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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북청사자놀음’ 여재성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북청사자놀음’의 보유자 여재성 씨가 지난 21일 오후 8시30분 별세했다.88세. 고인은 함경남도 북청 출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15세 때 처음 사자춤을 배운 뒤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하여 북청군민회에서 탈을 쓴 것을 계기로 사자춤 재현에 뛰어들었다. 그는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도지사상을 받은 데 이어 1970년 북청사자놀음의 사자뒤채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유족은 부인 유성승(83)씨와 2남2녀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 흑석동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3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도 파주 이북5도민공원묘지.(02)860-3530.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사건이 발생하기 1년여 전, 그러니까 1982년 봄 어느날이다. 한 전직 장관(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인이 지인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을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의 남편은 다름아닌 외무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라 있었다. 무당은 부인에게 “염려말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요즘 들어 국상(國喪)이 자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뱉었다. 며칠 후 무당의 말대로 전직 장관 부인 등을 포함, 몇몇 지인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고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조용히 치렀다.(이때 지난해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무당옷을 빌려 입고 유일하게 외부인으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무당은 전직 장관 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관 지명에서 자신의 남편은 탈락되고 대신 이범석씨가 신임 외무장관이 됐다는 것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무당은 “변명 같지만 전화위복이 될 테니 두고 보라.”고 위로했다. 해가 바뀌어 1983년 9월. 무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일날(음력 8월18일)에 주위 친한 사람들을 일부 초청, 점을 봤다. 그런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무당은 “버마(미얀마) 가면 안 되는데, 버마 가면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달 뒤인 10월7일 밤, 무당은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건 개꿈이야, 개꿈!”하면서 남쪽을 향해 침을 퉤퉤 내뱉었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아침 아웅산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위기일발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범석 외무장관을 포함,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운명을 ‘재천’이라고 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상황이 떠올려진다. 첫째, 당초 전직 장관 부인의 뜻대로 남편이 외무장관에 발탁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당의 말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둘째, 무당이 ‘버마’를 운운한 점, 또 ‘대통령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미얀마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어쨌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운 좋게도 살아 돌아왔다. 운명의 조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을 앞두고 신(神)의 전주곡 같은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이 피범벅이 된 끔찍한 사건일수록 그 뒷얘기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살아온 60년 이 시대의 큰무당,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金錦花·77)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뿌린다. 작두 타며 신을 만나는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에 처음 신과 만났으니 올해가 꼭 60년째가 된다. 한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한국인’이 됐다.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갈 때마다 단연 ‘인기캡’으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내에서 서해안풍어제(무형문화재82-2호) 굿판을 벌일 때도 많은 외국팬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그는 2년 전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30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해 무속체험장인 ‘금화당’ 간판(글씨는 ‘도올’이 썼다.)을 내걸었다. 서해안풍어제 굿판을 벌이기에도 좋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땅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울 이문동의 서해안풍어제연구소와 금화당을 오가며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신과 가까이에서 ‘경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이문동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소박한 한복차림에 활짝 웃으면서 반긴다.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금화당’ 얘기를 먼저 꺼냈더니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워싱턴·LA 공연을 비롯, 유럽 각지의 해외공연을 수십차례 다니면서 무속 체험장 같은 공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으로도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세계 연극평론가 70여명, 외국 신문사 기자, 천주교 수녀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무속박물관이 내 꿈 아울러 여력이 되면 무속박물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200여년된 탱화 등 우리 무속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다수 소장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을 가졌다. 나이 다섯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금화’라 했다. 그의 신기는 어릴 적부터 신통방통했다. 열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췄다.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혔다. 열일곱살되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시름시름 무병을 앓던 그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내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신의 딸’이 됐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돼 금화의 허주굿(온갖 잡신을 몰아주는 굿)을 해주었다. 금화는 이어 내림굿을 하면서 작두를 탔다. 열아홉살되던, 즉 6·25직전 어느날었다. 금화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물론 신의 계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던 터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안 금화는 숨어다녔으나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리자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요.” ●올해 일어날 일은 비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에는 굿을 할 수가 없어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석, 우수상·공로상·개인상·단체상 등을 싹쓸이하면서 당당한 민속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의 초청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때 작두 타는 모습 등을 비롯,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선보여 많은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후 매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해외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올해 큰 사건은 없느냐고 하자 “그건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너무 빠르다. 순리대로 가야 하며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9월 금화당에서 무녀인생 60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을 벌일 예정이니 그때 구경 오라고 당부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황해도 연백 출생. ▲46년 외할머니에게 허침굿(허주굿), 내림굿, 솟을굿을 받음. 방수덕·권만신에게 대덕굿, 철물이굿, 배연신굿, 대동굿 등 전수. ▲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으로 방미. ▲84년 미국 하와이주 인간학연구위원회 및 하와이대재단 초청공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대동굿 기능보유자 지정. ▲95년 김금화대동굿(연강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
  • ‘발갱이들소리’ 전수관 건립

    경북도 무형문화재 27호인 ‘발갱이들소리’ 전수관이 건립된다. 2일 경북 구미시에 따르면 발갱이들소리의 효율적 전승보전을 위해 32억원을 들여 지산동 일대 1000여평의 부지에 300여평 규모의 전수관을 건립키로 했다. 내년에 착공해 2008년 완공할 계획이다. 발갱이들소리는 현재의 지산동 평야 일대에서 전해져 오는 농요로 신세타령과 가래질, 모찌기 등 모내기 순서에 따라 13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후삼국시대 견훤의 아들 신검의 군대가 고려를 침공할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았다고 해서 벌검평야,‘발갱이들’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온다. 발갱이들소리는 1982년 고 김택규 전 영남대 교수 등과 구미문화원이 조사, 채록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와 13마당으로 정립됐다.1991년 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받은 뒤 1999년 경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발갱이들소리는 경상도 특유의 선율에 구성진 음색을 담고 있고, 매년 현장 발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구미시는 발갱이들소리뿐만 아니라 지역내 18개 풍물단도 이곳을 연습장으로 이용토록 할 방침이다.구미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입문 25년 ‘국민 소리꾼’ 장사익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입문 25년 ‘국민 소리꾼’ 장사익씨

