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쯔양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항소심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눈가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하늘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점화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91
  • [사설] 자오쯔양 사망과 중국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이 중국의 변화계기가 될지 주목한다. 중국은 13억 인구와, 경제발전으로 지구촌의 큰 손으로 욱일승천하고 있다. 정치·사회적 변화는 그들의 내정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역사발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국제사회가 중국에 대해 경제성장에 상응하는 정치·사회 발전을 이뤄 지구촌 발전에 더 기여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 무력진압에 반대했다가 실각했다. 중국의 경제개혁·개방을 이끌었던 그는 민주·법치제도의 실시까지 생각했다가 뜻을 펴지 못했다. 자오쯔양의 사망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과격시위가 벌어질까 걱정하는 중국 당국의 심경은 일견 이해가 간다. 중국의 현 체제가 흔들리거나, 혼란상이 빚어지는 것은 동북아 경제·안보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의 사망을 신화사통신만이 단신으로 알리고, 중국 국내 라디오나 TV보도를 통제하는 것은 대국답지 않다.CNN·NHK국제방송의 사망특집도 모두 차단했다니, 국제화·정보화 시대에 맞지 않는 조치다. 이렇듯 폐쇄적인 태도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제대로 치를지 의문이 간다. 중국은 자오쯔양의 장례식을 그의 격에 맞춰 치름으로써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 중국 지도부가 자신감을 보일 때 체제는 더 안정될 것이다. 인권과 정치·외교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제도와 태도를 갖춰가길 바란다. 한국 국회의원의 기자회견 저지와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갈등과 모순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
  • [오늘의 눈] 자오의 유산, 중국의 미래/이석우 국제부 차장

    자오쯔양(趙紫陽)이 톈안먼(天安門)사태로 공산당 총서기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1989년.16년 전 일이다. 자오의 실각으로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불리던 전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이후 이어지던 1980년대의 민주화 실험은 좌초하고 중국은 보수화의 길로 선회한다. 1978년 개혁·개방정책 채택 이후 상당한 정도로 확대되던 언론 및 집회·결사의 자유 등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뒷걸음질친다. 감시와 검열, 허가와 엘리트에 의한 지배 강화가 민주화 일정을 대신했다. 대표적 두뇌집단인 사회과학원이 민주화 동조세력으로 찍혀 철퇴를 맞고 ‘개조’의 수술대를 거쳤고 민주화에 동조적이던 베이징대학은 총장이 갈리고 학생들은 ‘사상무장’을 위한 1년간의 추가적인 군사교육으로 전교생이 1년씩 유급당하기도 했다. 자오의 실각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함께 이뤄나가겠다는 병행발전정책의 좌절을 의미했다. 대신 강제력에 기초한 ‘장쩌민(江澤民)의 권위주의체제’가 등장했다. 그 16년 동안 일사불란한 권위주의체제는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그 사이 중국은 3억 남짓한 부유한 연해지방과 9억을 넘는 내륙의 빈곤층으로 양분됐다. 공동체적 이상은 옛 이야기가 됐고 젊은 세대의 에너지는 상당부분 공격적 민족주의로 돌려졌다. 중국이 1990년대의 타이완처럼 집권당 내부의 분당과 사회적 성숙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주화에 이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중국 공산당도 권위적 체제의 한계와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의 개혁 필요성을 실감하면서 민주화의 확대를 긍정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이후 ‘민중과 함께’란 구호가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의 민주화 실험의 유산이 어떻게 중국 미래에 영향을 줄까. 지상의 마지막 스탈린주의국가 북한에 전범이 되고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석우 국제부 차장 swlee@seoul.co.kr
  • “자오熱 막아라” 인터넷도 통제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자오쯔양(趙紫陽·85) 전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을 둘러싸고 중국 네티즌들과 중국 당국 사이에 ‘숨바꼭질’이 한창인 가운데 자오 전 총서기의 장례 규모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7일 오전 9시9분쯤(현지시간) 관영 신화통신의 첫 사망 보도 이후 신화(新華), 시나(新浪·sina)와 써우후(搜狐), 첸룽(千龍)왕 등 유명 인터넷에는 네티즌들의 추모의 글이 쏟아져 나왔다. 네티즌들은 ‘진정한 민주 전사, 실사구시의 인물’,‘때를 잘못 만난 비운의 정치가’,‘곧은 성격 때문에 최고지도자에 오르지 못한 인물’ 등으로 평가하며 자오의 생애를 기렸다. 하지만 사전 보도통제의 지침을 받은 듯 중국 당국은 곧바로 네티즌들의 대글들을 완전히 삭제했다. 중국 당국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자오의 사망 소식이 중국 대륙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방송과 신문에 이어 인터넷까지 통제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오쯔양 전 당총서기의 장례 절차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 소식통들은 “관계 당국자들이 현재 사회단체나 정치단체 지도자들과 만나 자오 전 총서기에 대한 장례식 수준 등을 놓고 협의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홍콩의 명보(明報)는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중국 지도부는 자오쯔양 장례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으나 내부 행사의 소규모 장례식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oilman@seoul.co.kr
  • 중국에 배달된 한국신문 자오쯔양 기사 잘려나가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는 한국의 일간신문 정기구독자들에게 18일 배달된 신문에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관련 기사가 모두 찢겨져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오후 5시 30분께 주중 한국대사관에는 한국 주요 일간지의 자오 전 총서기 사망 관련 분석기사가 실린 면이 통째로 잘려져 나간 신문이 배달됐다. 비슷한 시각 우리은행 베이징지점에 배달된 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고 LG전자, 포스코 등 기업체의 경우도 국제면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신문이 전해졌다. 훼손된 신문은 10여개의 중앙 일간지로 알려졌다. 잘려나간 면은 모두 자오쯔양 실각과 관련이 있는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문제 등 중국 지도부가 민감하게 여기는 분석 또는 해설 기사가 실려 있다. oilman@seoul.co.kr
  • [자오쯔양 사망] 정치·사회안정… 89년 재연 없을듯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통한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무력진압 지시에 맞서다 권력에서 축출된 그는 중국 인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인물이다. ‘보다 빠르고 보다 폭넓은’ 개혁·개방과 민주화를 추진했던 그의 죽음이 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89년 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 사망 직후에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재연시킬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관영 신화사가 이날 자오의 사망을 확인하면서도 “자오쯔양 동지 사망 기사는 신문에 제공된 것으로, 국내 라디오와 TV는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은 당 지도부의 정치적 부담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 지도부의 이같은 결정은 톈안먼 사태의 내재적 폭발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16년전 사태 발생의 배경이 됐던 당 관료들의 부정부패, 중앙과 지방의 대립, 빈부격차, 도농간 불균형 발전 등의 문제는 여전히 중국 사회의 주요 현안이기 때문이다. 홍콩의 중국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 소장인 프랭크 루(盧四淸)는 자오의 사망이 중국 민주화와 정치개혁의 촉매역할을 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자오 전 총서기 추모 활동이 사회 동요와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으며 앞으로 이틀동안이 관건”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많은 중국 전문가들은 자오의 사망에도 불구, 중국 사회의 안정성이 유지될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다. 홍콩의 시사평론가 류루이사오(劉銳紹)는 “자오 전 총서기는 이미 정계에서 떠난 지 15년이 넘었고 최근 중국의 정치 기류와 사회형태도 1980년대와 달리 안정적”이라고 설명했다. 톈안먼 사태 당시와 달리 시위를 주도할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홍콩의 민주화 단체들은 곧바로 자오와 톈안먼 사태의 역사적 재평가를 촉구했다. 홍콩 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支聯會)는 이날 성명을 내고 “중국 정부가 자오에 대한 공정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물론 톈안먼 사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후진타오(胡錦濤)의 4세대 지도부가 집권하면서 다소의 변화도 보인다. 당초의 ‘반혁명 폭란(暴亂)’ 규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발생한 정치풍파(春夏之交的一場政治風波)’라는 시각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oilman@seoul.co.kr
