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독립 지연
    2026-06-10
    검색기록 지우기
  • 식사 지원
    2026-06-10
    검색기록 지우기
  • 수사 무마
    2026-06-10
    검색기록 지우기
  • 미스 이란
    2026-06-10
    검색기록 지우기
  • 무상 사용
    2026-06-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9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재벌개혁 초일류기업으로 가자」선단·독립경영 비교

    선단식 경영을 각각 독립적인,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정부의재벌개혁 정책의 목표이다. 선단식 경영이란 여러 계열사를 같이 거느리는 경영방식으로 흔히 ‘문어발식 경영’으로도 일컬어왔다.한 그룹 안에 식품,자동차,전자,신문,건설,금융까지 포괄한 것이다. 정부가 재벌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도 재계가 선단식 경영에 집착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무엇보다 어려울 때 계열사들이 서로 도와주고제품을 사줄 수 있다.산업의 사이클상 불경기가 도래할 때 계열사를 도와줘경기의 바닥을 건너게 해주는 것이다.거대 그룹의 간판이 ‘신용’으로 통해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사업초기 위험부담이 많은 새 사업에 진출하는데 선단식 경영방식이 유리하다.그러나 기업이 부실해져도 즉각 퇴출되지 않고 그룹총수의 책임을 추궁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다.계열사의 제품을 비싸게 사주는 방식으로 부당하게내부거래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센터의 김용렬(金龍烈) 박사는 “그룹경영방식이전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선단식 경영방식은 부당 내부거래와 부실기업의 퇴출 지연 등 폐해가 드러난 형태”라고 지적했다.그는 “외국에서는 법과 소송이 발달해 구조적으로 선단식 경영이 불가능하지만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제도를 악용해 선단식 경영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독립기업식 경영은 자금조달이나 신용도가 모두 기업의 재무제표와 신용도에 따라 결정된다.계열사와의 관계도 느슨해진다.경영자의 책임 한계가명확해져 부실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퇴출 여부도 쉽게 결정된다. 독립기업식 경영을 할 경우 기업은 자신없는 분야나 주먹구구식 전망에서새 사업에 뛰어들지 않게 돼 건실해진다.중소기업이 먼저 들어가 번창하는사업에 대기업이 계열사 돈을 빌려 뒤늦게 진입하는 문제점도 고쳐질 공산이크다. 재정경제부 당국자는 “기술 변화가 급해지고 자본시장에서 각 개별기업의평가가 엄격해지는 상황에서 재벌은 독립기업식 경영으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정부는 기업들이 다각화의 폭을 좁히고경쟁력있는 전문업종에 전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정부의 요구가 어느 정도 기업에 수용될지 주목된다. 이상일기자 bruce@
  • 오늘 36회 방송의 날/통합방송법 무산 피해 실태

    3일은 제 36회 방송의 날.그러나 방송 현업인들의 얼굴 표정은 밝지 못하다. 통합방송법 제정이 지난 달 임시국회에서 무산됐고 이달 정기국회에서의 통과 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통합방송법은 권력으로부터의 방송 독립과 다변화되고 다매체화되는 국제 방송계의 흐름에 발 맞춰 방송환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려는 목적의식 아래 진행돼 왔다. 그러나 오늘 방송개혁의 시계추는 여전히 5년전을 가리키고 있다. 최대 쟁점은 방송위원회의 권한을 강화,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장하는 문제.그러나 이 문제로 인해 ‘방송과 통신의 결합’이라는 산업적 환경변화대처는 지연되게 됐다. 지난 90년대초부터 시작된 위성방송 사업 준비에도 불구하고 2000년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법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이때문에 전담팀을 구성,인공위성 사업을 모색해 왔던 여러 기업들이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한국통신과 데이콤 등이 의욕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위성을 2개나 보유하고도 수년째 궤도만 헛돌게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개탄했다.무궁화위성이 활용되지 못해 입은 손실은 연간 70억원,지금까지 253억원이 낭비된 셈이다. 4일 발사될 예정인 무궁화 3호위성도 상업적 이용에 대한 법적 보장없이 국민의 세금을 허공에 쏘아올리는 셈이 된다.위성발사에 3,400억원을 퍼부은한국통신은 지금까지 1,000억원이상의 기회비용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현재 무궁화위성 채널 24개 중 5개(KBS·EBS가 2개 채널씩,케이블TV 방송통신대 1개 채널)만이 시험방송을 위해 이용되고 있을 뿐이며 최근에는 아리랑TV가 해외위성방송을 시작했다. 이 틈을 타 340여개 채널에 이르는 외국 위성들이 전국의 1,000만가구를 상대로 전파를 무한정 쏘아대고 있다. 지난 94년 방송을 시작한 미국의 다이렉트TV가 170여 채널을,96년 출발한 일본의 스카이 퍼펙TV가 100여채널을,영국의 BskyB가 200여채널을 운용하는 것에 비해 우리 방송여건은 후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심지어는 북한도지난 7월부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을 대상으로 위성방송을 시작,체제선전을 강화했다. 대형 중계유선방송업자들의 탈법 행태도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인다.통합방송법 시행 6개월후 케이블TV로 전환될 예정인 이들 업체들이 시청자를 늘리기 위해 외국 위성방송을 송출하거나 홈쇼핑 광고를 하는 등 탈법 방송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사별로 1조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디지털TV 준비작업의 동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독립공사화가 또다시 좌절된 EBS는 재정난을 해소할 묘안이 없어 11월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가장 급한 위성방송의 온전한 출범을 위해 위성방송법이라도 분리입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임병선기자 bsnim@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아리에 아라지 이스라엘 대사

    아리에 아라지 주한 이스라엘 대사는 21일 대한매일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한국형 구축함사업(KDX-Ⅱ)의 함대공 방어시스템 사업자로 이스라엘이 선정되면 상당부분을 한국에서 생산하는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현재 한국 국방부의 미사일 시스템 입찰을 위한 최종작업이 진행중이며독일과 미국업체 및 이스라엘이 물밑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미국의 중재로 팔레스타인측과 체결된 영토와 안보교환 협정인 ‘와이 리버’ 협정이 중단된 상태인데 이유와 전망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예컨데 가자지구의 경우 2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 주민은 5만7,000명에 불과하다.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정착자들의 안전확보 방안을 강구중에 있다.이밖에 종교와 역사,안전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협정이행에는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협정 이행의 지연은 이스라엘 정부의 실행의지를 의심케하는데. 이스라엘정당들이 협정방안에대해 합의를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이행할 것이다.협정은 이스라엘 정부가 맹방인 미국과 이집트 대통령,요르단 국왕에게 한 공약이다.게다가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현재 의회의 강력한지지를 받고 있어 협정이행을 위한 정치적 지도력도 갖추고 있다. ■바라크 총리는 골란고원 반환과 관련,시리아와 직접적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반면 시리아는 이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어떻게 될것 같은가. 대(對)시리아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지난 67년이후 골란고원을 점령해왔다.원칙적으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돌려주고싶다. ■그렇다면 과거 영토확장과 국가방위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유가족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은 그간 양측에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는 5번의 전면전을 치렀다.그러나 유일한 해결책은 정치적 해법 뿐이라는 게 분명해지고있다.여론조사 결과 이스라엘인의 84%가 평화협상 과정을 지지하고 있으며 60%이상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그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에서도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곧 중동을 방문할 예정인데 중동평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아랍권의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변화에 기여할 것으로생각하나. 우리는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남북한의 경우 양 정부가 직접 대화를 한 뒤 국제사회가 4자 회담이니 6자 회담이니 하는 지원노력을 한다.마찬가지다.도와줄 수는 있을 것이다. ■한-이스라엘간 협력은 어떤가. 이스라엘은 정보,장거리통신,우주산업 등에 있어 최첨단 국가이다.특히 인터넷 관련 기술중 15%가 이스라엘 기술이다.우리는 우리의 기술과 한국의 대량생산 및 마케팅 기술의 조합을 바라고 있다. 지난 95년 부임이후 13개 협력안에 합의했고 이중 9개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투자보장,관세협력,최혜국 대우 등등이다. ■이스라엘은 한국 국방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국형 구축함(KDX-Ⅱ)의 중거리 방공미사일 시스템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약 사업자로 선정되면 한국에 어떤 혜택을 줄 것인가. 현재 입찰을 위한 최종단계에 있다.이스라엘의 ‘바라크 시스템’은 지난 10년간 100% 성공률을 보였다. 이스라엘이 사업자로 선정되면 미사일 시스템의 많은 부분을 한국에서 생산하도록 할 계획이다.한국 기업은 엔진,유도시스템 등에 있어 첨단기술을 제공받게 될 것이다. ■한국의 금융위기 전말(前末)을 목격했는데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국이 지금까지 한 것은 거의 기적과 같다고 본다. 금융부분이 변화됐고 재벌개혁과 경쟁력 강화는 거의 달성했다고 본다.신용평가기관인 S&P가 한국의 투자등급을 상향조정한 게 증거다. 박희준기자 pnb@
  • [데스크칼럼] 불순한 3金청산론