    열정과 사랑으로 휘감는다. 생명과 환희로 빚어낸다. 시원(始原)은 흥얼거림이다. 즉흥적이지만 틀을 깨며 희로애락을 넘나든다. 고요인가 싶더니 폭포수처럼 토해낸다. 맞다. 작곡이라는 개념을 벗어던진다. 국악 시 가요 재즈를 끌어들여 온갖 고생으로 살아온 몸과 마음에 절인다. 반주라야 북이나 피아노, 하지만 절묘한 생동감의 조화를 이룬다. 행복을 기원하는 소망이 있고, 장아찌같은 맛깔스러움으로 다시 듣고 싶어진다. ●박자틀 깬 특유의 창법 “하얀 찔레꽃/순박한 찔레꽃/별처럼 슬픈 찔레꽃/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찔레꽃 향기는/너무 슬퍼요/그래서 울었지/밤새워 울었지/아, 노래하며 울었지/아, 춤추며 울었지/아, 당신은 찔레꽃”(장사익 시·곡 ‘찔레꽃’) ‘국민소리꾼’ 장사익(57)씨. 전직 카센터 직원, 독서실 운영, 가구점 총무, 전자회사 직원, 보험회사 직원…. 방랑과 고난의 길에서 느즈막한 마흔여섯에 ‘찔레꽃’으로 정식 가수가 됐다. 이후 특유의 창법으로 ‘장사익 류(類)’라는 새로운 음악적 장르를 구축하면서 ‘이 시대의 소리꾼’으로 자리매김했다. 요즘에는 더욱 절정의 소리를 토해낸다. 속도경쟁의 무한시대를 비웃듯 ‘느림의 미학’으로 팬들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오라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다. 돈이 되든 안되든 ‘뒤풀이’자리를 좋아한다. 그럴 때마다 기립으로 노래를 따라하니 이보다 더 아니 좋을 수 있으랴. 장씨는 올해로 국악에 입문한 지 25년을 맞는다.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자택에서 만났다. 갈옷차림으로 환하게 웃으며 집앞까지 마중 나왔다. 원래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를 사양했다. 또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집은 가파른 북한산 자락에 떡하니 걸터앉은 듯했다.10여평의 잔디마당에 들어서자 바람의 종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학교종이 땡땡땡’을 비롯, 절간 처마밑에 달린 풍경(風磬) 등 10여개가 마당 한켠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손님을 맞았다. 장씨는 “이놈들은 가끔 오케스트라처럼 반주역할을 한다.”며 웃는다. 이때 참새 몇마리가 휙 날아간다. 세숫대야 크기의 물받이 돌그릇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저긴 참새들이 목마를 때 잠시 들렀다 가는 놀이터”라고 했다. 또 마당 한가운데에는 높이 1m가 채 안되는 ‘토(土)장승’이 몇개 있었다. 노래부르는 장씨 자신의 형상도 있었다. ●북한산자락서 신선처럼 여유 이어 2층으로 올라갔다. 탁 트인 통유리의 벽이었다. 시골집 대문짝이 바닥에 고즈넉하니 놓여 있었다. 응접용 테이블이었다. 앉자마자 눈앞에 인왕산이 병풍처럼 쫙 펼쳐진다. 문득 이보다 더 좋은 집터가 있을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저쪽은 인왕산 정상으로 뻗는 바위능선이지유. 코끼리 콧잔등처럼 생겼시유. 매일 만나지유.” “인왕제색도가 따로 없군요.” “호텔비 내고 살아유. 집은 (죽을 때)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잖아유. 섬이나 마찬가지예유.” “저걸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소리가 나오겠습니다.” “편하게 잠만 자지유.” “경치가 워낙 좋아 부부싸움도 안하시겠네요.” “왜유, 계속 해유.” 이때 병풍에 쓰인 ‘백년가약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하늘 고완선(부인 이름)과 땅 장사익은 금후(今後)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100년후에는 영원(永遠)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부부의 자필사인도 새겨져 있었다. 러브스토리를 물었더니 “우리 집에는 TV도 없다.”고 동문서답이다. “저 콧잔등 바위는 몇수억년됐지유. 여기 앉아 있으면 (자연의)소리와 풍경이 들려오는 것 같아유. 우리가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유. 나무들을 보세유, 사람은 더우면 이동하지만 나무들은 서로 싸움을 안해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겨울이 되면 옷을 홀랑 벗더라도 그대로 서 있지유. 나무와 풀들이 바로 저한테 선생이예유.(사람들은)마음이 오염되면 흰 것을 희게 보지 않아유.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집착을 버려야 일이 되는 것 같아유.” 서울을 떠난 지 40년이 됐어도 순도 100%의 고향사투리는 여전히 버리지 않고 품고 있었다. 잠시 창밖을 응시한다. 지나온 과거가 생각났던지 “빗자루로 쓸면서 걸어왔다.”고 했다. 처음부터 노래를 하려고 욕심을 냈으면 아마 오늘날의 자신과는 많이 차이가 났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래는 듣는 사람이 공감해야 자신의 소리를 스스로 평가해 달라고 하자 “기쁨과 슬픔,(노래를)들었을 때 ‘아, 그거 내 얘기야.’라는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대신했다. 요새 다들 빨리 가지만 느림속에서 거꾸로 가자, 박자 같은 걸 해체하고, 틀에 박힌 것보다는 정서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보자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예를 들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의 첫소절 중 ‘헤일 수 없이∼’에서 ‘헤’를 길게 강약을 주면 단어 하나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고 했다. 장씨는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7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한명, 남동생 둘, 여동생 셋이 있다. 소리의 기질이 많은 부친은 당시 소문난 장구잡이였다.5일시장 등을 다니며 장사를 했지만 7남매 식구들을 겨우 키워낼 정도의 평범한 농가였다. “지가유, 초등학교 5학년때 웅변을 했시유. 동네 뒷산에 올라 소리를 가다듬는 것이 버릇이 됐지유.5년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소리가 터졌다고 하데유. 가수 남일해 남인수 박재란씨의 가요도 많이 불렀지유.” 웅변할 때는 정치가가 되는 게 꿈이었으나 곧 ‘밥만 먹고 살자.’로 선회했다. 그래서 1965년 상경해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전 프로야구 선수 김우열씨와 동기동창이다. 역도부 학생들이 입장권을 주며 야구장으로 몰아내는 바람에 야구 구경도 많이 했다. 고 3때 종로 화신백화점 근처의 고려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이때 인근 낙원동 음악학원에 다니며 노래연습을 했다. 직장생활 3년후 군입대를 했다. 공병주특기였지만 소리솜씨가 좋아 31사단 문선대에서 근무했다. 나훈아 배호 신중현 등의 노래를 워낙 잘 불러 문선대의 대표가수로 활약했다. 72년 제대후에는 가수의 길로 나서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또 장남의 도리를 할 겸 직장을 구했다.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74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실직했다. 여기저기 직장을 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전자회사 영업사원도 해보고 노점상도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 야간대학에 다녔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쪼들림의 연속이었다. ●단소,·피리 등 대부분 독학으로 익혀 10여년 방랑끝에 84년 서울교대 뒤쪽에서 독서실을 운영하면서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2년 후에는 무역회사를 차렸지만 곧 문을 닫아 다시 백수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던 90년 매제의 도움으로 카센터에 취직했다. 직책은 ‘사무장’이었지만 오는 손님들한테 커피를 타주고 말을 걸어주는 ‘시간땜방’이었다.3년을 그렇게 보냈다. 92년말이었다.‘이모양 이꼴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듬해 국악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사실 80년부터 국악에 입문해 공부를 계속해 왔던 터였다. 처음 1년동안 단소를 배웠고,5년 동안 피리를 익혔다.86년에는 태평소를 배웠다. 스승에게 사사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독학이었다. 93년에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때마침 그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으로 장원에 뽑혔다. 또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도 ‘금산농악’으로 장원에 올랐다. 94년 11월 주위의 권유로 서울 신촌에서 첫공연을 했다.100석규모의 극장에는 3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자고나니 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1집앨범 ‘하늘가는 길’을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엄청 고생했시유. 다 말로 표현할 수 있남유. 울며 웃으며 예까지 왔지유. 한국적인 된장냄새로 삶의 진실과 정직을 담아내야지유.” 아들 둘은 현재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피리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49년 충남 홍성 출생 ▲ 68년 선린상고 졸업, 고려생명보험 입사 ▲ 70년 육군입대 ▲ 72년 문선대 활동후 제대, 무역회사 입사 ▲ 80년 국악입문. 정악피리와 태평소·대금산조 등을 배움 ▲ 84∼86년 독서실 운영 ▲ 90∼92년 카센터 근무 ▲ 93년 사물놀이와 농악활동 ▲ 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로 가수 데뷔 ■ 음반 하늘가는 길, 기침(98년), 허허바다(2000년), 꿈꾸는 세상(2003년) ■ 공연활동 96년 세종문화회관대극장에서 ‘장사익소리판 하늘가는 길’ 공연 이후 국내 및 해외공연 60여차례. ■ 상훈 전주대사습놀이 ‘공주농악’장원(9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결성농요’로 대통령상 수상(93년), 전주대사습놀이 ‘금산농악’ 장원(94년),KBS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 대통령상(95년),KBS국악대상 ‘뿌리패사물놀이’금상(96년)
  • 수원 한일초교 어머니 사물놀이패 ‘한우리’

    수원 한일초교 어머니 사물놀이패 ‘한우리’