  • [자오쯔양 사망] 실용노선 외길… 中개혁 ‘야전사령관’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가 17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오 전 총서기는 이날 오전 7시1분 베이징(北京) 시내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병인 호흡기와 심혈관 질환으로 숨졌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실각 이후 가택 연금돼온 자오 전 총서기는 결국 16년 만에 역사적 재평가는 물론 복권도 이루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자오쯔양의 사망으로 홍콩과 서방을 중심으로 톈안먼 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요구가 제기되고 있지만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한 중국 당국의 평가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그의 85년 삶에는 중국 현대사의 비극과 권력투쟁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허난(河南)성 화(滑)현 출신으로 중학 중퇴의 학력을 딛고 최고 권좌인 당 총서기에 올랐지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무력진압을 지시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리펑(李鵬) 총리 등 강경파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다가 ‘당을 분열시켰다.’는 죄목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해 5월19일 새벽 비가 뿌리는 톈안먼 광장을 찾아가 눈물로 학생들의 시위 해산을 호소한 것이 TV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학생 제군들은 아직 젊다. 살아서 중국의 4대 근대화를 실현하는 날을 직접 보아야 한다.…”는 간곡한 설득 장면은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각인돼 있다. 자오의 생애는 실각→복권→출세가도→실각이 반복되는 극적인 인생으로 점철된다.1967년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됐다 4년만인 1971년 네이멍구 자치구 당서기로 복권, 폭넓은 실용주의를 익힌다.75년 쓰촨(四川)성 당서기 시절 ‘식량을 원하면 자오쯔양을 찾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농업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가 도입한 자유시장의 일종인,‘가정생산청부제도(家庭生産請負制度)’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는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정치국위원, 상무위원, 부총리, 총리로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덩샤오핑의 전폭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80년 총리,87년 당총서기에 올라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오른팔로서 개혁·개방의 ‘야전 사령관’으로 맹활약했다. 천윈(陳雲)과 리셴녠(李先念) 등 당 보수파들의 치열한 견제 속에서 폭넓은 정치·경제개혁을 도입하는 등 고도성장의 레일을 깐 인물로 통한다. 덩샤오핑은 평소 ‘하늘이 무너져도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는 말로 각별한 신임을 표현했지만, 결국 ‘톈안먼 사태’의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실각 이후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王府井) 부근 자택에서 연금생활에 들어간 그의 ‘자유’를 위해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홍콩과 서방을 중심으로 연금해제를 촉구하는 서한은 100만통을 넘었고,1998년에는 홍콩 인권단체에 의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여행이 허가된 그는 베이징 인근의 순이(順義) 골프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말년에는 홍콩과 서방언론 사이에서 사망설이 제기되는 등 온갖 풍설을 겪었고 결국 “6·4운동은 재평가될 것”이라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oilman@seoul.co.kr ■ 자오쯔양 연보 ▲1919년 11월 허난(河南)성 화(滑)현 출생 ▲1932년 중학 중퇴후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가입 ▲1938년 중국공산당 입당 ▲1948년 위어(予鄂)지구 당위원회 서기 ▲1951년 광둥(廣東)성 인민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토지개혁 주도 ▲1956년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 ▲1963년 광둥성 제1서기 겸 당 중앙 중남국 서기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숙청 ▲1971년 복권 ▲1975년 쓰촨(四川)성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으로 농업진흥과 기업자 주권확대에 현저한 성과 거둠 ▲1980년 당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및 국무원 총리 ▲1987년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임 ▲1988년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임 ▲1989년 5월19일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농성중인 학생들 방문, 너무 늦게 온 것 사과. 마지막 공식행사 ▲1989년 6월24일 6·4 톈안먼 사태 때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청, 공직 박탈당한 채 연금조치 ▲2005년 1월17일 지병으로 베이징에서 사망
  • [자오쯔양 사망] 서방·홍콩언론 “재평가 이뤄져야”

    17일 베이징과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들은 자오쯔양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소식에도 별다른 동요없이 평온을 유지했다. 중국 정부는 소요사태를 우려해 언론보도를 통제하는 등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서방과 타이완·홍콩 언론들은 그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사태와 자오 전 총서기에 대한 재평가를 촉구했다. ●중국, 외국방송·인터넷통제 중국 정부는 중국내 TV와 라디오에 보도금지 지시를 내린 데 이어 CNN과 NHK의 특집방송을 차단했다. 대표적 인터넷사이트 신랑왕(Sina.com)은 대글을 달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반체제 인사들은 장례식을 공식행사로 치르고 업적을 재평가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톈안먼시위를 주도했던 왕단(王丹)은 타이완 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오 전 총서기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드물게 양심과 지식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애도했다. ●일본, 타이완 정상들 애도 일본 정부는 애도를 표하며 자오 전 총서기 사망을 계기로 중국이 민주화되길 희망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일ㆍ중 우호를 위해 진력한 분”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뤼슈롄(呂秀蓮) 타이완 부총통은 “자오 전 총서기가 추진하던 정치개혁을 완성하지 못해 중국의 정치 개혁이 지연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국 BBC방송은 자오의 개혁·개방정책이 중국 인민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렸다며 “그는 희망의 상징이었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민영TV TF1은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 편에 섰다 숙청된 자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쩡칭훙 부주석, 사망 전 자오 방문” 한편 쩡칭훙(曾慶紅) 중국 국가 부주석이 자오 사망 1시간쯤 전인 이날 오전 6시에 그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했다고 홍콩 인권ㆍ민주화정보센터가 가족들의 말을 인용해 밝혔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병문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中 ‘자오쯔양 사망설’ 부인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자오쯔양(趙紫陽·86)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설’이 신년 벽두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홍콩의 동방일보(東方日報)와 태양보(太陽報) 등 중화권 언론들은 11일 “자오 전 총서기가 지난 8일 베이징에서 호흡기 쇠약, 심장질환 등으로 사망했다.”고 전격 보도했다. 지난 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실각한 자오의 사망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중국정치에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타이완 중앙통신과 중화권 인터넷 매체인 둬웨이(多維)뉴스는 “자오 전 총서기는 아직 사망하지 않았으며 병세가 위독한 상태일 뿐”이라고 사망설을 일축했다. 설왕설래가 지속되는 가운데 사망설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은 자오의 딸인 왕옌난(王雁南·중국은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허용) 가디언경매회사 사장이다. 홍콩의 인권·민주화운동소식센터의 프랭크 루(盧四淸) 이사장은 “왕씨가 ‘아버지는 오래된 신병 때문에 한달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아왔다. 특별히 위중한 것은 아니다.’라고 전해왔다.”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 쿵취안(孔泉)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 브리핑에서 “자오 전 총서기는 병을 앓았으나 세밀한 치료를 받고 지금은 매우 안정된 상태”라며 사망설은 물론 위독설도 부인했다. 중국 소식통들은 자오쯔양 사망설이 수차례나 급속하게 퍼진 배경을 놓고 “중국 정부가 실제 자오 전 총서기가 사망했을 경우 발생할 소요 등의 파장을 줄이기 위해 소문 확산을 방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2003년 4월 일본 교토통신 등 일부 외신들은 자오쯔양 사망설을 보도했으나 모두 오보로 확인됐다. 자오쯔양 사망설이 꼬리를 무는 것은 ‘톈안먼 사태’가 함축하고 있는 폭발력 때문이다. 허난(河南)성 화셴(滑縣) 출신의 자오는 89년 6·4 사태 당시 무력진압을 지시했던 덩샤오핑(鄧小平) 최고지도자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다가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축출됐다. 광범위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등 사회불안 요소가 만연된 상황에서 자오는 민주화의 기수로서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자칫 저우언라이(周恩來)나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이 몰고왔던 중국 정치권의 지각변동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oilman@seoul.co.kr
  • “中 인력난… 저임금 경쟁력 퇴색”