    97년 12월 대선 직전의 일이다.한 언론사 편집국의 말석을 지키고 있던 때편집책임자가 암암리에 당시 여당 후보 지지발언을 하거나 제작방향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비애와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당시 보수언론의 대체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나 싶다.공·사석에서 김대중후보를 거론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했고 또모험이었다. 공공연히 비난과 배척의 인물이 된 DJ. 여기에는 객관적 검증이나 과학적분석없이 무조건적으로 용공이며 거짓말쟁이이며 과격하다는 식으로 매도된다.시중에 유포된 공안조직의 정보조작,또는 공작차원의 유언비어를 그대로따른 것이다.진실·공정보도의 가치는 김대중후보에게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런 제작태도가 거리낌없이 통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한마디로 지역패권주의와 권력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이 점에서 DJ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않았다.61년 5·16쿠데타이후 근 40년 동안 DJ는 억눌린 자,약한 자의 반열에서 외롭게 압제자에 맞서 싸워왔다.이때 언론은권위주의 정권의 개발전략의 동반자로 나서면서 특혜를 받았고,’영특한 언론인’은 세속적 출세가도를 달렸다.산업화과정에서 형성된 이른바 지연 학연을 동원한 천민자본가와정·관계의 들러리를 서며 부도덕한 빵부스러기에 탐닉하다 보니 약한 자는밟아도 괜찮다는 그릇된 규범이 자리잡은 것이다.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어준 대가로 언론귀족의 자리에 오르면서 뜬구름잡기식의 훈계나 궤변으로 여론을 오도한다.관념적이고 무책임한 양비론으로 고상한 심판관 노릇을 하며호의호식해온 세력이 된 것이다.거기에 DJ는 학연이나 지연에서 그들과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YS보다도 더 훨씬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불이익을더 당했다. 이런 언론이 지금 경계의 인물로 누구를 지목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자명하다.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DJ는 ’일그러진 영웅’에 다름이 아니었다.양김(兩金)중 굳이 차별화시켜서 본다면 YS는 멋있고 저돌적이며 어려운 것도 쉽게 풀어간다는 밝은 면이 부각되고,DJ는 여전히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진다.특히 유력언론이라고 자처하는 보수언론일수록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의 더 큰 거짓말에는 관대하면서 DJ의 사소한 거짓말에도 가혹하기 그지없었다.양김 중 이념성 투쟁성 지성 민주화행로 등이 천양지차인데도 한묶음으로 싸잡아 평가하면서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지도자에게 결과적으로 불이익을 안겨주기도 한다. 최근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3김 청산론이 나온다.’낡은 구습과 두터운 충성세력에 기대어 독선과 권력욕에 찌들어가는 노회한 정치인’3김은 물러가라고 목청을 돋운다.그러나 거기에는 김대중대통령을 흠집내려는 저의가 숨겨져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그들은 언제나 DJ가 살아움직이면 관속에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런 기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그 이유는 자명하다.그들의 입장에서 DJ가 정권을 잡아 개혁을 서두르는 것이 불안하고,잘하면 잘할수록 그동안의 매도와 폄하가 틀려가니까 더욱 못되기를바라는 것이다.독재정권과 함께 일그러진 초상을 그린 결과 스스로 성향과계층적 기반이 다르다고 보고 도처에 함정을 파놓고 있다.대안도 없이. 그들은 DJ는 없는 것으로 치부했는데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창출하자 이익을 추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되는 모양이다.때묻은 기득권세력과 부패커넥션을 형성해 기어이 나라를 거덜내고 정권을 빼앗긴 한나라당이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우군이라고 느끼는 이유도 알 수 있다.그래서 측면지원해주기 위해 YS가 정치재개를 선언하자 이때다 하고 3김 청산론의 선봉에 서고 있다.이런 음험하고 불순한 저의를 감춘 채 30년 3김의 패거리정치가 신물이난다고 법석을 떤다.30년 군부독재·부패정권은 지루하지 않고 차별화가 뚜렷한 김대중정부 1년반이 지겹다고 호들갑을 떠는 속셈이 무엇인지 우리는냉철하게 주시해야 한다. 이제라도 언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더 나쁜 김과 덜 나쁜 김을구분하고,군사독재의 후계자로서 역할이 끝난 김과 권력의 현실적 종속변수로서 마지막으로 국가에 헌신해야 할 다른 김,그리고 국민이 혁명하는 마음으로 찍어준 표로 선택된 또다른 김의 역할이 무엇이며 아름다운퇴장이 무엇인지를 구별해서 대안을 제시해주는 일이다. 독재정권 시절 현란한 궤변으로 패대기치듯 무턱대고 3김을 공격하던 불순한 보수언론의 태도야말로 청산돼야 할 구태다. honglee@
  • 동티모르 독립투표…유엔, 8월말로 연기

    모스크바 유엔본부 AFP AP 연합 유엔은 오는 8월 8일로 예정된 동티모르장래에 대한 주민투표를 8월 말로 연기키로 했다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22일 발표했다. 아난 총장은 모스크바 교외 공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현지의 안보 상황이 보다 적절해야 하며 투표 실시에 따른 세부 계획들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그는 이 모든 점을 고려하여 주민투표를 약간 지연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한 뒤 그러나 투표는 8월에 실시되며 동티모르인들이 자유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유엔 국제평화유지군-현황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코소보의 평화회복을 위해 나토 주도하의 국제평화유지군(KFOR) 배치를 결의함에 따라 유엔의 평화유지군 활동에 다시 관심이쏠리고 있다.지난 88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던 유엔 평화유지군의 과거및 현재 활동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유엔 국제평화유지군은 현재 전세계 14개 곳에서 1만3,000여명이 활동 중이다. 이들은 아프리카,중동,발칸반도,서남아시아 등 국제사회 대표적 분쟁지역에서 무장군대,군경부터 민간 감시단까지 다양한 형태로 평화유지에 힘을 쏟고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임무와 영향력 또한 하나같지 않다.휴전지역을 접수,무장해제,선거감시,경제재건 등 수렴청정에 진배없는 권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정부의 경찰력을 조련하는 ‘사관학교’ 역에 그치기도 한다. UNMIBH(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유지군)와 UNMOP(크로아티아 평화유지군)은 평화유지군이 제2의 정부로 기능한 대표적 사례.옛 유고연방 내전 주체들이 95년 데이튼 평화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각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크로아티아 지역에 분쟁재발 방지 및 긴장완화를 임무로 진주했다.특히 UNMIBH는 나토 가입국들이 다국적군 무장병력 대부분을 이뤘기 때문에 코소보사태가 터진 뒤 평화유지군 준거사례로 거론되기도 했다. UNTSO(유엔정전감시단)은 48년 유엔 평화유지군 창설 조직으로 중동에 투입돼 지금에 이른다.48년 휴전 및 49년 휴전협정 감시,67년 제2차 중동전 중재 등을 떠맡았다.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철군 감시를 위한 UNIFIL(유엔레바논잠정군),이스라엘-시리아간 휴전 및 국경협정을 감독하는 UNDOF(유엔해방군) 등과 연대활동 중. 평화유지군은 때때로 파견국 정부의 강한 반발로 각종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91년 걸프전 종전과 함께 이라크 봉쇄,양국간 국경침범 방지 등을 목적으로 구성된 UNIKOM(이라크-쿠웨이트 정전감시단)은 이라크 정부와 첨예한 신경전을 편 사례.UNICOM에 대해 이라크 정부가 유엔 종전안에 따른 대량살상무기 관련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단원들을 추방하자 미국이 공습에 나서기도했다. UNMOGIP(인도-파키스탄 군사감시단) 역시 파견지역 반발로 활동이 주춤해졌다.인도,파키스탄 독립 2년 뒤인 49년,양국간 카슈미르 지역 국경을 확정한‘카라치 협정’에 따라 그 이행 감시를 위해 투입됐다가 72년 카라치 협정이 개정되자 임무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인도 정부측에 의해 활동이 제약됐다. 이밖에 아프리카 지역에 ▲MINURCA(중앙아프리카 공화국 평화감시단)▲UNMOSIL(시에라 리온 내전감시단)▲MINURSO(서 사하라지역 분쟁감시단),미주에서 MIPONUH(아이티 경찰감시단;아이티 경찰 조련임무),아시아에서 UNMOT(타지키스탄 정전감시단),유럽에 ▲UNFICYP(키프러스 국제평화유지군)▲UNOMIG(그루지야 휴전감시단) 등이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완료된 평화유지군 활동 유엔은 지난 48년 평화유지활동을 처음 시작한 이래 51년간 유엔의 이름으로 총 49회의 국제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35차례 활동을 완료했다. 그간 111개국에서 75만명 이상의 군인,경찰 및 민간 봉사자가 파견돼 활동에 공헌했으며 1,581명(98년 8월말 현재)이 고귀한 목숨을 바쳤다. 이미 종료된 평화유지활동을 지역별로 보면 아프리카 13회,중·남 아메리카7회,아시아 6회,유럽과 중동 각각 5회다. 아프리카 대륙의 대표적인 유엔평화유지 활동으로 앙골라검증단(UNAVEM)을우선 들수 있다.UNAVEM은 앙골라 정부군과 반군인 앙골라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간의 평화협정에 따른 쿠바군의 철군이행,민족화합,완전 정전 및 UNITA군의 무장해제 및 무기회수 등을 검증하기 위해 89년초부터 97년 6월말까지 3단계에 걸쳐 구성되었다.프랑스,헝가리,인도 등 31개국으로부터 283명의군감시단과 3,649명의 군병력,288명의 경찰이 파견됐다. 앙골라 정부군과 반군의 협정이행 지연 등을 이유로 유엔은 UNAVEM을 유엔앙골라관찰단(MONUA)으로 대체했으며 이 관찰단은 99년2월 활동을 종료했다. 유엔은 르완다의 정전협정 감시와 수도 키갈리의 치안유지 등의 감독을 위해 93년 10월부터 3년여 동안 르완다지원단(UNMIR)을 파견했으나 26명의 목숨을 잃는 비극을 맛보았다. 코스타리카,엘살바도르,과테말라,온두라스,니카라과 등 중미 5개국에서의유엔 활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유엔 중앙아메리카관찰그룹(ONUCA)은 89년 말부터 3년 동안 1,000여명이 파견돼 인명피해 없이 이들 5개국 정부의 게릴라 지원중지와 게릴라해산 등을 감독했다.이와 함께 엘살바도르 정부군과반군간의 정전 감시와 아이티의 경찰제도 확립 및 경찰훈련을 위해서도 파견됐다. 다시 포격전이 터졌지만 카슈미르 지역에서는 2차 전쟁이 발발된 지난 65년유엔 인도-파키스탄관찰단(UNIPOM)이 파견돼 임무를 수행했다. 또 아프가니스탄,캄보디아 등지에도 나갔는데 특히 93년 말까지의 유엔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는 캄보디아 재건에 큰 일을 해냈다.중동에서 이란과 이라크가 격돌하자 테헤란과 바그다드에 감시단을 파견,정전과 철군을 감시했다. 크로아티아 신뢰회복기구(UNCRO),유엔 민간관찰지원그룹(UNPSG),유엔보호군(UNPRFOR),유엔 예방배치군(UNPREDEF) 등의 이름으로 옛 유고연방 지역에 파견된 유엔군은 세르비아계 무장 민병대가 판을 치는 이 지역에서 민간인들에게 수호천사 역을 다했다.92년 2월부터 3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신유고연방 및 마케도니아에 나갔던 3만9,0000명의 유엔군은 비행금지구역 감시,비무장지대 설정,인도적 구호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167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박희준기자 pnb@
  • 경찰 수사권 독립 찬성/ 반대

