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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고인석(전 삼양사 대표이사 부사장)씨 별세 영찬(신한은행 과장)씨 부친상 2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5일 오전 9시 (02)3410-6901 양정진(전 한국경제신문 제작국장)씨 모친상 3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30분 (02)2227-7560 오경진(현대제철 이사)경환(올제텍 이사)경주(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씨 모친상 권정환(포레빌 대표)씨 빙모상 3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5일 오전 6시30분 (02)2227-7556 이홍모(원주MBC 보도부장)씨 빙부상 3일 원주기독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011-372-2200 노현(숭실대 경리과장)씨 빙부상 3일 평촌 한림대성심병원, 발인 5일 오전 8시 (031)386-2345 이문락(코스콤 고객만족팀장)씨 부친상 2일 경북 영천 영남대병원, 발인 4일 오전 9시 (054)330-7397 유석진(전 서울대 의과대 신경정신과 교수)씨 별세 김명희(여의도클럽 이사·전 KBS PD)씨 상부 유태혁(베드로신경정신과 원장)태용(테제건축 대표)태익(다나병원 부원장)태명(경상대 가정교육과 교수)씨 부친상 이종성(재미 정신과 의사)윤창섭(〃 마취과 〃)권경덕(마취과 〃)성원모(한양공대 자원공학과 교수)이문성(백산정신과 원장)씨 빙부상 3일 서울대병원, 발인 5일 오전 6시 (02)2072-2011 송태호(증권선물거래소 부장)씨 상배 2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02)2227-7541 조성직(부산지방경찰청 정보과)규용(울산동부경찰서 〃)씨 부친상 정홍자(울산생활과학고 교사)씨 시부상 조보람(부산은행 광남지점)정호(학생)씨 조부상 2일 부산 영락공원, 발인 5일 오전 9시30분 (051)790-5068 노명완(고려대 교수)영완(창해금속 대표)태완(홍익대 교수)씨 부친상 강철희(고려대 교수)씨 빙부상 2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5일 오전 9시 (02)923-4442 신승태(성우철강 대표)현희(부동산 임대업)씨 부친상 윤철묵(현대증권 김천지점장)씨 빙부상 3일 고대안암병원, 발인 5일 오전 11시 (02)926-1699 김홍경(대한민국6·25국가유공자 서울지부 사무처장)씨 상배 주경문(CM협회 상무이사)씨 빙모상 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02)3010-2261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4) 병자호란이 시작되다(Ⅰ)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끝까지 청을 기미(羈)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람들은 대체로 척화파의 논의가 높고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높고 깨끗한 논의’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준비 없이 갈림길에 서다 당시 ‘명분’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명 감군 황손무(黃孫茂)였다. 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은 하늘이 준 것이니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과 총포 등을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청 역시 마지막까지 조선의 본심을 떠보려고 시도했다. 역관 박인범(朴仁範) 등이 들어갔을 때, 용골대는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자신들에게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넘겨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박인범 등은 반발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왕자와 척화신만 보내주면 청군이 비록 압록강에 이르더라도 침략을 당장 중지하고 두 나라가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제의했다. 박인범 등이 ‘예의의 나라로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또 전달할 수 없는 말’이라고 거듭 반발하자 용골대 등은 돌아갔다.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홍타이지, 침략 결심을 하늘에 고하다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들을 열거했다.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1621년 이후 자신들이 요동을 차지했을 때 도망하는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는 공유덕과 경중명 일행을 공격했던 것, 명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도 그것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운운 한 것 등이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불만이 모두 나열되었다.‘청의 힘과 역량이 명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점이었다.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명에만 병선을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이 특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타이지는 곧이어 누르하치의 신주를 모신 태묘(太廟)에도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홍타이지는 11월29일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유시문을 내렸다.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강조했다. 위에서 언급한 ‘허물’에 더하여 조선이 청에서 보낸 국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도 추가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버일러들이 내민 편지를 퇴짜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도 ‘유시문’을 보냈다.‘조선이 패만하고 무례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병’들에게 조선에서의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 것, 대군이 통과하는 지역의 사묘(寺廟)를 파괴하지 말 것,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 것, 항복한 자를 죽이지 말고 치발(髮)할 것, 망명해 오는 자를 받아들여 보호할 것, 사로잡은 백성들의 가족을 서로 이산시키지 말 것, 부녀를 폭행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었다. 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홍타이지는 이날,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濟爾哈朗)에게 심양에 남아 도성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아지게(阿濟格)를 우장(牛莊)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조선을 공격하는 와중에 혹시라도 명군이 배후에서 역습해 오는 상황을 우려한 조처였다. 우장은 압록강과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당시 청은 명이 수군을 이용하여 발해만으로 들어와 내지에 상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도 여전히 명의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三拜九頭禮)를 행했다. 당자는 까치를 신성시하는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물이었다. 이어 팔기의 깃발들을 도열해 놓고 주악을 울리며 다시 배천례(拜天禮)를 행했다. 홍타이지는 이어 도도(多鐸)와 마부대 등에게 병력 1300명을 따로 주었다. 그들 가운데 300명은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그들을 신속히 서울로 진격시켜 궁궐을 포위하려는 깜냥이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홍타이지의 생각이었다. ●무너진 통신체계 조선 침략에는 만주와 몽골군뿐 아니라 명에서 귀순한 한족 출신 장졸(-漢軍)들도 대거 동참했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嘉喜)를 비롯하여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 한군 지휘관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청은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만몽한(滿蒙漢)의 모든 역량을 사실상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군들은 특히 홍이포(紅夷砲),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한 중화기의 운용과 운반을 맡았다. 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은 질풍같이 내달렸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鐵騎)와 야전에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주로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군이 대비하고 있는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울로 돌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사실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도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로에서 적 기병을 차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봉화마저 제때 올리지 않았고, 평안도 각지에서 올린 변보(邊報)는 청군 기마대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2) 고달픈 나그네의 휴식처,주막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2) 고달픈 나그네의 휴식처,주막