    한 초등학교 교사가 대학 동아리의 경험을 살려 학생과 학부모, 교사 대상의 사물놀이패 동아리를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공동체의식을 키우는 것은 물론,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당으로 국악을 활용하고 있다. 교육대에 재학 중인 후배들에게는 예비교사의 교단 경험을 쌓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국악을 통해 교사-학생-학부모 사이에 서로 이해하며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학교 현장을 찾았다. “쟁쟁쟁∼쟁기∼쟁∼기쟁∼쟁쟁” 상쇠 강경순(39·여)씨의 꽹과리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수장구 남양선(39·여)씨는 “쿵따따∼쿵따! 덩덩덩∼”하며 신나게 장구를 두들기고, 북재비 김미향(41·여)씨도 머리를 힘차게 흔들며 “더덩∼더덩∼덩덩∼” 쉴새없이 북채를 움직였다. 지난 4일 오후 경기도 수원 한일초등학교 운동장은 어머니 사물놀이패 ‘한우리’의 공연으로 한껏 달궈져 있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어머니 11명은 혼연일체가 됐고 북과 장구, 꽹과리는 환상적인 소리의 조화를 만들어냈다.“우와!” 6학년 동주(12)는 환호성을 질렀다. 상쇠 강씨는 바로 추임새에 들어간다.“얼쑤, 절쑤, 잘 한다, 절씨구, 덩닥기, 덩기닥, 덩기, 닥기, 덩기닥, 절쑤” 그러자 공연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모두 젓가락을 마주 때리며 장단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고 어깨를 덩실거리며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저기가 우리 엄마야.” 3학년 예진(9)이는 이강복(38)씨를 가리키며 친구에게 연신 자랑을 늘어놓았다. 장단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던 6학년 석현(12)이는 “우리 조상 고유의 리듬에 맞춰 절로 춤이 나왔다.”면서 “사물놀이패 공연을 자주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7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어머니들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꽹과리를 맡은 박상숙(42)씨는 “아들 앞에서 한 공연은 처음이라 무척 떨렸다.”면서 “아이들의 반응이 예상 외로 좋아 보람을 느낀다.”며 흐뭇해했다. 한일초등학교 어머니 사물놀이패 ‘한우리’가 결성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학교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짜내던 중이었다. 그 때 평소 전통문화에 조예가 깊던 김종호(32) 교사의 자원으로 주민들에게 사물놀이 강습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학부모 20여명이 모여 시작했다. 모두 전통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 가락을 익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전통 가락을 외우는 것도 녹록지 않았지만 몸으로 익히기는 더욱 어려다. 박씨는 “몸과 머리가 함께 가락을 익히는 데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며 처음 배울 때를 돌이켰다. 남씨는 “피아노나 플루트 등은 아파트에서 연주해도 주민들의 불평이 적은데 장구나 북을 연주하면 여기저기서 민원이 들어와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몇 명이 그만두었고 11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성과가 나타났다. 지난해 9월 마을노래자랑 찬조 출연으로 공연의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지금까지 동네 양로원과 노인대학 등에서 5∼6차례 공연을 펼쳤다. 동네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일부는 사물놀이를 배우겠다며 학교를 직접 찾기도 했다. 학부모들의 열정이 전통음악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무엇보다 전통음악을 통해 가족 분위기가 밝아진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정선숙(39)씨는 “가족끼리 국악 공연을 찾는 일이 많아지면서 전통음악이라는 가족 공통의 관심사가 생겨 더 친해진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강경순씨는 “국악공연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이가 무척 좋아한다.”면서 “모자간의 정도 더 깊어졌다.”고 했다. 박상숙씨는 “전통음악을 배우고 싶어하는 남편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면서 “평소에는 일상적인 대화만 했었는데 요즘은 사물놀이가 대화의 양념 역할을 한다.”고 좋아했다. 김종호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사교육 때문에 너무 바빠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이 적은데 학부모와 아이들이 사물놀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생기면서 새로운 대화의 장이 생겼다.”면서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 달라진 가족 분위기에 만족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아이들이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장점 가운데 하나다. 엄마의 공연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싶다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6학년 인성(12)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배울 곳이 많은데 우리 음악은 가르치는 곳이 별로 없다.”면서 “조만간 태평소를 배워 전통음악의 맥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일근 교감은 “한우리 활동을 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지난달 어린이 단소부 모집에 이들 학부모의 80% 이상이 가입했다.”면서 “앞으로 한우리 단원을 30명까지 늘리고 가야금부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원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공동체 정신 기르는덴 전통문화가 가장 적합-‘한우리’ 창설 주도 김종호 교사 “전통문화는 아이들이 즐겁게 공동체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경기도 수원의 한일초등학교에서 어머니 풍물놀이패인 ‘한우리’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종호(32) 교사는 전통문화 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까지 한일초등학교에 몸담고 있다가 올해부터 수원 당수초등학교에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와 인터넷 게임 등에만 푹 빠져 공동체놀이를 모른다.”면서 “강강수월래와 농악, 사물놀이 등 우리 전통문화를 학교 현장에서 활성화시켜 공동체정신을 길러주면 인성교육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가 전통문화의 효과를 확신한 것은 지난 1995년. 대구교대에 재학하면서 대구 남도초등학교에서 특기적성 강사로 근무하면서다. 당시 김 교사는 학교에서 탈춤을 가르쳤다.5월 운동회 때에는 탈춤반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다.“연습할 때 ‘얼쑤, 절씨구, 덩기 닥기 덩기닥’ 추임새를 넣었어요. 그러자 아이들도 따라했고 운동장을 반쯤 돌았을 때 옆 뒤로 애들이 쫓아오더군요. 곧 이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서양음악보다 우리 전통가락이 아이들 정서에 훨씬 더 맞는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학부모들을 모아 사물놀이패를 만든 이유에 대해 “교육은 가정과 학교, 사회 3곳에서 동시에 이뤄진다.”고 전제한 뒤 “7차교육과정으로 바뀌면서 음악 교과서에 전통음악이 60% 이상을 차지하는 등 전통문화의 비중은 늘어난 반면, 가정과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에서 어머니부터 국악에 관심을 가지면 아이들도 관심을 갖게 되고, 이같은 분위기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김 교사는 대구교대 1학년 때 전통음악 동아리인 ‘풀이마당’에 들어가 처음 전통음악을 접한 뒤 푹 빠져 교육적 효과까지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후 1994∼95년 대구·경북지역 사물놀이 경연대회에서 각각 은상과 금상을 받았다.1997년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다사농악팀으로 출전,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수원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풍물 동아리 ‘풀이마당’ 김종호 교사가 몸담고 있는 ‘풀이마당’은 대구 교육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풍물 동아리다. 지난 1987년 출범, ‘성년’을 바라보는 동아리다. 출범 당시 84학번이었던 나규식씨와 이재완씨가 전통문화를 익히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10여명의 학생들과 시작했다.‘풀이마당’이라는 이름은 액과 살을 풀어헤치고 마당에서 함께 어울려 신명과 흥을 나누자는 뜻이다. 주로 탈춤과 풍물놀이를 다룬다. 풀이마당 단원들은 매년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미래의 선생님이 될 대구교대생들을 대상으로 장구장단과 민요, 교과서에 나오는 전통음악 등을 가르친다. 예비교사인 교대생부터 전통문화에 익숙해야 교단에 서더라도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풀이마당 안에는 독특한 소(小)동아리가 운영되고 있다. 바로 졸업생들의 모임인 ‘어제의 용사’다. 김종호 교사도 이 모임에 속해 있다. ‘어제의 용사’는 크게 대구·경북과 경기도 권역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매년 정기적으로 권역별로 한두 차례의 모임을 갖고 학교 현장에 전통문화를 어떻게 보급할지에 대한 토론회를 열고 있다. 단순한 대학 동아리에 머무르지 않고 일선 학교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동아리인 셈이다. 이같은 풀이마당의 취지에 따라 재학생들은 교내 국악반과 함께 선배들이 재직 중인 학교 5∼6곳을 찾아가 학생들에게 전통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국악을 통해 선후배간 정도 쌓고, 미리 교단을 경험해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풀이마당 박원석(22) 회장은 “초등학생들의 반응이 좋아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를 찾아갈 생각”이라면서 “사물놀이를 지역사회에도 알리기 위해 예비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양로원에 가서 공연을 하는 계획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김천 ‘빗내농악전수관’ 제몫 톡톡

    ‘빗내농악을 아십니까’. 경북 김천 빗내농악전수관이 빗내농악 보급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20일 김천시에 따르면 빗내농악전수관이 2003년 11월 문을 연 이후 600여명이 이 곳에서 빗내농악을 배웠다. 빗내농악은 김천의 동쪽에 위치한 빗내마을에서 이어져 오는 전형적인 풍물굿이다. 유래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의 감문국에는 잦은 수해를 면하려는 풍년제가 마을굿 형태로 펼쳐졌다. 이후 풍물놀이가 이어지는데 ‘빗신’과 전쟁을 하는 군사굿이었다. 이것이 빗내농악이다. 내륙농촌지역이어서 다른지방 가락이 혼합되지 않았다. 질굿·문굿·마당굿·지신굿 등 12가락으로 구성돼 있고 이 가락은 긴 것과 짧은 것의 119마치로 세분된다. 남필봉(40) 빗내농악보존회 회장은 “한국 사물놀이의 대부분이 ‘농사굿’인데 비해 빗내농악은 ‘군사굿’이어서 힘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고 말했다. 빗내농악은 1961년 마을 무대에서 벗어나 전국대회에 진출했다. 그동안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비롯해 각종 경연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둬 김천의 대표적인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천시는 빗내농악을 알리고 맥을 잇기 위해 23억원을 들여 개령면 광천리 3400여㎡에 빗내농악전수관을 건립했다. 농악전수관 도병채(49) 관장은 “악보도 만들고 역사를 문서화하는 것은 물론, 영상물을 남겨 체계적으로 빗내농악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김천시 관계자는 “전수관을 통해 320년 전부터 빗내들을 중심으로 전해 내려온 빗내농악이 새롭게 조명되고 전파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천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외면당하는‘위도 띠뱃놀이’

    전북 부안군 위도에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선다면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위도띠뱃놀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위도에 처리장을 건설하는 문제가 여전히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띠뱃놀이의 존재는 외면당하고 있다. 지난 2월 위도띠뱃놀이를 현지조사한 주강현 한국민속연구소장은 “위도에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을 건설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띠뱃놀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상황”이라면서 “환경도 중요하지만 문화유산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폐기장건설은 문화환경 파괴 위도띠뱃놀이는 작위적인 축제가 아니라 어업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풍어를 기원하는 자발적 공동체 문화.따라서 처리장이 만들어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 못한다면 풍어를 비는 의식도 필요없어진다.결국 띠뱃놀이가 유지된다고는 해도 살아있는 문화로서가 아니라,박제화된 민속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폐기물처리장 건설은 문화환경의 파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도 결정 과정에서 띠뱃놀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그러나 폐기장이 아니더라도 띠뱃놀이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그는 1980년대 초반 띠뱃놀이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현지조사에 참여했다. 정 과장은 “현지조사 당시 이미 위도 칠산바다의 파시는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했고,서해페리호 사건으로 띠뱃놀이에 참여하던 주민의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또다시 변화가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사람이 바뀌고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띠뱃놀이가 나빠졌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름부터 ‘띠뱃굿’이었던 것을 197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띠뱃놀이’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무형문화재 예산 나아가 중요무형문화재 띠뱃놀이 예능보유자였던 주무(主巫) 조금례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녀를 구할 수가 없어 인천에서 데려오기도 했고,인터넷에 무녀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위도에서는 무속인으로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 과장은 그런 만큼 “무형문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늘리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단언했다.눈에 보이는 유형문화재에만 관심을 가질 뿐 무형문화재 관련 예산은 모두 합쳐도 일년에 수십억원에 불과하다.최소한 주무가 위도에 머무를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 박사는 ‘보존’,정 박사는 ‘시대 상황에 따른 변화’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지만,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대목이 있다.현재는 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사람’만이 대상이지만 앞으로는 ‘전승지’나 ‘전승시설’도 함께 지정하자는 것이다.띠뱃놀이의 경우에 현재는 악사인 김상원씨 한 사람만이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있지만,수호신을 모신 산위의 원당(元堂)과 띠배를 띄워보내는 포구의 보존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한편 김동용 부안군청 문화관광과장은 “‘원전수거물센터’의 설계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위도띠뱃놀이의 원당과 포구가 포함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 “앞으로 위도가 관광지로 개발된다면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띠뱃놀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생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퇴계원산대놀이’ 60년만에 복원