    *찬성 자치경찰제 실시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 경찰 수사권 독립문제가 반드시 검토돼야 한다. 영국 미국 일본 등 자치경찰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가 경찰에 독자적인 수사권을 부여하고 있다.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검사를 수사 주재자로,경찰은 보조자로 해 검사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있어 수사 진행상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고 있다. 경찰은 매년 발생하는 150여만건의 범죄 가운데 96.7%를 실질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그런데도 경찰은 제도상으로 수사의 주체가 아닌 보조자에 불과하다.이는 책임과 권한이 일치하지 않는 엄청난 모순이다. 현행 소송법상 경찰은 시종일관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지만 소수의 검사 인원으로 연간 150만건에 이르는 범죄사건 수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경찰에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경미한 사건도 절차상 검사의 검토와판단을 거치게 돼있는 점은 국민의 불편과 심리적 부담감만 가중시킨다.사법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증거능력이 없어 피의자나 참고인이 검찰에서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서장 등 경찰간부의 지휘와 검사의 지휘가 중복되다보니 지휘·명령체계가 이원화돼 있어 수사지연과 업무혼선이 초래된다. 이처럼 중첩된 검·경의 수사업무는 국가 인력과 예산의 비효율적인 집행이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경찰 수사권 독립에 대해 수사상 인권 침해의 가능성이나 법률소양 부족,법 적용의 형평성과 일관성 결여 등을 우려하고 있다.하지만 영장실질심사제도나 국가인권위원회,시민단체의 감시 등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기능이 강화되고 있다.경찰 또한 그동안 고시특채나 경찰대생,간부후보생,법대생 특채 등을 통해 고급 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경찰이 처리한 사건 전부를 검찰에 송치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고사건 처리기준에 관해 통일된 지침 등을 마련한다면 법집행의 통일성과 형평성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金學培 총경]*반대 경찰이 이번에는 자치경찰제 도입과 관련하여 검사의 수사지휘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즉 수사권 독립 주장을 하고 있다. 경찰은 모든 사건 사고에 대해 검찰이 일일이 지휘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자치경찰제의 정착이 어렵다며 경찰 수사권 독립을 자치경찰제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적극 추진중이라고 한다.그러면서 수사 소추 재판을 각각 경찰 검찰 법원에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자치경찰제도는 경찰 내부의 조직 인사 예산 등 권한 일부를 지방자치단체에 이양,자치단체가 치안분야에 대해서도 책임행정을 하도록 하자는것이다.반면 검사의 수사지휘는 인권침해 사례를 방지하고 수사의 적정성을확보하기 위해 법관과 같은 자격을 가지고 신분이 보장된 검사의 지휘통제를 수사절차 진행과 동시에,또는 사전에 철저히 하자는 형사사법절차의 기본원리에 속한 것이므로 서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이다. 지역갈등이 심화되어 있는 현단계에서 자치경찰이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지않고 지역의 이해만을 고려한 경찰권 행사를 할 경우 전국적인 법집행의 형평성 통일성을 해할 뿐 아니라 통치권 행사에도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독일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일찌감치 그 논의가 종결됐고 최근에는 경찰의 기능 중 수사기능은 법무부에 편입시켜 그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미국 영국 일본 등도 현실제도와는 상관없이 검찰의 경찰수사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감독권한이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수사 소추 재판을 경찰 검찰 법원에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는 마치 병원에서 수술준비,수술,수술후의 회복과정을 3분하여 별개의 자격을 가진 자가 담당해야 견제와 균형이 이뤄진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수사권 독립문제는 기관간의 권한쟁의 문제가 아니라 수사와 소추의 불가분성,국민의 인권 및 적법 절차보장이라는 형사사법정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검토돼야 한다. [尹錫正 변호사]
  • 美·中 관계 다시 급속 냉각/배경과 전망