    김홍도의 그림(1) ‘주막’이다. 짚으로 엮은 지붕 아래 왼쪽에는 주모가 구기로 술독에서 술을 떠내고 있고 옆에는 치마꼬리를 잡고 칭얼대는 어린 아들이 있다. 오른쪽에는 패랭이를 쓴 사내가 격식 없이 만든 밥상을 앞에 놓고 그릇을 기울여 마지막 한 술의 밥을 뜨고 있다. 국에 만 밥인가, 아니면 물에 만 밥인가. 이 사내가 쓴 패랭이는 대를 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갓 모양으로 엮은 모자다. 패랭이는 원래 여러 계층의 사람이 두루 쓰는 것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대개 천민이나 보부상이 썼다. 보부상이 쓰는 패랭이에는 목화송이를 달지만 이 사내는 그것이 없다. 아마도 이 사내는 여행 중인 천민일 것이다. ●기둥에 초가지붕만 얹은 옥외공간이 ‘정석´ 패랭이 쓴 사내의 뒤에는 망건도 하지 않은 맨 상투의 사내가 입에 짧은 곰방대를 물고 주머니를 열고 있다. 아마도 밥을 먹은 돈을 내려나 보다. 한데 이 사내 역시 배꼽까지 내놓고 있는 것을 보아서 당연히 양반은 아니고, 패랭이 쓴 사내와 거의 대차 없는 신분일 것이다. 주모가 있는 곳 뒤에 창 같은 것이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건물일 터이다. 그것은 김홍도의 또다른 그림(2) ‘주막’에서도 볼 수 있다. 역시 주막 그림인데, 건물이 확실히 보인다. 갓을 쓴 양반이 마당에서 상을 차리고 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다시 김홍도 그림(1) ‘주막’으로 돌아가자. 지금 주모가 있는 곳은 기둥에 초가지붕만 얹은 반 옥외 공간이다. 그리고 그 밖에 싸리로 엮은 담이 빙 둘러쳐져 있다. 이것은 익히 알고 있듯 주막이다. 이밖에 주막집 그림이 몇 점 남아 전하는데, 이 그림처럼 아주 간단한 형태를 띠고 있다.TV의 사극을 보면 주막집이라면 초가집이 몇 채가 있고, 가운데 마당이 있어 평상을 군데군데 펼쳐 놓고는 술손님을 받는다. 한데 그런 형태의 주막집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주막은 조선전기에 이미 있었다. 임진왜란 전을 살았던 유희춘은 1574년 경연에서 선조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경기도 일대의 숯막(炭幕)은 여행하는 사람들이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쳐들어가서 협박하고 그 집을 불태웁니다. 서울 안에서도 밤에 또한 도둑이 많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전부터 주막은 여행자들의 숙박처였던 것이다. 재미난 것은 여기서 주막을 숯막(炭幕)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주막은 숯을 굽는 곳이었던가? 이덕무의 ‘서해여언(西海旅言)’이란 기행문에 그 해답이 있다.“술과 숯은 발음이 서로 비슷하므로 술막(酒幕)이 와전되어 숯막(炭幕)이 된 것이다.” 술막이 숯막이 된 이유다. 조선전기 주막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좀 한심한 수준이었다. 윤국형이 쓴 ‘갑진만록’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중국은 방방곡곡 점포가 있고 술과 음식, 수레와 말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간다 해도 단지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가면 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으므로 그 제도가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가난하여 시전이나 행상 외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농사로만 살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는 것은 술과 물, 꼴과 땔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싣고 가는데, 먼 길일 경우 말 세 마리에 싣고 가까운 길이라도 두 마리 분량은 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괴로워한 지가 오래다. 경리(經理) 양호(楊鎬,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국을 모방해 연로에 점포를 개설해 그 지방 사람들이 물건을 대도록 했으니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습관을 바꾸기 어렵고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들지를 않았다. 수령들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중국 장수들이 지나갈 때면 관에서 물건을 갖추어 길옆에 진열하여 사고파는 듯 보여주다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거두었으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한 짓이라, 중국 사람들에게 비웃음 사고 말았으니, 한심한 일이다.” 주막이란 술이나 물, 꼴, 땔나무를 공급할 뿐이고, 먹을 양식과 이부자리 같은 것은 여행객이 모두 갖추어가지고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주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역시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다. 전쟁의 상처가 가라앉고, 대동법 같은 상업을 자극할 수 있는 법령의 제정과 일본과 중국을 잇는 중계무역의 발달, 그리고 농업에서 발생한 잉여 등이 상업을 자극하자, 물자의 이동이 보다 활발해졌던 것이고, 이에 여행객에게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주막들이 제법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김창흡은 1702년 호남 일대를 여행하는데, 천안의 주막에서 아침을 먹고는 주막에서 여행객들에게 팔기 위해 늘어놓은 떡과 술을 보고 곡식을 쓸데없는 데 허비하는 해로움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주막이 술과 떡으로 행인을 유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끝난 뒤 본격 성업 이제 직접 주막을 이용한 사람의 기록을 보자. 평민들이야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니, 양반 두 사람의 경우다. 신정(申晸,1628∼1687)은 1671년 9월1일 암행어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임무 수행지가 영남으로 정해진 것은 14일이었고, 그는 그날 출발한다. 그의 암행어사 수행 일기인 ‘남행일록(南行日錄)’을 읽어보면 주막에서 잔 기록이 나온다. 그는 15일 숙소를 새벽에 출발하여 지금의 판교 주막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는다. 점심은 용인 어증포 주막에서 먹고, 그 날 밤은 금량역(金梁驛)에서 잔다. 역에서 잔 것은 그가 암행어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민간에서 여러 날 묵는다. 그러다 20일에 조령 고사리(高沙里) 주막에서 아침을 먹었고, 점심 때는 다시 용추의 주막에 들른다. 송상기(宋相琦,1657∼1723)는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을 받아 1722년 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을 가는데, 이때의 기록이 ‘남천록(南遷錄)’이다. 그는 1월2일 한강을 건너 과천에서 하루를 자고,3일 정오에 미륵당 주막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그 날 밤은 수원에서 잔다. 이후 간간이 주막에 들른 이야기가 나온다.8일에는 이산(尼山)의 수령 윤의래가 경천(景天)의 주막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 날 이산의 주막에 도착했다고 한다. 또 9일에는 오목(五木) 주막을 지나다가 우연히 상경하는 이보혁을 만나 주막에 들렀고,10일에는 참례(參禮) 주막으로 송사윤이 찾아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잠은 주막 아닌 민가에서 잘 수도 있지만 식사는 주막에서 해결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도적 출몰 잦아 골머리 앓기도 주막은 교통의 요지에 있기 마련이고, 그곳에 들르는 사람은 상인이나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강도가 노리는 곳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2년 윤9월 5일조에 의하면, 창과 칼로 무장한 도적이 성환(成歡) 주막에 돌입해 사람을 해치고 공주와 영동에서 상납하는 군포전(軍布錢)을 빼앗아 갔다고 하니, 그 사정을 알만 하지만 주막은 그 이름대로 역시 여관업이라기보다는 우선 술집이다. 여행객들이 한 잔 술로 피로를 푸는 것, 그것이 바로 주막의 본 면목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 사람들이 명승지를 찾는 유람이 유행하자 자연히 그런 곳에는 주막이 성행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들어 곤욕을 크게 치렀던 문인 이옥은 1793년 8월22일 민원모, 김려, 김선 등 친구들과 북한산으로 놀러가자는 계획을 세운다. 가기 전에 세 가지 약속을 하는데,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지을 것, 산행을 할 옷차림을 하고 장비를 갖추었으니(장비래야 지팡이지만) 뛰든 구르든 어디를 가도 무방하지만 절대로 백운대는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산골짜기나 개울가에 다행히 주막이 있거든 술이 붉은지 누런지 묻지 말 것이며, 맑은지 걸쭉한지 묻지 말 것이며, 술 파는 여자가 어떠한지 묻지 말 일이다.…술을 마시기는 하되 석 잔에 이르는 것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탐승을 떠나기 전에 주막에서 술 마실 것부터 걱정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SK에너지, 中에 대규모 석유화학 공장