    일제의 탄압으로 소멸됐던 ‘퇴계원 산대놀이’가 60여년만에 완전 복원돼선보인다.25일 오후4시 예술의전당 야외극장.(02)580-1132. 예술의전당이 마련한 ‘전통예술 기획 시리즈-한강’프로그램의 하나로 퇴계원산대놀이 보존회 민경조 회장과 회원 29명이 출연,전체 12마당(과장)중 5마당을 선보인다. 산대놀이는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발생,전승된 탈놀이로 발생지역에 따라 퇴계원·송파·양주 별산대놀이로 나뉜다. 내용과 춤사위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탈모양이 지역에 따라 확연하게 다르다.퇴계원 산대놀이에는 19종류의 탈이 등장한다.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놀이로 크게 나눌 수 있다.파계승,몰락한 양반,만신,사당,하인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폭로와 풍자,호색,웃음과 탄식을 보여준다. 길놀이로 시작,팔먹중놀이(제6마당)노장놀이(제7마당)신장수놀이(제8마당)취발이놀이(제9마당)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제12마당)를 선보이는 공연시간은 2시간이 조금 넘는다. 길놀이는 산대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출연진이 가면과 의상을 갖춰입고 풍물을 연주하면서 동네를 돌아 관중을 공연장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팔먹중 놀이는 중들이 인가로 내려와서 불도를 이탈하는 내용을 담아 파계승들을 풍자한다. 노장놀이는 노장이 본격적으로 파계하는 마당으로 팬터마임 형식의 춤을 보여준다.신장수놀이는 유일하게 동물이 등장하는 마당으로 원숭이의 행동과춤이 해학적인데 극적인 연출이 많다. 취발이놀이는 노장과 여인들이 놀아나는 것을 풍자한 마당으로 걸쭉한 재담과 야한 부분이 많다.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는 죽음을 위한 굿.또한 놀이전체의 마무리 마당으로 축원굿,화해굿,대동굿의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송파·양주 별산대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퇴계원 산대놀이가 유독 일제탄압을 받은 까닭은 당시 퇴계원 산대놀이 연희자들이 3·1 만세운동 등 일제 저항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여 반일 감정이 확산되는 것을 꺼린 일제가 탈과 의상,악기 등을 빼앗아 불태우면서 완전히 소멸됐다.지난 90년 산대놀이 연희자중 생존자인 백황봉옹(89)의 제보로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지난 97년 남양주문화원에 퇴계원산대놀이 보존회가 설립됐고 같은 해 열린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으면서 점차 알려지게 됐다. 강선임기자 sunnyk@
  • ‘노약자석’ 이름 바꾸자/沈雨晟 공주민속박물관장(서울광장)

    지난 한가위 명절을 전후해서 ‘노인공경운동’을 펴는 한 동아리에서 ‘노인(老人)’보다 더 좋은 호칭으로 ‘어르신’이 거론된 적이 있다.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다면 노인들의 모임인 ‘노인회’는 뭐라하며,‘노인복지회’는 뭐라 할 것인가에 이르고 보면 머리가 갸우뚱거려 진다. 오랜 세월 관습적으로 써 오는 말을 하루 아침에 고친다는 것이 간단치 않음을 실감케 했다. 대중교통 수단인 지하철에도 ‘노인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노약자·장애인석’이다.‘노약자·장애인석’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인 아래에 ‘노약자·장애인을 위하여 비워둡시다’라는 토까지 달아 놓았다.그런데 이 자리에는 대부분 멀쩡한 젊은이들이 발을 꼬고 앉아 있다.낯뜨거운 나체사진 표지의 주간지나 주로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있는 젊은 남녀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다.그들을 보는 노인들은 곤혹스럽다.차라리 ‘노약자·장애인석’이라고 써 붙이지나 말았더라면 싶다. 벌써 오래전부터의 일인데 실제 노약자나 장애인들은 이 자리를 애써 피하고 있다.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과 눈 마주치는 것이 송구해서이다. ○일선 우선석이라 불러 기왕 말이 나왔으니 ‘노약자·장애인석’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한말씀해야겠다.노약자는 늙어 병약한 자이고,장애인은 신체가 불구인 사람이다.꼭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궁상스럽지만 남의 나라 예를 들어보자.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우리의 ‘노약자·장애인석’을 ‘우선석(優先席)’이라 적고 있다.연세 많으신 분,몸 불편하신 분들이 우선 앉으시는 자리라는 뜻이다. 배워야 할 것,흉내 내야 할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장애인에 대해서는 몇일전 경상남도 밀양에서 있었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다시금 느낀 바가 있다.거의 모든 민속놀이에 장애인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 형상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이른바 온갖 장애인이 다 모여있다. 벌써 10년전 쯤인가 싶다.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한 많은 작품의 연출을 맡기도 했던 나의 친지 한분이 그 무렵 인기있었던 ‘병신굿’이라는 이름의 놀이굿을 가지고 외국의 연극제에참가했다가 큰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도대체 역사와 문화가 찬란하다는 한국에 이처럼 몰인정하고도 참혹한 연극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라는 빗발치는 비판으로 해서 도망치듯 돌아오고 말았었다. ○가정교육 소홀히 한탓 노인을 공경하고 장애인을 보살피자는 뜻으로 착안되어 특별히 자리까지 마련한 것이 ‘노약자·장애인석’임은 더없이 가상한 일이다.그렇지만 그 호칭이나 또 그 자리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쓰여지고 있느냐에 이르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 문제는 젊은이들만을 탓할 것이 아니다.바로 이 젊은이의 어버이가 가정교육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나이가 많아서 늙고 병든 병약자나 몸이 부자유스런 장애자 보다도 나이는 어리면서도 노약해 버린 젊은이,몸은 멀쩡하면서도 정신장애증을 앓고 있는 젊은이들을 고치기 위하여도 ‘노약자·장애인석’은 이름도 기능도 바꿔져야 하겠다. 부드러우면서도 예의 바르고 간절한 이름을 찾아봐야 하겠고,꾸짖어야 할때는 당당히 꾸중하는 노인의 위엄도 되살아나야 한다. ‘노약자·장애인석’을 멀리서바라보는 노인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 민속경연 대통령상 경산 ‘계정 들소리’

    16일 경남 밀양시 삼문 야외공연장에서 폐막된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영예의 종합최우수상인 대통령상(상금 1,100만원)은 경북 경산의 민요인 ‘계정들소리’에 돌아갔다. 경산시 자인면에서 전해지는 이 민요는 지신밟기를 시작으로 망깨소리·모심기소리·방아타령 등 10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회에 출연한 팀으로서는 다소 인원이 적은 80명이 재현한 이 민요는 9세기쯤 왜구를 물리친 한 장군의 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 장군의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던 풍습이 후대에 풍년을 기리는 농요로 발전한 것이다. 신찬균 심사위원장은 “구성과 의상 등이 원형 그대로이고 짜임새가 있어 선정했다”면서 “앞으로 대회참가와 수상만을 겨냥한 물량위주의 행사는 절대 수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우수상(국무총리상·상금 700만원)은 경남 의령 치실(칠곡)에서 전승돼온 민속놀이 ‘치실망깨다지기’가 차지했다. 부문별 우수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상금 각 350만원)은 농악에서 대구의 ‘달성다사농악’,민속놀이에서 서울의 ‘경복궁지경닺이’와 대전의 ‘버드내보싸움놀이’,민요에서 전남의 ‘강진군동두레농요’,민속무용에서 부산의 ‘동래한량춤’등 5개팀이 받았다.
  • 향토축제 나눔의 마당으로/沈雨晟 공주민속극박물관장(서울광장)

    고장마다 펼치고 있는 이른바 향토축제가 해마다 불어나고 있다. 1년에 300여가지의 축제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역사성 있는 민속제의 성격을 띤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꾸며진 ‘문화제’ 또는 ‘예술제’라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하긴 우리 민족은 자고로 축제를 생활속에 심어온 남다른 데가 있는가 싶다. 상고시기 축제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옛 문헌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을 꼽는데 “…부여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굿을 올리며 온 나라 사람들이 며칠을 먹고,마시고,노래하고,춤춘다…”했다. 이 밖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대개 정월,5월,10월 등의 일정한 때에 제사를 곁들인 공동체의 잔치를 펼치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씨뿌리기를 끝낸 5월,추수를 마친 10월의 축제는 모두가 일의 시작과 마무리에 있으니 단순히 먹고 놀아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더 큰 수확을 염원하고,다지고,구가하는 가운데 내일의 평안함과 태평까지를 기리는 삶의 일정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저 먹고,마시고 깨부수는 난장판으로 아는 풍조로 해서 본디의 축제정신이 왜곡되고 있다. 한편 축제 가운데는 국가적 규모의 큰 것이 있어 향토축제와 대비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은 점점 나라가 주관하는 특별한,또는 연례적 기념일로 분류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그렇다면 그저 지방에서 열리는 것이라면 향토축제일까. 그렇지 않다. 한 지역의 유서깊은 전통문화에 뿌리를 둔 향토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데 요즘의 실상은 분별이 없다. 물론 향토성이 있는 축제만이 축제라는 주장은 아니다. 예컨대 ‘강변 팝송잔치’는 ‘○○예술축제’로 부르는 것이 걸맞다는 의견이다. 또 한가지 흉금없이 논의되어야 할 일이 있다.향토축제의 본보기로 대접받고 있는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를 보자. 다분히 회고취향에 따라 열심히 옛 모습을 재현하려는 데까지는 그래도 좋다. 각기 제 나라 임금과 장수를 추모하고 숭앙하는 의식도 있음직하다. 그런데 이 모든 행사의 저변에 신라와 백제의 옛과 오늘이 서로 대결·질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나아가서 고구려문화제는 3국의 분열상을 재현·음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문화를 확인하는 가운데 그의 총합체인 찬란한 민족문화를 더욱 뼈대있게 하려는 ‘울력 정신’이 발양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고질적 병폐인 동·서 갈등의 뿌리는 신라와 백제의 이질성에서 온것이 아니라,해당시기 일부 봉건적 지배층과 외세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임을 우리네 민초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전통시대 신라와 백제의 마을과 마을에서 벌였던 축제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나’가 아닌 ‘우리’로 통하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래서 3국은 결국 하나가 되어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는데 다시금 외세의 농간으로 원통하게도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분단시대의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올해로 39년째 맞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이제는 ‘경연’이란 두 글자를 떼어 버리고 ‘우리민속큰잔치’로 거듭나야 하듯이 식민시대 유물인 관료적인 권위의식과 말초신경적 시샘을 훌훌 털어버리고 통일지향적 넉넉함이 의젓이 되살아나는 따사로운 나눔의 마당이어야 할 것이다.
  • ’97민속경연/대통령상 경기도 ‘통진 두레놀이’

