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獨과 한반도 통일](5)진정한 의미의 통일·교훈
[포츠담 김규환특파원] 베를린시에서 남서쪽으로 30여㎞쯤 떨어진 글리니케 다리는 독일 전역에서 몰려온 차량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있어 독일 통일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미국의 트루먼과 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탈린 등 연합국 삼거두가 2차대전 후 독일의 전후 처리방침을 논의한 역사적 현장인 포츠담으로 가는 관문인 이 다리는 분단 시절 동서독간의 간첩을 교환하던,한반도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같은 민족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통일 10주년을 맞는 오늘의 독일 모습은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남아 있는 한반도에 통일 한국의 장래를 예단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통일은 민족통합과 국력회복 등의 좋은 점이 있을 수 있지만 막대한 통일비용의부담과 동서독인들간의 마음의 장벽 해소,대량 실업 등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남아 있어 한반도 통일 이후를 점쳐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는것이다.
특히 독일은 이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려 1,000조원 이상의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으나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통합을 이루지 못한 ‘진행형’인 점을 감안하면,분단국이 완전 통합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과 인내심이 필요한지도 대변해주고 있다.통일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라는 얘기다.베르너 페니히 베를린 자유대 교수는 “독일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로 등장했다는 사실 못지 않게 심리적 장벽 등 사회적 갈등 해소 등의 과제를 안게 됐다”며 “통일 작업은 인내와 노력,그리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분단 이후 독일의 통일과정을 보면 동서독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해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60년대말 등장한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는 ‘동독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對)동독정책의 원칙를 깨고 동서독간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관계를 정상화하는 한편,적대감을 완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그는 특히 동방정책(Ostpolitik)을 바탕으로 인접한 소련·폴란드와 국경선 문제를 매듭짓고 폴란드·체코·헝가리·불가리아 등과 관계정상화를 이뤘다.이 공로로 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브란트 총리의 통일을 향한 행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72년 동서독간 기본조약을 맺은데 이어,동서독 이익대표부를 설치함으로써 동서독 관계개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독정부는 정치적 공세와 함께 인적교류를 넓혀 나갔다.지난 54∼57년 해마다 240만명의 서독인들이 동독의 친척을 방문했고,베를린 장벽이 설치된이후에도 연간 100만명 정도가 동독지역을 방문하는 등 교류가 잇따랐다.서독정부는 동독주민들에게 1인당 1년 2회에 한해 30마르크(약 1만8,000원)의서독방문 환영금을 주는 등 교류를 부추겼다.
경제교류도 크게 확대했다.서독은 분단초기 경제교류를 서베를린으로의 통행보장을 위한 협상수단으로 이용했지만,60년대 이후 동질성 회복의 수단으로 활용했다.서독정부는 동독이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동독제품을 수요 이상으로 구입했다.이에 따라 50년 8억마르크(약 4,800억원) 정도에 불과하던 동서독간의 교역액은 88년에는 160억마르크(9조6,000억원)으로 폭증했다.인적·물적교류가 독일통일의 주춧돌을 놓은 셈이다.페니히교수는 “통일전의 동서독관계와 남북한관계의 크게 다른 점은 인적·물적교류에 있다”며 “동독의 잦은 제한조치로 한때 인적·물적교류에 어려움을겪은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극소수의 기업인 및 문화·체육계인사들이 교류하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 비하면 동서독의 교류창구는 항상 열려 있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북한이 최근들어 경제난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에 화해 제스처를 보이고 있지만,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한반도에서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칼 킨더만 뮌헨대 교수는 “동독은 소련의위성국가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근본적으로 독자 행동하는 데다,서독 언론에접근할 수 있었던 동독 주민들과는 달리 북한 주민들은 외부 정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탓에 한반도의 통일여정이 독일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본다.우위에 있는 한국이 인내심을 갖고 대화와 교류를 늘려나가는 방향으로 북한에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분석이다.
khkim@ ** 베를린의 '분단 박물관' [베를린 김규환특파원] 통일전 동베를린의 프리드리히가에 자리잡고 있는찰리 검문소 앞의 조그마한 3층짜리 박물관은 동독 주민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분단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박물관 입구에 베를린장벽 조각 위에다 ‘자유! 자유! 자유!’라는 애절한구호와 함께 나비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림을 그려 분단의 아픔을 표현,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1층에 들어서면 통독전 동독주민들이 동독제 국민차인 트라반트 밑에 몸을 숨기고 검문소를 통과하는 모습을재연해 보이고 있다.
특히 차체 밑에 바짝 달라붙어 검문소를 통과하던 모습의 인형은 당시 탈출자들이 마음을 졸이는 표정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일깨우고 있었다.본에서 왔다는 미카엘 쿤(64)씨는 “동독 주민들이 탈출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은 했으나 이토록 처절할줄은 몰랐다”며“막대한 통일비용 등 통일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자유의 소중함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전한다.
2층에는 평화시위를 벌이던 동베를린 시민들을 소련탱크들이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는 모습이 침중한 음악과 함께 비디오로 재현돼 ‘인민과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주장하던 사회주의체제의 비정함을 되새겨주고 있었다.
3층에는 들어서자마자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동독 경비병들이 동베를린 탈출 주민들을 제지하기 위해 사용한 철모,칼 등 각종 무기들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친구와 함께 이곳을 둘러보던 아겐투어 하르퉁(15)군은 “통일 당시 너무 어린 탓에 통일이 뭔지도 몰랐다”며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는 모습을 보고 분단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