    SK에너지가 중국에 대규모 석유화학 합작공장을 설립한다. 두산중공업은 중국의 신형 원전시장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두 나라 ‘정상 외교’에 발맞춰 기업들이 주고받은 보따리들이다. SK에너지와 중국 최대 에너지 기업인 시노펙은 28일 베이징 신세기일항호텔에서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마슈훙 중국 상무부 부부장,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 왕톈푸 시노펙 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합작공장 설립에 관한 예비계약을 체결했다. 본계약은 올해 안에 맺을 방침이다. 시노펙이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 짓는 에틸렌 생산공장에 SK에너지가 지분 참여하는 방식이다. 지분 참여율은 35%이다. 금액으로는 2조원 안팎이다. 국내 기업의 대(對)중국 석유화학 프로젝트로는 최대 규모다. 우한 에틸렌 공장은 연간 생산량 80만t 규모로 2011년 말 가동 예정이다. 같은 날 오후 이남두 두산중공업 부회장은 양창리 중국핵공업집단공사(CNNC) 부총경리와 원전사업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중국 최대 국영회사인 CNNC는 2020년까지 해마다 원자력발전소를 3기 이상씩 지을 계획이다. 이번 MOU는 대량 발주가 예상되는 중국의 신형 원전사업에 두산중공업이 적극 참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박경리 선생 생전에 쓴 마지막 산문 공개

    박경리 선생 생전에 쓴 마지막 산문 공개

    “최근에 나는 식중독을 두 달간 앓았습니다. 처음에는 식중독인 줄 모르고 한 달이나 지내다 보니 기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오래 앓아온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눈도 나빠지고 병이 여러가지 겹치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이면 병원에 가지 않고 견디려고 하는데….” 지난 5일 타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쓴 마지막 산문이 23일 발간된 문예계간지 ‘아시아’의 여름호(통권 제9호)에 실렸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부쩍” 지난달 4일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 기고한 ‘물질의 위험한 힘’이라는 제목의 이 산문에서 고인은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세태의 위험을 경고한다.“살아 있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비단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꽃이라든가 짐승이라든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방현석 주간은 “지난 2월 아시아문학포럼 개최를 앞두고 선생님께 포럼 참석을 요청하는 자리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산문을 청탁드려 쓰러지시기 직전에 원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 고인은 죽음에 대해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나는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해도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죽음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살아온 연륜에서 터득한 내 나름대로의 진리입니다.” 그는 이어 “세월이 흘러서 나이도 많아지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니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을 느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며 요즘 들어 인생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피동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부쩍 두려움을 느낀다며 물질적인 것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문학의 상업화에도 쓴소리를 했다.“문학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상업적인 계산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아닙니까?” 고인은 “요즘의 내가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양식에 더 이끌리고, 물질적이고 인위적인 것의 위험한 힘을 더욱 경계하게 되는 것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인 것 같다.”는 말로 글을 끝맺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박경리 선생이 잠든 통영

    박경리 선생이 잠든 통영

    지난 9일 ‘토지’의 작가 고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원했던 대로 고향인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자락에 묻혔다. 한산도 등 아름다운 섬을 품은 통영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선생이 그토록 사랑한 통영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선생이 나고 자란 ‘뚝지먼당’에서 소설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간창골, 해저터널 등을 거쳐 영면한 미륵산자락까지 하나하나 짚어봤다. #박경리 선생에게 통영이란…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해군 사령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전쟁의 험악한 기운으로 가득찼던 통영은 그러나 근대로 들어오면서 예술의 향기 그윽한 도시로 탈바꿈한다. 통영이 고향인 시인 유치환은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중앙동 우체국에서 이영도에게 연서를 썼고, 그 우체국 앞길은 현재 ‘청마거리’로 명명돼 있다. 그뿐 아니다. 음악가 윤이상과 시인 김춘수, 화가 이중섭과 전혁림, 시조시인 김상옥 등 당대를 풍미했던 예술인들이 펜으로, 또 붓으로 통영에 대한 사랑을 읊고 그려냈다. 하지만 고 박경리 선생에게 고향 통영은 애증이 엇갈린 도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순철 통영시청 문화예술계장에 따르면 선생은 27∼28세 나던 해 고향을 떠난 후 2004년 처음으로 통영땅을 밟았다. 피보다 붉은 뚝지먼당 동백꽃이 50번도 넘게 피고 진 세월이다. 김 계장은 “몇몇 동창들과 감격적인 해후의 시간을 갖긴 했으나, 끝내 생가가 있는 뚝지먼당 등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난에 시달렸던 유년기를 추억하기 싫어서였을까. 앞서 유방암과 싸웠던 1973년에는 토지 1부 자서를 통해 “내게서 삶과 문학은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단 말인가.”라며 심경의 일단을 내비치기도 했다. 선생의 생가에 대해서는 친구들간에도 견해가 엇갈리는데, 김 계장은 선생의 기억과 호적 등의 자료를 토대로 역추적한 결과 문화동 328의1번지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지인들이 뚝지먼당이라 부르는 곳이다. 삼도의 수군통제사들 중 으뜸이 되는 원수의 깃발을 모신 사당을 ‘뚝사’라 하는데,‘뚝지’는 ‘뚝사’,‘먼당’은 ‘고개’의 사투리다. 즉 ‘뚝사가 있는 고개’가 뚝지먼당인 것.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배수지가 들어서면서 뚝사는 사라지고 말았다. #문단의 거목 키워낸 뚝지먼당 선생은 뚝지먼당에서 ‘박금이’(朴今伊)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다. 돈 있는 사람이 고갯길 골목에 사는 경우가 어디 흔한가. 뚝지먼당 또한 마찬가지. 굽어진 골목마다 가난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 이웃들이 그러했듯 가난에 시달렸던 ‘문학소녀’의 생가는 이미 허물어졌고, 그 자리엔 붉은 벽돌집이 들어섰다. 골목길 입구의 ‘김약국의 딸들’ 작품비만이 그 시절을 웅변하고 있을 뿐. 선생은 통영공립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강신연(84), 김천수 할머니 등과 자주 어울렸다. 강 할머니는 당시의 박금이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금이는 작은 키에 예쁘장했제. 친구들도 잘 사꼬.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서도, 부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왔다아이가. 원래 내가 있는 통영초등학교에 올라꼬 했는데 자리가 없었어. 그래가 산양읍에 있는 산양보통학교(현 진남초등학교)를 잠깐 다니다 4학년 때 다시 통영초등학교로 전학온기라.” 강 할머니는 선생이 어린 나이에도 소설책 읽기를 즐겼다고 전했다.“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에다 소설책을 피놓고 봤다니께네. 공부를 열심히는 안 했지만서도, 그래도 잘한 편이었어. 그 가시나가 얘기도 참 잘했따꼬. 정신없이 금이 얘기 듣다가 밤 11시가 넘어서야 퍼뜩 정신차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니께네.” 뚝지먼당 아랫마을이 간창골이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무대다. 작품 속 서문고개는 슬프고 기구하다.‘김약국의 둘째딸’ 용빈의 독백을 들어보자. 명망 높았던 한 가족의 몰락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하략”‘토지’의 시작이나 ‘김약국의 딸들’이나 하나같이 비극적인 이유가 혹시 뚝지먼당이 심어준 정서 때문은 아닐까. 뚝지먼당에서 보면 통영항은 물론, 세병관과 남망산 등 통영의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다. 선생은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진주여고에 들어갈 무렵 아랫동네 명정동으로 이사를 간다. 명정동 골목집 바로 앞은 윤보선 전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잠들다 2007년 12월 선생은 세번째로 통영을 찾는다. 그곳이 산양읍 미륵산 자락의 양지농원이다. 선생이 통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자, 영원한 잠을 자게 된 곳이다. 양지농원 정대곤 대표에 따르면 원래는 현 묏자리 바로 아래에 선생이 거처할 집을 짓기로 했었다. 양지농원 내 2층짜리 전원주택풍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낸 선생은 통영 앞바다의 수려한 풍경에 “왜 이제사 여기에 왔을까.”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생전에 집을 짓지는 못했어도 이제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일까. 통영 읍내에서 차로 통영대교, 또는 충무교를 넘거나 혹은 걸어서 해저터널을 건너면 닿는 곳이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미륵도다. 미륵산은 미륵도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내친 걸음, 미륵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등산로는 빽빽한 편백나무 숲 사이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절집 미래사에서 시작된다. 관광 케이블카가 수리 중인 탓에 가파른 산길을 40분쯤 걸어 올라야 했다. 정상에 서면 한려수도의 빼어난 풍경이 주르륵 펼쳐진다. 흰 거미줄을 뽑아내듯 바닷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어선들이 한산도 등 다도해의 섬들을 종횡으로 엮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관광엽서에서 흔히 보는 한려수도 사진은 십중팔구 이곳에서 찍는다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의 풍광이다. 선생의 묘지가 있는 미륵도는 오후에 찾을 것을 권한다. 한 굽이 돌 때마다 해안절경을 토해내는 22㎞의 산양일주도로는 해질녘 달려야 제 맛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가 다도해의 섬들 뒤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 만들어내는 붉은 기운은 그야말로 몽환적이다. 글 사진 통영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대전 분기점→대전·통영중부고속도로→통영. ▶주변 명소:통영 시내에 윤이상 생가, 청마문화관, 화가 이중섭이 머물렀던 집, 전혁림 미술관 등이 있다. 시민문화회관 부근에는 15명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 유치환의 ‘깃발´ 시비도 있다. 산양일주도로변 달아공원은 국내 최고의 일몰을 자랑하는 곳. 통영시청 문화예술계 650-4510, 문화관광과 650-4610. ▶맛집:울산다찌집(645-1350), 통영사랑 다찌집(644-7548), 만성복집(645-2140). #‘토지´ 속 또 다른 명소 ‘토지’ 4부에 등장하는 충무교 옆 해저터널은 한번쯤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항일독립운동에 뜻을 둔 유인실과 좌파 지식인 오가다 지로는 서로 사랑하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란 처지 때문에 선뜻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통영에 내려와 처음으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곳이다.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통영 읍내와 미륵도를 연결한다.1932년 완공후 30여년 동안은 차들이 다니기도 했으나, 요즘엔 도보로만 오갈 수 있다. 세병관을 지나 서문고개 끝자락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공대천의 원수’를 기리는 곳일 텐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별다른 피해 없이 용케 살아남았다.‘토지’5부에서 송영광(길상과 서희 부부의 수양딸 양현과 비극적 사랑을 나누는 색소폰 연주자)의 상념을 통해 잠깐 등장한다. 충렬사 앞의 명정우물(정당샘)도 가볼만 하다. 선생이 진주여고에 입학하면서 이사한 명정동 집에서 3분거리다. 일정(日井)과 월정(月井) 두 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월을 합해 명정(明井)이라 부른다.1670년쯤 우물을 하나만 팠는데, 물이 곧 탁해지고 말라버렸다. 두 개를 파자 그제서야 수량이 풍부해지고 맑아졌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예전엔 식수원이자 빨래터였다고 한다. 작품 속엔 등장하지 않지만, 선생도 여고시절 이곳에서 물을 긷거나 빨래를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 반발 또 반발… ‘2차 조직개편’ 무산 우려