    ◎국무총리상엔 강원도 ‘강릉 용물달기’ 차지 □문화체육부 장관상 ·대구 ‘비산농악’ ·인천 ‘서해안 일노래’ ·서울 ‘수표교 다리밟기’ ·대전 ‘바구니 홰싸움놀이’ ·전북 ‘웅포용왕제’ 제3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상금 1천만원)은 경기도의 ‘통진두레놀이’가 받았다.국무총리상(상금 6백만원)은 강원도의 ‘강릉용물달기’가 차지했고 문화체육부장관상(상금 각 2백50만원)은 ▲대구의 ‘비산농악’ ▲인천의 ‘서해안 일노래’ ▲서울의 ‘수표교 다리밟기’ ▲대전의 ‘바구니 홰싸움놀이’ ▲전북의 ‘웅토용왕제’가 차지했다.공로상(상금 각 2백만원)은 ▲부산의 ‘구덕망깨소리’ ▲충남의 ‘세도두레놀이’ ▲전남의 ‘정동우물제’,장려상(상금 각 2백만원)은 ▲평남의 ‘평양검무’ ▲경남의 ‘김해오광대’가 받았고 노력상(상금 각 1백만원)은 ▲광주의 ‘광산풀두레’ ▲평북의 ‘평안도 다리굿’ ▲충북의 ‘강서농요’ ▲제주의 ‘의귀리 □비는 소리’ ▲함남의 ‘돈돌날이’ ▲경북의 ‘계정들소리’가차지했다.입장상(상금 1백만원)은 전북의 ‘웅토용왕제’가 받았다.이밖에 개인상 부문에서 지도상(상금 1백만원)은 인천 ‘서해안 일노래’의 김순재씨,연기상(상금 1백만원)은 제주 ‘의귀리 □비는 소리’의 김병인씨에게 돌아갔다.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익산시 공설운동장과 실내체육관에서 전국 18개 시·도(이북 3개도 포함) 1천802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번 대회는 서울 ‘수표교다리밟기’ 등 12개 종목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전국민속경연 오늘 개막/익산서 3일간 일정

    제3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15일 익산시에서 개막,3일간의 일정에 들어간다. ‘문화 유산의 해,우리 멋 한마당’을 케치 프레이즈로 내 건 대회에는 전국 18개 시 도에서 18개 작품이 출품돼 고장마다 전해오는 전통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자랑하게 된다. 부문별 출품작은 민속놀이의 경우,전북의 ‘웅포용왕제’ 등 10개 작품이,민요는 경북의 ‘계정들소리’ 등 5개 작품,민속무용은 평남의 ‘평양검무’ 농악은 대구의 ‘비산농악’ 민속극은 경남의 ‘김해 오광대’ 등이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서울의 ‘수표교 다리밟기’ 광주의 ‘광산 풀두레’ 등 12개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다.
  • 무악인 박병천(이세기의 인물탐구:140)

    ◎신의 소리·동작 전수하는 ‘굿판의 사자’/신들린듯한 소리·춤사위 ‘세습무의 증언자’/무형문화재 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진도씻김굿의 전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이틀에서 사흘이 걸린다.그러나 70년대 이후 진도씻김굿의 인간문화재 박병천은 망자를 불러들이는 초가망석,복덕을 비는 제석,매듭을 푸는 고풀이와 이슬털기,길닦음으로 1시간짜리 굿을 짜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중에서도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맺힌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흰 광목천으로 길을 닦아 혼을 승천시킨다.이때 주무는 흰 도포에 갓,단정하게 앉아 북가락과 구음으로 굿을 이끌되 신바람나게 뛰거나 번거롭게 휘도는 것이 아니라 시종 숙연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맺힌 망서 넋 위로 ‘누웠던 환자가 벌떡 일어난다’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북춤에서 굿거리 한량춤과 지전춤 살풀이춤으로 한판을 펼쳐도 그 기량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특히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쌍가락으로 치는 북춤은 양어깨를 활짝펴고 솔개가 날아가다 동작없이 머문듯한 춤사위며 천길 낭떨어지에 내려꽂히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휘돌고 몰아치는 전과정이 가히 ‘달인의 경지’로 호평된다. 그는 ‘춤은 바로 장단의 기화’라고 말한다.‘춤은 우리 가락에 내몸을 놓는것’이며 ‘내몸에다 장단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락에 맞춰 내몸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이김발(이긴발)­까치발(새발)­자진발­디딤발’로 장단에 몸을 놓는 지무네(지무)를 추되 춤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전체속을 깊이 알고 추는 ‘무검질 속’춤이 제격이다. 그가 짠 씻김굿 무악은 2분박 보통 빠르기의 흘림을 기본으로 하면서 진양에서 굿거리 중모리 덩덕궁이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삼장겹장단은 흥과 화사가 넘치고 너름새가 화려하여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장단이다.소리 역시 툭 트여서 현대창작무대의 잦은 초대와 요청이 들어오고 국립무용단에서는 그의 장단과 소리와 북춤을 무용극에 삽입하고 있다. 그가 이런 장단과 연희에 달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굿속에서 굿을 보면서 자라난세습무가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진도 신청의 당장이던 박범준과 당대 제일의 무당으로 알려진 김소심의 장남.그의 조상이 진도에 온 것은 9대조부터이며 그의 종조부인 박종기씨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이고 당숙인 만준씨는 피리의 명인,고모인 박선래씨도 무업을 이어받고 있다.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무동을 서기 시작했고 목포상업중과 목포 상선전문학교시절에는 연극부 밴드부에서 타고난 끼를 다방면으로 발휘했다.굿에 종사하던 사람을 천시하던 시절이라 한때는 미곡상도 해보고 포구에서 객주노릇을 하기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것이 없어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다. 70년대에 접어들자 그는 집안에서 배운 진도만의 ‘남도 들노래’‘강강수월래’‘거문도 뱃노래’와 ‘진도다시래기’를 가지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국무총리상 대통령상을 휩쓸었고 이보형 임학재씨에게 발굴되어 77년 서울 YMCA강당에서 첫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무대에 서 본적이 없는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연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다 막상 막을올리기 직전에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창피해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세습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그는 무대에 오르면 평소의 근엄하던 자태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희색만면에다 목소리에 마저 신기가 실려 징으로 녹여내고 목으로 풀어내는 ‘비나리’는 씻김굿 명인들 중에서도 독보적 명기로 구분된다. ‘나오소사 나오소사 씻김받자고 나오소사.잔옷벗고 마른 옷입고 상탕에 목욕하고 중탕에 메를 짓고,쑥물 향물 청계수로 목욕재계하신후에 …’ ○어려서부터 굿속서 자라 엇중모리에 얹는 이 비나리는 굿에서 씻길 망자를 맞아들이는 초가망석(초혼) 첫머리 사설로서 애절한 허튼제와 일정한 장단이 없는 무장단이 특징이다.또 언제 손이 나가는지 2박자 하나라도 네개 여섯개 열두개로 끊어내고 둥둥 떠있는 혼을 능란하게 어우르는 품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에 의하면 ‘남이 넘볼수 없는 경이의 수준’이다. 징을 칠때는 씻김굿에서만 만 9시간을 끌기도 하고 살풀이 장단하나만도 80여개로 쪼개치는 귀신같은 솜씨는 그의 손 마디마디에 박혀있는 굳은 살과 가죽처럼 두꺼운 손바닥에서 그만의 연륜을 되짚을수 있을 뿐이다.굿판을 시작하며 막을 올릴때는 ‘선부리장단’을 쓰고 중중모리로 넘어가야할 경우에도 중모리장단의 절반 다음박에서 중중모리장단을 ‘산 도리돈돈 닷 돈…’으로 절묘하게 끌어낸다.실제로 그가 굿을 진행하는 전과정에서 북가락에 구음을 넣는 그 소리는 어느때는 구슬프고 어느때는 화창하여 때묻지 않은 싱싱한 구음에 녹아들고 젖어든다. 송파구 석촌초등학교옆 살림방이 딸린 박병천문화재전수소는 에어컨 하나없는 선풍기 바람속에서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그는 온신명을 쏟아낸다.단 한사람이라도 완벽하게 가르치고 길러내자 하는 일념에서다.무무를 담당하는 부인 정숙자씨(58)와의 사이에 3남 4녀가 있지만 장남(환영)만이 국립국악원 대금주자로서 국악과 관련이 있을뿐 막상 진도씻김굿을 잇는 자녀는 없다. 우리민족음악회의 노동은씨(음악평론가)는 ‘우리가 박병천을 주목하는 것은 인간문화재나 대금산조의 창시자의 집안이라는 사실때문이 아니라’ ‘인간사 음악으로 장구한 역사의 지평을 이룬 신청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 시대 신들의 언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전달하는 음악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시대의 음악사자” 그의 연희는 모든 민속예술자료의 사전에다 각종 민속연희에 가닿지 않는 부분이 없을만큼 무한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그의 대에서 어쩌면 세습무가 끊긴다는 사실은 그를 아끼는 주변에 안타까움을 던져준다.그러나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세습무의 증언자로서 일생을 가무에 젖어 살아온 그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입신 대광에서 왕생극락을 현대에 실천한 초월의 예인이 아닐수 없다. □연보 ▲1932년 전남 진도 출생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년부터 무무악 섭렵 ▲1971∼7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남도 들노래’(국무총리상수상 ‘강강수월래’(대통령상)‘거문도 뱃노래’(국무총리상)‘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1978년부터 서울YMCA강당,국립극장,공간사랑 ‘씻김굿’ 공연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1981년 ‘박병천문화재전수소’개설 ▲1982년 국제민속예술제초청 유럽 6개국 순회공연,해마다 ‘명무전’ 참가 ▲1984년 LA올림픽개막축제공연,니카라과 민속음악제 금상 ▲19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7개국순회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참가 ▲1990년 LA 세계민속페스티벌 참가 ▲1994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공연 ‘코리아 페스티벌’ 및 미국순회 ▲1997년 ‘명인명창 한마당’(호암아트홀),‘진도 바닷길’ 축제공연 ▷현재◁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재단법인 문화재보호재단(한국의 집)전문위원 및 공연단 총감독,중앙대예술대학원 및 국립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 제12회 향토문화대상/본상 수상 개인­단체 공적