    미국과 중국 관계가 다시 삐걱거리고 있다.지난 97년 말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미국 방문 및 8개월 뒤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답방으로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깃발을 앞세우며 고속 순항하는 듯 보이던 두나라 관계에서 마찰음이 커지고 있다.미국의 전역 미사일방위(TMD)체제 구축,중국의 미국 핵기술 절취 의혹 등 악재가 겹치면서 상호 비난 수위가 높아지고 관계가 냉각되고 있다.서로 ‘동반자’라고 손을 맞잡던 두나라의 이번 갈등은 예전처럼얼마 후 가라앉을까 아니면 전에 없이 악화되어 갈까.갈등의 쟁점 및 근본배경,양국 관계의 미래상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핵기술 절취 의혹 중국이 미국 국립연구소의 핵기술을 훔쳐내 소형핵탄두 제조에 이용했다는 의혹.미국내에 광범위한 반중국 여론을 불러일으켰다.미 공화당은 “중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안보를 희생시켰다”며 민주당 정부의대응을 비난,정치쟁점으로 부각시켰다.공화당은 클린턴정부가 96년 이 사건을 인지하고도 은폐와 소극대응으로 일관했다며 중국과 대중국 포용정책을밀어붙쳐온 민주당 정부를 수세로 몰고 있다. 중국은 사실을 부인하면서 미국내에 반중국 세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며 공격적 대응 자세를 분명히 했다.국가적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중국의 비난과 부인에도 불구,샌디 버거 안보보좌관은 지난 16일 이 의혹이 사실임을 확인했다.관련된 중국계연구원은 해당 연구소에서 해고됐다.미국은 4월10일부터 시작되는 주롱지(朱鎔基) 총리의 미국방문때 의제로 다루겠다고 밝혀 스파이 논쟁은 확대될 전망이다. ▒TMD(전역 미사일방위체제) 외부 미사일 공격에 대한 요격 미사일망을 구축한다는 미국의 구상으로 중국의 반발을 일으켰다.미국이 일본과 함께 계획을 추진하는 데 대해 “중국견제”라며 비난했다.중국을 가상 적으로 삼고 방위체제를 강화한다는 우려다.또 합리적인 방위수준을 넘어서는 ‘공격적인계획’이며 미·일 방위체제의 공격력을 높일 것이라며 긴장하고 있다.특히타이완(臺灣)의 TMD참여 가능성은 베이징 당국을 자극했다.탕자쉬앤(唐家璇)중국 외교부장은 이달 초 “타이완을 참여시키는 것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등 지역안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권문제 “중국의 인권상황이 98년 가을부터 악화되고 있다”는 지난 2월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를 시작으로 두나라의 인권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미국의 ‘공세’에 중국도 지지않겠다는 듯 비난 성명을 내며 반격의 수위를높였다.미국이 불법구금과 불합리한 재판 등을 문제삼자 중국은 ‘내정간섭’이라며 맞받아쳤다.3월초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중국방문은 중국내 반체제인사 구금 등에 대한 이견으로 껄끄러운 분위기로 끝났다.지난 2월말 미 상원은 99-0이란 압도적인 표차로 금년 제네바 유엔 인권회의에서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중국은 “결의안 채택의 경우 두나라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될 것”이라고 경고,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오는 6월 텐안먼(天安門)사태 10주년을 맞는 중국으로선 어느때보다도 인권문제에 대해 민감한 상황이어서 정치범 석방요구 등 미국의 인권공세에 평소보다 더날카로운 반응이다.티베트와 신장지역 등 중국소수민족지역의 인권탄압 의혹도 불씨가 되고 있다. ▒미·일 방위협력지침 4월 일본 국회에서 통과가 예상되고 있어 중국 대(對) 미국·일본 간 또 한 차례의 풍파가 예상된다.동북아에 유사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본 자위대의 활동 범위와 내용을 확대한 것이 지침의 골자.활동 범위에 타이완 해협이 포함된 것이 중국을 건드렸다.중국은 ‘하나의 중국정책’을 훼손하는 주권침해 행위라며 분개했다.일본이 필리핀 해협 등 동남아지역까지 ‘유사시의 활동범위’을 넓힌 것도 미국이 막후에서 일본을 꼬드겨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시켜려는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과 무역분쟁 미국의 태도는 지난 10년동안중국의 WTO가입을 불가능하게 해온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중국에게 WTO에 가입하려면 관세를 더 내리고 불공정한 무역관행을 고치라고 요구하고 있다.지연되는 협상은 감정의 골을 벌여놓고 있다.미국측은 지난해 무역역조가 540억달러나 된다며 추가 시장개방을 원하고 있다.데일리 미 상무장관은 최근“우리는 시장을 열고 있는데 그들은 닫았다”며 “대중 무역적자가 정치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달았다”고 경고했다. - 배경과 전망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과 ‘앞으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잠재력을 가장많이 가진’ 중국.두나라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중국이 경제적 성장에 따라 제3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반서구적인 세력을 이끌며 서구와 대립할 것이란 논리를 미국은 포용정책속에서도 뿌리치지 못한다.‘신황화론(新黃禍論)’적인 ‘중국 위협론’은 다른 가치관과 정치제도·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중국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타이완 문제도 원죄처럼 두나라의 진정한 신뢰를 막고 있다.타이완을 독립된 실체로서 존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미국의 정책은 좁혀질 수 없는 베이징과 워싱턴의 거리다.“타이완은 중국의 일부며 중국의 주권이 미친다”는원칙은 일단 수용하면서도 이와 다른 미국의 정책과 행동은 중국에겐 대미(對美) 불신의 근원이다.“타이완은 침몰하지 않는 미국의 항공모함”이란 중국의 비난 속에는 지난 96년 타이완 해협에서의 중국의 미사일 발사훈련과같은 타이완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 재연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같은 갈등요인에도 불구,두나라는 과거 냉전시대의 미·소관계처럼 악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중국은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위해 미국의 자본과 기술및 시장을 필요로 한다.갈등과 화해의 지속적인 반복 과정속에서 두나라가대화와 협조를 통한 국익을 추구해 나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상황에 자주 노출되겠지만 파국은 피하리란 것이다.한반도 문제를 비롯,핵확산,위안화 가치절하,테러 등 지구촌의 각종 정치·경제문제해결을 위해 양측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석우
  • “체감경기 6개월내 회복”…전철환 한은총재 회견

    全哲煥 한국은행 총재는 “경기가 지난해 4·4분기나 올 1월에 저점을 지난것 같지만 아직 통과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며 “수출주력 상품을 제외한 다른 부문에서는 경기회복을 체감하려면 앞으로 6개월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全총재는 이어 “물가도 안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시중자금을 여유있게 공급해 금리를 낮게 유지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또한은 고유 업무인 통화신용정책에 대해 “정부가 금리문제를 한은보다 먼저발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6일로 취임 1년을 맞는 全총재를 대한매일 경제과학팀 廉周英 차장이 3일 만났다. ■한은이 통화신용정책 권한을 확보한 지 1년이 다 돼 갑니다.그러나 아직정책 선도기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부는 금융 기업 정부부문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인·허가권 등 이른바‘권력’을 동원하는 반면 중앙은행은 이런 권한이 없습니다.또 지금은 기계의 부속품을 바꾸는 구조조정기여서 기름(통화정책을 통한 이자율 조정)을넣어도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한은의 역할이 부각될 것으로 보십니까. 임직원들에게 “구조조정이 끝난 다음은 우리가 나설 차례”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구조조정은 이제 30% 가량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올해는 지나야통화신용정책의 작동 매커니즘이 복원될 것 같습니다. ■한은이 정부논리에 끌려다니며 여전히 대외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정부가 구조조정 비용으로 쓸 국채를 한은이 직접인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결국 시장발행을 관철시키지 않았습니까.청와대 회의에 가서도 “직접인수는 안된다”고 버텼습니다.한은이 국채를 인수하면 돈이 풀려 물가불안 요인이 되기 때문이지요.한은의 ‘공’을 언론에서 너무 몰라 주는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는 경기저점을 지난해 4·4분기로 보고 있습니다.그런데 지표경기와 체감경기의 괴리가 여전히 큽니다. 경기가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아직 저점통과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지난해 4·4분기나 올 1·4분기에 바닥을 친 것같기는 하지만 경기가 ‘L’자형이 될 지 ‘U’자형이 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올 경제성장률을 어떻게 내다보십니까. 한은은 연초에 올 경제성장률을 3.2%로 수정 전망한 바 있습니다.상반기에는 2%대,하반기에는 3%대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구조조정의 진전과 신용등급의 상향 조정,외환·금융시장의 안정 등으로 경제주체들의 불안심리가 해소되면서 소비·투자 등 내수의 회복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예측해 하반기의 성장률을 상반기보다 높게 잡았지요. ■물가문제가 대화의 소재에서 사라진 느낌입니다.올해에는 물가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까.내년 총선을 앞두고 올 하반기에는 통화관리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물가가 안정돼서 그러는 지,(정부가) 담배 값을 비롯한 공공요금을 마구 올리는 것 같습니다.시중에 돈이 많이 풀린 것은 사실이지만 올해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올 하반기에는 경기회복세가 확산되고,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질 것으로 보여 통화공급을 약간 낮추는 쪽으로 통화신용정책을펼 계획입니다.일부에서 걱정하는 것처럼 정치논리에 흔들리지 않고 물가안정목표(3±1%)를 차질없이 달성하겠습니다. ■금리조정은 한은의 고유 권한인데도 외부 목소리가 앞서거나 끼어들곤 합니다.지난해 연말에도 콜금리를 5%대로 내리겠다는 얘기가 정부 쪽에서 먼저 나오지 않았습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그래서 정부 당국자에게 몇번 화도 냈습니다.그렇지만언론에는 이미 보도된 상태고….정부가 금리문제를 먼저 얘기하면 금융시장에 불필요한 충격을 주고,경제주체의 의사결정에 혼선을 부르게 됩니다.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 신뢰도를 해칠 우려도 있습니다. ■한은법이 개정돼 지난해 4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한은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미흡하지는 않습니까. 독립성을 높이긴 했지만 중앙은행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엔 미흡한 점도있습니다. 全총재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모든 부문에서 구조조정이 급속히 이뤄지고있는 와중이어서 통화신용정책의 효과가 외부에 잘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은이 펴는 통화신용정책에 대해 95% 이상 확신을 갖고 있으며,지금의 금리정책이 기업구조조정을 지연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 오늘의 눈-신중치 못한 검찰간부 언행