    중앙·지방 정부는 물론 소속·산하 기관까지 아우르는 ‘2차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무산될 우려를 낳고 있다.19일 각 부처와 지자체에 따르면 20일까지 행정안전부에 자체 조직개편안을 제출해야 하지만, 중앙부처와 대부분 지자체 등은 눈치보기와 내부 반발 등으로 확정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총대를 멘’ 2차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각급 행정기관의 반발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 중앙부처를 대상으로 한 과(課) 이하 하부조직 개편작업은 ‘눈치작전’에 밀려 ‘제자리 걸음’ 중이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개편작업 역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처럼 조직개편이 늦춰지면서 업무차질 등 우려도 커지고 있다. ●행안부 소걸음, 다른 부처 게걸음 행안부는 당초 1차 개편작업 때 적용했던 ‘과의 최소인원 10명’ 기준을 ‘과당 평균인원 15명’으로 강화한 ‘정부조직 관리지침’을 지난달 초 각 부처에 전달했다. 이를 근거로 행안부는 지난 2일 전체 조직의 25%인 3개국·40개과를 줄인 개편안을 발표했으며, 지난 14일에는 새 조직체계에 맞춰 인사도 마무리했다. 지침이 내려간 지 한달 이상 지났지만, 다른 부처의 조직개편은 지지부진하다. 이 중 기획재정부와 환경부 등은 개편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다가 슬그머니 덮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식경제부와 농림수산식품부 등은 개편을 아예 검토조차 않고 있다. 한 부처 관계자는 “행안부 지침은 권고일 뿐, 의무사항이 아니다.”면서 “1차 개편으로 조직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2차 개편을 추진할 수는 없다.”면서 사실상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행안부는 또 다음달 중 중앙부처의 ‘손발’ 역할을 하는 특별지방행정기관에 대한 개편안도 확정할 계획이다. 하지만 중앙부처 대상 2차 개편작업이 사실상 ‘올스톱’되면서 특별지방행정기관 역시 개편작업에 대한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조직관리의 주무부처로서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면서 “청와대 등 상급기관에서 불호령이 떨어져야 움직이겠다는 것은 조직 이기주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퇴양난 지자체 행안부는 지난 1일 ‘지자체 조직개편안’을 발표한 뒤 각 지자체에 20일까지 자체 개편안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마감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경기와 강원 등은 개편안조차 확정하지 못해 전전긍긍이다. 강원도를 포함해 도내 18개 시·군 중 개편안을 확정한 곳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감일을 지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오히려 조직개편이 지역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반대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강원도 관계자는 “정부의 인위적인 조직개편은 재조정돼야 한다.”면서 “지역여건 등을 고려해 현실적인 방안이 제시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는 1700여명의 정원을 축소한다는 계획이지만, 도내 31개 시·군은 일괄 감축계획에 불만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구가 110만명으로 전국 기초단체 중 가장 많은 수원시의 경우 공무원 1인당 주민수가 424명으로 전국 평균 197명에 비해 2배 이상 많다는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인구 50만명이 넘는 기초단체 중 유일하게 일반구(區)가 없는 남양주시, 올해 안에 인구가 5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화성시 등도 조직개편 예외지역으로 인정해 달라는 입장이다. 또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나 재건축사업이 진행돼 인구가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 김포·양주·시흥·광명·의왕시 등도 감축인력 재산정을 요구하고 있다. ●소방·노조, 지자체 조직개편의 변수 반면 개편안을 마련한 지자체는 소방공무원 등의 집단 반발에 직면했다. 앞서 행안부는 지자체 조직개편으로 남는 일반공무원들을 지금까지 소방공무원들만 근무해온 소방관서에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서울시의 경우 오는 2010년까지 11개 수도사업소 중 3개를 통·폐합한 뒤 감축인력 432명의 절반 정도를 소방행정직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시 소방공무원은 5279명이며, 이 중 소방행정직은 25%인 1374명이다. 소방행정직은 인사·경리 등 행정업무는 물론, 소방시설이나 위험물 등 소방검사에 투입되는 인력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고참 등에게 돌아가는 요직으로 간주된다. 같은 맥락에서 대구시는 조직개편에 따른 초과인력 140명 중 17명, 경북도는 123명 중 33명, 전남도는 69명 중 23명을 각각 해당지역 소방본부로 배치할 방침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이같은 조치는 행안부와 소방방재청이 합의한 사안으로 안다.”면서 “일선 소방공무원들의 반발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소방공무원들과 공무원노조 등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전남지역 공무원노조총연맹·전국공무원노조·전국민주공무원노조 지도부 30여명은 19일 전남도청에서 연대 기자회견을 열어 조직개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또 경북도소방본부 관계자는 “초과인력을 소방본부 등에 재배치할 경우 기존 소방인력의 사기저하는 물론, 업무수행에도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만 최근 2∼3년간 신규인력 충원을 최소화했던 부산, 행안부가 제시한 정원보다 재직 공무원이 적은 울산 등은 다소 여유있는 입장이다. 부처·지자체종합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19일 TV 하이라이트]