    ◎김재붕/일본의 잘못된 식민사관 되잡아 30여년간 농촌에 살면서 민족사와 지역향토사 연구에 전념,광개토대왕 비문과 신라·고구려사의 심도있는 연구로 일본의 잘못된 식민사관을 극복해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 확립에 앞장섰다.특히 70년대 광개토대왕 비문연구를 비롯한 백제와 일본과의 연구관계 논문이 일본에서 「일본 고대국가와 조선」이라는 일본어판 저서로 발간돼 일부 일본학자들로부터 「선생의 글을 대할 때마다 일본역사에 대해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극찬과 함께 일본내의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 잡았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충남도 문화재전문위원,연기군향토사연구소장,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및 일본조선학회·일본민족학회 회원으로 일하면서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여 충남도문화재 보존 등 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95년도 연기군민대상을 받았다. ◎익산고적선양회〈대표 채남석〉/완주 백제고분·익산 별신제 발굴 84년 설립 이래 매월 월례발표회와 고적답사를 실시,완주 제네리 백제고분과 제네리 사지·익산 동촌리 토기 요지·익산 성포 별신제 등을 발굴해 학계에 보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회집 「익산문화」 4집을 발간,이 가운데 1·2·4집은 지역문화 관련 논문 31편을 수록했고 3집은 전적과 고문서를 조사해 실었다.특히 익산지역의 문화위상을 확립하고 미륵사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미륵사지 복원 1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90년 익산군 문화원 창립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문화원 활동과 연계해 「익산 인물지」를 펴냈고 「살아있는 익산문화」 비디오제작,「고도 익산」 화보제작에 참여했다. ◎정표시〈한국농요보존회중앙회 부회장〉/농요·민속놀이 발굴보급에 앞장 지난 1948년부터 평창군 대화면에 살면서 지속적으로 향토문화 발굴 보급활동을 벌여왔다. 대방놀이·합놀이·대보름놀이·성지놀이·윷놀이(정경도윷놀이) 등을 발굴·보급했고 이 가운데 85년도 제3회 강원도민속경연대회에 평창군 대표로 대방놀이를 재현,우수상을 받았다. 특히 이 민속놀이들과 병행되는 농요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현재 한국농요보존회중앙회 부회장직을맡아 한국농요의 발굴·보급에 앞장 서고 있다. 지난 92년 7월 가평초등학교에 농악대를 설립,지도해왔고 지역 군부대 장병들을 상대로 민속놀이를 전파해 우리 민속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등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해 땀을 쏟고있는 숨은 향토연구가다. ◎고승관〈홍익대 교수〉/사재 털어 미술·박물관 등 세워 현직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역과 수도권간의 문화격차를 깊이 인식,직접 박물관·미술관을 세우는 등 시설확충에 앞장섰으며 이 공간을 활용하는 문화행사를 지속적으로 벌이는 노력가다. 홍익대 조치원캠퍼스 조형대학 산업공예과에 재직하던중 수도권 미술문화와 충청권의 미술이 큰 차이가 있음을 느껴 서울에서 충청도로 이주했다. 먼저 문화공간의 조성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충북 괴산군 청천면 도원리에 사재로 4만평의 부지를 마련,87년부터 도원성미술관·박물관·야외조각공원 등 토털 예술타운 조성에 나섰다.지난 93년 도원성미술관및 야외조각공원을 부분개관해 여기에 돌탑 70여기와 타임캡슐 7기 등을 설치했다. ◎윤병수〈거제문화원장〉/거제 구비문학 체계화 등에 힘써 55년 거제문화원장을 창립,3대원장을 거쳐 현재까지 원장직을 맡아오면서 전통민속놀이 발굴을 비롯해 설화전집 발간과 관광에세이집 발간,옥포대첩·거제의사집 발간 등 거제 구비문학을 체계화시켰다.문화예술부문 전 분야에 걸쳐 행사를 유치,한국예총 거제지부 설립에 앞장섰으며 특히 청소년 정서순화에 열정을 갖고 청소년을 위한 가을 음악회,어린이 한문교실,청소년 유적지순례 등을 개최해 호응을 얻고 있다.주부교실과 16회에 걸친 한글백일장을 열어 주민들의 창작의욕 고취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또한 풍어를 기원하는 전통민속놀이인 팔랑개어장놀이를 발굴,제26회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은데 이어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공로상을 수상하는 공을 세웠다. ◎최일환〈목포 문태고 교사〉/학회 결성 등 지역 문화발전 헌신 교사로 재직하면서 끊임없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 문학회 결성과 문학지 발간,지역문인 회보 발간,시낭송회 개최등을 주도해 문학을 통한 지역문화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향토문인. 지난 82∼87년 목포문인협회 지부장을 맡아 중단된 목포문학을 복간하고 목포문인협회 회보를 창간하는 한편 목포문학 신인상 제도를 창설,10명의 지방문인을 등단시켰다.87∼92년 전남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전남문학상을 제정,전남문학의 역사현장 순례행사를 신설했고 청소년들을 위한 시낭송대회도 개최해왔다. 지난 92년 전남시인 98명으로 전남시인협회를 조직,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동안 전남시문학상을 제정해 매년 2명씩 선정하고 있다.
  • 민속예술경연대회 오늘 성남서 개막

    문화체육부와 문예진흥원이 주최하고 경기도·성남시가 주관하는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16일 상오10시 경기도 성남시 성남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을 시작으로 일제히 열린다.
  • 거문고 명인 김무길(이세기의 인물탐구:99)

