, 2018년 8월까지 항암치료를 받으며 회복에 전념했다. 현재는 정기검진을 받으며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 유상무♥김연지 부부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느꼈던 심경 및 항암치료 종료 2개월 후 2018년 10월 웨딩마치를 올리기까지의 결혼 비하인드를 풀어내 스튜디오에 뭉클한 감동과 잔잔한 웃음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유상무는 ‘뼈그맨’이 ‘사랑꾼’으로 변신하는 달콤한 새신랑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더욱이 이날 방송에서는 남편 유상무를 위한 특급 식단을 마련하는 김연지의 모습도 시선을 모았다. 김연지가 항암 치료 후 운동만큼이나 중요한 식습관 개선을 위해, 시중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꼬박꼬박 공수, 하루도 빠짐없이 식탁에 올리는 ‘열정 와이프’의 모습을 보여준 것. 과연 맛과 건강까지 한 번에 잡아 주는 유상무를 위한 ‘비장의 식재료’는 무엇일지, 남편을 위해 사랑을 꾹꾹 담아 차려주는 김연지의 밥상과 5개월 차 신혼부부의 건강한 일상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제작진은 “정말 쉽지 않은 역경을 뚫고 결혼에 성공한 유상무♥김연지 부부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꽁냥꽁냥한 신혼일지를 보여줄 예정”이라며 “그동안 SNS에서만 소식을 접했던 화제의 주인공, 유상무♥김연지 부부가 직접 스튜디오에 등장해 가슴 따뜻한 결혼식 비하인드와 건강한 식탁을 선보일 예정이니 많은 기대 바란다”고 전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은 오는 26일 화요일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별책부록’ 이종석♥이나영, 달콤한 첫 입맞춤 “참아지지 않는 날”

    ‘별책부록’ 이종석♥이나영, 달콤한 첫 입맞춤 “참아지지 않는 날”

    ‘로맨스는 별책부록’ 이나영과 이종석이 달콤한 첫 입맞춤으로 ‘진짜’ 로맨스의 시작을 알렸다. 지난 24일 방송된 tvN 토일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연출 이정효, 극본 정현정, 제작 글앤그림) 10회는 케이블, IPTV, 위성을 통합한 유료플랫폼 시청률에서 가구 평균 5.8% 최고 6.4%를 기록하며 케이블과 종편을 포함한 동시간대 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tvN 타깃인 남녀 2049 시청률도 평균 3.9%, 최고 4.5%를 기록하며 케이블과 종편 포함해 동시간대 1위를 차지,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 (유료플랫폼 전국기준/ 닐슨코리아 제공) 이날 차은호(이종석 분)는 강단이(이나영 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더는 사랑을 숨기지 않는 차은호 앞에 강단이도 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강단이와 차은호의 마음이 한 곳에서 만난 것. 서서히 차오르던 감정은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순간, 더 짜릿한 설렘을 선사했다. 강단이는 차은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란스러운 강단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은호는 목걸이와 꽃다발만 남긴 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강병준 작가와 관련된 차은호의 사정을 모르는 강단이는 내내 그를 기다리며 애를 태웠다. 연락조차 되지 않던 차은호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강단이. 차은호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차은호를 향해 달려가는 강단이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강단이의 변화는 설렘을 자아냈다. 차은호는 더 이상 마음을 속이지 않고 강단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처럼, 누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모른다”는 그를 보며 강단이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마음을 들켜 솔직하게 고백하는 순간에도 차은호는 여전히 강단이가 먼저였다. “좋아해. 그런데 억지로 몰아붙일 생각 없다. 누나는 지금처럼 했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그의 말은 강단이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따뜻한 배려였다. 강단이를 좋아하는 동안 힘들지 않았다며, 인생을 건 사랑도 아니라고 자신의 마음을 낮추는 차은호의 사려 깊은 고백은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겼다. 한편 지서준(위하준 분)의 강단이를 향한 직진도 계속됐다. 그러나 차은호의 마음을 알게 된 강단이는 평소처럼 지서준을 대할 수 없었고, 그와 있는 동안에도 내내 차은호를 생각했다. 지서준이 손가락을 베였을 때도 강단이는 가방에 있는 밴드를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차은호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이런 강단이의 변화를 눈치챈 차은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늘 깊은 곳에 마음을 눌러왔던 차은호. 그는 “가끔 오늘 같은 날이 있어. 참기가 어려운 날, 참아지지 않는 날”이라며 강단이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심장을 간질이는 첫 키스는 또 한 번의 ‘심쿵’ 엔딩을 그려냈다. 조심스럽게 감정을 쌓아온 강단이와 차은호의 챕터는 입맞춤과 함께 ‘진짜’ 로맨스 챕터로 나아갔다. ‘은단커플’의 달콤한 입맞춤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설렘을 예고했다. 무엇보다 강단이의 마음이 천천히 차은호에게로 향하는 과정은 설렘을 자극했다. “그 사람 마음이 내 마음이 있는 곳에 걸어올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차은호의 사랑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강단이의 변화도 차은호와 같았다. 계절처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차은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바람 잘 날 없는 ‘겨루’의 일상도 여전했다. 모두가 책 한 권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뛰어다녔다. 밤새 인쇄소에서 스티커 작업을 한 사고뭉치 신입 오지율(박규영 분)의 성장기도 뭉클했다. 차은호의 냉철한 조언에 그제야 판권면에 적힌 이름의 무게가 오지율에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강병준 작가와 차은호의 관계도 드러났다. 차은호는 강병준의 제자였던 것. 아버지처럼 따르는 강병준을 위해 세상의 비난과 추측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차은호였다. 강병준이 왜 세상에서 사라져 홀로 투병 중인지, 그의 비밀이 불러올 파장이 궁금해진다. tvN 토일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매주 토,일요일 밤 9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로맨스는 별책부록’ 위하준, 따뜻 위로 전하는 어른美 “신개념 서브남”