    ●명사의 스승(EBS 오후 7시55분) 주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명창 안숙선에게는 수많은 이름들이 따라다닌다. 끊임없는 노력과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별칭들이다. 명창 안숙선을 만들어준 스승을 만나본다.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손을 잃고 그림을 얻어 행복하다는 화가 석창우. 전기기사로 일하던 중 감전 사고로 두 팔을 모두 잃은 이야기와 그림과는 무관한 삶을 살다가 아들에게 줄 새를 그리면서 새삼 재능을 발견한 사연, 갈고리에 붓을 끼우고 투쟁한 지 한 달 만에 정식 제자로 맞아 준 스승에 대한 이야기 등을 엿본다.   ●사랑해(SBS 오후 9시55분) 영희는 영희B의 유산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 한다. 한편, 영희는 신문을 들고와서는 철수에게 만화가 안 실렸다며 궁금해 한다. 그러자 철수 역시 의아해하다가 편집장으로부터 진작 타협을 원할 때 듣지 그랬냐는 말에 못내 서운해 한다. 그러면서도 영희에게는 단행본 발행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둘러댄다.   ●이산(MBC 오후 9시55분) 청나라 군사가 무력을 썼다는 말에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송연은 태감을 만난다. 하지만 태감은 송연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그림 한 점을 전해주고, 송연은 그 그림을 산에게 보여준다. 산은 정약용이 송연의 말을 되새긴 뒤 군사들을 청나라 사신단이 있는 모화관으로 보내는데….   ●뉴스Q(YTN 오후 4시30분) IOC위원에 도전하고 있는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총재(WTF)가 출연한다. 김운용, 박용성 위원의 연이은 자격 상실로 현재 국내에는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유일하게 IOC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조 총재가 IOC위원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과 세계 태권도계의 수장으로서의 남다른 태권도 사랑을 들려준다.   ●TV, 책을 말하다(KBS1 오후 11시30분) 지난 5일 타계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그가 인생을 바쳐 써낸 작품 ‘토지’를 다시 조명해보고, 고인의 작품과 사상이 현재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돌아본다. 고인이 타계하기 한 달 전, 그를 직접 만났다는 문학평론가 방민호씨의 인터뷰 내용도 공개한다.
  • “노루·사슴 노는 고향 땅서 편히 잠드소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고(故) 박경리 선생이 9일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의 미륵산 자락에 영면했다. 고인의 유해는 이날 오후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 등 유족과 전국의 문인, 통영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영 앞바다와 한산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양읍 신전리 양지농원의 미륵산 자락에 안장됐다. 오후 1시쯤 양지농원에 도착한 유해는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남해안별신굿 보존회의 들채굿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유족, 지인들의 큰 절을 뒤로 하관됐다. 이어 유족들과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 문인들이 고인이 소설 ‘토지’를 완간한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옛집의 흙과 타계 전까지 살았던 원주 토지문화관 텃밭의 흙, 최참판댁이 있는 하동 평사리의 흙을 관위에 뿌리는 ‘허토’ 의식이 열렸다. 고인이 2003년 전남 함평나비축제 명예대회장을 했던 인연으로 함평에서 가져온 하얀 나비 수십마리가 하늘로 날아 오르는 가운데 고인은 양지바른 산자락에 영원히 육신을 눕혔다. 앞서 오전 통영시내 강구안 문화마당과 충렬사 주차장에서 추모제와 노제가 열렸다. 유해가 실린 꽃상여와 200여개의 만장(輓章)이 어릴 적 고인이 뛰놀던 통영시내 1㎞를 이동하는 동안 13만여명의 고향 주민들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진의장 통영시장은 “선생의 타계로 문학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는 깨닫게 됐다.”면서 “이순신 장군의 독전 소리가 저렁저렁하던 한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뵈는 양지바른 곳,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그곳은 노루와 사슴이 쉬었다 가는 좋은 땅, 평화로운 땅이다. 그곳에서 편안히 잠드소서.”라고 추모사를 했다. 한편 통영시는 지난해 12월24일 고인이 81번째 생일을 기념해 외손자 2명과 통영을 찾아 시에 전달했던 유품 수백여점을 이날 시청 강당에서 공개했다. 공개 유품에는 ‘박경리문학상 제작에 관하여’ 육필원고(23장), 본명인 ‘박금이’(朴今伊)로 된 여권, 진주여고 재학당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김약국의 딸들’ 영역본, 외손자 등과 주고 받은 엽서와 편지,‘토지’ 완간 10주년 특별대담 DVD세트, 충무시 문화상 수상패, 고인의 연필 드로잉, 액세서리 주머니, 신문 스크랩 등이 포함돼 있다. 고인이 생전에 “나의 생활이요, 나의 문학이요, 나의 예술”이라며 가장 아꼈던 3가지 물품인 재봉틀과 국어사전, 통영 소목장(小木匠·목재로 만든 세간)은 들어 있지 않았다. 통영시는 유품을 2010년 개관 예정인 통영 박경리문학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통영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하늘의 토지’에서 편히 쉬소서