    ◎웅건하고 청완한 가락으로 녹기금의 멋 구사/국악적 분위기서 성장… 구전심수로 악기익혀/신쾌동·한갑득 양대 유파의 가락 모두 섭렵 흔히 거문고산조를 가르켜 「무애의 강에 내리는 빗물」이라고 말한다.강상에 비가 내리니 수면 위에서 노는 파문은 비의 꽃인 양 수만가지 흐느낌이 형형색색이다.손과 줄이 눈부시게 어울려 「큰 줄은 소나기 쏟아지듯 급하고(대현조조여급우) 작은 줄은 갸냘프기가 속사김과도 같아(소현절절여사어)」 듣는 이의 가슴에 촉촉히 스며든다. 김무길이 거문고를 앞에 놓고 왼손으로 괘를 짚어 음높이를 조절하면 유현이 밀고 당기는 농담이 흥청거리다가도 오른손으로 술대를 잡아 머리쪽의 줄을 치면 공중에서 놀던 솔개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히듯 호방한 남아의 기개로 우람하게 울부짖는다.대점으로 줄을 찍기도 하고 소점으로 줄을 뜯기도 하면서 술대가 문현을 힘차게 타면 슬,유현이 살짝 넘기면 기,대현이 다시 둥소리로 받아 슬기둥슬기둥 소리에 대명천지가 열리고 덧없는 인생 달랠 길 없어 애간장이 다 녹는다.깊은강이 멀리 흐르는 이치를 유유히 간직한 채 거문고 육현은 무위자연의 세계를 정금미옥으로 펼쳐나간다. 거문고산조는 백낙준에 의해 처음 짜여졌고 그에게서 신쾌동·박석기가 배웠으며 박석기에게서 한갑득이 배웠다. 신쾌동은 백낙준의 가락을 가장 많이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정세한 농현과 복잡한 장단,거기에 가락을 더하고 다듬어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한갑득은 「편편이 나는 범나비같이 때로는 놀란 새 뱀을 쪼듯」 느리고 빠른 안배에 따라 두손의 수법을 자재롭게 움직이면서 연주자의 기량에 흥과 청을 맡기는 분방한 금도가 특징이다.정해진 수법에 구애됨이 없이 연주자의 애환을 담아 진흙속에 뿌리내린 연꽃의 향취를 은은히 풍겨나게 한다. 바로 이 거문고산조의 양대유파를 고루 섭렵하고 어느쪽이랄 것 없이 각유파를 능란하게 연주하는 이가 김무길이다.그는 86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장원에 올라 거문고연주에서의 성가와 지위가 더욱 탄탄한 것이 되었다. 김무길은 임춘앵·김경애·전황 등의 창극단에서 살림을 맡고 있던 국악인 김봉현의 3남1녀중 장남.부친은 전남 곡성군 옥과 출신으로 명고수 김명환과 동향이고 한갑득명인과도 막역지우로서 해방이전에 한갑득과 여성국극단을 따라 서울에 정착했고,김무길은 서울 종로 낙원동에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국악적 분위기가 몸에 배어 창과 장고장단에 심취하더니 13살 되던 해 비원 앞에 있던 한갑득문하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구전심수로 악기를 익힌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스승댁에서 거문고 한대목을 배우고 나오면 발걸음 하나에도 장단을 맞춰 「살징뜰 살징뜰 살찌르르 징징」 그날 배운 것은 구음으로 외워두었고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이웃의 안면방해를 의식하여 이불속에서 손전등을 켠 채 밤샘연습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갑득의 극진한 가르침 아래서 거문고산조를 배우다가 당시 인사동에 처음 생긴 국악예고에 진학,학교에서 거문고를 가르치던 신쾌동을 만난 것이 한갑득의 노여움을 사게 됐으나 그로서는 학교의 스승을 피할 수가 없어 한동안 신쾌동 휘하에 머무는 시기를 거쳤다.신쾌동 또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가운데 특히 타고난 자질과 빼어난 기량을 보이는 김무길을 극진히 총애하여 후에 그의 뒤를 잇는 신쾌동거문고산조의 이수자가 되게 했다. 그러나 신쾌동의 가락이 웅건하고 남성적이며 짜임새가 완벽한 반면 한갑득류는 변화무쌍한 음색에 농현이 많고 연주법이 엄격하지 않아 그로서는 양스승을 모두 사사하고 싶은 생각에 한갑득스승 앞에 세번씩이나 무릎을 꿇고 빈끝에 어렵게 스승의 노여움을 풀었고 미처 배우지 못한 「산조」 한바탕중 자진모리부분을 10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익힌 일화를 지니고 있다. 혹독한 학습시기를 지나 호남일인일기대회와 아시아민속예술경연대회 특상으로 국악계의 시선을 모으는 기대주로 성장했으나 거문고만으로는 생계를 이을 수가 없어 70년대 초반 그는 대림산업소속으로 파이프배관공이 되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적이 있고 1년만에 돌아와 이번엔 분식집이라도 내기 위해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중 때마침 국립국악원의 교사직에 추천되어 다시 자신의 정도인 금선을고를 수 있게 되었다. 김무길은 거문고 전바탕을 연주하는 데 있어 어느 한 스승에 치우침이 없이 한번 신쾌동류를 연주하면 다음은 반드시 한갑득류를 연주한다.그의 연주는 선율이 단순하고 반복되는 음이 많으면서도 무기교의 기교로 왕유의 「이윽고 달이 빛을 안고 찾아오는 죽림」과 강희안의 「가는 음율 솔바람과 어울리는 녹기금의 멋」을 구사하여 점차로 절대음악에 눈떠갔다. 지난 91년 국립국악원 국악당에서 열린 「그동안의 독공을 자랑하고 대성을 위한 은비의 무대」를 보고 원로 성경린씨가 『웅건하고 청완한 가락을 성취하니 가위 명인반열』이라고 한 것은 국악인 최상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김무길의 예인으로서의 자세는 옛것을 지키고 현대화나 서구화를 극구 꺼리는 전통파의 한사람이다.그의 연주는 「일시에 피어나는 꽃의 미가 아닌 오랜 풍상을 겪은 고목의 미」이기 때문이다.성격 또한 거문고가락처럼 우직하고 담박하면서도 고집이 세고 옳은 일이 아닌 것에는 지조를 굽히지 않는다.가족은 박초월 판소리 「수궁가」의 계승자인남해성이수자로 인정받은 부인 박양덕과 딸 미선(중앙대 예대4년·거문고전공)이 그의 뒤를 잇고 있고 아들 성혁(추계예대)도 아쟁을 배우고 있다. 최근 새로 이사한 그의 반포동 집에는 스승 신쾌동·김윤덕·한갑득등에게 물려받은 명금들이 작은 바람소리에 소스라칠듯 문풍지를 울리는 가운데 그는 스승들의 유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동살풀이」장단을 넣어서 만든 「김무길류 거문고산조」를 이루려는 연구에 전력하고 있다. 기쁨이나 슬픔·동경이나 이상에 구애되지 않고 들뜬 변화를 읽어낼 수도 없는 그의 가락은 당대 향산거사가 노래한 「비시무성승유성」,이른바 「소리 없는 것이 있을 때보다 더 유감하다」는 거문고의 정취와 정조를 얻어내었고 이제 애써 줄위의 음을 다루지 않아도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명률의 경지에서 「무하유의 이상향」을 거침없이 펼치려는 시기다. □연보 ▲1943년 서울출생 ▲1956년 한갑득거문고 사사 ▲1957년부터 신쾌동거문고 사사 ▲1962년 서울국악예고 졸업 ▲1963년 호남일인일기 경연대회 및 아시아민속예술경연대회 특상 ▲1966년부터 한갑득거문고 사사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신쾌동거문고산조 전수생 ▲1978년∼88년 국립국악원 수석 ▲1981년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발표 ▲1982년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발표 ▲1983년 한갑득류 거문고산고 발표 ▲1985년 독일 백림음악제참가 공연 ▲1986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장원,중요무형문화제 제16호 거문고산조 신쾌동류 이수자지정,국립영화제작소 영화「거문고」출연 ▲1987년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CD출반,신쾌동류 거문고산조 전바탕독주 ▲1990년 소련순회공연 ▲1991년부터 서울국악예고 및 중앙대출강,국립국악원 무형문화재정기공연 「김무길 거문고산조(신쾌동류)」발표 ▲1992년부터 한국국악협회이사,전북대·목원대출강,삼성문화재단초청 베트남 중국공연,국악원 일요·토요명인전 신쾌동류 및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전바탕독주회 ▲1996년 「한갑득류 거문고산조(75분)」「신쾌동류 거문고산조(60분)」전바탕CD출반(서울음반) KBS 국악대상(94년)
  • 제11회 향토문화 대상/대상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