    ‘로맨스는 별책부록’ 위하준, 따뜻 위로 전하는 어른美 “신개념 서브남”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위하준이 보는 이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하는 힐링남의 매력을 발산하며 주목받고 있다. 이나영에게는 마음 편히 고민을 들어주는 남사친으로, 정유진에게는 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을 알아 봐주는 멋진 파트너로, 암투병중인 엄마에게는 세상 따뜻하고 든든한 아들로 다가가는 지서준의 모습이 그려졌다. 위하준은 tvN 토일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지서준을 각기 다른 색깔의 감정 톤과 눈빛으로 섬세하게 변주하며 한층 깊어진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동안 위하준은 동네친구에서 썸남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직진남의 모습으로 이나영과 훈훈한 연상연하 케미로 여심을 설레게 하는가 하면, 이종석과는 강단이를 사이에 둔 신경전으로 티격태격하는 귀여운 브로맨스 케미를 보여줬다. 길에서 데려와 키우고 있는 개 ‘단비’와도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드라마의 또다른 재미를 만들어 냈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이 반환점을 돌면서 위하준이 연기하는 지서준의 존재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동안 지서준은 은단커플의 로맨스에 텐션을 UP시키는 활약으로 사랑과 원망 아닌 원망을 동시에 받아왔다. 그랬던 그가 고민에 빠진 단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며 진심을 담은 말로 은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큐피드 역할을 자처했다. “책을 읽는 사람인 단이씨 마음이 변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좋은 책은 그렇잖아요. 10살 때 읽은 책을 스무살에 읽어보면 완전히 다르잖아요. 우리가 달라졌으니까. . . 단이씨가 가지고 있는 그 책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단이씨가 달라졌을거에요. 아마도. 그 책을 읽는 단이씨의 마음이!“ 강단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강단이 은호에 대한 감정으로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일체의 사심을 담지 않고 진정성 있는 조언을 건냈다. 자신 앞에서 은호에 대한 감정을 늘어 놓는 단이를 질책하거나 모진 말로 상처주는 게 아니라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귀 기울여주고 어쩌면 자신에겐 불리할 수도 있는 조언까지 해주는 어른스러운 모습의 지금껏 본 적 없는 신개념 서브남의 면모를 보여주며 신선한 자극을 선사했다. 지서준의 또 다른 사연이 새롭게 등장했다. 비밀의 방을 통해 드러낸 강병준 작가와의 특별한 인연에 이어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암 투병중인 엄마의 이야기가 펼쳐진 것. 엄마가 좋아하는 작가 그림이 담긴 엽서를 건내고, 자신이 디자인한 책을 선물하며 다정 다감하게 대화를 나누는 세상 따듯한 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겨루 출판사와 디자인 계약을 위해 해린과 만나는 모습에서도 일에 있어 까칠하고 예민하지만,일에 대한 열정 가득한 그녀의 모습을 따듯하게 바라 봐 주고, 바로 마음을 열고 곁을 내어주며 따듯한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이처럼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언제나 진심을 다하고 상대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 볼 줄 아는 지서준의 모습을 결을 달리하는 표정 연기와 눈빛, 목소리로 담아내며 캐릭터의 매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 위하준의 연기가 회를 거듭할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 한편 예고를 통해 이종석, 이나영에 이어 겨루와의 계약으로 인해 정유진과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 내용이 펼쳐져 앞으로 이들 세 사람과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지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늘(24일) 밤 9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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