    沈在淪대구고검장의 검찰총장 퇴진 요구는 많은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했다.검찰의 생명인 상명하복의 정신이 무너졌다고 판단,검찰의 와해로 진단하는성급한 시각도 있다. 그런가 하면 대전수임비리 의혹이 검찰의 집안싸움으로 비화한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법조인도 적지 않다. 여권과 검찰 수뇌부는 沈고검장의 ‘돌출성’ 항명이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해서는 안된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본질은 李宗基변호사로부터 향응과전별금을 받은 沈고검장의 ‘혐의사실’이지 그가 내뱉은 총장퇴진 요구는별개라는 것이다.이 때문에 검사들의 집단행동 가능성도 일축한다. 크게 보자면 맞는 말이다.그럼에도 이같은 대응에 만족하다가는 또다시 검찰의 위기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물론 검찰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렵게 도입한 총장 임기제를 무시하고 검찰에서 잔뼈가 굵은 고위 간부가 “총장 물러나라”고 요구한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공권력의 보루인 검찰조직에서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쳐고검장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자신이몸담은 조직을 ‘권력의 시녀’로 매도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같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沈고검장의 발언에는 쉽게 간과해선 안될 대목도 없지 않다.특히 ‘정치검찰’ 비판은 검찰로서는 뼈아프지만 곱씹어보아야 할 대목인 것 같다.상당수 검찰 관계자는 펄쩍 뛰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국민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이 바라는 검찰상은 강하지만 공정하면서 빈틈없는 검찰이다. 검찰의 총수가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지연에 대해 “미치겠다”는 표현을 쓴 것이나 대검 차장이 沈고검장의 돌출행동에 ‘치졸한 작태’라고 맞받아친 것은 아무래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검찰 수뇌부의 언행이라면 태산보다도 신중하고 무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검란(檢亂)이 검찰 수뇌부의 진중치 못한 언행에서 비롯된 측면도있다는 일각의 지적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金경찰청장 간담회

    金光植 경찰청장은 18일 “앞으로 경찰인사는 능력과 실적,지역 형평성,경찰발전 기여도 등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겠다”면서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 외부의 부당한 청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金청장은 이날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이달 말로 예정된 경찰 후속인사와 관련,“지연 학연 혈연 친소관계 등을 배제하고 연공서열식 인사관행을탈피해 전문성과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과감히 발탁,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개혁적 인사가 될 것”이라면서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면 인사의 폭은 예년보다 다소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金청장은 이어 “경찰이 인지해 처리하고 있는 강·절도,폭력,과실치사상등 일정 범위의 민생침해 범죄에 대해서는 송치할 때까지 검사지휘 없이도수사할 수 있도록 추진할 방침”이라고 경찰의 수사권 독립 의지를 밝혔다. 金청장은 “97년의 경우 민생침해 범죄는 87만8,610건으로 총범죄 145만2,097건의 60.5%에 달하고 있다”면서 “이런 유형의 범죄는 경찰이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함으로써 경찰수사의 책임성과 수사역량을 높이는 동시에 검·경의 이중조사에서 오는 국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도 경찰에 독자적 수사권을 부여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 5대 그룹 개혁 본격화­반도체 2社 실사 발표와 LG 반발

    ◎대기업 빅딜 파란 우려된다/정·재계합의문 원칙 흐려질 수도/금감위 초강경 대응으로 압박/他부문 구조조정 악영향 줄 듯 대기업 구조조정 판도에 또 다시 파란이 일고 있다. LG반도체가 24일 A.D.L사의 경영주체 선정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함에 따라 지난 7일 청와대 정·재계간담회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원칙 자체가 깨져버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금융감독위원회 등 당국이 여신중단과 여신회수 같은 초강수로 LG를 압박할 채비에 나서 최근들어 정부와 재계 사이에 흐르던 훈풍이 순식간에 삭풍으로 바뀔 조짐마저 보인다. LG는 이날 선정결과 발표 직후 “한쪽 당사자를 배제한 채 독단적으로 진행돼 결코 신뢰할 수 없는 평가여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12·7 정·재계 합의문은 ‘구조조정 지연에 귀책사유가 있는 기업에 대해 채권금융기관은 신규여신 중단 및 기존여신의 회수조치를 실행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정부의 입장은 간단하다.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함께 합의한 사항을 깨는 기업에 대한 시범케이스 차원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반도체 빅딜이 파행으로 치달을 경우,가뜩이나 삼성차의 SM5 생산여부로 난항을 겪고 있는 삼성­대우 빅딜에도 나쁜선례를 남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5대그룹은 업종전문화,상호지급보증 해소,외자유치 등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 260여개인 계열사를 합병·매각·청산·분사 등을 통해 절반수준으로 줄여 업종전문화를 달성해야 하고 올 연말까지 이(異)업종간 상호지보를 완전히 해소해야 한다.부채비율 감소,외자도입도 당면과제다. 그러나 이들 과제는 정부와 채권금융단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LG의 반발로 인한 파문이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될 경우,다른 기업의 구조조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강경노선을 고수,독자노선을 선언할지도 모를 LG와 반도체 통합을 압박하고 있는 당국의 힘겨루기가 어떤 모양새를 그려낼지 주목된다. ◎3사·2사 체제 득실/통합땐 수치상 세계 1·2위 석권/효율적 투자 큰 이점/설비규격 통일 과제/추가비용 천문학적 반도체 통합법인의 실사결과가 나왔지만 LG측의 반발로 여전히 가변적이다. 통합론과 통합무용론으로 맞서있는 반도체.양사체제와 3사체제의 득실은 무엇일까. 양사체제의 경우 우선 ‘규모의 경제’를 펼 수 있다.부품 및 설비도입때 보다 싼 가격에 제품을 들여올 수 있다.제살 깎아먹기식 구매에서 한국의 ‘바이어 파워’가 막강해지게 된다.무엇보다 효율적인 투자가 가능해지는 장점도 있다.세계시장의 추이를 앞장서서 선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현대와 LG 양사의 통합에 따른 부정적인 효과도 무시못한다.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업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현재 LG는 국내에서는 천안 청주 구미에,해외에서는 영국 웨일스에 공장을 갖고 있다.현대는 이천과 미국 뉴저지,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공장을 가동중이다. 설비규격이 서로 다른 점도 난제중의 난제.현대는 독자기술에 의한 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LG는 일본 히다치기술에 의존하고 있다.장비 자체가 다르고 반도체 만드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전문가들은 “기술은 서로 섞일 수 있지만 설비가 다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숙제”라고 지적하면서 “고속도로는 같은 고속도로인데 아스팔트길이냐,시멘트길이냐의 차이가 설비에 따라 갈린다”고 말한다. 통합에는 몇조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추가비용도 든다.현대 688%,LG 487%에 이르는 만만치 않은 부채비율을 안고 있는 양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빚을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통합의 시너지효과를 내기 위해 하나로 합쳤지만 또 다른 부실이 우려되는 까닭이다.기아자동차(13조원)와 한보(7조원)를 합친 액수 이상의 엄청난 부실기업이 탄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양사체제 개편이후 수치만으로 따지면 세계 반도체시장의 1,2위를 국내 기업이 석권하는 결과를 낳는다.삼성은 D램시장(97년말 기준)에서 시장점유율 18.8%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여기에 9%,6.7%를 유지하는 현대와 LG가 합칠 경우 산술적으로 15.7%로2위자리에 오른다.현재 2위는 일본의 NEC로 12.1%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반도체 통합의 주사위는 일단 던져졌다.그러나 LG의 반발이 워낙 거세 통합은 앞으로도 ‘멀고 험한 길’이 될 것같다. ◎보고서 낸 경영컨설팅사 ADL 의견/시장 지배력·중장기 생존력 중시/모두 15개 항목 평가/경영주체 합의해야 반도체 빅딜의 실사를 맡은 세계적 경영컨설팅사인 A.D.L 한국지사 鄭泰秀 지사장은 “보고서를 청와대와 금감위,전경련,현대전자,LG반도체 등 5곳에 전달했다”며 현대전자를 경영주체로 선정하게 된 이유 등을 밝혔다. ●현대전자가 통합회사의 경영권을 차지하나. 통합회사의 경영주체로 확정되기 까지는 양사의 합의가 필요하다.즉 양사간 경영권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넘기는 형태의 합의가 남아있다. ●평가항목은. D램업계의 절대 성공요인을 12개로 선정했다.이와 별도로 재무제표의 건전성 등 3개의 사업성과 지표 등 모두 15개 항목을 보았다. ●제조장비의 공정차이 등으로 인해 통합이 어렵고 시장점유율이 내려갈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경영주체가 통합전략을 수립할 것이다.독자생존시보다 시장점유율이 하락한다는 가정은 맞지 않을 수 있다.점유율이나 매출액보다는 감산효과나 시장지배력 제고로 인한 가격상승에 따라서 이익이 증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이 회복되는 단계에서 통합이 필요한가. 우리는 중장기 생존가능성을 중시한다.중장기적으로 두 회사의 생존가능성이 낮고 시장회복은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현대전자가 통합과정에서 은행으로부터 좋은 조건을 유도할 것이라는 데. 우리는 3개항의 조건을 보고서에 명기하고 금감위로 하여금 감독하도록 제안했다.현대가 통합법인의 경영주체가 되었을 때 지켜야하는 사항은 비 반도체 사업의 조기정리,출자 및 지급보증관계 금지,그리고 독립이사회 구성 등이다. ◎실사 공개 이모저모/“객관적”“인정 못해” 평가 엇갈려/현대 “아주 당연한 일”/LG,보고서 그대로 반환 반도체 통합주체의 선정일인 24일 협상당사자인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숨을 죽인채 결과를 기다렸다.실사기관인 A.D.L이 오후 2시쯤 현대의 손을 들어줬다는 발표가 나오자 삽시간에 현대는 ‘천당’,LG는 ‘지옥’으로 변했다. ●현대전자는 24일 반도체 통합법인의 경영주체로 현대전자가 적합하다는 실사기관 A.D.L의 발표에 대해 “평가 결과는 종합적이고 객관적이었다”고 환영일색. 한 관계자는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해 온 현대가 경영주체로 선정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며 “구체적인 통합방안과 절차는 조속한 시일내에 확정해 공표하겠으며,자세한 사항은 LG반도체와 금융감독위원회,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관련기관과 협의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LG는 A.D.L보고서가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강력 반발. LG측은 이날 오전 11시30분쯤 A.D.L관계자가 평가보고서를 들고 具本俊 LG 반도체 사장실로 찾아왔으나 실사과정 자체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평가도 인정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姜庾植 구조조정본부사장은 “A.D.L보고서는 평가기준 및 방법에 대한 사전합의와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의견제시로 보기 어렵다”면서 “보고서를 뜯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具本茂 회장은 이날 별다른 일정없이 그룹회장실에서 대기했으며 발표내용을 보고받고 표정이 어두웠다는 후문. 발표이후 LG반도체 직원들은 크게 술렁거렸다.성탄절인 25일에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상출근하며 具本俊 사장 주재로 추후 대책 마련을 위한 임원회의 를 소집,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 제2의 건국 국민 대토론회 중계