    ◎본상 개인 5명·단체 1곳 선정/새달 1일 시상식 서울신문사가 전통문화 계승과 지역문화의 창달에 힘써온 숨은 일꾼을 찾기 위해 제정한 제11회 향토문화대상 수상자가 22일 결정됐다. 전통문화부문과 현대문화부문으로 나누어 전국의 시·군 문화공보실과 문화원·예총·향토사학자들이 추천한 단체 및 개인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영예의 대상에는 김정명 춘천문화원장(75)이 선정됐다. 본상중 전통문화부문에는 ▲김상곤(남원애향운동 본부장·58·전북 남원) ▲대구향토문화연구소(대표 김택규·66) ▲최종덕(양양 오색국교교사·52·강원 양양)씨등 3명이,현대문화부문에는 ▲이윤수(시인·82·대구시) ▲이은구(이천문화원장·52·경기 이천) ▲심우성(극단 서낭당 대표·62·충남 공주)씨등 3명이 뽑혔다. 대상에는 상금 3백만원,본상에는 각각 2백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올해 심사는 구상(시인)·차범석(극작가)·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민속학)·정영호(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이중한(서울신문 논설위원)씨등 5명이 맡았다. 서울신문사 주최,LG전자 협찬,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향토문화대상 시상식은 오늘 12월 1일 하오 4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대상 수상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소양제」 부활·예술행사 활성화/민속자료실 만들고 삼악산성 복원 앞장 『큰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지역에 묻혀버린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강원도 춘천문화원장 김정명씨(75)씨는 『선인들의 얼이 담긴 향토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작업이 너무 미흡해,후손으로서의 도리를 하려고 애썼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양구군수·강릉시장·도청 상공국장,중소기업 협동조합 도지부장 등을 거쳐 지난 87년 춘천문화원장으로 부임했다.그 때 문화원은 봉의동 도청 앞의 건물에 3평짜리 사무실를 임대해 쓰고 있었다.인원은 여직원 한명과 원장 뿐이었다. 문화재를 간수하는 유일한 기관인 문화원의 당시 역할과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이다.『조상들의 발자취와 손때 묻은 유품들을 추스리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때마침 시립도서관이 새 건물을 짓자,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해 사무실을 도서관으로 옮기고 민속자료실과 영상오디오 자료실·미니 도서실 등을 만들고 지역의 예술·문화 행사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흐지부지됐던 춘천의 향토문화 축제인 「소양제」를 77년부터 부활하고 정월 대보름 놀이와 청소년 유적답사 등도 알차게 추진했습니다』 향토문화를 지키고 가꾸려면 주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솔선하기 시작했다.스스로 강원도 전역을 누비며 선조들의 생활도구와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베틀,소 구유,재래식 쥐틀 등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6백여점의 유물들을 의상,음식,생활,생활방식,습관 등으로 나뉘어 민속자료실에 전시했습니다』 대부분 지금은 볼 수 없는 물건들이다.학생들과 주민들이 문화원을 향토문화의 학습장으로 활용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요즈음은 스러져가는 산성 복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춘천 덕두원리에 10여m 정도만 남아 있는 고대 맥국의 마지막 유적인 삼악산성의 복원 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맥국은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 왕국으로 강원도의 뿌리입니다』 춘천,나아가 강원도의 뿌리인 맥국의 보존을 위해 3년 전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오는 연말까지는 신북읍 발산1리에 맥국터비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앞서 몽고 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던 항몽터전으로,허물어져 자취를 잃어가는 봉의산성을 2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국립 강원박물관을 세우고,지역 인사 17분이 모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시를 읊던 국사봉에 망배도 세워 선조들의 참된 얼을 배우고 잇는 곳으로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정선아리랑 등 전통문화를 12분야로 나눠 책으로 펴내기 위해 서두르는 등 제 2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원장은 『강원도에 제 2의 김유정과 이효석이 배출될 수 있는 문화의 터전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춘향제」를 전국규모의 축제로/김상곤 남원애향운동본부장 지난 85년 춘향문화선양회를 발족해 해마다 춘향제를 창의적으로 유치,전국적인 규모의 축제가 되도록 했다.91년 춘향제부터는 춘향문화대상(학술·예술·여성·언론분야)을 제정해 올해까지 상을 시상해오고 있다.92년 춘향제 때는 「춘향제 60년사」를 발간했으며 93년에는 「춘향전 관계사 학위논문선집」「춘향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발간했다. 투철한 향토애를 바탕으로 남원의 문화전통을 가꾸고 남원인의 품위향상을 위해 애쓰는 것은 물론 현재 춘향제를 세계적인 관광문화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사당 놀이」 등 문화재지정 공헌/심우성 극단 서낭당 대표 59년 사라져 가던 「남사당 놀이」의 연희를 수합해 재연한 이래 특히 전통 인형극과 탈놀이의 발굴조사를 통해 무형문화재의 지정에 공헌해 왔다. 저서로 「남사당패 연구」「무형문화재 총람」「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민속문화와 민중의식」「탈」등이 있으며 「조선무속의 연구」「역과 점의 과학」「연극의 역사」등 20여권의 역저가 있다. 현재는 문화체육부 문화재 전문위원,극단 서낭당 대표,한국민속연구소 소장,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69년 창립… 「향토문화」 회지 발간/대구향토문화연구소 69년 6월 향토사 및 향토문화의 조사연구에 관심있는 교수와 향토사가들이 모여 창립됐다.같은해 12월 회지인 「향토문화」를 육필사본으로 간행하는등 연구회의 발전을 꾀했으며 85년 7월부터는 대우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모임을 활성화 하고있다. 현재 회지는 제7집까지 간행됐으며 조사보고서로는 「경상감사 도임행차순력 복원」「화랑문화의 신연구」「낙동강 유역사」등을 출간할 예정이다.이밖에도 향토사 사료 윤독회,향토사적 답사 등으로 대구 경북지역의 향토문화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87년부터는 각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단체를 결집해 우리 문화유산을 발굴·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76년 청파요 개설… 도예발전 헌신/이은구 이천문화원장 우리 전통도예의 맥을 이은 분청사기의 장인으로 76년 이천읍 사음리에 청파요를 개설해 도예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다. 91년 1월 이천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지역문화 발전은 물론 지방문화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특히 이천문화원이 해마다 10월에 개최하는 이천도자기축제를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문화관광축제로 적극 육성,올해 제9회 이천도자기축제의 경우 외국인 1만5천명을 포함한 25만명의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으며 4억3천만원의 도자기 판매실적과 함께 도예작품전·한국의 잔 특별전·도자기 제작실연등 각종 행사를 마련해 도예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농악대 구성… 전통민속 보존 힘써/최종덕 양양 오색국교 교사 63년 교육계에 투신한 이래 투철한 교육관으로 전통민속예술과 우리 뿌리찾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전통민속예술의 창달 및 계승발전을 위해 사라져 가는 향토민속의 발굴에 힘써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최우수상 3회,종합우수상 2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3차례 수상했다. 양양군 전통민속보존회와 어린이·청년·노인 농악대를 각각 구성해 농악보급 및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청소년 어울마당 지도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여름 피서철에는 해수욕장에서 고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전통민속을 공연함으로써 볼거리를 제공하고 향토민속을 관광자원화해 주민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광복뒤 첫 월간시집 「죽순」 창간/이윤수 시인 지난 45년 「죽순시인구락부」창립 이래 현재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46년 광복 최초로 월간 동인시집 「죽순」을 창간했다.48년 한국문단 최초로 「상화시비」를 대구달성공원에 건립했으며 50년에는 문총(현 예총)구국대 경북지부를 조직했다.79년 동인시집 「죽순」을 복간했으며 83년에는 「전선시첩」1·2·3 합본을 발했다. 85년 상화시인상을 제정,올해로 10회째를 맞고 있으며 90년부터는 상화시 전국백일장을 해마다 실시하고 있다.92년 2월부터 한동안 서울신문에 「향토시인 이윤수 특집」이라는 글을 게재해 필력을 과시했으며 지난해 5월에는 한·일 국교수립후 처음으로 한·일 친선합동시화전을 주일 한국총영사관 초청으로 열었다.
  • 민속 축제(외언내언)

    놀이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하나의 의식적 기능이다.원시인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것은 생존을 위한 온갖 어려움들,사냥의 고통이나 부족간의 투쟁,그리고 자연의 재해등에 시달린 심신을 재생시키기 위한 거룩한 의식이었다.그래서 놀이의 겉모습은 춤과 노래를 통한 흥겨움의 시간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삶을 위한 창조적인 감성이 짙게 깔려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놀이를 유난히 즐겨왔다.마을마다 놀이가 펼쳐지면 모두가 신바람이 났고 이 신바람은 농경생활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와 스트레스를 씻어 주었다.설·추석·단오등 명절은 말할것도 없고 모내기나 추수때 마을은 온통 잔칫집인양 춤과 노래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면서 공동체의식을 다져왔다. 한 나라 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민속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민중적 삶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우리 민족성의 근원인 「한」과 「멋」은 민속놀이속에 살아남아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펼쳐지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이같은 우리 민족고유의 정서를 한껏 뽐내는 놀이 축제다.이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58년 10월.서울 중구 장충동 옛 육군체육회관에서 시작된 이후 전국을 누비면서 3백여종의 민속놀이를 발굴,재현하는등 사라져 가는 향토문화를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해 왔다. 올해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11일부터 13일까지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열린다.「한국의 얼,세계로」라는 주제를 내건 이번 대회에는 전국 19개 시·도 27개팀이 참가,민속예술의 향연을 벌인다.여기에서 서울의 「마포 나루굿」,부산의 「사하방아소리」,대구의 「달성다사농악」등 13개 종목이 첫선을 보인다고 한다. 특히 이번 대회는 같은 곳에서 열리는 백제문화제(9∼12일)와 맞물려 한층 흥겨운 한마당축제가 될것 같다.해맑은 가을하늘 아래 펼쳐지는 올해 대회도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바란다.
  • 전통민속예술 발굴의 장/전국민속예술경연 11일 개막

    ◎19개시도 27팀 공주서 열띤 공연/청소년민속예술제도 함께 개최/작년 대통령상 수상팀 등 8개팀 초청 문화체육부가 주최하고 충남도와 공주시가 주관하는 제3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및 제2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가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열린다. 「광복 50돌 한국의 얼 세계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민속예술경연대회는 11일부터 13일까지 공주종합운동장과 공주 곰나루에서,청소년민속예술제는 14일 곰나루에서 각각 펼쳐지게 된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잊혀져가는 전통민속예술을 보존 전승하기 위해 지난 58년부터 시작돼 그동안 3백여 종목의 민속예술을 발굴 재현해냈고 이 가운데 안동차전놀이등 34개 종목이 국가지정 문화재,정선아리랑등 20개 종목이 시도지정 문화재로 선정됐다. 지방자치제 실시후 처음 열리는 올해 공주 대회는 특히 제41회 백제문화제(9∼12일)와 연계해 관객과 출연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로 치러진다. 올해 「민속예술경연대회」에는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 19개 시·도 27개팀 1천6백90명이 각각 고유의 민속예술 경합을 벌이게 되며 지난해 대회 최우수상(대통령상) 수상팀인 대전 「부사칠석놀이」등 8개종목(7백80명 출연)의 초청공연도 함께 열린다.또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는 전국 15개 시·도 16개팀(9백20명 출연)이 참가하게 된다. 「민속예술경연대회」 출연종목 가운데는 서울 마포나루 주민과 밤섬 주민들이 배를 만들어 진수할 때나 단오날 배의 무사항해와 풍어를 비는 굿인 「마포나루굿」,고된 방아질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한 노동요인 부산광역시의 「사하방아소리」를 비롯해 호남우도농악 판굿에 나타나는 민속극인 광주광역시의 「호남우도 농악 도둑잽이굿」,괴질을 물리치기 위한 한마당놀이인 충남도의 「부여 단잡기놀이」,함경남도 북청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돼온 민속놀이인 「돈돌날이」등 독특한 민속놀이가 포함돼있다.이와함께 대전광역시의 「부사칠석놀이」,「안성남사당 풍물놀이」,「연산 백중놀이」,「홍성결성농요」·「강강술래」,「예천공처농요」,「북청사자놀음」,「예천통명농요」등의 시연도 펼쳐진다.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에서는 경기 동두천여상의 「이담농악」,경북 안동중앙고의 「하회별신굿탈놀이」,충북 보은농공고의 「보은흰돌물다리기」,광주광역시 광산본량중의 「호남우도농악도둑잽이굿」,강원 정선종합고의 「성마령길메는놀이」,부산광역시 한독여실고의 「좌수영어방놀이」,대구광역시 경신여상의 「대구성서농요」,제주 대정여고의 「영감놀이」,광주광역시 광주농고의 「우도농악」,경남 충무고의 「통영오광대」,서울 국악예고의 「소고놀이」,대전광역시 유성농고의 「문창동엿장수놀이」,인천여고의 「은율탈춤」,충남 공주농고의 「공주머슴호미씻기놀이」,전남 여천중의 「호남우도풍물」,전북 전주농림고의 「우도농악」등이 경합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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