    풍부한 값싼 노동력이라는 중국 경제의 최대 장점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예상보다 빨리 닥친 임금 인상과 인력난으로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은 물론 중국기업들도 노동력이 풍부한 베트남이나 양쯔강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호에서 보도했다. 광둥성 둥관시에서 전선공장을 운영하는 타이완 기업가 웡은 “필요 인력의 절반 정도만 확보해도 다행”이라고 인력난을 털어놓았다.광둥성은 중국 전체 수출의 3분의1을 차지한다.외국기업들이 다수 입주해 있는 둥관시는 광둥성 전체 수출물량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요지이지만 현재 약 27만명의 인력이 부족한 상태다.중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광둥성 전체로는 약 200만명의 일손이 모자란다. 노동력 부족현상은 외국기업들의 생산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광둥성이 가장 심각하지만 연안을 따라 상하이 남쪽의 저장성까지 사정은 비슷하다.푸젠성의 취안저우시도 지난해 20만명의 인력이 부족하다며 대책을 촉구했었다.인력난은 임금인상으로 이어졌고,임금을 둘러싼 노사분규도 급증했다.지난 6일에는 3000명의 공장근로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선전시내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약 1억 5000만명의 농촌 유휴인력이 있는 중국이 구인난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줄고 있기 때문.아직도 거주이전의 자유에 대한 규제가 강해 농촌 출신들에게는 여간해서 도시 거주증이 발급되지 않는다.도시거주증이 없으면 사회보장 및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정착하지 못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올들어 농산물 가격이 오르면서 농가 수입이 늘자 농촌에 주저앉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잡지는 전했다.또 농촌 인구가 광둥성 등 연안지역에 비해 최저임금이 많고 의료보험 등 혜택이 주어지는 내륙의 양쯔양 지역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례도 많다.둥관시에 입주한 공장들은 이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임금을 올려주거나 생산 자동화율을 높이든가,아니면 이전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장쩌민 전격퇴진] 장쩌민은

    [장쩌민 전격퇴진] 장쩌민은

    19일 중국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사임한 장쩌민(江澤民)은 1989년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에 오른 뒤 15년 간 중국의 1인자 자리를 지켜온 인물이다. 1926년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살이던 46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이듬해에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 전기과를 졸업했다. 55년 옛 소련의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1년 동안 자동차기술을 공부한 뒤 돌아와 자동차공장 공장장,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치며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그가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85년 7월에 상하이(上海) 시장이 된 것이었다.그는 상하이시를 중국 최고의 경제ㆍ금융 중심지로 발전시키며 시(市) 당서기로 승진했고 다시 그 공로를 인정받아 87년 공산당 정치국원에 당선됐다. 춘제(春節) 때마다 상하이에 들르던 당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얼굴 알리기를 게을리하지 않던 그는 89년 6월 정치국 상무위원에 당선됐다.곧 이어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당총서기가 실각하면서 당 총서기에 임명됐다.당의 원로들은 그가 상하이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를 조기 진압한 사실과 공산당 간부의 자제들 모임인 태자당(太子黨) 출신이라는 점에서 개혁 성향이 강한 자오쯔양을 대신할 적임자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는 그해 11월 덩샤오핑이 맡고 있던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물려받았고 이듬해 4월에 국가군사위 주석직,93년 3월에는 국가주석까지 맡으며 당(黨)ㆍ정(政)ㆍ군(軍)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다. 장쩌민은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 부주석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준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3월 국가주석직을 이양했으며 이번에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겼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장쩌민 전격퇴진] 후진타오는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총명하면서도 온화하고 겸손하다는 평을 듣는 후진타오(胡錦濤·61) 주석은 일찌감치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江澤民)의 뒤를 잇는 중국 제4세대 지도자로 꼽혀 왔다. 그러나 후 주석은 린뱌오(林彪),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의 부침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후 주석은 1942년 12월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안후이(安徽)성 지시(績溪)현이며 어린 시절을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보냈다. 1959년 명문 칭화(淸華)대 수리공정과에 입학한 그는 1965년 졸업후 1968년까지 정치지도원으로 재직했으며 1966년 이후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에 참가했다. 간쑤(甘肅)성 건설위원 시절 간쑤성의 최고권력자 쑹핑(宋平) 당서기의 눈에 들어 승진가도를 달리다 쑹핑의 천거로 1982년 후야오방 총서기에 의해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지도자로 발탁됐다.그러나 태자당과의 갈등으로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좌천되기도 했다. 쑹핑은 당 원로들에게 후 주석을 제4세대 후계자로 추천했고 덩샤오핑은 1992년 제14차 당대회에서 후 주석을 장쩌민 이후의 지도자로 선정하고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했다. 후 주석은 1998년 3월 국가 부주석직에 오른 데 이어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직까지 차지,‘차세대 지도자’의 지위를 굳혔으나 장쩌민을 자극하지 않으려 정치적 언행을 극도로 자제하는 등 신중한 행보를 보여 왔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개혁보다 안정적인 개혁을 추구해온 후 주석의 과거행보를 들어 향후 행보도 획기적으로 달라지진 않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강인한 성격과 국수주의적 성향,중화패권주의 지향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지적이다. oilman@seoul.co.kr
  • [차이나 리포트 2004] (3)경제를 보는 두 시각

    [차이나 리포트 2004] (3)경제를 보는 두 시각

    중국은 논쟁의 나라다.역사적으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으며 근대화 과정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와 자본주의자들간의 논쟁이 치열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이 퇴장한 지금 또 하나의 논쟁이 불 붙고 있다.아직은 서구 자본주의로 무장한 학자들간의 논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그러나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태동하는 조짐도 보인다.역사학계의 ‘동북공정론’과 국제정치학계의 ‘다극화론’은 ‘중화민족주의’의 반영이다.경제학계의 ‘긴축 논쟁’도 그 뿌리는 이런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다. 중국 정부는 과거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학자들간에 논쟁을 유도했고 논쟁에서 정리된 결론들을 정책에 반영했다.이번 긴축 논쟁은 향후 중국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에도 지난 2001년 주식시장 논쟁과 마찬가지로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우징롄(吳敬璉)과 베이징대학의 리이닝(勵以寧) 교수가 양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이들은 모두 덩샤오핑(鄧小平)사단의 개혁파 그룹에 속하며 중국 경제학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논쟁의 핵심은 긴축의 강도와 정부의 시장개입 여부다.지난 2001년의 주식시장 논쟁에서는 중국 정부가 우징롄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우징롄이 판정승을 거둔 바 있다. ●긴축을 지지하는 관방학자들 중국정부의 긴축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곳은 정부 연구기관인 국무원발전연구중심과 사회과학원이다.사회과학원의 판강(樊綱)은 “중국경제가 이미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경기과열로 들어섰으므로 정부가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그는 철강,에너지 등 일부 원부자재의 병목현상이 너무 심각하므로 현재의 투자과열을 진정시켜야만 물가상승 압력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징롄은 판강과 같이 정부의 시장개입에 동의하면서도 물가상승보다는 부동산,주식시장의 거품을 더 우려하고 있다.이들은 모두 “정부가 경기과열을 계속 방치하면 심각한 시장주의의 오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학계는 정부의 시장개입에 비판적 반면,상당수의 학자들이 이번에 정부가 시장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며,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는 중국의 시장기능이 긴축 조치로 다시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리이닝 베이징대 교수는 현재의 중국경제 상황을 ‘정상적인 경기순환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중국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경기침체이지 경기과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해외유학파의 대표주자격인 후쭈류(胡祖六) 골드만삭스 중국 지사장 역시 “개도국인 중국경제가 9∼10% 성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며,현재 중국경제는 결코 과열상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다만 현재의 부동산시장과 자동차산업은 문제가 있으므로 이들 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선별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홍콩대학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장우창(張五尙) 교수도 “현재의 상황을 결코 통화팽창이라고 볼 수 없다.”며 정부의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반대하고 있다. ●정부 부처간에도 입장 달라 경제부처들도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통화관리 주무부처인 중국인민은행은 현재 통화팽창 압력이 있으므로 이를 해소할 정부의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국가발전개혁위원회(한국의 재정경제부)와 국가통계국은 약간 다른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국가통계국은 최근의 소비자 물가상승 추세가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보고 지나친 통화긴축이 기업에 어려움을 줘 경기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국가발전개혁위원회 산하의 거시경제연구원도 현재 거시경제지표들이 합리적인 수준내에 있으므로 지나친 긴축은 필요치 않다는 시각이다. 