    지난 5일 별세한 박경리 선생의 영결식이 8일 오전 8시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문학인장으로 엄수됐다. 도종환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에는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 등 유족과 정·관계 인사 등 150여명이 참석,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박완서, 최일남, 오탁번, 박범신, 윤흥길, 김원일, 조정래, 김초혜, 이근배, 김병익, 김치수, 김화영 등 문인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정몽준 한나라당 최고위원, 최열 환경재단 대표 등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외손자 세희씨가 든 위패와 최유찬 연세대 교수가 든 영정을 앞세우고 소복을 입은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이 뒤따르는 가운데 고인의 관이 영결식장에 들어오자 참석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어 정현기 세종대 교수가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고 고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상영됐다.“가장 순수하고 밀도가 짙은 사랑은 허덕이고 못 먹는 것,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연민’”이라는 고인의 육성은 장례식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박완서씨는 조사를 읽어 내려가다가 “선생님 손의 온기가 지금도 제 찬 손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데….”라는 대목에서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시인 이근배씨는 고인의 영전에 바치는 조시를 통해 “선생님은 흙과 물, 나무, 짐승, 세상 사람들, 소설, 문학의 어머니”라면서 “부디 사랑의 손길을 한 번 더 잡아주소서.”라며 고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유족을 대표해 김영주 관장은 “어머니께서는 아름답게 사시다가 아름답게 가셨습니다. 어머니 죽음을 애통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라고 울먹이며 힘겹게 인사말을 전했다. 유족과 내빈들의 헌화를 끝으로 고인의 유해는 최근까지 머물던 강원도 원주로 떠났다. 원주에서는 고인의 단구동 옛 집터에 마련된 토지문학공원에서 추모제를, 매지리 토지문화관과 모교인 경남 진주여고에서 노제를 지낸 뒤 이날 오후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시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냈다.9일 오전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헌무·헌다례 등 추도식에 이어 산양읍 신전리 미륵산 기슭에서의 마지막 안장식을 끝으로 고인은 영면에 들었다.김규환 김승훈기자 khkim@seoul.co.kr
  • “대지의 어머니, 봄과 함께 돌아오소서”

    “대지의 어머니, 봄과 함께 돌아오소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타계 사흘째인 7일에도 아침 일찍부터 문인을 비롯, 정·관계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황동규 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소설가 한말숙씨, 채호기 문학과지성사 대표, 이세기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등이 조문한 뒤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백낙청 교수는 고인에 대해 “계시는 것만으로도 문단의 품격을 높여주시는 분”이라면서 “일찍 가시게 되셔서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말숙씨는 “1950년대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입문하면서 서로 안 만나면 못 견딜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80년대 이후 못 만났다.”며 “80년대 마지막 만났을 무렵 나는 어떻게 하면 멋진 집에 살까 고민하는 동안 선생님은 사회에 대해 많이 생각하셔서 점점 무언가 서로 안 맞는다는 걸 느꼈다.”고 털어놨다. 이날 오후 빈소를 찾은 강재섭 대표는 “흙 냄새가 물씬 나던 장엄한 서사시”였다고 ‘토지’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며 “엄청난 소설을 남기신 뛰어난 문인이셨다.”고 말했다. 전날 빈소를 다녀간 문인 20여명이 작성한 만장(輓章) 글귀 속에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녹아 있어 관심을 모았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대지의 어머니시여! 봄과 함께 돌아오소서!”라는 글귀를 남겼고, 박완서씨는 “님은 가셨으나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말로 고인을 보내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시인 이시영씨는 “생명 대지의 어머니, 고향에 돌아오시다!”, 소설가 오정희씨는 “생명의 아픔과 슬픔이 없는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라는 말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고인의 빈소는 정계와 학계, 문화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들이 보내온 화환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재계에서 보내온 조화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빈소에 놓인 조화 중 재계 인사가 보낸 화환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명의로 온 조화 정도였다. 빈소를 찾은 한 조문객은 “수많은 조화 가운데 기업인들이 보낸 조화가 거의 없는 것이 문화에 대한 기업의 무관심과 빈약한 문화적 토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문화플러스] 경기국악단 국악관현악 ‘토지’ 공연

    경기도립국악단은 지난 5일 타계한 박경리 원작의 음악극 ‘토지’를 연주회 형식으로 재구성한 국악관현악 ‘토지’를 23일 오후 7시30분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공연 무대에 올린다. 음악극 ‘토지’는 경기도립국악단 김영동 예술감독이 대하소설 ‘토지’의 제1,2부를 축약하여 작곡한 것으로,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초연됐다. 김영동감독이 지휘하는 이번 공연의 연출은 박성찬, 최서희 역은 김정선, 김길상 역은 서범석, 강청댁 역에는 박윤선, 공월선 역에는 하지아, 김평산 역에는 한규석, 이용 역에는 전승현, 조준구 역에는 박형주가 맡는다. 청소년 5000원, 어른 1만∼2만원.(031)289-6400.
  • MB “폐암수술 받으라 권유하려 했는데…”

    MB “폐암수술 받으라 권유하려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6일 고 박경리 선생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조문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11시쯤 류우익 대통령 실장, 곽승준 국정기획수석, 이동관 대변인 등과 함께 빈소를 찾아 영정에 헌화한 뒤 분향, 묵념을 했다. 또 이 대통령은 고인에게 추서된 금관문화훈장을 직접 영정 옆에 놓고, 유족인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 시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뒤 박완서 장례위원장, 진의장 통영시장 등과 고인과의 인연과 장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대통령은 “조만간 뵈면 폐암수술 받으시라 권유하려고 했다.”며 안타까운 뜻을 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날 오후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빈소를 찾았다. 김 전 대통령은 “토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애통함을 금할 수 없다.”며 “다른 세상에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김근태 국회의원, 정동영 국회의원, 김기열 원주시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도 걸음해 조의를 표했다. 문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박경리 선생님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있어 돌아가셨지만 아직 살아계신 것 같다.”며 “한국의 역사를 개인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죽음은 한 연대기의 종지부를 찍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소설가 전상국씨도 “박경리 선생님은 글 쓰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 밖에 소설가 오정희·유시춘·신경숙, 시인 정현종ㆍ오탁번, 시나리오작가 신봉승, 만화 ‘토지’의 오세영 화백,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마광수 연세대 교수 등도 조문했다. 한편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시와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군, 모교인 진주여고에 차려진 분향소에도 이날 하루종일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통영시 중앙동 문화마당에 설치된 야외분향소는 오전 10시부터 지역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줄지어 분향했다. 정해룡 통영예총 회장은 “선생의 문학 뿌리와 원류는 통영의 자연 풍광과 유년시절의 추억이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유해는 8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에서 발인, 같은 날 원주 토지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치른 뒤, 모교인 진주여고를 거쳐 장지인 경남 통영으로 운구된다. 그리고 9일 오후 1시 영결식을 지내고 산양읍 미륵산 기슭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규환 이정규 윤설영기자 khkim@seoul.co.kr
  • [소설가 박경리 타계] “노벨상 받고 가시리라 믿었는데…”