    ◎‘제2건국’ 범국민 개혁운동 바람직/밑으로부터의 변화요구 제도권 반영 절실/운동 적극전개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 표시/예산·인사원 분산 등 선진국 벤치마킹 필요 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의 건국 국민대토론회는 시민단체·학계·경제계 등에서 500여명이 참석해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제2건국 운동의 필요성에는 공감을 나타냈으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운동의 성격,과제,정치성,시민단체와의 역할설정 등의 문제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또 이에 대한 갖가지 대안도 제시됐다. ●주제1 제2의 건국 의제 설정과 추진전략 제2의 건국 기획위원인 韓相震 서울대교수는 주제발표에 나서 “제2의 건국운동은 정부의 홍보 운동이 아니고 국민과 함께 개혁을 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2건국운동의 취지와 7대 개혁지표 등의 주요과제를 설명했다. 韓교수는 “제2건국을 위해서는 정부의 결연한 개혁의지와 밑으로부터의 변화요구를 제도권에 투입시키는 국민운동이 필요하며,정부와 민간세력이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徐京錫 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제2의 건국운동이 각계의 문제제기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운동을 회생시키려면 이런 비판에 정면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2건국은 철저하게 순수한 민간주도의 기구가 돼야 한다”며 현재의 기획단을 지원단과 기획단으로 이원화,기획단장은 민간이 맡고 지원단장은 행정자치부장관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자인 신대균 행정개혁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정부가 과도한 의욕을 갖고 정부조직을 앞장세울 때 대규모 동원체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하고 민간의 자율적 활동을 지원하는데 그칠 것을 주장했다. 정수복 크리스천 아카데미 기획실장은 “제2건국운동의 목표와 좌표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없다”며 시민단체가 소외된 아쉬움을 지적하고 “모든 시민단체들이 환경문제를 이슈로 다루고 있는데 환경문제도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해학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공동의장은 “정부가 제2건국운동을 서두르는 바람에 토대가 무시되고 골조부터 마련된 격”이라며 “민간운동지원법을 통과시켜 민간이 참여해 국민공동체 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韓교수는 이같은 지적들에 대해 “정부는 제2건국운동에서 빠지고 민간단체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시민운동가들의 도움도 받아야 하지만 일반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일방적인 시민단체 지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주제2 제2 건국을 위한 정부 혁신과 정부 참여 토론자인 김광식 21세기 한국연구소장은 정부 혁신문제와 관련,7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소장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소장은 정부개혁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었으나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지 못한데는 너무 단편적으로 접근됐기 때문이라면서 청사진을 분명히 만들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과학기술의 지원과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도 있어야 한다. 정부개혁은 정부 역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강화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이밖에 ▲예전에는 국가주도의 공업화로 제조업 분야를 집중 육성했으나 이제는 환경·생명 등 신문명산업을 집중육성해야 한다 ▲정부개혁이 실질적으로 성공하려면 공무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실천전략을 세우고 국민들이 충분히 인식하도록 노력하는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역할 및 개혁 필요성에 대해이계식 기획예산위원회 정부개혁실장은 “케인즈는 국가가 민간 부문의 비효율성과 낭비로 인해서는 망하지 않지만 공공부분의 비효율성과 낭비로 인해서는 망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예산과 인사권 분산과 관련,선진사회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창현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개혁은 각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조대학 원장은 “영국 미국 호주 등의 개혁을 접목시키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개혁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일”이라면서 “외국 개혁과 우리와는 30년 정도의 갭이 있으므로 외국의 신시장주의 보수주의에 현혹돼기보다는 가능한 개혁안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부가 해선 안될 일은 규제완화하든지 민영화하든지 정부가 손을 털어야 한다”면서 아울러 지방행정기관의 능력을 제고할 것을 제안했다. 끝으로 주제발표자인 김병준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은 시민단체가 제2건국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데 대해 “목적이 같다고 해서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상호견제 균형이 되면서 제기능을 살릴 수 있다”고 시민단체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주제발표 요지 ◎정부 혁신부터 시작해야 ▲제2 건국운동의 비전과 주요의제(韓相震 서울대교수)=제2건국운동은 개발독재모델의 한계,민주주의와 사회통합,국가개혁을 향한 국민적 열망,냉전해체와 글로벌화를 위해 추진돼야 한다. 제2건국의 총괄적 비전을 제시하고 정부 및 공공부문,경제부문,사회부문을 혁신해야 한다. 3대 실천원칙은 실질개혁의 원칙,국민주체의 원칙,솔선수범의 원칙이다. 정부 및 공공부문 혁신운동부터 시작해 정부의 선도적 노력을 통해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획득해야 하고,이를통해 경제 및 사회부문으로의 확산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2건국위 추진과정에서 시민집단은 제도권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며,정부와 정당에 개혁에 앞장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민간운동 돕는일에 국한 ▲제2건국운동의 추진전략(徐京錫 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제2건국운동은 철저히 비정치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시 군 구 단위 범국민협의회는 그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지기 전까지 활동이 보류되어야 하며 청와대 내 제2건국담당업무를 정무수석실에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제2건국운동은 철저히 순수 민간주도의 자문기구가 돼야 한다. 제2건국위는 민간운동을 뒤에서 돕는 일에 국한돼야 한다. 제2건국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제2건국위부터 개혁돼야 한다. 행자부장관이 기획단장이 되는 구조에서 개혁작업은 정부 여당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공무원 개방형 충원제돼야 ▲제2건국을 위한 정부혁신의 방향과 과제(成炅隆 한림대 교수)=정부 혁신의 방향은 독점에서 경쟁으로,규칙 지시 관행 중심에서 임무 성과결과 중심으로,권한의 상위집중에서 하위분산으로,직업공무원제에서 개방형 충원제로 나가야 한다. 정부혁신의 주요 과제는 대형 국책사업의 선정과 집행과정에서 국민 참여를 확대하고,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에 대폭 이양하며,특별법적 지위에 있는 반관반민적 단체들의 법적 근거를 제거하고 건전한 시민단체를 육성해야 한다. 또 정부 각 부처에 예산권과 인사권을 부여해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개방형 임용제 계약제 경쟁과 성과에 대한 차등보상제 도입을 통해 직업공무원제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 ◎과제 마련 시민참여토록 ▲정부개혁과제와 시민단체의 역할(金秉準 경실련 상임집행위원)=국민의 정부출범후 정부개혁은 미진했다. 검찰 경찰등 권력기관의 조직개편이 배제됐고,규제개혁이 지지부진했다. 경찰자치 특별검사제 도입이 보류됐으며,중앙정부 권한의 지방이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는 기득권 세력이 개혁을 지연시키고 있고,개혁의지를 실천으로 옮길 시민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민단체는 시민사회를 반영하는 개혁과제를 마련하고,시민을 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시민단체와 정부는 간접적이고 느슨한 관계가 바람직하다. 시민단체가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개혁운동기구의 한 구성원이 되면 정체성이 상실된다. ◎부정부패 예방에 중점을 ▲제2건국과 부정부패추방(金聖在 한신대교수)=국민의 정부 출범후 공직자 사정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부정부패 추방운동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총체적 부정부패구조를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부정부패를 예방적 차원에서 통제하고 적발시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를 확충해야한다. 또 부정부패 환경을 혁파하고 전사회적인 의식생활 개혁운동을 추진해야 한다. 미국의 공직자 윤리청 등과 같은 독립적인 반부정부패 추진기구 설치를 검토하고 이 기구에 시민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부정부패 환경을 혁파하기 위해 부정부패 공직자에 대한 정보제공,행정절차의 공개,부정부패고발센터 활성화,지속적인 규제개혁 추진,공직자윤리강화 및 공무원의 인사 및 보수체계를 개혁해야 한다. ◎재산등록 심사강화 필요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제도개혁방안(朴元淳 참여연대 사무처장)=공직사회제도개혁은 퇴직공직자 관련 사기업체 취업제한,재산등록 심사강화를 통한 공직자윤리 강화,내부고발자 보호,돈세탁 방지 및 부정이익 몰수 추징제도 등을 포함한 부정부패 방지기본법의 제정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또 예산부정 방지제도와 공직자 윤리강령의 제정이 직접적 제도개혁이다. 간접적 제도개혁은 정보접촉이 쉽도록 정보공개법을 보완하고,감사원 검찰 등 사정기관의 개혁 등을 통한 개혁을 생각할 수 있다. 시민참여를 통한 부정부패 척결방 안은 시민 감사청구제도의 확산,사정기관의 민간위원회 제도 도입 및 일정한 요건을 갖춘 시민단체 활동가에게 시민 옴부즈만증을 부여하는 시민옴부즈만 제도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 韓銀,예산편성 싸고 재경부와 신경전