정부 안팎에서 이처럼 경제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어 당분간 중국정부가 초강력 긴축 수단을 동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금리 인상을 하더라도 그 폭은 소폭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베이징 이문형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mhlee@kiet.re.kr ■ 경제 움직이는 싱크탱크들 중국의 대표적 싱크탱크로 국무원발전연구중심(DRC)을 들 수 있다.1981년 경제개혁을 담당할 인재와 정책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국무원 산하에 독립된 기관으로 설립하였다.기관장은 장관급으로 책정되어 있다.자오쯔양(趙子陽) 전총서기의 브레인이었던 마홍이 장기간 주임으로 있었으며 현재는 왕멍쿠이(王夢奎)가 주임으로 있다. 성장,고용,지역발전,농촌,산업,국제경영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중국 개혁정책 성공의 최대 공로자중 하나이다.전체 연구원 직원은 700여명,그중에서도 박사급 연구원은 200여명이며 대표적 연구원으로 우징롄(吳敬璉)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국무원 산하 학술기관으로 사회과학원이 있다.국무원발전연구중심이 정책수단 개발을 주 임무로 맡고 있는 반면,사회과학원은 이데올로기 개발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최근 국내에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주역들이 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들이다.대표적 경제학자로 초창기 개혁멤버중 하나인 류궈광(劉國光)을 들 수 있다. 중국은 각 부처별로 정책연구를 보좌하는 연구기관들을 내부에 두거나 또는 외부 독립기관으로 두고 있다.대표적 연구기관으로 중국 핵심 경제부처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거시경제연구원,상무부의 국제무역경제합작연구원(1997년 설립),중국인민은행 산하의 금융연구소(1956년 설립)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와 미국 등 해외에서 유학한 고급 두뇌들이 대학으로 들어오면서 대학의 정책연구기능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과 칭화대학 경제연구중심 등이 대표적 대학 부설 연구기관들이다.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중심은 1994년 설립되었으며 리이닝,리이푸(林毅夫) 등이 대표적 학자이다. ■ 경제학계 주류·비주류 중국 경제학계의 주류는 극좌인 마오쩌둥 사상을 버리고 극우인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하고 있다.지난 20여년간 개혁정책으로 인해 상하이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듯 경제학계에도 버금가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부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주류 학자들 중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이들은 연령층으로는 개혁 초창기 세대인 70대와해외유학파인 30대가 주력을 이루고 있다.중국내 정부나 기업 등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40대와 50대 연령층이 없다.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문을 닫음으로써 이 기간에 학교를 다녀야 했던 40대와 50대가 정규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국무원발전연구중심 등 개혁후 새로 설립되어 보수가 좋은 정부 연구기관이나 대학,증권기관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개혁정책의 이론을 제시하고 구체적 정책수단들을 개발하고 있다. 실제 개혁정책을 만들고 그리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중국내 신흥 화이트 칼라층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평보다는 효율을 주장하며,정부의 개입보다는 시장기능을 중시한다.규범경제학보다는 실증경제학을 선호하고 국제무역에 있어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있다. 소유제에 있어서는 사유제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고 있으며,국유기업의 ‘철밥통 근로자’들을 ‘노동귀족’으로 간주하며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 경제학 남용에 반대하는 비주류 학자들 대표적 비주류 경제학자로는 쭤다페이(左大培,사회과학원),리우리췬(劉力群,국무원발전연구중심),양빈(揚斌,廈門大) 등을 꼽을 수 있다.이들은 서구식 자본주의 경제학의 지나친 남용과 재벌 학자들의 부패를 반박하면서 ‘경제학 정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 지금은 상당한 세력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최근 다시 대두되고 있는 중화사상과 개혁정책의 부작용에 따른 사회적 불만을 배경으로 생겨난 학파이다. 이들은 신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을 옹호하고,보호주의와 산업구조 고도화 정책을 지지한다.다국적기업과의 협력에는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고 민족기업을 적극 지지한다. 대체로 50대 전후의 세대로 민족관이 뚜렷하다.노동자와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삼아야 하며 민생주의에 입각한 지역간,계층간 소득격차를 해소하는 데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문형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mhlee@kiet.re.kr
  • [차이나 리포트 2004] (3)경제를 보는 두 시각

    중국은 논쟁의 나라다.역사적으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으며 근대화 과정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와 자본주의자들간의 논쟁이 치열했다.마르크스주의자들이 퇴장한 지금 또 하나의 논쟁이 불 붙고 있다.아직은 서구 자본주의로 무장한 학자들간의 논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그러나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태동하는 조짐도 보인다.역사학계의 ‘동북공정론’과 국제정치학계의 ‘다극화론’은 ‘중화민족주의’의 반영이다.경제학계의 ‘긴축 논쟁’도 그 뿌리는 이런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있다. 중국 정부는 과거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학자들간에 논쟁을 유도했고 논쟁에서 정리된 결론들을 정책에 반영했다.이번 긴축 논쟁은 향후 중국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에도 지난 2001년 주식시장 논쟁과 마찬가지로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우징롄(吳敬璉)과 베이징대학의 리이닝(勵以寧) 교수가 양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이들은 모두 덩샤오핑(鄧小平)사단의 개혁파 그룹에 속하며 중국 경제학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논쟁의 핵심은 긴축의 강도와 정부의 시장개입 여부다.지난 2001년의 주식시장 논쟁에서는 중국 정부가 우징롄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우징롄이 판정승을 거둔 바 있다. ●긴축을 지지하는 관방학자들 중국정부의 긴축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곳은 정부 연구기관인 국무원발전연구중심과 사회과학원이다.사회과학원의 판강(樊綱)은 “중국경제가 이미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경기과열로 들어섰으므로 정부가 적극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그는 철강,에너지 등 일부 원부자재의 병목현상이 너무 심각하므로 현재의 투자과열을 진정시켜야만 물가상승 압력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징롄은 판강과 같이 정부의 시장개입에 동의하면서도 물가상승보다는 부동산,주식시장의 거품을 더 우려하고 있다.이들은 모두 “정부가 경기과열을 계속 방치하면 심각한 시장주의의 오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학계는 정부의 시장개입에 비판적 반면,상당수의 학자들이 이번에 정부가 시장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며,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는 중국의 시장기능이 긴축 조치로 다시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리이닝 베이징대 교수는 현재의 중국경제 상황을 ‘정상적인 경기순환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중국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경기침체이지 경기과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 해외유학파의 대표주자격인 후쭈류(胡祖六) 골드만삭스 중국 지사장 역시 “개도국인 중국경제가 9∼10% 성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며,현재 중국경제는 결코 과열상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다만 현재의 부동산시장과 자동차산업은 문제가 있으므로 이들 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선별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홍콩대학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장우창(張五尙) 교수도 “현재의 상황을 결코 통화팽창이라고 볼 수 없다.”며 정부의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반대하고 있다. ●정부 부처간에도 입장 달라 경제부처들도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통화관리 주무부처인 중국인민은행은 현재 통화팽창 압력이 있으므로 이를 해소할 정부의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국가발전개혁위원회(한국의 재정경제부)와 국가통계국은 약간 다른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국가통계국은 최근의 소비자 물가상승 추세가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보고 지나친 통화긴축이 기업에 어려움을 줘 경기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국가발전개혁위원회 산하의 거시경제연구원도 현재 거시경제지표들이 합리적인 수준내에 있으므로 지나친 긴축은 필요치 않다는 시각이다. 정부 안팎에서 이처럼 경제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어 당분간 중국정부가 초강력 긴축 수단을 동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금리 인상을 하더라도 그 폭은 소폭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베이징 이문형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mhlee@kiet.re.kr ■ 경제 움직이는 싱크탱크들 중국의 대표적 싱크탱크로 국무원발전연구중심(DRC)을 들 수 있다.1981년 경제개혁을 담당할 인재와 정책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국무원 산하에 독립된 기관으로 설립하였다.기관장은 장관급으로 책정되어 있다.자오쯔양(趙子陽) 전총서기의 브레인이었던 마홍이 장기간 주임으로 있었으며 현재는 왕멍쿠이(王夢奎)가 주임으로 있다. 성장,고용,지역발전,농촌,산업,국제경영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중국 개혁정책 성공의 최대 공로자중 하나이다.전체 연구원 직원은 700여명,그중에서도 박사급 연구원은 200여명이며 대표적 연구원으로 우징롄(吳敬璉)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국무원 산하 학술기관으로 사회과학원이 있다.