    5일 한국 문단의 큰 별인 박경리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의 제2의 고향인 강원 원주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민들은 “원주가 선생이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30년 가까이 거주하면서 ‘토지’를 완간하는 등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았다.”며 애통해 했다. 시민들은 선생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26일부터 옛 집인 단구동 토지문학공원에서 매일 저녁 촛불기도 모임을 갖고 쾌유를 빌어왔다. 시민 정규완(47·회사원)씨는 “선생이 원주에 정착한 뒤 옛 집을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하도록 선뜻 내준데다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을 만들어 창작의 산실로 삼는 등 지역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며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례위원인 김기열 원주시장은 “1980년 내려오신 뒤 활발한 작품활동은 물론 원주에 많은 애착과 관심을 가져주셔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갖게 하신 분인데 황망히 떠나시게 돼 섭섭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조의를 표했다. 선생을 곁에서 보필해 온 고창영 토지문학공원 소장은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시간과 모든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원주시는 이날 토지문학공원 내 선생의 옛 집필실 1층에 시민들이 조문을 할 수 있도록 분향소를 설치했다. 장례일에는 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준비하고 토지문화관도 들를 예정이다. 한편 박경리 선생의 고향인 경남 통영시민들도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정해룡 통영예총 회장은 “유치환, 김춘수에 이어 통영이 낳은 한국 문학계의 마지막 산맥이 타계하셨다.”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실 때까지 살아계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순철 통영문인협회 회원은 “‘김약국의 딸들’ 등 박경리 선생의 많은 작품의 무대가 통영이었다.”면서 “살아계실 때 통영에서 박경리 문학관 착공 테이프라도 직접 끊었으면 좋았을 텐테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통영시는 이날 진의장 시장을 명예 위원장, 정해룡 통영예총회장을 위원장으로 해 문화·교육·언론계·시민사회단체 회원 50여명이 참여한 ‘고 박경리 선생 추모위원회’를 구성해 애도를 표하고 추모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추모위원회는 6일 오전 10시부터 통영시내 중심가인 강구안 문화마당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시민들의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 통영 이정규·원주 조한종기자 jeong@seoul.co.kr
  • [소설가 박경리 타계] 1955년 등단…본지 기자 지내

    [소설가 박경리 타계] 1955년 등단…본지 기자 지내

    1926년 10월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경리는 아버지의 방랑벽으로 사실상 홀어머니 밑에서 생활하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런 신산한 삶을 잊기 위해 독서와 시작(詩作)에 매달렸다. 훗날 그가 사석에서 “혹시나 어머니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하며 매일매일 시 쓰기에 매달렸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크나큰 위안이었다. 삶의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경리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이듬해 결혼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고 그해 말 남편을 사별한 데 이어 전쟁 직후에는 아들마저 여의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었다. 이런 절망적 삶은 그를 처연한 문학의 외줄타기로 더욱 거세게 내몰았다.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은 단편 ‘계산’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그는 오롯이 글쓰기에만 한평생 매달렸다. 1969년 박경리는 자신의 문학적 삶에 큰 걸음을 내디딘다.‘토지’ 1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1994년 5부를 끝으로 20여년에 걸친 ‘토지’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토지’를 완간한 그는 1998년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후배 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99년 토지문화관을 건립, 후배 작가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해 왔다. 박경리는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기자이기도 했다.1959년부터 3년여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를 지냈다. 당시 ‘다치기레’(해설 박스기사)를 혼자 쓰다시피하며 필명을 날린 일화들이 전해온다. 그러나 그 자신 언론에 몸담았으면서도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언론과의 접촉은 극도로 꺼렸다. 작가는 오로지 글로만 말한다는 신념에서였다.“작품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만큼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작가가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것은 그만큼 작품이 미흡하다는 뜻이라는, 스스로를 향한 삼엄한 경계였던 셈이다. 생명운동가답게 그는 일상생활도 아주 소박했다. 새벽 2시쯤 일어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쓴 뒤 동이 터오면 텃밭에 나가 손수 심은 고추 등 채소를 정성스레 돌봤다. 토지문화관 옆의 텃밭에도 철마다 푸성귀를 가꿔 오가는 지인들에게 나눠준 그였다. 작가에게 글쓰기 이외의 유일한 위안은 담배였을까. 그는 하루 1갑 넘게 담배를 피운 지독한 애연가였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사설] ‘토지’로 돌아간 박경리 선생

    이 찬란한 신록의 계절에 우리는 한국문학의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위대한 문학가 한 분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82세를 일기로 어제 영면한 것이다. 지난달 지병이 악화해 입원한 선생은 한달간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다 끝내 생의 끈을 놓았다. 박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공간과 6·25의 혼란기에 청년기를 보냈고, 그 후로도 오랜 세월 엄혹한 군부정권 아래서 민족사의 동통(疼痛)을 남달리 아파한, 한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켜켜이 한(恨)을 쌓아간다. 하지만 그 바탕에서 작가가 찾은 것은 ‘불행’이 아니었다. 시대상황으로도 꺾지 못하는 올곧은 저항정신이요, 생명에 대한 외경이요,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욕망이었다.6·25를 배경으로 한 초기의 화제작 ‘시장과 전장’,19세기 말에서 광복까지를 다룬 대표작 ‘토지’가 모두 그러했다. 특히 ‘토지’가 한국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어떠한 찬사로도 부족하다 하겠다. 구미 문학이론을 따르지 않은 특유한 전개, 등장인물 700여명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묘사, 한국·만주·일본을 넘나드는 스케일 등에서 ‘토지’는 이후 발달한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면서 또한 금자탑이었다. 이제 선생의 육필 원고를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선생의 치열한 창작혼과 생명사랑은 이 땅에 계속 이어지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가 남긴 토지문학관이 앞으로도 후배들을 위한 창작교실이자, 환경·생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터 구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련다. 박경리 선생은 그의 작품 이름처럼 ‘토지’로 돌아가 더욱 굳건히 뿌리내렸다.
  • [소설가 박경리 타계] 작품 세계

    박경리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감내하기 어려운 곤고한 삶을 살아왔지만, 문학적으로는 누구도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거대한 산맥을 이뤘다. 굳이 여러 작품을 들지 않더라도 대하소설 ‘토지’, 이 한 작품만으로도 그는 한국 소설사에서 누구도 건널 수 없는 대하(大河)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행한 출생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 그리고 폐암 선고…. 그가 사석에서 “나는 슬프고 고통스러워 문학에 몰입했고, 훌륭한 작가가 되기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고 고백한 것만 봐도 그 아픔이 얼마나 폐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박경리 문학작품에서 짙게 배어나는 인간 존엄에 대한 치열한 작가 의식, 도저한 생명사상에 대한 탐구도 그의 고단한 삶에서 기인한다.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한 박경리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불신시대’,1958년 ‘벽지’‘암흑시대’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한국 문단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작품들은 주로 단편소설이고, 체험적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이 화자(話者)로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이처럼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대(當代)를 읽어낸다. 대표적인 작품이 ‘불신시대’와 ‘암흑시대’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극도로 반발했던 박경리는 자연스레 여성이 처한 불행한 현실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모의 삶에 깃든 억압-피억압의 관계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의 고민은 초기 단편 ‘전도’와 장편 ‘김약국의 딸들’‘파시’ 등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됐다. 작가는 1959년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독한 여인의 심적 방황을 그린 ‘표류도’를 발표하면서 장편 소설로 선회했다. 이후 ‘내마음은 호수’‘푸른 은하’ 등을 발표하는 한편 19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내놓았다. 이전의 전쟁 미망인을 즐겨 등장시키던 체험적 작풍(作風)에서 벗어나 한층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했다는 ‘김약국의 딸들’은 공간 배경도 전쟁터가 아닌 통영으로 바뀌었고 제재와 기법면에서 다양한 변모를 드러낸다. 박경리 문학의 명제는 자유에 대한 집착,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 인간소외에 대한 저항, 인간의 존엄과 사랑에 대한 절대적 믿음 등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을 소외시키는 제도와 관습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김약국의 딸들’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 후반 들어 박경리 문학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장편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 그 자신 “빙벽에 걸린 자일, 주술에 걸린 죄인이 된 기분으로 25년간 글감옥 속에서 ‘토지’를 완간했다.”고 할 만큼 ‘토지’의 집필은 피를 말리는 지난(至難)한 작업이었다. 한국 문학사에 획을 그은 작품인 만큼 ‘토지’에 대한 논의 또한 풍성하다. 역사소설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 속에 ‘토지’는 가족사 소설·민족사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규정되는 등 한국문학 담론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켰다.‘토지’는 이처럼 거대한 서사 구도 아래 다종다양한 계층의 이야기가 중층적으로 형상화돼 있다. ‘토지’는 인간의 존엄과 소외문제와 함께 생명사상의 흐름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바로 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의 인물로 등장한다. 작가에게 있어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한(恨)의 정한과 통한다. 그 한을 풀어가는 과정은 곧 박경리 문학 등장인물들의 삶의 여정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토지’로 대표되는 박경리의 작품 세계는 민족적 삶의 총체상을 보여준다.”며 “박경리 문학의 밑바닥에는 인간적 품위와 낭만적 사랑의 정신,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한 줄기로 흐른다.”고 말한다. 하층민부터 상층민까지 한 사회의 모든 삶을 아우르는 ‘총체소설’의 양상이말로 박경리 문학의 업적이요 특징이라는 것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박경리 영원히 ‘土地’로 돌아가다