    ◎인건비 동결·삭감 최대쟁점… 접점찾기 난항 내년도 한국은행의 예산편성을 놓고 ‘칼자루’를 쥔 재경부와 한은간 신경전이 치열하다. 한은의 내년 예산안은 한은법 개정(98년 4월1일)에 의해 재경부의 ‘승인’을 받게 돼 있어 두 기관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이다. ○두기간 입장 평행선 대립 99년도 한은 예산안의 최대 관건은 인건비다. 이 부문에 대한 두 기관의 입장은 다르다. 한은은 올해에 이어 내년 인건비를 동결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예산안을 재경부에 제출했다. 지급기준으로 보면 가령 올해에 봉급이 월 100만원이었던 사람은 내년에도 100만원을 받게 한다는 얘기다. 반면 재경부는 한은의 인건비 동결 방안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기류다. 더 줄여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21일 “IMF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여파로 겪는 국민들의 고통 등 나라경제의 분위기를 감안해 인건비 부문을 심도있게 들여다보고 있다”며 “기획예산위원회로부터 넘겨받은 공기업 부문과 국책은행 등 다른 금융기관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인건비 동결의 타당성 여부를 가려내겠다”고 강조했다. ○금통위 의결 먼저 거칠듯 두 기관의 신경전으로 한은 예산안의 재경부 승인 시기는 지연되는 것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재경부는 한은 예산안을 승인하는 것이 처음인데다 IMF 이후의 경제여건을 감안,신중을 기하고 있는데다 한은이 관련자료 제출 요구에 비협조적이어서 12월 중순쯤 ‘통과’ 여부가 가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한은 정관에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1월 말) 금융통화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치게 돼 있다. 한은은 따라서 재경부의 승인이 늦어질 경우 금통위의 심의·의결을 먼저 거친 뒤 재경부 승인 과정에서 변경사항이 있으면 수정해 반영하는 방안도 강구중이다. ○韓銀,독립성 금갈까 우려 한은 관계자는 “금융감독기능이 한은에서 떨어져 나간 뒤 통화신용정책을 독자적으로 펴는 등 한은법 개정에 따른 독립성 확보에 힘쓰고 있다”며 “한은 예산안이 원안대로 재경부 승인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도 같은 맥락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 예산은 통화신용정책 비용 등을 포함한 전체예산(종합예산) 중 인건비 업무비 예비비 등 경비예산만 재경부(금융정책국 심의)의 승인을 얻게 돼 있다.
  • 황성신문과 동지적 관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7)

    ◎일제 강점기 민족 이끈 ‘두바퀴’/친일비판·을사조약 반대 등 배일 역설/애국계몽·국채보상운동도 함께 주도/1910년 폐간때까지 항일의 구심점역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흔히 을사조약이란 비극적 상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황성신문의 논설이다.그러나 정작 ‘시일야방성대곡’에 얽힌 비참한 사연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국민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일제 강점기 험한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간 민족의 양바퀴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발간된 당시 신문들은 각각 뚜렷한 색채를 갖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다.대한매일과 황성신문,그리고 제국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국민신보 대한신문 경향신문 등이 그 대표적 매체들이다.신문 성격만큼이나 을사조약과 일제 침탈을 둘러싼 논조에선 극명하게 대립했다.또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도 현격한 논조 차이를 보였다.그러나 이 가운데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반일 논조를 확연하게드러낸 양대 산맥이었으며 공동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3일 유신회와 진보회가 합동한 친일 단체 일진회가 발표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에 대한 공박에서부터 같은 논조를 벌인 두 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무효화 투쟁에선 그야말로 하나가 됐다.조약 체결의 속사정과 강점 과정을 앞다투어 파헤쳐 격변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읽어냈다고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을사조약을 앞둔 시점에서 일진회 준동에 대한 공동보조는 그 시초랄 수 있다.일진회가 일본 침략 행동을 찬동·지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공격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내자 두 신문은 이를 통렬히 반박하는 논설을 일제히 실었다.당시 정부에서도 선언서에 현혹되지 말 것을 훈령으로 고시할 정도였으나 일제의 득세에 따라 국민신보 대한신문 등 친일지들이 나타나고 언론도 완전한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을사조약에 반대한 황성신문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대한매일이 유독 황성신문의 논조를 적극 지지했다.그해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 나간 뒤 張志淵 사장이 붙잡혀가고 정간 조치가 내려졌을 때였다.대한매일은 ‘황성의무’란 논설을 통해 저간 사정을 통렬히 비난하고 황성신문을 적극 찬양하고 나서 일반인에게 진실을 알렸다.조약 체결의 속사정을 파헤친 황성신문의 ‘신조약청체전말’을 호외로 발간해 세세하게 다시 싣고 무효화선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제국신문이 을사조약에 대해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싣고 대한일보가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을 ‘경거망동’으로 비난한 것을 보면 당시 대한매일의 강경한 논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병운동에 대한 관점에선 다소 차이를 보인 게 사실이다.대한매일이 강한 논조를 편 데 비해 황성신문을 비롯한 나머지 신문들은 민중의 혁명적 변혁과 대중투쟁을 간과한 것으로 학계는 평가한다.대한매일이 지방소식란에 매일 의병투쟁 소식을 실은 데 비해 타지들은 ‘무익한 폭거’‘부질없는 행동’으로 돌렸다.황성신문조차도 1906년 5월20일자 논설 ‘의병들의 소요는 마땅히 빨리 진압돼야 한다’는 논설을 실을 정도였다.그나마 황성신문은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민간인 학대까지 찬성하지는 않았다. 애국계몽운동과 경제사정에 관해서는 두 신문이 한 길을 택했다.특히 교육발전과 일제의 경제적 침투에 반대하는 자주적 산업건설 대목에선 철저하게 같은 논조를 폈다.황성신문이 먼저 1906년 2월13일자 논설 ‘경고동포’에서 지식 보급,대중계몽의 의의와 그 절박함을 지적했다.대한매일도 이어 8월3일자 논설 ‘한국의 실업’에서 실업국민(實業國民)이 되기 위해 △자국 비용품은 자국에서 공급할 것과 △국산품 수출자가 될 것을 역설한 것은 그 대표적 예다.이같은 계몽운동은 두 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의 최일선에 나서는 것으로 연결된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 두 신문은 1910년 폐간될 때까지 나라의 운명과 사회흐름을 예리하게 감지해 운동력을 키운 시대의 견인차인 것이다. ◎당시 親日紙 행각/을사조약이후 제국신문 등 변절 일제옹호 앞장 대한매일과 황성신문이 을사조약 무효화선언 등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것과는 달리 친일 신문들은이같은 민족지들에 결사코 반대하며 일제를 옹호하고 나서 대조를 보인다. 일본인 경영의 국문지인 대한일보는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게재를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한 대표적 신문.張志淵이 구속에서 풀려나고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황성기자패론’과 ‘여장지연군’이란 제목의 글로 오히려 장지연의 논조가 그릇되며 고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제국신문의 경우 자주독립을 주장한 민족지 성격이 강했으면서도 이때는 논조의 일관성을 잃은 것으로 비쳐진다.이 신문은 1904년 2월 강압적으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대해 “시정개정의 충고권이란 결국 침략의 제일보”라고 비판했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태도를 바꿔 11월22∼23일 이틀에 걸쳐 ‘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는 글을 실었다.황성신문 정간사태에 대해서도 “과격한 논조로 나가면 탄압을 받아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논조를 폈다. 1906년 1월 친일파의 영수 宋秉畯 李容九 등이 일진회 기관지로 발행한 국민신보는 처음부터 열렬한 친일로 나섰다.1906년 9월2일자 2면에 게재한 ‘궁문파엄’(宮門把嚴)이란 글은 단적인 예다.이 글은 “궁궐 문을 지키는 일을 힘써 수행해야 한다.혹시 협잡배가 각종 수단을 부려 군주의 총명을 막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대궐을 지키는 일본군에게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신료의 침입을 막아 고종황제의 뜻이 외부로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민족지의 하나인 천도교계의 만세보는 경영난으로 친일 진영에 넘어가 대한신문으로 탈바꿈한 다음엔 입장을 바꾸었다.이 신문은 언론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한 李完用이 인수해 李人稙에게 발행을 맡긴 것으로 친일 내각의 옹호와 그 선전에 적극 나섰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백범 金九의 현재적 의의/李萬烈 淑大 교수·한국사(기고)