국무원발전연구중심이 정책수단 개발을 주 임무로 맡고 있는 반면,사회과학원은 이데올로기 개발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최근 국내에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주역들이 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들이다.대표적 경제학자로 초창기 개혁멤버중 하나인 류궈광(劉國光)을 들 수 있다. 중국은 각 부처별로 정책연구를 보좌하는 연구기관들을 내부에 두거나 또는 외부 독립기관으로 두고 있다.대표적 연구기관으로 중국 핵심 경제부처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의 거시경제연구원,상무부의 국제무역경제합작연구원(1997년 설립),중국인민은행 산하의 금융연구소(1956년 설립)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와 미국 등 해외에서 유학한 고급 두뇌들이 대학으로 들어오면서 대학의 정책연구기능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중심과 칭화대학 경제연구중심 등이 대표적 대학 부설 연구기관들이다.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중심은 1994년 설립되었으며 리이닝,리이푸(林毅夫) 등이 대표적 학자이다. ■ 경제학계 주류·비주류 중국 경제학계의 주류는 극좌인 마오쩌둥 사상을 버리고 극우인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하고 있다.지난 20여년간 개혁정책으로 인해 상하이에 천지개벽이 일어났듯 경제학계에도 버금가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부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주류 학자들 중국의 주류 경제학자들,이들은 연령층으로는 개혁 초창기 세대인 70대와해외유학파인 30대가 주력을 이루고 있다.중국내 정부나 기업 등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40대와 50대 연령층이 없다.1960년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문을 닫음으로써 이 기간에 학교를 다녀야 했던 40대와 50대가 정규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국무원발전연구중심 등 개혁후 새로 설립되어 보수가 좋은 정부 연구기관이나 대학,증권기관 등에서 근무하고 있다.개혁정책의 이론을 제시하고 구체적 정책수단들을 개발하고 있다. 실제 개혁정책을 만들고 그리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중국내 신흥 화이트 칼라층이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평보다는 효율을 주장하며,정부의 개입보다는 시장기능을 중시한다.규범경제학보다는 실증경제학을 선호하고 국제무역에 있어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있다. 소유제에 있어서는 사유제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고 있으며,국유기업의 ‘철밥통 근로자’들을 ‘노동귀족’으로 간주하며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서구 경제학 남용에 반대하는 비주류 학자들 대표적 비주류 경제학자로는 쭤다페이(左大培,사회과학원),리우리췬(劉力群,국무원발전연구중심),양빈(揚斌,廈門大) 등을 꼽을 수 있다.이들은 서구식 자본주의 경제학의 지나친 남용과 재벌 학자들의 부패를 반박하면서 ‘경제학 정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 지금은 상당한 세력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최근 다시 대두되고 있는 중화사상과 개혁정책의 부작용에 따른 사회적 불만을 배경으로 생겨난 학파이다. 이들은 신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을 옹호하고,보호주의와 산업구조 고도화 정책을 지지한다.다국적기업과의 협력에는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고 민족기업을 적극 지지한다. 대체로 50대 전후의 세대로 민족관이 뚜렷하다.노동자와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삼아야 하며 민생주의에 입각한 지역간,계층간 소득격차를 해소하는 데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문형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mhlee@kiet.re.kr˝
  • 홍콩 민주화 시위 / 도전받는 1國2制 中의 선택은

    국가안전법 처리에 반대하며 연일 계속되는 홍콩 민주화 시위로 중국의 ‘1국 2체제’가 시험대에 올랐다.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수반인 둥젠화(董建華) 행정장관은 퇴진 압력을 일축하고 19일 베이징을 방문,후진타오(胡錦濤) 중국 당총서기 겸 국가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와 만나 대책을 협의한다.중국 당국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예단할 순 없지만 파장을 고려해 둥 장관의 퇴진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중국 지도부의 결정은 경제적 요충지로서 홍콩의 미래와 4세대 지도부의 성향을 파악하는 주요 잣대가 될 전망이어서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 민주화 시위 배경 홍콩 주권반환 6주년인 지난 7월1일 홍콩에서는 50만명이 홍콩의 소(小) 헌법격인 기본법 23조(국가안전법)의 입법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홍콩 정부가 중앙정부에 대한 어떠한 반란,국가 분열,반란 선동 등 행위를 금지하고 외국 정치 조직,단체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규정한 국가안전법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는 6년간 억눌려온 홍콩인들의 민주화 욕구를 폭발시켰다. 7일 둥젠화 장관이 국가안전법 처리를 늦추겠다고 발표했지만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9일과 13일에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면서 광범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확대됐다. 종교계와 학계·시민단체·야당은 물론 그동안 베이징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목소리를 낮춰온 경제계까지 “이대로는 안된다.”며 홍콩의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1국 2체제’하에 반환 이후 50년간은 ‘독립’을 보장한다는 영국과의 공동성명을 지키고 2007년과 2008년으로 각각 예정된 행정장관과 입법회(국회) 의원의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다.베이징이 앉혀놓은 행정장관과 베이징의 입김에 좌우되는 입법회 등 독립성이 결여된 현 정치체제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둥젠화 운명 퇴진 압력을 받고 있는 둥젠화는 사임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6년째 홍콩 행정장관을 지내고 있는 둥 장관은 17일 기자회견을 갖고 “홍콩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내가 그만둔다는 것은 비도덕적이며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라면서 “사임은 결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사임 압력을 일축했다.그는 대신 “지난 6년간 잘못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며 나에 대한 비판도 이해한다.”면서 앞으로는 여론에 더욱 귀를 기울이겠다며 새 출발을 다짐했다. 그는 그러나 국가안전법의 입법화는 홍콩 정부의 의무라고 전제하고 광범위한 여론수렴 등을 통해 시행해 나가겠다며 입법 강행을 시사했다. 둥젠화에 대한 지지도는 최근 35%로 곤두박질쳤다.둥 장관에 대한 지지도 하락에는 지나친 베이징 의존뿐 아니라 악화된 경제상황도 일조했다.지난 4∼6월 실업률이 8.6%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재정적자 확대로 4개월전 20년만에 처음으로 세금을 올렸다.300명의 사망자를 낸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 대한 대응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둥 장관의 처리를 놓고 고민에 빠진 베이징 당국이 그러나 당분간 둥을 퇴진시키진 않을 것이라고 중국 정부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중국 지도부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둥을 직접 홍콩 행정관에앉혔다는 점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그가 잔여임기 4년을 채우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3. 베이징의 고민 홍콩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독립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타이완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또 홍콩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당장은 아니지만 중국 본토에서도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이후 민주화에 대한 억눌려온 열망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다.급속한 경제성장의 여파로 높은 실업률과 부정부패,확대되는 도농간 소득격차로 사회 내부에 쌓인 불만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 정치 분석가들은 중국 관영 언론들이 7월1일 시위 이후 홍콩 상황에 대해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하지만 인터넷과 홍콩의 위성TV,하루에도 중국 본토와 홍콩을 오가는 수천명의 관광객들을 통해 홍콩 사태를 접한 중국인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고 홍콩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가 최신호에서 전했다. 일부에서는 홍콩 사태를 톈안먼사태 이후 중국 정부가 맞은 최대의 도전으로 보고있다.후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등 새 지도부가 민주화 요구를 허용할 지는 미지수다.홍콩의 한 민주화 세력은 원 총리가 1989년 당시 자오쯔양(趙紫陽)과 함께 톈안먼에 직접 찾아갔었다는 점을 들며 희망섞인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둥의 후임이 마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베이징의 최선책은 홍콩 사태를 국가안전법 문제로 국한시키고 민주화 요구 시위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홍콩문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홍콩 관측통들은 “완전한 자치를 요구하는 홍콩인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 한 베이징의 어떤 해결책도 홍콩 경제의 번영과 1국 2체제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김균미기자 kmkim@ 국가안전법 쟁점 ●반역죄 중국과 전쟁중인 외부 무장단체 가입이나 전복 기도,중앙 정부 위협 또는 축출 행위.중국에 나쁜 선입관을 갖게 하는 등의 이적 행위. ●국가전복 무력이나 중대 범죄를 통해 중앙정부를 전복하거나 위협하는 등 중국의 기본제도 파괴행위. ●분리운동 무력이나 중대범죄를 통해 중국의주권 일부를 분리하려는 모든 행위. ●폭동교사 반역이나 전복·분리를 자행하기 위해 타인을 의도적으로 교사하거나 교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폭동 교사 출판물 발간·배포하는 행위. ●국가기밀 절취 국가안보를 위협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국가기밀 불법 공표 행위.불법활동이나 권력남용·의무태만 등 중대범죄를 공표하더라도 공공이익 위한 것은 인정. ●단체불허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거나 범법행위 자행 목적 단체 불허.불법단체 회원가입·지원행위,집회 참석은 범법행위에 해당. ●법 적용 홍콩 영주권을 가진 중국 주민이 홍콩을 벗어난 지역에서 위반할 경우에도 적용.