    박경리 영원히 ‘土地’로 돌아가다

    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씨가 5일 오후 2시4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82세.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은 박씨는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해오다 지난달 4일 뇌졸중 증세로 쓰러져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달 말 한 차례 고비를 겪은 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치료를 받다 끝내 이날 숨을 거뒀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박씨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이 소설가 김동리에 의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김약국의 딸들’‘파시’‘시장과 전장’ 등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현대문학에 ‘토지’ 1부를 연재하기 시작한 후 ‘문학사상’‘월간경향’‘문화일보’ 등으로 매체를 옮기며 1994년 8월 집필 25년만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하소설 ‘토지’ 전 5부를 탈고했다. 1897년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서울과 중국 간도 등을 무대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아간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토지’는 한국 문학사의 가장 큰 수확으로 꼽힌다. 1980년부터 강원 원주시 단구동, 지금의 토지문학공원에 정착했으며 1998년부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토지’ 탈고 이후 9년만인 2003년 현대문학에 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연재하기도 했으나 세 차례만 실은 채 미완으로 남겼다.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까치 설’‘어머니’‘옛날의 그 집’ 등 신작시 3편을 8년여만에 발표하며 창작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1950년 남편 김행도씨와 사별했으며 유족으로는 외동 딸인 김영주(62) 토지문화관장과 사위 김지하(67) 시인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진다.8일 오전 8시 영결식을 가진 뒤 원주시 토지문학공원에서 노제를 지내고 이튿날 장례를 치른다. 장지는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기슭 양지농원. (02)3010-2631. 한편 정부는 5일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혔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소설가 박경리 타계] “작가로서의 전범 보여주신 분”

    작가 박경리의 한평생은 그대로 한국 현대문학의 거울이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의 짙디짙은 문학적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동시대의 작가는 아마도 없었을 터. 소설가 오정희씨게 고인은 문학소녀의 꿈을 향해 나아가게 해준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부음 소식을 들은 오씨는 “박경리 선생님은 내가 문학소녀였던 시절부터 문학적으로 굉장히 큰 영향을 주셨고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도 많이 흠모했던 분”이라며 “여성이라는 어떤 틀을 뛰어넘고 큰 문학세계를 이루셨다.”고 말했다. 또 “원주시 단구동 자택에 계실 때나, 토지문화관에 계실 때나 찾아뵐 때마다 책상 위에 원고지와 만년필을 항상 올려놓고 계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추억하기도 했다. 소설가 박범신씨도 “선생님은 모든 후배 작가들에게 작가로서의 삶을 위한 전범을 보여주신 큰 산 같은 분”이라며 “예전에 토지문화관에서 집필할 당시 밤 늦게 돌아오면 불이 다 꺼진 가운데 선생님 사저에만 불이 켜져 있어서 그 불빛을 지도로 삼아 돌아오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에게 그 불빛은 두고두고 작가로서의 삶에 있어 거대한 상징이 됐다고 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우리 문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라고 고인을 회고하며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 끊어졌던 대하소설의 맥을 이은 분이셨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토지’ 1부를 밤새워 읽고 외웠었다는 소설가 공지영씨도 고인에 대한 기억이 각별했다.“1996년 선생님 댁을 찾아갔을 때 책상 옆에 놓인 손재봉틀을 보여주셨다.”면서 “문학에 실패하면 삯바느질을 할 각오로 글을 쓴다고 말씀하셨던 그 순간은 두고두고 두려운 가르침으로 남았다.”고 말했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소설가 박경리 타계] 故 박경리 선생 영전에

    [소설가 박경리 타계] 故 박경리 선생 영전에

    이 나라 산천이 꽃과 신록으로 더욱 곱게 단장하는 이 5월 맑은 날에 하늘 한 자락 흔들며 들려온 선생님의 부음을 받고 빈소로 달려갔습니다.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고 병실을 찾았을 때만 해도 다시 일어나시어 붓을 잡으시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를 걸어보았습니다마는 그 불꽃의 정신과 혼과 살을 바친 문학으로 다독이고 끌어안던 이 나라 산과 물을 뒤로 하고 떠나신다니 천지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선생님은 이 시대와 함께한 위대한 소설가셨을 뿐 아니라 민족사에 높은 탑을 지으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남다른 모국어의 혼불을 키우시더니 저 동족상쟁의 고난 속에서 붓을 잡고 일어나 한국 소설의 새벽을 여는 작가로 첫발을 내디뎌셨습니다.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은 순수 장편문학의 불모지에 무성한 숲을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어, 그로부터 이 땅의 문학은 풍요와 중흥의 새날을 맞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개간한 소설의 영토와 굴착한 민족문학의 광맥은 어찌 다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 시대의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선생님은 오직 붓 한 자루로 어두운 방에서 글을 쓰셨습니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밤을 낮 삼으시면서 집필하신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사에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역사이며 인류가 함께 영원히 읽는 대작이었습니다. 세계문학사에 이름이 올라 있는 어느 작가, 어느 시인의 위업이 ‘토지’에 바쳐진 시간과 정신과 노동에 필적할 만하겠습니까. 박경리 선생님! 제가 월간 문예지 ‘한국문학’을 어렵게 꾸려가고 있을 때 힘을 보태주시려고 ‘토지’ 제3부의 원고를 주셨습니다.2년여 전이었던가요.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있었던 김동리 선생님 추모 모임에 오셔서 오늘의 우리 문단이 김동리 선생님 같은 어른을 잘 모시지 못한다고 꾸지람을 하시는 것을 듣고 저희 같은 후학들은 회초리를 맞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을 소설로 이끄셨던 김동리 선생님도 가시고 그렇게 문단의 어른을 받들줄 알고 참 문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도 이제 떠나셨으니 이 적막을 어찌 하겠습니까. 이 나라 산과 물이 울고 선생님의 글로 살찌우며 자란 이 땅의 사람들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시여! 더 넓은 하늘 더 넓은 땅에 가셔서 더 큰 붓으로 못다 쓰신 겨레의 혼불 밝혀주소서. 2008년 5월5일 후학 이근배 곡만(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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