    백범 金九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의 한 분이다.그는 최근 어느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복제(複製)하고 싶은 인물중 최다수를 얻었던 데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손수 쓴 ‘백범일지’가 수십종의 판본을 갖고 있으며 광범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범은 존경을 받은 만큼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그에 관한 연구는 미미하고 묘소에는 참배객이 거의 없으며 기념사업회는 셋방살이를 면치 못한채 역대 정권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해방 후 우리사회를 주도해 온 기득권층과 분단세력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는 제도언론은 철저하게 그를 소외시켰다.다음 사례들은 이를 증명한다. ○제도언론 백범 연구 외면 지난 4월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주최로 ‘남북협상 50주년 기념 강연회’가 열렸다.1948년 4월 하순에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이 50년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남북협상이 당시 비현실적이었다 할지라도,민족사적으로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역사의식을 말할 수 있는 언론이라면,그 강연회를 적어도 취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그러나 어떤 언론기관이나 정부 관계자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작년 10월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백범 김구선생 탄신 1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도 마찬가지였다.대회장이 꽉 메워졌지만 언론기관이나 정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때 학술대회 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청중들을 향해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백범이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백범을 가장 존경한다는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하던 해 백범의 기일(忌日) 아침 일찍이 효창공원의 백범묘소를 참배했다.전·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다.金 전대통령은 백범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때 담당 비서관까지 지정했으나,그뒤 어떠한 계획이나 진척도 보여주지 않았다.이렇게 된 것이 그의 뜻이었는 지,그를 보필하는 관료들의 반대 때문이었는 지 확인할 길이없다. 백범은 민족독립운동과 통일국가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지도자다.그의 사상은 조국의 ‘완전자주통일독립’과 ‘문화국가’의 실현으로 요약된다.완전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이 급선무요 필요조건이다.통일 없이는 완전자주독립은 물론 문화국가를 실현할 수 없다.우리시대의 민족사적 과제는 백범이 실현하려다 중단된 그같은 이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함에 있다.그래서 백범사상은 우리시대가 실천해야 할 민족사적 과제의 정확한 목표다. 백범은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좌우의 독립운동단체 및 정파간의 협력과 일치를 일궈냈다.해방 후 완전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그가,조국이 두 동강으로 쪼개질 급박한 상황에서는 과거의 찬탁세력과도 협력하여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고 분연히 일어섰다.이렇게 완전자주통일독립을 위해 협력과 공존을 구사하던 그의 방략은 이데올로기와 혈연·지연 등에 의한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에 따가운 경종이면서 좋은 귀감이다. ○통일없이 완전 독립 없다 우리세대가 민족사에 기억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을 이룩하여 완전자주독립과 문화국가의 이상을 실현해 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백범은 남북,동서의 겨레 전체가 우러러보면서 귀감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승이요,민족적 지표를 제시한 지도자다.바로 여기에 그의 현재적 의의가 있고,오늘의 입장에서 그를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있다.
  • 김 대통령 3·1절 기념사

    3·1운동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의 정점이요,자랑스러운 상징이었습니다.그로부터 79년 후인 지난 2월25일 이 나라에는 다시 한번 국민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그것은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된 것입니다.이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시가 실현된 것입니다. 3·1운동은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바로 그것이었습니다.지금 우리 국민은 3·1운동의 국난극복 정신을 그대로 계승해서 오늘날 금융위기라는 국가의 존폐가 걸린 난국을 극복하는데 다함께 나서고 있습니다. 공무원 여러분도 기구개혁,정부기구의 축소와 인원의 감축,봉급의 동결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의 공무원 사회는 많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고,그것 없이는 국정을 바르게 이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정부는 앞으로 공무원에 대해 공정한 지위안정,생계보장,이직자에 대한 사후대책 등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반공무원,경찰,군인,정부 산하기관 어디에서고 이제는 지연과 학연 혹은 이해관계 등 부조리한 관계에 의한 왜곡된 인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저는 여러분께 다짐합니다.3·1운동 당시 우리 조상들이 국난극복을 위해서 일치협력했듯이 이 나라의 노동자,사용자,정부의 노·사·정 3자가 우리 국민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전위대로 나서주어야하겠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된 화해,협력,불가침의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우선 최소한도의 대화는 이루어져야 합니다.최소한도의 교류도 이루어져야 합니다.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북한 당국에 대해 다시 한번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안하는 바입니다.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 내지는 생사확인 만이라도 서둘러야겠습니다.또한 우리는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위해 남북대화를 병행해 4자회담을 꼭 성사시켜야 하겠습니다.
  • 전운 걷혔지만 긴장 계속/유엔 사찰 재개 어떻게 전개될까

    ◎무제한·무조건 사찰 이행 미지수/대량 살상무기 범위도 분쟁 소지/사찰 순조땐 제재 해제 가능성도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이라크와 유엔의 ‘전면 사찰’합의를 사실상 수용함에 따라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대량 살상무기 사찰활동이 재개될 수 있게 됐다. 미국 등 유엔 안보리 15개 회원국들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사이에 합의된 ‘바그다드 합의문’을 25일부터 검토한뒤 사찰 재개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에 들어갈 계획이다.이에따라 유엔 특별사찰위원회 사찰단의 제한없는 사찰이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유엔의 사찰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될 지는 아직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이라크 정부가 대통령궁 8곳은 물론 전략적인 장소나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에 대해 즉각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인 사찰을 마찰없이 허용할 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규정에 대한 해석 차이,무제한적인 사찰 시도와 독립국가로서의 주권 존중 등 상반된 입장 등은 사찰 과정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대량 살상무기 폐기를 둘러싼 이견과 다툼 발생 여지도 적잖다.생물학 및 화학 무기 생산과 관련,어떤 시설까지 무기 생산시설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산업 특성상 이견과 분쟁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사찰 활동이 미국과 이라크간의 대결과 긴장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는 파란과 곡절을 겪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단호하다.클린턴 대통령은 “후세인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합의 사항을 보여주어야 하며 합의사항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보복(군사행동)이 가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미국은 더이상 후세인의 지연 책략에 속지 않을 것이며 합의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빠른 시일내에 군사적인 응징이 가해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걸프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도 고도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걸프만에는 이같이 한동안 긴장이 계속되겠지만 만약 후세인 대통령이 합의를 충실히 이행하면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제가 완화되거나 해제될 가능성도 있다.‘바그다드 합의’는 이라크에 대한 사찰이 완전히 이행될 경우 유엔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가 완화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이라크의 경제재건을 위해서는 경제제재의 해제가 필요하다.이라크는 유엔의 경제제재 해제를 위해 외교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