  • 中 ‘자오쯔양 사망說’ 소동

    |도쿄 황성기·베이징 오일만특파원|“긴급:자오쯔양 전총서기 심장병으로 사망…”“긴급:자오쯔양 생존,요양중…” 30일 자오쯔양(趙紫陽·사진·83) 중국 공산당 전총서기 ‘사망설’을 놓고 한국과 중국,일본 3국의 언론기관은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오후 2시쯤 교도통신은 자오 전총서기가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긴급으로 올렸다.이어 3시간여 후 사망기사를 취소한다는 내용의 알림기사를 내보냈다가 다시 1시간만에 사망이 확실하다고 번복하는 등 혼란을 빚었다. 사망 소식이 처음 전해지면서 한국과 중국,일본의 특파원들은 곧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한국의 모 통신은 “베이징에 거주하던 자오 전총서기가 사스(SARS)를 피해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에서 요양중”이라고 중국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에서도 중국 공산당과 외교부 등에 확인작업을 했지만 “모르겠다.”는 애매 모호한 답변만을 들었다.사망설 진원지인 일본 언론과 정보기관도 숨가쁘게 움직였다. 우리의 국정원과 비슷한 일본 내각조사실은 “두가지(생존,사망) 정보가 다 들어와 있으나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유보 판정을 내렸다. 일본의 일부 석간신문은 초판에 교도통신 기사를 그대로 넣었다가 ‘생존설’이 흘러나오자 다음판에서 기사 전문을 삭제하는 해프닝도 벌였다. 일본의 J통신은 정확한 확인이 어렵고 자오 전총서기의 사망설과 생존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자 아예 두가지 기사 모두를 내보냈다. 반면 미국 언론들은 보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AP,CNN이나 로이터 등의 관계자는 “사실확인이 되지 않으니 우리도 답답하다.”는 반응이다. 결국 이번 자오 전총서기 사망설 소동은 중국 당국의 확인과 신화사 등 관영매체가 확인보도할 때까지는 안개속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 [씨줄날줄] 십자가論

    대북 송금 특검법 처리를 앞두고 ‘십자가론’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이 일반론으로 거론했다고 하나,특검법의 해법으로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말이 십자가론이지 희생양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확한 게 아닌가 싶다.‘십자가를 지게 한다는 것은 사실 어느 특정인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쓰도록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십자가론은 한국정치 문화가 안고 있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왕조가 바뀌거나,새 왕이 등극할 때면 늘상 있어왔던 일이다.전 정권과의 단절이나,대중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정자들이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활용해온 것이다.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조선조의 태종도 즉위하자 처가인 민씨 형제 4명을 모두 내쳐버리고,공신인 이숙번마저 귀양보내 민심을 얻었다. 우리 정치사에서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구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중국 천안문 사태 이후 자오쯔양(趙紫陽)의 실각 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친구이자 법률 부보좌관이었던 빈센트 포스터가 지난 1993년 워싱턴 정가와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권총 자살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낯선 아칸소주 출신 인사들의 워싱턴 입성을 완결짓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정치도 이제 직선으로 뽑은 4번째 대통령을 맞고있다.그러나 여전히 전근대적인 후진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새 정부 출범 때마다 전 정권과의 단절과 차별을 위해 십자가를 멘 희생양들이 줄을 이었다.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냈고,문민정부 때는 첫 공직자 재산공개로 전 정권 지도층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불러왔고,국민의 정부 때도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을 따지기 위해 경제청문회를 개최해 정책책임자를 구속했었다.표현과 내용이 약간씩 달라졌을 뿐,본질은 십자가론이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시중에는 ‘국민의 정부 실세들도 아마 구속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들이 나돌았었다.결국 ‘박지원’‘임동원’ 등의 이름이 특검이 시작하기도 전에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권력의 생리는 늘 같은 것인가. 양승현 논설위원 yangbak@
  • [피플 인 포커스] 리펑 상무위원장 퇴진

    |베이징 오일만특파원|보수파의 거두 리펑(李鵬·사진·75)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10일 전인대 상무위원회 업무 보고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장’으로 사라졌다. ●장쩌민 그늘서 영원한 2인자 영원한 2인자,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양자로서 혁명 원로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권력 핵심에 진입한 인물이다. 타이쯔당(太子黨)의 리더로서 보수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지난 83년 부총리에 오르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2년 뒤인 85년 당 정치국위원 및 중앙서기처 서기,4년 뒤인 89년 3월 총리로 격상된다. 이해 6월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당총서기의 뒤를 이어 1인자를 꿈꿨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중앙 무대에서 무명인사나 다름없는 장쩌민(江澤民) 상하이 당서기를 중앙에 불러들였다.리펑은 이후 15년 가까이 장 주석 밑에서 ‘2인자’로 만족해야 했다. ●톈안먼사태 이후 인기 내리막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일벌레’로 불리는 그는 90년대 내내 개혁·개방의 ‘속도 조절’을 외치며 ‘개혁파’와 대치,적지 않이 부작용을 막았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톈안먼 사태 당시 강경 진압을 주장,‘대학살’의 주범으로 인식되면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급격하게 인기를 잃었다. 최근까지 직계 가족들의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연류설이 끊이지 않는 등 잦은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16전대에서 자신의 심복 뤄간(羅幹)을 당 상무위원으로 추천,당 원로로서 보수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으로 관측된다. oilman@
  • 후진타오의 中國/ 쩡칭홍·원자바오

    ***부주석 쩡칭훙·총리 원자바오 유력 ■쩡칭훙 前조직부장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쩡칭훙 전조직부장은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의 그림자로 통한다.정치국 후보위원인 그가 이번 16대 전대를 통해 2단계나 뛰어올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것도 이런 배경이다.후진타오(胡錦濤·60)가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가 될 경우 후가 맡고 있는 국가 부주석과 당 중앙 당교(黨校) 교장,중앙 서기처 서기 등을 승계,2인자의 반열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후진타오를 견제하면서 장 주석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는 역할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쩡은 대표적인 태자당(太子黨)이다.아버지는 홍군(紅軍)의 원로인 쩡산(曾山)전 내정부장이다.이러한 부친의 군 인맥은 그에게 엄청난 자산이 됐다.중국 권력 핵심인 상하이방(上海幇)의 핵심으로,태자당의 실질적 리더로 떠올랐다. 이후 부친의 후광을 업고 84년 상하이(上海) 공산당 조직부 부부장으로 발탁돼 출세가도에 들어선다. 장 주석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5년이다. 장 주석이 상하이(上海) 시장으로 부임하면서다.이때부터 17년간 장의 최고책사로서 맹활약하게 된다.그가 당총서기에 오른 결정적 배경은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가 유혈사태에 휘말리지 않은 것이다.초기 단호한 대처가 주효했는데 막후에서 완벽한 정지작업을 수행했다. 장 주석의 일생일대의 권력투쟁이었던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당 서기와의 싸움에서도 쩡의 정확한 정세판단과 충고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략과 강력한 추진력을 무기로 14차 당대회(92년)와 15차 당대회(97년)에서 당 및 군부 실력자들을 무력화시켰다.주군(主君) 장 주석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이다. 하지만 쩡칭훙의 ‘빛나는’ 전공에도 그가 장 주석 이후 ‘홀로서기’가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권력투쟁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적을 양산했기 때문이다.16대 전대를 통해 권력 전면에 나서게 될 쩡이 장 주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원자바오 부총리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출신 배경이나 든든한 후원자 없이 4세대 권력 핵심에 오른 ‘실력파’로 꼽힌다.이번 16전대를통해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뒤를 이어 ‘경제 사령탑’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86년 왕자오궈(王兆國)의 후임으로 당중앙 판공청 주임 자리에 오른 뒤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장쩌민(江澤民) 등 3명의 당총서기를 보좌했다. 자신의 후원자인 후야오방이 87년 1월 덩샤오핑(鄧小平)의 미움을 사 실각할 때나 자오쯔양(趙紫陽)이 톈안먼사태로 퇴진했을 때도 굳건히 자리를 지킬 정도로 실력파다.87년 제13차 당대회 때 불과 47세의 나이에 당 중앙위원에 선출,출세가도를 달렸다. 후야오방 전 총서기 참모였던 우자샹(吳家祥)은 “원 부총리가 정직과 성실,근면의 미덕을 갖췄고 전문가로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인물평을 했다.소용돌이치는 중앙 정치무대에서 살아남아 최고 지도부에 오른 것도 이러한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다. 시련도 있었다.93년 장쩌민 총서기의 핵심 측근인 쩡칭훙에게 판공실 주임자리를 빼앗기고 한직으로 밀려났다.이 기간 중 당 재경영도소조와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기서 주룽지 총리와 인연을맺는다.이후 주 총리 밑에서 경제 후계자로서 실무를 익히게 되며 98년 주룽지 총리의 절대적 신임을 배경으로 부총리로 재기,실각을 예견했던 중국 관측통들을 놀라게 했다. 원자바오가 중앙무대에 얼굴을 내민 것은 76년 탕산(唐山) 대지진 때다. 대지진 직후 전문인력을 찾던 중앙정부는 베이징 지질학원 출신으로 지방에서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그를 발탁했다.천재지변이 그를 중앙무대로 이끈 것이다. oilman@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 ◆우방궈(吳邦國·61) 공업담당 부총리 장쩌민 국가주석의 핵심적인 지지기반인 ‘상하이방(上海幇)’의 선두주자중 한 사람으로 대표적인 기술관료.1992년 14기 전국대표대회(全大)에서 정치국원으로 승진,98년3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승승장구했다.내년 3월 차기 전인대에서 전인대 상무위원장이나 제1 부총리에 승진할 것으로 예상된다.상하이시위 상무위원으로 재직중이던 80년대 중반시장이던 장 주석과 ‘교분’을 쌓았다. ◆뤄간(羅幹·67) 당정법위원회 서기 리펑(李鵬)전인대 상무위원장의 ‘후계자’.이번 전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당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직을 맡을 것으로 점쳐진다.허난(河南)성 부성장 및 서기,노동부장 역임.15기 전대에서 정치국원에 임명됐다. 그가 상무위원이 되면 톈안먼(天安門)사태 재평가에 대한 기대나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세력의 입지가 약해지고 부패와의 전쟁도 한풀 꺾일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관측.톈안먼사태의 무력진압 책임과 가족의 부패로 지탄을 받는 리 위원장의 ‘수족’인 탓이다. ◆황쥐(黃菊·64) 전 상하이시 당서기 ‘상하이방’ 일원으로 중국 경제발전의 상징인 상하이 푸둥(浦東)개발의 주역.94년 정치국원에 진입,4세대 지도자중 한사람으로 급부상.80년대 중반 상하이시 부서기 재임 중 시장으로 부임한 장 주석과 인연을 맺었다.89년 톈안먼사태로 장 주석이 중앙으로 진출함에 따라 상하이 시장,당서기로 임명돼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자칭린(賈慶林·62) 전 베이징 당서기 국무원 기계공업부 출신의 경제 전문가.‘상하이방’과 함께 장 주석의 권력을 떠받들어온 ‘충복’.국무원 산하 기계공업부에서 근무하면서 장 주석과 평생의 정치적 인연을 맺었다. 85년부터 94년까지 푸젠(福建)성 부서기,성장을 거쳤다.푸젠성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베이징시장에 올랐다. ◆리창춘(李長春·58) 광둥(廣東)성 서기 후진타오 부주석과 쌍벽을 이루는 기록의 사나이.39세에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장에 선출돼 최연소 시장,42세 때는 랴오닝성 성장대행에 임명돼 최연소 성장 기록을 세웠다.97년에는 최연소 정치국원이 됐다. 선양시장 시절에는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기업에 대해 파산제를 도입,선양경제를 되살렸고,아시아 금융위기로 비틀거리던 광둥성의 금융구조 개혁을 단행,성공을 거둬 당중앙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김규환기자 khkim@ ■5세대 지도자들 ◆보시라이(薄熙來·52) 랴오닝성 성장 ‘포스트 후진타오 시대’를 이끌어갈 5세대 지도부의 선두주자.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의 맏아들로 논리정연한 언변과 훤칠한 외모로 인기를 얻고 있다.93년부터 2000년까지다롄(大連)시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다롄을 전국 최고 환경모범도시,외국인 투자유치 최우수 도시로 이끌어 당중앙의 신임이 두텁다. ◆시진핑(習近平·46) 푸젠(福建)성 성장 40대 중반으로 성장 연임에 성공,중앙정계 진입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설득력있는 화술과 온화한 성품이 주무기이다.오지인 샨시(陝西)성 옌촨(延川)현에 하방(下放)돼 고초도 겪었으나 혁명원로였던 부친 시중쉰(習仲勛)의 군대동료 겅바오의 비서로 일한 게 출세가도를 달리는 계기가 됐다. ◆리커창(李克强·47) 허난(河南)성 성장 베이징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중국 정계의 ‘샛별’로 통한다.98년 허난성부성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출세의 필수 코스로 불리는 공청단 제1서기직을 5년 동안 맡으면서 중국 정계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왕이(王毅·49) 외교부 부부장 일본 대리대사를 지낸 일본통으로 인재의 산실인 중국 외교부 내 ‘무서운’ 신예로 꼽히고 있다.지난 95년 아주사장(국장)에 올라 중국 외교부 내 최연소 국장으로 발탁됐다.문화혁명 후 시험을 거쳐 대학에 진학한 첫 세대로 일처리에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후진타오의 中國/ 茶상인 아들서 ‘13억 리더’로 우뚝

    중국공산당 16대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4세대 인맥이 전면 부상하고 있다.13억의 중국인을 다스릴 최고 권력이 장쩌민 주석 겸 당총서기의 3세대에서 후진타오로 대표되는 신진 세대로 이양되는 것이다.원로세대의 전면퇴진으로 특징지워질 이번 세대교체는 자본가의 입당으로 대변되는 ‘시장주의 공산당’을 이끌어가야 할 힘겨운 과제를 안고 있다.후진타오와 함께 중국공산당의 새 지도부를 구성할 주요 인물을 소개한다.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21세기 중국의 새 지도자로 떠오른 후진타오(胡錦濤·60).중국 지도부가 10여년간이나 공들여 키운 후계자지만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가난한 차(茶)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최고 지도자로 우뚝 솟은 후진타오의 정치철학과 인생관은 21세기 중국의 내일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일 것이다. ◆유연함 뒤에 숨은 강철 의지 1988년 10월,당시 중국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시기였다.후진타오가 당 서기로 있던 구이저우(貴州)성도 시위 물결에 휩쓸렸다.후야오방(胡耀邦) 당 총서기가 시위에 온건하게 대처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이후라 위기감을 느꼈다. 후 주석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진타오는 대규모 경찰을 배치한뒤 즉각 현장으로 달려갔다.경찰 진압에 앞서 최종적으로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함이다.살벌한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와 얼굴을 마주한 후진타오는 끝까지 인내심을 잃지 않고 이들의 주장을 경청했다.“시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나를 믿고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라.”며 설득,극적으로 사태를 반전시켰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 성난 호랑이 새끼들을 진정시킨 것이다.이 사건을 계기로 당은 후진타오에 대해 ‘돌발사건의 해결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88년 12월 28일,구이저우성 당서기로서 합격점을 받은 후진타오는 티베트로 달려가야 했다.독립 기운이 절정기에 오른 티베트의 당 서기로 발령을 내린 것이다.정치생명이 걸린,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은 후진타오의 숨겨진 진면목을 드러낸 사건이다.89년 3월5일,1만명의 승려들과 티베트인들이 수도 라사 거리를 점거,사태는최악으로 치달았다. 후진타오는 무장부대에 즉각 진압을 명령,총알 세례를 받은 시위대는 눈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됐다.당시 후진타오는 철모를 쓰고 진압을 진두지휘,우아하고 고상한 외모 아래 숨겨진 강철 의지를 드러냈다. ◆당 지도부의 모범생으로 후진타오는 42년 12월 상하이(上海)에서 가난한 차(茶)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아버지 후쩡위(胡增玉)는 안후이(安徽)성 출신이다.후는 4살 무렵 인근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는 7살 때 사망,어렵고도 힘든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타고난 성실성과 총명함으로 후진타오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남들보다 두살 어린 17살 때 명문 칭화(淸華)대 수리공정과(水利工程科)에 입학했다.하지만 착취계급(자본가)의 아류인 소업주(小業主)로 분류돼 일류학과의 꿈을 접는 아픔도 있었다. 대학시절 최우수 학생 그룹에 속했고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지부 문화선전대를 이끌며 사교춤과 노래를 즐기는 등 개방적 면모도 보였다.평생의 반려자인 류융칭(劉永淸)도 이 당시 만났고 졸업 직전인 65년 4월 공산당에 입당한다. ◆문화혁명 소용돌이 한발 비껴 서 대학을 떠나기 직전에 닥친 문화혁명(1966∼1976)은 그의 정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출신 성분이 소업주인 데다 칭화대 당위원회 간부였던 그는 보황파(保皇派)로 낙인찍혀 ‘화장실 청소’ 등의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그는 흥분하지 않고 냉철한 눈으로 문혁의 광풍(狂風)을 지켜보면서 소요파(消遙派·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집단)가 된다.그가 몇번의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자기 색깔과 계파를 드러내지 않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문혁기의 생생한 체험일 것이다. ◆쑹핑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로 68년 간쑤(甘肅)성 수력발전소 건설공사장으로 하방(下放)된 후는 힘든 노동일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성실함과 친화력으로 한 단계씩 승진을 거듭한다. 그러던 중 79년,후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정치적 스승’,쑹핑(宋平) 전 상무위원을 만난다. 당시 간쑤성 당서기로 있던 쑹핑은 성 위원회 설계관리처에서 일하던 후진타오의 브리핑을 받는다.‘간단명료하고 조리있는’ 후의 답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쑹핑은 자연스럽게 칭화대 후배인 후진타오를 주목하게 된다. 중앙무대로 진출한 쑹핑은 혁명 전우인 후야오방 당총서기에게 후진타오를 추천,82년 40살의 최연소 중앙위원이 됐고 후에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된 공청단 제1서기에도 오른다. ◆덩샤오핑이 차기 재목으로 점지 후진타오는 쑹핑과 후야오방의 정성어린 지원을 받지만 4세대 리더로서의 등극은 덩샤오핑의 점지로 이뤄진다.92년 봄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선 덩은 “혁명화,연소화,전문화의 표준에 의거해 덕망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를 발탁하라.”고 지시한다.본격적으로 후계그룹을 키우겠다는 선언이다. 정치적 후원자인 쑹핑은 기민하게 움직였다.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쑹핑은 자신의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는 조건으로 권력 실세인 차오스와당 원로인 보이보(薄一波) 등을 설득,분위기 조성에 들어갔다. 92년 9월 14대 전대 직전,권력의 핵인 상무위원 최종 심사에 ‘후진타오 파일’이 올라갔고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내 보기에도 이 사람은 괜찮은 것 같더군.”이라며 OK 사인을 했다.지방의 당서기에서 무려 3단계나 도약,4세대 후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친화력과 조직관리의 귀재 그에게는 중국인의 사랑을 받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풍모가 느껴진다.사람을 대하면서 인정(情)과 이성(理),사무(事) 등 3개 요소를 적절하게 조화시켰다.원만한 리더십과 친화력으로 조직의 활력을 불어넣는 스타일이다. 공청단 시절 부하들은 “후진타오의 태도는 늘 겸손하고 붙임성이 있으며 성실했다.”고 회고한다.85년 구이저우성 당서기 시절 특유의 지방색과 배타성에 직면한 그는 지역의 원로 간부들을 맨투맨으로 접촉,‘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단결과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한 그는 경제건설에 전념,부임 2년만에 귀주성의 1인당 GDP를 418위안(元)에서 794위안으로 무려 94%나 늘렸다.당시 경제성장률을 감안하더라도 평균 수치를 훨씬 웃도는 성과였다. ◆철저한 2인자의 처세술 후진타오는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다.겸손은 그의 처세술의 백미다. 92년부터 후는 10년 동안 권모술수가 난무한 중난하이(中南海) 시절을 보냈다.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趙紫陽),마오쩌둥 시대의 류사오치,린뱌오(林彪) 등 2인자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본 그로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을 것이다.기자들을 만나면 “나를 선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여러분이 나를 선전한다면 이는 곧 나의 정치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내가 아직 젊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당부한다.이 때문에 그의 정치 기록에도 일관되게 장쩌민의 부하로서 장을 떠받들고 있다.정적들이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이간질하는 어떤 자료도 찾아보기 어렵다. oilman@ ■인맥/ 共靑團이 ‘오른팔' 후진타오 국가부주석의 인맥은 장쩌민 국가주석 등 제3세대 지도부의 바로 아래인 제4세대의 젊고 참신한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공산당 전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과 칭화(淸華)대 인맥,간쑤(甘肅)성 군단 등이 후 부주석의 대표적인 인맥으로 꼽히고 있다. 후 부주석이 1980년대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면서 맺은 공청단 인맥은 그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다.왕자오궈(王兆國) 통일전선부장,리커창(李克强) 허난(河南)성장,쑨자정(孫家正) 문화부장,장푸썬(張福森) 사법부장,쑹더푸(宋德福) 푸젠(福建)성 당서기,첸윈루(錢運錄) 구우저우(貴州)성 당서기,리즈룬(李至倫) 감찰부 부부장,주산칭(朱善卿) 공산당 대외연락부부부장,류성위(劉勝玉) 중앙당교 부교장,위유쥔(于幼軍) 선전시장,저우창(周强) 공청단 제1서기 등으로 정치세력의 주력부대인 셈이다. 칭화대 인맥 중에는 후 부주석이 재학중이던 60년대 초반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40여년 동안 이어지면서 스스럼없이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동지들이 가장 많다.우방궈(吳邦國) 부총리와 우관정(吳官正) 산둥(山東)성 서기,자춘왕(賈春旺) 공안부장,왕수청(汪恕誠) 수리부장,톈청핑(田成平) 산시(山西)성 당서기,천칭타이(陳淸泰)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부주임 등은 칭화대 동기이자 입당 동지들이다.더욱이 자 공안부장과 천 부주임은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동창이다. 이밖에 후 부주석의 인맥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원세력으로 간쑤성 군단이 있다.그가 60년대 후반 간쑤성에서 근무하면서 사귀어 신뢰감을 쌓아온 정치인들이다.이들은 후 부주석을 중앙 정계로 발탁한 뒤 정치적 대부 역할을 한 쑹핑(宋平) 전 공산당 조직부장을 ‘모시고’ 있다. 원자바오(溫家寶) 부총리를 비롯해 자즈제(賈志杰)·천광이(陳光毅)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상무위원과 장우러(張吾樂) 국가유색금속공업국장·옌하이왕(閻海旺) 인민은행 부행장 등이 간쑤성 군단의 핵심 인물들이다.특히 이들은 대부분 정부 행정부처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후 부주석의 정치권력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김규환기자 khkim@
  • 후진타오·원자바오·쩡칭훙 中 권력 삼두체제 유력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16차 공산당대표대회(16全大)를 계기로 중국의 권력구도는 후진타오(胡錦濤·60) 국가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60) 부총리,쩡칭훙(曾慶紅·63) 전 조직부장이 이끄는 ‘삼두 체제’가 유력하다. 장쩌민(江澤民)-리펑(李鵬)-주룽지(朱鎔基) 등 3세대 핵심 지도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원자바오= 차기 총리로 유력한 인물이다.주룽지 뒤를 이어 ‘경제 사령탑’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막강한 출신 배경이나 든든한 후원자 없이 권력 핵심에 오른 ‘실력파’로 꼽힌다.86년 왕자오궈(王兆國)의 후임으로 당중앙 판공청 주임 자리에 오른 뒤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장쩌민 등 3명의 당총서기를 보좌했다.87년 제13차 당대회 때 불과 47세의 나이에 당 중앙위원에 선출,출세가도를 달렸다.조용한 성격이지만 조직을 움직이고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시련도 있었다.93년 장쩌민 총서기의 핵심 측근인 쩡칭홍에게 판공실 주임자리를 빼앗기고 5년간 서기처 서기 등 한직으로 전전했다.98년 주룽지 총리의 절대적신임을 배경으로 부총리로 재기,실각을 예견했던 중국 관측통들을 놀라게 했다. ◆쩡칭훙= 장쩌민 당총서기의 ‘그림자’로 불린다.지난 85년 당시 상하이(上海) 시장이었던 장쩌민이 그를 비서로 임명한 뒤 17년간이나 최측근 심복으로 활동했다.탁월한 분석력과 형세판단이 장점이다. 장 총서기가 주위의 격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권력 핵심부에 올리려하는 것은 그만이 장 주석의 의지를 실현하고 노후를 확실히 보장해 줄 인물이기 때문이다.이번 전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2단계 승진이 유력시 된다. 90년대 초 주군(主君) 장쩌민의 제1의 위협이었던 양상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발휘했고 장쩌민의 일생일대의 권력투쟁으로 불리는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시당위원회 서기와의 싸움에서 일등공신이 됐다. oilman@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